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에대해 원인,경과,결과 등으로 나타내 주세요...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에대해 원인,경과,결과 등으로 나타내 주세요...

작성일 2007.07.10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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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학년 사회 숙제입니다 오늘 30분 안에 답변 해주세요

4.19혁명,5.18민주화운동 자세하고 간단하게

원인 경과 결과 등으로 해주세요

 

내공은 갖고싶은만큼 마음껏드림!!

저 내공 만정도있어요 넘쳐남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후 헌법 제 48조 규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최 권한대행은 27일 오전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하는 동시에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을 임명했다.
이어 최 권한대행은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제 1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최 대통령은 '우리는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의사가 전혀 없는 정부'라는 말로 국민들의 의구심을 풀려 했다. 야당인 신민당은 정부가 과도기간을 연장하는 등 불만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으나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국민들 역시 유신체제라는 억압에서 막 벗어나려는 순간에 있어 정부의 조치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12월 12일 저녁 10·26 사건 수사를 맡았던 보안 사령관 전두환 소장은 9사단장 노태우 소장 등 하나회 출신의 정치군인들과 (황영시, 유학성, 박준병, 박희도, 장세동, 김진영, 최세창, 정호용, 허삼수, 이희성, 김복동.....) 함께 일련의 군사 행동을 취하였다. 全 사령관은 박대통령 암살 사건에 관련 혐의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 총장을 강제 연행하는 하극상의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게다가 정 총장을 연행하면서 총격전까지 벌였다.
한편 전 사령관의 연행 재가 요청에 최대통령은 정 총장 연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노재현 국방장관도 정 총장을 석방하고 각자 부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전 보안 사령관은 이를 거부하고 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중앙청, 국방부, 육군 본부 등 국군 중추부를 차례로 장악하고, 각 방송국, 신문사, 통신사를 그들의 통제하에 두었다. ( 12. 12 쿠데타 )
결국 이 사건으로 전두환 보안 사령관 등 일부 군인들(신군부)의 위법적인 행동에 반대했던 많은 군 장성들이 체포되고 군에서 쫓겨났다. (신군부는 정승화를 비롯, 그의 추종세력인 3군 사령관 이건영, 특전 사령관 정병주,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등을 80년 1월 20일자로 모두 강제 예편시키고 정승화에게는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전두환 사령관은 자신의 육사 동기생 및 가까운 친구들을 요직에 앉혔다.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은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됐다. 또 쿠데타 주체 세력들은 특전사령관과 3군 사령관 등 핵심 부대의 책임자가 됐다.

美정부와 서울의 미대사관측은 전두환 사령관의 '권력 찬탈'(Power grab; 당시 글라이스틴대사가 사석에서 사용한 표현)을 원상태로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이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의 측근들에게 "우리는 12월 12일 일어난 사건을 역전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고 명백히 밝혔다. 그 대신 미국은 전사령관에게 정치에 개입하거나 정치권력을 차지하려 들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충고를 간단히 무시하고 곧바로 정치 개입과 정치 권력 장악에 나서게 된다.

12·12쿠데타는 약 20년에 걸친 박정희 군사 독재가 끝난 후 국민들이 열망하던 민선·민주 정부의 부활을 가로막았다. 그 후 몇 달에 걸쳐 군부가 다시 집권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무력을 동원한 한 무리의 군인들에 의해 국가 권력이 또다시 찬탈되고 있음을 느꼈다. 1970년대는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70년대에 바침
신해철 작사·작곡
하늘이 그리도 어두웠었기에 더 절실했던 낭만
지금 와선 촌스럽다 해도 그땐 모든 게 그랬지.
그때를 기억하는지 그 시절 70년대를.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와 가위를 든 경찰들
지금 와선 이상하다 해도 그땐 모든 게 그랬지.
그때를 기억하는지 그 시절 70년대를.

* 무엇이 옳았었고 (무엇이) 틀렸었는지
이제는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
모두 지난 후에는 (누구나) 말하긴 쉽지만
그때는 (그때는) 그렇게 쉽지는 않았지.

