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정치적 특징

고려의 정치적 특징

작성일 2007.03.26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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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대한 빨리 알려주세요렺
  2. 내공 30입니다..
  3. "후삼국이 지도자와 세력다툼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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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태조 왕건의 정치

 

*민생 안정 정책 : 백성들의 세금을 줄였습니다.

 

*민족 융합 정책 : 지방 세력(호족)들을 후하게  대접하였습니다.

 

*불교 숭상 정책 : 불교를 장려하여 많은 절과 탑을 세웠습니다.

 

*북진정책 :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북쪽으로 영토를 넓히려고 노력하였습니다.

 

 

2.고려의 새로운 제도

 

*과거 제도 : 귀족이 아닌 양인도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될 수 있었음.

 

*백성 보호 : 세금이 신라 때보다 크게 줄었고,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는 기관도 생겼음.

 

*관리 파견 : 지방에 관리가 파견되어 왕명을 지방에까지 전하였고, 지방의 호족은 향리가 되어 지방관을 도왔음.

 

*유학보급 :  고을마다 학교가 세워져 유학의 정신이 널리 보급되었음.

 

제가 아는곳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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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

궁예를 몰아낸 뒤 신하들의 추대 형식을 빌려 왕위에 오른 왕건은 고구려 계승을 내세워 국호를 고려라 하고(918), 자신의 세력 근거지였던 송악으로 도읍을 옮겼다.

왕건은 본래 송악 지방의 호족 출신으로서 예성강 하구를 중심으로 중국과의 해상 무역을 통하여 성장한 호족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강화하였다. 그후 궁예의 신하가 되어 한강 유역을 점령하는 등 영토 확장에 공을 세웠다. 특히, 수군을 이끌고 금성(나주)을 점령하여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광평성 시중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왕건은 궁예나 견훤과는 달리 자신이 호족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경륜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통일 역량을 기르기 위하여 안으로는 지방 세력을 흡수 통합하고, 밖으로는 중국의 5대 여러 나라들과 외교 관계를 맺어 대외 관계의 안정을 꾀하였다.

또 태조는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우고, 후백제와는 대립하는 정책을 취했다.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도와 이들을 막아냄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전쟁 없이 신라를 통합할 수 있었다. 아울러 후백제에 내분이 일어나 견훤이 귀순하자 백제를 정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936).

한편,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했을 때(926) 고구려계 유민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망명해 왔다. 이에 태조는 이들을 우대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합을 꾀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후삼국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계 유민들까지 포함한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2>태조의 정책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호족들을 포섭하여 집권적 지배 체제를 확립하고, 오랜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지를 개간하여 생산력을 발전시키며, 조세 제도를 재조정하여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아울러 골품제가 해체된 뒤 지배층을 새로이 편성하기 위한 제도도 마련하여야 했다.

태조는 후삼국의 분열이 신라사회의 모순과 지방 세력의 대두로 인한 것이며, 그러한 사회 혼란의 근본 원인이 가혹한 고대적 조세 제도에서 비롯된 경제 모순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왕위에 오른 뒤 태조는 취민유도를 내세워 호족들이 지나치게 세금을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조세 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세율을 10분의 1로 낮추었다. 아울러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기구로 흑창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태조는 이어 태봉의 관제를 중심으로 신라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하여 정치 제도를 마련하고, 개국 공신과 지방의 호족들을 관리로 등용하였다. 유력한 호족과는 혼인을 통하여 관계를 깊게 다져 갔고, 지방의 중소 호족들에게는 향촌 사회에서의 지배권을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었다. 공신들에게는 역분전을 지급하여 새 지배층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방 호족들을 견제하고 지방 통치를 보완하기 위하여 사심관과 기인제도를 활용하였다. 또한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훈요 10조를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태조는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으로 강력한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하였다. 그 결과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국경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3>광종의 개혁 정치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과 정종 때에는 왕권이 불안정하여 왕자들과 외척들 사이에 왕위 계승 다툼이 일어났다. 왕규의 난은 그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러한 왕권의 불안정은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호족 세력을 통합하기 위하여 취하였던 혼인 정책 때문에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광종은 왕권의 안정과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공신이나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은 약화된 반면, 노비들이 양인이 되어 조세와 부역의 의무를 지게 되었으므로 국가의 재정 기반과 왕권이 좀 더 안정되었다.

