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조약부터 광복까지 일제침략과정의 핵심단어좀 써주세요. 최대한 많...

강화도조약부터 광복까지 일제침략과정의 핵심단어좀 써주세요. 최대한 많...

작성일 2008.08.05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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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 갑신정변, 을미사변, 병인양요, 신미양요, 갑오개혁, 을사조약,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등등등

 

 

 

최대한 많이 써주시는 분에게 내공을 드림. 많으면 감사내공도 드림.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강화도조약 (1876년)

 

체결 과정
윤요호 사건(1875) : 일본 군함 윤요호가 강화 해협을 침범함.

윤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조약 체결을 강요함.

강화도 조약 체결(1876) : 조선 정부의 의견이 문호 개방 쪽으로 기울어 조약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은 1876년 조선일본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일본은 자기들이 도발한 운요호 사건을 트집잡아 1876년 2월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도 국제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통상관계를 맺기로 하고 신헌(申憲)을 강화도로 파견, 일본사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와 협상케 한 결과 두 나라 사이에 수호조약이 맺어졌다.

모두 12개조로 된 수호 조약은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제1조)고 했지만, 이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침략을 쉽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수호조약은 그 밖에도 부산, 인천, 원산항의 개항, 개항장 안의 조계 설정, 영사재판권의 인정 등의 조항이 명시되어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의 속셈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 강화도 조약에 따라 1876년 7월 다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무역장정(조일통상 잠정협약)을 조인하였고,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였다

 

내용: .

(1) 조선의 자주권 인정: 청나라와 관계를 끊게 한 후 조선을 침략하기 위함.

(2) 부산을 포함한 3개의 항구 개항: 통상 이외에 정치적, 군사적 침략 의도가 포함됨.

(3) 일본인의 해안 측량권 인정: 일본의 군사 작전을 유리하게 하기 위함.

(4) 일본의 치외법권 인정: 일본인에 대한 법적 조치를 못하게 함.

1.조약 체결 배경

 

1) 민씨 세력 집권: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집권하게됨

2) 통상 개화론의 성장: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의 통상개화론자들은 열강의 침략에 대비해 개항의 불가피함을 주장.

3) 운요 호 사건: 일본이 메이지유신 (1854) 을 단행 하면서 교섭을 해왔으나 조선이 거부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체제가 수립되자 '운요 호'를 파견하게 됨.조선은 운요 호에 경고사격을 한 빌미로 강화도 조약을 맺음.

 

2. 조약 내용 (주요내용만)

 

1관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후 수시로 사신을 조선국 서울에 파견, 교환한다

4관 조선국 부산의 초량은 일본 공관이 있어 양국인의 통상지였다. 금후에는 종전 관례의 세견선 등의 일을 없애고 새로운 조양게 준하여 무역 사무를 할 것이다.

5관 조선 정부는 부산 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와서 통상하는 것을 허가한다.

7관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는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의 항해자가 자유롭게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10관 일본국 국민이 조선국 항구에서 죄를 지었거나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판함.

 

3. 조약 결과

 

1) 조. 일 수호조규 부록 (1876)

조선 국내에서 일본 외교관의 여행자유, 개항장에서의 일본 거류민의 거주지역 설정과 일본화폐의 유통등을 허용

2) 조. 일 통상 장정 (1876)

일본의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및 양곡의 무제한 유출등을 허용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 조선의 국내 산업은 일본의 경제침략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음

 

4. 조약 성격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부산,원산,인천 등 세 항구의 개항과 치외법권과 해안측량권 등을 내어준 불평등 조약임

 

5. 조선정부의 개화정책

 

1) 1차 수신사 파견 (1876, 일본): '김기수'는 [일동기유] 를 저술하여 근대 문물을 소개

2) 2차 수신사 파견 (1880, 일본): '김홍집'은 [조선책략] 을 가져와 미국과의 수교에 영향을 줌

3) 관제의 개편: ‘통리기무아문 (개화정책전담기구)'을 설치, 그 아래에 '12사'를 두어 업무를 분담하게 함

4) 군제의 개편: 5군영을 2영(무위영, 장어영) 으로 통합, 개편하고 별기군을 창설함.

