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독립운동가(20명!)내공은 10!

우리나라 독립운동가(20명!)내공은 10!

작성일 2007.10.04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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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독립운동가 20명 부탁해요!

친절한 답변 부탁해요~! 빠를 수록 좋으니 빨리 독립운동가 20명의 이름을 써주세요.

내공10!!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재홍
출생 : 1891년 12월 30일
사망 : 1965년 3월 1일
출생지 : 경기도 평택
직업 : 독립운동가사학자국내 역사인물
소속 :  조선일보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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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출생 : 1886년 4월 22일
사망 : 1947년 7월 19일
출생지 : 경기도 양평
직업 : 독립운동가국내 역사인물
소속 :  조선건국연맹 위원장
서재필
출생 : 1864년 11월 20일
사망 : 1951년 1월 5일
출생지 : 전라남도 보성
직업 : 독립운동가
소속 :  독립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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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출생 : 1878년 11월 9일
사망 : 1938년 3월 10일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
직업 : 독립운동가국내 역사인물
소속 :  신민회 대표

 

 

 

김좌진
출생 : 1889년 11월 24일
사망 : 1930년 1월 24일
출생지 : 충청남도 홍성
직업 : 독립운동가
소속 :  임시정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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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출생 : 1900년 8월 10일
사망 : 1932년 10월 10일
출생지 : 서울특별시
직업 :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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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출생 : 1876년 7월 11일
사망 : 1949년 6월 26일
출생지 : 황해도 해주
직업 : 독립운동가
소속 :  임시정부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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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출생 : 1902년
사망 : 1920년 9월 28일
출생지 : 충청남도 천안
직업 : 독립운동가국내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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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출생 : 1908년
사망 : 1932년 12월 19일
출생지 : 충청남도 예산
직업 : 독립운동가
소속 :  한인애국단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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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현
출생 : 1872년
사망 : 1933년 8월 22일
출생지 : 경상북도 영양
직업 : 독립운동가국내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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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
출생 : 1905년 3월 10일
사망 : 1938년
출생지 : 평안북도 용천
직업 : 독립운동가시인국내 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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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윤봉길-1932년 4월 일본의 천장절과 전승기념 축하식 단상에 수통형 폭탄 투척
1931년 한인애국단 가입
1931년 한인공우회 조직

유관순-3.1운동때 만세를부름

김구-1949년 6월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
1948년 신탁통치 반대운동
1948년 유엔한국위원단 면담에서 단독선거 반대
1948년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 제창

안중근-이토 히로부미사살
이봉창-1932년 사쿠라다문에서 히로히토 암살 시도 실패, 체포
1931년 중국 상하이 한인애국단 가입
1925년 일본 오사카 철공소 직공
1924년 9월 금정청년회 간사
안창호,김두한,김좌진,손병희,홍범도,등등!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박재혁 [, 1895~1921.5.27]

 

부산의 동래()에서 출생하였다. 부산진보통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나와 왜관()의 무역회사에 다니다가 1917년 중국 상하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다니며 무역업에 종사하였으며, 이때 중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였다. 1920년 7월 만주 지린성[]에 있는 무장 항일독립단체인 의열단()에 입단하고 단장 김원봉()으로부터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서장을 암살할 것을 지시받았다.

같은 해 9월 13일 고서적상으로 가장, 고서() 속에 폭탄을 숨겨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와 다음날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만나 폭탄을 던졌다.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시작하여 형 집행 전에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관순 [, 1902.12.16~1920.9.28]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났다. 1915년 선교사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하였으며, 1918년에는 고등과 교비생으로 입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방문하여 만세운동을 협의,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출동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중권()과 어머니 이씨()는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집마저 불탔으며, 자신은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영명학교()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온 오빠 관옥()을 만났다. 그후 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에 의한 방광파열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5월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추서하였다.

 

김좌진 [, 1889.11.24(음)~1930.1.24]

 

본관 안동(). 자 명여(). 호 백야(). 충남 홍성() 출생. 형규()의 2남이다. 부유한 명문대가 출신으로 15세 때 가노()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광무 9)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융희 1)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을 정리하여 호명학교()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고, 1916년 노백린()·신현대()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에 두고 5분단()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참모총장박영희(:부관)·이범석(: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천수평()·마록구(鹿)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 도독부군의 최진동()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滿)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김일성()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남궁 억 [, 1863.12.27~1939.4.5]

 

본관 함열(). 자 치만(). 호 한서(西).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1883년 영어학교에 1년간 다닌 후, 1886년 내부주사()가 되고,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를 수행하여 상하이[]에 갔다. 1889년 궁내부 별군직(), 1893년 칠곡부사(使)를 역임하고, 1895년 내부 토목국장()이 되어 탑골공원을 축조하였다. 그 후 흥화학교() 교사로 영어와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수석총무와 사법위원을 겸임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 관계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와 《황성신문()》 사장이 되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과 러·일협정을 공박하였다. 1905년 성주목사(使), 이듬해 양양군수()로 있으면서 양양에 현산학교()를 설립하고 1907년 대한협회장이 되었다. 1908년 《교육월보》를 간행하고 관동학회() 회장이 되었다. 10년부터 9년간 배화학당()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가정교육》 《신편언문체법()》 등 교과서를 지었으며, 1918년 강원 홍천()의 보리울[]에 교회와 학교를 건립, 무궁화 묘포()를 조성하였다. 1933년 ‘무궁화와 한국역사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1935년 병으로 석방된 후 고향에서 별세하였다. 저서로 《동사략()》 《조선()이야기》 《무궁화 동산》 《기러기》 《조선의 노래》 등이 있다.

 

윤봉길 [, 1908.6.21~1932.12.19]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거점이 중국으로 옮겨지면서 항일운동이 중국, 만주에서 많이 진행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지원과 안내를 받아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윤봉길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거사를 했다.

충청남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과 어머니 김원상() 사이에서 태어났다(1908). 본관은 파평()이고 호는 매헌()이다.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하였다. 동생인 윤성의()와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에서 사서삼경한문학을 계속하였다.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는 농민계몽·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펴나갔다.

농촌사회운동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이란 교재를 집필하여 야학회를 조직,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이란 단체를 설립하여(1929), 농촌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해 2월 18일 부흥원 주관으로 학예회를 열고, 촌극인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는데, 농촌에서 문화활동이 많지 않던 당시여서 관람객이 매우 많이 모여 성공리에 마쳤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농촌활동을 계속하였고, ‘월진회()'라는 농민단체를 만들어 회장에 추대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농촌자활운동을 펴나갔다. 또한 건강한 신체 위에서 농촌의 발전과 민족독립정신이 길러질 수 있다는 신념으로 ‘수암체육회()'를 조직하여 농민들의 건강증진활동도 이끌어 나갔다.

