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을당시 조선의상황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을당시 조선의상황

작성일 2009.06.04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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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을당시 조선의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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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흥선대원군 집권부터.. 을미개혁까지

 

한국 현대사 주요사건

 

1.병인양요 (1866)

이것은 흥선대원군 집권시절 러시아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자. 천주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프랑스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와 있었는데.그들을 이용해 프랑스로 러시아를 견제. 하고저하였으나  선교사들이 자신의 뜻대로 해주지 않자 그들에게 실망했고 때마침 대왕대비라던가 신료들이 천주교에 대해 비판을 해서 일어나게 된 것이 병인박해입니다. 조선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 12명중 9명이 죽고 국내신도 8000여명이 죽은 사건입니다. 병인박해 소식을 들은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이 보복원정을 옵니다. 이것인 병인양요입니다.

프랑스 군은 본국정부의 승인없이  1866 10월에 군함 7대와 대포 10문 총병력 1000명을 이끌고 쳐들어옵니다.강화도로 쳐들어온 프랑스군은 결국 장수 양헌수가 비밀리에 강화도 도하에 성공해서 정족산성을 점령 후 물러가게 됩니다. 11 10일 프랑스군이 철수하게 됩니다. 이때 강화도에 있던 중요한! 문물인 외규장각 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를 약탈해 갑니다.

2.신미양요 (1871)

1866년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계기가 되서 일어나게 된 사건으로 제너럴 셔먼호 가 평양으로 와서 강제로 통상을 요구하였는데 이것을 조선측에서 거부하자 조선의 민간인들을 죽이는등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평양감사 박규수가 화공으로 셔먼호를 침몰 시켜버립니다. 1871 5월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가 쳐들어오는데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정부의 승인으로 군함 5척 해병 1230명 대포 85문으로 무장을 하고온 로저스 제독은 손돌목에서 최초의 포전을 갖고 6 16일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합니다. 마지막으로 광성보 전투를 치릅니다. 조선 전사 43명 부상 24명 어재연장군이 사망합니다. 미군은 전사 3명 부상10명을 당합니다. 미국의 목적은 조선을 개항 하는데 있었는데 조선의 결사항전 의지를 알고 조선을 개항 시키려는 의지를 접고 7 3일 함대를 철수 시킵니다.

3.척화비 건립 (1871)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이후 1871 4월에 전국에 세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비석 표면에 세김 척화비의 이면에는 서양에 대한 반감 양반유생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는 대원군의 개인적인 의지와 정치적인 목적이 숨어있습니다.

조선후기 이양선이 빈번히 출입하고, 중국이 외세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자 조선 내부에서는 외세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반감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는 1866년 병인양요를 일으켜 조선에 침략합니다. 또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부친 묘를 도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1871년 신미양요까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외세의 침략으로 조선의 양반 유생들은 외세를 오랑캐라 하여 이들과 화친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양반 유생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는 정치적 원인과 서양에 대한 반감이 더해져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 척화비를 세우게 됩니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고 비석 표면에 세겨 쇄국정책의 뜻을 강력하게 표명합니다.

 

4.운요호사건 (1875)

 

일본 군함 운요호가 1875 9 20일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 .   
   
운요호의 함장 이노우에는 일본군 몇 명을 데리고 작은 보트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하였다. 이때 해안 경비를 서고 있던 조선 수병은 예고도 없이 침투하는 일본군 보트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에 놀라 일본군은 모함으로 되돌아가, 함포로서 조선에 보복 포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영종진(永宗鎭 오늘날의 영종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과 격전을 벌여, 근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무기도 다량 탈취하였다. 그리고 주민에 대한 방화, 살육을 하고 퇴각하였다.

그 후 일본은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하며 나타나,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통상을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인 1876 2 26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였고, 조선은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되었다.

운요호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의도적으로 일으킨 포함외교의 한 형태이며, 이는 그들이 22년 전에 미국에 당한(배운)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국력이 약한 결과 불법침입자에 대한 정당한 방어적 공격도 보복당하여 그 책임을 조선에 묻고 강제로 수교하였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 대륙침략의 단초(端草)였으며 신호탄이었다.   

 

5.강화도조약 (1876)

 

체결 과정
윤요호 사건(1875) : 일본 군함 윤요호가 강화 해협을 침범함.

