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 국사 수행평가입니다(내공100)

중3 국사 수행평가입니다(내공100)

작성일 2008.05.26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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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6월 2째주까지 조사해야하는 숙제인데요

좀 도와주세요

 

1. 세도정치

2. 개화, 개항(강화도 조약 같은거)

3. 척사 (척사, 개화대립 등)

4. 통상 수교과정(신미, 병인양요 등)

5. 동학 농민운동

 

이렇게 5가지를 조사하는건데

중요한건

예를들어 통상 수교과정을 조사해서 병인양요를 찾으셨다면

병인양요에 대해 알 수 있는대로 조사하는 것 입니다.

제가 웹 서핑이 조금 딸려서 그러는데 도와주세요 (ㅠ_ㅠ)

 

(내공 냠냠 ㄲㅈ)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세도정치]

1. 세도 정치의 의미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비정상적인 정치형태

세도 정치란 원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정치’라는 의미였으나, 실제로는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에 의해 특정 집안과 그 추종 세력이 전권을 행사하는 권력 형태였다. 조선 왕조 시기에는 개혁 군주인 정조의 사후에 권력을 장악한 안동 김씨 일파와 헌종 때 잠깐 득세한 풍양 조씨 일파의 정치를 말한다.

 

2. 세도 정치의 시기

순조, 헌종, 철종 의 3대 60여년간

정조의 사후에 12세의 나이로 즉위한 순조(재위 기간 1800~1834)부터 시작하여 헌종이 후사가 없이 돌아가신 후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즉위하게 된 철종(재위기간 1849~1863)에 이르기 까지 60여년간 헌종(재위 기간 1834~1849) 때 15년 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안동 김씨 일가가 권력을 장악하여, 정조가 규장각을  통하여 양성한 인물들을 몰아내고, 정조가 양성한 군대인 장용영을 혁파하였다.


 

3. 세도 가문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이 대표적임

(1)순조[1800~1834] - 안동 김씨(순원왕후-김조순의 딸)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정조의 유탁을 받은 김조순이 영조의 계비이며 사 도세자 죽임의 주역인 김귀주의 누이이기도 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협조하면서 그의 딸을 순조의 비로 들이는 데 성공한다. 1804년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1805년 세상을 뜨자 이때부터 안동 김씨가 본격적인 척족 세도를 시작하게 된다. 김조순은 본래 정조의 신임을 받던 시파이지만 벽파 정권에 협조하면서 겉으로는 전혀 당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모난 짓을 하지 않았다. 정순왕후가 죽자 정순왕후 편에서 세도를 휘둘렀던 벽파 일당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힘을 쓰게 된다. 여기에는 안동 김씨 이외에 시파의 대가인 남양 홍씨, 풍 양 조씨, 여흥 민씨, 동래 정씨, 나주 박씨 등이 제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으로 풍 양 조씨 만영의 딸이 간택되는데 효명세자가 일찍 죽자 그 소생인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의 나이로 등극한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탓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정권을 잡아 여전히 안동 김씨 일문의 독재가 지속된다.

(2)헌종[1834~1849] - 풍양 조씨(신정왕후-헌종의 어머니, 조만영의 딸) 

한때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 일문이 정권에 접근했으나 김조근의 딸이 헌종의 비 로 간택 됨에 따라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그대로 이어진다.

(3)철종[1849~1863] - 안동 김씨(명순왕후-김문근의 딸)

그 이후 순원왕후의 근친인 김문근의 딸이 철종의 비로 간택됨에 따라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까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가 정국을 휘어 잡게 된다.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가 어찌나 드셌던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 외에는 못하는 일이 없다 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851년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은 철종을 보필한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국사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의 조카인 김병학이 대제학을 맡고 병국이 훈련대장을 맡았으며 병기가 좌찬성을 차지함으로써 조정을 장악한다.