광종은 문예와 유교 경전을 시험하여 문반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 제도를 시행하였다. 과거 제도는 공신의 자제를 우선적으로 등용하던 종래의 관리 등용 제도를 억제하고, 새로운 관리 선발 기준을 마련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광종은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신구 세력의 교체를 도모하였다.

이어서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자신감을 갖게 된 광종은 본격적으로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황제를 칭하고, 광덕· 준풍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과 호족 세력이 크게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다. 광종의 개혁은 경종 때의 경제 개편으로 이어져 중앙 관료들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한 전시과제도가 실시되었고, 성종 때의 지배 체제 정비로 이어져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4>유교적 정치 질서의 강화

성종 때에는 신라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성종은 즉위 후 국가의 오랜 폐단을 없애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하여 중앙의 5품 이상의 관리들로 하여금 그 동안의 정치에 대한 비판과 정책을 건의하는 글을 올리게 하였다.

이에 최승로는 시무 28조를 올려 유교의 진흥과 과도한 재정 낭비를 가져오는 불교 행사의 억제를 요구하고, 태조로부터 경종에 이르는 5대 왕의 치적에 대한 잘잘못을 평가하여 교훈으로 삼도록 하였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성종은 먼저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리 제도를 마련하여 지방 세력을 견제 하였다. 또한 국자감을 정비하고, 지방에 경학 박사와 의학 박사를 파견하여 유학 교육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아울러 과거 제도를 정비하고 과거 출신자들을 우대하여 유학에 조예가 깊은 인재들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유도하였다.

이어서 성종은 중앙의 통치 기구를 개편하였다. 당의 제도를 받아들인 2성 6부제를 기반으로 하고 태봉과 신라의 제도를 참작하여 중앙 관제를 정비하였다. 뒤에 송의 관제를 받아들여 중추원과 삼사를 설치하고, 고려의 실정에 맞게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을 설치함으로써 세 계통의 기구들이 어우러진 고려만의 독특한 정치 체제를 마련하였다.

 


5> 중앙 정치 조직

 고려의 통치 체제는 성종 때에 마련한 2성 6부제를 토대로 하였다. 고려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도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조정하였다. 그리하여 최고 관서로서 중서문하성을 두었고,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리고 상서성은 실제 정무를 나누어 담당하는 6부를 두고 정책의 집행을 담당하였다. 중추원은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고, 삼사는 송과는 달리 단순히 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만을 맡았다.

고려의 독자성을 보여 주는 관청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재신과 추밀이 함께 모여 회의로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 곳이다. 도병마사는 국방 문제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였으나, 고려 후기에 도평의사사(도당)로 개편되면서 구성원이 확대되고 국정 전반에 걸친 중요 사항을 담당하는 최고 정무 기구로 발전하였다. 식목도감은 임시 기구로서 국내 정치에 관한 법의 제정이나 각종 시행 규정을 다루던 회의 기구였다. 이러한 회의 기구의 존재는 고려 귀족 정치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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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재신과 추밀은 6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최고직을 겸하여 중앙의 정치 운영에서 가장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사대는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어사대의 관원은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리면서, 왕의 잘못을 논하는 간쟁과 잘못된 왕명을 시행하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봉박, 관리의 임명과 법형의 개정이나 폐지 등에 동의하는  서경권을 갖고 있었다. 이들은 비록 직위는 낮았지만 왕이나 고위 관리들의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약하여 정치 운영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다. 전체적으로 관리들의 기능이 신라 시대보다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6>관리 등용 제도

 고려의 관리는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등용되었다. 과거는 제술과, 명경과, 잡과로 나뉜다. 제술과는 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하고, 명경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을 시험하여 문신을 뽑았다.

