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가족관계, 성장배경, 시대적 배경, 나폴레옹이 살았던 시대와...

나폴레옹의 가족관계, 성장배경, 시대적 배경, 나폴레옹이 살았던 시대와...

작성일 2010.10.18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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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폴레옹의 가족관계와 성장배경

 

2. 나폴레옹이 살았던시대적 배경(그냥 어떤 시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3. 나폴레옹이 살았던 시대에 우리나라와 비교(왕과 역사적 사건같은)

 

내공있구요 구체적으로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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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폴레옹의 성장과정

 

N a p o l e o n 1 세. 본명은 Napoleon Bonaparte 이고 별칭은 Le Caporal이다. 프랑스 장군이자 제 1통령(1799-1804). 프랑스와 서유럽 여러 나라 제도에 오래도록 영향을 끼친 많은 개혁을 이루어 냈고 프랑스의 군사적 팽창에 가장 큰 열정을 쏟았다. 그가 몰락했을 때 프랑스 영토는 1789년 혁명 때보다 줄어들었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조카인 나폴레옹 3세가 다스린 제 2제정이 막을 내릴 때까지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나폴레옹은 1769년 8월15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태어나기 바로 전 제노바는 코르시카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그 뒤 코르시카 사람들은 프랑스의 점령에 저항했고 카를로 역시 파스칼 파울리가 이끄는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나 파올리가 망명하자 샤를는 프랑스인과 타협했다. 코르시카 총독의 비호를 받은 그는 1771년 아작시오 지방법원의 판사 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1778년에는 위로 두 아들인 조제프와 나폴레옹을 오탱의 신학교, 브리엔 왕립 군사학교에 입학시켰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간 뒤 한 동안 스스로를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다.그는 9세 때부터 프랑스에서 교육받았으나 코르시카 기질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으며 교육과 독서를 통해 확실한 18세기 사람이 되었다. 나폴레옹은 오탱, 브리엔, 파리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가 파리에 있던 1785년 2월, 아버지는 어려운 집안 살림을 남겨 놓은 채 암으로 숨을 거두었고 장남은 아니었지만 나폴레옹은 16세도 안된 나이에 가장역할을 떠맡았다. 그 해 9월 58명 가운데 42등으로 파리의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젊은 포병 졸업했고 젊은 포병장교를 위한 훈련기관인 라 페르 (La Fere)연대에 포병소위로 임관했다. 연대가 주둔한 발랑스에서 계속 교육을 받으며 특히 전략과 전술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788년 6월에 연대에 복귀하였는데 그때는 이미 프랑스 혁명의 불안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2) 나폴레옹의 등장

 