만주 망명
그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무엇인가 큰 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장부()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1930. 3. 6).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미행을 하여,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만주에서 같은 길을 걷는 김태식(), 한일진() 등을 만나 함께 독립운동을 결의하였다.

윤봉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야 성공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상하이를 향해 갔다. 그는 혼자 랴오둥 반도의 남단에 있는 다롄[]을 거쳐 산둥[]반도에 있는 칭다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독립운동 할 곳을 물색하기도 하였다. 결국 1931년 8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는 프랑스 조계( 프랑스가 초차한 지역) 안에 있는 안공근()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중국에서의 뜻있는 일을 위해 생활을 구상하였다. 우선 경제생활을 위해 한국인인 박진()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하였다. 한편으로는 국제활동을 위해 상하이 영어학교에서 영어 공부도 병행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를 찾아가 그의 뜻을 말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였다.

훙커우공원의거
일본은 1932년 자작극인 일본 승려 살해사건을 이유로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일본군은 시라카와[] 대장의 지휘하에 전쟁을 승리하였다. 일본군은 일본 국왕의 생일축일인 천장절()과 전쟁 승리 두 가지를 축하하는 기념식을 갖기로 하였다.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기념식장에서 거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김구를 비롯한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등 지도자들과 협의하여 거사를 구상하였다.

윤봉길은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미리 기념식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기념식장에서 투척할 수류탄도 제조하였다. 폭탄 제조 전문가인 김홍일()의 도움을 받았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은 폭탄(저격용 물통 모양의 폭탄 1개, 자결용 도시락 모양의 폭탄 1개)을 감추고 식장에 입장하였다. 그리고 식이 한참 진행중일 때 식장으로 다가가 수류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시라카와 일본군 대장과 일본인 거류민단장 가와바다[]는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케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일본으로 옮겨져 오사카[]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었다(1932. 11. 20). 그리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중국 등 세계에 알려졌고,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은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국인 한 사람이 해냈다.”고 격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봉창 [, 1900.8.10~1932.10.10]

 

 

1900년 8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용산 문창()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으로 있다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滿) 기차운전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1924년 9월 용산 일대에서 금정청년회()를 조직하여 간사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형 범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라는 이름으로 도쿄[]·오사카 등지를 전전하였다.

1931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과 이춘태()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구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선()으로 둘러댔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치가야[]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백정기 [, 1896.1.19~1934.6.5]

 

호 구파(). 전라북도 정읍() 출생이다.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동냥으로 한문 공부를 하고, 19세 때 큰 뜻을 품고 상경, 식견과 견문을 넓히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에 내려가 항일운동을 선도하였고, 그 후 동지들과 경인()간의 일본 군사시설 파괴를 공작하다가 경찰에 구금되었으나 본적지와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다. 그 후 각지를 잠행()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 일본 군사시설의 파괴에 전력하였다.

1924년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 1925년 상하이[]로 가서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 농민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 이를 흑색공포단(BTP)으로 개칭, 조직을 강화하여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3월 상하이 훙커우[]에서 동지들과 중국 주재 일본대사 아리요시[]를 암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중근 [, 1879.9.2~1910.3.26]

 

본관은 순흥()이며, 아명은 안응칠()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후에 오학교()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 인재양성에 힘쓰다가 국운()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 노에프스키[]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의 탐방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했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동지 조도선()과 통역 유동하()와 함께 이강()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철이사(滿) 다나카 세이타로[]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유필()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구 [, 1876.7.11~1949.6.26]

 

 

본관은 안동()이다. 호 백범(), 아명 창암(), 본명 창수()였으나 구()로 개명, 법명 원종(), 초호 연하()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 농감()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이동녕()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에서 장제스[]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했다. 1940년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조직인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여 그 사령관에 지청천()을 임명하였다. 1941년 12월 9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했다. 194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다시 선임되었다.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김규식()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홍범도 [, 1868~1943.10.25]

 

호는 여천(), 별명은 범도()이다. 1868년 평안북도 자성[:일설에는 평양·양덕()]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 갑산()에 이사, 수렵과 광산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 해 9월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이 법에 의하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11월 차도선(태양욱()·송상봉()·허근()과 함께 산포대()를 조직, 삼수()·갑산지방 포수들의 총포를 회수하러 온 일본군을 북청(후치령()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을 벌여 격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그는 9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전멸시켰는데 한때 갑산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 점령되자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에 전력, 다음 해 부하 박영신()으로 하여금 함북 경원()의 수비대를 습격하게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어 약 400명의 독립군으로 1개 부대를 편성, 국내에 잠입, 갑산·혜산·자성 등의 일본군을 급습하여 전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만포진(滿) 전투에서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1920년 6월 반격전으로 나온 일본군이 제19사단의 병력과 남양() 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 오자, 700여 명의 독립군을 지휘,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20여 명을 사살, 그때까지의 독립군이 올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그해 9월 청산리() 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가하였다.

그 후 독립운동단체가 흑룡강의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주선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었으며, 1921년 러시아령() 흑하자유시()로 이동하여 스랍스케 부근에 주둔,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양성에 힘쓰던 중 1921년 6월 소련 당국의 한국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령으로 빚어진 흑하사변()이 발생하자 소련군과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북만주로 탈출하였다. 그 후 후진 양성에 힘쓰다가 1943년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시영 [, 1869.12.3~1953.4.17]

 

본관 경주(). 호 성재()·시림산인(). 본명 성흡(). 1869년 12월 3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1885년 사마시()에 급제, 1886년 가주서(), 1887년 형조좌랑()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로서 서연관()이 되었다.

1891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부승지()에 이어 우승지()에 올라 내의원(상의원()의 부제조(調)를 겸하고, 다시 참의내무부사(궁내부() 수석참의()를 역임하였으나, 1896년 장인인 김홍집()이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905년 외부교섭국장()에 재등용되고, 1906년 평남 관찰사로 나갔다가 1908년 한성()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 류허현[]에서 신흥강습소()를 설립, 독립군양성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 ·재무총장을 역임, 1929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고,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촉성회() 위원장으로 활약하다가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대통령 이승만()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1951년 부통령을 사임,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국민장으로 정릉()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수유리로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손병희 [, 1861.4.8~1922.5.19]

 

호 의암(). 초명 응구(). 후명 규동(). 충북 청원()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으로서 북접()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의 전봉준()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 ·강계()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상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 ·박영효()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를 조직한 후 이용구()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와 합하여 일진회()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26명을 출교()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를 창립하고 보성() ·동덕()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신채호 [, 1880.12.8~1936.2.21]

 

본관 고령(). 필명 금협산인()·무애생(). 호 단재()·일편단생()·단생().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지금의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들어가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그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논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였으며, 내외의 민족 영웅전과 역사 논문을 발표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다. 1907년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 등에 가입·참가하고, 이듬해 순 한글 《가정잡지》를 편집·발행하였다.

