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친일 예술가 누군지 ...

일제강점기 친일 예술가 누군지 ...

작성일 2005.07.30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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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金殷鎬,창씨명鶴山殷鎬,1892∼1979)

                친일파로 전락한 어용화사(御用畵師)

1937년 이후 '선전' 참여작가
1941년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

 

[금차봉납도]를 미나미 총독에게 증정

 

김은호는 이 땅이 일제식민지로 전락한 직후 순종의 초상화를 두 차례 그린 어용화가이다. 또 봉건 왕조의 마지막 어용화사(御用畵師)로 출발하여 맨 먼저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린 친일파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순종의 어진 제작 경력과 빼어난 인물묘사 솜씨로 윤택영, 윤덕영*, 민병석* 등 친일 매판귀족이나 일본인 고관들의 초상화 주문에 응하면서 화단의 총아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후원에 힘입어 조선인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선전'(朝鮮美術展覽會)에 16회(1937) 때부터 심사위원격인 '참여'작가로 발탁되었다. 선전은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가 1922년부터 주최한 관제 공모전이다. 1937년 11월에 그린 [금차봉납도]는 제작 시기로 보아 참여작가의 '영광'에 대한 보답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그림의 주제는 1937년 8월 20일 결성된 '애국금차회'의 일화를 담은 것이다. 순종의 외척인 윤덕영의 처 김복완(金福緩)이 회장으로, 이윤용·민병석 등 매판귀족의 처와 김활란* 등이 간사로 참여한 애국금차회는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원호에 앞장 선 여성부인회이다. 애국금차회는 결성식 때 즉석에서 금비녀 11개, 금반지와 금귀지개 각각 2개, 은비녀 1개, 현금 889원 90전을 모아 일제의 '성전'(聖戰) 승리를 위한 국방헌금으로 냈는데({매일신보}, 1937. 8. 21), 김은호는 이 '감격스러운' 광경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미나미(南次郞) 총독에게 증정하였던 것이다.({매일신보}, 1937. 11. 20) 왼편에 금비녀(金釵) 따위를 증정하는 회장 김복완과 한복차림의 부인들을, 오른편에 그것을 받는 미나미 총독과 총독부 고위관료들을 정밀한 초상화법으로 그린 이 [금차봉납도]는 김복완의 남편 윤덕영과 김은호의 친분 관계 속에서 그들의 부탁으로 제작된 것이다. 특히 김은호의 초기 화단활동은 윤덕영의 후원에 힘입은 바 컸는데, 김은호가 어용화사로 발탁되었을 때 윤덕영의 옷을 빌려 입고 궁중에 출입할 정도였다. 윤덕영은 김은호가 어려웠던 청년시절 가장 큰 도움을 준 보호자 겸 은인이었다. 김은호의 [금차봉납도]는 개인적 출세욕에 눈먼 미술인들의 친일화를 부추기고 그 길로 인도하는 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군국주의 경향성의 첫 작품이고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에 대하여 김은호는 윤덕영과의 교분상 어쩔 수 없이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당치 않는 변명에 불과하다. 김은호는 이 작품을 계기로 친일활동을 본격화하였기 때문이다. 1930년대 만주침략(1931)에 이어 대동아전쟁을 선포(1939)하고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킨 일제가 경제수탈과 침략전쟁에 광분해 있는 가운데 그는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창씨개명에 동조하고 군국주의에 야합한 가장 '모범적'인 예술인이었다. 창씨개명에 적극 동조하여 그는 쓰루야마(鶴山殷鎬)라고 성을 바꿀 정도였다. 전시에 후방에서 화가로서 일본'천황'을 위해 '화필보국'(畵筆報國) 및 '회화봉공'(繪畵奉公)하고자 한 조선미술가협회(1941년 결성)에 김은호는 이상범, 이영일, 이한복과 함께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일본화부는 내선일체에 동조하여 동양화부의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조선미술가협회는 총독부 학무국장이 회장인 관변단체로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 화가들이 포함된 친일 미술인의 총력 협의체였는데, 1943년 1월 다른 예술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에 배치되어 국방기금마련을 위한 전람회 개최 등 전시체제에 열렬히 협조하였다. 이어 김은호는 이상범과 함께 친일미술전람회의 총화격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의 일본화부 심사위원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1942∼44). '선전'보다 한술 더 떠 총독부 정보과가 후원한 총후미술전은 조선인에게 일제 군국주의 찬양과 황국신민화의 '영광'을 고무시키기 위한 공모전 형태의 전람회였다. 그와 함께 김은호는 '조선남화연맹전'(1940. 10),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 1), 총독부와 {아사히신문}이 후원한 '일만화(日滿華)연합 남종화전람회'(1943. 7) 등 '성전' 승리를 위한 국방기금 마련전에 열심이었다.

 

 

파벌조성과 왜색풍을 물들이는 데 앞장 서

 