법제적으로 양인 이상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으나 실제로 제술과나 명경과에는 주로 귀족과 향리의 자제들이 응시하였고, 백정 농민은 주로 잡과에 응시하였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은 시험관인 좌주와의 결속을 강화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쉽게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한 관리의 등용은 신분을 중시하던 고대 사회와는 달리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등용하였다는 점에서 능력이 중시되었음을 뜻한다.

한편,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자손 등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관료가 될 수 있는 음서의 혜택을 받아 관료로서의 지위를 세습하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의 관료 체제가 귀족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7>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새로운 지배층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었다.

이들 중 여러 세대에 걸쳐 중앙에서 고위 관직자들을 배출한 가문을 문벌 귀족이라 부른다. 문벌귀족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 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되어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또 자손에게 세습이 허용되는 공음전의 혜택을 받았을 뿐 아니라 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개인이나 국가의 토지를 차지하여 정치 권력과 함께 경제력까지 거의 독점하였다.

한편, 이들은 비슷한 부류들끼리 혼인관계를 맺어 권력을 더욱 단단하게 장악하였다. 특히,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벌 귀족의 성장에 따라 사회적 모순과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를 통하여 진출한 지방 출신의 관리들 중 일부는 왕에게 밀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보좌하는 측근 세력이 되어 문벌 귀족과 대립하였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이들 정치 세력간의 대립과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8>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년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이자겸 세력은 대내적으로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대외적으로 금과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으로 보였다. 반면 왕의 측근 세력들은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면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1126)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물러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자겸의 난 이후 인종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며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관리들과 묘청,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지방 출신의 개혁적 관리들 사이에 대립이 벌어졌다.

묘청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겨, 보수적인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주적인 혁신 정치를 시행하려 하였다. 이들은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반면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 귀족 세력은 유교 이념에 충실함으로써 사회 질서를 확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민생 안정을 내세워 금과 사대 관계를 맺었다. 결국 이러한 정치 개혁과 대외관계에 대한 의견 대립이 지역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묘총 세력은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서경에서 나라 이름을 대위국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면서 난을 일으켰으나(1135)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은 문벌 귀족 사회의 분열과 지역 세력 간의 대립, 풍수지리설이 결부된 자주적 전통 사상과 사대적 유교 정치 사상의 충돌, 고구려 계승 이념에 대한 이견과 갈등 등이 얽혀 일어난 것으로 귀족 사회 내부의 모순을 드러낸 것이었다.
 

9>무신 정권의 성립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이후 문벌 귀족 지배 체제의 모순은 더욱 깊어졌다. 지배층은 이와 같은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정치적 분열을 거듭하였다. 의종 역시 측근 세력을 키우면서 이들에 의존하고 향락에 빠지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고, 무신 우대와 무신 차별에 따른 무신들의 불만이 커졌다. 여기에 군인전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도 고조되었다. 이러한 지배 체제의 모순이 정치적으로 폭발한 것이 무신 정변이었다.(1170)

정중부, 이의방 등 무신들은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신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권력을 행사하면서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토지와 노비를 늘려갔다. 또한 저마다 사병을 길러 권력 쟁탈전을 벌였다.

이 시기에 지배층에 의한 대토지 소유는 더욱 늘어났고, 정치 싸움으로 인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농민과 천민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최충헌은 정권을 잡자 무신 정권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하여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하는 한편, 농민 항쟁의 진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사회 개혁책은 흐지부지 되고 그는 오히려 많은 토지와 노비를 차지하고 사병을 양성하여 권력 유지에 치중하였다.

최충헌은 최고 집정부의 구실을 하는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또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하였다.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도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하였고 더 나아가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였고 정국이 안정되면서 최우는 문학적인 소양과 함께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문신들을 등용하여 고문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최씨의 집권으로 무신 정권이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국가 통치 질서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최씨 정권은 권력의 유지와 이를 위한 체제의 정비에 집착했을 뿐, 국가의 발전이나 백성들의 안정을 위한 노력에는 소홀하였다.