또한 《대한협회보()》 또는 《기호흥학회보()》 등에 논설을 발표하고 1909년 일진회() 성토에 앞장섰다. 1910년 4월 신민회 동지들과 협의 후 중국 칭다오[]로 망명, 그곳에서 안창호()·이갑()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권업신문()》에서 활동하다가, 1914년 이 신문이 강제 폐간되자 그 해 남북 만주와 백두산 등 한국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를 답사하였다. 1915년 상하이[]로 가서 신한청년회() 조직에 참가하고, 박달학원()의 설립 운영에도 힘썼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가, 의정원() 의원, 전원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나, 한성임정() 정통론과 이승만 배척운동을 내세워 공직을 사퇴하고 주간지 《신대한()》을 창간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맞서기도 하였다. 그 후 비밀결사 대동청년단()단장, 신대한청년동맹() 부단주() 등에 피선되었다. 1923년 민중의 폭력혁명으로 독립의 쟁취를 부르짖고 임시정부 창조파()의 주동역할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으로 쫓겨가 다물단()을 조직 지도했으며, 중국과 본국의 신문에 논설과 역사논문을 발표하였다.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기 시작, 1927년 신간회() 발기인,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하여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에서 피체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옥사했다. 적과 타협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저서에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사론()》 《이탈리아 건국삼걸전()》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동국거걸최도통전(()》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여운형 [, 1886.5.25~1947.7.19]

 

 

호 몽양().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하였다. 우무학당() 등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1907년 고향집에 광동학교()를 세우고, 1908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강릉에 초당의숙()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던 중 국권이 피탈되고 학교가 폐쇄되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서간도(西)의 신흥무관학교()를 견학하며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교를 중퇴,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난징[] 진링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다가 상하이[]로 가 1918년 신한청년당()을 발기하여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는데, 일본정부는 이를 자치운동()으로 회유하고자 그 해 11월 그를 도쿄[]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 인사들에게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였다. 1929년 제령()위반죄로 3년간 복역하고, 1933년 출옥,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정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하였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창당,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으나 반대하여 탈퇴하였다. 또,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한지근()에 의하여 1947년 암살되었다. 체육인으로서의 그는 덴마크체조를 보급하였으며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제11대(1946∼1947) 회장을 지냈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규식 [, 1838~1896]

 

본관 청풍(). 자 우약(). 1870년(고종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879, 1888년 두 차례에 걸쳐 이조참의를 지냈다. 1889년 나주목사로 있을 때 광양현에서 난이 일어나자 안핵사(使)로서 이를 수습하였다. 1895년 충주부관찰사로 단발령을 철저히 시행하다가, 의병장 유인석() 휘하의 오명춘()에게 살해되었다.

 

서재필 [, 1864.11.20~1951.1.5]

 

본관은 대구()이며, 호는 송재()이다. 영어명은 제이슨(Philip.Jaisohn)이다.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했다. 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외숙인 판서() 김성근()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879년(고종 16) 전강(殿)에 장원하였다. 이 무렵부터 김옥균(서광범() 등 개화인사들과 교유, 1883년 일본의 도쿄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 귀국 뒤 국왕에게 사관학교의 설립을 진언,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1884년 12월 김옥균·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참판 겸 정령관()이 되었으나 정변의 실패로 일본을 거쳐 1885년 미국으로 망명, 1889년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본국의 명성왕후 일파가 몰락하자 1896년 귀국 후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정부예산을 얻어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한편, 이상재()·이승만() 등과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모화관()을 인수·개축하여 독립회관으로 하였다. 1897년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나 수구파() 정부와 일부 외국인의 책동으로 다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가 3·1운동 소식을 전해 듣고 잡지 《The Evening Ledger》와 제휴, 한국문제를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한국에 친화적인 성향의 미국인을 규합하는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후 상해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활약, 1922년 워싱턴군축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연판장을 제출하고, 1925년 호놀룰루의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일본의 침략을 폭로·규탄하였다. 1947년 미군정 장관 J.R.하지의 초청으로 귀국, 미군정청고문()으로 있는 동안 국민의 추앙을 받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 및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미국에 있던 그의 유해는 전명운()의사의 유해와 함께 1994년 4월 8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옥균 [, 1851~1894]

 

 

본관 안동(). 자 백온(). 호 고균() ·고우(). 시호 충달().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6세 때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1872년(고종 9)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교리() ·정언() 등을 역임하면서 관료로서 출세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 등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1881년(고종 18)에 일본을 시찰하고, 다음해 다시 수신사(使)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일본을 다녀온 후에는 일본의 힘을 빌려 국가제도의 개혁을 꾀할 결심을 굳혔다.

서재필() 등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시키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과 함께 국가의 개혁방안을 토론하다가, 1884년(고종 21)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부측에 군인양성을 위한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청나라 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가 지나치게 수구적()인 데 불만을 품고 국제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는 개혁을 단행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수구파의 제거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신축한 우정국() 청사의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를 감행하여 한규직() 등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의 호조참판으로 국가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 10년간 일본 각지를 방랑한 후 1894년(고종 31)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자객 홍종우()에게 살해되었다.

갑신정변은 민중이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닌 소수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에서 임오군란()과 구분되고,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항거가 아닌 기층질서에 대한 개혁의지였다는 점에서 동학농민운동과도 구분된다. 또 왕조의 제도적 개혁을 뛰어넘어 왕조질서 그 자체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갑오개혁()과도 구분된다.

갑신정변에 투영된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 그 자체에 어떤 궁극적 해답을 주려는 혁명적 의도가 들어 있었다. 1895년(고종 32)에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의 상소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융희 4)에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기화근사()》 《치도약론()》 《갑신일록(: )》 등이 있다.

 

이윤재 [, 1888.12.25~1943.12.8]

 

 

호 환산()·한뫼. 경남 김해 출생. 대구 계성()학교에서 수업하고 평북 영변()의 숭덕()학교에 재직 중 3·1운동에 가담,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중국 베이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24년 귀국, 오산()·배재() 등 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잡지 《한글》을 편집하였다. 1927년 조선어학회 《우리말 사전》 편찬위원이 되고 1934년 설립된 진단학회()에 가입, 국사연구에도 참여하였다.

1937년 수양동우회()사건에 관련, 이듬해 11월까지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와 연희전문학교·감리교신학교 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국어학자들과 한글맞춤법을 제정하는 한편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는 등 한글 보급을 통한 민족운동을 계속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피체,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주요저서로 《성웅 이순신》《문예독본》 등이 있다.