김은호는 친일활동의 명성에 걸맞게 한국 근현대 채색화에 왜색풍을 수용하여 유포시켰고 제자 양성에도 적극적이었다. 친일파로서 김은호 개인의 이력은 물론이려니와 폭 넓은 일본 채색화풍 수용과 제자 배출은 우리 현대회화의 정상적인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한 식민잔재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김은호는 인천의 부농 집안 출신으로 구한말 인천관립일어학교(1906∼07)를 다녔다. 일본 물결이 유입되는 세상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빨리 읽은 것이다. 집안이 몰락하자 인흥(仁興)학교 측량과를 마쳤고(1908),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옮겼다. 그는 측량기사의 조수로 혹은 도장포와 인쇄소 등을 전전하다가 영풍서관에서 고서를 베끼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 곳에서 김은호는 어려서부터 보여온 그림에 대한 능력과 남다른 손재주를 인정받아 이왕가가 후원하는 근대적 화가 양성기관인 '서화미술회'에 제2기생으로 편입하였고, 화과(畵科)와 서과(書科) 과정을 마쳤다(1912∼17). 그의 입학은 영풍서관에서 만난 서예가 현채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안중식, 조석진, 정대유, 강진희, 김응원 등에게서 전통서화를 익혔고, 안중식으로부터 '이당'(以堂)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이'(以)는 주역의 24괘 중 첫 자를 딴 것으로 김은호는 그 아호처럼 모든 면에서 으뜸이었다. 김은호는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자마자 빼어난 묘사 솜씨로 친일세도가인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순종 초상을 제작하는 어용화사로 발탁되었다(1915, 1928). 초상화가로 유명해지자 당대의 상류층인 친일 귀족, 자본가, 관료 등의 초상화를 맡게 되고, 그들과 교분이 두터워지면서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는다. 이 경력은 김은호가 친일파 화가로 전락하는 서막인 셈이다. 서화미술회 졸업 후 김은호는 민족미술에의 의지를 표방하며 결성된 '조선서화협회'(1918년 발족, 1921년에 첫 협회전 가짐)전에 참여하였고, 1919년 3·1 운동 때에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옥고까지 당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후 화가로서 그림에만 전념하는데, 특히 일본식 채색화 기교에 치중하면서 그나마 지녔던 민족의식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1922년 이후의 작품 경향과 '선전' 참여 활동이 그것을 잘 말해 준다. 1920년대 후반 대부호 김용문의 도움으로 다녀온 3년여의 일본 유학(1925∼28)은 자신의 전통적 기법에 기초한 화풍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정식으로 습득한 것이다. 그는 3년 동안 도쿄미술학교 일본화과의 청강생으로 일본화과 교수인 유키 소메이(結城素明)에게 사사받았다. 유키 소메이는 서양화의 사생기법과 접목시켜 자연사생 중심의 새로운 일본 풍경화풍을 일으킨 화가이다. 김은호가 귀국하여 제7회 '선전'(1928)에 출품한 [늦은 봄의 아침](暮春の朝) 이후 섬세한 채색화에는 그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사실 김은호는 인물화나 화조화에서 그 이전부터 이미 장식적인 일본 채색화풍에 물들어 있었다. 선전에 입상하기 위해서는 일본인 심사위원의 구미에 맞는 형식을 구사해야 했기 때문인데, 김은호는 1회 '선전'에 [미인승무]로 4등상, 3회 때 [부활 후]로 3등상, 7회 때 [북경소견]으로 특선을 수상하였다. 도쿄에 머물면서 일본의 권위 있는 공모전인 '제전'(제국미술원전람회)의 일본화부에 입선하기도 하였고 '동양회화전'에서는 [단풍]으로 1등상을 받았다(1928). 이들은 대부분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새로운 감각의 채색화풍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제8회 '선전'(1929) 때 출품작이 입선에 그치자 출품을 중단하였고, 한때 발길을 끊었던 서화협회전에 다시 참여하였다. 이 행동은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철새 같은 미술인의 전형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는 허백련과 2인전을 갖거나 김용문의 도움으로 중국여행을 통하여 견문을 넓혔고, 특히 후진양성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다가 8년 만인 제16회 '선전'(1937) 때부터 '참여'작가로 선정되는데, 바로 그 해 가을 앞서 설명한 [금차봉납도]를 그린 것이다. 이처럼 김은호는 자신의 출세욕에 따라 왕성한 활동을 통하여 화단의 자리를 굳혔다. 그러니 주변에는 자연히 많은 사회 저명인사 애호가와 화가 지망생들이 모이게 되었다. 김은호 자신도 후배양성에 관심이 많았고, 한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 1992)로 지칭되듯이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1920년대 후반부터 그의 화실 낙청헌(絡靑軒)에 몰려든 사람들과 함께 '이묵회'(以墨會)라는 서화연구회를 꾸렸고, 이들 중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조중현, 이유태 등은 따로이 '후소회'(後素會)를 결성하여 1936년부터 정기전을 갖기 시작하였다. 또한 1937년에는 박광진, 김복진과 함께 체계적인 미술교육기관으로 '조선미술원'을 개설하였으나 시도로 그쳤다. '후소회'는 김은호의 장식적이고 정밀한 필치의 섬약한 일본식 채색화풍을 전수한 모임으로서 일본 남화풍이 가미된 산수계열의 이상범 문하 '청전화숙', 전통적 남종화풍을 고수한 허백련의 광주 '연진회'와 더불어 당시 동양화 분야의 3대 후진양성 통로였다. 이러한 세 유형의 화가 모임 가운데 특히 '후소회'의 활동이 가장 돋보여 해방 후 국전 운영과 화단까지 주도하는 정치력을 갖게 된다. 여섯 번의 정기전(1936∼43) 외에도 후소회원들은 '선전'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1934년부터 김은호가 지도한 백윤문, 한유동, 장운봉(장덕), 김기창, 장우성 등이 입선과 특선을 차지하였고, 제21회 '선전'(1942) 때에는 동양화부 입선작 60점 가운데 21점이 회원작품이었으며, 또 2점이 특선하여 세상의 관심을 끈 바도 있다({매일신보}, 1942. 5). 뿐만 아니라 회원의 주축을 이룬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 조중현 등은 최고상과 특선 등을 독식하다시피 하였다. 그런 가운데 주변의 시샘과 방해공작도 있었던 모양이다. 김기창이 16회부터 19회까지(1937∼40) 연속 4회 특선으로 김은호의 제자 중 첫 추천작가로 선정되는데, 19회 특선 때의 일화가 그 한 사례이다. 심사중 특선후보 작품 속에서 일인 심사위원이 김기창 작품을 치워 놓자 안면 있는 다른 심사위원에게 간청하여 재심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 심사위원이 김은호의 제자사랑에 감복하여 무감사 특선으로 밀어 주었다고 하며, 김은호는 답례로 자신이 아끼던 고려청자를 선물하였다고 한다. 청각장애자인 제자를 생각하는 김은호의 '인정미'와 심사원 자격으로 '참여'한 정치력을 한껏 과시한 것이다. 이 일화는 이후 화단에 친일파 화가의 대량배출, 인맥에 의한 파벌 조성과 왜색조의 채색화풍을 풍미하게 한 요인이 되었음을 적절히 시사해 준다. 이런 현상은 당대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기득권을 강화하며 해방 후 화단에까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관변을 맴돌며 친일행각은 철저히 감춰지고

 

황국신민의 '영광'을 안고 열과 성을 다해 작품활동과 후진양성에 전념해 온 김은호는 일제에 부역한 탓에 결국 해방 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이상범, 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제외당했다. 그러나 김은호는 미군정 이후 친일파의 재기용 내지 득세에 편승, '인정미'로 기른 제자들의 옹호 속에서 다시금 화단의 총수로 떠오르게 된다. '미협'(대한미술협회)과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주도적 참여를 시작으로 제자들과 함께 제도권 미술계의 가장 거대한 파벌로서 일제 강점기에 이어 지속적으로 정치력을 키워 갔다. 해방 후에도 김은호는 여전히 정심한 필치와 채색의 인물화 분야의 일인자였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 아래서 관변의 요청으로 많은 초상화를 제작하였다. 이순신, 정몽주, 신사임당, 논개, 성춘향, 안중근, 서재필, 이승만 등은 물론 미국 대통령 윌슨,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주한미국 대사 무초 등의 초상화는 화풍도 그러하려니와 일제 때 어용화사에서 시작되어 관변에서 맴돌며 살아간 흔적의 좋은 사례들이다. 이에 힘입어 김은호는 군사정부 아래서 서울시 문화상, 5월 문예상 미술부문 심사위원과 8·15 해방 17주년 기념 문화훈장(이상 1962), 3·1 문화상 예술부문 본상(1965) 및 대한민국예술원회원(1966)과 예술원상(1968), 제11회 5·16 민족문화상 학예부문 본상(1976)을 받는 등 다른 친일인사와 마찬가지로 친일화가로서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그에 못지 않게 김은호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도 존경과 찬사로 일관된다. 이은상은 팔순기념으로 김은호를 다음과 같이 읊조린 바 있다.