윤요호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조약 체결을 강요함.

강화도 조약 체결(1876) : 조선 정부의 의견이 문호 개방 쪽으로 기울어 조약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 1876 조선 일본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일본은 자기들이 도발한 운요호 사건을 트집잡아 1876 2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도 국제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통상관계를 맺기로 하고 신헌(申憲)을 강화도로 파견, 일본사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 淸隆)와 협상케 한 결과 두 나라 사이에 수호조약이 맺어졌다.

모두 12개조로 된 수호 조약은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1)고 했지만, 이는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침략을 쉽게 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수호조약은 그 밖에도 부산, 인천, 원산항의 개항, 개항장 안의 조계 설정, 영사재판권의 인정 등의 조항이 명시되어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의 속셈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 강화도 조약에 따라 1876 7 다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무역장정(조일통상 잠정협약)을 조인하였고,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하였다

 

내용: .

(1) 조선의 자주권 인정: 청나라와 관계를 끊게 한 후 조선을 침략하기 위함.

(2) 부산을 포함한 3개의 항구 개항: 통상 이외에 정치적, 군사적 침략 의도가 포함됨.

(3) 일본인의 해안 측량권 인정: 일본의 군사 작전을 유리하게 하기 위함.

(4) 일본의 치외법권 인정: 일본인에 대한 법적 조치를 못하게 함.

1.조약 체결 배경

 

1) 민씨 세력 집권: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집권하게됨

2) 통상 개화론의 성장: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의 통상개화론자들은 열강의 침략에 대비해 개항의 불가피함을 주장.

3) 운요 호 사건: 일본이 메이지유신 (1854) 을 단행 하면서 교섭을 해왔으나 조선이 거부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체제가 수립되자 '운요 호'를 파견하게 됨.조선은 운요 호에 경고사격을 한 빌미로 강화도 조약을 맺음.

 

2. 조약 내용 (주요내용만)

 

1관 조선은 자주국이며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후 수시로 사신을 조선국 서울에 파견, 교환한다

4관 조선국 부산의 초량은 일본 공관이 있어 양국인의 통상지였다. 금후에는 종전 관례의 세견선 등의 일을 없애고 새로운 조양게 준하여 무역 사무를 할 것이다.

5관 조선 정부는 부산 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와서 통상하는 것을 허가한다.

7관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는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의 항해자가 자유롭게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10관 일본국 국민이 조선국 항구에서 죄를 지었거나 조선국 인민에게 관계되는 사건은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판함.

 

3. 조약 결과

 

1) . 일 수호조규 부록 (1876)

조선 국내에서 일본 외교관의 여행자유, 개항장에서의 일본 거류민의 거주지역 설정과 일본화폐의 유통등을 허용

2) . 일 통상 장정 (1876)

일본의 수출입 상품에 대한 무관세 및 양곡의 무제한 유출등을 허용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위한 발판을 마련, 조선의 국내 산업은 일본의 경제침략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음

 

4. 조약 성격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지만, 부산,원산,인천 등 세 항구의 개항과 치외법권과 해안측량권 등을 내어준 불평등 조약임

 

5. 조선정부의 개화정책

 

1) 1차 수신사 파견 (1876, 일본): '김기수' [일동기유] 를 저술하여 근대 문물을 소개

2) 2차 수신사 파견 (1880, 일본): '김홍집' [조선책략] 을 가져와 미국과의 수교에 영향을 줌

3) 관제의 개편: ‘통리기무아문 (개화정책전담기구)'을 설치, 그 아래에 '12'를 두어 업무를 분담하게 함

4) 군제의 개편: 5군영을 2(무위영, 장어영) 으로 통합, 개편하고 별기군을 창설함.