 

이상재 [, 1850.10.26~1927.3.29]

 

본관 한산(). 호 월남(). 본명 계호().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에서 박정양()과 사귀어 l0여 년 간 그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그가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갈 때 그의 수행원이 되어 도일(), 동행하였던 홍영식(김옥균() 등과 깊이 사귀었다. 1884년 우정국 총판()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使)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청나라의 압력으로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이 되자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로 학무국장()을 겸임하면서 신교육령()을 반포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법부참사관()을 지내고, 1896년 국어학교 교장·내각총서() 및 중추원 1등의관()을 거쳐 의정부()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사건으로 구금되었다가 10일 후 석방되어 의정부 총무국장을 사임하였다. 1902년 개혁당()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참찬()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이상설()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듬해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종교부 총무 및 교육부장을 겸임하던 중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교섭을 받았으나 참가를 거부하였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 회장이 되어 베이징[]에서 열린 만국기독교청년연합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 후 1923년 소년연합척후대(:보이스카우트) 초대 총재가 되고, 이듬해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장례는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안창호 [, 1878.11.9~1938.3.10]

 

호는 도산()으로 평안남도 강서(西)에서 출생했다. 한학을 배우다가 서당 선배로부터 신식학문에 눈을 뜨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청일전쟁()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보고 깨달은 바 있어 1895년 상경, 구세학당()에 들어가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를 쾌재정()에서 개최하여 약관의 몸으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안겨준 연설을 하였다. 훗날 종교가이며 교육자로서 민족의 지도자가 된 이승훈()은 이 연설에 감명을 받고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혔다고 술회할 정도였다.

1899년 고향 강서에 한국 최초로 남녀공학의 점진학교()를 세우는 한편 황무지 개척사업을 벌였고,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문을 더욱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고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을 하면서 초등과정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 이듬해에는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을 위해 한인공동협회()를 만들어 《공립신보()》를 발간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 귀국, 1907년 이갑(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대구에 태극서관()을 세워 출판사업을 벌이고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육성에 힘쓰는 한편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하고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 지도자 양성에 힘쓰는 등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신민회 간부들과 함께 개성헌병대에서 3개월간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는데 이는 1909년에 있었던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그 후 시베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 1912년 그 곳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조직하여 초대 총회장에 취임하고, 기관지 《신한민보()》를 창간하였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21년 임시정부가 내부분열을 일으키자 이를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 조직을 강화하였다.

1926년 다시 상하이로 가서 흩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으며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상촌() 건설에 뜻을 두고 이를 추진하였으나 일제가 중국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실패하고,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공원[]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2년 6개월을 복역한 뒤 가출옥하여 휴양 중 동우회()사건으로 재투옥되고, 1938년 병으로 보석되어 휴양 중 사망하였다.

그의 기본사상은 《민족개조론()》을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실역행()을 근간으로 하는 그의 흥사단 정신은 오늘날에도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프리웨이에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가 생겼다. 2004년 로스앤젤레스에 '안창호 우체국'이 생겼다.

 

박은식 [, 1859.9.30~1925.11.1]

 

본관 밀양. 자 성칠(). 호 겸곡()·백암()·태백광노(). 10세 이후 부친에게 한학을 배웠고,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주자학 연마에 심혈을 기울여 일찍부터 문명()을 날렸다. 학문적 계보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찍부터 신기영()·정관섭() 같은 정약용()의 문인들과도 접촉하면서 그의 실학사상을 체득하였다. 26세를 전후하여서는 박문일(박문오() 형제에게서 주자학을 본격적으로 사사하였다.

1885년 향시에 합격, 1888∼1894년까지 숭인전참봉·동명왕릉참봉의 벼슬을 지냈다. 1890년대 서울에 거주하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사상도 종래의 정주학() 중심에서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양명학()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를 바탕으로 교육·언론가 또는 민족운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898년 9월 장지연이 창간한 《황성신문》의 주필로 민중계몽에 나섰고, 만민공동회와 더불어 반봉건·반침략 투쟁을 벌이던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였다. 또한 성균관의 후신인 경학원 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지내면서 교육개혁에 관한 글을 집필하여, 1904년 《학규신론()》을 간행하는 한편, 서우학회(西)를 발기하고 1908년 그 후신인 서북학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으며, 기관지 《서우》 《서북학회월보》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교육·학회 활동뿐만 아니라 《황성신문》이 복간되자 자리를 옮겨 10년 폐간될 때까지 일제의 침략상을 고발하는 언론활동을 계속했다.

이 밖에도 그는 1909년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유교개혁을 주장하고, 장지연 등과 대동교()를 창건하여 종교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유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의 공작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민중계몽 ·교육 ·언론 활동도 1910년 국권피탈과 더불어 일단 막을 내리고, 1911년 가을 만주 위안런현[]으로 망명하면서 나라 밖에서 구국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나라 잃은 슬픔을 국사연구를 통하여 승화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지()》 등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1912년 상하이에 도착한 그는 신규식()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를 조직했고, 상하이에 박달()학원을 세워 교포자제를 교육했다. 1914년 잠시 홍콩에 머물다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국시일보()》의 주간이 되었는데, 이때 《안중근전》과 《한국통사()》를 지었다.

1915년 상하이에서 이상설·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이 당의 취지서와 규칙을 작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또한 신규식과 함께 대동보국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8년에는 러시아에서 한인교포 잡지 《한족공보()》 발행에 관여하던 중 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1운동을 맞이하였다. 이에 그는 독립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기 시작, 이듬해 이를 간행하였다.

3·1운동 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이 되었고, 1924년 임정 국무총리 겸 대통령 대리, 1925년 3월 이승만의 대통령 면직으로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임정은 독립운동의 이념·방법·지연·인맥 등의 파벌 암투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임정의 헌법을 개정, 대통령제를 국무위원제로 고치고 그 해 8월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무위원을 선임하고 자신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 해 11월 ‘독립운동을 위한 전민족 통일’을 당부하는 유촉()을 남기고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정의 국장으로 상하이 정안길로()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정부에 의해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는 그의 독립활동과 많은 저술들을 통해 독립정신을 함양하고 민족해방운동의 정신적 지주를 유지하려면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역사서술과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비록 정신주의적·관념적 역사관에 머물긴 했지만 역사 연구와 서술을 민족해방운동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최익현 [, 1833.12.5~1906.11.17]

 

 

본관 경주(). 자 찬겸(). 호 면암().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하였다. 김기현(이항로() 등의 문인().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사헌부 지평(사간원 정언()·이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 등 반()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 철폐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로 된 격렬한 척사소()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의정부 찬정()·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임락()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을 배포한 뒤,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를 구술(), 임병찬에게 초()하여 올리게 하였다. 단식을 중지하였으나 그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합 48권)이 있다.