"솔거 가신 뒤에 천오백 년 긴세월을 동방화단에 누구누구 해옵던고 화선을 만나려거든 이묵헌을 찾으시오 붓끝에 새가 울고 먹 뿌리면 꽃이 피고 산수인물이 조화 속에 나타나고 담소로 팔십평생에 늙을 줄을 모르네 빼어나 고운 모습 학수(鶴壽)를 사오리다 수정같이 맑으신 뜻 석수(石壽)를 사오리다 문생들 화통을 이어 백대장생 하오리다."(畵仙以堂頌, 1971. 8)

또한 김은호에 대한 기존 미술계의 회화사적 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통의 맥을 시대적으로 되살린 근대적 채색화의 개척자'로 '근대·현대 한국화단에 새로운 채색화 계파를 형성시킨 유일한 존재'(이구열, 1990)라거나 '극채세화(極彩細畵)의 화풍을 고수하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제자를 기른 인정미 넘치는 예술가'(이규일, 1992)로 논평되고 있다. 그의 친일 협조에 따른 반민족 행위와 왜색조에 물든 회화세계에 대하여는 '아쉽다'라거나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치부하면서, 그가 이룬 사실주의나 제자 육성의 공적에 비하면 크게 개의할 일이 아닌 것으로 넘어가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왜색풍은 마치 '엔가'풍의 트롯트 뽕짝이 '전통가요'로 둔갑한 현실정서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 현대화단의 숙제로 남아 있는 일제잔재 청산은 여전히 김은호에 대한 바르고 엄정한 재평가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김기창 (金基昶, 1914∼2001년)

        스승에게 물려받은 친일화가의 길

 

'선전' 추천작가
1942년 반도총후미술전 추천작가

 

화풍만 아니라 친일행각까지 스승의 길 따라

 

김기창은 여러 면에서 친일화가의 선두주자였던 김은호*의 수제자격이다. 섬세한 사실 묘사 위주의 일본화식 채색화법을 고스란히 배웠을 뿐 아니라 친일 행각까지도 착실히 스승의 길을 따랐기 때문이다. 김기창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장티푸스를 앓으면서 청각장애를 일으켜 정상적으로 학교 과정을 마치지 못하였다. 그는 어머니 한윤명(韓潤明)의 정성으로 한글과 일어, 한문 등을 익혔고, 그림에 대한 재능이 일찍 발견되었다. 김기창의 어머니는 감리교 신자로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한때 개성의 정화여학교 교사를 지낸 바 있는 신여성이었다. 김은호의 문하생이 되어 본격적인 화가 수업을 한 것도 어머니의 배려 덕택이었다.

그의 나이 17세 때(1930)의 일이다. 김기창은 김은호의 문하에 들어선 지 6개월 만에 제10회 '선전'(朝鮮美術展覽會)에 [널뛰기](板上跳舞)를 출품하여 입선하는 기량을 발휘하였다(1931). 이 때 어머니로부터 '운포'(雲圃)라는 아호를 받게 된다. 이후 계속해서 '선전'에 입선하다가 24세 때인 제16회 '선전'(1937)에 할머니의 옛얘기를 듣는 아이들을 담은 [고담](古談)을 출품하여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다음해에는 [여름날](夏日)로 '총독상'을 받고, 18·19회 '선전'에 계속 특선으로 입상되어, 연 4회 특선 경력으로 추천작가가 되었다. 약관의 27세였다. 16회와 17회 때에는 스승인 김은호가 직접 심사원으로 참여하였고, 19회때에는 주변의 시샘과 방해가 있었으나 김은호의 주선으로 무난히 무감사 특선에 올라 추천작가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이러한 김기창의 '선전' 출품작들은 대부분 향토적 내용에 장식적인 색채 감각과 호분의 사용, 섬세한 필치 등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요구에 충실히 부응한 것이었으며, 스승인 김은호의 일본식 채색 화풍을 전수받은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김기창의 뛰어난 묘사력이 뒷받침되어 있었다. 1938년에는 일본인 화가(失澤弦月, 野田九浦 등)를 만나 본토의 정통 채색화풍을 익히러 도쿄에 잠시 다녀오기도 했다. '선전'에 추천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파 대열에 합류한 김기창은 자신의 탁월한 회화 기량으로 젊은 나이에 '추천작가가 된 영광'을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것으로 갚았다. 그 영광을 가져다 준 스승 김은호가 밟은 길을 따라 총독부의 전시 문예정책에 부역한 것이다.

  화가로서 개인의 명예를 한몸에 얻게 되었으니 척박한 민족현실이 안중에 있을 리 만무다. 김기창은 '조선남화연맹전'(1940. 10)과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 1)를 비롯하여 김규진, 김은호*, 이상범, 이한복, 허백련 등 대가급 친일 미술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기금마련 전람회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그는 김은호, 이상범이 심사위원 으로 참여한 일제 말 친일미술전의 핵심인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에 후소회 동문인 장우성과 함께 일본화부 추천작가로 발탁되었다(1942∼44). 자연스레 친일파의 나락에 빠져든 것이다.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를 찬양·고무하기 위한 선전 작업에도 앞장 섰다. 이는 우선 신문·잡지류의 대중매체에 실린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에 게제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1943. 8. 6), 조선식산은행의 사보 {회심(會心)}지에 실린 완전군장의 [총후병사](1944. 4)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는 '축 입영(祝 入營)……'이라는 어깨띠를 두른 학도병 좌우에 갓 쓰고 안경 낀 연로한 아버지와 수건을 쓴 어머니가 수묵소묘풍으로 그려진 삽화이다.

이는 1943년 8월부터 시행된 조선 청년 징병제를 선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종군하게 되어 감격스러운 듯한 학도병의 진지함과 장한 아들을 굽어보는 아버지의 표정에 선전효과를 높이려는 의도가 다분히 배어 있다. 훈련병을 그린 [총후병사]는 펜화에 담채를 가한 삽화이다. 완전군장으로 간이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병사의 옆모습을 포착한 것으로 얼굴과 주먹 쥔 손에는 성전에 참여한 멸사봉공의 굳은 의지가 생생하게 담겨 있다. 또한 제21회 '선전'(1942)에 출품한 채색화 [모임]은 마을 부녀회의 반상회 광경을 연상시켜 주는데, 전시 후방에서 지원할 수 있는 여러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가증스런 점진적 식민잔재 극복론

 

젊은 나이에 '선전'의 추천작가가 된 '영예'와 기량으로 김기창은 일제 군국주의에 부화뇌동하였다. 김기창의 작업들은 당시 일본인 화가들의 전쟁선양 작품들에 버금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친일 경향과 활약으로 김기창은 광복직후 결성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스승인 김은호를 비롯하여 이상범,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 등과 함께 당연히 제외당했다. 그러나 그 역시 미군정과 이승만 친미 파쇼정권의 등장 이후 친일행적은 감추어진 채 제도권 미술계의 중심으로서 일제 때 친일 하면서 누렸던 명예와 인기를 유지하게 된다. 김기창은 광복후 나름대로 '눈 뜬 장님으로' 친일파가 된 자기 변명과 극복론을 폈다. 당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환경지배론과 점진적 식민잔재 극복론이 그것이다.

