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공60검]임진왜란당시 각 성과 지도에 대해

[내공60검]임진왜란당시 각 성과 지도에 대해

작성일 2008.03.16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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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가 조선에 대한 게임을 만들고 있거든요 ;;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했어요 그런데 제가 성과 산성등 이름과 지도를 몰라서

좀 올려주세요 ㅠㅠ 되도록이면 거기에서 누가 싸웠나도 좀 알려주세요

또 사명대사가 싸운 무슨무슨 산등 산도좀 알려주시고요 ㅠㅠ 정말 부탁입니다.

 

내공 60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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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하지만 답변 드리겟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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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ㅅ 냠냠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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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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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일본군의 부산침공
날짜 : 1592년 4월 13일 – 1598년 11월 19일
장소 : 한반도
결과 : 조선과 동맹군의 승리
교전국
조선,
명나라
일본
지휘관
조선

선조
광해군
이순신†,
권율,
유성룡,
이억기†,
원균†,
김명원,
이일,
신립†,
곽재우,
김시민†

명나라
이여송† (pr.),
이여백,
조승훈
마귀 (pr.),
천만리,
유정,
양원,
진린,
등자룡
심유경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야키,
모리 테루모토,
우키다 히데이에,
구키 요시타카,
소 요시토시,
고바야카와 타카카게,
와키사카 야스하루,
시마즈 요시히로,
구루지마 미치후사†

병력
조선

340,000,
(전쟁 초반)
약 22,600여명의 지원군 포함
명나라
1차 원병 (1592–1593)
43,000+[1]
2차 원병 (1597–1598)
100,000[2]

일본

1차 침입 (1592–1593)
약 160,000-235,000
2차 침입 (1597–1598)
약 140,000

피해 상황
조선

군인 합계 300,000[3]
명나라
군인 합계 30,000[4[5]

일본

군인 합계 130,000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에서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공격함으로서 시작한 전쟁을 말한다. 왜란이라고 통상적으로 부르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조선과 일본 양국 간의 전쟁이므로 조일전쟁, 또는 정유재란과 구분하여 제1차 조일전쟁으로 부르는 시도도 있다. 일본은 초반에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이순신 및 권율 등의 명장들과 각 지방의 조선 백성들의 조직적 자발적 저항에 부딪혀 7년만에 일본이 패하여 완전한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대대적 침략 공세를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구분해서 부른다. 한편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 부르며, 두 차례의 전쟁을 각각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게이초노에키(慶長の役)’라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 북한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위기이자 극복이였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였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 시대는 전기와 중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목차
[보이기]
1 원인
2 각 국의 정치적 상황 및 군사력
2.1 조선의 정세
2.1.1 조선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2.1.2 조선의 대외관계
2.1.2.1 일본과의 관계
2.1.2.2 명과의 관계
2.1.3 조선의 군사력
2.1.3.1 조선 초기의 국방 체계
2.1.3.2 국방력의 와해
2.2 일본의 정세
2.2.1 센고쿠 시대 통일
2.2.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경제 개혁
2.2.3 일본의 군사력
2.3 명의 정세
2.3.1 명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2.3.2 명의 대외 관계
2.3.2.1 조선과의 관계
2.3.2.2 일본과의 관계
2.3.3 명의 군사력
3 경과
3.1 제1차 침략
3.2 제2차 침략
4 전쟁 결과가 3국에 미친 영향
4.1 조선에 끼친 영향
5 당시 사용된 무기
5.1 조선(한국)
5.2 왜
5.3 양국 전함 비교
5.3.1 조선
5.3.2 왜
6 주요 인물
6.1 조선 (한국)
6.2 왜 (일본)
6.3 명 (중국)
7 같이 보기
8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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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원인
1590년 일본 열도의 정권을 잡고 오랜 전국 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간파쿠(關白)가 되어 그의 야망을 동아시아 정복으로 확장하려 했다. 오랜 전국 시대를 끝냈지만 아직 산재해 있던 일본 내의 불평 세력의 관심을 외부로 향하려는 의도로 1591년 명나라를 정복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는 주장을 사신 현소(玄蘇) 등을 보내 와서 ‘명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조선에서 길을 인도해 달라.’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일본은 항상 명나라가 자신들의 조공(朝貢)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저지른 일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대의(大義)로 준엄하게 거절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대대적으로 조선을 향해 침입하였다.[6]


[편집] 각 국의 정치적 상황 및 군사력

[편집] 조선의 정세

[편집] 조선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조선 왕조는 개국 후 100여년 동안 창업을 주도했던 개국공신과 이후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 집단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구파는 정권이 안정됨에 따라 임꺽정 등의 의적들이 등장할 만큼 민심을 저버리는 등 그 부패가 심해졌고, 이런 변화 속에서 이른바 사림파 세력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사회 질서의 재정립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 결과 신진 사림 세력과 기존의 훈구파 세력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러한 마찰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들을 삼사의 청요직에 등용하면서 표면화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반세기 동안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 신진 세력은 큰 타격을 받고 정국은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지면서 권문세도가에 의한 농장의 확대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 제도도 문란해져서 민생이 도탄에 빠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의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조정은 왕위 계승을 둘러썬 왕실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인 을사사화가 발생하였으며 사림 역시 내부 분쟁으로 인해 상호 대립하는 새로운 정쟁의 양상이 나타났다.

그 후 명종이 모후의 대리 정치에서 벗어나 직접 왕권을 행사하게 되자 외척 세력이 정치의 중심에서 제외되고 명종의 개혁 의지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신진 사림 세력이 국정 운영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신진 사림 세력은 선조 연간에 이르러 다시 동인,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함으로써 국정의 효율적 운용에 장애를 끼쳤다.


[편집] 조선의 대외관계

[편집] 일본과의 관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를 기본적으로 교린(交隣) 정책을 유지하였다. 고려 말기부터 번번히 왜구는 한반도의 해안 지대를 침범, 약탈하였다. 이에 조선 때에 와서는 수군의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성능이 뛰어난 대포와 전함 등을 대량 생산하는 등 왜구 소탕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약탈이 어려워진 일본이 평화적인 무역 관계를 요청해 오자, 조선은 부산, 울산 등 일부 항구만을 제한적으로 개방하는 형태의 무역을 허용해 주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왜구의 약탈이 계속되자 이를 강력히 응징하기 위하여 세종대왕은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 섬을 공격하였다.


[편집] 명과의 관계
조선과 명나라 간의 관계는 ‘책봉-조공 체제’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조선 전기에는 기본적으로 책봉-조공 체제에 기반한 사대 관계를 바탕으로 조선이 명나라를 섬기는 상황이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는 형식적으로 군신·상하 관계가 성립되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써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국가 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구체적으로는 명나라 황제에 의한 조선 국왕 책봉의 수용, 명나라 연호의 사용, 정례적인 조공 등 제후로서의 의무 등이 부과되었다.

하지만 명나라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은 전혀 없었으며, 초기에는 태조의 조선 국왕 인정 문제와 여진족 문제, 조공 문제로 알력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태조와 정도전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차원에서 요동 정벌을 계획하면서 명나라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15세기에는 이처럼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표방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명나라와 대결을 시도할 정도로 주체적 움직임이 있었으나 16세기에는 화이론을 옹호하는 사림파가 전면에 등장하여 명나라에 대한 사대가 문화적 동질 의식과 춘추대의에 바탕을 두고 이해와 시세를 초월해서 수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면서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는 15세기 이래의 기조를 유지하였다.

평화적이고 안정적인 양국 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조선은 명나라와 약속한 ‘1년 3공’의 규정을 넘어서까지 명나라와의 교섭에 적극성을 보였고 그를 통해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는데 열심이었다. 16세기 이후 양국 관계에서 중요해진 측면은 경제적 관계였다. 15세기 이래 조선은 책봉-조공체제 아래 규정된 당초의 조공 부담을 줄이는데 주력하여 금과 은을 조공 품목에서 제외받는 성과를 얻었다.

양국 사이의 통상은 부진한 상황이었으나 15세기 말부터 조선 내부의 농업 경제력 향상과 함께 중국산 견직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명나라로부터 대량의 비단과 원사가 유입되었다.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무역 관계의 진전은 조선의 은광 개발과 일본으로부터의 은 유입을 가속화시켰으며 궁극에는 은을 매개로 조·명·일 삼국 사이의 무역 구조가 정착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처럼 16세기까지 양국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인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요동 정벌 문제, 여진족 문제 등 일부 현안을 놓고서 상당한 갈등을 겪었다. 조선은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사대 관계를 받아들였지만, 명나라의 압력에 의해 자주성이 침해되거나 국익이 심하게 손상받는 상황에 처할 경우엔 명나라에 대한 저항도 불사하는 양면적 입장을 보여던 것이다.

결국 명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는 왕권의 안정과 국제적 지위 확보를 위한 자주적인 실리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기 위한 문화 외교인 동시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편집] 조선의 군사력

[편집] 조선 초기의 국방 체계
조선의 기본적인 병역 원칙은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제로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 이하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正男 : 장정)은 누구에게나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이 경우 정남은 정병(正兵 : 현역 군인)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保人 : 보충역)으로서 실역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 하는 두 가지 중의 한 가지로 구분되었다.

