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공20] 조선초기의 정치,경제,문화,인물,예술 등 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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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05.26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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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신문을 만들려고 하거든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인물은 그 인물의 업적도 함께 설명해주세요.

간단히 항목만 나타내도 괜찮아요.

여기서 질문 처음해봐요.

그래서 내공 어떤건지 모르는데 일단 25 드릴게요.

잘부탁드려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정치

고려말 무인정권에 의해 귀족정치가 붕괴된 이후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하고 있었다. 학문적 인 교양을 갖추고 정치 실무에도 능한 학자적 관료, 그들이 바로 신흥사대부였다. 일반적으 로 그들은 문벌을 통한 음서 보다는 과거를 통해 정치적 진출을 도모했다. 그들의 출신 배경은 지방의 향리층 출신이 많았으며, 경제적으로 중소지주 내지 자영농민층 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개간하거나 토지를 매입했으며, 또 수리시설이나 영농 법의 개량 등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만든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대지주이자 동시에 원나라와 결탁하고 있던 권 문세족과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신흥사대부들이 대거 중앙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전후해서였다. 공 민왕은 대외적으로는 반원,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억압을 지향했다. 그는 정동행성 폐지, 친원파 제거, 옛 관제 복구, 쌍성총관부 철폐 등의 개혁정치를 주도하면서, 친명정책을 추진 했다. 그 과정에서 권문세족과 인연이 없는 승려 신돈 같은 인물을 중용하기도 했다. 그는 권문세족의 토지와 노비를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해방시켰는데, 일반 백성들의 환영 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개혁정치는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과 능력을 갖춘 신흥사대부 계층은 점차 고려의 정치무대에 등장해, 정치의 대세를 변화시켜가게 되었다. 고려말은 국제관계에서도 격동과 위기가 교차하는 시기였다. 공민왕 대에 이미 두 차례에 걸쳐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다. 왜구의 침입은 이미 그 전부터 시작되었다. 왜구는 각지의 해 안에 상륙, 촌락을 습격해 약탈하곤 했다. 왜구의 침입은 특히 해상교통을 마비시켜 해상을 통해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을 때로 어렵게 함으로써 국가재정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왜구를 막기 위해 수차례 외교적 교섭을 추진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일본 정부 자체가 그들 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무력으로 그들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최영, 이성계, 정지 등은 왜구 세력을 물리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 결과 최영, 이성계를 중심으 로 일단의 무장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무장 최영과 이성계는 대외정책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였다. 당시 권세를 장악하 고 있던 이인임은 공민왕 시대의 친명정책에서 다시 친원정책으로 되돌아갔다. 이에 대해 이성계, 정몽주 등은 극구 반대했다. 그러던 중에 명나라는 철령위를 설치, 원나라의 쌍성총 관부 지역을 직속 영토로 한다는 통보를 해왔다. 최영은 요동정벌을 도모했으며, 우왕 역시 거기에 동조했다. 원정을 반대하던 이성계 일파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되돌리고 말았다. 그들은 우왕 과 최영을 축출하고,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은 고려를 타도하고 새 왕조를 세우 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으로 몰아 내쫒고, 허수 아비와 다를 바 없는 공양왕을 세웠다(1389년). 전제개혁을 통해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한 그로서는 새왕조를 건설하는 절차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정몽주와 같은 영향력있는 일부의 반대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같은 반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렇게 장애물을 제거한 그들은 공양왕에게 양위를 강요,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다 (공양왕 4년, 1392). 고려가 망하고 이른바 이씨의 역성혁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태조 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도읍를 한양으로 옮겨 새 왕조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건국 후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사대부들, 특히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은 대신 중심의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권익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에 조선 건국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왕실세력과 다른 공신들이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왕 자의 난으로 표출되었다. 이방원은 세자로 책봉된 이복 동생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태종이다. 태종은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국왕에게 집중시켰고, 도평 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대신들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실제 업무를 6조에 맡겨 6조 직계 제를 시행했다. 그는 또 {경제육전}을 보완하는 {원육전}과 {속육전}을 만들게 하였다. 그 뒤를 이은 세종(1418-1450)은 집현전을 설치, 우수한 학자들을 모아 중국의 고전과 옛 제도를 연구하게 했다. 세종은 집현전에서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국가의 정치체제를 정비하 고자 했다. 군신간의 권력균형을 통해 안정되었던 정치구조는 세종의 사후 문종·단종대에 이르러 정치 적 실권이 다시 관료들에 의해 좌우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일부 사대부의 도움을 받아 조카 단종(1452-1455)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바로 세조이다. 이 과정에서 원로 황보인, 김종서와 동생인 안평대군 그리고 후세에 사육신으로 불리우는 신하들이 살해당했다. 폐위된 단종 역시 살해되었다. 세조가 편찬을 착수했던 {경국대전}은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성종 16년(1485)에 반포, 시행 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의 완성은 건국이후 모색된 조선의 국가운영의 기본 방침이 확정되 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 사회의 지배층은 양반 사대부, 그 중에서 특히 훈구세력이었다. 그들은 개국 공신 들을 비롯해, 역대 왕들을 보좌하면서 제도를 정비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세조를 도와 왕위 에 오르게 한 세력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실용학문에 능하고, 관찬 사업에 참여하 는 관학자들이기도 했다. 대개 한양부근 경기지역에 거주했던 이들은 많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어 경제적인 여유도 누리고 있었다. 반면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재야의 독서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중소지 주층에 속하며, 향촌에서 유향소나 향청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학문적으로는 시 나 문장을 짓는 사장보다는 유교경전 공부인 경학을 중시했고, 유학의 기본정신이 수기치인 에 있다고 믿었다. 자연히 도덕적 수양을 중시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사림이다. 사림세력은 성종(1469-1494) 때에 대거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훈구세력의 비 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의 제자를 배출하면서 사림의 세력이 커졌다. 중앙에 진출하게 된 그들은 주로 3사 계통에 자리를 잡고 언론을 통해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계에서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대립이 조성되었고, 마침내 정치적 갈등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15·16세게 4차례의 사화는 이 과정에서 발발하였다. 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구세력의 정치적 보복이라는 성격도 없지 않았다. 4차례에 걸친 사화, 즉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 기묘사화 (중종 14년, 1519), 을사사화(명종 즉위년, 1545)는 각각 경우가 달랐다. 