 

조만식 [, 1883.2.1~1950.10.18]

 

본관 창녕(). 호 고당(). 평안남도 강서(西)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 재학 중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그 때 인도의 독립운동가 M.K.간디의 무저항주의민족주의에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직하고 3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1년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1922년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1923년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연정회()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 그 후 숭인중학()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西)체육회 회장,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언론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민족주의운동을 지도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구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요청을 거절하고 극력 반대하다가 한때 구금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소련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부하였다. 그 해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을 내세우고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소련군정청 당국과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당을 접수하고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 협박과 회유를 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월남()을 종용하는 제자들의 간청도 거절하였다. 그 후 6·25전쟁 때 평양형무소에서 공산당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1991년 유발()을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한용운 [, 1879.8.29~1944.6.29]

 

본관 청주(), 호 만해(·), 속명 유천(), 자 정옥(), 계명 봉완()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에 가서 연곡()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에서 원종종무원()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을 저술, 대승불교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에 가입하여, 이듬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한용운의 연표]

연 도

내 용

1896

동학에 가담했으나, 운동의 실패로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감

1905

백담사()의 연곡()에게서 중이 되고, 만화()에게서 법을 받음

1908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에서 원종종무원()설립. 도일하여 일본 시찰

1910

국권 피탈로 중국·시베리아 등지 방랑

1913

귀국하여 불교학원에서 교편 잡음
《조선불교유신론》발간

1914

《불교대전()》 저술

1916

월간지 《유심()》발간

1919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에 서명, 3년간 복역

1920

조선불교청년회 결성

1926

시집 《님의 침묵》출간

1927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경성지회장 역임

1931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월간지 《불교》를 인수,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

1935~36

장편 《흑풍()》연재

1938~39

장편 《박명()》연재

 

 

홍경래 [, 1771~1812]

 

 

출신 지역은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이다. 아버지를 포함한 가계를 알 수 없으며, 아들만 네 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처 최소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신분은 대개 몰락양반이라고 설명하여 왔으나,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유교는 물론 풍수()에 상당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한 이었다. 평양 향시를 통과했고 한양으로 올라와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고 전한다. 홍경래는 당시의 세도가들의 폭정과 민중탄압을 비판하고 민중의 희원을 반영하여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진인설()을 봉기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하였다고 전한다. 이 밖에 성장과정과 과거응시 등에 대해서 19세기 후반 작자미상의 한문단편 《홍경래전》를 근거하고 있지만, 그 내용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1801년(순조 1)에 우군칙()과 병란()을 논의한 뒤로 10년 동안 각지를 다니며 향촌의 유력자, 무술을 갖춘 장사(), 그리고 부호를 끌어들여 봉기를 준비하였다. 평서대원수(西)의 직책을 띠고 1811년 12월 18일 가산 다복동의 봉기로부터 만 4개월 동안 계속된 반란을 총지휘하였다.

1812년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정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으며, 정부로부터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민중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변혁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죽지 않고 하늘을 날아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그가 이끈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지배체제가 아니라 기층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대규모의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중세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남자현 [, 1872~1933.8.22]

 

본관 영양(). 경상북도 영양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남편 김영주()가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여 유복자()를 길렀다. 1919년 3·1운동 때 중국 둥베이[] 지방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西)에서 활약하는 한편, 12곳에 교회를 건립하고 10개의 여성교육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에 힘썼다.

1925년 박청산()과 국내로 잠입,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고, 1932년 국제연맹 리턴조사단하얼빈[]에 도착하자 무명지를 끊어 ‘조선독립원()’이란 혈서를 써서 끊어진 손가락과 동봉하여 전달,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33년 만주 괴뢰정부 건국일(3월 1일)에 이규동() 등과 함께 일본장교 부토 노부요시[]를 살해하려고 폭탄과 무기를 휴대하고 가다가 체포되었다. 옥중에서도 단식으로 항쟁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하얼빈에서 객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동녕 [, 1869.2.17~1940.3.13]

 

 

본관 연안(). 호 석오(). 자 봉소().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생하였다.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국권이 위축되자 전덕기(양기탁() 등과 상동()청년회를 조직, 계몽운동을 벌였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폐기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 해 북간도로 가서 이상설()·여준() 등과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교포교육에 힘썼다. 1907년 귀국, 안창호()·김구()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청년학우회() 총무로서 활약하였다. 1910년 신흥강습소()를 설립, 소장이 되어 독립군 양성과 교포교육에 힘썼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권업회()를 조직하고, 《대동신문()》 《해조신문()》을 발행하였으며, 1913년 대종교()에 입교하고, 1919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장·내무총장, 1921년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 중 파벌싸움으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놓이자, 안창호·여운형()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 단결을 촉진하였다. 1924년 재차 국무총리가 되어 군무총장()을 겸직하고 이어 대통령대리가 되었으며, 1926년 국무령(), 1927년 주석()이 되었다.

1929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 이사장에 피선되고, 같은 해 재차 의정원 의장이 되었으며, 임시정부 주석은 계속 역임하였다. 1935년 양우조() 등과 한국국민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는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광복진선()에 가담하여 항일전을 구상하며, 1939년 김구와 전시내각을 구성, 조국광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쓰촨성[]에서 병사하였다. 임시정부 국장()으로 장례가 거행되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안공근 [, 1889.7.11~1940]

 

일명은 서이로(西)·조한용()·장진구()이다. 황해도 신천()에서 출생하였다. 1909년 평안남도 진남포보통학교()에서 부훈도()로 재직하던 중 형 안중근()의 의거 소식을 듣고 동생 안정근()과 함께 중국 뤼순[]으로 건너갔다. 그후 1919년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 1920년 10월 임시파로외교위원()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12월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의사회() 의원, 1921년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표의원에 선임되었고, 1922년에는 이동휘(김규식()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 체류하면서 레닌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을 지원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6년 2월 상해한인교민단() 단장이 되어 한인들의 인권보호와 민족정신 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26년 5월에는 상하이에서 이유필(최창식(오영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촉진회()를 결성, 민족의 해방과 독립운동가의 조직적인 단결을 위해 노력할 것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0년 김구()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독립당()에서 특무공작을 주도·지휘하였고, 1931년 한인애국단(),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여 주요 간부로 활동하면서 친일분자의 암살과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애국단() 대표로서 미국과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단체의 연명()으로 '한국당호운단체()의 중일전국()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같은 해 8월 한국국민당·재건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과 미주의 대한인국민회·한인애국단·대한부인애국단 등을 통합, 우익진영의 연합체인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고 좌익계열인 조선민족전선연맹()과의 통합을 모색하는 한편 대일항전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명근 [, 1879.9.2~1927.7.7]

 

본관은 순흥()이다. 안중근() 의사와 사촌간이다. 황해 신천()에서 출생했다. 105인사건의 발단이 된 안악사건의 장본인이다. 어려서부터 안중근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이승훈()·김구()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1910년 국권피탈 후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중국 둥베이[]지방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황해도 송화()·신천 등지에서 신석효(), 이완식() 등과 함께 자금을 염출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뒤 같은 해 12월 선천역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 일본총독을 암살하려 한‘105인사건’의 주모자가 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복역하다 몇차례 감형되어 15년 동안 복역하였다.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지린성[]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승훈 [, 1864.4.25~1930.5.9]

 

본관 여주(). 호 남강(). 본명 인환(). 1864년 4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시골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16세 때 납청정()에서 유기상()인 임권일()의 상점의 점원이 되었는데, 10여 년 후 유기행상·공장경영 등으로 재산을 모았으나 1894년 청일전쟁 때 재산을 모두 잃었다.

