흑치상지장군과 고선지 장군의 당나라에서의 활약

흑치상지장군과 고선지 장군의 당나라에서의 활약

작성일 2019.10.14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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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장군과 고선지 장군의 당나라에서의 활약을 두 분 따로따로 적어주세요.
당나라에서의 군인으로서 활약한 점 들 정리해주세요ㅠㅠ


내공100이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흑치상지:

백제 말기의 독립군 총사령관 중 한명이자 대당제국의 장군.

백제 서부(西部)인.

《구당서》나 《신당서》의 흑치상지열전에는 흑치상지는 "날래고 용감하면서도 민첩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고상하고 기질, 칼싸움을 잘했으며 뛰어났다."거나, "명예, 가르침을 중하게 여겼고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사상적으로 깨끗했으며 정치에 휘말리지 않았고, 정감의 폭이 넓어 그 거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대하면서도 신중함, 성실함, 온화함, 선량함을 가졌"고 "그의 성품으로 친족들이 그를 존경하면서도 사부, 어른들이 그를 두려워했다."고 되어 있다

당제국(당나라)는 군인제국이었다. 남자가 출세하려면 군인이 되서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흑치상지도 자신의 특기인 칼싸움을 살려서 군인이 되었다.

660년에 당제국 소정방 장군이 백제를 멸망시키자 흑치상지는 당제국에 항복했다.

하지만 소정방 장군이 의자왕을 비롯하여 황태자를 궁전에 가두면서 군인를 풀어 백제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하는 꼴을 보다 못한 흑치상지는 10여 명의 백제 패잔병들과 함께 매복해있다가 자신의 본부(서부)로 도망가서 흩어진 패잔병들을 모아 임존성(任存城/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을 지키면서 목책를 쌓고 견고하게 지켰다.

사타상여와 함께 험한 지역을 탈환해 독립군 사령관 귀실복신과 연합했지만, 663년에 귀실복신이

백제 독립군 총사령관인 백제의 황태자인 부여풍왕과 대립하다가 처형되고, 부여풍왕이 불러들인 일본의 구원군마저 백강해전에서 대패, 부여풍왕이 고구려로 귀순해 독립군의 거점은 사실상 임존성 하나만 남게 되었다.

흑치상지는 사타상여와 함께 자신의 군대를 데리고 항복했고 항복 당시 당제국군의 지휘관 유인궤 장군은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에게 무기와 군자금을 주며 임존성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고, 당제국 해군을 이끌고 왔던 손인사가 "그들이 무슨 야심이 있을 줄 알고 그들에게 무기에 군자금을 지원하는가?"한 번 배신한 놈들을 믿게 이 쪼다야?이라며 반대하자 유인궤는 "내가 봐서 아는데 얘들이 당제국에 대한 충심과 지모가 있어. 믿어주면 공을 세울 거임."그러니까 두 번 다시는 배신 못하게 도망칠 곳부터 없애버려야지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에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는 유인궤의 명을 수락해 지수신이 남아있는 임존성의 백제군을 공격했기에 당제국에 항복한 것도 모자라 동족을 공격하기까지 한 빼도박도 못하는 배신의 흑역사를 내고야 만다.

묘지명에는 이후 664년에 절충도위가 되어 웅진성을 방어하게 되자 수많은 백제인들이 기뻐했고 672년에는 충무장군, 행대방주장사가 덧붙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지절, 사반주제군사, 사반주자사로 옮겼다가 상주국에 임명되었으나, 정작 한반도에서 백제 땅에 대한 신라의 역공세가 강화되고, 웅진도독부도 안동도호부와 마찬가지로 한반도를 떠나 요동의 건안 옛 성으로 옮기면서 흑치상지도 백제 땅을 떠나야 했다.