하지만 사림 세력이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함으로써 빚어진 훈구세력과의 갈등과 대립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거 듭된 사화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림 세력은 점차 서원과 향약을 토 대로 지지기반을 넓혀가며, 마침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향촌에 확고한 사회적 기반을 가진 사림 세력은 서원, 향약과 농장을 토대로 세력을 키워갔 다. 그리고 선조(1567-1608) 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정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교육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를 겸한 서원은 사림의 근거지가 되었다. 선현의 봉 사는 그들의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유명한 서원으로는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 있다. 훗날 이황의 건의에 따라, 국왕의 친필로 소수서원 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그리하여 이른바 사액서원이 시초가 되었다. 서원은 선조대에 이 미 100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서원과 함께 사림들의 지위를 굳게 해준 것은 향약이었다. 좋은 일을 서로 권하고 잘못을 서로 규제하는 것을 지향한 향약은, 사회적으로 유교도덕이 행해지는 이상국가의 건설을 목 표로 하였다. 중종 대에 조광조가 실시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가, 그 후에 널리 시행되기 에 이르렀다. 선조 대에는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사림의 경제적 기반은 지방의 농장에 있었다. 관직을 얻어 중앙으로 가더라도 농장에서 완 전히 철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여전히 그들의 동족이 살고 있었다. 농장과 동족이 지방에서 서원을 건립하고 향약을 운영해가는 사림세력의 물적, 인적 토대였던 셈이다. 사림이 중앙 정계에 등장,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정치의 운영방식 또한 바뀌게 되었다. 종래 의 6조체제에서 3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를 중심으로 하는 운영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3사가 사림의 의견을 집약해, 그것을 공론으로 제시함에 따라 자연히 이들의 정치적 발언권 이 강해졌다. 3사는 각각 독자성을 지니고 있어, 의견을 통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의 의견 을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직책이 이조의 전랑이었다. 이조 전랑은 관등이 5, 6품에 지나지 않았지만, 홍문관의 젊고 총명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유학자 중에서 임명된데다 스스 로 후임까지 지명할 수 있었다. 전랑을 거치면 대개 재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자연히 전 랑이 3사의 의견을 실질적으로 주도해갔다. 사림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중앙 정계에서는 이조 전랑을 통해 조정된 3사의 의견을 존중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사림의 의견은 그대로 정치에 반영되었으며, 누구도 그것을 무시하고서 독자적으로 정치를 운영할 수 없었다. 그것이 독특한 사림정치의 메카니즘이었다. 사림의 존 경을 받는 인물은 산림이라 하여 높이 떠받들어졌다. 서원에 근거를 둔 사림의 공론은 산림 을 통해 수렴되곤 하였다. 사림이 중앙 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들 사이에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생 겨났다. 그리고 그것이 붕당을 낳게 되었다. 특히 이조 전랑의 임명을 둘러싼 갈등으로 표면 화되면서 김효원 등 신진관료 중심의 동인과 심의겸 등 기성관료 중심의 서인으로 나뉘어졌 다(선조 8년, 1575). 초기에는 동인이 득세해 서인을 압도했다. 동인에는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 많아서, 학파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원이 붕당의 근거 지가 되는 경향을 낳기도 했다. 정여립 모반사건(선조 22년, 1589)으로 동인 세력이 약해졌 지만, 그래도 세력은 유지되었다. 그러다 서인 정철이 세자책봉을 건의한 건저의 사건을 전 후해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남인은 주로 이황의 문인들로, 북인은 주로 조식의 문인들로 구성되었다. 그 후 북인이 광해군(1608-1623)을 추대한 공으로 정권을 전담했다. 억눌려 있던 서인은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다(1623). 그 후에 는 서인들이 오랫동안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선조 25년(1592)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일본 에서 전국시대라는 혼란기를 수습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을 통해 일본 국내의 통 일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은 서울을 향해 북상했다. 조선 정부는 도순찰사 신립에게 기 대를 걸었지만, 그 역시 충주에서 패하고 말았다.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고, 두 왕자는 근왕 병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자가 적었다. 무방비 상태에 가깝던 조선의 전 국토는 왜군에 의해 짓밟혔다. 왜군은 전투 경험이 많은데다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상황은 곧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바다에서 왜의 해군 활동이 저지되고, 육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다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맹활약했다. 그는 함선을 건조 하고, 군사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새롭게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어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해전에서의 승리는 적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육지에서 펼쳐지던 왜군의 작전 에 막대한 차질을 안겨주었다. 육지에서 의병활동 역시 거세게 일어났다. 양반, 농민, 노비 등이 모여 의병장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해, 작전 지역을 점차 확대해나갔다. 대체로 명망이 높은 사림들이 의병장이 되 었다. 조헌,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정문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들 이외에도 묘향 산의 휴정, 금강산의 유정 등의 승려들도 승병을 거느리고 활약했다. 한편 왜군의 명나라 침략을 우려한 명이 참전을 결정하였고, 이윽고 명나라의 원군이 조선 에 도착했다. 이여송의 5만 원군은 평양을 탈환하고 남으로 왜군을 추격했다. 이 때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과 명나라의 저항으로 본국으로 물러났던 왜군이 선조 30년(1597) 다시 침략해 옴으로 써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이 때 왜군의 진출지역은 경상도 지역에 한정되었으며, 바다에서도 이순신에 의해 격파당하고 말았다. 토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모두 퇴각하고 말았 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1608-1623)은 내정과 외교에서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 했다. 즉 내정분야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하면서 민생의 안정을 위해 대 동법을 시행하였고, 이외에도 사고의 정비, 서적의 간행, 호패의 실시 등 각 분야에서 상당 한 치적을 올렸다. 대외적으로는 쇠퇴하던 명과 청(후금)의 교체기를 관망하면서 중립외교노 선을 통해 조선의 안정과 실익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는 서인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으며, 인조가 즉위하였다(인조반정, 1623). 서인 정권은 후금을 배격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그것이 후금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마침 그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공신의 한 사람인 그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관군에게 패하자 그 일당이 후금으로 도주, 광해군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알리고 침략을 종용했다. 이에 1627년 후금이 침입해왔다(정묘호란). 조정은 강화를 청하고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을 약속, 후금의 군대를 철수하게 했다. 이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1636년) 사신을 보내 군신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왔 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단연코 거부했다. 이에 청 태종이 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병자호 란). 왕자와 왕실가족은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갔다. 군량이 적은데다 구원병도 오지 않았다. 게다가 강화가 함락되고 왕자와 왕실가족이 포로로 잡히게 되자,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삼전도(지금의 송파)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조선은 명과 단교하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신하로서의 예를 지키고, 명을 공격할 때 원 병을 파견할 것 등을 약속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가고, 강경론자였던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잡혀가 죽음을 당했다. 김상헌도 청나라로 잡혀가 오랜 옥중 생활 을 했다. 그 후 임경업이 명과 연계해 청을 치려 한 적이 있으며, 또 인조를 이어 왕위에 오 른 효종(봉림대군)은 북벌을 계획한 적도 있었다.

