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숙제 하다가 올립니다.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구부(丘夫),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들. 355년(고국원왕 25)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371년 고국원왕이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전진(前秦)과 평화적 관계를 수립하여 전진의 제도와 문화의 수입에 노력하여, 372년 전진 왕 부견(符堅)이 보낸 승려 순도(順道)가 가져온 불상과 경문을 받아들여 최초로 불교를 수입하였으며 같은 해 태학(太學)을 설립하였고, 373년 처음으로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375년 초문사(肖門寺)를 창건하여 순도를 머물게 하였다.
그해에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또 전년에 고구려에 온 중 아도(阿道)를 위하여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지어 주지(住持)로 삼았으며, 같은 해에 백제의 수곡성(水谷城)을 빼앗았다. 377년 3만 대군의 백제군 침공을 물리치고 백제의 북변(北邊)을 역습하였으나 이듬해 거란(契丹)에게 북변을 빼앗겼다.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그의 완전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생존시의 칭호는 영락대왕(永樂大王)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약칭이고, 그가 쓴 영락(永樂)이란 연호는 한국에 알려진 최초의 연호이다. 즉위 초부터 대방(帶方) 탈환전을 개시하여 백제의 북쪽을 진격하여서 석현(石峴) 등 10성을 함락하였고, 396년(광개토왕 6: 백제 아신왕)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여 58성을 차지하였으며, 왕제(王弟)와 대신 10인을 볼모로 삼아 개선하였다.
이리하여 한강 이북과 예성강 이동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400년에는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5만의 원군을 보내어 왜구를 격퇴시켰으며, 동예(東濊)를 통합하고(410), 신라와는 하슬라(何瑟羅)를 경계로 삼았다. 또 연(燕)나라의 모용 희(慕容熙)를 반격하여 신성(新城) ·남소(南蘇)의 2성 등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였고, 405∼406년 후연(後燕)의 모용 희의 침입을 2번 받았으나 요동성(遼東城)과 목저성(木底城)에서 모두 격퇴하였다. 407년 모용 희를 죽이고 자립한 고운(高雲)과는 수교를 맺기도 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東夫餘)를 정벌하여 64성을 공파함으로써 철령(鐵嶺: 安邊) 이북의 동부여가 고구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또한 남하하여 한강선까지 진출하였으며, 서쪽으로 후연을 격파하고 요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만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③장수왕의 업적.
장수왕의 업적 중 하나는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평양성은 현재 북한의 수도인 평양을 포함한 곳이다.
이로인해 장수왕은 아버지인 광개토대왕과 달리 남하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국내성에 있던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결국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던 한강 유역의 모든 땅을 얻었고
최종적으로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룩하게 된다.
요점정리에요....
* 소수림왕 (374 ~ 384)
1. 불교의 공인 - 전진에서 순도가 전래
2. 태학의 설립 - 삼국시대 유일의 국립대학
3. 율령의 반포
--> 지방에 산재한 부족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중앙집권국가로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것으로 4세기 고구려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국가체제를 개혁하여 새로운
발전의 토대를 마련.
* 광개토대왕 (391 ~ 413)
1. 영토확장
1) 백제격파 - 한강선진출(임진강까지), 중부지역은 한강상류까지 진출
2) 왜구 격퇴 - 신라, 가야에 침입한 백제의 용병인 왜구를 격퇴
3) 후연(선비족)격파 - 요하선 진출
4) 숙식(여진) 정벌 - 동북방으로 진출
5) 비려(거란) 정벌 - 서북방으로 진출
2. 우리나라 최초로 연호 사용 - 영락
* 장수왕 (413 ~ 491)
1. 평양천도 - 대내적으로 국내성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뿌리깊게 잔존하고 있던
옛 고구려 5부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것이고, 대외적으로는 백제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고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것이다.
2. 백제를 침공하여 위례성 함락
3. 중원(충주)까지 영토를 확장
도움이 되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