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라
신라(新羅)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로, 현재의 한반도 동남부 일대를 약 1000여 년 동안 지배하고 있던 국가이다. 7세기경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나·당 연합을 결성,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여, 이 이후로는 대신라 또는 통일신라로 불린다. 669년 발해가 세워짐과 함께 남북국 시대의 남쪽 축이 되었다. 892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처음 이름은 후고구려)을 세움과 함께 후삼국 시대가 시작, 양국의 공세에 버티지 못한 신라가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하니 56대 992년 만에 멸망했다.
신라사는 크게 상대, 중대, 하대로 나뉘는데, 상대는 박혁거세 거서간부터 진덕여왕까지의 28대 771년으로, 건국 이후 부족국가에서 고대국가로의 발전 및 팽창으로 고구려, 백제와 양립하던 시기이다. 중대는 태종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8대 127년으로, 삼국 통일 및 그 직후의 신라문화의 황금기이다. 하대는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의 20대 156년으로, 계속된 평화와 왕위 계승권 싸움으로 혼란해져 기울어간 시기이다.
국호
계림, 사로, 서라벌 등으로도 불렸으나 지증 마립간 4년 504년 국호를 '신라'로 확실히 하며 왕에 대한 칭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에서 "왕"으로 정했다. 이 일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거니와,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인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좇았다.
신라의 국가 성립
신라는 처음 진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하였는데,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기원전 57년 건국되었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4세기 내물 이사금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이것은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내물 이사금 때에는 해안가에 나타나던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 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성장해 나갔다.
신라의 정치적 발전
신라는 내물 이사금 이후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5세기 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였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또한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복속시키기도 하였다. 국호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는 지방의 지배 세력을 확실하게 장악하여 갔다.
이어 법흥왕은 병부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또한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김해 지역의 금관 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다.
신라의 팽창
신라는 6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 결속을 다지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 통일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다시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했고, 더구나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있었다. 결국 고구려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668년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결국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는 한편, 백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이어 남침해 오던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었다. 하지만 670년 옛 고구려의 영토인 한반도 북쪽과 만주 일대를 차지하지 못하고 발해가 들어서면서 불완전한 통일을 이룩하였다.
대신라의 발전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신라는 그 영역의 확대와 함께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도 크게 증대되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도 안정되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을 전후하여 나타난 중요한 정치적 변화는 왕권이 전제화되었다는 점이다. 태종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서 통일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이때부터 태종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나아가 왕명을 받들고 기밀 사무를 관장하는 시중의 기능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의 이익을 대변하던 상대등의 세력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통일 이후 진골 귀족 세력이 약화되고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정치 변동과 호족 세력의 성장
8세기 후반 신라에서는 국가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고,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하였다.
진골 귀족들은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권력 싸움을 벌였다.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이에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한편,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무거워졌다.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면서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랐다.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도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앙 정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졌다.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지방에서는 호족이라 불리는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다. 호족들은 농민 봉기를 배경으로 각처에서 일어나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반(半)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자기 근거지에 성을 쌓고 군대를 보유하여 스스로 성주 혹은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그 지방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 지배력도 행사하였다.
한편,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한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진골 귀족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없게 되자 은거하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연계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였다.
후삼국의 성립
10세기로 들어오면서 지방에서 성장하던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의 혼란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경주 일대로 축소되어 다시 삼국이 정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의 멸망
고려 태조는 실각한 전(前) 임금인 궁예와는 달리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우호 정책을 내세웠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하였다.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과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었고, 그 결과 경순왕의 자진 항복을 받아내어 신라를 무혈 정복할 수 있었다.
2. 고구려
고구려 (高句麗, 기원전 37년경 - 668년)는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시대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약 700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건국《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동명성왕이 졸본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했다 한다. 그러나 동명왕편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 및 부여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더 일찍 건국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한다. 3년에는 국내성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초기의 고구려는 부여 및 전한의 4개 군현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비옥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구려는 왕족인 계루부를 포함한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성장
53년에 즉위한 태조왕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왕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복속시키고 한 군현에 대한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4년 위나라의 관구검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 때의 명재상 을파소는 194년에 진대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4세기에 이르러 중국 대륙이 5호 16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고구려의 정복 활동이 활발하게 재개되었는데, 미천왕은 313년 낙랑군을 점령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으며,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의 백제 및 신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아직 부족별로 흩어져있는 힘을 조직적으로 통합하지 못하여 그 다음 왕인 고국원왕 때에는 342년 연나라의 대대적인 침공과 371년 백제의 근초고왕의 침공으로 인해 수도가 점령되고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융성
소수림왕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한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372년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국교로 삼았으며, 태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이를 통해 중앙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이르러서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에 즉위한 광개토대왕 때에는 서쪽으로는 후연을 멸망시키고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 비려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위축시키고 왜와 가야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 했으며 전기 가야 연맹을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에 평양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들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쇠퇴와 멸망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헸다. 안원왕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을 감행,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이 발흥하였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고 신라와 백제 간 동맹을 깨트리는 한편, 돌궐의 침공에 대항하였다. 돌궐과의 전쟁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고구려는 다시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때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에게 복속을 강요하자, 고구려는 항전하였다. 수나라는 598년과 612년에 각각 침공해 왔는데, 특히 두 번째 침공 때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에서 활약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살수 대첩) 결국 수나라는 이 전쟁의 충격으로 멸망하였으며, 고구려도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당나라와도 대치하였다.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는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정권을 쥐었다.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645년 당 태종 이세민이 침공했으나,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의 활약으로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에도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해 왔으나 그 때마다 연개소문이 격퇴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 자식들의 권력 투쟁이 일어났고, 결국 백제를 멸망시키고 여세를 몰아 침공해오는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668년 705년만에 멸망하였다.