(2)경제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정도전, 조준 일파는 공양왕을 세운 후, 전제개혁을 단행했다. 그때까지 신흥사대부에 의해 주장되면서도 실천에 옮겨지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색 등 온건 개혁파의 반대가 있었지만, 점차 그들은 정권에서 밀려났다. 개혁적 인 사대부들은 방대한 농장을 소유한 권문세족과 사원세력을 배척하고자 했다. 전제개혁은 전국 토지에 대한 새로운 양전 작업으로부터 시작되었다(창왕 원년, 1389). 이듬 해 종래의 공사 전적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이어 공양왕 3년 새로운 전제의 기준이 되는 과 전법을 공포했다. 과전은 경기도에 한해 관직의 고하에 따라 분배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이성 계, 정도전 조준 일파는 많은 과전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 이외의 토지는 모두 공전 으로 편입시켰고, 농장은 모두 몰수했다. 그로 인해 권문세족의 경제적 토대는 붕괴되었으며, 그것은 곧 그들의 몰락, 나아가서는 고 려왕조의 몰락을 의미했다. 공전의 증대는 국가의 수입을 증가시켰으며, 그것은 새로운 왕조 조선의 경제적 토대가 되었다. 전제개혁 때 실시된 과전법에 의하면, 관리들은 18과로 나뉘어 일정한 과전을 받게 되어 있 었다. 과전은 경기 지방의 토지에 한하도록 했는데, 이는 지방 세력의 대두를 막기 위한 것 이었다. 과전은 또 일대에 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세습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 결과 과전으로 줄 토지가 부족해졌다. 게다가 세습이 허락된 공신전이 늘어났다. 세조 12 년(1466)에는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을 실시했다. 현직 관리에게만 지급했던 것이다. 그 러나 직전법도 오래 실시되지 못하고, 명종 11년(1556)에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관리들은 오 로지 녹봉만 받게 된 것이다. 그 외에 지방 유력자인 한량에게 지급한 것으로 군전이 있었다. 과전과 마찬가지로 세습되 어갔다. 중앙관부의 비용을 위해 지급된 공해전은 없어졌으며, 조세와 공물로 충당되었다. 그외에 학전, 사원전, 관둔전, 국둔전 등이 설정되어 있었다. 조선의 토지제도는 형식적으로는 왕토사상에 입각해 국가에서 직접 조를 거두는 공전을 제 외하고는, 적절히 분배해 수조권을 위임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허나 실제에 있어서는 세습 되거나 사유지처럼 되어버렸다. 수급자가 직접 조를 거둘 수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그것이 점점 농장으로 발전해갔다. 농장의 확대는 국가의 공적인 수입을 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을 곤궁하게 만들었다. 토지의 경작은 농민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보다 발전된 기술과 각종 비료를 이용해, 매년 토 지를 경작하는 연작법을 쓰고 있었다. 논에서는 이앙법도 생겨나 있었다. 가뭄에 대비해 저 수지도 만들었으며, 기후에 맞는 품종을 개량하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고려시기에 비해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였다. 농민들의 사회적 지위 역시 향상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자영농민들이 적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농민의 대부분은 양반의 소유지를 경작하고 수확의 반을 지주에게 납부하는 전호였 으며, 신분적으로는 양인인 상민이었다. 그 밖에 외거노비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들 은 신분적으로는 주인이 있는 천민이었으나 독립된 호를 이루고 독립된 가계를 유지하고 있 었다. 농민들은 이주의 자유가 없었다. 이들이 농토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호패법 이 제정되었다. 호패는 일종의 신분증명서였다. 또한 오가작통법에 의해, 거주지로부터의 이 탈을 서로 감시하게 하였다.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은 국가에 대해 토지세인 전조를 내야 했 다. 과전법에서 전조는 수확량의 10분의 1이었지만, 세종 26년(1444) 새로 제정된 공법에서 는 수확량의 20분의 1로 되었다. 공전의 전조는 각지의 조창을 거쳐 조운을 통해 서울에 운 반되었다. 전조를 정하는 기준으로는 전분6등법과 연분9등법이 있었다. 토지의 비옥함에 따 라 6등급으로 나누고 그 해의 풍년, 흉년에 따라 9등분한 것이다. 한편 경작자인 농민과 토 지소유자인 지주 사이에는 수확의 반을 서로 나눠 갖는 병작제가 행해지고 있었다. 농민들 은 또 공납을 부담해야 했다. 공납은 각지의 토산물을 바치는 것이므로 토공이라 하기도 했 는데, 관청의 용도에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들인 장 정들에게는 역의 의무가 있었다. 역에는 교대로 군대에 가야 하는 군역과 일정한 기간 동안 국가나 관청에서 요구하는 노동에 종사해야 하는 요역이 있었다. 요역은 인원과 날자수가 정해져 있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임의대로 징발하기도 했다. 농민들의 자급자족을 위한 가내수공업은 무명을 짜는 면직업이 대부분이었다. 견직업(비단), 마직업(삼베), 저직업(모시) 등도 행해졌지만 목면의 재배가 성행했다. 면포는 농민들의 옷 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군복 재료 및 무역품이 되기도 했다. 국가는 세금 대신 면포를 납 부하게 하기도 했다. 농촌에서 농구제조업도 행해졌으며, 주로 대장장이들이 담당했다. 그들 의 대부분은 농사도 겸하면서 수공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수공업에서는 관영수공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훌륭한 수공업 제조기술을 갖고 있 던 장인들은 대부분 공장안에 등록된 관장이었으며, 중앙 및 지방의 감영, 병영, 수영 등에 배속되었다. 관장은 서울에 약 2,800여명, 지방에 3,800여명 정도 있었다. 이중에는 일정기간 동안 관청에 동원되는 기간을 제외하고는 사영 수공업에 종사하며 장세를 내는 사람도 있었 다. 그들은 신분상으로는 천민이었지만, 실제로는 독립된 세대를 이루고 독립된 가계를 유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노예노동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도시에서는 전업적인 사영수공업도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양반의 사치품을 주문받 아 생산하기도 하고, 일상 생활 용품을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한양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도로 양쪽에 시전이 있었다. 국가에서 건설한 건물을 점포용으로 상인들에게 임대해준 것이다. 육의전이 대표적인 것인데, 그들은 특정한 상품을 독점해서 팔 수 있는 특권을 갖는 대신 국가나 왕실,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바쳐야 하는 일종의 어용상인이었다. 그 외에 영세한 시전도 있었고, 또 몇 군데의 장시가 한양에서 열리고 있었 다. 지방에는 장시라 부르는 정기시장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주로 군역이 나 조세를 피해 도망다니는 농민들이 보이고 도적이 훔친 물건을 파는 곳이라하여 금지와 탄압을 받았다. 5일마다 열리는 장시에는 보부상이 다양한 물품을 유통시키고 있었다. 보상 은 세공품 위주의 사치품을, 부상은 생활필수품을 주로 다루었다. 그들은 합법적인 단체권을 가진 보부청을 조직하기도 했다. 수로에는 선상이 있었으나,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화폐경제는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태종 원년(1401)에 저화, 세종 5년(1423)에는 조선통보, 그리고 세조 10년(1464)에는 전폐를 만들었다. 대체로 세를 거두는데 사용되었으므로, 널리 유통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천민으로는 노비가 있었다. 여기에는 국가에 속하는 공노비와 개인에 속하는 사노 비가 있었다. 공노비는 다시 입역노비와 공납노비로 구분되었다. 입역노비는 일정한 기간 동 안 관청의 노역에 종사해야 했고, 납공노비는 몸값으로 매년 일정한 신공을 바쳐야만 했다. 그런 구분은 사노비에도 해당되었다. 솔거노비는 주인집의 잡역이나 농경을 하는 입역노비 였으며, 외거노비는 일정한 신공을 바치는 납공노비였다. 노비는 어느 한 쪽 부모가 노비이면, 자식은 자연히 노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 소생 자식은 종모법에 따라 어머니편에 소속되었다. 또한 일정한 가격에 매매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노비 나 외거노비는 독자적인 세대를 이루고 독립된 가계를 이루고 있으면서,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었다. 그래서 일반 양인신분인 농민과 거의 다를 바 없었다. 짐승의 도살과 가죽제품의 제조, 그리고 유기를 만드는 등의 일을 하면서 특수부락을 이루 고 사는 백정 역시 천민 신분에 속했다. 고려 시대에는 이들을 양수척, 화척 등으로 불렀다. 그외에 유랑극단이라 할 수 있는 광대나 사당패가 있었다.

