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신라 백제 건국이야기

고구려 신라 백제 건국이야기

작성일 2008.03.11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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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질문을 하나 하려합니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이야기를 알려주세요..

이번주 목요일까지요!!

내공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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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건국이야기

 

만주에 부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북부여왕은 늙었으나 아들이 없어 산천을 두루 다니며 제사를 드리던 중 곤녕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말이 큰돌을 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러보니 한 어린아이가 개구리 모양으로 쪼그리고 있었는데 등에는 금빛이 찬란하였다.

왕은 하늘이 주신 아들이라 생각하고 크게 기뻐하며 아이 이름을 "금와"라고 하였다. 어느 날 천제(하느님)는 꿈에 나타나 "이 곳은 내 자손이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너희는 동해 바닷가 가섭원이라는 곳 에 도읍을 정하라." 라고 하여 북부여왕 해부루는 가섭원으로 나라를 옮기고 이름을 동부여라고 하였다. 그러자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 북부여에 새로이 나라를 세웠다. 한편 동부여에는 해부루왕이 죽자 금와가 왕이 되었다.

어느 날 금와왕은 사냥을 하다가 깊은 숲 속에서 유화라는 하백의 딸을 발견했다. 유화는 해모수라는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청년의 꼬임에 빠져 허락도 없이 혼인을 했다가 해모수가 없어지자 유화는 그의 아버지 하백에게서 버림을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금와왕은 기이하게 여겨 유화를 데려다 작은 방에 가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화의 방에 햇빛이 비치고 큰 알을 낳게 되었다. 왕은 해괴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알을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그러나 알 주위를 지나는 모든 동물들이 피해가고 오히려 알을 품어 주었다. 그래서 왕은 알을 깨뜨리려고 했으나 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알은 다시 유화에게로 돌아오고 알에서는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는 외모가 출중하고 영특하였으며 체격도 좋았다. 특히 활을 아주 잘 쏘았다. 그래서 그 아이 이름을 주몽이라 지었다.(그 당시에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주몽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자 금와왕의 왕자들은 주몽을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금와왕은 왕자들의 말을 듣고 주몽을 마굿간지기를 하게 하였다. 현명한 주몽은 명마를 굶겨서 삐쩍마른 말을 만들었는데 왕은 그 말을 필요없다고 하여 주몽에게 주었다.

그러나 금와왕의 맏아들 대소태자는 계속 주몽을 죽이려 하자 주몽은 어머니와 아내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임신한 아내에게 칼을 두동강 내어서 증표로 주면서 "일곱 모난 돌 위 소나무 아래 둘것이니 아들이 나거든 그 증표를 찾아서 오 게 하라." 고 말하고 오리, 마리, 협부의 세 친구와 함께 명마를 타고 부여를 떠났다. 그런데 대소태자의 군사가 쫓아 왔지만 강에서 자라와 물고기들이 다리를 만들어 주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으며 졸본 부여에 도착하게 되었다.

졸본 부여의 왕은 주몽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둘째 공주를 시집보내어 사위로 맞아 그의 뒤를 이어 왕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주몽은 나라 이름을 '고구려'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때가 주몽의 나이 22살이었으며 자신의 성을 '고'라고 지어 '이름이 '고주몽'이 되었다.

 

백제의 건국이야기

 

백제를 세운 온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둘째 아들이다. 고구려, 신라와는 달리 알에서 깨어났다는 설화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이야기는 대충 이러하다. 주몽은 졸본 부여에 와서 둘째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은 비류이고 둘째 아들은 온조였다.

한편 주몽이 북부여에서 나올 때 두고 온 예씨 부인도 아들을 낳았는데 유리였다. 유리 태자가 졸본 부여에 와서 왕위를 이어받자 비류는 이 곳에 남아 있는 것이 불편할 것이라 생각하고 온조와 함께 오간, 마려 등 10여명의 부하들과 남쪽으로 내려가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한산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들이 넓고 기름져서 농사를 짓고 살기에 좋아 보였다.