5) 조사 시찰단 (신사유람단) 파견 (1881, 일본)

6) 영선사 파견 (1881, ): '김윤식'과 유학생들이 청국에서 무기제조법, 자연과학을 배워 옴

7) 보빙사 파견 (1883, 미국): '민영익' 파견

 

6. 조선정부의 개화정책 추진배경

 

서양의 근대 문물제도가 들어오게 되고 열강들의 이권침탈이 심화되었으며, 민중들의 양반지배층의 수탈에 대한 저항의식이 크게 성장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일부 들 사이에서 '통상 개화론'이 대두하였으며, 문호개방과 더불어 개화사상으로 발전하게 됨. 개화사상은 북학파의 실학사상과 청의 양무운동, 일본의 문명 개화론에 영향을 받았다

 

7. 근대 문물의 수용

 

1) 일본에 조사 시찰단을 파견: 일본의 정부기관, 각종 산업시설을 시찰

2) 청국에 영선사 파견: 무기제조법, 자연과학을 배워옴, 서울에 '기기창'을 설치

 

6.임오군란 (1882)

임오군란 1882 8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구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배경

1876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점차 붕괴되고 대신 국내의 정세는 개국, 개화로 향하게 되었다. 개국 문제를 둘러싸고 정권은 대원군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파와 국왕과 명성황후 측의 척족(戚族)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로 양분, 대립하고 있었다. 외교노선은 민씨정권이 문호개방정책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구미 제국과의 통상관계를 연이어 수립하고 있었다. 이 개국 정책은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 뿐만이 아니라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백성들을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거듭되고 있었다.

청과 일본의 개입

한편 명성황후의 국상을 강제 진행함에 따라 대원군의 정치적 실권은 단축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청국은 종주국으로서 속방(屬邦)을 보호해야 한다는 핑계로 이 기회에 일본에 빼앗겼던 조선에 대한 우월한 기득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마침 임오군란 당일날 지방으로 도망갔던 명성황후와 그 일족이 개화파 관료 김윤식(金允植), 어윤중(魚允中)을 청나라로 보내 청나라에게 원조를 요청한 것(음력 6 19)을 핑계로, 음력 6 27 마건충(馬建忠)이 이끄는 육군 4,500명이 육로로, 8 20(음력 7 7) 청나라 해군 제독 오장경 정여창(丁汝昌), 김윤식을 대동하여 남양만으로 상륙해 조선에 진주하였다.

오장경은 8 25(음력 7 12) 흥선대원군을 병영으로 초청하였다가 군란 선동의 배후자라 하여 톈진(天津)으로 납치한다. 대원군 납치 후 다시 민씨 정권이 부활하였고, 청군은 8 29(음력 7 16) 청군은 왕십리 이태원 일대를 공격하여 170여 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사형시키는 등 군란 진압에 나섰다.

한편 일본에 도착한 하나부사공사가 군변의 사실을 일본정부에 보고하자 일본은 곧 군함 4척과 보병 1개 대대를 조선에 파견하였으나 청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병력 차이로 인해 대항하지는 못했다. 이때 하나부사 일본 공사가 이끄는 일본군 대대 병력이 서울로 진주한 것은 음력 6 29이었다. 대원군이 청나라에 의해 제거되었기 때문에 조선측에 대한 강경한 태도로 책임을 물어 8 30 (음력 7 17)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게 되었다.

결과 및 평가

군변으로 시작한 이 사건이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개입을 확대시키는 국제문제로 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외세를 빌려 군란을 진압한 민씨 정권은 결국 자주성을 잃고, 정권 유지를 위해 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댓가로 청나라의 숱한 간섭을 받게 되었다. 또 일본과는 7 17 임오군란의 뒷처리로 손해배상금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 조약 및 조·일수호조규속약(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함으로써 자주권을 더욱 잃게 되었다.

청은 이후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한다. ,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키고, 마건창(馬建常) 뮐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간여하였다. , 조선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 특권을 규정하고, 경제적 침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이 후원한 갑신정변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본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은 청일전쟁때까지 청나라의 독주를 지켜봐야 했다.

7.제물포 조약 (1882)

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 1882 8 30(음력 7 17) 조선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이다.

임오군란에 개입한 일본 조선에 책임을 물어 일본 측 대표 하나부사 요시모토 공사와 조선 김홍집사이에 맺어진

조약이다. 본조약 6개조와 '조일수호조규 속약' 2개조가 각각 조인되었다.

그 내용은 조선측의 50만원 배상, 일본공사관의 일본경비병 주둔, 조선 정부의 공식 사과를 위한 수신사 파견, 임오군란 주모자 처벌, 일본인 피해자 유족에게는 위문금 지불 등이 그 핵심을 이룬다.