당제국에서는 본적을 경조(京兆) 만년현에 받아 만년현인에 소속되었다. 지극히 공평한 것을 소임으로 삼으면서 사사로움을 잊는 것을 커다란 강령으로 삼았다고 하며 당제국 황제 고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좌령군장군, 웅진도독부사마로 임명했고, 부양군개국공 식읍 2천호를 덧붙여 봉해졌으며, 묘지명에는 당 고종이 그의 선함을 칭찬하며 지조(?)와 학식 있는 군자로 대우했다고 하는 등, 당에서의 인망이 높아졌다.

의봉(儀鳳) 2년(677년)에 토번 제국과 당제국과의 전쟁이 개시되자 조하(洮河)로 출진하는 유인궤의 부장으로써 흑치상지는 조하도경략부사(洮河道經略副使)가 된다. 의봉 3년(678년) 9월 12일에 당제국의 이경현, 유심례 등이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과의 사투에서 패하고 지금의 칭하이성 시닝(西寧) 부근의 승풍령이라는 고개에서 포위되는 위기를 맞는데, 흑치상지가 밤에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토번군을 기습해 격파, 이경현 장군을 구해낸다(승풍령 전쟁). 이 공로로 흑치상지는 좌무위장군 하원군부사로 임명되었다. 조로 2년(680년) 가을 7월에도 토번의 가르친링을 다시 한 번 물리쳐 부사에서 대사(大使)로 군직을 승진하게 되었으며, 개요 원년(681년) 여름 5월 21일에는 토번의 논찬파를 양비천에서 격파하고(양비천 전투) 양식, 가축 등을 전리품으로 빼앗아 돌아갔다. 흑치상지가 하원군에 있는동안 7년 동안 토번군은 벌벌 떨었다고한다.

공을 세워 좌응양위대장군, 연연도부대총관을 지내다가 684년 11월 4일에는 강남도대총관이 되어 서경업을 토벌한 공으로 연국공(燕國公) 식읍 3천호에 봉해지면서 우무위위대장군, 신무도경략대사에 임명되고 예전 계급은 그대로 하도록 두었다. 수공 2년(686년), 돌궐의 골돌록이 하동도(河東道)를 공격하자 흑치상지는 좌응양위대장군(左鹰揚衛大將軍) 연연도부대총관(燕然道副大總管)이 되어 양정(兩井)에서 2천 기병을 거느려 돌궐군 3천을 상대로 승리하고 흑치상지는 연국공(燕国公) 식읍 2천 호의 작에 봉해졌다.

수공 3년(687년)에 돌궐 제국과 당 제국은 전쟁을 벌이는데, 흑치상지는 이때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으로서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로 채워져 이다조(李多祚), 왕구언(王九言) 등을 부장으로 거느리고 돌궐과 전쟁, 황화퇴(黄花堆)에서 돌궐을 크게 쳐부수고 다시 40여 리를 뒤쫓아 돌궐을 사막 쪽으로 쳐 몰아내버렸다. 그런데 당시 우감문위중랑장(右監門衛中郞將)이던 찬보벽(爨宝璧)이 황제에게 표를 올려 돌궐 잔당을 마저 칠 것을 청했고, 황제도 흑치상지에게 다시 항원군경략대사(懷遠軍經略大使)로써 찬보벽과 함께 군을 합쳐 함께 돌궐을 쫓게 했는데, 찬보벽은 공을 탐내어 흑치상지와의 사전 회의도 없이 홀로 진격해 당군 1만 3천 명이 궤멸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흑치상지가 당제국의 장군으로 군 복무하면서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패전이었다.

그가 아무리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명장이지만, 이민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 패전 책임을 물어 찬보벽은 처형당하고 대장 흑치상지도 심문 받던 도중, 혹리 주흥(周興) 등이 흑치상지가 응양장군 조희절과 짜고 반역했다고 모함하는 바람에 투옥당하고, 689년 옥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고선지 장군:

흑치상지 장군이 백제 출신이라면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 출신이다.