5) 조사 시찰단 (신사유람단) 파견 (1881, 일본)

6) 영선사 파견 (1881, 청): '김윤식'과 유학생들이 청국에서 무기제조법, 자연과학을 배워 옴

7) 보빙사 파견 (1883, 미국): '민영익' 파견

 

6. 조선정부의 개화정책 추진배경

 

서양의 근대 문물제도가 들어오게 되고 열강들의 이권침탈이 심화되었으며, 민중들의 양반지배층의 수탈에 대한 저항의식이 크게 성장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일부 들 사이에서 '통상 개화론'이 대두하였으며, 문호개방과 더불어 개화사상으로 발전하게 됨. 개화사상은 북학파의 실학사상과 청의 양무운동, 일본의 문명 개화론에 영향을 받았다

 

7. 근대 문물의 수용

 

1) 일본에 조사 시찰단을 파견: 일본의 정부기관, 각종 산업시설을 시찰

2) 청국에 영선사 파견: 무기제조법, 자연과학을 배워옴, 서울에 '기기창'을 설치

 

임오군란 (1882년)

임오군란1882년 8월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구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의 정세는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개국 문제를 둘러싸고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 대립하고 있었다. 외교노선은 민씨정권이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 제국과의 통상관계를 연이어 수립하고 있었다. 이 개국 정책은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 뿐만이 아니라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백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고 있었다.

청과 일본의 개입

한편 명성황후의 국상을 강제 진행함에 따라 대원군의 정치적 실권은 단축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청국은 종주국으로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마침 임오군란 당일날 지방으로 도망갔던 명성황후와 그 일족이 개화파 관료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을 청나라로 보내 청나라에게 원조를 요청한 것(음력 6월 19일)을 핑계로, 음력 6월 27일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육군 4,500명이 육로로, 8월 20일(음력 7월 7일) 청나라 해군 제독 오장경정여창(丁汝昌), 김윤식을 대동하여 남양만으로 상륙해 조선에 진주하였다.

오장경은 8월 25일(음력 7월 12일) 흥선대원군을 병영으로 초청하였다가 군란 선동의 배후자라 하여 톈진(天津)으로 납치한다. 대원군 납치 후 다시 민씨 정권이 부활하였고, 청군은 8월 29일(음력 7월 16일) 청군은 왕십리이태원 일대를 공격하여 170여 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사형시키는 등 군란 진압에 나섰다.

한편 일본에 도착한 하나부사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병력 차이로 인해 대항하지는 못했다. 이때 하나부사 일본 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서울로 진주한 것은 음력 6월 29일이었다. 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조선측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8월 30일 (음력 7월 17일)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결과 및 평가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개입을 확대시키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댓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 또 일본과는 7월 17일 임오군란의 뒷처리로 손해배상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함으로써 자주권을 더욱 잃게 되었다.

청은 이후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한다. 곧,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창(馬建常)과 뮐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 조선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경제적 침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이 후원한 갑신정변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청일전쟁때까지 청나라의 독주를 지켜봐야 했다.

제물포 조약 (1882년)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은 1882년 8월 30일(음력 7월 17일) 조선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임오군란에 개입한 일본조선에 책임을 물어 일본 측 대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와 조선김홍집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다. 본조약 6개조와 '조일수호조규 속약' 2개조가 각각 조인되었다.

그 내용은 조선측의 50만원 배상, 일본공사관의 일본경비병 주둔, 조선 정부의 공식 사과를 위한 수신사 파견, 임오군란 주모자 처벌, 일본인 피해자 유족에게는 위문금 지불 등이 그 핵심을 이룬다.

제물포조약의 규정에 따라 사과 사절로서 박영효, 김만식 등이 수신사로, 홍영식, 서광범 등이 수행원, 그리고 군왕의 밀명을 띤 민영익, 김옥균 등 15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을 맡는 일본은 국빈대우에 가까운 극진한 대접을 하는가 하면 100일 간의 체제비용을 전액 일본 외무성이 감당하였다. 그리고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당대의 철학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이들이 접촉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그의 해박한 근대지식으로 하여금 조선 청년들을 사로잡게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이들 사절단을 극진히 환대하고, 제물포조약에 의해 조선 정부가 배상토록 한 배상금 50만엔을 5년에 걸쳐 완납토록 했던 것을 10년으로 연장해 주었으며, 조선 정부가 필요로 하는 자금 17만엔을 부산 세관의 수입과 서천 사금광산을 담보로 잡고 연리 8부로 조선에 차용해 주었다.