한발의 총성으로 그가 사라져간 그날 이후로
70년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지.
수많은 사연과 할 말을 남긴 채.
남겨진 사람들은 수만의 가슴 마다에 하나씩 꿈을 꾸었지.
숨겨왔던 오랜 꿈을.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가.

장군들의 긴박한 현장 육성

(보안사령부 비밀 녹음 테이프 ; 이건영 3군 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 사령관의 전화 통화 ; 12일 밤 10시 16분)
.........
.........
이 : 응
장 ; 그러니까 헌병감이 턱 들어오더니 총장님이 피습당한 것 같다.....
이 : 총장이 뭐라고?
장 ; 총장님이 피습당한 것 같다.... 이렇게 탁 돼 가지고 그래 제가 확 나가면서 총장님 공관에 전화를 딱 걸으니까 공관의 경호 대위 김대위가 탁 나오더니 [사령관님, 지금 빨리 앰뷸런스를 좀 보내주고..... 총장님이 피습 당했습니다.] 이렇게 아주 경황없이 이야기를 해요. 알았다, 그러면서 제가 전화를 딱 끊고 바로 거기서 제가 차를 몰고 부대에 들어오면서 바로 부대 출동태세를 갖춰놓고 APC하고 병력을 총장 공관으로 우선 급파를 시켰지 요. 그러고 앰뷸런스를 보내고 동시에 총장님을 빨리 구출하기를 이렇게 하고 그러고 지금 제가 여기와서 대략 상황을 보니....파악이 안되는데 우선 총장님 문제만 생각해서 갔더니 거기 가서 보니 해병대 애들하고 우리 헌병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놈들이 우리 헌병 들어간 놈이 총장님을 피습한 건지 원래부터 경비를 담당하고 있는 해병대가 총장을 피습했는지 그건 모르 겠는데..... 아무튼 해병대가 우리 헌병을 그 안에 한 50명 있는 것을 포위해 가지고 마이크로 버스에서 안 내보내고 있어요.
이 ; 우리 헌병이?
장 ; 못 나오고 있어요.
이 ; 해병 헌병 때문에.
장 ; 해병 헌병이요, 우리 0 0 니까.
이 ; 응
장 ; 육군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났기 때문에 자기네는 무조건 안 내보낸다 이거죠. 그래 마침 해군 헌병감이 오고 이러는데.... 30단에 유학성 장군이 와 있다.... 이래서 나를 자꾸 찾는다 이래서 예감이 이상해서 말입니다. 지가 빨리 상황실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와 가지고 30단에 유학성 장군이 있다고 해서 전화를 바꾸니까 이미 오래된 것처럼... [왜 유장군님 남의 부대에 와서 왜 이럽니까?] 제가 예감이 이상해서 물으니까 [에이 장 장군 거 알면서 왜 그래 이리와....] [이리 오기는 어딜 와 . 당신이 왜 그래요. 왜 남의 (부대에) 한밤중에 와서 무슨 지랄하고 있어. 쏴 죽인다.] 이렇게 했더니 황영시 장군한테 전화를 바꿔요. 황영시 장군이 있다가 [장태완이 너 왜 그래. 알 만한 사람이 나하고 다 통할 수 있는 처지인데 왜 그래. 이리 와 ] [ 아니 왜 이라십니까. 왜 그 우리 좋은 총장님을 어쩌자고 납치해 가지고 왜 이라요. 정말 그러면 내 죽여] 했더니 [차규헌이도 와 있고
다 와 있는데 마 이리와....] [ 무슨 .... 혼자 다 해먹어. 임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 해놓고 바로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는 중인데 말입니다.
이 : 응, 그러면 말이야.
장 ; 보니깐 조그만 이놈들이 장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화를 올리는 것은 총장님은 납치돼 가지고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그라는데요. 참모차장하고 모두 저짝에서 전화가 오기를 [어떻게 되느냐] [어떻게 되긴 나는 딴 것 없다. 쳐들어간다. 30단이고 다 쏴 죽인다] 했더니.....
(중략)
이 : 그럼 말이야, 30단이 장 장군 명령권 내에 있는 거 아니야?
장 ; 그런데 거기에는 제가 자극을 안하는기요. 거기에 몽땅 모여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그 새끼들 거기 모여 있으면 뭐합니까. 제가 단장한테 전화를 걸어가지고 이리 오너라 하든지 지시하든지.... 처음에는 단장보고 금마들(그 놈들) 당장 쏴 죽이라 했거든요. 그런데 단장이 모두 그놈아들한테 누질려 (눌려) 있는 것 같아요
이 ; 그런데 현재는 말야. 다른 30이나 33이나 부대동원에 대해서는 각각 지휘관들한테 내 명령 없이 출동하지 말라고 지시는 해놔 있어요.
장 ; 지가 알아서 해 놔 있어요.
이 : 그래서 여기선 부대는 하나도 동원 안하는데 쌍방이 충돌이 없이 잘 돼야지, 그렇지 않으면 굉장한 불상사가 생겨.
장 ; 그까짓 거 충돌이고 뭐고 몇 놈 죽어도...
이 : 글쎄 잘못된 놈은 죽어도 좋은데.
장 : 하여튼 내부에선 제가 죽든 살든 할 테니까요. 사령관님은 바깥을 좀 해 주십시오.
이 : 그렇게 해요..... 이거 뭐 좀 불순한 장난이 있는 것 같애.
장 ; 예, 완전히 장난이라요. 전두환이하고 이놈아들이 모두 작당(?)해 가지고 장난인 것 같애요.
이 ; 응
장 : 그리고 여기도 보니까 단장들이 몇 놈들이 자취를 감추고 없는데요. 그놈 아들한테 전부 사전에 공작을 해서 한 모양인데...
(중략)
이 ; 알겠어. 이게 뭐 굉장히 불순한 장난이 있어 큰일이야.
장 : 안에선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이 ; 이랬다가 북괴한테 큰일 나요.
장 ; 사령관님은 바깥에서 잘 해 주십시오.
이 ; 알겠어요
장 ; 저는 안에서... 이놈의 새끼들 다 죽이든지 해버릴 테니....
이 ; 하여튼 빨리 수습을 좀 하도록 해. 이거 굉장히 불행한 사태야.
장 : 알겠습니다.
이 : OK, 전화줘 고마워요.