1795년에는 공포 정치가 종식되고, 새 정부에서는 집권한 부르주아지의 의도에 따라 "새로 구성되는 의회는 반드시 직전 의회 의원의 2/3이 의원으로 참가하여야 한다."는 '2/3법'이 제정되었으며 정부 조직은 내무, 외무, 군무, 사법, 재무를 각각 담당하는 5인의 집정관으로 구성된 '도독 정부'의 모습을 보였다. 10월 달에는 왕당파의 반란이 있었는데 이것은 나폴레옹에 의해서 진압되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제 2차 대불동맹이 결성되어 프랑스를 위협하자 프랑스인 들은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폴레옹을 생각하게 되고 이것이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장교로 있던 20세 때 프랑스 혁명을 맞이한다. 그는 군사적인 천재였으며 타고난 노력가였고 폭력을 사랑했으며 명예욕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초기에는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가 1793년에 툴롱에서 왕당팡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이것을 진압하면서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때 로베스피에르의 추종자가 되었다가 테르미도르 반란 후에 투옥이 되기도 했는데 1795년에 재차 일어난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재 등용되어 1796-7년에는 이탈리아 쪽에서 침공하는 오스트리아 군에 대항하는 프랑스 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군대는 셋으로 나누어 1군과 2군은 명망이 있는 장군들이 사령관을 맡았던 것에 비해 약관의 나이인 나폴레옹이 3군사령관을 맡게 되어 노장들의 불만도 있었으나 그는 1,2군사령관이 모두 패한데 반해 그만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이탈리아를 점령하여 그 이름을 떨쳤다. 이처럼 나폴레옹의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우려한 테르미도르 도독 정부는 나폴레옹의 세력을 국외로 돌리고 그의 힘을 이용하여 영국의 오리엔트 식민지를 점령하려는 두 가지 목적 하에 이집트 원정을 명령한다. 이 원정은 1798년 5월에서 1799년 1월까지 있었는데 원정군은 보, 기병이 합해서 40,000명 그리고 학자가 200명이 이 원정을 수행했으며 이들을 수송하기 위한 함대도 360척에 달하였다. 나폴레옹은 이 원정의 목적이 지브랄타 해협을 지나 아일랜드를 점령하는 데 있다고 헛소문을 퍼뜨려 영국의 넬슨(Nelson)함대로 하여금 지르발타 해협을 지키게 하였다. 그 사이에 그는 몰타(Malta)섬을 점령한 후 이집트로 향하였다. 6월 31이 알렉산드리아 항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카이로로 향하였다. 7월 21일 이집트의 맘루크군과 큰 접전을 벌였다. 접전 직전에 나폴레옹은 휘하 장병에게 "이 피라밋 위에서 4천년의 역사가 귀관들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격려하였다. 사막의 태양 아래서 더위에 지든 병사들에게 행한 격려의 말로서는 너무나 엉뚱한 것 같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튿날인 1798년 7월 24일 나폴레옹군은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8월 1일 그의 함대를 찾고 잇던 넬슨이 드디어 아브키르만에 정박하고 있는 프랑스 함대를 발견하여 전멸시켰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귀국의 길도 증원군의 길도 막혔다. 그는 지중해의 패권을 넬슨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영국군과 휴전 교섭을 하는 중에, 한 장교의 손에 들어온 신문에 의하여 대불동맹과 프랑스와의 전면전의 정보를 얻은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군의 지휘권을 클레베르(Kleiber)에게 맡기고 5백 명의 부하를 데리고 8월 23일 이집트를 탈출하였다. 보나파르트의 명성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일대에 이미 떨쳐져 있었다. 일반 국민은 그가 근동에서 겪은 고전과 패전의 사실은 모르고 과장된 승전의 소문만을 듣고 들떠 있었다. 그가 이집트에서 귀국하였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진 것은 10월 13일이었다. 파리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신문들은 그의 동정을 낱낱이 보도하였다. 나폴레옹은 이집트를 탈출할 때 이미 쿠데타에 의한 정권 쟁취를 계획하였다. 그는 지금 누구와 손잡을 것인 가만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었다. 그의 야심과 시에예스의 계획이 들어맞았다.

나폴레옹에게 기대되고 있는 전면적인 평화와 시이에스가 계획하고 있는 개헌 계획이 결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도독 정부의 5인 도독은 고이에, 물랑, 듀꼬스, 바라스 및 시에예스였는데 앞의 세 사람은 공화주의자라는 것 외에는 별로 두드러진 정치적 재능이 없었다. 나폴레옹과 시에예스는 모로 장군 및 노련한 탈레랑과 경찰 장관 푸셰, 법무장관 캉바세레스, 그리고 5백인회 의원들과 결탁하는데 성공하였다. 나폴레옹의 쿠데타는 안개달 18일로 정해졌다. 10년 간의 혁명은 이제 한 군사 모험가의 지배로 그 막을 내렸다.

