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 [국사] 단어 요약 부탁 합니다 [내공 있는거 다 겁니다]

우리나라 역사 [국사] 단어 요약 부탁 합니다 [내공 있는거 다 겁니다]

작성일 2005.08.09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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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묘청
2김부식

4최충헌
5망이
6만적
7이의민
8팔만대장경
9삼별초의 항쟁
10권문세족
11성리학
12신진 사대부
13김윤후
14안향
15공민왕
16신돈
17최무선
18이성계
19박위
20정도전
21조준

 

여기까지이고요 A4에 1~2줄로 요약하면되요 정말 성의껏 서주신분꼐 내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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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묘청[, ?~1135]

 

정심()이라고도 한다. 서경(西: ) 출생. 검교소감() 백수한()을 통하여 근신()들과 접촉, 도참설()을 이용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1127년(인종 5) 왕실 고문으로 추대되자 왕의 서경 거둥을 주청하여 실현하고, 당시의 혼란한 내외정세를 이용, 개경() 출신 구신()들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서경천도()를 획책하였다. 1129년 신궁을 낙성, 칭제건원()을 청하고 금나라 공략 등을 건의하였으나 김부식() 등 사대주의자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134년 삼중대통지 누각원사()에 오르고 왕에게 천도를 계속 주청하였으나 불가능해지자 1135년 서경에 기반을 두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여 천견충의군()을 조직,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군은 원수() 김부식에게 섬멸되고 묘청 자신은 부하 조광()에게 피살되어 개경에 효시되었다.


2김부식[, 1075~1151]

 

고려 문신, 재상, 유학자, 고문체(古文體)의 보급에 힘씀. 예종·인종실록 및 삼국사기 50권을 편찬.
김부식은 무열왕의 후손으로 고려 문종 29년(1075)에 경주에서 태어나 의종 5년(1151)에 세상을 떠났다. 예종, 인종의 학문 숭상기에 중심적 학자로 유학의 학문 발전에 기여한 유학자였으며, 고문체(古文體) 문장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문학자였고, 이자겸 난, 묘청의 난 등을 통하여 위기에 처한 왕조의 안정에 기여한 정치가였다. 특히 그는 고대 역사학을 극복하여 중세의 역사관을 정립한 역사가였다.

4최충헌[, 1149~1219]

 

본관 우봉(). 초명 난(). 시호 경성(). 음보()로 양온령()이 되고, 1174년(명종 4) 조위총()의 난을 토벌, 별초도령()에 올랐다. 1196년 동생 충수()와 함께 권신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 폐정()의 개혁을 위한 봉사십조()를 왕에게 올렸다. 이어 왕의 측근을 몰아내고 좌승선()을 거쳐 어사대지사()가 되었으며, 1197년 충성좌리공신()에 봉해졌다.

그러나 왕이 봉사십조를 이행하지 않자 창락궁()에 유폐시킨 뒤 평량공() 민(:)을 왕위에 앉히고 정국공신()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주국()이 되어 최씨 무단정권을 확립했다. 같은 해 딸을 태자(:)의 비()로 만들려는 동생 충수와 대립, 충수를 죽이고 독재정권을 더욱 강화했다.

1198년(신종 1) 사노() 만적()의 난을 토벌하고, 1199년 병부상서이부지사()가 되어 군사권 ·인사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다시 김준거(琚)의 난을 토벌하고 1202년 삼중대광() 수대위상주국()이 되었다.

이어 도방()을 설치, 신변을 보호케 했으며 추밀원사(使) ·이병부상서() ·어사대부()로서 경주별초군()의 반란을 진압했다. 1204년 신종을 폐하고 태자(:)를 옹립, 벽상삼한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수태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상주국() 병부어대판사() 태자태사()에 올랐다. 1209년 학자 이규보()를 발탁,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운()을 재흥시키려고 힘썼는데, 청교역()의 관리들의 자기네 부자살해 미수사건이 생기자 영은관()에 교정도감()을 설치,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케 했다.

1211년 내시 왕준명() 등의 음모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난 뒤, 왕을 폐하고 한남공() 정(:)을 즉위시켰다. 1212년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에 책봉되고, 1213년 강종이 죽자 고종을 즉위시켰다. 1217년(고종 4) 자신을 암살하려는 흥왕사() 승려들의 음모를 적발, 처형한 후로는 백성들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기는 했으나 민란을 잘 진압하여 기강의 확립, 풍속의 순화, 문운의 재흥 등 치적을 많이 쌓았다.