좌절된 '서울의 봄'

1980년 봄이 왔다. 10·26 사태로 비상 계엄이 선포되고 12·12 쿠데타 등 불안정한 정국의 추이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국민들은 오랜 유신 체제의 망령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주 사회에 대한 희망을 키워 나갔다.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 각처에서 민주화의 물결은 봇물 터지듯이 솟구쳤다. ( '서울의 봄' ) 4.19직후처럼 민주회복의 물결이 도도하게 흘러 군사독재의 모든 잔재를 씻어내는 듯 했다. 사람들은 이제는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김영삼·김대중의 행보에 신경을 썼다. 두 사람은 단결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부는 새로운 민주 헌법의 제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이에 학생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이제까지 정부 태도를 볼 때, "최규하 정부는 유신 잔당으로 민주화 의지가 없다"고 단정지었다. 신중하게 학원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던 학생들은 5월이 되면서 거리로 나왔다. 14일과 15일 서울의 대학생들은 계엄령 하인데도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가졌다.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에 놀란 정부는 서둘러 학생들을 진정시키려 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신현확 총리는 15일 담화문을 발표해 "국회와 협의해 모든 정치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겠다"며 학생들에게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중동을 방문중이었던 최 대통령도 일정을 하루 앞 당겨 16일 밤 귀국하려 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일단 15일의 시위를 중지하고 정부의 태도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최대통령이 귀국했을 때 상황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국민들은 다시 한번 깊은 좌절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일주일만에 12.12 쿠데타를 당한 최 대통령은 그 뒤 군의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의 요구를 무시하지 못했다. (전 보안사령관은 1980년 4월 14일 공석 중이던 중앙정보부장의 자리까지 겸임하면서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전 보안 사령관은 단결된 군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이끌어 나가야 된다고 주장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나 집회가 공산주의자의 선전에 말려들어 나라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강력한 군의 힘을 동원하여 막기로 작정하였다. 이러한 군의 요구를 이겨내지 못한 최규하 정부는 5월 17일 24시를 기해 그간의 부분 계엄을 전국 계엄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계엄포고령을 발표 ▲ 모든 정치 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시위의 금지 ▲ 언론·출판·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 각 대학의 휴교령 ▲ 직장 이탈 및 태업·파업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국민의 저항에 쇄기를 박았다. 이어 18일에는 김대중, 김상현, 김종필, 이후락 등 26명의 정치인들을 학원·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합동수사본부에 연행하고 김영삼을 가택연금 시키는 등 정치적 일대 탄압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전국의 각 대학과 주요 도시에는 공수 특전단을 비롯한 군 부대가 투입되었다. 12.12에 이은 신군부의 제 2의 쿠데타였다. 체코의 '프라하의 봄'이 소련군의 탱크에 짓밟혔듯이 '서울의 봄'은 신군부의 장갑차에 산산조삭이 나고 말았다.