다시 공장을 일으켜 서울·인천 등지를 내왕하는 도매상을 시작, 일약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편, 1899년 돈으로 벼슬을 사서 수릉참봉()이 되었다. 오산면() 용동()에 본가를 짓고 승천재()를 세워 인근의 소년들을 모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 당시 관서지방의 자산가들을 연결하여 큰 민족자본을 만들어 침투해 오는 외국자본을 막아야 한다는 ‘관서자문론(西)’을 내세웠다.

이탈리아 사람과 제휴,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한국 최초의 국제투자를 시도하였는데,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파산하였다. 그 후 시골에 칩거하면서 나라가 기울어 감을 걱정하다 늦게나마 면학()의 길을 찾던 중 1907년 평양 쾌재정()에서의 안창호()의 교육진흥론() 연설에 크게 감동받아, 당장 상투를 자르고 금주단연()을 실천에 옮기고 승천재를 개축하여 강명의숙()을 열었다.

또한 신민회() 발기에 참여한 후 다시 재단()을 만들어 오산학교()를 세웠으며, 10년 평양에 마산자기회사()를 세웠다. 그 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오산학교의 교육목표를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하여 세웠다.

1911년 5월 안악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9월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 4년 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15년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한편,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2월 서울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그리스도교 관련인사의 참여문제는 자신이 책임지고 활동하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가출옥, 그 해 일본시찰을 하고 돌아와 총독부와 교섭하여 오산학교를 고등보통학교로 승격시키고,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1926년 오산학교 이사장에 취임, 재직 중 사망하였다. 그의 생전에 졸업생들의 발기로 오산학교 교정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사망하자 사회장으로 오산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장지연 [, 1864.11.30~1920.10.2]

 

본관 인동(), 호 위암()·숭양산인(), 초명 지윤(), 자 순소()이다.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1894년(고종 31) 진사()가 되고, 이듬해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고, 1897년 아관파천() 때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를 기초하였다.

이해 사례소() 직원으로 《대한예전()》 편찬에 참여, 이듬해 내부주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이승만(남궁 억()·양흥묵() 등과 만민공동회()를 열어 총무위원으로서 정부의 실정을 규탄하였다. 1899년 《시사총보()》의 주필로 항일구국()의 필봉을 휘둘렀으며, 한때 사직하고 광문사()를 설립,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간행, 1901년 황성신문사 사장이 되어 민중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전력을 다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써서 일본의 흉계를 통박하고 그 사실을 전국민에게 알렸다. 이로 인해 일본 관헌에 잡혀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정부에서 통정대부()로 기용하였으나 거절하고, 물러나 역대 문헌의 수집과 저술에 힘썼다.

1906년 윤효정() 등과 대한자강회()를 조직, 구국운동을 벌이다가 이듬해 강제로 해산을 당하자 대한협회()로 개편하였으나, 압력이 심하여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해조신문()》 주필이 되었다. 경영난으로 신문이 폐간되자 상하이[]·난징[] 등지를 방랑하다가 귀국, 1909년 진주() 《경남일보()》 주필로 취임, 이듬해 8월 29일 국권침탈이 되던 날 황현()의 절명시()를 게재, 이로 인하여 《경남일보》는 10일간 발행정지 되었다.

저서에 《유교연원()》《동국유사()》 《대동시선()》 《농정전서()》《일사유사()》 《위암문고()》 《대한최근사()》 《대동문수()》 《대동기년()》 《화원지()》 등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윤동주 [, 1917.12.30~1945.2.16]

 

만주 북간도명동촌()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이며, 아버지는 윤영석(), 어머니는 김룡()이다. 1931년(14세)에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자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1933).

1935년에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여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하여 거기서 졸업하였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에 묻혔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와 당숙인 윤영춘()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이 추모시를 선사하였다.

윤동주는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처녀작은 <삶과 죽음> <초한대>이다. 발표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인 <쉽게 쓰여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에서 출간되었다(1948).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작으로 그의 인간됨과 사상을 반영하는 해맑은 시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겨울> <버선본> <조개껍질> <햇빛 바람> 등이 이에 속한다. 후기인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쓴 시는 성인으로서 자아성찰의 철학적 감각이 강하고, 한편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암울한 역사성을 담은 깊이 있는 시가 대종을 이룬다.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쉽게 쓰여진 시> 등이 대표적인 그의 후기 작품이다. 특히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의 대표시로서, 어두운 시대에 깊은 우수 속에서도 티없이 순수한 인생을 살아가려는 그의 내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

 

김시현 [, 1883~1966]

 

본관 안동(). 자 구화(). 호 하구().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3 ·1운동 후 만주에서 항일무장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무력항쟁을 벌였다. 1920년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혁명단체대표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고, 1923년 의열단의 밀령으로 국내에 들어와 전국적인 규모의 폭동과 요인 암살을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29년 석방되어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지린성[]에서 독립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1년 베이징[]에서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형무소에서 5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베이징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2년 베이징 일본영사관에 1년간 감금되었고, 1945년 다시 일본헌병대에 잡혀 수감중 8 ·15광복으로 석방되었다. 귀국 후에는 정계에 투신, 민주국민당 고문을 역임하고,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52년 대통령 이승만()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60년 4 ·19혁명으로 석방되었고, 그해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한형석 [, 1910.2.21~1996.6.14]

 

1910년 2월 21일 부산 동래(:지금의 부산직할시 동래구)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 한흥교()와 함께 중국으로 가, 상하이[]의 신예()예술대학에서 작곡 등을 공부하였다.
 
1939년 10월 충칭[]에서 조직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예술조장을 맡아 일하였다. 그뒤 《한국행진곡()》 《항전가곡()》 등의 군가를 작곡하였고 시안[西] 등지에서 서사시국경의 밤》과 《아리랑》을 공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40년 중국 중앙 전시() 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의 교관을 지냈다. 이듬해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자, 《광복군가집》 1·2집을 발간하고 《국기가()》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을 작곡하였다.