 

5망이와 망소이(亡伊.亡所以, 성이 없음, ?-1176) 형제

 

천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킴
고려 명종 1년 충청도 공주 명학소의 천민인 망이와 망소이는 스스로 산행병마사라 하고 굶주린 백성을 선동하여 공주를 함락하였다.
조정에서는 대장군 정황재에게 3천 명의 병사를 딸려 보내 토벌케 했다. 그러나 토벌이 쉽지 않자 이들을 달래면서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올려주었으나 난민들은 승복하지 않았다.
이들이 예산. 직산. 등을 함락하고 많은 사람까지 죽이자 충순현을 다시 명학소로 강등시키고 난민을 총공격하여 주동자를 붙잡아 죽임으로써 망이. 망소이의 난은 끝났다.

6만적

 

1198년(신종 1)에 만적이 중심이 되어 시도하였던 봉기. 무인란 이후 하극상 풍조가 사회 전반에 팽배해지면서 야기된 신분질서의 와해와 피지배층의 사회의식 성장은 각처에서 광범위한 민중항쟁을 유발시켰다. 이 가운데 하나가 만적의 봉기였다. 당시 집권자인 최충헌(崔忠獻)의 사노비였던 만적은 노예들을 모아놓고, 노예제도의 부당함을 설파하고 봉기를 계획하였다. 이리하여 거사일을 정하여 관노들은 조정의 청사내에서 권신들을 죽이고 사노들은 개경(開京) 성내에서 먼저 최충헌 등 각기 상전을 죽인 후, 궐기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약속장소인 흥국사(興國寺)에 모인 노예는 수백 명에 불과하여 다시 2차로 날짜를 정하여 보제사(普濟寺)에 모이게 하였는데 한충유의 가노 순정의 밀고로 주동자 100여 명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자 봉기는 끝났다. 이 봉기가 실패하였으나 그 역사적 의의는 최초의 조직적인 신분해방운동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크다.

7이의민 [ 李義旼 , ?~1197 ]

본관 경주(慶州). 천민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하여
안찰사(按察使) 김자양(金子陽)에게 발탁되어 경군(京軍)에 편입되었다.
수박(手搏)을 잘 하여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別將)이 되었다.
1170(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이 되고
이어 장군에 승진하였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장순석(張純錫) 등의
의종 복위음모를 평정한 공으로 대장군이 되었다.
이듬해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여 상장군에 올랐다.
1178년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를 죽이자 그를 두려워하여
병을 핑계로 고향 경주에 은거해 있다가 경대승이 죽은 후
공부상서(工部尙書)·중서문하평장사를 거쳐, 1191년 병부판사(兵部判事)에 이르렀다.
참위설(讖緯說)을 믿고 역모(逆謀)할 뜻으로 명사들을 포섭하고
적도(賊徒) 김사미(金沙彌)·효심(孝心) 등과 은밀히 결탁하였으며,
벼슬을 팔고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등 관기를 문란하게 하다가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최충헌(崔忠獻)에게 살해되었다

8팔만대장경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일명 고려대장경판)은 지금부터 750여년전인 고려 고종 23년인 1236년부터 38년인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제작된 8만 여장의 목판이다. 몽골의 병란을 맞아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전국민이 일치단결 하여 부처님의 힘을 빌어 외적을 물리치겠다는 일념으로 장장 16년의 대장정을 거쳐 이루어진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다.
경판의 재질은 지금까지 모두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자현미경으로 조사한 결과산벚나무와돌배나무가 대부분이었다. 경판은 위의 사진과 같이 앞뒤로 글자가 새겨진 부분과 마구리로 구성되고 총 길이는 68 혹은 78㎝이며 폭은 약 24㎝, 두께는 2.7-3.3㎝의 범위이다. 무게는 경판의 재질에 따라 4.4kg까지 나가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3∼3.5㎏정도이다. 경판은 한 면에 23행, 한 행에 14자, 전후 양면에 644자를 새겼다. 판의 후면 끝에는 경의 이름과 장 수, 천자문 차례의 함호를 새기고 좌우끝의 각목에도 동일한 표시를 남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경판은 81,258판 1511부 6802권으로 현재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에서 숨쉬고 있다.
필자의 몇 년에 걸친 대장경판 재질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대장경판이 강화도 선원사에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설의 의문점등 대장경의 현안문제를 조선왕조 실록의 자료와 함께 소개 한다.

