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374-412, 소수림왕4-광개토왕22)
고구려 제19대왕(391-412), 고국양왕의 태자, 본명은 담덕(談德)인데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이라 하였다. 재위시에는 영락대왕, 사후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소수림왕 4년(374년) 후에 고구양왕이 되는 왕제 이련(伊連)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국양왕 3년(386년)에 태자로 봉해졌다가 부왕의 사후 신묘년(391년) 즉위 하였다.
시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생전에 영토확장에 힘썼으며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등 고구려의 세력권을 ?히고 동북아시아 패자로서의
자주성을 드높였다.여기서 광개토 대왕은 한반도와 중국 본토를 나눔으로서 한반도는 한민족으로 본다.
광개토대왕은 남정북벌하여 한국 민족사에 있어 한 시대를 구획하는 '광개토경'
위업을 이룩하였다. 서쪽에 위치한 후연과는 처음에 우호관계에 있다가 후연왕
모용성이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침공해오자 이에 대한 보복을 감행하여
요동성과 요하지역을 차지하게 되고 다시 후연왕 모용희가 침공해오자 요하
이동지역에서의 세력권을 확고히 하게 된다. 북으로는 거란을 정벌하여 조공관계를 맺는다. 백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관계가 깨진 백제가 왜를 앞세워 고구려와
우호관계에 있는 신라를 침공하자 5만 병력을 보내어 가야지역까지 추격하여
일대를 장악하고 6성을 장악하는 등 세력을 행사하고 신라에 대해서는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함으로써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광개토대왕은 거란이나 후연, 비려, 왜에 대해서는 토멸의 대상이었으며 신라나 백제, 가라제국은 정복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아 이들 신라나 백제, 가야는 동일집단으로 보고 통일의 위업을 이루려는 의지를 보였던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즉 최초의 통일국가를 형성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내정의 정비에도 힘을 기울여 장사, 사마, 창군의 중앙관직을
신설하고 역대 왕릉의보호를 위해 수묘인 제도를 두고 평양에 9사(九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하는 동시에 또한 아들인 장수왕 때 평양으로의 천도를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412년 39세에 세상을 떠 414년에 능에 옮겨 장사지내고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린 비석을세워 기렸는데 이 비가 바로 광개토왕릉비(일명 호태왕비)이다. 당시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 동쪽국강상(國岡上)에 왕릉과 함께 세워진 이 비는 왜의 등장과 고구려의 발전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서,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양3국의 고대사연구의 논쟁점이 되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삼국시대 최초로 한반도 통일이라는 목적을 세웠고 나아가서는 중국과 대립하면서 자주국임을 내세운 것이다.왕권강화를 통하여 내정을 편안히하고
그위세를 몰아 중국과 한반도를 넘나들며 강국으로의 고구려를 만든 것이다. 또한
사후에 나라가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여 아들(장수왕)에게는 남정, 즉 한반도통일이라는 숙제를 남긴 것이다.그리하여 장수왕은 평양성으로 천도하여 신라와 백제를 괴롭힌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마음 속에 광개토대왕이 영웅으로 남아있는 것은 고구려가, 광개토대왕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중국에 대항하며 한민족의 권위를 높였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