이와 같은 원칙을 전제로 하여 군은 크게 중앙군인 경군(京軍)과 지방군인 향군(鄕軍)으로 구분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태조 3년(1394)부터 세조 초년까지 약 60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의 개혁을 거쳐 5위 체제(의흥위(義興衛), 용양위(龍?衛), 호분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위(忠武衛))의 편제가 확립되었다.

5위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군은 의무병인 정병을 비롯하여 시험으로 선발된 정예부대와 왕족, 공신 및 고급관료들의 자제들로 편성된 특수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지방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의 두 가지 병종으로 구분되어 국방상 요지인 영(營), 진(鎭)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하여 도성 수비의 임무를 담당하였다.

영진군은 주로 해안 및 북방 변경 지대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내륙 지방에는 거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병력 부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향리, 관노, 무직 백성, 공노비 등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잡색군(雜色軍)을 편성하여 해당 지역의 수령 지휘하에 두었다.

지방군의 방어 개념은 각 도에 주진으로서 병영(병마절도사가 지휘)과 수영(수군절도사가 지휘)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각 처의 요충지에 거진(첨절제사가 지휘), 진(동첨절제사가 지휘) 등 대소의 진영을 두어 유사시에 주진 진장의 지휘하에 지역 방어에 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진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는 신속한 병력 집결이 이루어지지지 않는 취약점이 노출되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세조 1년에 거진을 독립된 방어 편성 단위로 하고 그 아래에 군, 현의 병력으로 제진을 관할하게 하는 진관 체제가 답변확정되었다.

그 후 을묘왜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조선의 군사적 환경이 급변하면서부터 근 1백여년 동안 고수해 오던 진관 체제는 변모를 가져와 제승방략의 분군법으로 방위 체제가 전환되었다. 분군법은 지역 수령들에게 사전에 작전 지역을 배정해 주고 유사시에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진관지역에서 작전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작전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유사시 최전방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갖추고 있는 반면에 작전 지역에 집결한 병력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경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 지휘를 받아야 하는 시간상의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최전방에 대한 과도한 병력 집중으로 말미암아 후방 지역이 공백화 될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위 체제는 일본과 여진족 등 야만족들이 소규모의 노략질을 자행하던 시기에 방어 병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전란을 겪지 않은 조선 조정으로서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편집] 국방력의 와해
조선왕조는 건국 후 2백여 년간 이렇다 할 외환을 겪지 않은 가운데 평화가 계속됨과 동시에 문치를 국가 정책의 중심으로 삼음으로써 국가의 기풍을 문약에 빠짐과 동시에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국방체제도 점차로 이완되기에 이르렀다. 국방의식이 희박해지고 군정이 이완되어 감에 따라 각종 국방 제도도 그 자체가 형식화되어 남해안과 북방의 변경 지역에서 근근이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전국 각지에서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거나 대역인을 세우고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는 방군수포와 대역납포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미 병력은 장부상으로만 존재하였으며 군은 실제로 무력한 대역인으로만 편성되어 병력 부제 현상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 결국 임진전쟁을 치러야 할 선조 때에 와서는 경군(중앙군)과 향군(지방군) 모두 병부에 편제 상의 정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실병력은 거의 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편집] 일본의 정세

[편집] 센고쿠 시대 통일
1392년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전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봉건영주세력에 대한 쇼군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의 봉건영주인 슈교다이묘들이 사분오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1467년의 오닌의 난을 계기로 무로마치 막부가 몰락하고 그로부터 100여년 동안 군웅이 할거하는 센고쿠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지방의 신흥무사집단이 구 세력인 슈고다이묘 집단을 대신하여 자립 태세를 갖추어 전국대명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던 중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오다 노부나가가 출현하여 다수의 경쟁 세력을 굴복시키고 일본의 실질적 지배권을 장악함으로써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1582년 오다가 그의 부장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피살당하는 이변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실권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인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요토미는 아카치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오다의 유지를 계승하여 일본 통일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1583년 히데요시는 시바타 카쓰이에(柴田勝家)와 시즈가타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거의 수중에 넣었다. 같은 해 3월에는 수륙교통의 요지인 혼간사 자리에 장대한 오사카 성을 쌓기 시작했으며 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도 노부오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과 전쟁에 들어갔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보로 화의가 성립됨으로써 후방을 안정시킨 히데요시는 1585년 시코쿠를 평정하고 조정으로부터 간파쿠, 다음 해에는 다이죠 다이진에 임명되고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출신 성분이 미천한 히데요시는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고자 했다. 간파쿠가 된 히데요시는 천황으로부터 일본 전국의 지배권을 위임받았다고 칭하며, ‘소부지(墜無事, 전국의 평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이를 바탕으로 쟁란을 거듭하던 다이묘들에게 정전을 명령하고, 영토의 확정을 히데요시 자신에게 맡기도록 강요했다. 1587년에는 명령에 따르지 않던 규슈의 시마즈 씨를 정벌하고 1590년에는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켰으며 도후쿠의 다이묘를 복속시키면서 전국 통일을 완성했다.


[편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경제 개혁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는 곧 강력한 정치, 경제 개혁을 시작하였다. 도요토미 정권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검지(檢地)라는 토지 제도 개혁과 가타나가리(刀狩)라는 무기 몰수 정책이었다.

1591년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검지장과 구니에즈(지도)를 제출하게 하여 전국 통일을 과시했다. 검지장을 토대로 토지를 측량하고 수확고를 조사하여 전국의 생산력을 쌀로 환산하는 ‘고쿠다카(石高)제’를 실시하고 다이묘에게는 고쿠다카에 상응하는 군역을 농민에게는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고쿠다카에 합당하는 연공을 징수하였다.

가타나가리는 농민들에게서 무기를 몰수하고 농민의 신분을 명확히 하기 위해 1588년에 시행되었으며 1591년에는 ‘히토바라이(人掃)령’을 내려 신분상의 이동을 금지하고 사농공상의 신분을 확정하여 병농분리를 완성시켰다.


[편집] 일본의 군사력
15세기 중엽의 센고쿠 시대에 이르러서 전투의 양상이 대규모의 집단 보병 전술로 전화됨에 따라 전투의 주체도 소수의 특정한 영웅이 아닌 보병의 밀집 부대로 옮겨지게 되었다.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아시가루(足經)라는 경장비보병이 출현하여 전투의 승패를 갸름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16세기 중엽에 철포(조총)와 화약이 전래되면서부터 철포 부대인 철포조와 궁사 부대인 궁조로 편성되어 전투 시 공격의 주역을 맡았다.

당시의 전국 다이묘 세력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이와 같은 전술 변화를 이용하여 통일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1572년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군과의 전투에서 조총을 보유한 보병을 주력으로 다케다군의 기병을 격파하여 전술의 변화에 획기적인 전기를 열었다.

그 후 1582년에 이르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투 부대의 병종을 기병과 보병의 두 가지로 대별하고, 시대장(侍大將)의 지휘 하에 기병, 총병, 궁병, 창검병 등의 단위대를 편성한 후에 각조의 지휘관으로 기사, 보사 등을 두었다.

이 무렵의 일본군은 부대를 삼진 또는 사진으로 나누어서 단계적으로 공격을 수행하는 것을 기본적인 전벅으로 답변확정하고 있었다. 즉, 제 1진의 기병이 2개 대로 전개하여 포위 태세를 갖추면 제2진의 총병이 적의 정면에서 조총을 쏘면서 돌격을 감행하고 이어서 제3진의 궁병이 진격하면 제4진의 창검병이 뒤따라 돌진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비(非)전투 요원으로서는 소인(전령 업무), 하부(수송 업무), 선두 및 수주(순박운앙 업무), 대목부(감찰 업무), 의사, 승려 등이 전투 부대와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도요토미는 이와 같이 변모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1586년 무렵부터 대규모의 건조 계획을 추진하여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미 천여 척의 전함을 확호한 데에 이어서 종전 무렵에 이르러서는 3천여 척이라는 대규모의 선단을 보유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에는 서해, 남해, 산양, 산음 및 기내 이동의 일부 지역에 동원령을 내려서 33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 무렵의 일본군은 철포, 창, 궁시, 왜도 등 4가지의 개인 무기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주종 간의 단결력이 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실전 경험이 풍부하였기 때문에 전쟁에 있어서 탁월한 전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편집] 명의 정세

[편집] 명의 대략적인 정치적 상황
1368년 개국된 명나라는 15세기 초인 영락제 때에 이르러 그 국세를 크게 떨쳤으나 영락제가 죽은 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449년에 정통제가 몽골의 오이라트부를 친정하다가 도리어 패전하여 포로가 된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명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이 약화되었으며, 내부의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그 후, 16세기에 이르러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전국이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만큼 크게 동요하였고, 이 무렵부터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왜구 집단은 명나라의 변경 해안 지대를 휩쓸어 제국의 존망을 위협하였다.