당제국에서 출세하려면 군인이 되서 전쟁터에서 공을 세울수밖에 없었기에 고선지 장군은 전쟁터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그리고 정복자가 된다.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제국 장군. 고(高)라는 성 때문에 고구려 황족의 후예가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으나 딱히 이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당시 세계최강의 패권제국이었던 당제국으 여러 이민족들과 많이 무역을 했기 때문에, 이민족 출신 군인들을 장군으로 기용하는 번장제도가 있었다.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高斯界)가 당제국의 번장이었으며(같은 시기에 같은 고구려 유민인 왕사례도 당제국 번장으로 크게 출세했었다), 고선지는 그러한 아버지의 지위에 따라 음보로 등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번장이란, 한마디로 직접 전쟁터에서 싸우는 군인이기도 한데 지방 영주와 같은 강력한 권력을 지닌 세력이었다. 그 지역을 다스리는 총 사령관이며 군대도 가지고 있는 강력한 군인이었다.

본래 고향은 하북 밀운군으로 북경 근방이나 당제국이 730년경의 튀르기시 토벌원정 때 이주한 걸로 추측된다. 일찍이 장군이 되어 크고 작은 전공을 세웠으며, 당제국의 서역(유럽, 이슬람) 원정을 진두 지휘하였다. 747년부터 당제국 황제가 이슬람 원정을 지시하여, 토번과 사라센 등을 개발살냈고, 수많은 이슬람 국가들을 몰살시키면서 당제국의 영향권을 서쪽 이슬람 사막지대까지 확장시켰다. 이러한 원정에서 파미르 고원을 넘어 동투르키스탄(지금의 위구르)과 타슈켄트를 넘어 사마르칸트까지 점령했다.

이러한 전공으로 당시에 명성이 높았으며, 시성 두보가 고선지 장군을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정확히는 그의 애마를 칭찬하는 시다. 아마 한혈마였던 듯하다. 시 자체는 749년 지어졌으나 이 때 고선지는 서역에 나가 있었고, 그 이전 고선지가 별로 출세하지 못한 시점에 두보가 그를 만났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의 마지막 구절로 볼 때 기약 없는 고선지의 출세길을 한탄하면서, 역시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 자신의 신세도 함께 한탄한 시이다.

安西都護胡靑驄(안서도호호청총): 안서도호의 서역산 푸른 준마

聲價忽然來向東(성가홀연래향동): 명성을 떨치며 홀연히 동쪽으로 왔네

此馬臨陣久無敵(차마임진구무적): 이 말은 전장에서 오래도록 무적이었고

與人一心成大功(여인일심성대공): 주인과 한 마음으로 큰 공을 세웠네

功成惠養隨所致(공성혜양수소치): 공을 이루니 은혜롭게 보살펴져 가는곳마다 따라다니니

飄飄遠自流沙至(표표원자류사지): 표표히 먼 사막으로부터 이르렀다네

雄姿未受伏櫪恩(웅자미수복력은): 씩씩한 자태는 말구유에 엎드려 은혜입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니

猛氣猶思戰場利(맹기유사전장리): 사나운 기상은 아직도 전장의 승리를 생각하네

腕促蹄高如踣鐵(완촉제고여부철): 발목 짧고 발굽은 높아 쇠를 딛고 서있는것 같으니

交河幾蹴層氷裂(교하기축층빙렬): 교하에서 몇번이나 겹친 얼음을 발로 차서 깨트렸던가?

五花散作雲滿身(오화작산운만신): 오색 꽃무늬가 온 몸에 구름처럼 흩어져 있어

萬里方看汗流血(만리방간한류혈): 만리를 달리면 바야흐로 피땀 흘리는 것을 보겠네

長安壯兒不敢騎(장안장아불감기): 장안의 장사들도 감히 올라탈 엄두를 못내니

走過掣電傾城知(주과철전경성지): 번개보다 빨리 달려감을 온 성에서 다 알고 있기 때문이라

靑絲絡頭爲君老(청사락두위군로): 푸른 실로 갈기 땋고 주인을 위해 늙어가니

何由却出橫門道(하유각출횡문도): 어찌하면 다시 전쟁터로 길을 나설수 있을까?