[참고]나합(羅閤)
관찰사나 수령들에게는 반드시 합부인이 있어 뇌물을 챙겼다. 요즘 장관 부인이 직접 돈을 챙기다가 발각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첩을 시켜 돈을 먹었다. 한번 암행어사가 오는 날에는 일망타진, 합부인들이 감옥을 가득 메우기도 했는데, 곧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안동 김씨 우두머리 김좌근(金左根)에게도 합부인이 있었는데, 나주기생 출신이라 세상사람들이 나합(羅閤)이라 불렀다. 김좌근이 지방수령의 임면권을 혼자 거머쥐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나합에게 가서 뇌물을 바쳐야 그 액수 여하에 따라 발령이 났다. 그래서 나합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였다. 나합이 젊은 미남자를 보면 수령자리를 주고 비단을 많이 바치면 경기도 양주 수령으로 임명하였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하루는 김좌근이 집에 돌아와 나합에게 묻기를 『세상 사람들이 자네를 나합, 나합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였다. 나합이 받아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여자를 희롱하기를 합(蛤, 조개)이라 하지 않사옵니까. 그러니 저를 나합이라 할 때, 합은 조개합자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4. 세도 정치의 결과

세도가의 권력 독점 (왕권약화, 정치기강문란, 삼정의 문란)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세도 정치 시기에는 매관매직이 성하였으며, 권력이 일개 가문에 집중됨 에 따라서 중대 문제를 공론에 부치는 논의 구조가 사라졌고 언로가 막히며, 남인, 노론, 소론 등의 재야 세력과 지방 선비들을 권력에서 배제하여 사회 통합의 실패를 불렀고, 지방수령들은 돈으로 자리를 매수하였으므로 농민들에 대한 수탈이 극에 달하였다. 

(1)정치기강의 문란

 원인: 왕권의 약화로 세도가의 독주를 견제할 세력이 없음

 내용: 관직임명-매관매직 성행(공명첩-이름쓰는 난이 비어 있는 관직 임명장)

        과거시험-실력보다 부정에 의해 합격(대리시험, 문제유출, 시험답안 교체 등의 방법 동원)

모든 법도가 안동 김씨 일파에 의해 좌우되고 뇌물이 성행함은 물론이거니와 벼슬을 사고 파는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무관의 자제들은 활도 쏘아보지 않고 오로지 가문의 덕을 입어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다.

 결과 :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산 관리들은,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 재산을 불렸는데,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온갖 이름을 붙여 정해진 액수 이상을 거두어 들였다. 당시 농민들이 주로 부담한 세금은 농토에 부과된 전세, 군포, 봄에 관청의 곡식을 농민들에 게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이자를 붙여서 거두어 들이는 환곡, 이에 따라 양반 지주들은 환곡을 빌리는 것을 피하고, 가난한 농민들만 원치 않는 환곡을 떠맡아 높은 이자를 물어야 했다. 결국엔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착취로 그 유명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진주농민봉기'도 일어났다고 볼수 있다.

수령통제수단: 전최제도가 무용지물

이런 수령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전최라는 제도가 있었으니 전(殿)은 하, 최(最)는 상을 의미하였다. 즉 지방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觀察使)들이 1년에 두 번 관찰하에 있는 수령들의 치적을 조사하여 상·중·하로 성적을 매겨 중앙에 보고하였다. 말하자면 요즘의 대학에서 학점을 A·B·C로 매기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 전최제도가 무용지물이 되어 모두가 「최」로 매겨 잘했다고만 보고하니 하나마나한 제도가 되고 말았다. 이유는 뻔했다. 수령들이 관찰사에게 잘 봐달라고 뇌물을 바쳤고 관찰사는 뇌물을 받거나 일가친척이라는 이유로 그 성적을 「중」이하로 매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도에서는 올 에이(all A)학점이 나왔다. 수령들은 고을 백성들에게 온갖 세금을 과하기만 하면 위에 상납할 돈이 나왔으니 부정은 구조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전최제도가 잘 운영되지 않아서 드디어 암행어사(暗行御史)가 출두하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실효를 거두었으나 뒤에는 이 제도 또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2)삼정의 문란

 삼정이란?:당시 농민들이 부담하던 세금 (전세, 군포, 환곡)

 삼정의문란 : 뇌물로 관직을 산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드림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여 그것을 벌충했으며 이같은 수령의 부정에 편승한 아전들의 횡포 또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것이었다. 도학을 논해야 할 서원은 세도 정치의 외형적 인 지주로서 노론측 당론의 소굴이 되었으며 불법적인 수세권을 발동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왕권을 침해하는가 하면 관령보다 위세가 당당한 묵패로 향촌민에 대한 착취를 서슴지 않았다.

