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학살 사건...

양민학살 사건...

작성일 2009.11.12댓글 1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저는 나주 지역에 사는 학생입니다.

 

숙제를 하던 중에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나주지역에서도 발생한 양민학살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양민 학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적 한 부분이기도 하고 또 숙제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양민 사건에 대해 알려주시구요 ,,, 정치적으로 개입된 세력이 있는지 아니면 정치와 관련된

 

사항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급합니다,. 빨리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우리나라의 양민학살사건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보도연맹사건은 전국적으로 이뤄졌는데 나주 또한 예외가 아니지요. 이 나주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서 조사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참고로 보도연맹에 대해서는 제가 예전에 쓴 기사가 있기에 이를 참고하시면 큰 도움이 될듯 하군요.

 

----------------------------------------

김 전 대통령 서거날 보도연맹 사건 패소, 더 아쉽다

[오마이뉴스 송영대 기자]
 

18일 오후 1시 43분, 한국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힘쓰시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결국 서거했다. 그동안 몸이 좋지 않아 37일간 투병생활을 하였고, 그 와중에 여러 차례의 집중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노환과 병마로 인하여 결국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이날은 한국 민주주의의 큰 별이 떨어지고,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거목이 쓰러진 날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가 불과 87일 전이었기에, 국민들의 충격은 말 할 수 없었다. 연이은 전직 대통령의 서거에 다들 애통해 하였으며, 특히나 이번 해엔 각계각층의 중요 인사들이 사망이 잇달았기에 그 아픔을 더했다.

 

18일의 주요 뉴스는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였다. 하지만 다른 중요한 사실들은 이에 가려서 잘 조명되지 못하였다. 특히 18일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뜻에 위배되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지만, 그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 보도연맹 사건.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유족들의 소송을 법원이 외면해 버린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에 가려진 보도연맹 사건

 

▲ 울산유족회 간부 사진. 1960년 10월 1일 울산유족회 간부 33명이 함월산 백양사 옆 합동묘와 비석 앞에서 합동제사를 마친 후 함께 찍은 사진.
ⓒ 진실화해위원회

18일 서울고등법원은 울산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와 유족들이 낸 항소심에서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1심에서는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유가족 508명에 대해 국가가 200억 원 대의 배상을 해야한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정작 이번 항소심에서는 다른 판결을 내린 것이다.

 

애초에 1심에서 재판부는 유족들이 그동안 희생자들의 사망 여부나 장소, 학살 지시자 등을 몰랐기 때문에 소멸시효에 대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상 조사 발표 시점부터 계산해야한다고 판단하여 국가가 유족들에게 200여억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었다.

 

이번 재판부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지난 1950년으로 "국가배상법에 따르면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는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시점으로부터 5년"이라며 "울산보도연맹 사건은 1955년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된 만큼 국가는 지난해 6월 제기된 이번 소송에서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며 유족들이 배상을 청구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울산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1950년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당시 좌익으로 몰린 보도연맹원 407명을 총살한 사건이며, 2005년 희생자 유족들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조사 개시 신청을 접수하여 1년 만에 진실이 규명되었었다. 하지만 대법원의 최종 판단 또한 남아 있기 때문에, 최종 배상 여부는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런 법원의 판단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법원은 6·25전쟁 발발 직전 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학살사건이었던 '문경학살사건'에 대하여, 관련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항소심에서도 소멸 시효가 완성됐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했던 바가 있다. 하지만 이번 법원의 판단에는 현실적으로 유가족들이 그동안 소송을 제기하기 어려웠던 사회적 환경을 무시하고, 오직 법의 잣대로만 따지는 것에 대한 비판이 많아, 차후에도 여러 논쟁을 일으키리라 본다.

 

보도연맹사건, 도대체 무엇이기에?