그 후에도 검모잠, 안승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다. 또한 671년까지, 안시성은 (보장왕이 항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함락당하지 않고 남아있었다고도 전한다. 결국 698년 고구려 장수 출신인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게 계승되었다.
고구려와 현대사
2004년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은 동북공정이라 불리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민국에서도 고구려의 역사가 자신들의 것임을 입증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2004년 고구려 연구재단을 설립하였으나, 2006년에 외교를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동아시아 역사재단에 통합되었다.
중국 사서 고구려 관련 내용들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를 말함)와 함께 모두 요동 동쪽 천여리 되는 곳에 있었다. 그 뒤에 고려는 요동을 침략해서 소유했고, 백제는 요서를 침략해서 소유했는데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었다.
예(濊), 옥저(沃沮), 고구려가 본래 조선 땅에 위치해 있다.
3. 백제
백제(百濟)는 온조왕을 시조로 하여 기원전 18년 현재의 한강 북쪽의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해 세워진 한국 고대 국가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의 하나이다. 475년 고구려의 공세에 밀려 웅진성(현재 공주)으로 천도하였다. 538년 이후의 공식 명칭은 남부여(南扶餘)이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하였다.
일본어에서는 쿠다라라고 부르며, 이는 한국어의 「큰 나라」에서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신빙성이 낮다고 보여진다.
백제의 국가 성립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부여 또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고구려 유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나라의 군현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차츰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중국 대륙의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
<추가>
기원전18년 건국했다는건 옛날에는 삼국사기 에 초기기사 불신 으로 믿는 학자가 적었으나 풍납토성에 발견으로 확실히 기원전 18년에 건국했다는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백제의 정치적 발전
4세기 중반 백제는 근초고왕 때 크게 발전하였다. 이 때 백제는 마한의 나머지 세력을 모두 정복하여 그 영토가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쪽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립하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와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점차 전제군주화가 되어가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아울러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백제의 팽창
4세기 근초고왕은 마한을 완전히 병합하고 고구려로 북진 남평양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남제서와 북제서에 의하면 근초고왕은 요동과 산동반도까지 진출하였으며 일본열도의 규슈까지 진출하여 거대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5세기 이후 고구려의 장수왕에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웅진성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문주왕 때는 해구와 같은 무인 실권자가 등장하여 백제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그러나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동맹을 강화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개명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대륙의 남조(南朝)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또한 왜에 불교를 전파하기도 하였다.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수복하였지만 얼마 안 가 배신한 신라에게 빼앗기고 성왕 자신도 신라군에 의해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백제의 멸망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신흥 귀족인 김춘추가 김유신과 제휴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서서히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를 통일하려 하였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먼저 백제를 공격했다.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각 지방의 저항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복신과 흑치상지, 도짐 등은 왕자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이들은 200개의 성들을 되찾고 사비성과 웅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결국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만다. 이 때 왜가 백제에 원군을 보내, 신라-당나라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이 백촌강에서 격돌하였다(백촌강 전투). 백제-왜 연합군은 대패하고, 백제의 유민들이 왜에 많이 이주하게 되었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왜와 교류가 깊었기 때문에 왜의 귀족층에는 백제계의 도래인의 자손들이 많이 있었다. 풍장(豊璋)의 남동생·선광(善光)의 자손은 조정으로부터 구다라노 고니키시(百濟王)의 성을 받아, 백제의 왕통을 전하게 된다. 덧붙여 간무 천황의 어머니인 다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는 무령왕을 조상으로 하는 도래인 야마토(和)씨의 출신이다.
그 후 900년에서부터 930년 동안 백제라는 이름의 국가가 신라의 장군이었던 견훤에 의해 다시 세워지나 역사가 짧고 연관성이 비교적 적다. 학계에선 편의상 후백제로 부른다.
끝으로 님에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시기를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