원로화가가 된 김기창은 최근 한 일간지 기자와의 대담에서 친일의 변으로 "사람은 자기가 살아가는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물론 의지가 강한 자기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평범한 인간이면 누구나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되겠지요"({경향신문}, 1991. 8.3)라고 피력한 바 있다. 친일파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자기 반성치고는 너무나 안일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 대담에서 "내 살속의 과거를 깎아 내며 민족적인 것에 이르고자 신체적 장애를 딛고 끊임없이 정진해 왔다"는, 전혀 '평범한 인간'의 논리와 걸맞지 않는 발언에 이르면 가증스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화가로 출세하기 위해 '선전'에 출품해서 추천작가의 영예를 안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고 그 '환경' 속에서 더 출세하기 위해 스스로 친일행각을 벌였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광복직후 어머니가 지어 준 아호인 '운포'(雲圃)의 '포'(圃)에서 '口'를 떼어 내고 '운보(雲甫)'로 바꾼 이유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는 얘기와도 맞물려 있다. 어차피 형식적 자기 변명에 불과하다.

그의 형식주의적 경향은 점진적 식민잔재 청산론과 광복후 변모가 큰 화풍에서도 찾아진다. 이런 논리는 광복이듬해 화단활동을 본격화하면서 쓴 아래의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우리의 모든 문화면은 오랜 왜정 압박하에 자유를 속박당하며 가사상태에 빠져 그 향상력이 저지되어 왔고, 특히 미술에 있어서 그 영향을 지독히 흡수한 것이 동양화였다. 그야말로 눈 뜬 장님처럼 예술관념을 인식치 못한 제작을 했고, 그 작품에서 예술의 대명사의 대접을 받아 떳떳이 내놓을 무엇이 있었던가. 결국 환경적으로 왜놈의 탈을 쓰고 그들의 유행성을 모방만 하느라고 급급했기 때문이었으니, 일종의 고질적인 우리들의 비예술관념과 깊이 뿌리 박힌 일본적인 습관을 현재에 있어서 여하히 처리할 것인가. 단지 지금 와서 일본적인 것을 이탈하려고 성급한 초조를 하더라도 안 될 것이니, 차라리 그것이 일본적이라 하더라도 서서히 이탈하도록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하고, 자기 실력을 가다듬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광복기분으로 가뜩이나 어리뻥뻥한 모호한 제작태도를 지닌 우리들이 '조선적, 조선적' 하기만 하고 날뛴다면 자신을 더욱 방황의 구렁텅이에 몰아 넣게 될 것이요, 그 작품이란 죽도 밥도 아닌 엉터리 작품이 될 것이니, 우리는 그런 태도를 청산하고 제일 먼저 화안(畵眼)의 양성, 즉 그림을 바로 인식할 줄 아는 교양을 쌓을 것이오…….(김기창, [해방과 동양화의 진로], {조형예술} 1호, 1946).

이 점진론은 결국 식민지 시절 벌인 반민족적 행각에 대한 반성의 핵심은 간과한 채 '현실'이 아닌 '그림을 바로 인식할 수 있는 교양'을 쌓자는 주장만 담긴 것이다. 그런데 그의 '그림 교양'은 또다시 광복후 격변하는 시대현실과 무관하게 형식실험적 태도로 바뀌었고, 개인주의적 작업과 사회활동 그리고 화단정치에서도 점진론과는 정반대로 맹활약을 벌였다. 특히 다양한 화풍의 변화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김기창은 '운보적이고 민족적인 것을 찾기 위해, 야성적이고 생명감 넘치는 격정적인 힘찬 화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 분방하고 '줄기찬 자기연소'(이구열, 1979) 과정을 거쳤다. 그 자신의 고백대로 김은호를 배우면서 형성된 일본식 채색화풍을 벗고, 1952년 전후로는 형상 변형이 반추상적인 입체파풍의 시기였고, 1964∼65년은 문자를 변용하거나 완전 추상에 빠진 시기, 1970년대는 수묵의 강한 선을 쓰는 시기, 그리고 1975년부터는 민화류 소재를 이용한 바보산수 시기 등으로의 변모가 그것을 잘 말해 준다. 그런데 이런 화풍의 변모는 개인적 갈등과 창작욕구에 의한 것이지만, 실제는 이후 우리 미술계에 물밀듯이 유입된 모더니즘의 조형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데 불과하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화풍에 매몰되었듯이 광복후에는 또 다른 서구 제국주의 미술에 기대어 자기 회화세계를 변모시켜 낸 결과이다.

 

 

왕성한 활동력과 정치력으로 친일행위 은폐

 

광복후 김기창의 회화적 변모에는 여성화가로서 추상주의를 지향한 박래현의 영향도 있었다. 광복다음해 결혼한 박래현과는 17회의 부부전을열어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자유신문}의 미술기자, 민속박물관의 미술부장을 잠시 지낸 것(1947∼48)을 제외하고는 작업과 화단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미협과 국전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국전과 민전의 심사위원으로서 꾸준히 화단의 세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백양회 창립 주도, 해외전에 한국 대표로 적극 참여, 해외 여행, 홍익대 미술과 교수(1954)와 수도여사대(지금의 세종대) 교수(1962∼74) 역임 등 그의 정치력에 걸맞는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또한 왕성한 활동으로 상복도 많아 여타의 친일 인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제12회 3·1 문화상(1971)을 받았고 3·1 문화상 심사위원(1972, 1977)에 위촉된 바도 있다. 이외에도 은관 문화훈장(1977), 국민훈장 모란장(1981), 예술원 정회원(1981), 중앙일보 중앙문화예술상 본상(1982),예술원상(1983), 5·16 민족상과 서울시 문화상(1986), 색동회상(1987) 등 관민단체의 상을 두루 받았다. 한편, 화단과 사회활동도 국제적이어서 한독미술가협회 회장(1981), 후소회 회장(1985)을 비롯해서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지부 실행위원(1967), 한국농아복지회 창립과 초대 회장(1979), 세계농아연맹 문화예술분과 부위원장(1985), 아시안게임 동남아채묵(彩墨)전 추진위원장(1986)을 역임하였으며, 88 올림픽 아트포스터 제작작가로 선정되는 등 다채롭고 의욕적인 면모를 과시하였다.

또한 박정희 군사 정권 아래서는 초상화나 기록화 제작을 도맡기도 하였다. 추사 김정호와 의병장 조헌의 영정(1974), 을지문덕과 신숭겸 영정(1975), 그리고 신라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 영정(1974)을 제작하여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받은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공공건물의 벽화나 그림제작도 많았고 성화집 {예수의 생애}에서는 한복을 입은 기독교화를 그려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현재는 1979년에 착공한 청주 교외의 화실에서 노년의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간행위원회를 발족시켰는데, 63년 동안의 작품활동을 총망라해서 초대형 화집을 발간할 예정인 모양이다. 그 간행위원회에 참여시킨 문화계·미술계 위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역시 김기창의 정치력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운보 화백이 한국 미술에 있어서 도저(到底)한 거봉이요, 또한 그의 작업이 장강처럼 맥맥히 이어져 왔음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즉, 운보의 80년 생애와 그 방대한 작품이……특히 그의 삶이나 예술은 육체적 이중고를 초극한 실로 '위대한 실존상'으로 우리 모두의 삶의 귀감이 될 것이다.(구상 시인의 글, 발간위원회 두번째 소식지, 1993. 1) 이 글을 쓴 시인 구상은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발간위원장이다. 아직도 우리는 김기창의 친일활동은 철저히 밀쳐놓은 채 그를 '삶의 귀감'으로 삼자는 주장이 공공연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제명(玄濟明창씨명玄山濟明,1902∼1970)