제물포조약의 규정에 따라 사과 사절로서 박영효, 김만식 등이 수신사로, 홍영식, 서광범 등이 수행원, 그리고 군왕의 밀명을 띤 민영익, 김옥균 15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들을 맡는 일본은 국빈대우에 가까운 극진한 대접을 하는가 하면 100일 간의 체제비용을 전액 일본 외무성이 감당하였다. 그리고 외무상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당대의 철학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이들이 접촉할 수 있도록 주선하여 그의 해박한 근대지식으로 하여금 조선 청년들을 사로잡게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이들 사절단을 극진히 환대하고, 제물포조약에 의해 조선 정부가 배상토록 한 배상금 50만엔을 5년에 걸쳐 완납토록 했던 것을 10년으로 연장해 주었으며, 조선 정부가 필요로 하는 자금 17만엔을 부산 세관의 수입과 서천 사금광산을 담보로 잡고 연리 8부로 조선에 차용해 주었다.

이런 일본의 계략에 빠져 친일 성향을 갖게 된 이들은 귀국하여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8.갑신정변 (1884)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12 4(음력 10 17)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촉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한 정변이다.

1882 제물포조약에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던 박영효등의 일행은 친일성향을 가지고 귀국하여 일본의 힘을 빌려 개화와 정치개혁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김옥균·박영효·홍영식은 주()조선 일본 공사 다케조에 이치로(竹添進一郞)와 밀의한 끝에 일본군 주둔 병력을 빌려 정변을 일으키고 혁신정부를 세우기로 기도하고 1884 음력 10 17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개국축하 만찬회를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 개화파들은 연회가 열릴 즈음 이웃집에 불을 질러 혼란을 일으킨 다음 사대당 요인들을 모조리 암살할 계획을 세웠지만 겨우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혔을 뿐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김옥균·박영효 등은 창덕궁으로 달려가 고종에게 사대당과 청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거짓으로 보고하고 왕을 경우궁으로 옮긴 후 일본군으로 하여금 궁을 호위케 한 다음, 민영목·민태호·조영하 등의 사대당 일파를 차례로 죽였다.

12 5 개화파들은 각국의 공사·영사들에게 신정부의 수립을 통고하는 한편, 새정부를 구성하고 혁신정강으로 문벌폐지와 인민평등권 확립, 관제의 개혁, 지조법 (地租法) 의 개혁과 재정의 일원화 등 14개 항목을 내세웠다. 그러나 미처 공포도 하기 전에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청국군이 출동하여 창덕궁을 공격하는 바람에 집권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김옥균·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사대당 정부는 더욱 보수적이 되었고 조선에서 청의 세력이 강대해진 가운데 청·일 두나라의 조선쟁탈전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하기에 이르렀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이들은 14개조의 개혁요강을 내세우는 등 개화·개혁의 순수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으로는 철저하게 일본의 힘을 빌려 집권하고자 한 친일 사대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게 한 구실을 만들었다.

 

9.동학농민운동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인 조병갑의 학정에 반발하여 시작되었지만 그 원인은바로 세도정치가 극에 달아있던 세도가문에 의한 독재적 정치로인해 삼정의 문란과 정치의 한계 그리고 왕권의 약화로

국난이 계속되자 이로인해 많은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중 1811 12월 평안도를 거점으로 봉기한 홍경래난이 동학의 시발점인데 홍경래의 난은

다음과 같은 명분을 내세웁니다.

 

1. 평안도 지방의 차별 철폐

2. 안동김씨 정권의 타도

3. "도참설"에 근거한 진짜 군왕의 추대

결국 "홍경래의 난"은 홍경래가 전투 중에 죽음으로써 실패하지만

하지만 "홍경래의 난"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의 반란이 표출되었고

그 정신이 동학농민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주며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후 4월에 전국적으로 봉기하게 되고 6월에는 전주감영을 점령하여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물러나게 됩니다.

 

동학농민운동의 기본이념은

1. 보국안민

2. 제폭구민

3. 척양척왜로 후에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됩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민중항쟁이라고 할수있습니다 동학은 신분제의 타파를 외치고 있었기때문에 혼란한 조선말 상황에 가난한 농민들이 의지할수 있는 종교였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간단하게 "반봉건적, 반외세적 농민항쟁"입니다.농민이 주축이 되는 운동으로 지배계층에 대한 조선 시대의 최대의 항쟁입니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후에 3.1운동으로 계승되었습니다.