高都護驄馬行(고도호총마행), 두보, 749년작.

751년, 고선지 장군의 석국 원정때 참살당한 석국 왕의 아들이 압바스 왕조와 연합하여 고선지 장군의 침공에 대비하자, 고선지는 당제국에서 파견한 병력 및 동맹국의 병력들을 소집하여 탈라스 대평원으로 진군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탈라스 전쟁인데 카를룩군의 배신과 수적인 열세에 밀리며 아쉽게 패배하였고, 간신히 휘하 이사업 장군의 패전병 재편성과 당 제국의 하서절도사 유임 정도로 끝나고만다. 하지만 카를룩군의 배신과 수적인 열세라는 위기속에서도, 고선지 장군은 탈라스 전쟁에서 이슬람 연합군들을 거의 개박살낼 정도로 막강하였다. 비록 아쉽게 패배하긴 했지만 말이다.

고선지 장군은 이처럼 세계를 정복한 전쟁영웅이자 정복자이지만, 그가 고구려에서 활약한 정복자가 아니며

어떻게보면 고구려를 멸망시킨 중국 당제국을 세계최강의 대제국이 되게끔 만든 군인중 하나라는 점에서..

재평가는 커녕 한국에서는 비난과 흑역사의 아이콘으로 불리웠었..으나.

하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그래도 이슬람의 수많은 국가들을 포함한 전세계의 70개가넘는 국가들을 정복한

고선지 장군의 정복전쟁을 보면 그가 비록 당제국의 장군으로 활약한건 사실이지만,

'고구려인'으로서 세계를 정복했기에, 그래도 고구려인은 죽지 않았다!

고구려인의 기상을 만방에 떨친 것이다는 의견이 많아지고있다.

그러니 꼭 나쁘게 볼게 아니라 재평가도 시급하다는 평가도 있는 영웅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고선지 장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있어 그를 전쟁영웅으로

보는 시각이 많은 입장.

비운의 명장군들.... 흑치상지, 고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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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출신 장군 흑치상지 장군의 상세한...

백제가 망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서 고선지 장군과 비슷한... 흑치상지 장군활약상을 자세히 설명 해 주십시요..... 보면 흑치상지는 백제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던 660년.....

고선지장군에 대해 궁금점..

... 고선지 장군은의 당나라 권력이 막강해서 만약 반란을 일으켰다면 그 여파가... 고선지장군은 당시 당제국의 동쪽에서 활약장군입니다. 따라서 그가 단신으로 탈출하여...

당나라 고구려 유민 출신 장군들 좀...

고선지 말고도 유명한 당나라 우리민족 유민(백제 고구려)출신의 장군들 좀 소개해주세요^^ 개인적으로 궁금 한것은... 또한 백제출신 유장으론 흑치상지가 있습니다....

고선지 장군은 왜 고구려 유민이면서도...

... 후손으로 당나라 장수로 활약했다는 이유에서 별다른 연구를 하지 않아왔고 특별한... 비록 당나라를 위해 싸우긴 했지만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 땅을 찾아 그곳에 새로운...

우리나라에서 고선지 장군의 후손이...

... 고선지 장군께서는 당나라로 가서 장수하지 않으셨나요?? 궁금하네요 우리나라에는 없고 중국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선지 장군은 중국 서북부 지방에서 활약했기...

고선지 장군께 편지글 쓰기

... 고구려 멸망 고구려때 고사계랑 장군이 있는데요 그아들이 고선지에요. 고선지당나라가서 공을 세웠죠 빌어먹을, 백제 유장 흑치상지도 있지만 애는 고구려 유장 임.....

고선지 장군보다 채륜이 더 뛰어나다?

... 종이가 고선지 장군의 서역 원정을 통해 서방으로... 국적문제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장수로 활약한 것이므로 학자들이 교과서 같은 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