 

10>원의 내정간섭

 몽고와 강화한 이후 고려의 자주성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고려는 먼저 몽고의 일본 원정(1274년)에 동원되었다. 몽고는 국호를 원으로 바꾼 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원정을 단행하면서 고려로부터 선박, 식량, 무기를 비롯한 전쟁 물자와 함께 군대와 선원 등 인적 자원도 징발하였다. 오랜 전란에 시달린 고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원은 고종 말년에 화주(영흥)에 쌍성 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직속령으로 편입하였으며, 자비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여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였다. 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뒤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고 목마장을 경영하였다. 동녕부와 탐라총관부는 충렬왕 때 다시 찾았으나 쌍성 총관부는 공민왕 때에 무력으로 회복할 때까지 원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고려는 오랜 항쟁의 결과, 원에 정복당했거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맞은 것으로 바뀌었다. 아울러 관제도 개편되고 격도 낮아졌다.

또 원은 일본 원정을 준비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정동행성을 계속 유지하여 연락 기구로 삼았고, 군사적으로는 만호부를 설치하여 고려의 군사 조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을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한편, 원은 공녀라하여 고려의 처녀들을 뽑아 갔으며, 금·은·베를 비롯하여 인삼·약재·매 등의 특산물을 징발하여 농민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또한 매를 징발하기 위해서 응방이라는 특수 기관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원의 내정 간섭과 경제적인 수탈은 고려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우선 자주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원의 압력과 친원파의 역할로 인해 고려의 정치는 크게 왜곡되었다. 왕권이 원에 의지하여 유지됨은 물론 통치 질서가 무너져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11>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1351~1374)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그에 의존한 고려의 왕권은 이전 시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고 중앙 지배층도 개편되었다. 이전 시기부터 존속하였던 문벌 귀족 가문, 무신 정권기에 새로 등장한 가문, 원과의 관계를 통하여 새로 등장한 가문 등이 이른바 권문세족으로서 새로이 자리 잡았다. 그들은 왕의 측근 세력과 함께 권력을 잡아 농장을 확대하고 양민을 억압하여 노비로 삼는 등 사회 모순을 격화시켰다. 이에 대하여 신진 관리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관료의 인사와 농장 문제와 같은 여러 가지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개혁의 노력은 충선왕과 충목왕 때부터 시도되었다. 그러나 원의 간섭을 받고 있던 고려의 왕은 개혁을 철저하게 추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공민왕은 원ㆍ명 교체기(1368)를 이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 때의 개혁은 대외적으로 반원 자주를 실현하고,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은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의 숙청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몽고풍을 없애는 등 반원 자주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또한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으며, 더 나아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 공민왕의 이러한 반원 자주 정책은 친원파 권세가의 반발로 중단될 위기에 놓였고, 이에 대외적인 개혁의 완수를 위해서는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권문세족들을 눌러야 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왕권을 제약하고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던 정방을 폐지하였다.

아울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세력이 없는 집안 출신의 승려 신돈을 등용하여 권문세족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들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였던 것이다.

한편, 성균관을 통하여 유학 교육을 강화하고 과거 제도를 정비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공민왕 때의 개혁은 권문세족들의 강력한 반발로 신돈이 제거되고, 개혁 추진의 핵심인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이 시기의 개혁은 아직 개혁 추진 세력이 결집되지 못한 상태에서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12>신진 사대부의 성장

 무신 집권기 이래 지방의 향리 자제들을 중심으로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한 신진 세력들은 원의 간섭과 측근 정치로 인하여 정치적 지위가 불안정하였다. 이들 중의 일부는 측근 세력으로 성장하여 권문세족이 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에 힘입어 신진 사대부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성리학을 수용하여 학문적 기반으로 삼고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려 하였다.

신진 사대부들은 주로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반을 침해하면서 농장을 확대하는 권문세족과 충돌하게 되자 국가의 공적인 힘을 강화하여 그들의 비리와 불법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기반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권문세족이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관직으로의 진출이 제한되었고, 과전과 녹봉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13>고려의 멸망

공민왕 때의 개혁 노력이 실패하자 고려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권문세족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 소유를 확대해 나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졌다.

