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 책 추천

우리나라 역사 책 추천

작성일 2008.11.22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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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 하는데요..

국사 과목이 있더라구요..

 

솔직히 저는 초등학교 4학년때 처음 사회라는 과목을 시작으로 고3까지

사회는 정말 못해요..

우리나라 역사 아무것도 몰라요,

고구려 신라 백제 이것두 모르고요,, 고조선이 뭔지, 암것도 모르는 바보 멍청이에요 ㅜㅜ

 

솔직히 사회라는 과목, 국사 세계사 근현대사 등등

역사에 관한건 싫어하고 보지않았거든요..

 

근데 지금에서야 느낀거지만 참으로 중요한걸 지금까지 놓치고 있는것 같아서,

 이런 방면에 빠삭(?) 하신 고수분들의 조언ㄴ을 듣고자 합니다.

 

저처럼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전무한 사람에게 꼭 필요하고 딱 맞는 책이 없을까요?

 

뭐 공무원시험준비로 인해서 시작하긴 하지만

너무 기초도 없는 상태에서 어려운 책들을 보고 외우려니 여간 힘에 부치는것이 아니네요..ㅜㅜ

 

부디 유익하고 한눈에 역사를 볼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도표 많은건 잘 안봐서...

 

암튼 내공 팍팍 쏠테니 부디 알려주셔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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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국사책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답변드리겠습니다.

 

제가 권해드리는 책은 독학국사 라는 책 입니다. 공무원시험 또는 역사전공자들에게는 필수아이템이죠.

독학국사는 국사편과 근.현대사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교과서를 쉽게풀이해서 만든책으로 글이 어떻게 되어

있냐면 '~되어있지요. 했습니다' 같이 딱딱한 멘트는 없어서 지루하지않고 세세한부분까치 커버해주기때문에

많이 도움이 되실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용마다 중요한사실을 잘 정리해뒀고 표를 만들어뒀기때문에 한눈에 보시길 용이하실거에요. 시중가는 14000원[국사편] 근.현대사편은 대략 12000원 정도 합니다.

 

역사에대한 기초상식이 전무하시다면 성인이라고 할지라도 만화책형식의 역사를 한번쯤 읽어보시는것을

추천해드립니다. 우선 역사에 대해서 이질감이 덜있어야겠지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우리나라 역사 알아보기

   공무시험출제과 비슷하지만

   본 역사책에서 자세히 보면

   어려운 출제가 있습니다.

   시험이란 자신이 복습해서

   잘 합격하길 바랍니다.

 

 

한국의 역사 (연표)  v  d  e 
선사 (유적)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환인
환웅 (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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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 단군
진국
삼한

 



 
 
 


 
 
 


   

   



고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삼별초의 항쟁
홍건적의 고려 침공
조선
역대국왕 /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 / 병자·정묘호란
경복궁·창덕궁·종묘·화성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선사 시대
이 부분의 본문은 한국의 선사 시대입니다.
기원전 4000년 경 빗살무늬 토기, 서울 암사동 선사 유적지 출토

한국의 선사시대구석기 시대 후기로부터 시작되며, 약 70만 년 전에서 청동기 시대까지의 시기에 해당된다.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발굴된 유물 및 유적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발굴 성과와 연계하여 연구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

한국의 구석기 시대는 70만 년 전에서 약 1만 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약 70만년전 부터 한반도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약 4만 년 전에 현생인류가 출현하면서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작은 씨족 사회가 서서히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은, 원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다른 부족들이 유입되었다는 주장, 원주민이 이동 없이 진화하였다는 주장, 원주민과 유입된 주민들이 혼합되었다는 주장 등의 이론이 있다.

 중석기 시대

한국의 중석기 시대(또는 고신석기 시대)는 약 1만 년 전 부근의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진행하는 과도기에 해당되며, 학자에 따라서는 중석기를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 등, 동아시아 중석기 시대의 구분과 함께 다양한 이론(異論)이 존재한다.[2][3][4]

 신석기 시대

한국의 신석기 시대는 기원전 약 1만 년 전에서 4천 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이후 후기 신석기시대(기원전 약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사람들의 군집 생활의 유적지가 여러 곳에서 발굴되고 있어 씨족을 중심으로 생활하였고 점차 다른 씨족이나 먼 지역과 교역이 이루어지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부족사회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국가'에 해당되는 특징적인 유적이 없어 국가 형태는 이 시기까지 세워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문헌상으로는 한국의 첫 국가인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상고 시대

상고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된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 ~ 기원전 3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단군 왕검에 의해 이른바 단군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진 이후 한민족의 역사가 첫 장을 열었으며 이 시대를 흔히 고조선 시대라고 부른다.[5]

이 시기는 농경의 발달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청동기가 사용되면서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부와 권력을 가진 족장(군장)이 출현하였고, 성읍국가로 발전되었다고 추측된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고인돌,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등이 있다. 부족장은 세력을 키워 주변 지역을 아우르고, 마침내 국가를 이룩하였다.