 

3. 통령정부시대

 

1)권력강화

 

갓 30세가 된 보나파르트의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으나 사람들은 언제나 승리를 거둔 그를 믿었으며 그가 질서를 잡아 평화를 되찾고, 혁명이 거둔 정치적사회적 성과를 더 탄탄하게 만들어주리라 기대했다. 참으로 그는 놀라울 만큼 지적이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지칠 줄 모르고 일했지만 야심이 너무 컸다. 혁명 덕분에 그처럼 일찍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혁명의 아들로 여겨졌고 그 자신도 이 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아들이라기보다 오히려 18세기의 아들이었으며 가장 잘 깨우친 전제군주였다. 그는 국민주권일반의지의회토론 같은 것을 믿지 않았고 인간의 이성 자체보다 이성을 발휘하는 것을 더 신뢰했다. 또 무력이 뒷받침되기만 하면 계몽된 확고한 의지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믿었고 대중을 경멸하면서도 두려워했으며 여론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나파르트는 군사독재를 폈으나 시에예스가 작성한 혁명력 제8년 헌법(1799.12.25) 때문에 처음에는 그 참모습이 드러나지 않았다. 이 헌법은 '인권'을 보장하지도 않았고, '자유평등박애'를 내세우지도 않았지만 국유재산 매각을 무효로 돌릴 수 없음을 선포했고 망명귀족에게 불리한 입법을 지지함으로써 혁명파들을 안심시켰다. 또한 제1통령에게 엄청난 권력을 주었고 나머지 두 통령은 이름뿐이었다. 제1통령은 민사와 군사부문의 모든 관직을 임명하고, 심지어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3개의 입법부 의원들을 뽑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이 헌법은 1800년 2월 국민투표에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로 통과되었다.

 

2)개혁 프로그램

 

통령정부가 이룬 행정개혁들은 그 헌법보다 더 오래 살아 남았고 프랑스에 더 중요한 것이었다. 정부의 최고기관으로, 제1통령이 창설해 대부분 그가 직접 이끈 국가위원회는 새로운 법률의 원천이자 행정재판소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각 주의 행정책임자인 주지사는 법이 집행되는 것을 감독했고 중앙집중을 도왔다. 사법제도는 크게 바뀌었는데 혁명 초부터 선출되던 재판관은 정부가 임명했으나 종신임기 제도로써 독립성을 보장했다. 경찰 조직도 강화했다. 그리고 지방당국이 아닌 전문 세무공무원에게 직접세 징수를 맡겼고, 프랑 화(貨)를 안정시켰으며, 주주(株主)들과 국가가 함께 소유하는 프랑스은행(Banque de France)을 설립함으로써 재무행정을 크게 개선했다. 군대와 비슷한 조직으로 중등교육을 실시하고 대학도 다시 세워 교육을 중요한 공공사업으로 삼았으나 초등교육은 아직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민법을 집대성하는 일은 1790년에 시작해 통령정부시대에 끝냈다. 1804년 3월 21일 공포한 나폴레옹 법전은 혁명이 거둔 수확들. 즉 개인의 자유, 노동의 자유, 양심의 자유, 국가의 세속적 성겨, 법 앞에서의 평등 등을 뚜렷이 규정했으나 토지재산을 보호하고 고용주에게 더 큰 재량을 주었으며 피고용자를 거의 배려하지 않았다. 또한 이혼을 인정했지만 여자에게 아주 한정된 법칙 권리만을 주었다. 나폴레옹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것은 군대였다. 그는 혁명을 통해 이룬 군대체계(강제징집과 대리징병을 허용하고 징집병과 기존 군인을 함께 편성하며 모든 사람에게 최고 계급으로 승진할 자격을 열어놓은 것)를 그 대로 이어나갔다.