              일제말 친일음악계의 대부

 

1938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경성지부 간사
1944년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조선음악협회 이사

 

서울음대 창설의 주역

 

'현제명' 하면 누구나 곡목은 몰라도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고향생각])랄지,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그 집 앞])이랄지, 또는 "배를 저어가자 험한 바다물결 건너 저편 언덕에……"([희망의 나라로]) 등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귀에 익숙한 노래들이 생각난다. 그만큼 현제명*은 가곡 작곡가로 널리 알려진 음악가이다. 그가 살아온 생애는 분명 홍난파와 더불어 몇 안 되는 양악계의 큰 별임에 틀림없다. 그는 한국 양악계에서 부동의 중진 음악가이다. 더욱이 홍난파가 광복 이전의 한국근대양악계의 대부라는 점과 달리 현제명은 근대뿐만 아니라 현대양악계에까지 큰 산맥을 이룬 음악가라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것은 그가 단순히 노래 몇 곡 작곡하고 성악가로 활동했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각종 조직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또 광복 직후 오늘날의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을 창설한 주역이라는 점에서도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였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이나 역사적 평가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현제명은 또한 뚜렷한 친일 전력을 가진 음악인이었으며, 광복 이후 역사적 반성 없이 악단에서 가장 강력한 대부로 등장한 인물이었다. 음악인은 오직 미적 평가의 대상이지 윤리적·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아님을 정당화시킨 병리적 계기가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현제명 역시 홍난파와 함께 일제 중반까지 '양악으로 민족개량운동'을 전개하다 후반부터는 음악과 관련한 모든 조선총독부 관제 친일단체에 지도자로 가장 강력하게 활동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친일 전력의 음악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개신교 출신이었고, 또 홍난파와 함께 현제명은 극소수의 미국유학파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근대양악계가 열악한 환경이었다는 것도, 이들의 음악활동이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이러한 배경은 광복 후 음악계가 '기독교-친일-친미-반공이데올로기'로 사고를 제한시키는 데 공헌한다. 현제명은 1902년 12월 8일에 대구 남산동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나 1970년 10월에 고혈압으로 작고할 때까지 성악가(전공), 국민개창운동 지도자,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 고려교향악단 창설자, 음악원 교장으로서 음악교육가, 오페라 연출가,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하였고, 예술원 종신회원 등을 지냈다. 대구 대남국민학교와 계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구 제일교회 성가대 단원으로 음악 체험을 시작하였다가 1924년에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곳에서 그는 선교사들로부터 성악과 피아노 지도를 받았으며, 이후 전주 신흥중학교에서 음악과 영어교사로 활동하였다. 1926년부터 2년간 미국 시카고에 있는 무디(Moody)성경학교를 다녔고, 1928년부터 1년 동안은 인디애나주 레인보우의 건(Gunn)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였으며, 귀국한 후에는 국내악단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29년 봄부터 연희전문학교 음악교수, 조선음악가협회(1930년 결성)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부각은 뚜렷하였다. 1930년대 초·중반 동안 국내 음악인으로는 홍난파, 김영환, 채동선, 안기영, 최호영, 독고선, 홍재유, 윤성덕, 김인식, 박경호, 김세형, 박태준, 김동진, 권태호, 이인선, 한기주, 김재훈, 김관, 정훈모, 채선엽, 이유선, 이영세, 홍성유, 이흥렬, 박태현, 홍종인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현제명은 작곡집 2권을 펴내기도 하였다. 1937년은 현제명에게 전환점을 가져오는 해이다. 즉, 이 해에 그는 전에 유학한 바 있는 건음악학교에서 '자연발성법'이라는 논제로 성악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직후부터 국내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음악가로 주목받았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음악보국'운동 본격화

 

1937년 5월에 그는 홍난파, 김영환, 박경호, 윤성덕, 이종태 그리고 전통음악분야의 함화진과 함께 새롭게 결성된 조선문예회의 회원으로 가입하게 되는데, 이로부터 그는 친일의 길을 걷게 된다. 홍난파와 마찬가지로 친일의 배경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이 있었고, 또한 민족음악 개량운동의 허구성도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문예회는 사회교화단체로서 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하고 일본인과 조선인 문예가 30여 명이 결성한 단체였다. 음악인들은 주로 곡을 붙여 발표하거나 악보제작과 음반취입 활동을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조선 음악인이 조선인을 계몽한다는 구실 아래 일제 지배층과 손을 잡음으로써 양악전공활동을 보장받은 것이다.

현제명은 1937년 조선문예회 활동을 통하여 '천황폐하 중심의 일본 정신으로 국체 관념을 뚜렷이 함으로써 시국인식을 고취하고 황군을 격려한다'는 취지 아래 [가는 비], [서울](이상 최남선* 작시), [전송](お見送り, 土生よねさく 작시)을 작곡하여 발표하였다. 1938년 6월에 현제명은 홍난파, 전영택 등 18명의 수양동우회원이 1937년 7월에 기소된 사건을 계기로 친일 대동민우회에 가입·활동하면서 그의 친일활동을 본격화한다. 그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1938년 결성)에서 경성지부 간사를 역임하였고, 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1941년 결성)가 후에 개편될 때에는 이사를 맡았다. 또한 '전시하의 국민들에게 건전한 음악과 음악 자체의 예술성을 국민음악 정신대(挺身隊)로서 활동·보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1942)된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제2기로 개편(1944)될 당시에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그의 친일음악활동은 정점에 이른다.

그리고 1940년대에 들어와서는 구로야마(玄山濟明)라는 창씨명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1941년 6월 조선음악협회가 신체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음악보국'(音樂報國)하자며 양악·조선음악·일본음악별로 음악회를 개최할 때(6. 4), 자신의 성악작품 [후지산을 바라보며] 등을 발표하였다. 현제명 이외에 이 음악보국 음악회에 출연하거나 작품을 발표한 음악인들을 살펴보면, 지휘 겸 테너 히라마 분쥬(平間文壽), 작곡 안기영·김메리·임동혁·김성태·박경호·이흥렬·김세형, 소프라노 이관옥·채선엽·김자경·최희남·이승학·이유선·김천애·주경돈, 테너 송진혁, 바리톤 최창은, 피아노 이흥렬·김영의·이경희, 바이올린 홍지유·림향자·하대응·계정식·김생려·김재훈·고종익, 비올라 안성교, 첼로 김태연, 플루트 김재호 등 국내 주요 음악인들이 망라되어 있었으며, 조선음악협회합창단과 이화여전·세브란스의전·경성음악학원·경성여자사범학교 학생연합합창단도 출연하였다.

