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난에 대해서

묘청의 난에 대해서

작성일 2008.12.03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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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난의 성격규명과 역사적 평가 , 묘청의난의 진행과정 자세히 서술 묘청의난에대한 신채호의 평가 언급

 

이렇게 갈켜주세여.. ㅜ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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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묘청의 서경천도운동(묘청의 난, 1135년 음력 1월 4일1136년)은 승려 묘청 등이 금국정벌론과 서경천도론이 개경 귀족들의 방해로 무산되자 서경(西京:현재의 평양)에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호(軍號)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여 대위국(大爲國)을 선언하고 일으킨 반란이다. 대위국이라는 새로운 국가이념 차원의 반란은 1년 후 김부식(삼국사기의 편찬 책임자)이 지휘하는 진압군의 공격을 받고 내부 분열을 일으켜 자멸하였다.

 

 배경

 당시 주변 상황

당시 고려 사회는 지배층은 경제발전의 소득을 독차지하면서 향락생활을 즐긴 반면, 일반 백성은 극심한 착취구조에 저항해 살던 곳에서 도망을 가버리는 유망(流亡)현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또한 지배층 안에서도 대대손손 고위직을 지켜가며 권력과 부를 움켜쥐고 있는 문벌귀족과 과거제를 통해 새롭게 등장한 신진관료 사이의 대립이 격화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외척인 이자겸(李資謙)이 자기의 셋째·넷째 딸을 인종에게 바쳐 세력을 확대시켜 대권을 장악한 후,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려는 뜻을 품고 이자겸의 난을 일으켜 고려의 조정은 더욱 더 기강이 어지러워졌다. 다행히 1126년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척준경에 의해 일단 진압되었으나,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고 정치기강이 해이해져서 수도내의 분위기는 흉흉해졌다. 다만, 김부식이 이자겸을 진압했다고 해서 문제의 원인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얼굴이 이자겸에서 김부식으로 바뀌었을 뿐이고, 여전히 왕권은 불안하기만 했다.

또 밖으로는 여진족의 세력이 더욱 강성하여져 고려에 대하여 거꾸로 외교적인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새롭게 발흥하는 여진족이 건국한 금나라는 강성한 힘을 바탕으로 고려에 대해 속국이 될 것을 강요했다. 금은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킨 데 이어 송나라를 격파하고 장강 이남으로 몰아냄으로써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밀려난 한족은 남송을 세우게 된다). 이 금나라가 고려에 새로운 관계를 요구해왔던 것이다. 예전에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던 여진족이 이제는 신하의 예를 강요하자, 고려인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분노했다. 인종의 바로 전 시대인 예종때에 윤관여진족을 토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던 기억이 생생할때였다. 이자겸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금의 속국이 될 것을 주도한 적도 있지만, 이자겸은 자신이 일으킨 반란으로 제거되고 없었다.

 서경 천도 운동과 금국정벌론

이런 상황에서 개경에 기반을 둔 구세력이 아닌 서경의 신흥세력이 부각되었다. 이들 서경 세력은 고려 3대 국왕 광종 이후 주도권을 개경과 개경 이남의 문벌 귀족 출신들에게 빼앗긴 세력이었다. 특히 서경 출신이자 빼어난 시인으로 알려진 정지상은 이자겸 제거에 공을 세운 권신 척준경을 과감히 탄핵해 그를 귀양보내는 데 공을 세웠다. 이로써 정지상은 인종(仁宗)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정지상은 서경 출신의 승려인 묘청의 사상을 신봉했고, 묘청을 인종에게 소개하였다.