민족의 십자가, 광주

가로수들의 신록이 여느 해처럼 싱그러운 1980년 5월 18일 아침, 전남대생들은 교내로 들어가려다가 총을 든 군인들에 의해 제지를 당하자 투석으로 맞섰다. 당시 어느 외국 언론이 표현한 대로 ' 20세기의 마지막 비극'인 광주의 학살과 위대한 민중항쟁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신군부는 공수부대의 핵심인 7공수여단의 33대대와 35대대를 광주에 파견하고 그중 33대대의 주력이 전남대를 장악했다. 전남대생들은 만일의 휴교 조치에 대비하여 학교 앞에 모이기로 사전 합의한 대로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나오다가 계엄군과 대결하게 된 것이다.
학교 앞에서 계엄군에 쫓겨난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시내 거리를 돌며 "전두환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대중을 석방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경찰이 최루탄과 경찰봉으로 해산시키려 하자 다시 투석전으로 맞섰다. 신군부는 경찰력으로 진압이 실패하자 오후 3시경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착검한 M16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대원들은 남녀학생들을 붙잡아 마구 난타했다. 격분한 학생들이 보도 블럭을 깨서 집어 던졌다. 붙잡혀온 학생들을 공수대원들은 군화발로 짓밟았다. 피 흘리는 학생들은 굴비처럼 엮어져 군 트럭에 실려 갔으며,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되자 귀가하는 학생·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켜 패고 연행하고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다.

다음날인 19일 시민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금남로 일대에 많은 시민들이 모여 들었다. 공수대원들은 난폭하게 시민들을 해산 시켜려 들었다.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공수대원들은 분노한 시민들의 합세로 시위가 커지자 몽둥이는 물론 대검까지 사용하였다. 공수대원들의 무자비한 진압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는 사람들의 수가 차츰 많아졌다. 공수대원들의 잔인성을 목격한 군중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총궐기에 나섰다. 20일 날이 밝자 아침부터 금남로에 모여든 시민들이 수 만 명에 달했다. 시민들은 금남로에 주저앉아 공수대원들의 잔인한 진압을 성토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들의 숫자는 늘어났다. 오후가 되자 공수대원들은 시위하는 시민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광주 시내 곳곳에는 다시 격렬한 공방이 시작되었다.