 

10.갑오개혁 (1894)

 

조선 고종 31(1894) 7월부터 고종 33(1896) 2월 사이에 추진되었던 개혁 운동. 개화당이 정권을 잡아 3차에 이르는 개혁을 통하여, 재래의 문물제도를 근대식으로 고치는 등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혁신을 단행하였다.

갑오개혁의 원인: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으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

목적:조선의 전통적인 제도를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함

과정: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개혁을 실시

김홍집을 총재로 삼아 갑오개혁을 주도함

정치:자주독립을 지향함/나라의 공식문서에 한글을 사용함

교육:서울에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 학교를 세움/각 지방에도 소학교를 세움

경제:근대식 화폐제도 답변확정/도량형 통일

사회:조혼을 금지과부의 재혼을 허락

결과:

일본의 간섭으로 자주적 개혁을 이루지 못함

갑오개혁을 실시하게 된 과정

지방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동학 농민군과 의 합의

정부의 정치 개혁 추진으로 민심 수습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정부의 군국기무처를 설치로 개혁안 마련

 

11.을미사변 (1895)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 10 8(음력 8 20) 명성황후가 시해된 사건이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명성황후는 다시 러시아 쪽으로 접근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낭인들을 소집해 1895 10 8일에 명성황후가 있던 궁에 들어가 살해하고 시체를 불태웠다.

명성황후는 폐서인되었으나 대한제국 수립 이후 일본의 작용으로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얻었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조선은 청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자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고저한 시점에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조선은 청에 원군을 요청하게되었으며 이때 일본은 톈진 조약을 확대 해석(청과 일본의 조약인데, 둘 중 한 나라라도 군사를 일으키면 나머지 한 나라도 군사를 일으킨다는 내용이 있었음)하여 조선에 원군을 파병합니다.

하지만 동학농민운동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하였으며, 조선은 원군의 역할이 없어졌기 때문에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청군은 물러났지만 일본군은 조선의 개혁 추진을 핑계로 물러나지 않고, 경복궁을 점령하여 간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이를 계기로 청일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은 청으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습니다.그러나 갑자기 커진 일본을 견제코자 프랑스, 독일, 러시아 3국이 일본에게 압박을 가하여 요동반도를 반환케 합니다. 이를 3국간섭이라고 합니다.

이때 명성황후는 러시아의 힘이 강대함을 보고, 친러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이 불법으로 경복궁을 침략,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 을미사변입니다.

 

12.을미개혁 (1896)을미의병

을미 개혁: 청일전쟁 후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이 러시아 중심의 삼국간섭으로 일시 후퇴하자, 고종은 이 틈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접근,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켜 조선정부가 러시아와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 뒤, 친일개화파로 새로 김홍집내각을 성립시키고 을미사변으로 일시 중단된 갑오개혁을 다시 추진하였다. , 을미개혁은 1894 7월에서 1896 2월 초까지 약 19개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실시된 갑오개혁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다.

태양력의 사용, 군제·교육제도 등의 개혁과 함께 단발령을 실시하였다. 특히 1896 1월 공포, 강제 실시한 단발령은 을미사변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일어난 유생들의 반일·반근대의병의 원인이 되었다. 을미개혁은 일본에 의존한 것이었고, 이로 인해 반일분위기가 만연하였으므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13아관파천(1896

을미사변때 생명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피신)함으로써 이른바 아관파천이란 사건이 발생

 

14. 대원군서거 (1898)

1.흥선대원군의 탄생과 성장배경

조선 왕조 고종 때의 왕족, 정치가, 이름은 이하응이고, 고종의 아버지이며, 시호는 헌의이다.

2.흥선대원군의 주요 업적

. 세도정치 타파_안동김씨 세력 축출

· 서원정리_600여개를 47개소로 줄임

· 양전, 호포제, 사창제실시_ 삼정의 문란 시정노력

· 대정회통 편찬_통치질서 재확인

· 경복궁 중건_왕권회복

· 통상수교를 거부

3.시대적 배경

국내 상황-세도정치로 왕권약화, 정치기강 문란, 삼정의 문란으로 전국적인 농민봉기 동학과 천주교의 확산

국외상황- 이양선 출몰, 서양 세력의 베이징 함락,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됨

4.흥선대원군이 당시 사회에 미친 영향

정책은 땅에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고 외세를 배척하고 민생을 안정 시킴으로서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서원 철폐와 호초제로 양반들에게 반발을 사고 경복궁 중건으로 원성을 샀다. 그리고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우리나라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계기가 됬다.