 환곡의 문란상

  환곡: 빈민을 구제하기위해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거두어들이는제도

  변질: 관청의 경비 마련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되면서 세금처럼 변질, 탐관오리의 토세질까지겹쳐 실제로는 고리대 구실

  결과 : 양반 지주들이 환곡 기피 (가난한 농민들만 높은 이자를 부담)

반세기에 걸쳤던 안동 김씨 시파계 일문의 독재는 세도 정치의 온갖 병폐를 전형적으로 드러내어 전국적으로 삼정 의 문란이 극심해졌고 잦은 민란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곧 세도 정권을 변질시키고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개화, 개항(강화도 조약)]

1. 개화의 의미

1876년의  강화조조약 이후부터 우리나라가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봉건적인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사회로 개혁되어 가던 시기.

 

2. 개항의 의미

특정한 항구를 열어 외국선박의 출입을 허용하는 일. 이러한 일반적 의미 이외에 역사적 의미는 쇄국 정책을 지양하여 외국과 국교를 맺고 통상 관계를 가지게 되는 역사 전개를 뜻한다.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을 취해 오던 조선이 개항하게 되는 것은 1876년(고종 13)에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서이다. 쇄국에서 개항으로의 전환은 역사적 필연의 결과로 이뤄졌다. 종래에는 조선의 개항에 대해 근대 일본의 무력적인 포함외교(砲艦外交)에 굴복한 것으로만 이해되었다. 즉, 외세에 의해 개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피동적인 역사의식이 주로 였다. 그러나 조선의 개항은 근대 일본의 무력 교섭이라는 외래적 계기와 더불어 민족사회 내에 자라고 있던 대외 개방의 내재적 계기가 작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3. 강화도조약의 빌미가 된 윤요호사건 -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 운양호사건]

[의미]

1875년(고종 12)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의 강화해협에 불법침입하여 포격을 가하고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한 사건.

[배경]

일본에서는 조선문제를 둘러싸고 정한론(征韓論)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대외적으로는 '탈아외교'(脫亞外交)의 일환이었던 서구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노력이 실패하면서 오는 실망과 좌절감에서, 대내적으로는 당시 일본 전국에 충만하고 있던 유신과 개혁에 대한 불평·불만에서 비롯되었다. 메이지[明治]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퇴진으로 야기된 무사계급과 국민의 감정을 무마하고 그 관심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1874년 타이완 침략을 단행했다.

이 당시 조선에서도 강경한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년 12월부터 고종의 친정과 이어 민씨척족정권의 집정이 시작되는 등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한반도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더구나 조선정부는 1874년 청(淸)나라로부터 일본이 장차 타이완을 침략한 것과 같이 한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경고가 담긴 자문(咨文)을 받고, 대원군의 심복으로 대일교섭을 담당한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 등을 처벌하고 양국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우호적인 태도를 일본 측에 전달했다.

 

4. 강화도조약

(1) 강화도 조약 체결 전후의 조선의 상황

- [조약체결전 조선 상황]국내에서도 개화세력들에 의한 문호개방의식이 자라고 있었고 민씨정권으로서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국과의 분쟁을 피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의 전통적인 외교노선에 대항한 박규수 둥의 개국노선이 관철된 결과이며, 이를 통해 조선의 변혁세력 개화파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정에서 한국 근대정치사의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 [조약체결후 조선 상황]이 조약에 규정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은 개항장을 통해서 일본인을 조선에 침투시키고, 여기에 조차지()를 확보하여 일본세력의 전초지로 삼고자 하였다. 아울러 치외법권을 설정하여 일본인 상인들의 불법적이고 방자스런 행동에 대해서 조선의 사법권()이 미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로써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 되었다. 이와 같은 불평등한 조약으로 하여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을 시작하게 되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는 반면에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에따라 러시아를 견제 하기 위해 미국과 수교하기 시작하여 독일, 프랑스, 영국 등 많은 나라와 수교를 하게 되어 이들나라에게 우리나라에 매장된 각종 지하자원을 강탈 당했고, 각종 이권들을 이들나라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2) 강화도 조약

