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외 무역에관하여

고려의 대외 무역에관하여

작성일 2003.03.24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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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기에 국제교역은 매우 활발하였다. 고려 정부에서도 장려하였고 가장 활발한 교역국인 송(宋)측에서도 적극적인 통상책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공무역(朝貢貿易) 이외의 사상(私商)의 활동도 크게 활기를 띠었다. 개경에는 송상(宋商)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상인들이 내왕하였는데, 그 개경에 이르는 예성강 입구에 벽란도(碧瀾渡)가 자리하고 있어, 국제교역항으로서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송을 비롯한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여, 고려의 국명이 서양에 알려져 "Corea"라는 호칭을 얻기에 이르렀다. 고려시기에는 중국대륙에 여러 왕조가 성쇠를 겪어, 고려는 여러 나라와 교역하였는데 [자료1], 나라마다 교역하는 방법이나 물품, 그리고 거래 장소와 통로가 상이하였다.

해외무역은 신라하대 이래 활발하였으며, 고려 왕실 자체도 그에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다. 해상세력들이 자유로이 국제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것은, 국가의 중앙집권화 정책과 방향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국가간의 공식적인 교역관계를 위주로 편성하되 민간사무역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하였다. 민간의 사무역은 이제는 국가의 허가를 전제로 가능하게 되었다. 사무역은 상인이 외국에 파견되는 사신과 동행하여 교역하는 것이 주요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감시를 피해 행해지는 밀무역(密貿易)의 형태도 있었다.

고려전기 고려와 가장 빈번한 교역을 한 나라는 송이었다. 송에 이르는 길은 국초에서 문종 28년(1074)까지는 산동(山東)의 등주(登州)방면에서 거의 직선 통로를 택하여 대동강어구의 초도(椒島) 옹진구(甕津口) 예성항(禮成港)에 이르는 길이 중심이었으며, 그 이후는 거란의 위협을 느껴, 남쪽으로 바뀌었다. 예성강에서 출항하여 자연도(紫燕島) 마도(馬島0 군산도(群山島)를 거쳐 서남으로 나아가 명주에 도달하는 길이었다. 이 항로는 명주·정해에서 순풍을 만나면 3일만에 바다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고, 또 5일이면 흑산도에 도달하여 고려 국경에 들어갈 수 있는 빠른 뱃길이었다.

고려와 송의 교역이 활발했던 것은 송조의 상업정책과 관련이 있었다. 송은 늘어나는 재정지출을 극복하기 위해 상인들의 상업활동을 보호 내지 장려해 주는 대가로 세금을 부담지워 세입의 부족을 보충하고자, 송 태조 때부터 상세(商稅)의 규례(規例)를 정하고 서남제국(西南諸國)과도 교역을 활발히 하였다. 고려와 송의 무역은 크게 조공무역과 민간무역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조공무역은 조공품(朝貢品)과 회사품(廻賜品)의 형식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 양국간에 교역되었던 국신물(國信物)은 그 품목이 30가지를 넘고, 물량면에서도 막대하여 국교를 상징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공무역의 품목이었음을 알게 한다 [자료4]. 실제로 송의 조정에서는 고려의 공물을 상품과 같이 취급한 예도 있었다. 고려 광종 13년(962)부터 명종 3년(1173) 사이에 고려의 사신이 송에 간 것이 약 60회이며, 송의 사신이 고려에 온 것이 약 30회였다.

민간무역은 공적인 조공무역보다 훨씬 활발하였다. 송상인의 내항횟수는 고려 현종 3년(1012)부터 충렬왕 4년(1278)까지 약 120여 회에 달하였고, 내항한 송 상인의 총인원은 약 5천명에 달하였다. 송과의 민간무역은 현종때부터 빈번하였는데, 특히 문종 때 가장 활발하였다. 고려에서 송에 수출한 것은 금·금은기구(金銀器具)·화문릉(花文綾)·세저(細苧)·생포(生布)·인삼(人蔘)·문피(文皮)·백지(白紙)·향유(香油)·송자(松子)·화문석(花文蓆)·나전(螺鈿)·장도(長刀)·지(紙)·필(筆)·묵(墨)·선(扇) 등이 있었다. 반면 송으로부터 수입한 것은 의대(衣帶)·안욕(鞍褥)·채단(彩緞)·칠갑(漆匣)·옥(玉)·금은기(金銀器)·금상(金箔)·차(茶)·향료(香料)·약재(藥材)·서적(書籍)·악기(樂器)·화폐(貨幣)·상아(象牙)·공작(孔雀0 등이었다. 그 가운데 고려의 종이는 송의 수도나 항구는 물론 장강 유역 안쪽까지 널리 유통되면서 중국인들의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수입품 가운데는 송산(宋産)이 아닌 서남아시아의 물산도 있어, 송상이 중계무역을 행하였음을 알게 한다. 고려와 송의 교역물품은 사치품·고가품이 중심이 되어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이 왕실과 귀족뿐이었으므르로, 그 교역은 특수계층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송상의 무역활동은 상품을 고려왕에게 헌상하고 그에 대하여 무역허가와 회사를 받는 사헌(私獻)무역의 형태를 취하였다. 활발하던 양국의 민간무역은 남송에 이르면서 점차 쇠퇴하여, 명종 재위 27년 동안에 송과의 무역은 3회에 불과하였으며, 신종 7년간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희종 7년간에는 1회, 고종 46년간에는 2회가 보일 뿐이었다.