그러나 비류는 그 곳 땅이 못마땅하여 아우 온조와 나누어 미추홀(지금의 인천 부근)로 떠났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18년이었다.

한편 비류가 정착한 미추홀은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살기에 적당하지 않아 비류를 따르던 백성들을 모아 다시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신라의 건국이야기

 

서라벌은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었다. 이 곳에는 여섯 마을이 촌장을 중심으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 여섯 마을을 '진한의 6부'라고 하였다.

어느 날 여섯 마을의 촌장을 뽑는 회의를 하던 중 양산 촌의 「나정」이라는 우물 가 숲 속에서 찬란한 빛이 내리 뻗더니 그 곳에서 흰 말 한 필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양산 촌의 촌장 '소벌공'이 가까이 가보니 말은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그 자리에는 큰 알이 한 개 놓여져 있었다.

알에 손을 대자 껍질이 깨지며 아주 잘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다. 여섯 촌장들은 아기를 꺼내어 깨끗이 씻었는데 몸에서는 광채가 났다. 아기는 고허 촌의 촌장 '소벌도리'에 의해 길러졌고 박처럼 큰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은 "박", 이름은 나라를 밝게 비추어 준다고 하여 "불구내"라고 하였다. 그후 한참 뒤 빛난다의 뜻을 지닌 "혁"과 세상에 있다는 뜻의 "거세"로 바꾸어 이름을 "혁거세"라 하였다.

바로 이 날 사량리 알영이라는 우물가에서는 계룡 한 마리가 나타나 오른편 겨드랑이 갈비뼈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다. 얼굴은 유달리 고왔으나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한 할머니가 월성 북쪽 냇가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빠져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아이가 되었다. 아이 이름을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하였다.

혁거세는 후에 알영과 결혼하여 신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6부 촌장들은 나라 이름을 '서라벌'이라 하고 임금을 '거서간'(왕 또는 귀인이라는 뜻)이라 불렀다. 이때가 혁거세 나이 13세, 기원전 57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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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문화의 특징-

고구려 문화는 고분에서 나오는 벽화에 그려져 있는 기마행렬, 수렵, 전쟁, 씨름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힘이 넘치고 패기 있는 문화적 특징을 가졌다. 대표적인 문화재로는 광개토 대왕릉비, 무용총, 장군총, 안학 궁터, 평양성터 등이 있는데 불교를 승인한 이후에는 불교와 관련된 절이 많이 건축되었다. 또 고구려는 넓은 지리 조건을 가지고 있고 나라의 힘도 강했다. 그래서 고분벽화를 보면 고구려의 문화는 힘차고 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문화의 특징-

백제 문화는 탑, 불상, 절과 같이 불교 중심의 문화재가 많고 무령왕릉, 공산성, 송산리 고분 등에서 나온 벽화나 정림사지 석탑, 금동 대향로 등을 볼 때 섬세하고 우아한 멋을 발견할 수 있다.백제의 금동대향로나 정림사지 석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우아하고 세련된 미를 느낄 수 있다.
-신라 문화의 특징-

신라의 문화재는 경주에 상당수 남아 있는데 대부분 불교와 관계 깊은 절과 불상이 많다. 또, 금관과 장신구 등은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천마총, 분황사 석탑, 석굴암, 첨성대, 불국사, 고분군 등 이름이 알려진 많은 문화재가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 석굴암을 보면 불교문화가 많이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문화의 특징은 소박한 면이다. 고구려, 백제와 문화가 합쳐지면서 더 우아해지고 세련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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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국이야기

 

백제를 세운 온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둘째 아들이다. 고구려, 신라와는 달리 알에서 깨어났다는 설화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이야기는 대충 이러하다. 주몽은 졸본 부여에 와서 둘째 공주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첫째 아들은 비류이고 둘째 아들은 온조였다.