 고조선

이 부분의 본문은 고조선입니다.

고조선(古朝鮮)은 청동기 시대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국가이다. 성읍국가를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부족연맹체를 형성하게 되는데, 대동강 유역에서 요하 유역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건국 연도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것은, 동국통감에 따른 것이다. 동국통감에서는 고조선 건국 연도가 요임금 즉위 25년에 건국되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요임금의 실존여부도 확실하지 않다. 학자들 중에서는 그 때에는 아직 신석기시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들어 고조선의 건국 연도를 기원전 7~8세기 정도로 추측하기도 한다.

 기자조선에 관한 논란

조선 시대 이전에는 은나라에서 건너온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이 정식 역사로서 인정되었으나,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점차 부인되어 현재에는 대한민국북조선의 역사학계 모두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 요서 지방에서 발굴되는 이 시기의 유물과 관련하여 기자조선의 성격에 대한 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있다.

 철기 시대

철기의 한국 전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국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300년경 ~ 서기 300년경의 시기에 해당되며,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6]

기원전 4세기경 한국에 철기가 보급되었고, 특히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중국 한나라와 대립할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만주와 한반도 각지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다.

 위만조선

이 부분의 본문은 위만조선 입니다.
이 부분의 본문은 한사군 입니다.
위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위만조선(衛滿朝鮮)은 (燕)나라 사람으로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準王)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여 건국된 나라이다. 위만조선은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한나라와의 중계무역을 독점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은 중국의 망명자를 많이 받아들이고, 예(濊)나 진국(辰國) 등 주변 소국들이 한나라(漢)와 직접 교섭하는 것을 막았다. 한나라의 무제(武帝)는 기원전 109년 섭하(涉何)를 보내 우거를 달래려 하였으나 우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에 분노한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했고, 결국 위만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이후 한 무제는 옛 조선의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한군현은 고구려 미천왕낙랑군(樂浪郡)과 이후에 설치된 대방군(帶方郡)을 병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여러나라의 성장

대륙으로부터 전파된 금속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 무렵 이후에는 한강 이남으로 전래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 지역에서의 원시사회는 부족 사회로 전환되었다. 북부 사회보다는 뒤늦게 그 형식이 변모된 남방식 고인돌이 이 시기에 각처에서 축조되었으며, 또 그러한 사실은 부족 사회의 성립이 그만큼 뒤늦었음과 그 발전 과정이 북부사회의 그것과 비슷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철기문명을 받아들인 각 나라들은 철기를 이용하여 농업을 발전시키면서도 독특한 사회 풍습을 유지하였다. 많은 소국들이 경쟁하는 가운데 일부는 다른 나라를 병합되었고, 다시 연맹 왕국으로 발전하여 중앙 집권 국가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기원전 3세기경부터 예맥계의 부여족(夫餘族)이 세웠던 부족 국가인 부여(夫餘, 扶餘)는 지금의 쑹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지금의 만주 일대를 지배한 나라이다. 동은 읍루(挹婁), 남은 고구려 및 현도군, 서는 선비(鮮卑), 오환(烏桓)과 인접하였었다. 부여는 북부여(北夫餘), 동부여(東夫餘)로 구분된다.

부여는 전국을 사출도(四出道)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와 같은 제가(諸加)가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그 인구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계급인 하호(下戶)는 모두 노예에 속하였다고 한다. 또한 부여에는 영고(迎鼓)라는 제천행사가 있었고, 풍속이 매우 엄격하여 도둑질, 간음 등에 대해 특히 엄벌하였다. 북부여와 동부여는 모두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동해안에 면한 지역에는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라 불리는 부족 사회가 할거하고 있었다. 이들은 예맥족의 한 지족(支族)으로 고구려와 언어·풍속이 비슷하였다.