한편, 북쪽으로부터 흥건적(1359~1361)이 침입해 와 공민왕이 복주(안동)까지 피난하기도 하였고, 남쪽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이 계속되어 해안 지방을 황폐하게 하였다. 이에 고려는 적극적으로 남과 북의 외적에 대한 토벌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영과 이성계는 큰 전과를 올려 국민의 신망을 얻었다.

우왕 때에 이르러 권문세족이 토지 겸병을 확대하자 최영이 이성계와 연합하여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였으나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마침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모인 급진 개혁파(혁명파) 사대부 세력은 우왕과 창왕을 잇따라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 후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이성계와 급진 개혁파 사대부 세력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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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종교

 

★고려의 경우

고려는 기본적으로 불교를 근본으로 하는 나라입니다. 물론 고려 말에는 유교 역시 활성화 되기도 하였으나 그 세가 불교에 미치지 못했습니다.(조선 건국 전까지는) 절이나 연등회 모습을 보시면 하시겠지만, 불교문화는 매우 사치스럽고 화려합니다. 이로 인해 고려시대의 문화는 아주 휘양찬란화려 그 자체였지요.

 

★조선의 경우

조선은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입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문화는 유교적 성향이 강하여 매우 소박했지요(조선 백자를 보시면 아실 겁니다.). 게다가 고려보다 충/의/인/덕 등에대한 정신이 강해서 조선 벼슬아치들의 사고관은 매우 강직하고 바르고 검소했다고 보시면 됩니다.(물론 일부 그렇지 않은 세력들이 있긴 했지만요)

2.여자의 지위

 

★고려의 경우

고려는 여성의 지위가 남성 못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호주(호적의 주)가 여성으로 되어있는 경우도 있었으며 부모의 제사를 여성이 받들고, 재산을 남자 형제들과 동등하게 물려받는 등 놀라운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고려 황실에서의 여성 파워는 단연 세계 최고였습니다.

 

★조선의 경우

조선 초까지만 해도 조선 여인들의 지위도 고려와 같이 남성 못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받들거나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는 경우가 있었지요. 그러나 조선 초중반에 접어들면서 그 지위가 급격히 하락합니다. 특히 9대 임금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가 여성의 도리아 칠거지악(여자가 행하지 말아야할 7가지 악행)에 대해 서술한 "내훈"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여성은 졸지에 지아비를 보좌하는 아녀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3.왕실/황실의 호칭

ㅡ>이게 무슨 특징이냐 하실 지 모르겠지만 이는 우리나라 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고려의 경우

고려는 건국 당시 "황국"이었습니다. 결국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 대 제국이었죠. 이는 왕건동상에서 왕건이 쓰고있는 황관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고려 중반기에 접어들어 중국에서 엄청난 세력을 확장하던 "금나라"의 위세에 눌려 금의 신하국으로 전락하였지만 여전히 "황실"의 호칭을 져버리지 않았습니다. 즉, 고려국왕을 "황제"라 했으며 그의 부인은 "황후" 모후는 "황태후", 국본은"황태자"로 불렀습니다.(이후 원 간섭기에 접어들면서 모두 왕국에 걸맞는 것으로 개칭했지만, 어쨋든 한때나마 고려가 황국이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보배같은 사실)

 

★조선의 경우

조선은 유교적 사대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나라입니다. 그로 인해 중국의 대제국 "명나라"를 임금의 나라로 받들며 설설 기기에 바뻣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은 한 나라가 아닌 명나라에 예속된 제후국으로 보시면 됩니다.(당시 명나라에선 각각 제후국의 수장에게 "왕"의 칭호를 하사하였음) 심지어 왕세자를 책봉할때나 중전을 간택할 때에도 중국 국가의 허락을 맡아야 했습니다. 완전 명나라의 똘마니였던 겁니다 ^^(사극에서 보시면 임금을 주상전하, 왕비를 중전마마, 세자를 세자저하 라고 하지요? 이는 다 명나라의 속국, 즉 자그마한 제후국에서나 들어볼 수 있는 호칭입니다.)

 점수 주시면 감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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