(3)문화

고려 후기의 유교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은 성리학을 받아들였다는 점에 있다. 성리학은 {소학}을 중심으로 일상 생활의 실천윤리를 중시하는 측면부터 수용되기 시작했다. 이어 인생과 우주의 근원을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는 철학 부문이 발전하게 되었다. 정치적인 도덕에 있어서는 군신의 의리를 강조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고려말에 등장한 신흥사대부 계층은 성리학을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게 되었다. 처음으로 성리학은 신봉한 사람은 안향이었다. 그 후 백이정이 원에서 성리학을 배워 왔으며, 그의 제자 이제현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이숭인, 이색, 정몽주, 길재, 정도전, 권근 등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다. 성리학의 전파는 곧 불교 배척과 직접 연결되었다. 중국에서도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불교를 비판, 극복하는 형태로 성리학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신흥 사대부들은 고려 사회의 지배이념이자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서의 불교를 비판할 수 있는 이론적 무기를 성리학에서 얻어냈던 것이다. 정도전은 특히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불교를 비판했다. 불교가 인간의 윤리를 무시하고 나라를 해치는 것이라 비난했다. 실제 생활에서는 {주자가례}에 의거한 유교식 생활규범이 점차 불교의 그것을 대체하게 되었다. 게다가 지방의 서원에 근거를 가지고 있던 사림들이 중앙 정계에 등장하게 되면서 성리학은 더욱 융성하게 되었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이언적, 기대승, 이황, 이이와 같은 훌륭한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사단칠정 논쟁과 같은 지적인 토론이 활발하게 전개되기도 했다. 성리학의 유행과 더불어 불교는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조는 도첩제를 실시해, 승려의 숫자를 제한하고, 사원을 함부로 짓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 태종은 전국에 242개 사원만 남 기고 모두 폐지해 버렸다. 그리고 사원에 소속되어 있던 토지와 노비를 몰수했다(태종 6년, 1406). 불교계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세종과 세조는 불교에 대해 개인적인 호의와 관심을 표시하였다. 세종은 궁성안에 내불당을 지었으며, 세조는 원각사를 짓고 간경도감을 두어 한글로 된 불경을 간행하기도 했다. 유교적 교양을 갖춘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성종은 다시 강력한 억불책을 밀고 나갔다. 도첩제를 폐지하고 출가 자체를 금했다. 이 어 중종 2년(1507)에는 승과를 폐지해버렸다. 그것은 불교와 공적인 관계를 단절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명종 때 섭정하던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중용, 불교를 장려하면서 승과를 다시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 국가의 계속된 억불정책에 따라 불교는 점차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회사상으로 기능했던 고려에서와 달리 부녀자들을 주 대상으로 한 신앙 의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조선 초기의 문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한글의 창제라 할 수 있다.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부합하는 문자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 민족사적인 의의가 있다. 세종은 일부 유학자들 의 거센 반발을 물리치고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우리 민족 최대의 문화유산인 한글을 창제, 반포했다(세종 28년, 1446). 그러나 한자 사용에 익숙해있던 양반 사대부들은 한글 사용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들은 한글을 언문이라고 멸시하며 한문사용을 고집하였다. 때문에 한글이 만들어진 초기에 는 궁중이나 일반 양반 가정의 아녀자들이 많이 사용했다. 세종은 정음청(언문청)을 설치해 왕실 조상의 덕을 기리는 {용비어천가}, 부처님의 덕을 찬 양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합해서 {월인석보}) 등의 시가와 {동국정운} 같은 연구서 를 한글로 편찬하였다. 이어 세조는 불교 서적을 번역, 출간하였다. 불경언해가 바로 그것이 다. 또한 {삼강행실도}와 같은 유교 도덕을 강조하는 책에 그림을 곁들어 한글로 펴내기도 했다. 