 

3)군사원정과 불안한 평화

 

나폴레옹은 1799∼1800년의 겨울과 봄에 군대를 개편하고 러시아가 대(對)프랑스 동맹에서 떨어져나간 뒤 홀로 남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려고 준비했다. 그는 스위스 연방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아차렸다. 그곳에서는 본토에 있는 오스트리아 군이든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 군이든 마음대로 옆에서 공격할 수 있었다. 그는 지난날의 승리에 비추어 이탈리아를 공격목표로 택했으며 제노바를 포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군을 기습했다. 6월에 벌어진 마렝고전투로 프랑스는 아디제 강까지 이르는 포 강 유역을 장악했고 12월에는 또 다른 프랑스 부대가 독일의 오스트리아 군과 싸워 이겼다. 1801년 2월 오스트리아가 뤼네빌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프랑스는 자연국경, 곧 라인 강과 알프스산맥 그리고 피레네산맥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제 프랑스와 전쟁을 하는 나라는 영국뿐이었으나 영국도 곧 싸움에 지쳐 평화를 원했다. 1801년 10월 런던에서 예비조약을 맺은 뒤 1802년 3월 27일 아미앵 평화조약을 맺었다. 유럽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나폴레옹의 위신은 더욱 드높아졌고 1802년 8월에는 그를 종신통령으로 삼자는 안건이 국민투표에서 대다수 지지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국제평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영국과 달랐다. 무엇보다 그는 관세도 낮추기 않고 유럽의 반을 프랑스 시장으로 삼으려해 영국 상인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다시 해외팽창을 꾀했는데 반란이 일어나 잃었던 산도밍고를 되찾고, 1800년 스페인에게서 받은 루이지애나를 점령하여 지중해와 인도양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프랑스의 팽창을 경계한 영국은 프랑스가 제노바에서 안트웨르펜에 이르는 해안을 독차지한 것에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평화가 깨진 직접 계기는 몰타 문제였다. 아미앵 조약에 따르면 프랑스가 물러간 뒤 몰타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은 아미앵 조약에 따라 원래 주인인 구호기사단(Knight Hospitallers)에게 그 섬을 돌려주어야 했지만 프랑스가 나폴리의 몇몇 항구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영국은 몰타를 떠나지 않았다. 두 나라의 관계는 점점 긴장되었고 마침내 1803년 5월 영국이 전쟁을 선포했다.

 

 

 

 

4. 제정시대

 

다시 일어난 전쟁은 보나파르트를 황제로 만들었다. 영국이 뒷돈을 댄 왕당파의 암살음모가 1804년에 밝혀지자 보나파르트는 다시는 그런 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강력히 대응하기로 했다. 부르봉 가문 출신으로 독일에 살고 있던 앙갱 공작이 음모의 주범이라고 믿은 경찰은 탈레랑과 경찰총수인 조제프 푸셰의 동의를 얻어 그를 납치하여 총살했다.

 

1)제정수립

 

푸셰는 보나파르트에게 종신통령제를 세습제정으로 바꾸어 암살로 체제를 뒤엎으려는 희망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보나파르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1804년 5월 28일에 제정을 선포했다. 우선 그는 위신을 높이기 위해 1804년 12월 2일 교황 피우스7세가 직접 참석한 가운데 노틀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가졌다. 마지막 순간에 황제는 교황에게서 황제관을 건네 받아 손수 자기 머리에 썼다. 1804년 나폴레옹 집안 사람들에게 황족 칭호를 내렸고 1808년에는 제국의작위체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 반발이 있었으므로 선전을 강화하고 언론을 엄격히 검열했다. 그러한 독재체제 덕분에 나폴레옹은 여론에 신경 쓰지 않았으며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2)영국과의 전쟁

 