1941년 11월 9일에 현제명은 일본어 보급을 통하여 '참된 황국신민 배출을 목적으로 설립한 전국적 시국학교' 중의 하나인 경성대화숙이 주최한 '(일본)국민음악의 밤'(부민관 대강당)에서 독창을 하였다. 이 음악회에는 김자경, 계정식, 경성음악전문학교 합창단, 이화여전합창단, 경성취주악단 등이 출연하였다. 그리고 경성대화숙이 1941년 12월 14일에 '총후 사상전에 정신(挺身)'하면서 개최한 대화숙 1주년 기념식에서는 현제명의 반주로 군가와 성수만세가 봉창되기도 하였다. 1942년 1월 23일에는 역시 대화숙 주최의 '군가강연의 밤'에서도 현제명은 일본 정신과 일본 정서로 만들어진 군가와 일본 국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현제명이 대화숙과 관련을 맺은 결과, 마침내 1943년 4월 1일에 경성대화숙 내에 '경성음악연구원'을 개설하는 데 성공한다. 이 음악연구원 교수진은 현제명을 대표로 하여 성악 김천애, 피아노 김영의, 바이올린 김생려, 작곡 및 이론 김성태 등으로 짜여졌다.

중요한 사실은 경성대화숙 부설 경성음악연구원이 광복 직후 경성음악학교로 이어지고 다시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학부로 발전한다는 점이다. 그는 1942년 12월 11일에 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 후원으로 개최한 조선음악협회 주최 제1회 음악경연대회에서 성악부 심사 전문위원을 역임하였고, 1943년 2월 24일 부민관에서 경성후생실내악단 주최,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원으로 열린 '(일본)국민음악연주회'에서는 개창지도를 하였다. 이 음악회는 미국과 영국음악을 몰아 내고 태평양전쟁 결전음악으로 '1억 국민이 군가로 국민개창운동을 보급'하자는 목적에서 개최되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3년에 태평양전쟁에 대한 결전결의 앙양기간을 설정하고, 조선음악협회와 합동으로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여러 가창지도대를 전국에 보내 순회지도하도록 하였다. 이 때 현제명은 가창지도대 지도자로 나섰다. 즉, 4월 29일에는 수원 일원, 5월 7일부터는 경기도 이천읍 일원, 5월 9일부터는 경기도 강화면 일원 등에서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주요 (일본)국민가는 일본 제2 국가(國歌)로 선정된 [바다로 가면](海行かば), [애국행진곡], [흥아행진곡],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 [태평양 행진곡], [애마진군가], [대소봉대일의 노래], [대일본 청소년단가], [대일본 부인회가], [아세아의 힘], [야스쿠니 신사의 노래], [국민진군가], [일월화수목금토], [대동아결전의 노래] 등 하나같이 일본 육군성이나 해군성 그리고 전시체제를 수호하는 기관들이 공모하여 유명해진 일본어 노래들이었다. 이 노래들은 조선의 민족정신을 약화시키고 민족정서를 해체시키고 일본 정신과 일본 정서를 표현한 곡들이다. 이러한 노래들을 현제명을 비롯한 국내 음악 주역들이 앞장 서서 가창지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일본정신과 일본정서로 길들이는 가창지도였다. 현제명은 1943년 8월 1일부터 징병실시 감사주간에 실시된 조선총독부 행사에 어김없이 출연한다. 즉, 8월 3일 오후 7시 경성운동장에서 진행된 '야외음악·영화의 밤'에 징병실시 시행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항공일본의 노래]와 [대일본의 노래]를 부른다.

 

 

홍난파 사후 친일음악계의 지도자로 부상

 

현제명은 홍난파가 없는 1941년 이후에 일제권력과 더욱 밀착한 결과 강력한 악단 대부로 존재하게 되었다. 1944년 5월에 '건전한 (일본)국민음악예술의 수립을 위하여' 제2기 경성후생실내악단이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면서 현제명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가장 강력한 대부로 등장한다. 단원으로는 피아노 김원복·윤기선·김영애, 편곡 이흥렬, 바이올린 정희석, 첼로 나운영, 소프라노 이규봉·고영희, 바리톤 정영재, 김학상, 이종태 등이 있었고, 상무이사에는 스즈키 칸이치로(鈴木貴一郞), 즉 이종태(李宗泰:일본 도쿄음악학교 출신의 음악교육가)가 창씨명으로 활동하였다. 경성후생실내악단은 광산이나 공장 등 소위 병참기지화가 되어 버린 조선의 생산지대들을 찾아 산업전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일본)국민음악 건설에 매진한다는 취지에서 발족된 것이었다. 한편, 조선음악협회는 1944년 7월에 일본에서 정보과 촉탁으로 이와모토(岩本政藏)를 영입하여 새로운 정비를 단행하는데, 이 때 현제명은 이사로 선임되었다. 조선음악협회의 회장은 아베(阿部) 총독부 정보과장이었고, 이사는 재류(諸留) 조사관과 이와모토 정보과 촉탁이 맡았으며, 민간인 이사로는 오오바 이사노스케(大場勇之助: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겸 경성제1고등여학교 음악교유) 및 아베(阿部文雄)와 함께 현제명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로써 현제명은 경성후생실내악단 이사장직과 더불어 유일한 조선인 조선음악협회 이사로서 조선 최고의 친일 음악실력자가 되었다. 현제명은 조선음악협회 이사로 취임하는 것을 계기로 세 가지 주요 사업을 전개하였다.

첫째,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에서 조선음악협회 회원과 경성시내 중등학교 학생을 동원(30개 단체 500여 명)하여 국가봉납식(國歌奉納式), 곧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君が代)를 일본신전에서 봉창하면서 황국신민으로서 일본 정신을 고취하고 음악보국을 맹세하는 식을 거행하였다(1944. 7. 26. 오후 2시 30분). 이 자리에는 아베 총독부 정보과장과 음악협회 관계자, 중앙방송 관현악단, 각급 학교장 등이 참가하였는데, 일본 국가를 부르고 역시 제2 국가인 [바다로 가면]을 부르면서 음악보국을 맹세하였으며, 식이 끝난 후 밴드를 앞세워 남대문에서 총독부 앞 광장까지 시가행진을 하였다.

둘째, 음악가 숙정사업이었다. 1944년 5월 18일 조선총독부 부령으로 확정한 '조선흥행취체규칙'에 의거, 같은 해 9월 1일부터 전면 실시하는 '기예자 증명서'(기예증) 발부를 기화로 음악관계자 약 400명 중 350명을 합격시키고 나머지는 숙정하였다. 물론 이 숙정사업에는 음악협회 이사장과 일본인 이사 그리고 현제명이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셋째, 조선총독부 지시하에 조선음악협회를 비롯하여 경성후생실내악단과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연대하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일본국민음악 보급으로 전시체제를 갖추는 사업을 전개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각종 노래 보급과 음악회 개최, 일본 음악인 초청 등을 추진하였다. 조선음악협회가 1945년 5월 27일부터 9월 10일에 걸쳐 경성부민관에서 일본음악, 조선음악, 조선양악 등 세 분야의 음악회를 개최한 것도 그의 일환이었다.