공식 명칭은 조일수호조약이며,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이미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에 왕정복고를 통고하는 한편,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를 외국사무국보(外國事務局輔)로 임명하여 조선에 대한 국교의 재개를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왔으나 조선은 서식과 직함이 다르다 하여 국서의 접수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생겨난 사족(士族)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고, 또 구미 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다른 나라의 문호를 개방시키려 했으며 조선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개화세력들에 의한 문호개방의식이 자라고 있었고 민씨정권으로서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국과의 분쟁을 피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청국도 조선에 미국·프랑스와의 국교수립을 권고하고 일본의 대만정벌 소식을 접하고는 조선의 대일본정책의 전환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세에 편승한 일본은 부산항에서 함포시위를 벌여 조야에 충격을 준 후, 강화도에서 운요호사건을 유발함으로써 마침내 1876년 2월 27일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이에 12개조로 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3) 강화도 조약의 주요 내용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5조, 조선은 부산 이외의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용한다. 제7조, 조선은 일본의 해안측량을 허용한다. 제10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영·일조약(1858)을 모방한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일본에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개방하고(제5조) 치외법권을 인정했으며(제10조), 일본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했다(통상장정).

 

 

 

[척사 (위정척사, 개화대립)]

1. 위정척사운동의 배경
19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는 전통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에서 대외적으로는 서세동점으로 표현되는 서구 열강의 도전과 내부적으로는 홍경래의 난 이후 거듭된 민란으로 봉건적 수탈제도와 신분제도 등의 변혁 요구로 민중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위정척사운동은 대내외적 도전들의 극복 방안으로 대두 되었다.
(1) 내부적 환경 : 양반 관료 정치가 더욱 타락하여 세도 정치로 이어졌다. 정치가 국왕 외척의 손아귀에서 좌우되었으며, 관직을 매매하여 탐욕스런 관리들이 활개쳤다. 삼정(전정, 군정, 환곡)은 탐관오리들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됨으로써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이에 민중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양반들의 부당한 지배에 저항하였다. 그 대표적 사례가 1862년의 임술농민항쟁이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국 70여 개 지방에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2) 외부적 환경 : 자본주의 강대국들의 침략적 접근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에 들어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자본주의는 세계적 규모로 발전하여, 원료 공급 기지와 상품 시장으로서 식민지를 필요로 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850년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와 동남 아시아 일대를 집어삼켰고, 1840년 영국의 아편전쟁 승리와 1860년 영&프연합군의 북경 함락 이후로는 중국을 야금야금 먹어들어 갔다. 중국이 '종이 호랑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미국과 러시아 또한 중국에 진출하였다. 이러한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은 조선에 큰 파문을 일으켜 위기감과 내부 단결을 강화시켰다. 통상 거부 정책은 더욱 굳세어져서 각지에 척화비가 세워지고 유림들의 척사 운동이 전국으로 번져갔다. 미국과 프랑스가 조선의 저항에 대하여 쉽사리 물러선 것은, 자기 나라의 문제나 다른 지역의 식민지를 경영하는 이유로 조선에 적극 진출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 위정척사운동의 발전
위정척사란 정학(정도)을 지키고 사학(이단)을 물리친다는 말로써 한국 역사상 고려말 불교를 배척하면서 최초로 나타났으며 위정척사사상은 조선왕조의 성립과 더불어 주자학이 그 정통사상으로 정착되면서 이념적으로 형성되었다. 개화기의 위정척사사상은 조선 후기 천주교의 전래를 계기로 서양 이질 문화의 도전에 의한 위기 의식 속에서 대두되어, 병인&신미양요기에 서양의 무력침략에 대한 대응 의식 속에서 정착 되었으며 이항로와 기정진 등에 그 사상적인 원류를 두고 특히 이항로의 문인 김평묵, 유중교, 최익현, 유인석 등(화서학파)와 기정진의 문도인 기우만(노사학파)에 의해 계승 및 발전 되었다

3. 개화와 척사의 대립

(1) 개화파 : 개화 사상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적인 민족 국가를 확립하려고 했던 움직임이다. 흥선대원군의 퇴진과 강화도 조약 이후 온건개화파는 민씨척족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개화정책은 미진하여 강경개화파들의 반발과 불만을 샀다. 이에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주도권을 쥐기 위하여 강경개화파를 후원하였으며, 이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대부분 사형당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남은 세력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총리대신을 지닌 김홍집 등을 중심으로 개혁정부를 세웠으나, 외세의 개입과 고종 황제의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후에 개화파는 독립협회로 집결하였으나 독립협회가 해산되면서 친일, 친러세력에 포섭되어 겉도는 신세가 된다. 일부는 친일민족반역자로 전락하게 된다.