그외에 농사에 관한 책이나 병서 등도 한글로 저술되었다. 이후 한글은 서민계층을 중 심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시기에 집현전이나 홍문관 학자들에 의해서 학문이 크게 발달했다. 자연히 많은 서적이 간행되었다. 이 때 간행된 책들은 대부분 유교 도덕을 선양하거나 아니 면 실제 현실과 관련된 종류가 많았다. 나라에서는 무엇보다 역사서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역사는 정치의 거울이라는 관념이 작용했던 것이다. 태종 13년(1413) {태조실록}이 편찬된 이래로 역대 왕들의 실록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실록은 안전한 보관을 위해, 서울(춘추관) 및 성주, 전주, 충주의 4개 사고에서 보관했다. 실록에서 후대의 귀감이 될만한 역대 왕들의 훌륭한 언행을 뽑아 만든 {국조보감}도 간행되었다. 이 책은 세조 4년(1458)에 처음 나온 뒤 그 후에도 계속 간행되었다. 또한 전 왕조인 고려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것은 새 왕 조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고려사}는 세종 때에 시작해 문종 원 년(1451)에 완성되었다. {고려사}가 기전체인 반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고려사절요}는 편 년체 역사서였다(문종 2년, 1452). 그 외에 단군조선에서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 리한 최초의 통사 {동국통감}도 편찬되었다. 이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생각해, 평양에 사 당을 세우고 국가에서 제사지내던 것과 관련이 있다. 군사 기술 분야에 있어서는 화포의 제작이 크게 발달했다. 종래의 방어용에서 벗어나 공격 용으로 나아갔다. 그 제작법과 사용법은 세종 30년(1448)에 편찬된 {총통등록}에 그림과 함 께 한글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문종 원년(1451)에는 화차가 제조되었다. 수레 위에 신 기전이라는 대형 화살 100개를 설치하고 심지에 불을 붙여서 쏘는 일종의 로켓포였다. 6) 문학과 예술 서거정은 과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와 문장을 뽑아 {동문선}을 편집해, 한 문학을 정리했다(성종 9년, 1478). 사대부 문인들 사이에는 한편에서 설화문학이 크게 유행 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 성현의 {용재총화}, 어숙권의 {패관잡기} 등을 들 수 있다. 그들 은 예로부터 전해오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담고 있다. 이들은 훗날 {대동야 승}과 같은 총서로 모아지기도 했다. 그리고 김시습의 {금오신화}는 소설의 선구로 여겨지고 있다. 유교 국가에 있어 음악은 곧 치국의 도이기도 했다. 그래서 음악의 정리는 큰 과제가 되었다. 세종 때 박연이 그 일을 했으며, 성종 24년(1493)에는 {악함궤범}을 내놓았다. 아악, 당악, 향악 3부로 나누어 악율에서 그 실제 응용에 이르기까지 그림과 함께 설명한 것이다. 고려의 악가나 민간의 속요를 수집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악장을 많이 지었다. 새 왕조를 창 건한 사대부들의 승리를 자축하는 장중하고 엄숙한 것들이었다. 정도전이 지은 [신도가]나 정인지 등이 지은 {용비어천가} 등을 들 수 있다. 고려말 이래 사대부들 사이에 유행했던 경기체가 역시 거기에 포함된다. 조선 중기에는 경기체가나 악장 대신에 가사가 발달했다. 가사는 4-4조의 산문으로, 한국적인 시가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철이 대표적인 작 가인데, 그는 [관동별곡]을 비롯해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시조가 널리 유행해, 사대부가 지녀야 할 교양의 하나가 되었다. 시조는 박인노, 신흠 등을 거쳐 윤 선도에 이르러 대성되었다. 그는 [산중신곡] [오우가] 등을 남겼다. 미술은 문인화로 불리는 수묵화가 유행했다. 세종 때 이름을 날린 강희안이 대표적인 화가 였다. 당시 활약했던 안견이나 최경, 그리고 이상좌 등은 모두 도화서 소속의 화원이었다. 안견은 대가들의 화법을 종합해 대성한 화가로서 [몽유도원도] 같은 산수화를 남겼다. 최경 은 산수와 인물에 능했고, 이상좌는 노비 출신으로 화원에 선발되었다. 화원들은 양반들이 원하는, 그들의 취미에 맞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주로 산수화와 인물화였다. 서예에 있어서는 송설체(조맹부체)가 유행했다.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송설체의 대가 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글씨를 썼다. 초서에 능한 양사언과 해서로 유명 한 한호 역시 명필로 이름높았다. 서예는 그림과는 달리 양반이면 누구나 해야 하는 교양이 기도 했다. 또한 독특한 미술품이자 실용품으로 자기가 있다. 조선에서는 주로 백자가 만들 어지면서 고려 청자가 자랑하는 곡선미 대신 소박하고 순후한 직선적인 형태가 자리잡게 되 었다. 백자는 밑바닥이 넓어서 보기에 안정감 있는 실용적인 공예품으로 제작되었다