5.후세의 역사에 미친 영향

경복궁 중건사업으로 국가의 수입을 늘리고 쇄국 정책을 펼쳐 우리나라에 근대화를 저지시켰다.

6.결론

·왕권 강화, 백성 생활 안정에 기여

·서원 철폐 등으로 인한 양반의 반발

·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 고조, 국가 경제곤란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 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우리 나라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그만큼 늦어지게 하여, 결국은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맞게 하였다.

있다.

 

15.대한제국(1897)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Empire of Korea) 1897 10 12부터 1910 8 29까지의 조선의 국호이다.

국호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기 위해 사용된 의례상·의전상 국호이다. 대한제국의 정식 국호는 ‘한()’인데, 이는 동양의 전통 군주국가 체계하에서 황제국은 통상 한 글자로, 제후국은 두 글자 이상으로 된 국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국호 한에 대외적 의미의 ‘대()’ 자를 앞에 추가하고, 국가의 단계를 의미하는 ‘제()’ 자를 중간에 더하여 ‘대한제국’이 된다. 이러한 표기는 서구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된 이후의 일로, 한 글자의 국호를 가지고 있던 청나라가 스스로 대청제국(大淸帝國)이라는 국호를 널리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와 일치한다. 19세기 이전에도 외교적 수사에서 대당(大唐), 대명(大明) 등의 표기가 없던 것은 아니나 19세기 중후반처럼 흔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용례에서 대한제국의 국호 원류를 상고할 수 있다. 일례로, 1899 8 17일에 반포된 대한제국의 헌법적 법전의 명칭은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였다. 한국 또는 대한국을 대한제국이라고 표기하는 것에는, 민족적 자긍심을 감안한 측면도 있고 현재의 대한민국과 구분하기 위한 의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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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정책


① 안동김씨 세력 척결

② 양전 및 사창제 실시

③ 호포제 시행

④ 서원철폐

⑤ 경복궁 중건 ( 당백전과 원납전 )

⑥ 통상수교 거부정책


1. 농민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대원군의 정책


─찬성하는 정책

*안동김씨 세력 척결

→ 세도정치를 없애서 그들로 부터 피해를 입은 모든 백성들은 환영을 함


*양전 및 사창제 실시

→ 토지제도 개혁 ( 양전 )과 환곡의 문란을 저지하는 사창제의 실시로

백성들을 괴롭혔던 제도를 없애게 되어 환영을 받음


*호포제 시행

→ 양반들도 세금 ( 군포납부) 하게 되어 백성들을 이롭게 함


*서원철폐

→ 형식과 운영 때문에 자금이 많이 들어가던 서원철폐로 백성들의 삶을

수월토록 함


*통상수교 거부정책

→ 이양선의 출몰로 인해 서양에 거부감이 많았던 백성들은 지지함



─반대하는 정책

*경복궁 중건

→ 경복궁 중건으로 세금이 오르게 되고 강제 기부금을 내게 하여 백성들이

힘들어했음


흥선대원군의 초기 개혁정책은 백성들로 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습니다.

왕권강화를 중심으로 전개한 개혁은 백성들의 삶을 개편하게 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왕실의 권위를 세워 왕권강화를 꾀한 경복궁 중건에서

그들을 지지하던 백성들과 다른 배를 타게됩니다.

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중심으로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지만 그 영향으로 백성들의

의식을 높이고 삶을 이전보다 이롭게 했으니 농민들에게 크게 나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2. 양반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대원군의 정책


─반대하는 정책


*호포제 실시

→위에서 설명

*서원철폐

→ 성리학 및 유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따라온 양반에게 서원을 철폐하는

것은 큰 불만을 사게 됩니다.


대원군의 개혁정치는 왕권강화를 중심으로 전개 되었기 때문에 왕권강화를 위해

서는 양반세력의 반발도 무시하고 전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국가재정을 늘리기

위해 호포제를 실시하고 서원을 철폐하여 양반의 불만을 사게 됩니다.