(2)위정척사파 : 개화파를 많은 유생들은 서양 여러나라와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고 그들과 접촉하기를 꺼려했다. 우리고유의 유교문화와 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위정척사운도을 일으킨다. 위정척사란 바른것을 지키고 그릇된 것을 배척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바른 것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유교 문화를 이르고, 그릇 된 것은 서양의 문화와 사상을 가리킨다.

 

[통상 수교과정(신미, 병인양요 등)]

1. 병인양요

(1) 병인양요의 의미 : 1866년(고종 3) 프랑스가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2) 배경과 과정 : 1866년 1월초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때 탄압을 피하여 탈출했던 3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리델이 7월 청나라의 톈진[天津]으로 탈출해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리고 이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1846, 1847년 2차례 조선을 침략했다가 실패했던 프랑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데, 프랑스의 실제 속셈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는 데 있었다.

같은 해 9월 15일 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왔다.  강화를 점령한 로즈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조선인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속히 관리를 자신에게 보내 통상조약을 맺게 하라고 조선 정부를 협박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경하·이용희·양헌수를 각각 대장·중군·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를 수복했다. 9월 20일 문수산성에서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0월 1일 밤 양헌수가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잠복하여 10월 3일 정족산성을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군은 전사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조선군의 정족산성 승리는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0월 5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대량의 서적·무기·금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이 사건은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2. 신미양요

(1) 신미양요의 의미 : 1871년(고종 8) 미국 함대가 조선에게 통상조약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를 침략한 사건.

(2) 배경과 과정 : 조선과 미국은 1855(철종 6), 1865(고종 2), 1866년에 미국 배가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 영일연해, 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3차례의 접촉이 있었는데,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1866년 7월 평양경내의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고, 청국정부에 사건의 조사를 의뢰했다. 미국 국무부는 조선과의 통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871년 조선측과의 교섭책임을 주청 특명전권공사 F. F. 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에게 조선원정을 지시했다. 그해 4월 23일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여 초지진에 상륙했으며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공격·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이 격전에서 조선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등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劉禮俊) 등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로 퇴각할 것이라 생각해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 : 1866년(고종 3) 8월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면서 대동강으로 올라와 해적질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불태워진 사건.

 

 

 

[동학 농민운동]

1. 동학농민운동의 의미

1894년(고종 31) 반봉건(反封建)·반침략(反侵略)의 기치하에 조선 봉건사회해체기의 제문제를 변혁하려 했던 농민들의 사회개혁운동. 동학의 종교조직을 이용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개혁지도자를 중심으로 농민·도시민·소상인·몰락양반·이서 등 봉건사회 해체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반제·반봉건 근대화운동이었다. 1894년 농민전쟁·동학난·동학 혁명·동학혁명운동·동학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2. 동학농민운동의 사회경제적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봉건사회는 농업생산력 및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사회는 지주·부농·소농·빈농·임노동자라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고 있었다 (→ 지주전호제). 특히 지주제의 모순과 봉건적 수취체제의 제반 모순에 따라 직접생산자인 농민에게 부담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860년대부터 군현을 단위로 한 농민항쟁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농민전쟁의 진원지인 호남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에 의한 봉건적 수탈이 심하고, 강경·법성포·줄포·논산포 등의 포구·개항장은 대일 미곡수출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미곡무역에 편승한 지주층의 지주제 강화로 인해 소농·빈농층이 몰락했으며, 농촌사회 내부의 분화 및 계급대립이 전면에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교세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봉건사회를 변혁하려는 일군의 혁명적 들과 결합하게 되었다.