1944년 10월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작곡과 가극활동을 계속하여 침체된 무장항일투쟁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최재형 [, 1858.1.20~1920.4.7]

 

일명 재형()·도헌(). 러시아명은 뻬돌소오·최뻬찌카.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하였다.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여 귀화하였다. 러시아 군대의 어용상인()으로 돈을 벌었고, 러시아 관리가 되어 두 차례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5개의 훈장을 받았다. 노우키예프스크 도헌()이 되어 연봉 3,000루블을 받게 되자 은행에 예치하여 그 이자로 매년 교포학생 1명씩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켜 인재양성에 진력하였다. 러일전쟁이범윤()과 상의,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이범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부터 이듬해까지 산발적으로 두만강을 건너 함북 일대의 일본수비대와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가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이를 맡아 재발행, 격렬한 논조로 일제를 규탄하고 독립을 절규하였다. 또한 노우키예프스크 한족민회() 회장에 취임, 교포자녀들을 위한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국권피탈 후에는 사태를 관망하며 동지규합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그 해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을 벌이던 중 붙잡혀 살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서재현 [, 1906.11.15~1999.7.14]

 

본관은 달성()으로, 1906년(고종 43) 11월 15일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1919년 아버지를 따라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인성학교()의 소년회 회장을 지냈다. 이어 상하이 둥지대학[]에 재학 중이던 1925년 5월에 25명의 한인 유학생들과 함께 저장로[] 남쪽으로 행진하면서 제국주의 타파 및 치외법권 철폐를 외치며 중국 학생들의 배외() 운동에 가담하였다.

1931년 9월 김석()의 집에서 상하이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의 중흥을 협의하고, 같은 해 11월 프랑스 조계()에서 개최된 임시총회에 참가해 해소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이 청년동맹의 해소와 새로운 조직의 구성 등에 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듬해 1월 역시 프랑스 조계에서 한국 청년들의 단체 훈련과 혁명 역량을 강화할 목적으로 김석 등 8명의 동지와 함께 상하이한인청년당을 조직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펼쳤다.

1944년 3월에는 난징[]에서 결성된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으로 활약하였고, 6·25전쟁 때는 해군 중령으로 참전하였다. 1955년 해군공창장을 끝으로 준장으로 예편한 뒤에는 재계에 몸담아 한국기계공업 사장, 강원산업(주) 부사장 등을 지냈다. 1999년 7월 14일에 사망한 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금성충무무공훈장, 은성을지무공훈장, 건국훈장 애국장(1994)을 받았다.

 

윤희순 [, 1902~1947. 5]

 

190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경성 주교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서양화를 공부하여 1927년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였다.

교사를 그만 둔 뒤 1932년 《매일신보()》 학예부에 들어갔다. 1935년 서화협회() 회원이 되었고, 그 해 열린 제14회 서화협회 회원전, 1938년 중견화가 양화전·회원전 등에 많은 작품을 출품하는 등 창작 활동을 계속하였다. 1943년 지금의 《월간조선》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조광사()로 자리를 옮겼다가 2년 후 광복이 되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서울신문》으로 개제·속간되면서 그 자치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6년 조선조형예술동맹 위원장으로 선출된 후로 조선미술동맹 위원장과 조선미술동맹 미술평론부 위원장 등을 역임하던 중 1947년 폐결핵으로 죽었다.

저서에 《조선미술사연구》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조형예술의 역사성〉(1946), 〈고전미술의 현실적 의의〉(1946), 〈조선미술사방법〉(1948) 등의 논문과 〈일본미술계의 신경향의 단면〉(1931), 〈조선미술의 당면과제〉(1932), 〈회화의 현대성―길진섭전을 보고〉(1940) 등 많은 평론을 썼다.

 

박차정 [, 1910.5.7~1944.5.27]

 

부산 동래() 출신으로, 15세 때부터 조선소년동맹()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5년 일신여학교()에 입학해 조선청년동맹과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槿)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뒤,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조사연구부장·상무위원·선전부장·출판부장 등을 맡아 여성 항일운동에 이바지하는 한편, 그해 12월 근우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전국적 반일학생운동으로 확대시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듬해 1월 부산방직 파업사건을 주도하다 다시 체포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난 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해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에는 한중 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임명되어 사관생도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뒤 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을 거쳐, 1936년 7월 이성실()과 함께 남경조선부인회()를 조직해 부녀자들의 민족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주도하였고, 다음해 11월에는 의열단 한중민족연합전선의 대() 일본 라디오 선전방송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8년 의열단 기관지 《조선민족전선()》에 글을 투고해 무장궐기를 촉구하고, 그해 10월부터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맡아 항일 투쟁에 주력하였다. 이듬해 2월 장쑤성쿤룬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1944년 5월 사망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신돌석 [, 1878.11.3~1908.11.18]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자는 순경(舜卿)이며, 본명은 태호(泰浩), 이명은 돌석(乭錫)이다. 경상북도 영덕(盈德)에서 출생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조국의 운명이 위급해지자 무력으로 적과 싸울 것을 결심, 1906년 영해(寧海)에서 의병 3백여 명을 일으켜 진군을 개시하였다. 울진군(蔚珍郡) 평해면(平海面)으로 가서 다시 3천여 명의 의병을 재편하고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접전, 경상도·강원도 일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따라 기습전으로 많은 적을 사살하는 등 가는 곳마다 큰 전과를 올렸으며 그만큼 명성도 높았다. 그러나 일본군의 병력도 증원되어 부득이 일월산(日月山), 백암산(白岩山) 등지로 퇴각하면서도 일본군에게 요소요소에서 큰 타격을 입혔다.

장진홍 [, 1895~1930.6.6]

 

 

본관 인동(). 일명 성욱(). 경북 칠곡() 출생이다. 1912년 조선보병대에 들어가 근무하다가 제대한 뒤 1918년 비밀결사 광복단()에 가입하였다. 그해 하바롭스크로 망명하여 교포청년들을 규합, 군사훈련을 지도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3·1운동 당시 각지를 돌아다니며 일본의 만행에 관한 자료를 수집·정리하여 그해 7월 미국군함이 인천에 입항하자 그 군함에서 하사로 근무하는 김상철()에게 주면서 영문으로 번역하여 세계열강에 배부, 그 진상을 알릴 것을 부탁하였다.

1925년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폭탄제조법을 배우고 국내에 잠입, 영천()에서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하여 대구 덕흥여관() 박노선()을 시켜 포장된 폭탄상자를 배달하도록 하여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였다. 피신해 있던 안동에서 다시 거사하려다가 실패, 1928년 일본에서 체포되어 송환, 사형선고를 받고 1930년 대구감옥에서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진만 [, 1876.8.24~1934.1.12]

 

1876년(고종 13)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7월 풍기()의 광복단조선국권회복단을 통합하여 결성한 항일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을 행동강령으로 군자금 모금과 독립군 양성 등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이에 따라 그는 대의()를 위하여 대구 부호인 처가에 침입하여 자금을 강탈하기로 계획하였다.