풍수지리설의 대가(大家)로 알려졌던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수도인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덕(地德)이 다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금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고,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묘청의 주장이었다.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 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에 의거,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에 맞서 서경천도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 개경의 문벌귀족 세력을 유교주의, 사대주의 세력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당시 고려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정지상도 백수한과 더불어 묘청의 주장을 거들어 서경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복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했고, 왕의 측근자들과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여 묘청을 성현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묘청은 곧 인종의 총애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인 인종은 1127년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하였으며, 그의 건의에 따라 서경의 가장 좋은 명당인 임원역(林原驛:평안남도 대동군 부산면 신궁동)에 대화궁(大花宮)을 짓게까지 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경천도는 곧 실현될 듯이 보였다. 처음에는 유신들이 의심하여 반대했으나 결국 그들의 교묘한 음양설에 넘어가게 되어, 묘청 등은 인종의 서경행차에 성공하고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하였다.

1128년 다시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는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므로 그곳에 신궁인 대화궁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 밖의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 하여 서경천도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그해 11월부터 신궁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개경 귀족들의 반발과 서경천도운동의 좌절

그러나 당시 조정 안에는 서경천도계획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지 않았다. 김부식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정지상 묘청 등 서경 세력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경 귀족 세력의 반발에 초조해진 묘청 일파가 지나친 농간을 부린 것이 폭로되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대두되었으며 민심 또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와, 인종은 서경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특히 대화궁을 지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고 금나라도 저절로 항복할 것이며, 그밖에도 많은 나라가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나, 준공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불상사가 잇달아 일어나기도 했다.

묘청은 상징 조작에 능했다. 이 상징 조작을 이용하여 인종의 총애를 받고 권력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 도가 지나쳐 오히려 신뢰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 가지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1132년(인종 10년) 2월, 인종이 묘청을 따르게 하고 서경으로 가던 중 큰 폭풍우를 만나 수많은 인마가 살상되고 인종을 비롯한 대소신료들이 고초를 겪었다. 이에 묘청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폭풍우와 고생이 묘청의 탓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묘청은 무리수를 썼다. 기름이 들어간 떡을 강에 던졌던 것이다. 기름떡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수면에서 오색으로 빛났고, 묘청은 이를 용이 침을 토했기 때문이라며 해석했다. 이런 현상은 천년에 한 번 있기도 힘든 상서로운 기운이라는 것이다. 묘청과 검교태사를 지낸 이재정 등 서경인 50여 명은 이때 금나라를 공격하자고 했다.

하지만 신중했던 인종은 결정을 미루고, 대신에 문공인과 참지정사 이준양에게 ‘용의 침’을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 ‘용의 침’은 기름떡을 가지고 농간한 것임이 탄로났다. 묘청과 정지상 등의 정치적 위신은 크게 실추되고, 조정에서는 묘청 일파에 대한 숙청 요구가 잇따랐다. 그러나 인종은 용인하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간은 서경의 대화궁에 행차할 것을 요청하는 묘청의 건의를 절반쯤 받아들여 옷만이라도 보내게 했다. 묘청이 무리해가면서까지 대화궁 행차를 거듭 왕에게 청원한 것은 서경 천도를 기정사실화하고자 했던 때문이다.

이외에도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던 대화궁이 여러 번 벼락을 맞아 불탄다거나, 극심한 가뭄으로 인많은 사람이 굶어죽기도 했으며, 또 대동강에서 뱃놀이하던 인종이 풍랑을 만나 큰 위험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인종도 묘청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경의 대표적 권신인 김부식이 서경 천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인종도 이를 받아들여 서경 천도 중지 명령을 내리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묘청 등은 인종을 서경으로 납치해 서경 천도를 강행하려 했지만 개경 관료들의 견제로 성공하지 못했다.

 경과

 묘청의 봉기

이렇게 사태가 반전되자 묘청은 1135년 1월 어서경의 분사시랑 조광 및 병부상서 유참 등과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부류현(副留縣) 수령 이하 관리들과 상경인(上京人:開京人)으로서 서경에 와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면의 모든 관청, 즉 주군수까지의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서북면 안에 있는 모든 고을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하였다. 이어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갈 뜻을 밝혔다

지역 차별에 반대하며 봉기한 세력이 특정 지역 출신(개경)을 모두 가두고, 자기 지역 출신들만을 관리로 임명한 것은 이미 반란의 명분을 잃은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정부군의 진압

이와 같은 묘청 등 서북인들의 반란에 부딪힌 중앙정부에서는 김부식을 평서원수로 하는 진압군을 파견하였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개경에 남아 있던 묘청 일파인 정지상·백수한·김안(金安) 등을 참수하였다.