1803∼05년 프랑스와 전쟁한 나라는 영국뿐이었다. 나폴레옹은 다시 전보다 더 큰 규모로 영국 침략을 준비했다. 그는 프레스트와 안트웨르펜 사이에 군함을 2,000척 가량 끌어 모았고 불로뉴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영국 해군보다 훨씬 약한 프랑스 해군은 스페인 해군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두 나라 해군이 힘을 합쳐도 영국 해군이 거느린 함대들 가운데 하나를 겨우 상대할까말까 정도였다. 프랑스 함대는 넬슨에게 쫓겨 공격 한번 못한 채 1805년 7월 유럽으로 되돌아가 카디스로 피했고 그곳에서 영국 함대에게 봉쇄 당했다. 빌뇌브는 스페인 함대의 도움을 얻어 봉쇄를 뚫으려 했으나 1805년 10월 21일에 트라팔가르 앞 바다에서 넬슨의 공격을 받았다. 그 전투에서 넬슨은 목숨을 잃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궤멸시킴으로써 영국은 침략 당할 위험에서 벗어나 마음껏 바다를 누릴 수 있었다. 트라팔가르 전투 일주일 전 프랑스군이 울름에서 오스트리아를 크게 이겨 나폴레옹은 11월 13일 빈에 입성했고 12월 2일에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무찔러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였고, 베네치아와 달마티아를 나폴레옹에게 넘겨주었다. 또 독일에 있는 광대한 영토를 나폴레옹의 속국인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텐에게 넘겨주었다. 그 다음 프랑스는 나폴리 왕국의 부르봉왕가를 내쫓고 그 왕관을 나폴레옹의 형인 조제프에게 씌웠다. 1806년 7월에는 라인 연방을 만들었고 얼마 안가 서부 독일 전체가 프랑스의 보호를 받는 연방 속으로 들어왔다. 1806년 9월에는 프로이센이 전쟁에 뛰어들었으나 10월 14일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패배했다. 러시아군은 1807년 2월 아일라우에서는 힘겹게 버텼으나 6월 프리트란트에서 크게 패배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와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영국과 맺은 동맹에 지쳤다. 그래서 그는 프로이센 북부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틸지트에서 나폴레옹과 만나 프로이센에서 떨어져 나온 폴란드 지방에 바르샤바 대공국(Grand Duchy of warsaw)을 세운다는 조약을 맺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동유럽은 러시아가 서유럽은 프랑스가 지배하게 된 것이다.

 

3)대륙봉쇄와 이베리아 반도 원정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모든 교역을 금지하고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에서 들어오는 모든 상품을 몰수하도록 명령했으며 영국 국적인 선박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그 식민지의 해안에 들르는 모든 배를 나포하겠다고 선언했다. 봉쇄에 성공하려면 유럽 전역에서 엄격히 이루어져야 했으나 영국의 오랜 동맹자인 포르투갈은 자기 나라 상업을 파멸시킬 봉쇄에 처음부터 협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을 쳐부수기로 마음먹고 스페인 카를로스 4세에게 프랑스군이 지나가도록 허용을 부탁했고 프랑스군은 리스본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북부 스페인에 너무 오래 주둔하자 스페인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카를로스 4세는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는데 나폴레옹은 이를 부르봉 가문 출신의 마지막 군주를 유럽에서 몰아낼 기회로 삼아 1808년 4월 카를로스와 페르난도 둘 모두 퇴위를 강요하면서 탈레랑의 성에 붙잡아 두었다. 그러나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가 잔혹하게 진압된 뒤에 스페인 전지역으로 반란이 퍼졌으며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리 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새 국왕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패배한 것은 그의 위신에 엄청난 타격이었다. 무기를 들고 일어선 이베리아 반도는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영국에게 교두보가 되었고 정력적인 아서 웰즐리(뒷날의 웰링턴 공작)가 지휘하는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연합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그러나 1809년초 나폴레옹은 스페인의 반란을 거의 진압했으며, 그 뒤 4월에는 바이에른을 공격하기 시작한 오스트리아를 또다시 패배시켰고, 쇤브룬 조약 (1809.10.14)으로 일리리아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대륙봉쇄 체제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었다.