9삼별초의 항쟁

 

삼별초의 항쟁 [강화도 -  진도 - 제주도 ]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된 군사조직으로 배중손의 지휘아래 진도에서 활동을 하다 쫓겨 제주도로 옮긴 후 김통정의 지휘아래 활동하다 몽고군에게 무너짐.


10권문세족

 

권문세족은 고려 세력으로서 과거보다는 주로 음서에 의하여 관인 신분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정권을 독점하고,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다.한편, 신진 사대부는 향리 출신이 대부분이며, 경제적으로는 중소 지주 출신들로서 성리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여 구질서와 권문 세족의 횡포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성장하였다.

11성리학

 

성리학은 경학의 일종이다.
즉, 유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삼경을 떠나서 따로 성리학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성리학은 유학의 일종이므로 효제의 실천을 위시한 인륜적 실천이 핵심이다.
이기심성론이 아무리 복잡하게 전개되더라도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를 떠난 보다 근원적 세계로의 형이상학적 초월에는 별 관심이 없다.
성리학은 기존의 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성리학의 특징은 효제의 윤리를 위시한 인륜적 가치를 불변의 진리로 간주하면서도, 인간과 인간의 도덕적 당위에 대해 인간 세계의 범위를 뛰어넘어 끊임없이 순환하는 광대한 자연 세계의 지평 안에서 깊이 사유했다는 점이다.(불교와 도교의 영향)
이 시대의 유학이 신유학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은 인간의 문제를 인간의 차원을 넘어 자연적 지평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자연 도덕주의, 도덕 형이상학)
성리학은 논리적 사변이 아니다.
이기심성론은 순수하게 언어와 논리적 법칙에 의해 진행되는 합리적 사변이 아니다.
따라서 이기심성 논의는 논리적 분석만으로는 진의를 다 파악할 수 없다.
즉, 매우 논리적인 듯하지만 논리적 정합성이 결여된 곳이 많다.(논리적 정합성보다 유가 철학의 근본적 요청에 충실하려함 때문.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내면적 깨달음때문. 등등이 원인)
결국 이기심성론은 논리적인 논의이면서 동시에 그 이상이기도 하다.
성리학은 비체계적인 철학이다.
주자는 방대한 분량의 문집과 어록 그리고 경서에 대한 주석을 남겨 놓았지만, 자신의 철학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체계화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주자는 독자적인 철학 체계의 수립가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경전 주석가였다.
그러나 주자의 각 단편들 속에는 분명 일관된 정신이 흐르고 있다.

12신진 사대부

 

고려 후기의 지배 세력인 권문 세족에 대항하여 새로운 사회 세력이 등장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신진 사대부였다. 이들은 학문적 교양을 갖추었을뿐 아니라 정치 실무에도 능한 학자적 관료였다. 이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무신 정권아래에서부터였으나, 정치 세력으로의 역활은 무신 정권이 무너진 13세기 말엽까지는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3세기 말 충선왕의 개혁 정치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으나, 개혁 정치의 실패로 뿌리내리지 못하였으며, 공민왕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등장하였다. 이들 신진 사대부는 권문 세족과 달리 그 가문이 한미하였고, 지방의 향리 출신이 많았다. 고려 시대의 향리는 지방에서 중소 지주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자제들이 고려 후기에 들어와 학문적 교양을 쌓아 과거를 통하여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신진 사대부는 권력을 등에 업고 불법 수단으로 막대한 농장을 소유한 권문 세족을 경멸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청렴 결백한 생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신진 사대부는 이미 중앙 정계에서 세력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권문 세족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원의 세력과 결탁하여 강력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광대한 농장을 소유한 권문세족에 대하여, 세력 기반이 미약한 신진 사대부의 개혁 운동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신진 사대부의 개혁 운동은 공민왕 때에 이르러서야 본격화되었다. 이 때에는 신진 사대부의 세력이 자못 성장하였고, 국제적으로는 대륙에서 명이 흥기하면서 원이 쇠약해지고 있었으므로 공민왕은 이들 신진 사대부를 기반으로 개혁 정치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의 개혁 정치도 이를 뒷받침하는 신진 사대부 세력이 권문 세족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그러나 여말에 이르러 새로 등장한 신진 무장세력과 신진 사대부들이 결합함으로써 마침내 권문 세족을 누르고 조선 왕조를 개창할 수 있게 되었다.

13김윤후[, ?~?]