통한의 계절 - 계엄령을 철폐하라! 전두환에게 죽음을! 남한의 한 도청 소재지 광주에 10만여 시위대는 서울의 계엄 정권에, 또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권력자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 시위는 곧 전면적 봉기로 확대됐다......
당시의 상황을 TIME은 이렇게 보도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7시쯤 금남로에는 새로운 상황이 벌어졌다. 2백여 대가 넘는 차량들이 도청 앞으로 길게 뻗은 금남로를 따라 줄이어 들어왔다. 헤드라이트를 밝힌 차량 행렬의 앞에는 대형 트럭이 앞장을 서고, 그 뒤로 버스와 택시들이 뒤따랐다.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차량 행렬을 에워싸고 금남로를 따라 서서히 도청 앞으로 나아갔다. (금남로 차량시위)
시민들은 박수를 보내고 만세를 부르며 힘을 돋구었다. 시민들과 공수부대 사이에 밀고 밀리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힘을 얻어 물러서지 않고 공수대원들을 공격하였다. 이날 밤 늦게 광주 시내의 밤하늘을 가르는 굉음이 소용돌이쳤다. 도청을 필사 Ю막?지키던 공수부대는 시민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자 마침내 총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앞장을 섰던 몇몇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거나 크게 다쳤다. 그러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은 인근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 예비군용 총기·실탄·수류탄을 빼앗아 무장하여 계엄군에 맞섰다. 시위대와 공수대원들은 밤을 새우며 혈전을 치렀다. 21일 새벽이 되자 공수부대는 작전상 광주 외곽으로 퇴각하였다. 시민들이 이긴 것이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
(1980년 5월 25일)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는가?
먼저 이 고장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목숨을 바친 시민,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이 알기로는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과도정부의 중대발표와 또 자제하고 관망하라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17일부터 학업에,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 당국에서는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일부 학생과 민주인사, 정치인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구실로 불법 연행했습니다. 이에 우리 시민 모두는 의아해 했습니다. 또한 18일 아침에 각 학교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꽂고 '돌격, 앞으로 '를 감행하였고 이에 우리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 이럴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 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시민 여러분!
너무나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 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를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여러분!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날조, 유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른 방향대로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일부에서는 우리 시민군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민주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절대 믿어주시고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22일 오래간만에 시민들은 작은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지난 며칠간 너무나도 엄청난 일들이 벌어져 시민들은 아직 어찌해야 될 지를 몰랐다. 이런 가운데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수습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수습위원회는 계엄군과 협상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총기를 반납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많은 시민들은 정부가 사과하기 전에 총기를 반납할 수는 없다고 버티었다. 총기를 반납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갈등이 나타났다.
23일부터는 도청 앞 광장에서 매일 성토 대회가 열렸다. 이 성토 대회에서 시민들은 자신들을 폭도로 몰아부치는 정부의 태도에 크게 분노하였다.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던 시민들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살상해놓고 정부는 무슨 염치로 시민들을 '폭도'로 모는가?" , "계엄을 해제하라" ,"정부는 과잉 진압에 대해 사과하라!"는 등 시민들의 요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25일이 되면서 군은 또 다시 광주 시내로 들어오려는 준비를 서둘렀다. 시민들은 불안에 싸였다. 5월 26일 이미 도청 앞에는 군이 진입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많은 시민들이 모여 궐기 대회를 열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궐기 대회가 끝난 다음 시민들은 대형 태극기와 1천여 명의 고등 학생 시위대를 앞세우고 가두 행진을 벌였다. 시민들은 "계엄령을 해제하라", "피의 대가를 보상하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무기 반납을 결사 반대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오후가 되자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돌아갔다. 계속적인 항쟁을 내 세운 도청 지도부는 시민군을 재편성해 계엄군의 진입이 예상되는 지점에 배치하면서 군의 진입에 대비했다.
오후에는 또 한 차례 궐기 대회가 열렸다. 궐기 대회를 마치고 시민들은 가두 행진에 나섰다. 5천여 명으로 시작된 행진은 광주 시내를 돌며 "광주를 사수하자"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위기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행렬이 다시 도청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사람은 단지 이삼백 명뿐이었다. 그만큼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항쟁 지도부는 마지막까지 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돌아갈 것을 권했다. 모두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어린 고등 학생들이 자신들이 나서 도청을 지키겠다고 애원했을 때 모두들 고개를 숙여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200 ∼ 500명의 시민군이 도청을 사수하는 가운데 27일 새벽 3시 드디어 수많은 계엄군들이 광주 시내로 공격해 들어 왔다. 항쟁 지도부는 가두 방송을 통해 광주 시민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였다.
"시민 여러분!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결국 도청에 남아 있던 시민들은 계엄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작전 개시 1시간 40여 분만에 모든 저항은 끝이 났다. 새벽녘이 뿌옇게 찾아 왔을 때 도청을 지키려 했던, 그래서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던 젊은 청년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갔다.
'광주 학살'로 불리게 된 이 사건은 그 후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서 핵심적인 쟁점이 돼 왔다. 그것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의 진앙(震央)이었다.

신군부의 집권 그리고 그 후....