한편 주몽이 북부여에서 나올 때 두고 온 예씨 부인도 아들을 낳았는데 유리였다. 유리 태자가 졸본 부여에 와서 왕위를 이어받자 비류는 이 곳에 남아 있는 것이 불편할 것이라 생각하고 온조와 함께 오간, 마려 등 10여명의 부하들과 남쪽으로 내려가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한산에 이르러 사방을 둘러보니 들이 넓고 기름져서 농사를 짓고 살기에 좋아 보였다.

그러나 비류는 그 곳 땅이 못마땅하여 아우 온조와 나누어 미추홀(지금의 인천 부근)로 떠났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지금의 경기도 광주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18년이었다.

한편 비류가 정착한 미추홀은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살기에 적당하지 않아 비류를 따르던 백성들을 모아 다시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이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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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국이야기~!>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고구려 주몽입니다.

 

 주몽은 부여에서 왕자들이 그를 위험 인물로 생각하여 해치려 하므로 그것을 피하여 졸

 

본부여로 왔습니다.

 

주몽은 이미 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급하게 피하느라 부인을 부여에 두고 왔지요. 졸본 지방의 왕은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

 

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

 

얼마 안 되어 왕이 돌아가니 주몽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주몽은 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으니 첫째는 비류라 하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습니

 

다.

 

두 아들이 어느 정도 장성하였을 무렵 북부여에 있을 때 예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

 

들이 오자, 그 아들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비류와 온조는 새로 나타난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

 

려 등 열 사람과 더불어 남쪽으로 떠나는데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습니다.


드디어 한산(지금의 서울)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부아악은 삼각산 만경대로, 바위가 아이를 업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지금도 부아악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비류는 해변에서 살려고 하였으나 열 사람의 신하가 말하기를 '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지금의 한강)를 끼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였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

 

보고 서로는 큰 바다로 막혔으니 지세의 험함과 이로움이 다시 얻기 어려운 형세이므로

 

여기에 도읍을 정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습니다.


온조는 신하들의 말에 따라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필을 삼으며 나

 

라 이름을 십제라 하였습니다.

 

이때는 기원전 18년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가 발전할 때이지요.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 문학산 부근으로 생각됩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하고 물맛이 짜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

 

를 보았습니다.

 

위례성은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안락하였습니다.

 

 미추가 부끄럽고 후회스러워 스스로 죽으니 그 신하들과 백성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습니

 

다.

 

그 후 올 때 백성이 즐겁게 따랐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습니다.

 

그 집안 내력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습니다.

 

<고구려의 건국이야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던 동부여의 금와왕은 우발수라는 강가에 말을 몰고 갔습니다. 왕은 말에게 물을 먹이려다가, 외딴 강가에 아름다운 처녀가 혼자 서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금와왕은 그 처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소녀는 누구이며, 어찌하여 이런 곳에 와 있는고?" 처녀가 말했습니다.

"저는 웅심산 아래에 있는 성 북쪽의 청하에 사는 하백의 딸이옵니다." 청하란 압록강을 말하며, 하백은 물을 다스리는 수신의 이름입니다. 이 아가씨의 이름은 ‘유화'입니다. 물을 다스리는 신인 하백에게는 세 딸이 있었는데, 맏딸이 유화이고 그 밑으로 원화와 위화가 있었습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세 자매는 산골짜기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가 부여의 옛 도읍으로 내려오다가 그들을 보았습니다. 세 자매는 소스라쳐 옷을 입었습니다. 해모수가 유화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땅을 다스리려고 하늘에서 내려왔소. 그대의 이름은?" “유화입니다.” "유화 낭자, 참으로 아름답구려. 우리 결혼합시다." 해모수는 유화의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는 혼인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해모수는 하늘나라에 다녀온다고 하고는 영영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이 무렵, 하백은 집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유화가 자기의 허락도 받지 않고 혼인을 맺은 것을 알았습니다. 하백은 몹시도 화가 났습니다. “당장 집에서 나가거라!"