이에 따라 명나라는 북쪽으로는 몽골족의 침입을, 남쪽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서 싸워야 하는 이른바 ‘북로남왜’의 우환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엇으며, 이러한 외부의 압력은 자연히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던 것이 만력제가 등극하면서부터 10년 간은 장거정(張居正) 같은 대정치가가 나타나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세정(稅政)을 일신하는 한편, 밖으로 몽골과 강화함으로써 북쪽 국경을 평온하게 하고 요동 섬서(陝西)를 개척하였으며, 남쪽에 반기를 든 이족(異族)을 평정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환관에게 맡겨 기강이 다시 문란해졌다. 명나라는 또한 서북변경 영하(寧夏)에서 일어난 몽골의 항장(降將) 보바이(知拜)의 반란과 귀주(貴州)지방의 토관(土官) 양응룡(楊應龍)의 난을 평정해야 하는 어려움과,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원군을 보내는 일 등으로 국력을 크게 소모하게 되었다.


[편집] 명의 대외 관계

[편집] 조선과의 관계
명나라는 1368년 건국 후 대내적으로는 전제왕정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자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형성해 나갔다. 명나라는 주변 나라들을 중화주의에 입각한 조공책봉체제로 편입시켰다. 조선은 왕권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국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본 등 이웃 나라들과 함께 명나라의 조공책봉체제를 받아들였다.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조선은 매년 서너 차례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해금정책을 취한 명나라와의 무역은 조공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다. 조공 무역은 명나라의 황제가 주변 국가의 왕을 임명하는 책봉의 대가로 해당 국가들은 조공을 통해 황제에게 헌상물을 바치는 형식이었는데, 조선으로부터 견직물과 고려인삼 등을 받으면 명나라에서는 그 대가로 고급 견직물과 자기, 서적, 약재 등을 주었다. 조공무역은 조선에게 더 이익이 많았는데, 이는 조공 횟수를 둘러싼 두 나라의 주장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명나라가 조선에게 3년 1공, 즉 3년에 1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한 반면, 조선은 거꾸로 명나라에게 1년 3공, 즉 1년에 3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했다. 조선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인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조공무역은 제후국에서 제국에게 일방적으로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제후국에서 조공을 가져와 바치면 제국에서는 그에 대해 사여를 내리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더 귀하고 많아야 한 것 또한 원칙이었다. 더불어 사절단의 체제비와 물품운반비를 명나라측에서 모두 부담하였다. 이는 상국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방도였다.


[편집]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는 일본의 조공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멀리 바다 건너 섬에 웅거해 있으면서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1404년 명나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10년에 한번씩 조공을 오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며, 칼을 가지고 오면 도둑으로 치부해 죄를 따진다는 조건을 붙였다. 무역 장소는 절강성의 영파(寧波) 지역으로 지정했다.

이렇게 제한을 가한 것은 유황, 구리, 칼 등 일본의 물품이 명나라에서 요긴한 것도 아닌 데다 천황이 아닌 영주들의 배가 주로 왔으며, 체류 경비를 부담하는 것도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그 뒤 인원을 300명으로 늘렸으며, 그런 대로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6세기 초반부터 일본의 규슈 지방 상인들이 명나라 복건성 쪽 항구에 드나들면서 은을 옷감과 교환하는 무역을 벌였다.

이 무렵 에스파냐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 와서 무역 행위를 하자 명나라에서는 이들을 몰아내면서 일본 상인들도 함께 쫓아냈다. 그래서 1547년 이후 일본의 조공선이 명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뒤 상인들은 아오먼(澳門, 마카오)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 결과 일본 상인들의 후원을 받는 왜구가 더 극성스럽게 해적질을 했던 것이다. 왜구는 명나라와 조선을 공격 목표로 삼아 횡행했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의 중개 무역을 통해 명나라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불편해 공식 무역의 길을 트려고 노력하면서 조선에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조선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정권을 잡은 후 명나라와 무역을 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편집] 명의 군사력
명나라는 개국 초부터 징병제와 모병제의 장점을 절충한 위소제도라는 군제를 채용했다. 위소의 최소 단위는 백호소로 정원은 병사 백명과 지휘관인 총기 2명, 소기 10명 등 총 112명이었다.

총기는 각각 소기 5명을 지휘하고, 소기는 각각 병사 10명을 지휘했다. 10개의 백호소로서 1개의 천호소를 구성하고, 5개의 천호소로서 1위를 구성한다. 유사시에는 위의 지휘관으로 참장, 유격장, 파총 등을 임명하고 중앙에서 파견되는 총병관이 이를 총괄 지휘하였으며, 1위의 병력규모는 5,600명이었다.

수 개의 위가 모여서 도지휘사사라는 군단을 형성하는데, 그 지휘관은 도지휘사이다. 여러 도지휘사사는 중앙의 오군도독부에 분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위소의 병사들은 평시에는 둔전 및 군사 훈련에 종사하면서 전시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전시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총병관의 지휘하에 전투임무를 수행하였다. 군단인 도지휘사사는 각 성 혹은 전략상 중요 지역에 소재하고 있었으므로 명대에는 13성의 도지휘사와 요동, 만전, 대령 등의 도지휘사사를 비롯하여 관할구역이 광대한 지역에는 행도지휘사사를 두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전반기까지 명나라는 전국에 16개 도지휘사사, 5개 행도지휘사사, 2개 유수사를 두고 여기에 소속된 493개의 위, 2,593개의 소가 있었으며, 도사에게 직속된 315개의 수어천호소가 있어 그 병력은 총 329만여 명에 달했다. 이 밖에도 황제의 친위군으로서 궁성의 수호를 담당하는 금의, 금오, 우림 등의 25위가 있어 그 병력 수가 15만여 명에 달했다.

명나라 군제의 근간인 위소제도의 경제적 기반은 군둔(軍屯)이었으며, 그에 대한 초기의 세금 부과는 매우 경미하엿으므로 위소제도의 운영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영락제 연간부터 군둔 관리 체제의 정비와 함께 둔전병의 부담이 가중되어 군둔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후 1449년의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위소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민병 모집을 통한 병력 보충이 이루어졌다.

이 민병은 북방의 몽골족과 동남 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정치 기강의 문란과 더불어 군의 기강이 해이해짐으로써 그 전투력이 약화되어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편집] 경과

[편집] 제1차 침략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쓰시마 도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할 것과 명나라 정복을 위해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쓰시마 도주는 명나라 정복을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말로 바꾸어 조선에 교섭을 해 왔으나 조선은 들어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4월 15만 명의 군대를 조선으로 파견해 침략하게 하였다.

일본군의 작전은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 길을 따라 북상하고, 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물밀듯이 북상해 오자 왕실과 조정은 서울을 떠나고 북쪽으로 피신하였다. 일본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으며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한반도 북부까지 쳐들어갔다.

숱한 싸움을 겪었던 일본군은 전쟁 경험이 풍부하였고 잘 훈련되고 조직되었다. 반면 조선군은 오랜 평화기를 누린 상태에서 군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실전 경험도 없었다. 조선이 전쟁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련한 대책은 하나같이 효과적이지 못한 것뿐이었다. 또한 병사들이 일본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탈영해버리는 사태도 빈번하였다.

무력한 조정과 관군을 대신하여 1592년 6월 이후 조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의병은 충의의 뜻을 강하게 지닌 선비와 전직 관료, 일본군의 침략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는 농민과 상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자신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진하여 전쟁에 참가한 이들은 사기가 높았고 향토지리에 밝은 이점이 있었다. 조선 조정은 비상대책으로 또 하나의 조정을 만들었는데 왕세자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하였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무기와 식량보급로,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려놓았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또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앞세워 일본 수군을 한산도 등지에서 싸우는 족족 쳐부수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보충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약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단숨에 뒤집는 원동력이 되었다. 육지에서는 김시민이 진주 대첩에서 분전하여 큰 승리를 거뒀고, 권율도 행주 대첩에서 크게 승리하여 일본군은 점점 조선군에 밀리게 되었다.

한편, 의주로 몸을 피신한 선조는 명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자국의 영토에까지 전쟁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한반도에서 적을 막는 것이 상책이라는 판단 아래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1593년 1월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서울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처음 3천여 명의 병력을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10만 명 정도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켰다.


[편집] 제2차 침략
일본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화의에 나섰다. 명군도 벽제관 전투에서의 참패를 겪고 난 후 자국의 이해를 우선시하여 종전을 원했으므로 화의교섭이 시작되었다. 조선은 삼국 중 가장 많은 피해를 입었으므로 화의에 결사반대하여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제도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의병부대를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군사력을 강화해나갔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가 왜성을 쌓고 대기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양측은 서로 자국이 유리한 입장에서 화의교섭을 하려 하였다. 일본은 한반도의 남부지방을 내줄 것, 감합무역을 부활할 것 등을 명나라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3년에 걸친 화의교섭은 결렬되었다. 남해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1597년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조선의 남부지방만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을 집중 공략하였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물리쳤고 일본 육군은 전라도 각 지역을 함락시키면서 방화, 약탈, 학살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은 전공을 증명하기 위하여 조선인들의 코나 귀를 베어 일본에 보냈고,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마구 잡아 노예상인에게 팔아넘겼다. 그러나 곧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직산 소사평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면서 북상을 저지하였고 잠시 파직 되었던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 하면서 일본군은 다시 남해안으로 물러났다. 일본군은 극심한 군량 부족 상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이를 극비에 부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일본군을 쫓아 대파하였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7년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편집] 전쟁 결과가 3국에 미친 영향

[편집] 조선에 끼친 영향
거듭된 전쟁으로 인한 농지의 황폐화, 국가질서의 문란과 더불어 관리와 토호들의 부정행위는 민중과 국가 재정을 모두 궁핍하게 만들었다. 전후 대책으로 실시된 군비확장과 시설복구에 지출이 계속 증가하자, 대대적인 토지 조사를 실시하였으나, 2번에 걸쳐 청나라가 침범해 왔기 때문에 농지를 전쟁 이전 수준으로까지 회복하는 데에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 농민에게는 과대한 부담이 강요되어 농민의 농지 이탈 현상이 증가하였다. 조정에서는 민생을 안정시키고 관리들의 부정을 방지하고자 조세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였다.