옥저(沃沮)는 지금의 함경도 일대에 위치했던 나라이며, 예맥족(濊貊族)의 부족사회였다. 또한 중앙의 왕이 없고 각 지방의 맹주인 현후(縣侯)가 군림하였다. 현후 밑에 삼로(三老)가 하호(下戶)를 지배하였다. 자원이 풍부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웃인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동예(東濊)는 한반도 동해안에 거주하던 부족사회로 농사를 주업으로 하였고, 직조기술도 발달하였다. 산과 하천을 경계로 읍락이 구분되어 각 읍락을 삼로(三老)가 통치했다. 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기원전 2세기경 위만이 고조선의 지배권을 장악할 무렵 이 지역에는 진국(辰國)이 있었고, 이들은 중국의 군현 세력에 저항하면서 점차 부족 연맹 세력을 형성하여 갔다. 그 결과 삼한(三韓)이라고 통칭하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등 세 무리의 부족 사회가 생겨, 기원후 3세기경에는 대방군에 공격을 가하기도 하고 직접 진(晉)과 교섭하기도 했다.

삼한(三韓)은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으로 구성되었으며, 세 나라 모두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였다. 농경과 철기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별읍인 소도와 이를 주관한 것으로 추측되는 천군(天君)이 있었으며, 파종 이후인 5월과 추수기인 10월에 각각 기풍제와 추수감사제를 지냈다.

일찍이 유력한 세력으로 등장했던 목지부족(目支部族)은 기원후 3세기 전반에 이르러 소멸된 것 같다. 이리하여 고구려로부터 망명해 온 백제(伯濟)의 부족이 그 지배권을 대신하였다. 전설상 온조가 영도한 백제는 마한 세력을 결합하여 백제왕국(百濟王國)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으로 진한의 여러 부족 중에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중심으로 한 사로(斯盧)가 경주평야의 6촌(六村)의 씨족 세력을 기반으로 신라로 발전해 갔다. 한편 변한에서는 구야국(狗邪國)이 가야로 발전하였다.

 고대

한국의 고대는 1세기 - 90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삼국시대

이 부분의 본문은 삼국시대입니다.
황금으로 만든 삼국시대 왕의 대구(帶鉤)

삼국시대는 여러 소국들 중 중앙집권적 국가로 발전한 삼국과 그 판도에 영향을 끼친 가야 연맹을 포함한 4개 국가가 정립된 시대를 일컫는다. 삼국시대의 전반은 고구려와 백제가 주도했으나 진흥왕 이후 국력이 막강해진 신라가 삼국시대 후기를 주도하고 결국 삼국 통일을 이루고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각국의 전성기는 백제 4세기, 고구려 5세기, 신라 6세기 순이다.

 고구려

이 부분의 본문은 고구려입니다.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국가이다.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동명성왕(東明聖王)에 의해 건국되었다. 태조왕(太祖王)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 대인 372년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고, 율령을 제정함으로서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켰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과 아들 장수왕(長壽王)의 영토확장으로 서로는 요동과 요서의 일부, 동으로는 동부여를 병합하고, 남쪽의 백제를 공격해 한강유역을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중국의 대규모 침략을 막아내었다. 598년-614년에 일어난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수나라를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수나라 멸망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당나라 또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연개소문, 양만춘등의 장수들이 이를 격퇴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 많은 중국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고, 668년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백제

이 부분의 본문은 백제입니다.
백제의 왕관 장식

백제는 서기전 18년 온조에 의해 하남 위례성에 건국되었다. 삼국지[7]에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백제는 3세기 경 충청도, 전라도 일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또한 북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와 중국 군현 사이의 영토적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4세기 근초고왕 때는 황해도 일부지역과 중국의 요서, 진평에 백제군을 설치하고 일본 규슈에 진출하는 등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와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등 수난을 맞았다. 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결국 관산성에서 전사했다.

그 후 백제는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신라군에 의해 멸망당했다. 백제의 문화는 대체로 세련되고 섬세한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백제의 문화는 왜 등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

이 부분의 본문은 신라입니다.

신라는 경주 지역에서 기원전 57년 경에 건국되었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국가의 틀을 세우는데는 가장 늦었다. 그러나 6세기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으며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기에 이르러 왕과 귀족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정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결국 경순왕 대에 국가고려에 넘겨주게 된다. 신라는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국민의 단결을 꾀하였으며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을 남겼다.

 가야

이 부분의 본문은 가야입니다.

2~3세기경에 김해 등지에 있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 고령가야, 소가야의 5개국이 합쳐져 전기 가야 연맹이 성립되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으로 인해 금관가야가 큰 피해를 입자 5~6세기 경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대가야를 중심으로 후기 가야 연맹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 역시 신라와 백제의 사이에서 위협을 받으며 서서히 무너져가 결국 562년 멸망한다.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부족국가의 연맹으로 전락한 것이 멸망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야는 김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웠으며 왜 등지와 교역을 하기도 했다.