(4) 예술

⑴ 문학:세종 때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이 창작됨으로써 국문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고려 중기에 발생한 시조는 조선시대에 박인로(朴仁老)·신흠(申欽)·윤선도(尹善道) 등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박인로의 와 윤선도의 등이 유명하다. 후기에 이르면서 서리나 기생 등으로 작가층이 확대되었고, 형식면에서 장형화(長型化)되고 내용면에서 사실성을 띤 사설시조가 유행하였으며, 또한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 박효관(朴孝寬)·안민영(安玟英)의 《가곡원류》 등 여러 시조집이 편찬되었다.

가사(歌辭)는 정극인(丁克仁)의 이후 사대부문학으로 자리잡아 은거가사·유배가사·기행가사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였고, 송순(宋純)을 거쳐 정철(鄭澈)의 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그 뒤 영남의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규방가사가 성행하였다.

한편 국문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홍길동전》의 뒤를 이어 《장화홍련전》 《심청전》 《흥부전》 《춘향전》 《옥루몽》 등의 많은 국문소설들이 쓰여졌고 《윤하정삼문취록(尹河鄭三門聚錄)》과 같은 방대한 대하국문소설들도 많이 나왔다.

판소리는 18세기 호남지방의 무가에 기원을 두고 발생, 신재효(申在孝)가 사설을 정리하면서 급성장하여 사대부와 서민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한편 한문학은 국문학을 누르면서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세력을 유지하였다. 성종 때 서거정(徐居正) 등은 신라 이래 조선초까지의 시문을 정리하여 《동문선(東文選)》을 편찬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관료문인들의 설화문학이 성행하여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등이 나왔다. 김시습(金時習)은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을 지었으며, 중기에 와서는 한문4대가가 나와 복고적인 고문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후기에는 참신한 문체와 독창적 내용에 관심을 두었던 박지원(朴趾源)이 《열하일기》를 비롯, 당시 사회를 풍자한 등을 발표하였다. 또한 증인들에 의한 한문학도 활기를띠기 시작하여 《소대풍요(昭大風謠)》 《풍요삼선》 등이 간행되기도 하였다.

⑵ 미술:조선 초기의 그림은 양반들이 그린 북종화(北宗畵) 계통의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기에는 남종화로 학풍이 바뀌어갔으며 한국적 특징을 나타내려는 경향이 짙어졌다. 후기에는 또한 수묵화를 주로 하는 문인화풍이 유행하였으며,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은 각자 독특한 풍속화를 개척하였다.

서예에 있어서도 초기에는 송설체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후기에 들어와 김정희(金正喜)가 중국서예의 모방에서 벗어나 추사체(秋史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였다. 도자기 제조 기술도 발달하여 우수한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백자(白瓷) 등이 많이 나왔다. 특히 백자는 담백하고 검소한 아름다움을 지닌 조선의 대표적인 공예 작품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도시의 궁궐과 성곽·성문·학교 등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조선 시대의 건축물은 대개 규모가 작고 소박하면서도 주위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현존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서울의 숭례문(崇禮門), 개성의 남대문(南大門),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 등을 들 수 있다. → 조선미술

⑶ 음악·연극·무용:세종 때 박연(朴堧) 등은 악기를 새로 만들거나 개량하고, 악곡과 악보를 새로 정리하여 아악(雅樂)을 대성시켰다. 성종 때는 《악학궤범(樂學軌範)》, 그 뒤에는 《악장가사(樂章歌詞)》 등의 음악서가 편찬되기도 하였다. 궁중음악과는 별도로 민간에서는 가사·시조·가곡(歌曲) 외에 각 지방의 민요와 판소리 등이 발달하였다. 무용은 중기 이후 무당춤·탈춤·농악·승무 등 인간적인 내용을 갖춘 표현적인 춤으로 발전하였고, 탈놀이〔假面劇〕인 산대(山臺)놀이와 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음 등은 후기에 널리 유행하였다.


그리구 인물은..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 못 옮기겠어요
오빠 책보구 적은건데.. 암튼 조선초기 사람은 직접 찾아보세요
이것뿐이 못 알려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거라도 도움이 되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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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치