송상은 빈번히 대규모로 고려에 와서 사헌무역을 하는 한편 일반인을 상대로 무역하였다. 심지어는 연안에서 밀무역을 하기도 했다. 정부는 밀무역을 금지하고, 벽란도에 감검어사를 파견하여 감시하였다. 실제 밀무역을 하던 송상을 적발하여 태형을 가한 일도 있었다. 민간무역을 정부에서 허용하기는 하지만, 이처럼 통제하에 두고서 인정한 것이었다. 물론 국가의 이러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밀무역은 완전히 근절되지는 않았다.

거란과의 교역은 송에 비해 활발하지 못하였다. 거란과는 성종·현종 때 전쟁을 한 이후에 국교가 정상화되었는데, 사신을 교환하며 국신물을 주고 받는 공무역이 주로 이루어졌다. 거란과는 의례적인 국신물 교환이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송과 지속적인 교류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거란 조공무역의 의존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거란은 무역장[場] 설치를 요구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나, 고려의 반대로 각장무역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고려와 거란의 무역에서는 조공무역의 비중이 컸다 [자료5]· [자료6]. 고려에서는 거란 사신의 객관으로 앙은관(仰恩館) 인은관(仁恩館) 선은관(宣恩館) 등을 설치하여 그들의 숙소 겸 시장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조공무역을 통해 고려가 거란에 수출한 품목은 교환가치가 있는 금·은·동과 포면류·화문석 등의 공예품, 문방용품 및 인삼·차 등이며, 거란으로부터 수입한 물품은 말·양·능라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리고 거란판 대장경이 다수 입수된 사실이 주목된다.

고려와 여진족 사이의 교류는, 금이 성립하기 전부터 있어 왔다. 10세기 초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여진의 추장이 무역을 위해 고려에 온 것이 230여회나 될 정도로 자주 왕래하였다 [자료2]. 고려로서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었으나, 안보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여진과 교역하였다. 금(金)이 건국된 후에는 국신물을 교환하는 공무역이 중심이 되었으며, 일부에서는 사무역도 행해졌다. 은폐·의대·포·채백·금견 등을 금에 수출하였으며, 금·말·화살·철갑옷 같은 무구류, 담비가죽·청서가죽·족제비털 등을 수입하였다. 금나라에 파견되는 사행(使行)은 무역의 이익을 노려 많은 물품을 가져가 교역할 수 있어 큰 이익을 보장하였기에, 다투어 파견되기를 희망하였다 [자료8].

고려와 금 사이에는 사행무역 이외에, 국경선 부근에 각장(場)을 설치하여 활발한 교역을 전개하였다. 압록강 방면에는 의주와 정주에서, 동쪽으로는 정평과 청주에서 각장 무역을 하였다 [자료9]. 각장 무역이 주는 경제적 이익은 국가재정으로나 상인 개인들에게 대단히 큰 것이었다. 고려왕실조차도 이 각장을 이용한 교역을 하기도 하였다. 각장 무역에서는 고려의 쌀과 저포가 금측(金側)의 견사나 비단·은 등과 교환되었으며, 북방국가의 정권교체로 변방이 혼란스러울 때에는 고려측의 미곡이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각장 무역은 12세기 초 요·금 교체기나, 13세기 초 금·원 교체기와 같이 북쪽 변방에서 변화가 생길 경우에는 국가의 안전을 위하여 폐쇄되기도 하였다.