동학(東學)은 몰락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을 통하여 만민평등의 지상천국을 건설하려 했다. 동학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는 관념적 차원에 머물렀으나 만민평등의 원리를 기반으로 한 반봉건 의식과 척왜양(斥倭洋)이라는 반침략의 민족 논리를 바탕으로 깔고 있었다. 동학교단은 1892년 11월 삼례집회와 1893년 3월 보은집회에서 교조신원운동이라는 종교적 운동을 벌였다. 이때 전봉준 등 남접세력은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민족적·계급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혁명을 기도했다. 이들은 교조신원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금구집회(1893. 3)를 소집, '척왜척양'(斥倭斥洋)과 '수령의 불법 침학 반대'를 외치면서 사회혁명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3. 동학농민운동과정(1차 농민전쟁)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들이 일단 해산한 후, 전봉준은 무장(茂長)으로 가서 3월 초순부터 손화중과 김개남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했다. 약 15일 동안 4,000여 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전봉준은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첫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했다. 이어 무장·고창·흥덕·태인·정읍·김제·금구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백산에 집결했다. 3월 25일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여 농민군을 정비했다. 연합부대의 대장에는 전봉준이 추대되고, 손화중과 김개남이 부대장이 되었다. 이들은 서울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타도하고 외래침략자들을 내쫓을 것을 제시하며 고통받는 민중과 봉건통치지배의 하수인인 아전까지도 힘을 합해 일어나자는 내용의 격문을 전국에 띄웠다. 백산에서 대오를 편성한 농민군은 4월 7일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격파한 후, 정부군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 등지를 공략했다. 진격하는 곳마다 관청을 습격하여 감옥에 갇힌 백성들을 석방하고 무기를 압수하였으며, 탐학관리를 비롯한 양반·지주·부호들을 징계하고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정부는 4월 2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병을 현지로 파견했다. 그러나 장성의 황룡시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병의 선발대는 농민군에게 격파당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장성을 떠나 북상길에 올라 원평·정읍을 거쳐 4월 27일(양력 5. 31) 전주성에 입성했다.

 

4. 동학농민운동과정(2차 농민전쟁)

1894년 6월 21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는 한편,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시켰다. 이어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봉건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했으므로 농민군의 지도부는 군량과 군기를 정비하면서 삼례에 투쟁본부를 두고 재봉기를 확정했다. 전봉준은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란 이름으로 반침략 항일투쟁에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거병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하여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 반침략투쟁이 농민군의 주요한 과제로 되었다. 그리고 전봉준은 종전 제1차 봉기 때 반대하던 입장을 지녔던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했다. 9월 하순 논산에 모인 남접, 북접 연합군은 공주를 향해 북상을 개시했다. 당시 공주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논산전투에서도 농민군은 다시 패퇴했고, 금구·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핵심부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황해도·경상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양반·부호·관료·이서층이 조직한 민보군에 의해 철저히 괴멸되었다. 민보군·수성군들은 도주한 농민군의 집에 방화하고, 귀순한 동학도들까지도 체포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농민군세력을 초토화했다.

 

4.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농민항쟁을 통한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을 바탕으로,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제·반봉건투쟁이었으며, 이른바 봉건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노선의 대결이었다. 농민군이 지향한 방향은 봉건적인 생산관계와 수탈을 제거하고 소상품생산자로서의 자립 발전을 보장해주는 농민적 토지소유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지향은 일련의 투쟁과정을 통하여 혁명의 방향으로 다듬어지고 발전해갔다. 탐관오리의 제거, 민씨정권의 타도와 봉건적 폐단의 시정, 봉건제도의 폐지, 친일정권의 타도와 식민지화의 저지로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시켜나갔다. 특히 제2차 농민전쟁을 통하여 일본 침략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제·반봉건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당시 갑오정권과 일본세력 및 보수유생들에 의해 철저히 압살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농민전쟁은 투쟁과정을 통하여 농민대중에게 봉건지배층과 일본 침략세력의 본질을 알게 했으며, 그들을 민족적·계급적으로 더욱 각성시키는 한편 광범한 대중을 반제·반봉건 투쟁세력으로 강화시켰다.→

 

[참고]

http://cafe.naver.com/hhistory.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46

http://club.cyworld.com/club/main/club_main.asp?club_id=52421078

http://www.on-asia.org/?mid=writer4&page=2&document_srl=5326

http://blog.daum.net/phoenix107/15453595?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phoenix107%2F15453595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1g1666a

http://mtcha.com.ne.kr/korea-term/sosun/term25-ganghoadojoyag.htm

조일수호조규의 역사적 위치, 윤소영 저, 한일관계사연구 제18집, 2003. 4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9b3072a

http://100.empas.com/dicsearch/pentry.html?i=110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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