 

4)제정의 강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실패했지만 나폴레옹의 운세는 1810년 절정에 올라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샤를마뉴의 후계자로 생각했으며 아이를 낳지 못한 조세핀을 버리고 오스트리아 황제의 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다. 1811년 3월 그녀가 아들을 낳자 제국의 미래가 보장된 듯했다. 제국의 영역은 어느 때보다 넓었고 황제 친척이 지배하는 속국들로 에워싸여 있었으며 스위스 연방과 라인 연방, 바르샤바 대공국 같은 여러 나라가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심지어는 마리 루이즈와의 결혼으로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에 매인 것처럼 보였다. 1796년 이전에 복잡했던 유럽의 지도는 이제 아주 단순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경들은 지리적, 민족적인 구분선과 맞지 않았다. 혁명과 민족주의를 통해 이룩한 프랑스 제도들을 퍼뜨림으로써 독일과 이탈리아 의 통일에 기초를 놓았다. 한편 프랑스가 유럽 전역에 일깨운 민족감정은 거꾸로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1809년부터 줄곧 스페인 게릴라들이 프랑스군을 괴롭히고 있었으며, 반란지도자들이 1812년 카디스에서 소집한 국민의회 (Cortes)는 프랑스 혁명이념과 영국 제도들에서 영향을 받은 헌법을 선포했다.

 

 

 


 

 

5)러시아 원정의 참패와 그 이후

 

에어푸르크 회합 뒤부터 러시아 황제는 나폴레옹에게 점점 더 믿지 못할 태도를 보였고 나폴레옹은 그를 위협하기 위해 1812년 봄 폴란드에 군대를 집결시켰다. 마지막 협상이 실패한 뒤 6월말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군에서 빼내온 부대를 포함해 총 45만 3,000명 가량의 병력은 니에만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초토전술을 펼치면서 퇴각했고 나폴레옹 군대는 9월초에야 모스크바 근처에 다다랐다. 러시아군 사령관 미하일 쿠투조프는 9월 7일에 보로디노에서 프랑스군을 맞아 싸웠다. 전투는 격렬했으나 뚜렷한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1주일 뒤 나폴레옹은 텅 빈 모스크바에 입성했고 같은 날 엄청난 화재로 인해 모스크바의 대부분이 타버렸다.나폴레옹은 퇴각해야 했는데, 때 이르게 찾아온 겨울 한파는 퇴각하는 프랑스군에게 커다란 재앙을 안겨 주었다. 이 재앙으로 유럽의 모든 나라는 나폴레옹에게 도전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 소식이 독일에 퍼지자 반프랑스 시위가 일어났고 프로이센이 파견한 부대들은 12월에 프랑스군을 이탈해 거꾸로 그들에게 총구를 돌렸다. 오스트리아도 파견대를 철수시키고 점점 더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탈리아 사람들도 나폴레옹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도 불만스런 움직임이 잦았는데 파리에서는 한 비판적인 말레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거의 성공할 뻔했다. 이 사건으로 나폴레옹은 서둘러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독재를 강화하고 온갖 수단을 다해 자금을 끌어 모으며 새로이 군대를 소집했다. 1813년 5월 나폴레옹은 뤼첸과 바우첸에서 러시아군과 프로이센군에게 승리했으나, 많은 병사를 잃었다. 프랑스군에 파견되었던 독일 부대들이 동맹군으로 넘어감에 따라 동맹군 병력이 날로 늘어났다.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전투(1813.10.16∼19)에서 크게 패배했고, 그 패배는 곧바로 몰락을 가져왔다.