또한 일본 테너로서 이탈리아를 유학하고 일본에서 꽤나 알려진 후지와라 요시에(藤原義江)를 초청하여(1945. 1. 5∼7, 약초국민극장), 조선군 보도부, 경성군인원호회, 국민총력조선연맹 홍보부 등의 협력으로 상이군인 및 산업전사 위문 결전음악회를 개최한데 이어 경성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개최한 것도 그 예이다. 또한 일본음악을 각급 학교에 보급한 것도 이예 속한다. 그는 광복이 가까워지면서도 일본본토 결전을 위한 경성부민대회나 그 음악회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현제명이 이사장으로 있는 경성후생실내악단은 1945년 5월 8일에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조선의 문화향상 발전을 꾀하고 그 공적이 많은 문인·화가·음악가 또는 단체에게 도쿄 신태양사가 수여"하는 조선예술상은 제5회 수상대상자로 경성후생실내악단을 선정하였던 것이다. 즉, 결전음악과 활발한 공연활동으로 일본음악보국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었다.

광복 직후 현제명은 제일 먼저 고려교향악협회와 그 산하에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고 미군정 장관을 명예회장으로 영입하였으며, 한국민주당 문교위원으로 정당활동을 하였으며, 경성음악학교 교장으로,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초대 음악학부장으로 등장하였다. 이는 사실 일본제국주의 잔재를 민족정기로 청산하지 못한 광복정국에 기인한다. 수많은 음악가와 음악교사 그리고 유행가 작곡가와 가수들이 펼친 식민지하의 일본식 가창운동을 광복 이후 청산하지 못한 결과 오늘날 가라오케, 비디오케 등 일본문화사업이 노래방 문화를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 또한 그 음악가들의 친일행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들에게 과제로 남는다.

 

 

홍난파(洪蘭坡,창씨명 森川潤,1898∼1941)

    민족음악 개량 운동에서 친일음악 운동으로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
  1941년 조선음악협회 평의원

 

  한국 근대양악사의 대변자

 

우리가 머리 속에 홍난파를 떠 올릴라치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짚히는 것이있다. 어린 시절 누구나 불러 보았던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고향의 봄])이랄지, 우리네 누님들이 서럽게 부르며 길 게 늘어뜨린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봉선화]) 등의 작곡가라는 점이다. 더욱이 [봉선화]는 담 밑에 저만치 외롭게 피어 있는 꽃과 같은 일제하 조국의 비운을 상징한다고 음악선생님에게 배운 바 있는우리에게, 홍난파는 '민족적 수절을 지킨 음악가'처럼 여겨졌다.

실제로 1942년 2월, 일본 도쿄에 있는 무사시노(武藏野)음악학교(1929년설립, 1949년부터 음악대학으로 직제개편)를 졸업한 소프라노 김천애(金天愛)가 같은 해 4월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회당에서 개최한 전일본 신인음악회에 하얀 치마 저고리를 입고 출연하여 [봉선화]를 열창함으로써 열렬한 환호와 벅찬 눈물로 감동을 가져온 바도 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부터 김천애는 귀국 활동을 통하여 [봉선화](때로는 봉숭아로알려졌다)로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더욱이 1943년 경성 후생 실내악단 단원이었던 김천애가 경상남도 삼천포 공연에서도 이 노래를 부를 계획이었는데, 일제에 의하여 이 노래가 '금지된 노래'로 처분됨에 따라'봉선화=홍난파=민족음악가'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홍난파는 우리 나라 근대음악사 중에서 양악사의 가장 큰 산맥일 정도로 그가 우리 음악에 공헌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전공은 바이올린이었지만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작곡가, 지휘자, 음악교육가, 음악평론가로서 큰 역할을 하였고, 때로는 출판사업가와 작가로서 여러 단편을 발표한, 말 그대로 전천후 만능 음악가였다. 그만큼 양악의 모든 분야에 우뚝 솟은 음악가임에틀림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근대' 양악사는 여명기나 다름 없어서 매우 열악하였기 때문이다.그는 한국 근대사의 인물이다. 1898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태어나 1941년 8월 30일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44세의 삶과 예술이 바로 한국 근대 양악사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2년에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한 그는, 1913년부터 3년 동안 음악학교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다님으로써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21세가 되던 1918년에 일본 '도쿄음악학교'(흔히'우에노'로 줄여 말하는 학교)로 유학하였지만 그 다음해인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지하고 귀국하여 음악활동을 열정적으로 펼쳐나간다. 바이올린 연주가, 작곡가, 평론가, 음악교육가, 지휘자, 작가로 활동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그는 1926년에는 사립인 도쿄 고등 음악학원에 편입하여 1929년에 졸업하였고,1931년 7월에는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기도 하였다.한편 그는 경성악우회 주간(1919), 전문적인 음악연구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연악회(硏樂會) 창설(1922) 및 운영, 조선음악가협회 상무이사(1931),이화여전 음악강사(1933), 난파 트리오 조직(1933) 및 활동, 경성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경성방송 관현악단 조직 및 지휘(1936), 경성 음악전문학교 교수(1938) 등을 역임하면서 조선 악단 전면에 우뚝 솟았다.

 

 

민족음악 개량운동에서 친일 음악운동으로의 급격한 변모

 

그러나 홍난파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의 민족 현실과 무관한 음악가였다.그의 화려한 음악활동은 일제가 3·1 운동 후 내세운 이른바 '문화정치'에 상응하여 '서양음악으로 민족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입장 속에서 진행된것이었다. 즉, 민족 개량운동 쪽에서 펼친 음악활동이었던 것이다.더욱이 중일전쟁이 일어나는 1937년 7월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펼쳐져 왔던 그의 '민족음악 개량운동'이 '친일음악운동'으로 급격하게 변모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변모는 두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 듯하다. 하나는'민족음악 개량운동'이 애초부터 식민지하에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수양동우회' 사건이다."조선음악 대부분이 극히 지완(遲緩)하여(더디고 느려서- - -인용자) 해이하고 퇴영적인(뒤로 물러나서 움직이지 않는- - -인용자) 기분에 쌓여 있지마는 서양의 음악은 특수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거개 경쾌 장중하다"([동서양음악의 비교], 1936)라고 말할 정도로 조선음악을 비판하고 서양음악을 열정적으로 계몽·보급하려 한 그의 '민족음악개량운동'은 기실 조선음악의 역사인식이나 미학에 관하여 무지한 데서 비롯하였다. 또한 이러한 서양음악 계몽운동이 식민지하의 민족현실과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아야만 가능하였기 때문에도 그의 '민족음악 개량운동'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 되자 쉽게 친일의 길을 걸어간다.홍난파는 1937년 4월 총독부 학무국이 주도하고 일본과 조선의 문예가 30여명이 결성한 사회교화단체 '조선문예회'에 회원으로 가입한다. 조선 문예회는 작가들과 홍난파, 김영환, 박경호, 윤성덕, 이종태, 함화진, 현제명* 등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친일단체였다.

홍난파는 1937년 6월에 안창호 등 수양동우회 회원 150여 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피검되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한동안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그 이후 그의 친일화는 본격화된다.1937년 9월 15일 조선총독부와 조선문예회가 '시국인식을 철저히 하며 사기를 고취'하기 위한 '시국가요 발표회'를 이왕직 아악부에서 개최하자, 홍난파는 최남선* 작사의 [정의의 개가(凱歌)]에다 곡을 붙여 친일가요를 발표하였다.1937년 9월 30일에는 조선문예회가 신작발표회로서'황군위문조성- - -총후반도의 애국가요' 발표회 겸 '시국가요 피로의 밤'을 부민관 대강당에서 가질 때, 그는 [장성(長城)의 파수(把守)](최남선 작사)와[공군의 노래](空軍の歌:- - -彩本長夫 작사)라는 친일가요를 발표하였다.1937년 10월 3일에는 경성 고등 음악학원이 주최하고 경성 군사 후원연맹이 후원하는, 부민관에서 열린 음악보국대 연주회에 출연하였다.