. 1980. 5월 18∼ 5.27 ; 계엄군, 광주항쟁 무력 진압
계엄사령부는 7.22일 광주사태로 인한 사망자 수가 189명이라고 최종 발표했지만, 아직도 사망자 수, 행불자 수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음
. 1980. 5.31 신군부, 대통령 자문·보좌 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
상임위원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취임
이후 국보위의 강권 통치
* 국보위는 초헌법적 기구로 5.16 군사쿠데타 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성격이 비슷

. 1980. 8.16. 최규하 대통령 사임,

"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책임 정치의 구현으로 불신 풍조를 없애고 불했했던 헌정사에 평화적인 정권 이양의 선례를 남기며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해 화합과 단결을 다짐으로써 시대 요청에 따른 안정과 도의와 번영의 밝고 새로운 사회를.... 민주국가의 평화적인 정권이양에 있어서 국정의 최고 책임자가 국익 우선의 국가적인 견지에서 임기 전에라도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정부를 승계권자에게 이양하는 것도 확실히 정치 발전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8.16)

. 1980. 8.21 전군 지휘관 회의,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
. 1980. 8.27 통일주체국민회의, 보궐 선거를 통해 새 대통령에 전두환 선출 (총투표자 252명중 무효 1표, 100%지지)

. 1980. 9.1 전두환 제 11대 대통령 취임

"... 앞으로 나 자신과 내 주변의 부정과 부패를 스스로 용납치 않을 것이며, 모든 공직자의 부정 부패도 계속 척결해 나감으로써 국민의 불신 소지를 가능한 한 조속히 없애는 데 주력하겠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회 개혁 주도세력이 처음에는 대단한 열의와 정의감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이 부패하고 사명감을 상실하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새 시대에는 결단코 이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 새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며
조병화
...... 온 국민과 더불어 경축하는
이 새 출발 / 국운이여! 영원하여라
청렴결백한 통치자 / 참신과감한 통치자
이념투철한 통치자 / 정의부동한 통치자
인품온화한 통치자 / 애국애족 사랑의 통치자
........
이 새로운 영토 / 오, 통치자여! 그 힘 막강하여라
아, 이 새로운 영토 / 이 출발
신념이여, 부동불굴하여라.... (80년 8월 28일 경향신문)

. 1980. 9.17. 군법회의 김대중에게 내란죄 적용, 사형 판결
* 미국의 김대중 구명운동
전두환, '김대중 카드'를 이용한 '방미' 협상
. 1980. 10.27 제 8차 개헌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 및 7년 단임제 규정)
. 1980. 11.28 민주정의당 창당
. 1981. 1.21 미국, 전두환 초청
. 1981. 1.25 전두환, 계엄령을 해제하고 김대중의 형량을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한다고 발표
. 1981. 1.28 전두환 대통령, 미국 방문
. 1981. 2. 25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간접 선거 실시. 전두환 후보 전체선거인의 90.2% 득표 당선
. 1981. 3. 3 전두환 제12대 대통령 취임. 제 5공화국 출범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시련과 고뇌의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야말로 제 5공화국의 출범으로 자기완성시대를 형성하여야 할 성장과 성숙의 시대에 들어서는 찰나에 있다."(취임사 중)


. 1988. 2월 전두환 대통령, 1988년 2월 외신과의 회견에서
".. 광주 사태는 당시 국가의 존립 기반이 위태로울 정도록 최악의 상황에서 국가 위기를 수습하는 가운데 빚어진 것으로서 대단히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 1988 6공 정부,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청문회 실시
. 1990 광주피해자 보상법 제정
. 1993 김영삼 대통령 특별담화 통해 광주 수습책 제시
12·12를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
. 1995. 7.18 서울지검, 5.18수사 결과 발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요지로 불기소 결정
◁ 국민들의 반발 일어남
1995.11 김영삼 대통령 민자당에 5.18특별법 제정 지시
1995.11.30.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 발족,
검찰 재수사결정
1995.12.2 전두환씨, 연희동자택에서 대국민담화 발표 뒤 낙향
곧 연행, 구속 수감
1995. 12.21. 검찰, 전두환, 노태우씨를 12·12반란혐의로 기소
1996.8 검찰, 전두환·노태우씨에 각각 사형, 징역 22년 6월징역 구형
1997 전두환,노태우씨 상고심 선고
(전두환씨 - 무기징역으로 감형)
1998 김영삼 정부, 국민대화합 차원에서 전두환, 노태우씨 사면