 삼국시대의 경제, 정치

 경제

기록상으로는 삼국 초기부터 화폐가 사용된 것으로 보이나 유물이 발굴된 것은 없으며, 물품화폐가 주를 이루었다고 여겨진다.[8] 신라에서는 5세기 말과 6세기 초, 도읍인 경주에 시장을 열고 감독하는 기관을 두기도 하였다.[9]

 정치

삼국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토대로 한 전제왕권 또는 귀족정치였다. 고구려는 5부족 연맹체로 시작하여 태조왕 이후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었다. 백제는 마한의 작은 소국에서 발전하여 3세기 고이왕 때 중앙집권국가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신라는 이보다 늦은 시기에 중앙집권화 되었으며, 귀족회의는 각각 고구려의 제가회의, 백제의 정사암 회의, 신라의 화백 회의이다.

 남북국시대

이 부분의 본문은 남북국시대입니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까지의 영토를 확립하고 고구려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세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여 남북국의 형세를 형성한 시기로, 남북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통일신라

이 부분의 본문은 통일신라입니다.

한반도를 통일한 신라는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고도의 중앙집권체계를 확립하였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다.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으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였다. 진골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득난세력(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상대적으로 부각되었으나, 골품제는 유지되었고 진골귀족의 고위직 독점은 여전하였다.

 발해

이 부분의 본문은 발해입니다.

고구려 유민 대중상의 아들인 대조영길림성의 돈화시 동모산 기슭에 발해를 세웠다.(698년)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이루어진 다종족국가이나, 고구려를 계승하였는지의 여부에는 국가간, 학자간 이견이 있다. 발해는 무왕 때에는 중국(당)에 대항해 영토 확장에 힘썼다. 이어 문왕 때에는 중국과 친선 관계를 맺고 적대적 이었던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를 개통하여 대립관계를 해소 하려 했다.

 후삼국시대

이 부분의 본문은 후삼국시대입니다.

후삼국시대892년 ~ 936년의 시기에 해당하며 견훤궁예의 신라에 대한 반란과 백제,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과 형성된 세력들이 존속했던 시기를 일컫는다.

신라 말기에 들어서 중앙 정부의 무능력으로 인해 전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워 졌고, 골품제의 폐단이 속출했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이 실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중앙 정부에 봉기하였다. 이 중 가장 큰 세력이 었던 견훤과 궁예는 각각 후백제후고구려를 건국하였다.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한 후고구려는 왕건이 세운 고려에 의해 멸망하였다.

고려는 신라를 흡수한 뒤,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입니다.

918년 ~ 1392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를 중세로 보고 있다.[출처 필요] 태조 왕건은 918년 궁예의 축출, 935년 신라의 평화적 합병, 936년 후백제의 항복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의 정치

고려는 새로운 통일 왕조로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려의 성립은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 이행하는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의미한다.[출처 필요] 또한 외세의 도움 없이 한민족이 단결하여 세운 최초의 진정한 통일 국가였다. 신라말의 6두품 출신 과 호족을 중심으로 성립한 고려는 골품 위주의 신라 사회보다 개방적이었고, 통치 체제도 과거제를 실시하는 등 효율성과 합리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고려 전기는 사상적으로 유교 정치 이념을 수용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사회였다.

고려 시대는 거란과 몽고, 홍건적, 왜 등 외부의 침입이 많았던 시기였으나, 줄기찬 항쟁으로 극복하여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12세기 후반에 귀족정치에 대한 반발로 무신들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종전의 문신 귀족 중심의 사회를 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도 정치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무신 집권기와 원나라 간섭기를 지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성장한 신진 사대부를 중심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합리적이고 민본적인 정치 이념이 성립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 개혁이 진전되었다.

 고려의 경제

고려는 후삼국 시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전시과 제도를 만드는 등 토지 제도를 정비하여 통치 체제의 토대를 확립하였다. 또, 수취 체제를 정비하면서 토지와 인구를 파악하기 위하여 양전 사업을 실시하고 호적을 작성하였다. 아울러 국가가 주도하여 산업을 재편하면서 경작지를 확대시키고, 상업과 수공업의 체제를 확립하여 안정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였다.

농업에서는 기술의 발달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상업은 시전을 중심으로 도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점차 지방에서도 상업 활동이 증가하였다. 수공업도 관청 수공업 중심에서 점차 사원이나 농민을 중심으로한 민간 수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 갔다.

 고려의 사회

고려의 사회 신분은 귀족, 중류층, 양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고려 지배층의 핵심은 귀족이었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각 신분에는 그에 따른 역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향리로부터 문반직에 오르는 경우와 군인이 군공을 쌓아 무반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백성의 대부분을 이루는 양민은 군현에 거주하는 농민으로, 조세, 공납, 역을 부담하였다. 향, 부곡, 소 같은 특수 행정 구역에 거주하는 백성은 조세 부담에 있어서 군현민보다 차별받았으나, 고려 후기 이후 특수 행정 구역은 일반 군현으로 바뀌어 갔다. 흉년이나 재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국가는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하고, 여러 가지 사회 복지 시책을 실시 하였다.