고려말 무인정권에 의해 귀족정치가 붕괴된 이후 새로운 관료층이 등장하고 있었다. 학문적 인 교양을 갖추고 정치 실무에도 능한 학자적 관료, 그들이 바로 신흥사대부였다. 일반적으 로 그들은 문벌을 통한 음서 보다는 과거를 통해 정치적 진출을 도모했다. 그들의 출신 배경은 지방의 향리층 출신이 많았으며, 경제적으로 중소지주 내지 자영농민층 이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개간하거나 토지를 매입했으며, 또 수리시설이나 영농 법의 개량 등을 통해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온갖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만든 대규모 농장을 소유하고 있던 대지주이자 동시에 원나라와 결탁하고 있던 권 문세족과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신흥사대부들이 대거 중앙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은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전후해서였다. 공 민왕은 대외적으로는 반원, 대내적으로는 권문세족의 억압을 지향했다. 그는 정동행성 폐지, 친원파 제거, 옛 관제 복구, 쌍성총관부 철폐 등의 개혁정치를 주도하면서, 친명정책을 추진 했다. 그 과정에서 권문세족과 인연이 없는 승려 신돈 같은 인물을 중용하기도 했다. 그는 권문세족의 토지와 노비를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해방시켰는데, 일반 백성들의 환영 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개혁정치는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과 능력을 갖춘 신흥사대부 계층은 점차 고려의 정치무대에 등장해, 정치의 대세를 변화시켜가게 되었다. 고려말은 국제관계에서도 격동과 위기가 교차하는 시기였다. 공민왕 대에 이미 두 차례에 걸쳐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다. 왜구의 침입은 이미 그 전부터 시작되었다. 왜구는 각지의 해 안에 상륙, 촌락을 습격해 약탈하곤 했다. 왜구의 침입은 특히 해상교통을 마비시켜 해상을 통해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을 때로 어렵게 함으로써 국가재정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왜구를 막기 위해 수차례 외교적 교섭을 추진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일본 정부 자체가 그들 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무력으로 그들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최영, 이성계, 정지 등은 왜구 세력을 물리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 결과 최영, 이성계를 중심으 로 일단의 무장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무장 최영과 이성계는 대외정책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였다. 당시 권세를 장악하 고 있던 이인임은 공민왕 시대의 친명정책에서 다시 친원정책으로 되돌아갔다. 이에 대해 이성계, 정몽주 등은 극구 반대했다. 그러던 중에 명나라는 철령위를 설치, 원나라의 쌍성총 관부 지역을 직속 영토로 한다는 통보를 해왔다. 최영은 요동정벌을 도모했으며, 우왕 역시 거기에 동조했다. 원정을 반대하던 이성계 일파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되돌리고 말았다. 그들은 우왕 과 최영을 축출하고,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사건은 고려를 타도하고 새 왕조를 세우 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위화도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으로 몰아 내쫒고, 허수 아비와 다를 바 없는 공양왕을 세웠다(1389년). 전제개혁을 통해 경제적인 실권까지 장악한 그로서는 새왕조를 건설하는 절차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정몽주와 같은 영향력있는 일부의 반대자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같은 반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렇게 장애물을 제거한 그들은 공양왕에게 양위를 강요,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했다 (공양왕 4년, 1392). 고려가 망하고 이른바 이씨의 역성혁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태조 는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도읍를 한양으로 옮겨 새 왕조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건국 후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사대부들, 특히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은 대신 중심의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권익을 도모하고자 했다. 이에 조선 건국과정에서 큰 공을 세운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왕실세력과 다른 공신들이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왕 자의 난으로 표출되었다. 이방원은 세자로 책봉된 이복 동생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태종이다. 태종은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국왕에게 집중시켰고, 도평 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대신들의 권한을 축소시켰으며, 실제 업무를 6조에 맡겨 6조 직계 제를 시행했다. 그는 또 {경제육전}을 보완하는 {원육전}과 {속육전}을 만들게 하였다. 그 뒤를 이은 세종(1418-1450)은 집현전을 설치, 우수한 학자들을 모아 중국의 고전과 옛 제도를 연구하게 했다. 세종은 집현전에서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국가의 정치체제를 정비하 고자 했다. 군신간의 권력균형을 통해 안정되었던 정치구조는 세종의 사후 문종·단종대에 이르러 정치 적 실권이 다시 관료들에 의해 좌우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일부 사대부의 도움을 받아 조카 단종(1452-1455)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바로 세조이다. 이 과정에서 원로 황보인, 김종서와 동생인 안평대군 그리고 후세에 사육신으로 불리우는 신하들이 살해당했다. 폐위된 단종 역시 살해되었다. 세조가 편찬을 착수했던 {경국대전}은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성종 16년(1485)에 반포, 시행 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의 완성은 건국이후 모색된 조선의 국가운영의 기본 방침이 확정되 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 사회의 지배층은 양반 사대부, 그 중에서 특히 훈구세력이었다. 그들은 개국 공신 들을 비롯해, 역대 왕들을 보좌하면서 제도를 정비한 사람들이었다. 또한 세조를 도와 왕위 에 오르게 한 세력이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실용학문에 능하고, 관찬 사업에 참여하 는 관학자들이기도 했다. 대개 한양부근 경기지역에 거주했던 이들은 많은 농장을 소유하고 있어 경제적인 여유도 누리고 있었다. 반면 지방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는 재야의 독서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중소지 주층에 속하며, 향촌에서 유향소나 향청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학문적으로는 시 나 문장을 짓는 사장보다는 유교경전 공부인 경학을 중시했고, 유학의 기본정신이 수기치인 에 있다고 믿었다. 자연히 도덕적 수양을 중시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사림이다. 사림세력은 성종(1469-1494) 때에 대거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훈구세력의 비 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길재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의 제자를 배출하면서 사림의 세력이 커졌다. 중앙에 진출하게 된 그들은 주로 3사 계통에 자리를 잡고 언론을 통해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계에서는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대립이 조성되었고, 마침내 정치적 갈등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15·16세게 4차례의 사화는 이 과정에서 발발하였다. 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구세력의 정치적 보복이라는 성격도 없지 않았다. 4차례에 걸친 사화, 즉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 기묘사화 (중종 14년, 1519), 을사사화(명종 즉위년, 1545)는 각각 경우가 달랐다. 하지만 사림 세력이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함으로써 빚어진 훈구세력과의 갈등과 대립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거 듭된 사화로 인해 심각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림 세력은 점차 서원과 향약을 토 대로 지지기반을 넓혀가며, 마침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향촌에 확고한 사회적 기반을 가진 사림 세력은 서원, 향약과 농장을 토대로 세력을 키워갔 다. 그리고 선조(1567-1608) 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정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교육뿐만 아니라 선현을 봉사하는 사묘를 겸한 서원은 사림의 근거지가 되었다. 