아라비아는 당시 대식(大食)이라 불리었는데, 이 대식국인은 당대(唐代) 이래로 남중국의 광주를 중심으로 무역을 해 왔으며, 송대에 이르러 송의 해외 무역 장려책에 힘입어 활기를 띠었다. 그들은 당시 남중국 연안에 출입하면서 송상의 고려무역에 자극되어 고려에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은 수은·점성향(占城香) 등 진귀한 물품을 바치고 금과 비단을 받았다. 아라비아 상인의 내왕에 관한 기사는 3회에 그쳐, 고려와 그들 사이에 지속적인 무역활동이 행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송상인이 고려와 아라비아 상인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교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의 교역은 외교 관계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민간차원에서 행해졌으나, 문종 10년(1056) 일본 사신이 고려에 온 것을 계기로 활발해졌다. 일본 상인들은 빈번히 고려에 와서 토산물을 바치는 사헌무역을 하였다 [자료3]. 일본의 장원귀족들이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에 적극 나섬으로써 고려에 내항하는 상인이 증가하자, 고려는 진봉선을 1년에 1회 2척으로 제한하는 등 규제를 가하였다. 11세기 후반 이후 일본과의 무역은 주로 진봉선에 의해 금주객관에서 이루어졌다. 무인정권시기에는 구주지역의 지방세력들이 적극적으로 교역에 참가하였으며, 고려의 상인들도 일본과의 사무역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 이후로는 거의 교역이 단절되었다. 일본에는 인삼·쌀·콩·마포·서적과 중국산 비단을 수출하고, 수은·유황·진주·소라·해조·거울상자·벼루상자·책상·향로·부채 등과 칼·활·화살·갑옷 같은 무구류, 그리고 후추·단목·침향·물소뿔 같은 남방산 물품을 수입하였다.

고려후기 원의 간섭하에선 주로 원과 교역하였다. 고려는 원과 단일한 경제권에 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을 통해 세계시장과 연결되었으므로, 고려후기의 대외교역은 어느때보다 활발하였다. 처음에는 원이 남송이나 일본 정복전쟁에 필요한 말과 군량을 확보하고자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고 강제교역을 시행하여 엄청난 경제 부담을 주었다.

원과 공무역은 왕이 원 방문 또는 사신의 교환을 통해 이루어졌다. 고려에서는 예물을 보내고 원에서는 답례품을 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교환에서 고려는 금·은 세공품과 자기·직물류·가죽을 보내고, 원에서는 금·은·비단·목면 등을 받아왔다. 빈번한 왕실간의 교류로 왕실이 무역의 주체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자료10]· [자료11].

공무역도 성행하였지만, 사무역도 활발하였다. 사무역의 한 형태는 왕이나 사신의 수행원에 의한 것이었다. 대규모의 수행원은 사적인 교역을 하였으며, 상인들도 이들과 결탁하여 사무역을 하였다. 상인들은 말·모시·베·인삼 등을 가지고 가서 팔고, 다시 명주비단·능라비단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원의 상인들도 고려에 와서 활발히 무역하였다. 원과 교역에 편승하여 우마·금·은 등이 유출되었는데, 은의 유출은 고려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국제교역은 육로를 통해서도 이루어졌지만, 해로를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거란이나 금과는 주로 육로를, 송·아라비아·일본과는 해로를 통해서 교역하였다. 원의 경우는 육로와 해로 두가지가 모두 활용되었다. 해로를 통해 고려에 오는 경우, 개경에 이르는 관문인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벽란도는 각국의 상인들이 몰려드는 국제상도시였으며, 이곳에서 많은 물자가 교류되었다 [자료7]. 이곳에는 국가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국가의 허락없는 상행위를 통제하였다. 벽란도는 국제항으로서 번성하였는데, 이곳에서 개경에 이르는 도로는 상인의 왕래로 번잡할 정도였다.

고려와 외국의 활발한 경제교류는, 고려의 국내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거래되는 물품은 비단이나 서적, 기타 귀중품이나, 무구류가 중심이 되어, 일반 서민들과는 관계없는 귀족이나 왕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이었다. 따라서 국제교역은 귀족층을 대상으로 한 교역의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서민들은 귀족이 외국에 매각할 물품을 생산하거나 헐 값에 탈취당하였으며, 귀족들의 소요품 구입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큰 고통을 겪었다 [자료10]. 국제교역의 성행은, 고려 경제 전체를 활발하게 하였으며, 고려의 국제적인 위치를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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