 고려의 문화

고려 시대에 해당하는 중세 문화는 고대 문화의 기반 위에서 조상들의 노력과 슬기가 보태져 새로운 양상을 보였다.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답변확정, 적용됨으로써 유교에 대한 인식이 확대 되었으며, 후기에는 성리학도 전래 되었다. 불교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이런 가운데 불교 사상이 심화되고, 교종과 선종의 통합운동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중세의 예술은 귀족 중심의 우아하고 세련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건축과 조각에서는 고대의 성격을 벗어나 중세적 양식을 창출하였으며, 청자와 인쇄술은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그림과 문학에서도 중세의 품격 높은 멋을 찾아 볼 수 있다.

 조선

이 부분의 본문은 조선입니다.

조선시대는 근세에 해당된다.[10] 조선시대는 전기·후기가 아닌 초기·중기·후기로 나뉘어지기도 한다.

 조선 전기

 정치

조선양반 관료들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왕은 최고 명령권자로서 통치 체제의 중심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말에 성리학을 정치 이념으로 하면서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사대부들 중, 혁명파 사대부가 중심이 되어 되어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여말선초의 온건파 사대부였던 사림이 16세기 후반 이후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그들은 학파와 정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붕당을 이루었다. 이후 여러 붕당 사이에 서로 비판하며 견제하는 붕당 정치를 전개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이를 당쟁 정치로 오해하고 있는데, 당쟁은 식민 사관의 당파성론에서 나온 말이다.

정치 구조는 권력 집중의 부패를 방지하면서,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비되었다. 상피제 도입으로 관리 등용에 혈연이나 지연보다 능력을 중시하였고, 3사와 같은 언관직을 통한 언로를 개방하여 독점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였다. 아울러 육조를 중심으로 행정을 분담하여 효율성을 높이면서 정책의 협의나 집행 과정에서 유기적인 연결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조선은 고려에 비하여 한 단계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중세 사회에서 벗어나 근세 사회로 나아갔다.

 경제

조선은 고려 말기의 파탄된 국가 재정과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재정 확충과 민생 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농본주의 경제 정책을 내세웠다. 특히 애민사상을 주장하는 왕도 정치 사상에서 민생 안정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조선 건국을 주도하였던 신진 사대부들은 중농 정책을 표방하면서 농경지를 확대하고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키며,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여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건국 초부터 토지 개간을 장려하고 양전 사업을 실시한 결과 고려 말 50여만 결이었던 경지 면적이 15세기 중엽에는 160여만 결로 증가하였다. 또한 농업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새로운 농업 기술과 농기구를 개발하여 민간에 널리 보급하였다.

반면 상공업자가 허가 없이 마음대로 영업 활동을 벌이는 것을 규제하였는데, 이는 당시 검약한 생활을 강조하는 유교적인 경제관을 가진 사대부들이 물화의 수량과 종류를 정부가 통제하지 않고 자유 활동에 맡겨 두면 사치와 낭비가 조장되며 농업이 피폐하여 빈부의 격차가 커지게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 사회에서는 직업적인 차별이 있어 상공업자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였다.

 사회

조선은 사회 신분을 양인과 천민으로 구분하는 양천 제도를 법제화하였다. 양인은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자유민으로서 조세, 국역 등의 의무를 지녔다. 천민은 비(非)자유민으로서 개인이나 국가에 소속되어 천역을 담당하였다.

양천 제도는 갑오개혁 이전까지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기본적인 신분 제도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천 제도의 원칙에만 입각하여 운영되지는 않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관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던 양반은 하나의 신분으로 굳어져 갔고, 양반 관료들을 보좌하던 중인도 신분층으로 정착되어 갔다. 그리하여 지배층인 양반과 피지배층인 상민 간의 차별을 두는 반상 제도가 일반화되고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신분 제도가 점차 정착되었다.

조선 시대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나 신분 이동이 가능하였다. 법적으로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하여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양반도 죄를 지으면 노비가 되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중인이나 상민이 되기도 하였다.