이런 일본의 계략에 빠져 친일 성향을 갖게 된 이들은 귀국하여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갑신정변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촉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한 정변이다.

1882년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던 박영효등의 일행은 친일성향을 가지고 귀국하여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김옥균·박영효·홍영식은 주(駐)조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이치로(竹添進一郞)와 밀의한 끝에 일본군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키고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기도하고 1884년 음력 10월 17일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개국축하 만찬회를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 개화파들은 연회가 열릴 즈음 이웃집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킨 다음 사대당 요인들을 모조리 암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겨우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혔을 뿐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옥균·박영효 등은 창덕궁으로 달려가 고종에게 사대당과 청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거짓으로 보고하고 왕을 경우궁으로 옮긴 후 일본군으로 하여금 궁을 호위케 한 다음, 민영목·민태호·조영하 등의 사대당 일파를 차례로 죽였다.

12월 5일 개화파들은 각국의 공사·영사들에게 신정부의 수립을 통고하는 한편, 새정부를 구성하고 혁신정강으로 문벌폐지와 인민평등권 확립, 관제의 개혁, 지조법 (地租法) 의 개혁과 재정의 일원화 등 14개 항목을 내세웠다. 그러나 미처 공포도 하기 전에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청국군이 출동하여 창덕궁을 공격하는 바람에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김옥균·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사대당 정부는 더욱 보수적이 되었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일 두나라의 조선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하기에 이르렀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이들은 14개조의 개혁요강을 내세우는 등 개화·개혁의 순수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는 철저하게 일본의 힘을 빌려 집권하고자 한 친일 사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게 한 구실을 만들었다.

 

갑신정변 요약

 

(1) 갑신정변의 배경

개화정책추진이 난관에 봉착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개화당의 요인들이 일본공사의 지원약속을 받고 비상수단을 도모한 것이 우정국사건

 (2) 경과

우정국개국 축하연에서 사대당요인을 살해하고 개화당에의해 정권장악  정부수립이라는공식이였는데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천하로 막을 내림

(3) 결과

한성조약체결(조선과 일본)

천진조약(청나라 일본) 체결

(4) 영향

청의 내정간섭이 강화 보수세력집권강화

개화세력의 배척

(5) 의의

중국과 주종관계 청산

입헌군주제 추진

문벌제도 타파및 평등사상 도입

근대화를 위한 정치개혁운동

 

동학농민운동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인 조병갑의 학정에 반발하여 시작되었지만 그 원인은바로 세도정치가 극에 달아있던 세도가문에 의한 독재적 정치로인해 삼정의 문란과 정치의 한계 그리고 왕권의 약화로

국난이 계속되자 이로인해 많은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중 1811년 12월 평안도를 거점으로 봉기한 홍경래난이 동학의 시발점인데 홍경래의 난은

다음과 같은 명분을 내세웁니다.

 

1. 평안도 지방의 차별 철폐

2. 안동김씨 정권의 타도

3. "도참설"에 근거한 진짜 군왕의 추대

결국 "홍경래의 난"은 홍경래가 전투 중에 죽음으로써 실패하지만

하지만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표출되었고

그 정신이 동학농민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며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후 4월에 전국적으로 봉기하게 되고 6월에는 전주감영을 점령하여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나게 됩니다.

 

동학농민운동의 기본이념은

1. 보국안민

2. 제폭구민

3. 척양척왜로 후에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됩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민중항쟁이라고 할수있습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입니다.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입니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습니다.

 

갑오개혁 (1894년)

 

조선 고종 31년(1894) 7월부터 고종 33년(1896) 2월 사이에 추진되었던 개혁 운동. 개화당이 정권을 잡아 3차에 이르는 개혁을 통하여, 재래의 문물제도를 근대식으로 고치는 등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혁신을 단행하였다.