전쟁 중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던 문서들이 모두 불태워지고, 공명첩이 발행되면서 사회절서 유지의 근간인 신분제도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또 궁궐과 서원 등 중요한 건축물과 많은 서적, 미술품 등이 소실되거나 약탈되었다. 사상적으로는 전쟁 중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인물들을 숭배하는 풍조가 고양된 반면, 일본군에 의한 피해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인을 더욱 멸시하고 적대시하는 경향이 깊어졌다.

 

[편집] 당시 사용된 무기

[편집] 조선(한국)

  • 각궁
  • 대장군전
  • 비격진천뢰
  • 대장군포
  • 신기전
  • 장병겸
  • 총통 -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세총통, 승자총통
  • 편곤
  • 화차
  • 환도

[편집]

일본에서 생산된 조총
  • 가마야리
  • 나이카마
  • 시케토우 유미
  • 시호다케 유미
  • 일본도
  • 철포(조총)

[편집] 양국 전함 비교

[편집] 조선

서울 전쟁기념관에 있는 거북선 모형
  • 거북선
  • 판옥선

[편집]

  • 아타케부네
  • 세키부네
  • 고바야

[편집] 주요 인물

[편집] 조선 (한국)

  • 강항
  • 고경명
  • 고인후
  • 고종후
  • 곽재우
  • 곽준
  • 광해군
  • 권율
  • 권응수
  • 권준
  • 김덕령
  • 김면
  • 김명원
  • 김성일
  • 김시민
  • 김억추
  • 김여물
  • 김완
  • 김응남
  • 김응서
  • 김응함
  • 김제갑
  • 김천일
  • 김충선
  • 나대용
  • 논개
  • 민정붕
  • 박진
  • 박홍
  • 배설
  • 배흥립
  • 백광언
  • 백사림
  • 변이중
  • 사명대사
  • 서산대사
  • 서예원
  • 선조
  • 송상현
  • 송유진
  • 송희립
  • 신각
  • 신립
  • 신점
  • 안위
  • 양대박
  • 여여문
  • 오억량
  • 우치적
  • 원균
  • 유극량
  • 유성룡
  • 유숭인
  • 윤두수
  • 이각
  • 이경록
  • 이덕형
  • 이몽학
  • 이순신
  • 이억기
  • 이영남
  • 이운룡
  • 이원익
  • 이일
  • 이장손
  • 이정암
  • 이항복
  • 이헌국
  • 임해군
  • 정걸
  • 정기룡
  • 정문부
  • 정발
  • 정운
  • 정인홍
  • 정평구
  • 정철
  • 정탁
  • 진대유
  • 조헌
  • 조종도
  • 최경회
  • 최호
  • 한호
  • 한응인
  • 허준
  • 황윤길
  • 황진

[편집] 왜 (일본)

  • 가토 기요마사
  • 가토 미쓰야스
  • 가토 요시아키
  • 게야무라 로쿠스케
  • 고니시 유키나가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 구로다 나가마사
  • 구로다 조스이
  • 구루시마 미치유키
  • 구루시마 미치후사
  • 구키 요시타카
  • 깃카와 히로이에
  • 나베지마 나오시게
  • 다치바나 무네시게
  • 다치바나 야스히로
  • 다테 마사무네
  • 도도 다카토라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카쓰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루이스 프로이스
  • 마시타 나가모리
  • 마에노 나가야스
  • 모리 가쓰노부
  • 모리 데루모토
  • 소 요시토시
  • 시마즈 요시히로
  • 아리마 하루노부
  • 아사노 요시나가
  • 안코쿠지 에케이
  • 야나가와 노리노부
  • 오타니 요시쓰구
  • 오토모 요시무네
  • 와키자카 야스하루
  • 우에스기 가게카츠
  • 우키타 히데이에
  • 이시다 미쓰나리
  • 이코마 지카마사
  • 이토 스케타카
  • 죠소카베 모토치카
  • 하치스카 이에마사
  • 호소카와 다다오키
  • 후쿠시마 마사노리

[편집] 명 (중국)

  • 동일원
  • 두사충
  • 등자룡
  • 마귀
  • 만력제
  • 만세덕
  • 사대수
  • 송응창
  • 심유경
  • 양소훈
  • 양방형
  • 양원
  • 양호
  • 오유충
  • 오종도
  • 유정
  • 이령
  • 이여송
  • 이종성
  • 임세록
  • 조승훈
  • 진린
  • 진유격
  • 천만리
  • 팽신고
  • 황응양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조선과 명(明)나라의 군사가 연합하여 물리친 전면적인 국제전쟁이었다. 임진년에 처음 발생했다 하여 보통 '임진왜란'이라고 하며, '7년전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1597년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언급할 때는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부른다. 그외 임진왜란을 일본에서는 '분로쿠[文祿]·게이초[慶長]의 역(役)', 중국에서는 '만력(萬曆)의 역'이라고 한다.

16세기 후반의 동아시아 정세

동아시아의 조선·중국·일본 각 나라는 14세기에 다같이 새 국가와 정권이 등장한 이후 2세기 동안 안정기를 누려왔다. 그러나 16세기에 접어들면서 나라가 동요되고 이웃한 여러 민족들이 자주적으로 발전하려는 경향을 보이면서 동아시아의 정세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명나라는 16세기경에 환관(宦官)이 실권을 장악하는 등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졌고, 지방에서도 향리재주(鄕吏在主)의 관리나 과거급제자층이 향신(鄕紳)이라는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여 반(反)환관운동·반(反)해금정책 등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각지에서는 농민봉기와 종실간의 반란이 잦았으며, 북쪽의 오랑캐와 남쪽의 왜적이 자주 침입해왔다. 한편 일본은 16세기 전반에는 전국 다이묘[大名]들의 영국경영(領國經營)에 기반하여 상공업 발달이 이루어졌고, 후반에는 권력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정권이 전국통일전쟁 과정에서 국내의 상권과 국제무역권의 통일을 강화해갔다(→ 일본사). 그리고 포르투갈인의 내항과 총의 급격한 보급으로 철포대 등 총보병부대를 중심으로 새 전투대형을 편성했다. 오다 정권의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간토[關東]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연합한 뒤 1587년 전국을 통일했다. 도요토미 정권은 통일 과정에서 도시 부상들의 협력을 기반으로 대륙과의 교통 창구인 하카타[博多] 등을 장악하여 역시 상권과 무역권의 통일적 확보를 중시했다. 그리고 토지와 농민을 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전국적 검지(檢地)와 호구조사를 실시하고, 새로운 신분규정을 정하는 등 체제정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도요토미 정권은 다이묘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고, 토지소유에서 제외된 하급 무사들의 불만을 많이 샀다. 더욱이 삼포왜란(三浦倭亂), 영파(寧波)의 난(亂) 등으로 명·조선과의 무역이 거의 폐쇄되자, 정치적으로 강력한 다이묘들의 무력을 해외로 분출시켜 국내의 안정을 기하고 경제적으로 국제교역상의 불리를 타파하기 위해 '당입'(唐入:중국 침입)을 통한 '체제변혁전쟁'(體制變革戰爭)을 구상하게 되었다.

조선은 개국 이후 1세기 동안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확립이 이루어졌으나, 15세기말부터 정치의 실권을 가진 훈척(勳戚)과 중앙정계로 진출하던 사림(士林) 간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면서 연이어 사화(士禍)가 발생했다. 1567년 선조(宣祖)의 즉위를 전후하여 사림정치가 확립되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혁신은 선조의 구신계(舊臣系)에 대한 비호와 내부 분열로 인해 정파정치(政派政治)의 양상으로 변질되었다. 즉 심의겸(沈義謙) 문제로 인해 동서(東西)로 분당(分黨)되고, 이어 정여립(鄭汝立) 사건을 계기로 동인에서 퇴계(退溪) 문하가 남인(南人)으로 분립하는 등 중앙정치세력의 알력 및 개편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권세가들의 경기도·황해도 지역의 해택(海澤)·노전(蘆田)의 강점, 군역의 포납화(布納化), 수령·유향소(留鄕所)를 통한 상납물의 강제 징수 등은 민심의 동요를 가져왔다. 그리고 군제도 병농일치의 개병제 원칙이 붕괴되고, 각급 지휘관들이 군사의 입번(立番)을 면제해주고 대가를 받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군사는 기능을 상실하여 국방력이 약해졌다. 이에 대해 이이(李珥)는 초기의 군사제를 규정대로 운용하면서 10만 양병을 주장했는데, 선조의 미온적인 반응과 사림 내부의 뒷받침이 없어 실현되지 못했다.