이렇게 하여 집을 쫓겨난 유화가 우발수 강가를 떠돌아다니다가 동부여의 금와왕을 만난 것입니다. 금와왕은 유화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정이 매우 딱하니 궁궐로 돌아가서 나와 함께 살자."

하고는 그녀를 데리고 갔습니다. 하루는 유화 부인이 커다란 알을 낳았습니다. 금와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분이 나빴습니다.

"사람이 알을 낳다니!"

금와왕은 그 알을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이상하게도 돼지들이 그 알을 밟 지 않고 피했습니다.

"그 알을 길거리에다 내다 버려라!"

신하들이 알을 돼지우리에서 꺼내어 길에 갖다 버렸으나, 거리를 지나가는 소나 말, 개들까지도 알을 피했습니다.

"이상한 일이군!"

금와왕은 그 알을 들판에 내버리도록 분부했습니다. 알이 들판에 버려지자, 이번에는 새들이 날아와서 따뜻하게 품어주었습니다. 신하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낱낱이 아뢰었습니다.

"참 괴이한 일도 다 많도다."

"저희들이 알을 깨뜨려 보겠나이다."

신하들은 몽둥이로 힘껏 알을 내리쳤습니다. 알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금와왕은 하는 수 없어서,

"그 알을 어머니에게 돌려주어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유화 부인은 알을 돌려받았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그 알 속에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사내아기는 무럭무럭 자라서 활로 파리를 쏘아 잡았습니다.

‘이 아이는 예사 사람이 아니다!'

유화 부인은 이 아이 이름을 '주몽'이라고 지었습니다. 동부여에서는 활을 아주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몽은 20살의 늠름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주몽의 활솜씨는 백발백중이었습니다.

금와왕 에게는 일곱 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주몽을 시기하였습니다. 맏아들인 대소는 다른 왕자들과 의논하여 주몽을 없애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주몽은 이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주몽은 자기를 따르는 오이, 마리, 협부라는 세 청년을 불러 놓고 말했습니다.

"태자를 비롯하여 일곱 왕자가 나를 헤치려고 한다. 이곳을 떠나야겠다."

"가신다면, 어디로 가십니까?"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워서 우리의 뜻을 펼쳐 보자!"

마침내 주몽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기를 밴 아내에게는 칼을 두 동강내어서 그 하나를 보이며 말했습니다.

"왕자를 낳거든 이 칼을 일곱 모진 돌 위 소나무 아래에 묻어 둘 테니 찾아가지고 오도록 하오." 주몽은 마굿간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명마가 주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명마는 어머니가 전에 정해 준 말이었습니다. 일찍이 금와왕은 주몽에게 마굿간을 돌보는 일을 맡 긴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가장 날쌘 말의 혓바닥에 바늘을 꽂아 두라고 주몽에게 일렀습니다. 혓바닥에 바늘이 꽂힌 말은 몹시 야위었습니다. 금와왕은 주몽에게 그 말을 주어 버렸습니다. 주몽은 여윈 말을 잘 키워서 명마로 만든 것입니다. 주몽을 태운 명마는 산과 들을 나는 듯이 달렸습니다. 주몽 일행은 남쪽으로 내달았습니다.

"주몽이 없어졌다! 주몽을 추격하라." 대소 태자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주몽의 뒤를 쫓았습니다. 주몽은 엄사수 (지금의 압록강 동부)라는 강가에 이르자 당황했습니다. 물이 깊어서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뒤에서는 대소 태자가 군사들을 이끌고 바람 같이 접근해 오고 있었습니다. 주몽을 따르던 한 청년이 강물을 가리켰습니다. "저것 좀 보십시오!"

물고기와 자라들이 강물 위에 뗏목처럼 이어져서 떠 있었습니다. 주몽은 일행과 함께 그 위로 무사히 강물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어? 주몽이 강물 위를 걸어가네?"