1916년 8월 광복회총사령 박상진()으로부터 받은 권총을 휴대하고 김진우()·정운일()·최병규() 등과 그의 장인인 서우순()의 집에 잠입하다가 발각되어 1917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광제 [, ?~?]

 

독립 운동가. 충남 보령군 출생.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의 침략상이 노골화되자 1907년 서상돈() 등과 국채보상회()를 조직하였으며, 전국민이 3개월간 금연()한 돈으로 이완용() 내각이 일본에서 차관한 1,300만 원을 갚고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 민족의 자주성을 찾자는 운동을 벌였다.

 

이승희 [, 1847.2.19~1916.2.27]

 

본관 성산(). 호 강재()·대계()·한계(). 본명 계도(). 1847년 2월 19일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유림() 30여 명의 서명을 받아 매국 5적신()의 참형()과 조약의 파기를 상소하고, 일본군 사령부에 강경한 항의문을 보낸 것이 화근이 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어 국채보상운동()에 가담, 서상돈()과 모금운동을 벌이다가 친일파의 방해공작으로 실패하고, 고종 양위()사건이 발생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이상설() 등과 함께 동포자제들의 교육과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3년 베이징[]을 방문, 각지를 순방하여 중국 명사들을 만나보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역설하다가 병으로 사망하였다. 유고로는 《한계유고》가 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곽낙원 [, 1859.2.26~1939.4.26]

 

1859년 2월 26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하였다. 김순영()의 부인이며 독립운동가인 김구()의 어머니이다. 《천자문》을 가르치고 《동몽선습()》 《사서삼경()》 등을 읽히는 등 아들 김구의 교육에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17세 때 남편이 반신불수가 되자, 안악()·신천()·장연·해주() 등지로 의사를 찾아 안정을 되찾게 하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봉기한 김구가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인천형무소 등지로 전전할 때, 매일같이 면회가서 아들을 격려하였다. 김구가 탈옥하자 남편과 같이 체포되어 인천형무소에 3개월간 투옥되었던 일도 있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고, 또한 남편의 죽음으로 집안형편이 어렵게 되자 삯바느질과 남의 집 가정부 노릇을 하며 김구를 키웠다. 아들 내외가 모친의 환갑잔치를 베풀려 하였으나 시국의 어려움을 들어 거절하였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아들을 따라 옮겼다가 1926년 귀국하였다. 1934년 다시 중국으로 가서 김구를 격려하고 아들이 마련하는 생일비용은 전액 무기구입자금으로 돌렸으며 찬거리를 줄여 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82세로 충칭[]에서 생을 마쳤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중권 [, 1863.11.2~1919.4.1]

 

한말의 독립운동가. 유관순의 아버지. 충청남도 천안()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사재()를 털어 천안에 흥호학교()를 세웠다. 1919년 3·1운동 때 서울에서 이화학당에 다니던 딸 관순()과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관헌에 의하여 부인과 함께 살해되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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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朴尙鎭) 1884. 12. 7∼1921. 8. 13 호:固軒


경북 경주(慶州)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爲)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 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지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 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급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피체되어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차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換)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피체되었고, 사형을 언도받아 4년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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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강탈 과정
조  약
내  용
한일 의정서
(1904년)
*군사상 필요한  장소 강탈
*제4조 : 제3국의 침해 또는 내란으로 대한 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대일본 제국 정부는 곧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대한 제국 정부는 대일본 제국이 용이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 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다.
제1차 한일협약
(1904년)
*재정과 외교 부문의 고문 정치 강요
*제1조 : 대한 제국 정부는 대일본 제국 정부가 추천한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에 초빙하여 재무에 관한 사항은 모두 그의 의견을 들어 시행할 것
*제2조 : 대한 제국 정부는 대일본 제국 정부가 추천한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외부에서 초빙하여 외교에 관한 중요한 업무는 모두 그의 의견을 들어 시행할 것
을사조약
(1905년)
*조선의 외교권 강탈과 통감부 설치
*제1조 : 일본국 정부는 동경의 외무성을 경유하여 지금부터 한국이 외국에 대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고,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거주하는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임무를 담당하고 한국 정부는 지금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떤 조약이나 약속을 맺지 않을 것을 서로 약속한다.
*제3조 :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한국 황제 폐하 밑에 1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둔하고 친히 한국 황제 폐하를 만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한일신협약
(정미7조약)
(1907년)
*통감의 권한 강화와 군대 해산
*제1조 :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4조 : 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부수각서
-제3 다음 방법에 의하여 군비를 정리함
-육군 1대대를 존치하여 황궁 수위를 담당하게 하고 기타 부대는 해체한다.
한국 병합 조약
(1910년)
*제1조 :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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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명밖에 못해서 ㅈㅅ하구요... 도움 되셨으면 해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재홍

여운형

안창호

김좌진

이봉창

김구

류관순

윤봉길

남자현

김산

안중근

김두한

손병희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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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명 이요 ㅋ  

 

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10명...

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10명 알려주세요~~ 오늘 내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고여... 부탁드립니다~~ 내공 많이 걸께요~~ <김구 [金九, 1876.7.11~1949.6.26]> 한국의 정치가...

우리나라독립운동가

잘알려지지않은독립운동가좀알려주세요(10명이상으로부탁)(내공100,내공냠냠,부실한답변신고) 우리나라독립운동가들) 1. 민영환 (1861.7.25~1905.11.30) 한말의 문신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김구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중.. 김구 를 A4용지 2장 정도로.. 자세히 알아봐 주세요.. 내공 많이 드립니다. 저 도와 주시는... 사실 두 의사의 장한 일이 있은 후, 중국 사람들은 10억...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방학숙제)빨리!!ㅋ^^

... 우리나라독립운동가중 1명을 정하여 A4용지2장분량이면...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아군 20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타격을...

독립운동가 업적 조사(내공45)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들의 생몰연대와 업적 짧게 공책 3,4줄정도로 조사해주세요... 김좌진 [金佐鎭, 1889.11.24(음)~1930.1.24]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

내공100겁니다.우리나라를 빛낸...

우리나라를 빛낸 사람들 한 5~20명 써주세요.내공100 안녕하세요 질문자님의 질문에... 만민공동회, 신민회 등을 조직한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 방정환: '사랑의 선물'을 짓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3명...

오늘 최대한빨리 올려주세요ㅜㅠ 내공만 받아먹지 마시구요~` 초6인데요~ 선생님이 내일 인물카드를 만든다고 하셧는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3명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