양반들은 대원군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반발하였다.

 

내용출처 :

 

<흥선대원군은 어떤 인물인가?>

 흥선대원군의 본명은 이하응으로, 사도 세자의 셋째 아들인 은신군의 손자이다.

 흥선대원군은 왕이 자식을 두지 않고 죽자 자신의 아들을 왕의 자리에 앉히고, 당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600여개의 서원을 47여개로 줄였다.

 또한 양반들도 세금을 내게 하였다. 또한 인재를 골고루 등용하여 당쟁을 막았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하여 그는 일반 서민들에게 많은 환영을 받았으나, 후에 경복궁을 재건축한다는 구실로, 당백전을 만들고 원납전을 하는 등 후기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아들 고종이 22세가 되었는데도 수렴청정에서 물러나지 않자, 강제로 몰려나 운현궁으로 쫓겨났다. 후에 청에 납치 되었다가 다시 운현궁에 돌아와, 87세에 죽었다. 특히 그는 난초를 즐겨 그렸다고도 한다.

 

<흥선대원군은 어떤 일을 하였을까?>

1.왕권강화

 

(1)비변사를 축소, 격하시키고 의정부와 삼군부 설치(삼군부는 군사담당기구)

(2)법전편찬-대전회통

(3)경복군 중건->원납전 강제징수. 당백전 남발로 경제적혼란초래, 백성들을 강제노동시킴

 

2.민생안정

(1)양반에게도 군포를 부담하는 호포제 실시

(2)조선후기 가장 패단이 심했던 환곡을 개혁하여 사창제 실시

(3)토지누락된 땅(은결)을 색출하여 국가제정확충

(4)서원철패(전국에 47개의 서원을 남기고 철패하여 국가제정확충)

 

3.통상수교거부정책

(1)병인박해-천주교 신자들이 외세를 이용해 포교의 자유를 얻으려하자 8명의 프랑스신부와 8000여명의(어떤책에선 2만이라고도 한다)신자들 처형

(2)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에서 프랑스와 미군을 격퇴

(3)척화비건립->양반과 유생들에게 호응을 얻음

=>흥선대원군의 정책은 땅에 떨어진 왕권을 강화하고 외세를 배척하고 민생을 안정시킴으로서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서원철패와 호포제로 양반들에게 반발을 사고 경복궁중건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그리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개기가 되었다

 

 

 

1820년 12월 21일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에서 영조의 5대손으로 태어남.


1843년 24세
군의 칭호를 받아 흥선군이 되었다, 이때부터 안동 김 씨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얼굴에 나타난 술기운에 빠져 행실이 추저분한 생활을 함.


1863년 44세
철종이 뒤를 이을 왕자가 없이 병이 들자 조 대비에게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약속받았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이 되어 임금이 직접 통치할 수 없는 때에 임금을 대신하여 정치를 시작하였다. 공평하게 인재를 등용하고 양반들에게도 세금, 수수료 따위를 거두어들이게 하여 나라 살림이 좋아지고 부패의 보온 설비를 갖추고 인공적으로 흙의 온도를 높여서 식물을 촉성 재배하는 묘상이었던 서원을 정리하였다.


1865년 46세
왕조의 위엄을 살리기 위하여 경복궁을 손질하여 고쳐 세웠다. 공사 비용을 보충하기 위하여
스스로 원하여 바친 돈을 발행하였다.


1866년 47세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여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천주교도를 더욱 어떤 행위나 사회적 활동을 권력이나 무력 따위로 억눌러 꼼짝 못하게 하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1867년 48세
경복궁에서 불이나자 경복궁 복구 작업을 시행함. 공사비용이 많이 들자 다시
조선 고종 때 발행한, 한 푼이 엽전 백 푼과 맞먹던 돈을 발행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졌다.


1868년 49세
경복궁을 완성하였다.


1871년 52세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웠다.


1873년 54세
명성황후가 최익현을 시켜 대원군의 잘못을 알리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도록
하게함. 11월, 고종이 직접 정치를 하겠다고 발표하자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885년 67세
청나라에 끌려갔던 흥선대원군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895년 77세
을미사변으로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흥선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얼마 후 스스로 물러났다.


1898년 79세
2월,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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