1938년 6월에는 앞서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말미암아 전영택(田榮澤),현제명 등 18명의 동우회 회원이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1941년 최종재판에서 그 동안의 친일 전력이 참작되어 전원 무죄판결이 날 때까지 계류되어 있었다.

 

 

음악총력전의 기수

 

그는 1938년 7월 9일에 경성방송국 제2방송 '동요와 합창' 시간(오후 6시)에 경성방송 관현악단의 반주와 경보(京保)합창대·경성보육학교 생도합창대(지휘이흥렬)의 노래를 지휘하여 친일가요를 방송하였다. 이 때의 노래들중 중일전쟁(1937. 7. 7)의 산물로 나온 [애국행진곡]은 일본인에 의해 작곡된노래로서, '천황폐하의 신민으로 일본정신을 발양하고 약진하자'는 내용인데,일본 전통의 전형적인 2박자풍 작품이고, 더욱이 '일본의 제2 국가(國歌)'로알려진 작품이었다.

1939년 10월 5일 9시부터는 경성방송국 제1방송을 통하여 홍난파가 지휘하는 경성방송 관현악단 공연이 방송되었다. 프로그램 제목은'애국가곡집'이었는데, 이 때의 '애국'은 '일본천황국가에 대한애국'이었음은 물론이다. 그 곡목이 이를 반증하고 있는데, [황국정신을되새기며](皇國精神にかへれ), [부인애국의 노래](婦人愛國の歌),[애마진군가](愛馬進軍歌), [태평양행진곡](太平洋行進曲) 등이 그것이었다.[애마진군가]의 경우, 일제가 동남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킨 후 그 전선에서 전쟁용 말(馬)이 필요하게 되자, 조선과 일본 현지인들로 하여금'애마사상'(愛馬思想)을 함양시키기 위해 일본 육군에서 가사와 곡을 공모한 작품이었다. 그 음악적 특징에 있어서도 이 노래는 요나누키 음계에다 2박자라는 일본 민족의 전형적인 음악이었다. 1939년 1월에는 6개에 이르는 일본의 레코드 회사가 이를 녹음하여 발매하기도 하였다.

[태평양행진곡]은 1939년 7월 20일 '바다의 기념일'(海の紀念日)을 제정한 직후 공모한 작품 중 제1위를 차지한 작품으로, '황국(皇國)의 생명선'인 태평양을 일본 영역화하자는 작품이었다.당시 이러한 노래들은 '국민가요'로 불려졌다. [애국행진곡], [애마진군가],[태평양행진곡], [흥아행진곡], [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 등은 태평양전쟁 직 후부터 국민총력 조선연맹이 음악총력전을 펼치며 이른바 '국민개창운동'과{국민가집} 발행을 통하여 '중점적으로 불러야 할 노래'로 선정하면서 강압적인 학습노래가 되어 있었다. 그 노래 내용은 어김없이 '일본국민가요'로서 '천황폐하 중심의 일본 정신과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반민족적인 노래들이었다.

이 노래들이 반민족적인 노래들이고 이 노래들을 전파하는 것 자체가 친일음악행위라는 것은, 그 노래들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정서를 일본정신과 일본정서로 바꿔 놓으려는 것이며, 결국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역사적으로 합의해 온 바 있는 민족정신과 민족정서를 '해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것이기 때문이다.더욱이 홍난파는 친일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친일가요와 글을 계속하여 발표하였다. 연대 미상이지만 중일전쟁 이후에 발표한 친일가요 [희망의 아침]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고, 1940년 7월 7일자{매일신보}에 발표한 [지나사변과 음악]은 그의 대표적인 글이다.

[희망의 아침]은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가 펴낸 {가정가요} 제1집에 발표한노래로 가사는 춘원 이광수*가 지었다. 가사에서 "일어나거라 우리 임금의분부" 받아 "새로운 세계를 이룩"하고 "대아시아 대공영권"의 "우리 일장기 날리는 곳이 자자손손 복 누릴 국토"라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천황폐하에게 몸과 마음을 바쳐 대동아 공영권을 건설하자'는 일본정신, 곧 황국정신의구현이었다. 음악 특징으로는 전형적인 일본 민족음계인 '도레미솔라'라는 요나누키 음계에다, 역시 일본 음악의 특징인 2박자 계통으로 작곡되었다.따라서 홍난파가 1930년대 벽두부터 주장한 순수 음악운동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현실을 외면할 수 있었던 자기 도피와 자기 기만의 음악운동이었다. 그가 조선 양악계의 대부라는 점에서도 그의 두 마음과 두정서는 일본 마음과 일본 정서가 중심이었다.

한편, [지나사변과 음악]이라는 글에서 그는 더욱 분명하게 일본인이 되어있었다.성전(聖戰)도 이제는 제3계단에 들어가서 신동아(新東亞) 건설의 대업(大業)이 ○○○ 더욱 견실하게 실현되어 가는 이 때에총후(銃後:후방- - -인용자)에 있는 여러 음악가와 종군(從軍)했던 악인(樂人)들의 뇌리에는 용용히 넘쳐 흐르는 감격과 ○○적 감흥이감발(感發)해 갈 것인즉, 이번의 성업(聖業)이 성사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할 때에 그 서곡으로, 그 전주적 교향악으로 '음악 일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날 날이 1일이라도 속히 오기를 충심으로 비는 바이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을 기울여서 총후국민(銃後國民)으로서 음악보국운동에 용왕(勇往) 매진할 것을 자기(自期:마음속에 스스로 기약함- - -인용자)하지않으면 안 될 것이다.이 글을 보면 홍난파는 이미 제국주의를 펼치고 있는 일본 '천황'의 신민(臣民)이 되어 있었다. '음악 일본'이 하루라도 빨리 본궤도에 올라 서있기를 바라는 그에게 '음악 조선'은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그는 1940년 9월 1일자 {매일신보}에서 창씨개명한 이름 모리가와 준(森川潤)을 사용하고 있는데, 창씨개명한 이름조차 성도 이름도 완전하게일본식으로 바꾼 것이다. 같은 해 10월 16일에 홍난파는 국체본의에 바탕을두고 내선일체를 획책하며 신동아질서 건설에 매진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국민총력 조선연맹의 문화위원으로 선정되었다.또한 1941년 1월 25일에는 '악단을 통하여 직역봉공을 하고 신체제 운동을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 최대의 친일음악단체 조선음악협회(회장은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국장 시오와라鹽原時三郞)의 23명의 평의원 가운데7명밖에 안 되는 조선음악인 평의원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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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친일파 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친일파라고 무조건 나쁜건가요? 보통... B 지역비하와 역사왜곡 세력은 누구인가? ...역사속 반역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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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때 독립운동가분들이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것은 친일파들이 자기합리화하는 개소리이며 독립... B 지역비하와 역사왜곡 세력은 누구인가? ...역사속 반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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