 

Ⅲ. 결  론

 

1. 몰락과 퇴위

 

1814년 1월 프랑스는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동맹국들은 그 과녁이 프랑스 국민이 아니라 나폴레옹 하나뿐이라고 공언했고 나폴레옹은 3월까지 신참병을 이끌고 버텼으나 동맹군을 무찌르지도, 대다수의 프랑스인의 무관심을 깨트리지도 못했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은 1814년 3월 쇼몽 조약을 맺어 나폴레옹이 무너질 때까지 싸울 것을 약속했다. 동맹군이 3월 30일 파리 근처에 다다르자 나폴레옹은 동맹군의 옆을 공격하려고 동쪽으로 옮겨갔으며 파리 시 당국은 곧바로 동맹군과 교섭에 들어갔다. 임시정부의 수반인 탈레랑은 황제의 폐위를 선언했고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와 협상을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퐁텐블로에서 파리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4월 6일 퇴위했다. 퐁텐블로 조약으로 동맹군들은 그에게 엘바 섬을 영주로 주면서 해마다 프랑스 정부로 부터 200만 프랑을 받고 400명의 자원 호위대를 거느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나폴레옹은 5월 4일 엘바에 도착했다.

 

2. 엘바와 백일천하

 

나폴레옹은 45세에 그냥 뒤로 물러앉을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복고왕정이 곧 비판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대륙의 상황에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빈에서는 유럽의 앞날을 의논하는 회의가 열렸고, 엘바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몇몇 외교관들이 나폴레옹 그 자신을 대서양의 먼 섬으로 쫓아내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나폴레옹에 대한 연금지불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은 나폴레옹의 행동을 취하게 만드는 계기를 주었다. 그는 1815년 3월 1일 쥐앙 만에 상륙했다. 알프스를 넘을 때 공화주의자 농민들이 그에게 모여들었고 그르노블 근처에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달려온 군인들이 그의 편으로 돌아섰다. 3월 20일 그는 파리로 들어갔으며 이제 한해 전에 몰락한 황제로서가 아니라 혁명정신의 화신으로서 다시 권좌에 올랐다. 동맹군에 맞서 벨기에로 진격한 나폴레옹은 1815년 6월 16일에 리니에서 프로이센군을 무찔렀다. 이틀 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승리한 영웅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과 워털루에서 마주쳤다.

격렬한 전투 끝에 나폴레옹이 승리를 눈앞에 두었을 때, 게프하르트 불뤼허가 이끄는 포로이센군이 도착해 전세가 역전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은 의회의 요구로 1815년 6월 22일 퇴위했다. 7월 3일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려 했으나 영국 함대는 모든 프랑스 선박의 출항을 금지했고 이에 그는 영국 정부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영국 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동맹국들의 의견을 감안해 멀리 떨어진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 그를 억류하기로 결정했다.

 

3. 세인트헬레나에서의 망명생활

 

1815년 10월 15일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에 상륙해 원래 부총독 관저로 지어진 롱우드(Longwood)에 자리 잡았다. 그는 영국군 장교가 수행하는 한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으나 스스로 롱우드에 틀어박혔다. 아내인 마리 루이즈와 아들의 소식도 전혀 듣지 못했다.  1817년 말에 처음으로 위궤양이나 위암으로 보이는 병세가 나타났고 1821년 초부터는 병이 급속히 악화되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젊은 시절의 나폴레옹은 본받을 바가 많았지만, 절대권력이라는 마약이 정신을 황폐화시켰다. 말년의 나폴레옹은 어쩌면 오만과 과대망상증 환자였다 할 것이다. 오만한데다가 방심을 하고 있는 사람이 차분히 작전을 짜서 대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서 본 바가 있다. 그러나 만약 루이16세가 유능하였다면, 그래서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나폴레옹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 혁명이 그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은 4월 마지막 유언을 남겼는데 "내 유골을 센 강변에 묻어 내가 그토록 사랑한 프랑스 국민들 속에 있게 해달라...나는 영국의 과두정치와 그에 고용된 암살자들 때문에 내 명을 못다 살고 가노라."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그는 52세도 안된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유해에 그가 좋아했던 군복을 입히고 마렝고 전투 때 입었던 잿빛 외투를 덮었다. 루퍼트 밸리에서 소박한 장례식이 치러졌고, 묘비에는 이름도 없이 "여기에 눕다" (Ci-Git)라는 말만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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