전쟁 직전의 한일관계

도요토미는 규슈[九州] 정벌로 전국통일이 막바지에 이른 1587년에 중국 침입의 구체화를 위해 조선 내 사정에 정통했던 쓰시마 섬[對馬島] 도주(島主) 소[宗義調]에게 조선침략 방안을 의논했다. 이때 소가 우선 조선과 교섭할 것을 건의함에 따라,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가신인 다치바나[橘康廣]를 파견했다. 조선에서는 다치바나가 가져온 서계(書契)의 서사(書辭)가 오만하다며 회답하기를 미루다가, 이듬해에 수로(水路)가 미매(迷昧)해서 통신사를 파견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새 쓰시마 섬 도주 소는 1588년 10월과 다음해 6월 다시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내한하여 공작과 조총을 바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을 파견했다. 그들은 교토[京都]에서 도요토미를 만나 답서를 받았는데, 답서에는 종래의 '예폐'(禮幣)가 '방물'(方物)로 바뀌어 있었으며 명나라를 침입한다는 '입대명'(入大明)의 구절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에 통신사가 시정을 요구하자 방물은 다시 예폐로 바꾸었으나, 입대명의 구절은 없애지 못했다. 이듬해 1월 귀국한 통신사들이 3월에 입경(入京)하여 일본의 조선 침입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서로 엇갈리게 보고함에 따라 조정의 견해도 양분되었고, 이에 일본침략에 대한 방비책의 논의가 유야무야되었다. 그해 4월 겐소 등이 다시 들어와 1년 후에 "명에 쳐들어갈 길을 빌리겠다"(假道入明)라고 통고하자, 조정에서는 이 내용을 명에 통보하고, 하삼도(下三道)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했는데, 몇 곳을 제외한 각 도에서는 오히려 일어나지 않을 왜란에 대비하여 민폐를 야기한다는 원성이 제기되는 등 별 성과가 없었다. 반면 도요토미 정권은 1591년부터 조선 침략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여 규슈·시코쿠[四國]·주고쿠[中國]의 다이묘들의 군대를 재편성했다. 도요토미는 그해 8월 침략일을 다음해 3월 1일로 정하고 나고야[名古屋]에 지휘본부를 건설하여 수륙군의 편성을 완료했다. 총15만 8,700명의 육군을 1~9번대로 편성하고 11만 8,300명을 후속 병력으로 잔류시켰다. 그중 선봉대로서 최전선 투입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주장(主將)으로 하는 제1번대 1만 8,700명,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번대 2만 2,800명,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번대 1만 1,000명 등 5만 2,500명의 병력을 편성했다.

일본의 침략

1592년 4월 13일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 1만 8,700명이 700여 척의 병선에 나누어 타고 쓰시마 섬의 오우라 항[大浦港]을 출항하여 부산포로 쳐들어왔다.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 전사했고 부산성은 함락되었다. 다음날 일본군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군민과 더불어 항전했으나 전사했고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그후 18일 가토의 후속부대가 부산에, 구로다의 제3번대가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했다. 4~5월에 걸쳐 제4~9번대에 이르는 후속부대가 상륙하여 수군병력 약 9,000명을 합해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의 총병력은 약 20여 만 명에 이르렀다. 부산·동래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해 북진을 계속했는데, 중로는 동래-양산-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를, 좌로는 동래-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을 거쳐 조령(鳥嶺)에서 만나 충주로 향하기로 했고, 우로는 김해-성주-지례-김천-추풍령의 길을 택해 경기도로 북상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임시변통으로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조령·충주 방면의 중로를,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에 임명해서 죽령·충주 방면의 좌로를, 조경(趙儆)을 우방어사로 삼아 추풍령·청주·죽산 방면의 우로를 방어하게 했다. 그리고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륵(金)을 좌도안집사로 삼아 민심 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했으며, 신립(申砬)을 도순변사로, 유성룡(柳成龍)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방어태세를 갖추게 했다. 그러나 4월 24일 이일은 상주에서 대패하여 충주로 도망했고, 신립은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치고 싸웠으나 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달천에 투신했다. 충주가 함락됨에 따라 일본군은 다시 여주-양근-용진나루와 죽산-용인-한강의 진로로 나뉘어 북상했고, 관군은 큰 전투도 1번 치르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났다. 조정은 일본군의 서울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로 삼았으나 충주 함락 소식을 듣고는 천도를 결정했다. 4월 30일 새벽 선조와 세자 광해군(光海君)은 평양으로 피난하고,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는 함경도와 강원도로 가서 근왕병을 모집하게 했다. 그당시 서울의 민들은 경복궁·창덕궁과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掌隸院)·형조 등을 불질렀고, 개성의 민들은 왕의 실정을 비난하면서 왕의 행렬에 돌을 던지는 등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었다.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지 18일 만인 5월 2일 서울을 점령하고, 군대를 재편하여 고니시는 평안도, 가토는 함경도, 구로다는 황해도로 진격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수성부대와 하삼도 후방지역 담당부대를 나누었다. 5월 15일 김명원은 평안도 정병 3,000명으로 임진강에서 고니시군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패해 27일 일본군은 임진강 이북으로 북상했다. 그런데 이미 5월 12일 조정은 명에 원병을 청하기로 결정하고 이덕형(李德馨)을 청원사로 파견하는 한편, 우의정 윤두수(尹斗壽)와 유성룡의 '평양사수' 결의를 받아들여 윤두수·김명원·이원익(李元翼)에게 평양을 방어하도록 했다. 그러나 고니시군이 대동강 연안까지 북상하자, 조정은 다시 평양 사수를 포기하고 북행을 결정하게 됨에 따라 평양의 민들은 위정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에 격분했다. 6월 11일 선조는 평양을 떠나 숙주·안주·안변을 거쳐 박천에 이르러 군권을 광해군에게 넘겨주고 의주로 향했다. 6월 14일 평양이 함락되었고, 17일 가토군은 함경도까지 유린하고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하여 일본군의 부산 상륙 이후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가 일본군에 유린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수군의 승리와 이순신

임진왜란 때 사용한 신기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때 사용한 현자총통,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일본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 육군에게 물자를 조달하면서 수로로 북상하는 작전을 세웠다. 당시 경상좌도수군절도사는 박홍(朴泓), 경상우도수군절도사는 원균(元均), 전라좌도수군절도사는 이순신(李舜臣), 전라우도수군절도사는 이억기(李億祺)였다. 그중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을 갖추며 식량을 저장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돌격선(突擊船)의 필요를 절감하여 조선 초기에 만들어졌던 귀선(龜船:거북선)을 개량했는데 이는 일본수군과의 해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했다. 4월 15일 경상 좌·우 수영군이 무력하여 일본수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은 채 전라도로 진격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군은 5월 4일 주전투함인 판옥선(板屋船) 24척, 협선(挾船) 15척, 포작선(鮑作船) 47척으로 출동하여 6일간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해전에서 총 40여 척의 적선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5월 29일부터 6월 10일에 걸쳐 이억기가 이끄는 전라우수영 함선 및 원균의 경상우수영 함선과 합세하여 사천(泗川)·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에서 적선 70여 척을 침몰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경상도 가덕도(加德島)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 장악했고, 특히 사천해전에서부터 거북선을 사용했다. 이에 일본군은 전수군을 집결하여 조선수군을 격파하기로 하고 구키[九鬼嘉隆]·도토[勝堂高虎]·가토[加藤嘉明] 등이 합세하여 6월말 부산포에 진을 쳤다. 7월 8일 이순신의 함대는 이억기·원균의 함대와 합세하여 55척의 전선으로 견내량(見乃梁)에 정박중이던 와키사카[脇坂安治]의 일본 함대 73척을 공격했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자,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으로 포위·공격하여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한산도대첩은 전쟁중에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한 전투로, 임진왜란중에 조선군이 거둔 3대 승리의 하나로 꼽힌다. 이 활약으로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려던 일본의 작전이 좌절되고,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이어 다음날에도 안골포(安骨浦)에서 구키의 전함 42척을 대파하여 3차 출동을 마무리지었다. 8월 24일 조선수군 연합함대는 4차로 출동하여 삼천포(三千浦)·서원포(西院浦) 등을 거쳐 9월 1일 절영도(絶影島)를 돌아 일본수군의 본거지인 부산포로 진격했다. 병사와 전선의 수와 지세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연합함대는 장사진(長蛇津)으로 공격하여 100여 척의 적선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다음해 5차 출동에서는 웅포(熊浦)를 공격했고, 7월 한산도의 두을포로 진을 옮겨 삼도수군의 제일선 기지로 정했다. 이와 같이 이순신 함대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은 의병활동과 함께 불리했던 전세(戰勢)를 역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의병의 봉기