대소 태자의 군사들은 강가에 다가와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딱 벌렸습니다. 그 때는 이미 뗏목 구실을 해 주었던 물고기와 자라들이 사라진 뒤였습니다. 주몽과 그 일행은 모둔곡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 베옷, 한 사람은 검정옷, 또 한사람은 물풀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는데 생김새가 뛰어나게 보였습니다. 주몽이 일행에게 말했습니다.

"바야흐로 내가 큰 뜻을 받들어 나라를 세우려 하는 터에 이 세 사람을 만났으니, 어찌 하느님의 돌보심이라고 아니할 수 있겠소!" 주몽은 세 사람에게 각각 재능에 따라 임무를 맡긴 뒤에 졸본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주몽을 따랐습니다. 졸본 땅은 매우 기름지고 도읍을 정하기에 아주 적합했으나, 미처 궁궐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비류수 위에 살면서 나라를 세웠습니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로 정하노라!" 주몽은 이 때 성을 '고'씨라 하였습니다. 고주몽의 나이 22살 때였습니다. 고구려와 주몽의 이름은 떠오르는 해처럼 사방으로 빛을 뿜었으며, 뒷날 '동명 성왕'의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 저 아는 게 고구려, 백제 밖에 없어서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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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

 

신라(新羅)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현재의 한반도 동남부 일대를 약 1000여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국가이다. 7세기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나·당 연합을 결성,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여, 이 이후로는 대신라 또는 통일신라로 불린다. 669년 발해가 세워짐과 함께 남북국 시대의 남쪽 축이 되었다. 892년 견훤후백제를, 901년 궁예태봉(처음 이름은 후고구려)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 양국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신라가 935년 고려왕건에게 항복하니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신라사는 크게 상대, 중대, 하대로 나뉘는데, 상대는 박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여왕까지의 28대 771년으로, 건국 이후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으로 고구려, 백제와 양립하던 시기이다. 중대는 태종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8대 127년으로, 삼국 통일 및 그 직후의 신라문화의 황금기이다. 하대는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의 20대 156년으로, 계속된 평화와 왕위 계승권 싸움으로 혼란해져 기울어간 시기이다.

 

국호

계림, 사로, 서라벌 등으로도 불렸으나 지증 마립간 4년 504년 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에 대한 칭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에서 "왕"으로 정했다. 이 일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인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

 신라의 국가 성립

신라는 처음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 건국되었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이사금 때에는 해안가에 나타나던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신라의 정치적 발전

신라는 내물 이사금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신라의 팽창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 통일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다시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더구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하지만 670년 옛 고구려의 영토인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고 발해가 들어서면서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

 대신라의 발전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그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도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도 안정되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8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도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각처에서 일어나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半)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지배력도 행사하였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후삼국의 성립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경주 일대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의 멸망

고려 태조는 실각한 전(前) 임금인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무혈 정복할 수 있었다.

 

 

2. 고구려

 

고구려 (高句麗, 기원전 37년경 - 668년)는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한반도 북부를 약 700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건국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졸본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했다 한다. 그러나 동명왕편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부여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더 일찍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한다. 3년에는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초기의 고구려는 부여전한의 4개 군현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비옥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구려는 왕족인 계루부를 포함한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성장

53년에 즉위한 태조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복속시키고 한 군현에 대한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4년 위나라관구검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 때의 명재상 을파소는 194년에 진대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4세기에 이르러 중국 대륙이 5호 16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고구려의 정복 활동이 활발하게 재개되었는데, 미천왕은 313년 낙랑군을 점령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으며,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의 백제신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아직 부족별로 흩어져있는 힘을 조직적으로 통합하지 못하여 그 다음 왕인 고국원왕 때에는 342년 연나라의 대대적인 침공과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의 침공으로 인해 수도가 점령되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융성