 문화

조선 초기에는 괄목할 만한 민족적이면서 실용적인 성격의 학문이 발달하여 다른 시기보다 민족 문화의 발전이 크게 이루어졌다. 당시의 집권층은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하여 과학 기술과 실용적 학문을 중시하여, 한글이 창제되고 역사책을 비롯한 각 분야의 서적들이 출반되는 등 민족 문화 발전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성리학이 정착, 발달하여 전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고, 여러 갈래의 학파가 나타났다. 15세기 문화를 주도한 관학파 계열의 관료들과 학자들은 성리학을 지도 이념으로 내세웠으나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이라도 좋은 점이 있으면 받아들이는 융통성을 보였다. 불교는 정부에 의하여 정비되면서 위축되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천문학, 의학 등 과학 기술에 있어서도 큰 발전을 이룩하여 생활에 응용되었고, 농업 기술은 크게 향상되어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켰다.

예술 분야에서도 민족적 특색이 돋보이는 발전을 나타내었고, 사대부들의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이 반영된 그림과 필체 및 자기 공예가 두드러졌다.

 조선 후기

한국사에서는 후기 조선 시대를 근대 태동기로 보고 있다.

 정치

숙종 때에 이르러 붕당 정치가 변질되고 그 폐단이 심화되면서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붕당 정치가 변질되자 정치 집단 간의 세력 균형이 무너지고 왕권 자체도 불안하게 되었다. 이에 영조와 정조는 특정 붕당의 권력 장악을 견제하기 위하여 탕평 정치를 추진하였다. 탕평 정치는 특정 권력 집단을 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붕당 정치의 폐단을 일소하지는 못하였다.

탕평 정치로 강화된 왕권을 순조 이후의 왕들이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면서 왕실의 외척을 중심으로 한 소수 가문에 권력이 집중되고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는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이로써 부정부패가 만연해지고 정부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심해졌다.

 경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들이 전란 중에 죽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이에 정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것은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서민들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농기구와 시비법을 개량하는 등 새로운 영농 방법을 추구하였고,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늘리려 하였다. 상인들도 상업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자본을 가진 상인들도 출현하였다. 수공업 생산도 활발해져 민간에서 생산 활동을 주도하여 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 축적이 이루어지고, 지방의 상공업 활동이 활기를 띠었으며, 상업 도시가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사회

조선 후기 사회는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하여 신분 변동이 활발해져 양반 중심의 신분 체제가 크게 흔들렸다. 붕당 정치가 날이 갈수록 변질되어 가면서 양반 상호 간에 일어난 정치적 갈등은 양반층의 분화을 불러왔다. 이러한 현상은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고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양반을 제외한 다수의 양반들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양반 계층의 도태 현상이 날로 심화되어 가면서도 양반의 수는 늘어나고 상민과 노비의 숫자는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부를 축적한 농민들이나 해방된 노비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또는 역의 부담을 모면하기 위하여 양반 신분을 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급격한 사회 변화에 대한 집권층의 자세는 극히 보수적이고 임기응변적이었다. 이에 계층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수탈이 심해졌다. 19세기에 들어와 실학과 서민문화가 발달하고 민족의식이 고양되면서 인간주의 사상이 확산되었고, 평등주의 사상에 기초한 토착종교가 발생하여 기존의 신분제에 대한 저항으로 크고 작은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기존의 신분 질서와 제사를 부정하는 서양 천주교(서학)의 교세가 점차 확장되자 이를 사교로 규정하고 탄압하여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와 함께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문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사회 각 분야의 변화와 함께 문화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나타났다. 양반층 뿐만 아니라 중인층과 서민층도 문화의 한 주역으로 등장하면서 문화의 질적 변화와 함께 문화의 폭이 확대되었다.

학문에서는 성리학의 교조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을 받아들였으며 민생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여 비판적이면서 실증적인 논리로 사회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이 대두되어 개혁 추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천문학의 의학 등 각 분야의 기술적 성과들이 농업과 상업 등 산업 발전을 촉진하였다. 서양 문물의 유입도 이러한 발전을 가속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예술 분야에서는 판소리, 탈품, 서민 음악 등 서민 문화가 크게 유행하였고, 백자 등 공예도 생활 공예가 중심이 되었다. 자연 경치와 삶을 소재로 하는 문예 풍토가 진작되어 문학과 서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근대

일반적으로 한국사의 근대는 1863년 고종의 즉위와 흥선대원군 집권 후, 혹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로 본다.

조선 말~대한제국

대한 제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 제국 : 1897년 ~ 1910년의 시기에 해당된다.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하 일제)이 한반도를 강제적으로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은 시기로서, 제1기 무단 통치 시기, 제2기 문화 통치 시기, 제3기 민족 말살 통치 시기로 나뉜다.