갑오개혁의 원인: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으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

목적:조선의 전통적인 제도를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함

과정: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개혁을 실시

김홍집을 총재로 삼아 갑오개혁을 주도함

정치:자주독립을 지향함/나라의 공식문서에 한글을 사용함

교육:서울에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 학교를 세움/각 지방에도 소학교를 세움

경제:근대식 화폐제도 답변확정/도량형 통일

사회:조혼을 금지과부의 재혼을 허락

결과:

일본의 간섭으로 자주적 개혁을 이루지 못함

갑오개혁을 실시하게 된 과정

지방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동학 농민군과 의 합의

정부의 정치 개혁 추진으로 민심 수습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정부의 군국기무처를 설치로 개혁안 마련

 

을미사변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가 시해된 사건이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명성황후는 다시 러시아 쪽으로 접근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낭인들을 소집해 1895년 10월 8일에 명성황후가 있던 궁에 들어가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웠다.

명성황후는 폐서인되었으나 대한제국 수립 이후 일본의 작용으로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얻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자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고저한 시점에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조선은 청에 원군을 요청하게되었으며 이때 일본은 톈진 조약을 확대 해석(청과 일본의 조약인데, 둘 중 한 나라라도 군사를 일으키면 나머지 한 나라도 군사를 일으킨다는 내용이 있었음)하여 조선에 원군을 파병합니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하였으며, 조선은 원군의 역할이 없어졌기 때문에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청군은 물러났지만 일본군은 조선의 개혁 추진을 핑계로 물러나지 않고, 경복궁을 점령하여 간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이를 계기로 청일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은 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습니다.그러나 갑자기 커진 일본을 견제코자 프랑스, 독일, 러시아 3국이 일본에게 압박을 가하여 요동반도를 반환케 합니다. 이를 3국간섭이라고 합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이 강대함을 보고, 친러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이 불법으로 경복궁을 침략,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 을미사변입니다.

 

을미개혁 (1896년)을미의병

을미 개혁: 청일전쟁 후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이 러시아 중심의 삼국간섭으로 일시 후퇴하자, 고종은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접근,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정부가 러시아와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 뒤, 친일개화파로 새로 김홍집내각을 성립시키고 을미사변으로 일시 중단된 갑오개혁을 다시 추진하였다. 즉, 을미개혁은 1894년 7월에서 1896년 2월 초까지 약 19개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실시된 갑오개혁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태양력의 사용, 군제·교육제도 등의 개혁과 함께 단발령을 실시하였다. 특히 1896년 1월 공포, 강제 실시한 단발령은 을미사변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일어난 유생들의 반일·반근대의병의 원인이 되었다. 을미개혁은 일본에 의존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반일분위기가 만연하였으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아관파천(1896년) 

을미사변때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피신)함으로써 이른바 아관파천이란 사건이 발생

 

대원군서거 (1898년)

1.흥선대원군의 탄생과 성장배경

조선 왕조 고종 때의 왕족, 정치가, 이름은 이하응이고, 고종의 아버지이며, 시호는 헌의이다.

2.흥선대원군의 주요 업적

. 세도정치 타파_안동김씨 세력 축출

· 서원정리_600여개를 47개소로 줄임

· 양전, 호포제, 사창제실시_ 삼정의 문란 시정노력

· 대정회통 편찬_통치질서 재확인

· 경복궁 중건_왕권회복

· 통상수교를 거부

3.시대적 배경

국내 상황-세도정치로 왕권약화, 정치기강 문란, 삼정의 문란으로 전국적인 농민봉기 동학과 천주교의 확산

국외상황- 이양선 출몰, 서양 세력의 베이징 함락,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됨

4.흥선대원군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

정책은 땅에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고 외세를 배척하고 민생을 안정 시킴으로서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서원 철폐와 호초제로 양반들에게 반발을 사고 경복궁 중건으로 원성을 샀다. 그리고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우리나라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계기가 됬다.

5.후세의 역사에 미친 영향

경복궁 중건사업으로 국가의 수입을 늘리고 쇄국 정책을 펼쳐 우리나라에 근대화를 저지시켰다.