소수림왕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한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372년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국교로 삼았으며, 태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중앙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대왕장수왕 대에 이르러서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에 즉위한 광개토대왕 때에는 서쪽으로는 후연을 멸망시키고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 비려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위축시키고 가야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 했으며 전기 가야 연맹을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에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들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쇠퇴와 멸망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헸다. 안원왕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을 감행,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이 발흥하였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고 신라와 백제 간 동맹을 깨트리는 한편, 돌궐의 침공에 대항하였다. 돌궐과의 전쟁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고구려는 다시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때 수나라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에게 복속을 강요하자, 고구려는 항전하였다. 수나라598년612년에 각각 침공해 왔는데, 특히 두 번째 침공 때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활약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살수 대첩) 결국 수나라는 이 전쟁의 충격으로 멸망하였으며, 고구려도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무용총 수렵도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와도 대치하였다.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는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쥐었다.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이 침공했으나,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의 활약으로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에도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해 왔으나 그 때마다 연개소문이 격퇴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 자식들의 권력 투쟁이 일어났고, 결국 백제를 멸망시키고 여세를 몰아 침공해오는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668년 705년만에 멸망하였다.

그 후에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다. 또한 671년까지, 안시성은 (보장왕이 항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함락당하지 않고 남아있었다고도 전한다. 결국 698년 고구려 장수 출신인 대조영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게 계승되었다.

고구려와 현대사

2004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동북공정이라 불리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민국에서도 고구려의 역사가 자신들의 것임을 입증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2004년 고구려 연구재단을 설립하였으나, 2006년에 외교를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동아시아 역사재단에 통합되었다.

중국 사서 고구려 관련 내용들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를 말함)와 함께 모두 요동 동쪽 천여리 되는 곳에 있었다. 그 뒤에 고려는 요동을 침략해서 소유했고, 백제는 요서를 침략해서 소유했는데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었다.

(濊), 옥저(沃沮), 고구려가 본래 조선 땅에 위치해 있다.

 

 

3. 백제

 

백제(百濟)는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기원전 18년 현재의 한강 북쪽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해 세워진 한국 고대 국가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의 하나이다. 475년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웅진성(현재 공주)으로 천도하였다. 538년 이후의 공식 명칭은 남부여(南扶餘)이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일본어에서는 쿠다라라고 부르며, 이는 한국어의 「큰 나라」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신빙성이 낮다고 보여진다.

 

 백제의 국가 성립

백제는 기원전 18년부여 또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고구려 유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의 군현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차츰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중국 대륙의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추가>

기원전18년 건국했다는건 옛날에는 삼국사기 에 초기기사 불신 으로 믿는 학자가 적었으나 풍납토성에 발견으로 확실히 기원전 18년에 건국했다는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백제의 정치적 발전

4세기 중반 백제는 근초고왕 때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모두 정복하여 그 영토가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점차 전제군주화가 되어가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아울러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백제의 팽창

4세기 근초고왕은 마한을 완전히 병합하고 고구려로 북진 남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남제서와 북제서에 의하면 근초고왕은 요동과 산동반도까지 진출하였으며 일본열도규슈까지 진출하여 거대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대륙의 남조(南朝)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지만 얼마 안 가 배신한 신라에게 빼앗기고 성왕 자신도 신라군에 의해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백제의 멸망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를 통일하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짐 등은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 이 때 왜가 백제에 원군을 보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백촌강 전투). 백제-왜 연합군은 대패하고, 백제의 유민들이 왜에 많이 이주하게 되었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왜와 교류가 깊었기 때문에 왜의 귀족층에는 백제계의 도래인의 자손들이 많이 있었다. 풍장(豊璋)의 남동생·선광(善光)의 자손은 조정으로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百濟王)의 성을 받아, 백제의 왕통을 전하게 된다. 덧붙여 간무 천황의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는 무령왕을 조상으로 하는 도래인 야마토(和)씨의 출신이다.

그 후 900년에서부터 930년 동안 백제라는 이름의 국가가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에 의해 다시 세워지나 역사가 짧고 연관성이 비교적 적다. 학계에선 편의상 후백제로 부른다.

 

끝으로 님에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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