선현의 봉 사는 그들의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것이었다. 유명한 서원으로는 중종 38년(1543)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 있다. 훗날 이황의 건의에 따라, 국왕의 친필로 소수서원 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그리하여 이른바 사액서원이 시초가 되었다. 서원은 선조대에 이 미 100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서원과 함께 사림들의 지위를 굳게 해준 것은 향약이었다. 좋은 일을 서로 권하고 잘못을 서로 규제하는 것을 지향한 향약은, 사회적으로 유교도덕이 행해지는 이상국가의 건설을 목 표로 하였다. 중종 대에 조광조가 실시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가, 그 후에 널리 시행되기 에 이르렀다. 선조 대에는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사림의 경제적 기반은 지방의 농장에 있었다. 관직을 얻어 중앙으로 가더라도 농장에서 완 전히 철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여전히 그들의 동족이 살고 있었다. 농장과 동족이 지방에서 서원을 건립하고 향약을 운영해가는 사림세력의 물적, 인적 토대였던 셈이다. 사림이 중앙 정계에 등장,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정치의 운영방식 또한 바뀌게 되었다. 종래 의 6조체제에서 3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를 중심으로 하는 운영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3사가 사림의 의견을 집약해, 그것을 공론으로 제시함에 따라 자연히 이들의 정치적 발언권 이 강해졌다. 3사는 각각 독자성을 지니고 있어, 의견을 통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의 의견 을 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직책이 이조의 전랑이었다. 이조 전랑은 관등이 5, 6품에 지나지 않았지만, 홍문관의 젊고 총명하여 장래가 촉망되는 유학자 중에서 임명된데다 스스 로 후임까지 지명할 수 있었다. 전랑을 거치면 대개 재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자연히 전 랑이 3사의 의견을 실질적으로 주도해갔다. 사림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중앙 정계에서는 이조 전랑을 통해 조정된 3사의 의견을 존중하 지 않을 수 없었다. 사림의 의견은 그대로 정치에 반영되었으며, 누구도 그것을 무시하고서 독자적으로 정치를 운영할 수 없었다. 그것이 독특한 사림정치의 메카니즘이었다. 사림의 존 경을 받는 인물은 산림이라 하여 높이 떠받들어졌다. 서원에 근거를 둔 사림의 공론은 산림 을 통해 수렴되곤 하였다. 사림이 중앙 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들 사이에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생 겨났다. 그리고 그것이 붕당을 낳게 되었다. 특히 이조 전랑의 임명을 둘러싼 갈등으로 표면 화되면서 김효원 등 신진관료 중심의 동인과 심의겸 등 기성관료 중심의 서인으로 나뉘어졌 다(선조 8년, 1575). 초기에는 동인이 득세해 서인을 압도했다. 동인에는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 많았고 서인에는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 많아서, 학파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서원이 붕당의 근거 지가 되는 경향을 낳기도 했다. 정여립 모반사건(선조 22년, 1589)으로 동인 세력이 약해졌 지만, 그래도 세력은 유지되었다. 그러다 서인 정철이 세자책봉을 건의한 건저의 사건을 전 후해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남인은 주로 이황의 문인들로, 북인은 주로 조식의 문인들로 구성되었다. 그 후 북인이 광해군(1608-1623)을 추대한 공으로 정권을 전담했다. 억눌려 있던 서인은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였다(1623). 그 후에 는 서인들이 오랫동안 정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선조 25년(1592) 조선을 침략한 왜군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일본 에서 전국시대라는 혼란기를 수습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침략을 통해 일본 국내의 통 일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은 서울을 향해 북상했다. 조선 정부는 도순찰사 신립에게 기 대를 걸었지만, 그 역시 충주에서 패하고 말았다.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고, 두 왕자는 근왕 병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자가 적었다. 무방비 상태에 가깝던 조선의 전 국토는 왜군에 의해 짓밟혔다. 왜군은 전투 경험이 많은데다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상황은 곧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바다에서 왜의 해군 활동이 저지되고, 육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바다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맹활약했다. 그는 함선을 건조 하고, 군사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새롭게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어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해전에서의 승리는 적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육지에서 펼쳐지던 왜군의 작전 에 막대한 차질을 안겨주었다. 육지에서 의병활동 역시 거세게 일어났다. 양반, 농민, 노비 등이 모여 의병장을 중심으로 부대를 편성해, 작전 지역을 점차 확대해나갔다. 대체로 명망이 높은 사림들이 의병장이 되 었다. 조헌, 곽재우, 고경명, 김천일, 정문부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들 이외에도 묘향 산의 휴정, 금강산의 유정 등의 승려들도 승병을 거느리고 활약했다. 한편 왜군의 명나라 침략을 우려한 명이 참전을 결정하였고, 이윽고 명나라의 원군이 조선 에 도착했다. 이여송의 5만 원군은 평양을 탈환하고 남으로 왜군을 추격했다. 이 때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과 명나라의 저항으로 본국으로 물러났던 왜군이 선조 30년(1597) 다시 침략해 옴으로 써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이 때 왜군의 진출지역은 경상도 지역에 한정되었으며, 바다에서도 이순신에 의해 격파당하고 말았다. 토요토미가 죽자 왜군은 모두 퇴각하고 말았 다.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1608-1623)은 내정과 외교에서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 했다. 즉 내정분야에서는 임진왜란 후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하면서 민생의 안정을 위해 대 동법을 시행하였고, 이외에도 사고의 정비, 서적의 간행, 호패의 실시 등 각 분야에서 상당 한 치적을 올렸다. 대외적으로는 쇠퇴하던 명과 청(후금)의 교체기를 관망하면서 중립외교노 선을 통해 조선의 안정과 실익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그는 서인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으며, 인조가 즉위하였다(인조반정, 1623). 서인 정권은 후금을 배격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그것이 후금의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마침 그 때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공신의 한 사람인 그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관군에게 패하자 그 일당이 후금으로 도주, 광해군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알리고 침략을 종용했다. 이에 1627년 후금이 침입해왔다(정묘호란). 조정은 강화를 청하고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을 약속, 후금의 군대를 철수하게 했다. 이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1636년) 사신을 보내 군신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해왔 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단연코 거부했다. 이에 청 태종이 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병자호 란). 왕자와 왕실가족은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인조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갔다. 군량이 적은데다 구원병도 오지 않았다. 게다가 강화가 함락되고 왕자와 왕실가족이 포로로 잡히게 되자,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삼전도(지금의 송파)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조선은 명과 단교하고,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신하로서의 예를 지키고, 명을 공격할 때 원 병을 파견할 것 등을 약속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가고, 강경론자였던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잡혀가 죽음을 당했다. 김상헌도 청나라로 잡혀가 오랜 옥중 생활 을 했다. 그 후 임경업이 명과 연계해 청을 치려 한 적이 있으며, 또 인조를 이어 왕위에 오 른 효종(봉림대군)은 북벌을 계획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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