6.결론

·왕권 강화, 백성 생활 안정에 기여

·서원 철폐 등으로 인한 양반의 반발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 고조, 국가 경제곤란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 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우리 나라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그만큼 늦어지게 하여, 결국은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맞게 하였다.

 

대한제국(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Empire of Korea)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의 조선의 국호이다.

국호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기 위해 사용된 의례상·의전상 국호이다. 대한제국의 정식 국호는 ‘한(韓)’인데, 이는 동양의 전통 군주국가 체계하에서 황제국은 통상 한 글자로, 제후국은 두 글자 이상으로 된 국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국호 한에 대외적 의미의 ‘대(大)’ 자를 앞에 추가하고, 국가의 단계를 의미하는 ‘제(帝)’ 자를 중간에 더하여 ‘대한제국’이 된다. 이러한 표기는 서구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된 이후의 일로, 한 글자의 국호를 가지고 있던 청나라가 스스로 대청제국(大淸帝國)이라는 국호를 널리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19세기 이전에도 외교적 수사에서 대당(大唐), 대명(大明) 등의 표기가 없던 것은 아니나 19세기 중후반처럼 흔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용례에서 대한제국의 국호 원류를 상고할 수 있다. 일례로, 1899년 8월 17일에 반포된 대한제국의 헌법적 법전의 명칭은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였다. 한국 또는 대한국을 대한제국이라고 표기하는 것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감안한 측면도 있고 현재의 대한민국과 구분하기 위한 의도도 있다.

역사

제국 성립

을미사변아관파천 등으로 인해 외세로 인하여 나라의 자주성이 크게 위협받게 되자 자주적 국가 수립을 염원하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져갔다. 그래서 1897년 고종경운궁으로 환궁해, 그 해 8월 17일 광무연호를 쓰기 시작하고, 10월 3일 황제 칭호 건의를 수락하였다. 고종은 자주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널리 표명하고 땅에 떨어진 나라의 위신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국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으며,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나라의 이름을 대한제국이라 하고 스스로 황제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각국은 대한제국을 직접적·간접적으로 승인하였다. 그 중 러시아프랑스는 황제가 직접 승인 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 독일 등도 간접적으로 승인 의사를 표시하였다.[1]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열강들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즉위 직후인 11월 12일 미루었던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렀으며, 11월 20일독립문을 완공하였다.

 

 

 

 

 

독립현회

독립협회(獨立協會)는 1896년 7월 설립된 조선의 사회정치단체이다.

1897년에는 서대문구에 독립문을 세웠다.

 

설립한 사람들

 

1896년(고종 33) 7월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는 개화 지식층이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고 활동하였다.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나선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이 적극 참여하였으며, 협회 발족 당시에는 이완용(李完用)·안경수(安駉壽) 등 정부 요인들도 다수 참가하였다.

 

 

목적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

 

활동내용

 

《독립신문》 발간, 민중계몽

초기에는 토론회·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에 힘써서 많은 젊은이들을 모았으며, 나중에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1898년 종로 광장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시국에 대한 ‘6개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고종에게 주청하였다.

 

 

을사조약 (1905년)

배경

1904년 일본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하고 인천에 병력을 투입하여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개시와 함께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이른바 공수동맹을 맺고 전쟁에 필요한 조선의 지원을 강요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자 일본은 조선에 대해 외교권 박탈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하여 체결하게 된다. 조약이 체결된 해의 간지을사년이므로 흔히 을사조약이라 부른다.

정미7조약 (한/일 신협약)(1907년)

1907.8 군대해산: 정미의병봉기

한일합병 (1910년)