임진왜란 전황도(1592~93)
해전에서 잇달은 승리를 거둘 때 육지의 곳곳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향토방위에 나서고 있었다. 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는 전계층이었는데, 농민이 주력군이었고 의병장은 대개 전직관료·유학자들이었다. 의병은 향촌공동체를 바탕으로 자신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 봉기한 부대였다. 따라서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지리에 알맞는 무기와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는 정면충돌보다는 매복·기습·위장 등과 같은 유격전술을 사용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의병은 우선 점령당한 하삼도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경상도의 경우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권응수(權應洙) 등이 활약했다. 특히 현풍 유생 곽재우는 사재를 털어 의령에서 기병하여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의령·삼가·합천·창녕 등을 수복하는 등 경상우도를 보호하여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전라도의 경우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김덕령(金德齡)·유팽로(兪彭老) 등이 활약했다. 특히 고경명은 유팽로와 함께 담양에서 회맹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7월 9일 금산에서 일본군과 격전 도중 장렬하게 전사했다. 충청도의 조헌(趙憲)은 10여 명의 유생들과 합의하여 공주·청주 간을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 옥천에서 기병했다. 이들은 차령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온양·정산·홍주·회덕 등에서 병력을 보충한 다음 영규(靈圭)가 이끄는 승병 500여 명과 합동하여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했다. 그러나 금산의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8월 19일 700명 전원이 전사했다. 경기도에서는 홍계남(洪季男)·우성전(禹性傳) 등이 활약했는데, 홍계남은 양성·안성 및 충청도의 읍들을 보호했다. 황해도는 전(前) 연안부사 이정암(李廷)이 기병하여 연안성을 굳게 사수함으로써 호남과 호서의 해상교통이 의주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함경도의 정문부(鄭文孚)는 경성(鏡城)에서 기병하여 정현룡(鄭現龍)·오응태(吳應台) 등과 협동, 경성·길주·쌍포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여 함경도 지역의 수복에 앞장섰다. 그밖에 평안도의 조호익(曺好益)·양산숙(梁山璹)의 활약도 유명했다. 그리고 의승군(義僧軍)은 특수집단인 승려 의병으로 묘향산의 휴정(休靜:서산대사)은 수천 명의 제자들로 승군을 조직하고 각 사찰에 격문을 보내 의병조직을 권유했다. 이에 호응하여 관동에서 유정(惟政:송운대사), 해서에서 의엄(義嚴), 호남에서 처영(處英), 충청도에서 영규 등이 제자들을 이끌고 의병대열에 참여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결과 1593년 1월 전국 의병은 총 2만 2,600여 명으로 관군의 1/4에 해당하는 병력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의병이 난립하여 명목뿐인 사이비의병들도 출현하는 등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실정이 되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1592년 10월부터 우성전으로 하여금 남도의 의병을 통솔하게 하고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의병을 권율과 권징(權徵)에게 분속시키고자 했다가, 전 우의정 심수경(沈守慶)으로 하여금 전의병을 통솔하게 했다. 의병장들은 승서제직(昇敍除職)되어 관인이 되었다. 그런데 본래 의병들이 향리방위의 차원에서 모였으므로 관명에 불복종하고 임의 행동을 하기도 하여 통제가 불가능하기도 했다. 이후 1594년 3월에는 종전의 의병을 해체하고 김덕령에게 예속시켰으나 명목에 지나지 않게 되어 초기의 의병과는 성격이 많이 변질되었다.

명의 참전과 반격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본군에 대한 조선군의 반격작전은 한층 강화되어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부대를 정리해 관군에 편입시켜 관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작전도 보다 조직화되었다. 이에 따라 육해(陸海)의 모든 전선에서 반격전이 이루어졌으며, 특히 1592년 10월의 진주성(晋州城) 전투의 승리가 돋보였다. 김해 주둔의 일본군이 전라도와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진주를 점령하기 위해 3만 명의 병력으로 공격해왔을 때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판관 성수경(成守慶)·이광악(李光岳)의 지휘하에 수성군 8,600명과 곽재우·최경회(崔慶會)·이달(李達) 등 의병장들이 성 밖에서 호응하는 6일간의 치열한 격전 끝에 김시민은 전사했지만, 적을 격퇴시킴으로써 전라도를 점령하여 군비를 마련하려던 일본군을 좌절시켰다. 한편 조선의 구원 요청을 받은 명에서도 일본이 전쟁 초기부터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워 대륙침략을 공언했으므로 자위책으로 원병을 파견했다. 우선 랴오양 부총병[遼陽副摠兵] 조승훈(祖承訓)이 이끄는 5,000명의 군대가 파견되어 7월 15일 평양을 공격했다가 적의 기습을 받아 대패했다. 이에 명은 12월 송응창(宋應昌)을 총지휘관인 경략(經略)으로, 이여송(李如松)을 동정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4만 3,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다. 1593년 1월 8일 명군은 조선군과 연합하여 먼저 평양성을 공격, 일본군 1만 여 명을 살상하고 성을 탈환했다. 그뒤 명군은 패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벽제관(碧蹄館)에서 패하고 주력부대는 평양으로 후퇴했다. 한편 함경도에서는 정문부 의병부대가 백탑전투에서 가토군을 섬멸하여 마천령 이북지방을 수복하는 등 경기 이북지방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때 삼도제찰사 권율은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명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탈환하려다가 명군의 후퇴로 고립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벽제관에서 명군을 패퇴시키고 사기가 올라 있던 일본군은 2월 12일 우키다[宇喜多秀家]의 지휘하에 3만 명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조선군은 민과 합동하여 화차(火車)·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총통·활 등을 총동원하여 수차례 공격해온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 전투는 임란3대첩의 하나로, 이후 일본군은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못하고 철수를 서둘러 마침내 4월 18일 서울에서 총퇴각했다.

휴전의 성립과 강화의 결렬

한편 전쟁의 와중에서 고니시의 강화제의가 있었고, 1592년 6월 대동강변에서 이덕형과 겐소의 회담이 열린 것을 계기로 휴전교섭이 시작되었으며, 명나라에서도 심유경(沈惟敬)을 일본 진영에 보내 강화를 추진했다. 그해 8월 평양에서의 강화회담을 한 후 평양 북방에 휴전선을 책정했고, 이후 본격적인 강화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 3월에 열린 용산회담의 결과 일본군은 서울을 버리고 경상도 해안일대로 물러났고, 포로가 되었던 왕자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일본군은 군량을 해결하기 위해 전라도 지방으로는 침략을 확대했고, 이순신의 수군을 배후로부터 공격하는 동시에 강화회의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6월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다. 이때 일본군 12만 3,000명의 공격에 대해 김천일·최경회 등 의병·관군 3,000명은 7일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마침내 진주성이 함락되었고 6만 명의 인근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이후 명과 일본 간의 강화회의도 5년을 끌다가 결렬되고 말았다. 본래 일본의 도요토미는 강화의 조건으로 명나라의 황녀(皇女)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보낼 것,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조선의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줄 것 등을 요구했다. 심유경은 이 요구가 절대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알고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책봉하고 조공(朝貢)을 허락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본국에 거짓 보고했고, 명은 1596년 사신을 파견해 도요토미를 일본왕으로 책봉하는 책서(策書)와 금인(金印)을 전했다. 이에 도요토미는 크게 노하여 이를 받지 않고 조선 재침략을 기도했다. 한편 휴전기간 동안 조선에서는 여러 무기와 화약이 발명되고 함선들을 건조했으며, 유성룡을 도제조로 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방법을 바꾸었다. 즉 속오법(束伍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군대를 살수(殺手)·사수(射手)·포수(砲手)의 삼수기(三手技)로 나누어 침략에 대비했다. 수군도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하여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세우고 기지의 방비와 포구 간의 연락을 강화했다. 한편 축성 작업도 활발하게 벌어져 남한산성·독산산성·무한산성·죽산산성 등이 새로 축조되었다.

정유재란

수항루(1677),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던 ...
일본은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 1~2월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략했다.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邢)를 총독,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5만 5,000명의 원군을 보내왔다. 이때 조선군의 전선 동원병력은 3만 명으로 권율부대를 대구 공산에, 권응수부대를 경주에, 곽재우부대를 창녕에, 이복남(李福男)부대를 나주에, 이시언(李時言)부대를 추풍령에 각각 배치했다. 7월초 일본은 주력군을 재편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秀包]를 총사령관으로, 우군은 대장 모리[毛利秀元] 이하 가토·구로다 등으로, 좌군은 대장 우키다 이하 고니시·시마즈[島津義弘] 등으로 편성한 뒤 하삼도를 완전 점령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했다. 이에 이복남·이춘원·김경로 지휘하의 수성군은 격전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군은 전주에 집결한 후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약탈을 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9월초 충청방어사 박명현부대는 여산·은진·진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이시언부대도 회덕에서 일본 좌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정기룡(鄭起龍)부대는 고령에서, 조종도(趙宗道)부대는 황석산성에서 일본 우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했다. 9월 5~6일 권율·이시언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해생(解生) 지휘하의 명나라 연합군은 직산에서 가토군·구로다군을 대파했다. 이에 일본군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고니시군은 순천, 가토군은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그해 11월 명의 형개가 4만 명의 병력을 3로로 재편하자 조선군도 이시언·성윤문(成允文)·정기룡이 각각 1영(營)씩 지휘하여 남진을 시작했다.