 

김윤후는 고종 때의 사람으로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에 있었다. 몽고의 원수 살례탑이 와서 성을 치자, 살례탑을 사살하였다. 왕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의 벼슬을 주었으나, 그 공훈을 타인에게 양보하며 말하기를 "싸울 때 나에게는 활과 화살이 없었으니 어찌 감히 엇되이 무거운 상을 받으리오" 하고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4안향[, 1243~1306]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순흥이며 초명은 유이고 자는 사온이다.호는 회헌이고, 시호는 문성이다.
안향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문교진흥과 제자 육성을 통해 유풍을 진작시켜 고려말 혼란과 모순을 수습하고 조선 5백년의 정치기념의 기반이 되었던 주자학을 일으켜 조선인들의 추앙을 받았던 고려 중기의 유명한 문신이었다.
1260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교서랑, 감찰어사가 되었다. 상주 판관으로 있을 때 민중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였다. 그 뒤 원나라에 건너가 그 곳의 교육 기관을 두루 살폈고, 주자학의 서적을 가져다 연구하여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주자학을 전하였다.


15공민왕[, 1330~1374]

 

공민왕은 고려의 제 31대 왕으로 이름은 '전'이다. 12세 때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약소국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글을 익히고 문물을 배웠다. 거기서 위왕의 딸
노국 대장공주와 결혼하고, 1351년에 고려에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왕이 되자 원나
라 왕실과 인척을 맺고 횡포를 부리던 기철의 일족을 없애고, 영흥 이북 땅을 되찾
았다. 또 원나라식 연호와 관제를 고치는 한편 내정 개혁에도 힘썼다. 그러나 만년
에는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져 최만생·홍윤 일당에게 죽임
을 당하였다. 그림과 글씨에 뛰어나 <천산대렵도> 등의 작품을 남겼다.

16신돈[, ?~1371]

 

본관 영산(). 속성 신(). 자 요공(耀), 법명 편조(), 돈()은 퇴속하여 고친 이름. 호 청한거사(). 계성현() 옥천사() 사비()의 아들.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사부()로서 국정을 맡았다. 1365(공민왕 14) 진평후()라는 봉작까지 받아 가며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의 개혁정치는 고려 내부의 혼탁한 사회적 적폐()를 타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것으로, 전민변정도감()이라는 토지개혁 관청을 두어 부호들이 권세로 빼앗은 토지를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자유민이 되려는 자들을 해방시켰으며, 국가재정을 잘 관리하여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 개혁은 상층계급의 반감을 샀고, 왕의 신임을 기화로 점차 오만해져서 방탕과 음란을 일삼았으므로 점점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祿殿)가 되어 1369년(공민왕 18) 풍수지리설()로 왕을 유혹, 서울을 충주()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오도도사심관()이 되려다 왕의 불신을 받았다. 그러자 왕을 살해하려는 역모()를 꾸며 권력을 되찾으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수원()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에 처형되었다.


17최무선[, ?~1395]

 

*본관 : 영주(永州
*활동분야 : 무기제조
*주요저서 :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화포법(火砲法)》
본관은 영주(永州:永川)이다. 왜구(倭寇)가 창궐하자 화약제조법의 필요성을 절감, 원나라 이원(李元)에게서 그 제조법을 배웠다. 1377년(우왕 3) 화통도감(火都監)을 설치케 하여 화약을 만들고, 대장군(大將軍) ·이장군(二將軍) ·삼장군 ·육화(六花) ·석포(石砲) ·화포(火砲) ·신포(信砲) ·화통(火) ·화전(火箭) ·철령전(鐵翎箭) 등 각종 화기(火器)를 제조하였으며 한편 전함(戰艦)의 건조에도 힘썼다.
1380년 왜구가 대거 침입했을 때 부원수(副元帥)로서 진포(鎭浦:錦江河口)에서 화포 ·화통 등을 처음으로 사용, 왜선 500여 척을 전멸시켜 영성군(永城君)에 봉해졌다. 1383년 남해 관음포(觀音浦)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했고, 1389년(창왕 1) 화통도감이 철폐되자 집에서 《화약수련법(火藥修鍊法)》 《화포법(火砲法)》을 저술하였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정헌대부(正憲大夫) ·검교문하부참찬사 겸 군기시판사(檢校門下府參贊事兼軍器寺判事)가 되었다. 의정부 우정승(議政府右政丞)이 추증(追贈),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추봉되었다.