일제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1910년의 경술국치 전반을 일컫는 말. 경술국치·국권피탈·일제강점·일제병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원군집정 이후 쇄국정책을 고수하여오던 조선은 1876년(고종 13) 일제의 강압적인 외교에 눌려 강1화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개항을 맞이하였고,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군사·경제·정치적 압력에 직면하게 되었다. 개항 초기에 조선을 둘러싸고 청나라와 세력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도발, 승리함으로써 청나라의 세력을 배제하고 조선에서 보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제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 때부터 등장한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조선이 이와같이 배일친러 정책을 표방하게 되자, 일제로서는 러시아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하여 일전을 벌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러일전쟁을 눈앞에 둔 1903년 12월, 일제는 영국·미국의 지지하에 한국의 식민지화방침을 확정짓는 '대한방침(對韓方針)'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방침 아래 일제는 먼저 러일전쟁도발과 도시에 1904년 2월, 한국에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그들의 침략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군사력을 등에 업고 한국정부를 위협하여 체결한 것이 <한일의정서 韓日議定書>이다. 이로써 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의 제공을 강요당하였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도 징발당하였다. 나아가 한국민의 항일투쟁을 탄압할 목적에서 '치안담당'을 구실로 1904년 7월부터는 군사경찰제도를 일방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다.따라서 한국민은 경향을 막론하고 일본군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어 같은해 8월 일제는 제1차한일협약(한일협정서)을 강제로 체결하여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고문을 재무와 외무에 두도록 하여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탈하였다. 나아가 일제는 한국식민지화를 앞두고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얻는 공작에 전력을 기울여, 미국과는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밀약(桂太郞-Taft密約)'을 맺고, 영국과는 8월에 제2차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양국으로부터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승인받기에 이르렀다. 또한 러일전쟁의 우세한 전황 속에서 9월에 체결된 포츠머스(Portsmouth)강화조약의 결과 일제는 한국 안에서의 러시아세력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한국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받아놓은 상황에서 1905년 11월,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리들을 매수하여 을사조약(제2차한일협약)을 늑결(勒結)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한국은 국권이 강탈당한 채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3.1운동(1919)

 

3·1 운동 (三一運動) 은 일제의 식민상태에 있던 한국인들이 1919년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제강점 하의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한국인의 민족적 항일 독립운동,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한일합병(1910)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에 산발적으로 항거해 오던 한국인은 제1차 세계대전 후미구의 대통령 월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되어, 1919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명의 <독립선언> 발표와 시위운동의 촉발로 거족적인 항일 독립운동을 일으켰으나, 일본군대의 출동으로 좌절되었다. 참가인원 200만여 명, 사망 7,500여 명, 부상 1만 6,000여 명, 투옥 4만 6,000여 명의 희생을 치렀다. 삼일운동의 민족정기는 그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국내 외에서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근대 시민혁명 의식과 자주 독립적인 국민국가의 수립, 민족의 통일을 이한 민족정신으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이 운동의 기폭제가 된 독립선언서 낭독 사건은 민족대표 33인이 주도했다

 

6.10 만세 운동 (1926년)

 

광주학생독립 운동 식민지 노예 교육에 맞서
호남 지역은 일찍이 왜란에서 거의 기울어져 가는 나라와 민족을 소생시키는 발판 구실을 하였다. 1894년에는 반외세의 자주 독립과 반봉건의 근대화를 지향한 동학농민전쟁을 일으켰다.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좌절시켜 엄청난 인명을 살상했고, 한말의 의병 항쟁에서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까지 벌여 의병과 그들을 후원하는 민간인들을 살상하고 탄압하였다.

전라도에 대한 일제의 경제 침탈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혹심하였다. 일제 침략자들이 노리는 농산물과 농토가 풍부한 이 지역에는 일찍부터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동양척식회사가 진출하였다. 이들은 우세한 경제력과 정치적 배경을 업고 탈법적 방법으로 지주가 된 뒤 착취를 시작했다. 이미 왕실과 관료의 착취로 농민들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거기에 일제의 소작료 수탈과 고리대로 농민들은 생존 자체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

3·1운동 이후 민족 운동의 선봉에서 활약했던 학생들은 일제의 정치·경제적 탄압을 피부로 느껴, 앞장서 저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의 학생들과 일본 학생들과의 우연한 충돌이나 일시적인 감정 싸움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정치, 경제적 침략에 대한 분노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일으킨 민족 항쟁이었다.