 무단 통치 시기

조선을 영구히 통치하기 위해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억누르고 국내의 저항 세력을 무단으로 통치한 시기이다.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독립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또, 헌병 경찰과 헌병 보조원을 전국에 배치하고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한국인을 태형에 처하기도 했다. 토지조사령을 공포하여 식민지 수탈을 시작하였고, 회사령을 공포하여 국내의 자본 세력을 억압하고 일본 자본 세력의 편의를 봐주었다. 이 시기의 한국인 노동자는 극악한 환경과 저임금, 민족적 차별까지 받으며 혹사되었다.

 문화 통치 시기

3·1 운동이 발발하자 일제는 무단통치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친일파를 육성하기 위한, 이른바 '문화통치'을 시행했다. 이 문화통치는 가혹한 식민 통치를 은폐하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였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는 오히려 증강되고,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기위한 '고등경찰제'를 도입하여, 더욱더 일제의 행태는 더욱 악랄해졌다.
그리고 일제는 무단통치시기에 금지되었던 언론`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여 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 그러나 신문에 대한 검열을 통해 삭제, 정간, 폐간을 자행하였다. 또한 결사의 자유를 이부 허용하여 단체의 설립을 일부 인정하였으나,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조선인을 기만하였다.
또 조선인의 교육의 기회를 늘리겠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노동력 양성을 위한 산학과 같은 초급 학문이나 기술 교육만을 허용하였고, 민립 대학 설립을 위한 운동도 탄압하였다. 그리고 지방 의회에 일부 조선인 참여를 허용하여 참정권을 일부 인정하였으나, 그에 참가한 세력은 친일파나 대지주, 자본가만 참여하여, 선거권을 제약하였고, 그 기관은 실권없는 자문 기관에 불과하여 조선인을 기만하였다.
즉, 일제는 조선인을 기만하고 식민통치를 은폐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의 분열과 이간을 조장하였다. 결국, 실력양성운동을 주장하던 민족주의세력 내에서 자치론자가 등장하여, 일제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였다.

 민족 말살 통치

20년대 대공황에 시달리던 일제는 그 타개책으로 식민지 확보를 통한 블록경제를 선택하였다. 그에 따라 1930년대 일제는 대륙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또한, 1941년 일제가 미국진주만선전 포고도 없이 불법적으로 기습함으로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이 착취 되었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또, 젊은 여성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여 군수 공장 등에서 혹사시켰으며, 그 중 일부는 전선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로 삼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끌려간 조선인들 중에는 뜻하지 않게 전범으로 몰려 전쟁이 끝난 후 사형을 당하는 등 억울하게 처벌받는 사람도 많았다.

일제강점기는 제국주의 일본이 연합군에게 패망함으로써 1945년 8월 15일 종료되었다.

 현대

 대한민국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한국은 태평양 전쟁에서의 연합군의 승리로 1945년 8월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런데, 한반도 분할 정책과 좌∙우익 세력의 갈등으로 인해 남북이 분단되어 통일 국가를 세우지 못하였다. 특히, 6∙25 전쟁을 겪으면서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고 기반시설은 대부분 초토화되어 남북 사이의 상호 불신이 깊어 갔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참상을 복구하고 1960년대 이후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이룩하며 북조선의 경제 수준을 추월하는 등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으로 변모하였다.

광복 후에 대한민국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이는 커다란 사회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사회에서 공업 사회로, 다시 정보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도 많이 변하였다. 4∙19 혁명5∙18 광주 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수많은 민주화 운동으로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점차 극복되고, 사회의 민주화도 꾸준히 이루어 졌다.

광복 이후에는 학문 활동이 활발해지고 교육의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 문화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가치관의 혼란과 전통문화의 위축 현상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민주화와 더불어 문화의 다양화가 촉진되고, 반도체 등 몇몇 과학 기술 분야는 세계적인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11]

 혼돈기

 민주화운동기

 개혁과 통일운동기

 정치

전두환 정권(군사 쿠데타에 의한 정권 확보 - 12.12 사태) 시기. 대통령 간접선거제도 답변확정. 이 시기에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무자비한 탄압이 자행되었으나, 각계각층의 대중들이 참여한 1987년 6월의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직접선거제도를 공약한 6.29 선언을 이끌어 내었다.

 경제

1960~70년대중공업의 과잉 투자와 1978년 2차 오일 쇼크로 국제 수지가 악화되고 높은 인플레이션과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하였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은 중화학 공업에 대한 과잉 투자를 조정하고 부실기업을 정리하려고 하였으며, 자본 자유화 정책에 따라 금융 시장의 개방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 조정은 실패하였고 기업 재벌의 국민 경제의 비중은 확대되었으나, 3저 호황(원유`달러`금리) 바탕으로, 경제는 안정될 수 있었다.