한편 그해 1월 일본군측의 거짓 정보와 서인 일부의 모함에 의해 정부의 출동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은 파직당하고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4월 조선수군은 조선 연해로 들어오는 일본수군을 중도에서 공격하려다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수군의 부산상륙을 허용했다. 이어 일본군이 제해권을 빼앗기 위해 해전에서 맹렬한 공세를 취하자,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6월 안골포전투와 7월 웅포전투, 칠천도전투에서 대패했다. 8월초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은 9월 16일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출동하여 서해로 향하는 300여 척의 일본전선을 명량(鳴梁)에서 대파했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수륙병진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조선수군은 다시 제해권을 장악했다.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하여 남해안 일대에 몰려 있었다. 그해 12월과 다음해 1월에 걸쳐 울산 도산성에서 권율 지휘하의 조선군은 가토군을 공격했고, 각 지역에서 일본군 잔당들을 섬멸했다. 그리고 이순신 지휘하의 수군도 절이도와 고금도에서 일본 수군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1598년 8월 마침내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에 조선군은 마귀·유정(劉綎)·동일원(董一元) 등이 지휘하는 명군과 함께 육상에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명군의 유정이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고 명군을 철수시킴으로써 일본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한편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진린(陳璘) 지휘하의 명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11월 노량(露梁)에서 일본전선 300여 척과 해전을 벌였다. 그결과 조선과 명이 일본의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시키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전쟁의 결과

이 전쟁은 16세기말 동아시아 3국이 모두 참전한 국제전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은 전국 8도가 전장으로 변해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엄청난 재산피해를 입었다. 토지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졌고, 전쟁 전에 170만 결에 달했던 토지결수도 54만 여 결로 줄었다. 이는 물론 양안(量案)에 등록된 결수(結數)이므로 실제 경작면적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 초기에 비하면 1/3도 안 되는 면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전란으로 인한 문물의 파괴, 재력의 탕진을 복구하기 위한 개혁이 정권의 급선무였다. 제도적 개혁으로는 비변사(備邊司)의 강화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기구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원래 비변사는 군사만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지만, 영의정 이하 삼공육조판서(三公六曹判書)가 모두 당상제조(堂上提調)에 임명됨으로써 서정일반에 관여하는 기관이 되었다. 이어 국가의 모든 국사가 국방문제와 관련되어 처리됨에 따라 의정부·육조의 업무 대부분까지 비변사가 담당함으로써 행정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군사적으로도 명의 제도를 받아들여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오군영제(五軍營制)를 마련했고 지방에는 초관과 속오군을 조직했다. 그런데 전쟁중 군량미를 조달하기 위해 납속책(納粟策), 서얼허통(庶孼許通), 향리의 동반직(東班職) 취임허용, 병사의 면역(免役), 노비의 방량(放良) 등이 일부 허용됨에 따라 중세적 신분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또 근본적으로 군역(軍役)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양전(量田)이 실시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정책들은 많은 모순을 안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국가의 조세수입은 줄어들었지만 군비의 확장, 국가의 지출 경비는 계속 늘어나게 되어 농민들에게 과중한 부역·공납·납세를 강요했고 이에 따른 이농현상이 광범하게 나타났다. 그결과 공물의 미납화, 양전수세의 간편화, 면세전 확대 방지책, 병역의 납세화, 환곡책, 모곡(耗穀)의 회수책 등이 제도화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전란으로 궁전·관청건물들과 홍문관·춘추관 등에 보관되었던 서적, 실록들이 소실되었고 많은 귀중한 문화재들이 약탈당했다. 사상적으로 봉건집권세력은 일반민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하고 내부 분열이 심해져, 해이해진 기존 질서를 더욱 강화시킬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이에 따라 주자학 이념의 교조화가 더욱 심해지고 집권세력 내부 간에도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경직된 풍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욱이 집권세력·층들의 사상에는 명군의 원조에 대해 존화의식이 강화되어, 이는 이후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북벌론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은 전쟁을 통하여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정권이 등장했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국내적으로 〈무가제법〉·〈대오법도〉·〈참근교대제〉 등을 제정하여 신분위계제에 근거한 봉건지배체제를 세우고, 도요토미의 팽창주의와는 달리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대외교역의 단일적 통일체제를 갖추었다. 더욱이 도쿠가와 바쿠후는 조선과의 통교회복을 서둘러 일본에 잡혀간 조선인들의 귀환문제 등에 적극적인 유화책을 썼다. 그리하여 1604년 승려 유정이 일본으로 가 교섭을 하여 3,000여 명을 귀환시켰다. 1607년에는 도쿠가와 정권의 화의를 받아들여 여우길(呂又吉) 등의 사절을 파견했으며,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를 체결하여 무역을 재개했다. 일본은 전쟁중 조선으로부터 약탈해간 활자·그림·서적 및 포로로 데려간 우수한 활자 인쇄공을 통해 성리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인쇄문화를 발전시켰다. 더욱이 조선에서 데려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크게 발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명나라는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모되어 재정압박이 가속되었고, 각종 봉건징세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봉기와 지방의 봉건군벌들의 반란이 잇달아 일어났다. 만주에서는 명의 세력이 약해진 것을 계기로 누르하치[奴兒哈赤]가 건주위(建州衛) 및 하다[哈達]·휘파[輝發]·우리[烏拉] 등 여러 여진족을 통일한 뒤 1616년 칸[汗]에 즉위하여 후금(後金)을 세워 명·청 교체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을 계기로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유교문화권에서 후진국으로 인식되어왔던 일본과 여진족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중화문화의 정통을 자부해온 명과 조선이 상대적으로 쇠약해져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새롭게 변화되었다.

그리고 병자호란은:::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으로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후금은 조선침략의 다음해에 내몽골의 챠하르[察哈爾] 지방을 공격하고, 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골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베이징[北京] 부근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늘려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등과 정병(正兵) 3만 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측은 세폐를 대폭으로 감액하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그 다음달에는 후금으로부터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고 요구받았다. 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절화(絶和)하는 한편 군비(軍備)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해졌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인조비 한씨(韓氏)의 조문(弔問)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義)를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또한 1636년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고 태종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이때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인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이 신하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태종은 귀국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냈는데,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국서에 접한 조정은 격분하여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이러한 정세를 살펴보던 청태종은 그해 11월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청의 침입

병자호란 때 청의 침입도
청태종은 1636년 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청태종은 명나라가 해로(海路)로 조선을 지원을 못하게 하기 위해 별군(別軍)으로 랴오허[遼河] 방면을 지키게 하고, 12월 2일에 만주족·몽골족·한인(漢人)으로 이루어진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9일에는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때 청은 맹약을 위반한 조선을 문죄(問罪)하는 것이 침략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켜서 후일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선봉인 마부태(馬夫太)는 이 길을 피하고 서울로 직행하여 선양[瀋陽]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다. 조선 조정은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계문에 의하여 청군이 침입해서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서둘렀다. 14일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묘사(廟社)의 신주를 가지고 강화로 향하게 하고,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안찰사,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副使)로 정하여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뒤의 효종), 인평대군을 배호하여 강화로 향하게 했다. 또한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강화를 방비하게 하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정했다. 그날 밤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良鐵坪:마포대안으로 추정)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최명길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다시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와 밤늦게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인조는 산성을 떠나서 강화로 향했으나 산길이 얼어 미끄러웠으므로 산성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어영대장 이서(李曙), 수어사 이시백(李時白), 어영부사 원두표(元斗杓) 등에게 성 안의 군병 1만 3,000여 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도원수·부원수 및 각 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이때 성 안에는 군량이 도합 2만 3,800여 석이 있었는데, 이 분량은 군병과 백관을 합하여 1만 4,000여 명이 있었으므로 약 50일분에 해당하는 양식이었다.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많은 군사들이 남한산성으로 몰려왔다. 성 안에서는 비록 큰 전투는 없었으나,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성 안의 상태가 비참해져감에 따라, 각지에서 오고 있는 원병이 산성의 포위망을 배후로부터 끊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도원수·부원수, 감사(監使)·병사(兵使)의 군사는 대개 도중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흩어졌다. 그중에서 전라병사 김준룡의 군사가 용인에서 적장을 죽이고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역습을 당하여 후퇴했다. 민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나, 거의 무력하거나 진군 도중이었다. 조선이 기대했던 명나라의 원병은 국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적은 수를 보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 10여 만 명의 청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되자, 성 안의 조선 조정에서는 차차 강화론이 일어났으며, 주전파도 난국을 타개할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청태종은 이듬해 정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서 12만 명의 청군을 결집하고 있었다. 2일에 인조는 청군에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여 청의 진영에 보냈는데, 청은 조선이 청과 개전할 준비를 하는 등 맹약을 깨뜨렸으므로 출정한 것이라는 등의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냈다. 그뒤 20일에 청나라는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되 먼저 주전의 주모자 2~3명을 가두어 보내라는 국서를 보냈다. 이틀 후에는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화에는 세자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난해 있었고 안찰사 김경징과 유수 장신 등이 방비를 맡고 있었는데, 결국 패전하여 빈궁과 대군 이하 2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항복과 강화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항복할 결심을 하고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때 항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島)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이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청태종은 돌아갔으며,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 선양으로 갔다. 청군은 돌아가던 중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고,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청군을 돕게 하여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괴멸되었다.