학생들은 학교 현장에서 차별 교육을 뼈아프게 겪고 있었다. 한국인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일본인의 6분의 1이었다. 그나마 정규 학교에서의 교육은 철저한 식민지 우민화 교육이었다. 일제는 우리말과 글을 없애고, 우리 역사도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조작하였다. 그러나 사립 학교, 종교 계통의 학교, 개량 서당, 강습소, 야학 등은 소수였지만 민족 의식을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애국 지사들이 우리 민족 문화를 수호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특히 국어와 국사 연구 및 이에 대한 교육은 민족 전통의 자각과 민족 주체 의식을 일깨우는 입장에서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학생들의 요구 사항도 '조선어 시간을 늘려 달라' '우리 역사 교육을 실시하라' 등이었다.

3·1운동 이후 높아졌던 교육열로 인해 경향 각지에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활발하게 전개되던 민족 운동과 국내외에서 계속된 항일 민족 해방 투쟁은, 젊은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을 크게 일깨웠다. 거기에다 일제의 가혹한 경제적 착취와 민족 차별 그리고 노골화 한 노예 교육을 직접 겪고 있던 학생들의 일제에 대한 감정은 날로 악화되어 갔다. 6·10만세운동 이후 각급 학교에는 조직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한 비밀 결사가 조직되었다. 강력한 항일 투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단결된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조직된 학생 비밀 결사는 외부의 민족 단체와 연결되기도 하면서 동맹 휴학 투쟁을 전개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해방 (1945년)

 

36년간 일제 치하에서 2차대전 종결로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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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1882년)

임오군란1882년 8월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구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의 정세는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개국 문제를 둘러싸고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 대립하고 있었다. 외교노선은 민씨정권이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 제국과의 통상관계를 연이어 수립하고 있었다. 이 개국 정책은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 뿐만이 아니라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백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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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ㅣ발 'ㅁ'

 

 

어떻게 우리 학교 방학숙제랑 똑같이 예를 들어서 ;; 질문을 하냐 ;;

 

위에 올라온 답변 으로 하면 숙제 ㅈ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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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학숙제를 에 물어봐!!!

 

니 능력으로 해라 ㅋ

광복까지 일제침략과정의 핵심단어좀...

... 등등등 최대한 많이 써주시는 분에게 내공을 드림. 많으면 감사내공도 드림. 강화도조약 (1876년) 체결 과정... 8 군대해산: 정미의병봉기 한일합병 (1910년) 일제침략으로...

일제 강점기의 역사

... 불가침 조약 –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1945) – 소련, 폴란드 침공 1940 – 일제식 성명 강요 실시 (창씨개명) – 한국 독립당 창당 –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창설...

줄거리좀 알려주세요!!

... 침략과 전쟁, 개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선!병인양요... 거쳐 강화도 조약을 맺고,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을 지나 대한 제국이 세워진 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는 한일...

1880~1945년(조선말기~광복) 까지의...

... 임오군란 (1882년) 임오군란은 1882년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정미7조약 (한/일 신협약)(1907년) 1907.8 군대해산: 정미의병봉기 한일합병 (1910년) 일제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한...

근현대사 단어설명좀해주세요...

그냥 간단하게 몇줄만 써주세요~ 30개정도만 써주셔두... 해산군인의 의병참여는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은 일본에 문호를...

6학년 1학기 요점 정리 좀 써주세요^^

... 고려의 재통일 1.과정 : 고려 건국 > 신라 항복 (스스로)... 민족 침략의 극복 1. 거란 : 1차 :서희의 외교 담판(강동... 물리침 강화도 조약과 개화 정책 1. 강화도 조약 : 운요호...

임진왜란에 대해서 요약해서 좀 써주세요.

급해요 빨리 요 최대한 빨리 그리고 ... 삼국통일의 과정 : 당나라와 연합(동맹)➝의자왕정치로 약해진... *강화도 조약 :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 해협에 침범, 초지진...

6학년 1학기 중간고사 핵심 부탁해요!!!

... ㅜㅜ * 핵심 길게 써주세요^^ 확실하게 사시대 1)... 삼국통일의 과정 : 당나라와 연합(동맹)➝의자왕정치로... *강화도 조약 : 1875년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 해협에 침범...

5학년 2학기 2단원 사회 역사연표와...

... 그것에 대한 설명도 써주세요. (설명이 중요해요)... 범위는 1866년 병인양요부터~ 1945년 8.15광복까지요.. 오늘... 병인양요: 프랑스→강화도침략,../양헌수장군이 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