18이성계[, 1335~1408]

 

이성계의 아버지는 원의 녹을 먹는 사람이었습니다. 쌍성의 천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고려쪽으로 귀화를 했고 이성계도 아버지를 따라 고려 조정의
녹을 먹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성계는 아버지를 따라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는데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이후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서 이성계는 무장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고
원이 무너지는 시기에 최영, 정몽주 등과 함께 많은 활약을 합니다.
이후 원이 무너지고 명이 건국되자 최영은 명이나 원이나 모두 고려의 적일 뿐이라
하여 북벌을 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북벌에 반대하였지만 결국 조정은 북벌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성계는 북벌에 실패하여 조국이 망하는 것이 두려워 위화도에서 회군을 하게
됩니다. 이후 최영을 죽이며 실권을 잡게되고 결국 고려의 역사를 끝내고조선의
초대 임금이 됩니다.


19박위[, ?~?]

 

 본관 밀양(). 처음 우달치()로 등용되었다가 김해부사로 승진하였다. 왜구를 격퇴하고,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 때는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을 몰아낸 뒤 경상도 도순문사(使)가 되어 함선 100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쳐서 적선 300여 척을 불태웠다. 후에 자혜부판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문하부지사에 올라 충의군()에 봉해지고 공신에 책록되었다.

1390년(공양왕 3) 김종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풍주()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 회군()의 공신으로 녹권()과 녹전(祿)을 받았다. 조선 건국 후에는 문하부참찬사를 거쳐 양광도() 절도사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그때 밀성()의 소경 이흥무()의 옥사가 있어 이에 관계한 혐의로 구금되어 대역죄로 몰리게 되었으나 태조의 호의로 석방되어 서북면 도순문사로 나갔다. 그러나 사헌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결국 파직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과 함께 정안대군(태종)에게 피살당했다.


20정도전[, 1337~1398]

정도전은 고려 우왕때 사람으로 혁명파 사대부의 대표로서
이성계(신흥무인세력)과 손을 잡고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역성혁명)
을 할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세울때
조선이라는 이름을 고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짓기도 하였고
유교이념이 들어간 4대문과 보신각등의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태종(이방원)과의 세력싸움을 하다 이방원에 의해 죽었다.

 

21조준[, 1346~1405]

 

이성계와 전제개혁()의 필요성을 협의, 상소하였고, 문하평리()로서 조선군충의군()에 봉해진 뒤 전제개혁을 반대하는 조민수()를 탄핵, 유배케 한 뒤 1390년(공양왕 2) 문하부지사 겸 대사헌()이 되었다. 그 해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개국의 경제적인 기반을 닦고,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평양백()에 봉해진 뒤, 오도도통사(使)로 병권을 장악하고, 이방원(:)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묵살당하자 사직하였다.

우리나라 역사 [국사] 단어 요약 부탁...

... 1~2줄로 요약하면되요 정말 성의껏 서주신분꼐 내공드... 안향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문교진흥과 제자... 활약을 합니다. 이후 원이 무너지고 명이 건국되자 최영은...

내공~팍팍!!!(단재역사퀴즈대회)

... 나올만한우리나라역사상식과 신채호선생님에대한것간략하게요약정리부탁드립니다 단재역사퀴즈대회 1. 개요... 못하고 있는데, 이윽고 읽던 부분을 마저 읽은 신채호는...

초래된 역사왜곡 설명 부탁합니다.

국사기 초래된 역사왜곡 설명 부탁합니다. 임나일본부설...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겁니다.... 수 있는 밝기였음을 보였으며, 이를 응용하여 우리나라의...

동북공정 (국사수행평가)

... 제발 부탁드릴게요. 내공없는 한 소년의 처절한... 약한 나라들을 괴롭히는 겁니다. 위로는 러시아도 자기네... 거기다가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은 모든 것을 짱개에서...

도대체 고구려와발해의 역사주인은...

... 고구려와발해가 우리나라 역사란걸 확실하게 증명할수있는 방법 이있나요??그러니까 간단하게 요약해서 질문하면... 질문이 좀 많네요 내공은 25겁니다... 전문적으로...

국사서술형문제좀 풀어주세요...

... 상당히 급한지라 내공 팍팍겁니다...ㅋ 국사셤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독자적인 청동기 문화가 발전되었다는것을 보여주기도합니다 5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북한과 우리나라

... 받고 있는데 그것부터가 사기 국사에요. 조선시대 말까지만 해도 <민족>이라는 의식이나 그런 개념의 단어조차 없었고, 조선은 우리 나라가 생겨나기 전 시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