전후의 대청관계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대해서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의 내왕시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開市)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또한 조선 정부에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이외에 전쟁 때 청으로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문제가 심각했다.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숭명배청의 사상이 전쟁 전보다도 굳어져갔다. 그리하여 강화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서는 1639년에 거절한 바 있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임경업에게 전선 120척과 병사 6,000명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군량미 1만 포를 조운하게 했는데, 임경업이 중도에서 일부러 30여 척을 파괴하고 풍운을 만나 표류한 틈을 타서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이 선양에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1645년에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인조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전후처리는 일단락되었고, 종전 직후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품목들은 조정되었으나 조선에게 불리한 조공관계와 무역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의 주도 아래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다.→ 정묘호란

 

(1)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
    ① 조선에서는 오랜 평화와 성리학의 발전, 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국방 정책에 소홀하였으며 양반 계급끼리의 세력 싸움으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조세 제도 문란
        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하였다.
②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100여 년 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한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침략적 야심을 펴기 위하여 우리 나라와 명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였다.
(2) 임진왜란의 경과
    ① 왜군은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 달라는 구실로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며 조선을 침략하였다.
    ② 부산과 동래성에서 정발, 송상현 등이 일본군의 조총에 맞서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적은 수로는 많은 적을 대적하지 못한다)으로 패하고 말았다.
    ③ 부산진과 동래성을 점령한 왜적은 세 길로 북상하였다. 이에 신립은 충주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패하고 전사하였으며, 20여일 만에 왜적은 서울을 점
   령하고, 북상을 계속하였다.
    ④ 선조는 한양을 떠나 평양성을 거쳐 압록강변의 의주까지 피난하였고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왜군의 침입로>


   바다에서의 승리 
1. 이순신 장군과 한산도 대첩   
(1)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해안을 지키던 이순신은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미리 군사를
     훈련시키고 전선을 정비해 두었기 때문에 왜군과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2) 이순신은 한산도 앞바다 해전에서 가장 통쾌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3
     대첩 중의 하나인 한산도 대첩이다. 1592년 7월 8일 당시 전라 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좁은 견내량(통영 수도)에 정박중인 왜군의 함대를 유도 작전에 의해 바다(외해)로 끌
     어내었다. 이것은 견내량이 좁아서 큰 싸움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군이 모두 외해로 나왔을 때 이순신은 공격 명령을 내려 학익진(학이 날개를 펴듯이 지을 치
는 전법)으로 적을 포위하는 한편, 거북선을 앞세우고 각종 포를 발사하여 적선 60여 척
     을 격파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 왜군이 남해를
     돌아 황해로 나가 황해도와 평안도에 상륙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3) 한산도대첩의 승리는 철저한 준비와 탁월한 전술은 물론 거북선과 화포 등 뛰어난 무기를 잘 사용하였기 때문이었다.
(4) 이순신 장군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군은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고 물자를 조달하려던 왜적의 작전을 부수고 남해 바다를 장악하였음은 물론 곡
     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우리 군대는 큰 용기를 얻었
     으며 일본군은 크게 사기가 꺾였다.



<이순신 장군의 출동지와 승전지>


   나라를 지키려는 백성들
 
1. 의병과 승병
(1) 의병이란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나라에 대한 충의를 내걸고 싸운 무장 부대로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고 지도자는 전직 관료, 유학자, 승려들이었다.
(2) 의병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향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여 적은 병력으로 많은 수의 적군에 상대하기 위해 정면 충돌보다는 매복, 기습, 위장 등과 같은 전술을 많이 써서 적에게 괴로움을 많이 주었다.
(3) 임진왜란이 장기화되면서 왜적에 대한 관군의 반격 작전이 강화되었으며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를 정리하여 관군에 편입시켜 관군의 전투 능력이 향상, 조직화되었다.
(4) 의병장의 활동 지역
    ① 조 헌 :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승병들과 함께 왜군에게 빼앗긴 청주를 다시 찾았으나, 금산에서 전사하였다.
    ② 고경명 : 동래부사였던 그는 전라도 장흥에서 봉기하여 의병 7,000여 명을 이끌고 왕이 피난한 평안도로 향하던 중 금산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아들 고증후
        도 의병으로 활약하다가 진주성에서 전사하였다.
    ③ 김덕령 :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곽재우 장군과 협력하여 왜군과 싸웠다. 여러 차례 왜군을 크게 무찔렀으나, 때마침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과 내통한다는 모략으로 붙잡혀 옥중에서 죽었다.
    ④ 정인홍 : 영의정까지 지낸 유학자로 남명 조식의 수제자이며 경상도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합천과 함안 등지를 방어한 공으로 대사헌이 되었다가 공
        조 참판을 지냈다.

    ⑤ 정문부 : 함경도 경성에서 일어나 길주, 회령 등을 회복하였다.
    ⑥ 곽재우 : 최초의 의병장으로 붉은 옷을 입고 다녀 홍의 장군으로 불렸으며 경상도
        의령에서 활동하였다.

    ⑦ 김천일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박광옥, 최경회 등과 함께 전라도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서울과 그 주변에서 유격전을 벌이고, 명나라 이여송의 군대가 남진할
        때 연합 작전을 폈다. 뒤에 진주성을 지키며 끝까지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⑧ 휴정(서산대사)과 유정(사명당)은 승병으로 각각 묘향산과 금강산에서 활동하였으며 유정은 사신으로 일본에 가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의 승전 요인과 영향
 
1. 임진왜란의 승전 요인
  7년간의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국난을 극복하였고, 민족의 생존과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으며 결과적인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은 국민의 단결된 힘이었다. 신분의 귀천이나 노소를 막론하고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자발적인 전투 의식은 의병 활동 등으로 나타났으며 전쟁 초기에는 왜적의 조총에 밀렸으나, 차츰 대포나 거북선 같은 함선 제조 기술에서부터  왜적을 능가하였으며 전 국민적 차원에서 국방 능력은 오히려 우리가 우세하였다.  
2. 임진왜란의 영향
(1) 국토가 황폐화되어 경지 면적이 줄어들고(종래의 1/3) 식량의 부족으로 농민들의 생활 이 가난해졌다.
(2) 많은 인구가 생명을 잃었고 호구 대장과 토지 대장 소실로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졌으며 사회 질서가 붕괴되어 사회가 혼란해졌다.
(3)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거나 또는 흉년·기근이 들었을 때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목적으로 백성에게서 곡물과 돈을 받고 국가가 납속에 응한 자에게 일정한 특전을 부여한 납속책의 시행으로 조선의 신분 제도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4) 경복궁과 실록을 보관한 사고 등 귀중한 문화재가 불에 타고 파괴되었으며 피해가 매우 심하였다.
(5)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게 된 조선에서는 전 국민이 국방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실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6) 일본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많은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여 갔으며 조선의 도자기 기술자와 학자들을 납치하여 일본 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자신에게 불만이 있는 세력을 무마시키고 대륙침략을 하기위해 1592년 임진년에 전쟁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의 과정

-선조는 한양-평양-의주로 피란하였고 명나라에 도움을 청 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

왜군의 침입을 대비한 결과 한산도 대첩에서 학익진전법을 사용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의병의 활약

이 나라를 지키기위해 유학자 농민 승려 등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조헌, 곽재우, 고경병,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이 활약해 주었습니다.

 

국내에 끼친영향

 

-피해가 조선이 가장크고 영토의 3/1이 줄었습니다.

-국가 재경에 타격이 컸습니다.

-경복궁 ,실록 보관소의 사고가 불타고 서적과 문화재가 불탔스며 많은 도자기 공들이 잡혀갔습니다.

-공명첩과 납속책의 실시로 신분제도가 동요되었습니다.

 

일본

-에도막부가 성립되었습니다,

-조선에서 약탈한 도자기.서적등으로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추가 보너스~~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

 

-조선에서는 오랬동안 평화와 성리하그이 발전,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국방정책에 소홀했습니다.

-양반계급기리의 세력싸움으로 극론이 분열되었고 조세제도 문란으로 민심이 극도로 혼란해 젔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녕하세요??저는고리울초등학교 에다니고있는박인정입니다.

저는현재6-6반입니다.

저 임진왜란과병자호란이국네에끼친영향좀 알려주세요.

점수10드릴게요.내일낮1시까지올려주시면감사하겠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행주산성의행주대첩 권율.

진주혈전(대첩이라고하긴그렇고혈전이라고하는게어울립니다.)김시민

사명대사는,,,싸운게아니고일본에가서 인질 4000명을데리고왔죠.,..

다들잘아는이순신장군님꼐서는목포앞바다와남해안에서열시미쌈질하셨구요,ㅋㅋㅋㅋ

선조왕께서는... 열나게 튀었죠.ㅋㅋㅋ

그리구!제일중요한건...의병이죠!!!!!!ㅋㅋㅋㅋㅋㅋ

 

권율장군과김시민은참고로 관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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