김부식은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하였다. 평산역―관산역(현재의 신계)―사암역(현재의 수안)을 거쳐 성천에 이르렀다. 거기서 토적(討賊)의 격문을 발하여 여러 성에 보내고 다시 3군을 지휘하여 연주(連州:价川)를 거쳐 안북대도호부(현재의 안주)에 다다랐다. 그 과정에 많은 성들이 중앙정부군(진압군)에 호응, 협력하게 되어 정세는 진압군에게 유리하게 되었다. 진압군은 서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을 제압하여 서경을 고립시키는데 주력했다. 이윽고 서경 주변 지역에 대한 제압이 끝나자 그제야 진압군은 서경을 포위하였다.

서경에는 7∼8차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다. 승산이 없음을 안 조광 등이 묘청과 유담, 유담의 아들 유호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 유첨을 고려 조정에 보내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중앙정부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고, 유첨을 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조광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고 판단,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결심, 개경정부의 어떠한 회유교섭도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인종과 김부식이 회유하기 위해 보낸 사절들도 죽였다.

묘청은 어이없이 죽었지만, 반란은 그후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진압군은 중·좌·우·전·후의 5군으로 나누어 평양성을 완전 포위하였으나, 반란군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크게 고전하였다. 그러나 포위당한 평양성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1136년 2월 진압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미 식량도 사기도 떨어진 반란군은 진압군이 성으로 진입하자, 도망가기에 이르고 반란군의 대장인 조광 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반란은 끝났다.

 평가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분명하다. 조선 말 일제 강점기 초기에 활동했던 신채호는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묘청의 난을 높이 평가한다. 묘청의 난이 성공했으면 조선사가 독립적 진취적으로 발전했으리라고 한탄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묘청의 난은 개경 귀족 세력과 그들의 권력 독점에 반발한 지방 세력(서경) 간에 권력투쟁일 뿐이며, 금국정벌론 등은 단지 명분뿐이라는 것이다.

 신채호의 평가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서 한국 고유의 낭가사상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좌절로 단절되었다고 하였다. 신채호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대하여 "서경 전역(戰域)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사(王師 : 김부식)가 반적(反賊)을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의 관찰이다. 실상은 이 전역이 낭(郎)·불(佛) 양가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이 전역에서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의 역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라고 하였다.

 반론

묘청이 주장한 금국정벌론이 현실성이 없다는 평가다. 식민 치하에 있던 신채호가 묘청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금국 정벌이라는 주장 때문이며, 조선의 독립 의지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민족 자주적인 입장에 선 사례를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 신채호의 기대와 달리 묘청 세력의 금국 정벌 주장은 실현은 거의 힘들었으며, 기병강국이던 금나라를 보병 위주의 고려군이 공격하여 성과를 내기는 힘들다고 주장했다. 방어자 입장에서는 전통력으로 산성 중심으로 적 기병대의 충격력과 기동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방어가 가능했으나, 만주로 공격을 하게 된다면 우수한 기병대가 절대 부족했던 고려가 만주 일대의 평원에서 치러지는 전투에서는 절대 불리할 것이란 주장이다.