문화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획득한 전두환 정권은 어느정도 기반을 닦고나서 국민에 대한 유화책을 펼쳤다. 그에 따라 통행금지해제나 해외 여행 자유화, 교복 자율화, 과외 금지 등이 시행되었다.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였고, 1988년에는 서울 올림픽 게임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흐음.. 국사에 대해 무지하시다면...

 

일단 국사는 교과서를 중심으로 모든게 이루어지죠.

 

따라서 가장 좋은, 모범 교재는 중등, 고등 국사책 입니다만,

 

전무하시다면

 

일단 만화로된 국사 시리즈를 먼저 정독해보시는건 어떨런지요?

 

만화로된 국사 시리즈를 읽을 때, 중요한게 있는데

 

일단은 그림만 보면 안된다는 겁니다.

 

보통 만화로된 것들은 그림, 대사, 해설 로 되있습죠.

 

읽을때 그림에 15%, 대사에 35%, 해설에 60% 집중하여 읽으신다면 될겁니다.

 

그림만 보고 숙숙 넘어가면 읽은것만 못한게 됩니다.

 

두번째는 책을 잘 골라야 한다는 건데요,

 

제가 어렸을 때 읽었던 만화로 보는 국사 시리즈가 두종류가 있습니다.

1.한국사 2000, 3000과

2.고구려 왕조 700년, 백제 왕조 700년, 신라 왕조 1000년, 조선 왕조 500년 (고려는 안샀다는거...)

 

이지요. 이 둘중에 고른다면 2번을 고르겠습니다.

그 이유는 1번은.. 완전 말그대로 흐름만 잡아놓은거더군요.

2번은 세세한 대목도 나와있고, 심지어 고등 국사책에도 나오지 않은 전문 지식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초등학생용인데 말이죠...

 

어쨋든 ..

 

만화로 읽는게 정 그러시다면..

 

아까 말씀 드린 중등, 고등 국사책을 정독하시고,

역사 부도라고 있습니다. 각 사건, 유물 등에 대한 사진, 그림들이 있는 책이죠.

 

국사를 공부할 땐 그냥 글로 읽는 것 보단, 사진과 참고 문헌등을 보면서 하는게 훨신 쉬울겁니다.

물론 답사가는게 가장 이상적일거구요.

 

아니면.. 글세요 어쨋든 중등, 고등 국사책은 일단 기본으로 정독하셔야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정리되어 있는 셀프라던지, EBS시리즈라던지, 완자, 누드교과서를 읽으세요.

뭐 동시에 읽어도 되지만, 국사는 기초를, 그러니까 역사의 흐름을 먼저 잡아놓고 하면 쉬울겁니다.

 

우리나라 역사 책 추천

... 우리나라 역사 아무것도 몰라요, 고구려 신라 백제... 제가 권해드리는 책은 독학국사 라는 입니다.... 읽어보시는것을 추천해드립니다. 우선 역사에 대해서 이질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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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는 그렇게 역사에 관심이 없더니 요새 드라마를 보고 우리나라역사에 관심을 가지게되었습니다. 전체적인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소설책을 추천해주세요...

우리나라 역사 책 추천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책을 보려고합니다. 세세하게 돌도끼... 추천 부탁드립니다^^ 역사전공자입니다. 역사드라마 볼때 항상 옆에두고 보는 쉽고 재미난 사건위주로 된 ...

우리나라 역사책 추천부탁들여요

... 보며주는 책 추천부탁 들여요 공부할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ㅎ 수고하세요 안녕하세요. 우리나라 역사책을 찾으시는군요. 괜찮고 많이 보시는 책들로...

우리나라 역사책 추천 좀 해주세요!!

... 국사교과서는 따로 공부할 것이고, 국사교과서와 함께 볼 우리나라 역사책 추천 부탁드립니다(__) 한권으로 볼 수 있으면 가장 좋습니다!! 쉽고 재밌으면...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책 추천~

...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읽으면 알수있는 책 추천해주세요~ 너무 조그만한 글씨에 , 두꺼운 책은 비추예요 옆의 강력추천합니다. 초등학생부터 일반까지 쉽게 읽을 수 있는...

공부하는데 도움될만한 책 추천 좀 해주세요

... 현대까지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 공부할 수 있는 책들 추천 좀 해주세요. 교과서 참고서 이런거 말구요 소설 말구요. 내공은 없어서ㅈㅅ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우리나라...

우리나라역사책추천좀요~

... 이해하기 싶고,, 한국역사 공부 잘할수있도록 도와주셔요~ 역사 하나도 모르시면요 역사 만화책 추천합니다 절때 판매원이 아니구요 제가 어릴때 부터 보면서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