 

▲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 영화의 여주인공인 영신(고 이은주 분)은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었다는 이유로 총상당하게 된다
ⓒ 태극기 휘날리며

그럼 도대체 보도연맹사건이 무엇이기 때문에 이렇게 논란이 되는 것일까? 보도연맹사건에 대해서는 여러 말로 설명해 볼 수 있지만, 영화 속의 한 장면을 가지고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하다. 바로 <태극기 휘날리며>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는 이진태(장동건 분)의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약혼녀인 영신(고 이은주 분)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영신은 총살의 위기에 처하는데, 바로 서울이 인민군에게 넘어갔을 때 여러 좌익단체들에 가담했다는 혐의 때문이다. 그러한 혐의에 영신은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식량을 배급받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총살되며 이진태는 이를 보면서 오열한다. 당시 6.25전쟁에 있었던 비극적인 장면이기도 하면서 보도연맹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보도연맹은 정부가 좌익 활동을 하던 인사들을 강제적으로 전향시켜 만든 반공단체로, 정식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었다. 1949년에 결성한 것으로서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은 전향시키고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사상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주로 가입시켰는데, 사실상 강제적이었으며 그 수는 무려 30만에나 달했다. 게다가 이 제도가 할당제이다 그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가입 시 보리쌀 등을 주어 서명하게 하다. 30만이라는 인원수는 그런 식으로 채워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해인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부터이다. 우익인사들은 보도연맹에 포함된 사람들이 북한, 즉 좌익에 가담할 것을 염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보도연맹원들을 불러 한꺼번에 총살시켰으며, 이는 6.25전쟁 당시에 있었던 최초의 민간인 학살로 기록된다.

 

국군은 잠재적인 위협요소인 보도연맹원들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각 마을마다 보도연맹원들을 색출하여 총살시켰다. 이로서 30만 여명에 달하던 보도연맹원들 중에서 20만 여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보도연맹은 자연스럽게 와해되었다. 결국 국가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하여 소중한 목숨들을 참혹하게 앗아간 사건이라 하겠다.

 

과거청산과 김대중 대통령
 

이러한 보도연맹 사건 등 민간인 학살사건이 새롭게 조명되는 것은 바로 김대중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부터이다. 김대중대통령 자신 스스로가 보도연맹원으로 가입되어 있어서 실제로 목숨을 위협받은 적도 있었다.

 

하루아침에 과거청산이 이뤄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이뤄지지 못하였던 과거청산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이에 대해 조사가 이뤄졌으며 이에 대한 여러 위원회들이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울산 국민보도연맹사건은 2008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를 대신하여 사과를 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전 정부에서는 여러모로 신경을 썼었다. 하지만 이명박정부에 들어서 이런 기조는 무너지고, 도리어 1950년 7월에 있었던 나주 집단학살이나 1949년 12월에 있었던 문경학살 사건에서도 울산 보도연맹사건처럼 원고 패소 판결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과거사에 대하여 명백히 밝혀지고, 그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배상이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명박정부는 자칫 나쁜(?) 선례를 만들면 차후로도 이와 관련된 배상이 끊이질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배상을 주저하는 것으로 보인다.

 

민간인학살사건의 아픔을 가지고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이 땅에는 너무나도 많다. 그러한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국가의 과거에 대한 사과와 그에 따른 배상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를 핑계로 이러한 사실들을 감추지 말고, 기존 정부들의 기조를 이어 이명박정부 또한 철저한 과거규명과 함께 유족들과 희생자들에 대한 배상을 해야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1958250

한국전쟁때 보도연맹원양민학살사건이...

보도연맹양민학살사건이 뭔가요?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6.25 전쟁 초기였던 7월초부터 8월 말에 걸쳐서 이남 지역에 행해진 민간인 학살입니다. 공식적으로 발견된 사망자의...

거창 양민학살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에 대해서 쉽게 알려주세요 왜냐하면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1950년대초 한국전쟁 와중에 일어났다카거든요 1. 왜 일어났는지 2. 사건 처리 경과 3. 이 사건이...

거창 양민 학살사건

... 거창양민학살사건 1. 사건개요 1951년 2월 10일과 11일 이틀간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공비토벌중이던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양민 187명 (후에 700여명으로 밝혀짐)...

양민학살 사건...

... 빨리요,,, 우리나라의 양민학살사건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보도연맹사건은 전국적으로 이뤄졌는데 나주 또한 예외가 아니지요. 이 나주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거창 양민 학살사건

... 그러나 국회의 재조사와 5월 8일 국회의 결의로 양민학살사건과 조사방해사건의 진상이 공개되자 내무·법무·국방 3부 장관이 사임하였고, 직접책임자인 9연대장 오익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