물론 인종 전대인 예종윤관이 기병으로 여진 정벌을 단행해 동북 9성을 축성하는 성과를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에도 고려의 국력을 다 쏟아부어 동북 9성을 쌓았지만 얼마 뒤에는 고스란히 되돌려줘야 했다. 윤관의 여진 정벌은 10배가 넘는 병력을 동원해 겨우 이긴 싸움이었고, 예종의 선대인 숙종부터 기병 양성에 노력한 끝에 겨우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입장은 달라졌다. 요를 멸망시키고, 북송을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여진족의 금은 상대가 누구라도 전쟁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금을 정벌한다는 정책은 전혀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묘청에 대한 비판

묘청은 간신이란 비판도 있다. 경과에서 보았듯, 자신의 군대마저 제대로 조직하지 못한 묘청에게 금국정벌론은 일종의 여론호도책이며, 묘청이 권력을 얻는 방식이나 세력을 규합하는 방법은 전형적인 간신의 방법이었다고 비판한다. 묘청과 정지상 등이 원했던 것은 단지 개경 귀족 세력이 독점한 권력을 서경세력이 차지하는 것뿐이라는 비판이다.

사실 서경과 개경은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2대 도시였다. 서경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 태조가 중요시하게 여긴 장소였으나, 3대 광종 이후 고려 조정은 개경 귀족 세력이 장악하게 되고, 이에 불만을 품은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이 마침 이자겸과 척준경의 난으로 기댈 곳을 찾던 인종에게 묘청과 도참설, 그리고 풍수지리설을 앞세워 권력을 자신들의 것으로 하고자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묘청 일파가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서경으로 수도 이전이 핵심이었다. 기득권 세력인 개경 문벌 귀족 세력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벗어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천도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풍수지리설과 금국 정벌이었다. 인종 역시 이자겸의 난 이후 문벌 귀족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고, 기득권 세력이 포진한 개경을 벗어나고자 했다. 이렇게 양자 간에 이해와 맞아 떨어져 일어난 것이 서경 천도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개경 귀족 세력은 당연히 천도운동을 강력히 반대했다. 이 운동이 성공하면 당연히 자신들의 권력과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 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고생한 것은 백성들이었다.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의 권력투쟁은 백성들에게는 다른 나라 얘기일 뿐이었으나, 그들이 일으킨 대규모 공사와 전쟁에 희생된 것은 백성들이었다. <고려사>에는 묘청이 엄동설한에 공사 독촉을 심하게 해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고 당시의 신궁 공사 상황을 전한다. 그러나 농업이 생산의 근간이었던 당시 공역 동원은 농번기가 아니라 농한기, 곧 겨울에 하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고려사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책이므로, 묘청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영향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 고려사회는 표면상 평온을 되찾았으나, 그 반란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서경의 권력구조상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서경세력은 개경의 문신 귀족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여왔는데, 서경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세력은 더욱 득세하게 되어 왕권마저 능멸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자겸의 난을 극복했던 것을 계기로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할 수 있었던 기회를 인종은 인재 기용의 실패로 놓쳤던 것이다. 결국 뒤이어 왕위에 오른 의종은 무신란으로 인해 정상적인 정치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르게 된다. 인재 기용의 실패로 왕권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 문신 귀족사회가 안고 있던 정치적·사회경제적인 모순과 폐단은 뒤에 무신정변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 : [기타] 자료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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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묘청의 난은 성격이 자주적이고, 주체적이고, 금에대핸 정복적이죠, 그리고 고구려의 영토를 수복하려고 하는것도 있고요, 이걸 난이라고 부르는게 많던데, 운동이라 봐야죠

 

척준경이 나대자 정지상이 조졌는데, 정지상은 문신이면서 서경출신이고, 묘청은 서경출신의 승려입니다, 이 사람들이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나도는 천도설을 인종에게 제의해서, 인종이 대화궁을 짓고 자주 행차합니다,

개경문벌귀족(김부식중심)이 반발하면서 일이 뜻대로 안되자, 묘청은 거병을 하는데 1년만에 끝나요

 

신채호 선생님은 이 사건을 고려조선 1천년역사에 제일중요한 사건이라고 하네요, 근데 군대를 일으키는 것과 금을 정벌하려고 하는 그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1人입니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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