신군부 검열에 삭제당한 시사만화 만평들

시와 노래로 보는 광주 항쟁 그리고 80년대 초반의 사회

① 아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김 준 태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만 흘리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로 갔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어디서 쓰러졌나.
우리들의 아들은 / 어디에서 죽어 어디에 파묻혔나
우리들의 귀여운 딸은 / 또 어디에서 입을 벌린 채 누워 있나
우리들의 혼백은 또 어디에서 / 찢어져 산산이 조각나버렸나

하느님도 새떼들도 / 떠나 버린 광주여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들만이 / 아침 저녁으로 살아 남아
쓰러지고, 엎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 우리들의 피투성이 도시여
죽음으로써 죽음을 물리치고 / 죽음으로써 삶을 찾으려 했던
아아, 통곡뿐인 남도의 /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해바람이 곤두박질치고 / 이 시대의 모든 산맥들이
엉터리로 우뚝 솟아 있을 때 / 그러나 그 누구도 찢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는 / 아아 자유의 깃발이여
인간의 깃발이여 / 살과 뼈로 응어리진 깃발이여

아아 우리들의 도시 / 우리들의 노래와 꿈과 사랑이
때로는 파도처럼 밀리고/ 때로는 무덤처럼 뒤집어 쓸지언정

아아 광주여 광주여 /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무등산을 넘어 / 골고다 언덕을 넘어가는
아아 온 몸에 상처뿐인 / 죽을뿐인 하나님의 아들이여

정말 우리는 죽어버렸나 / 더 이상 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이
더 이상 우리들의 아이들을 / 사랑할 수 없이 죽어버렸나
충장로에서 금남로에서 / 화정동에서 산수동에서 용봉동에서
지산동에서 양동에서 계림동에서 /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이 세월의 흐름이여

지금 우리들은 다만 / 쓰러지고 쓰러지고 울어야만 하는가
공포와 목숨 어떻게 숨을 / 쉬어야만 하는가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 모두가
넋을 잃고 밥 그릇조차 대하기 / 어렵구나 무섭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는 구나.....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 죽음과 죽음을 뚫고나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나님 아들이여 /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 백 번 죽고도 / 몇 백 번을 부활할 우리의 참사랑이여
우리들의 불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남아 나는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 지금 우리들은 더욱
푸르른 하늘을 올라 / 해와 달은 입맞추는 구나

광주여, 무등산이여 / 아아, 우리들의 영원한 깃발이여
꿈이여, 십자가여 /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젊어져가는 청춘의 도시여
......
.......
.......
........


② 오독
홍 헌 호

어느 시에서 나는
'화염 속의 내 고향 광주'를
'화엄 속의 내 고향 광주'로
잘못 읽었는데

그렇게 읽길 잘했어

화엄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옆에서 죽는 놈 짠하고 불쌍해서
내 목숨 들이붓고 피 뿜는 짓이 있다면
그것이 화엄 아니겄냐?
그것이 불타는 엄숙함 아니것냐?


③ 바위섬 (배창희 작사·작곡 김원중 노래)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 광주항쟁을 은유적으로 표현

④ 어머니의 노래 (작사·작곡 김종서)

Part - Ⅰ

Part - Ⅱ
Mother! 흐린 두 눈에 내일의 꿈을 꾸나요. 마냥 녹슬어만 가는 당신의 어린 아이들 무장한 캐터필러 광란의 노래 다 포근히 감싸며 안아 주셨죠. Mother! 폭 패인 두뺨에 슬픈 눈물 고이네! Mother! 이젠 알아요. 내일도 해는 뜨는 걸 하지만 날개 돋힌 오만은 차갑게 그 빛을 가리네. Mother! 다 포근히 감싸며 안아 주셨죠.
(랩) 시커멓게 그을린 동심들과 컴퓨터의 포로가 된 내 아이 도시에 엉켜진 거미줄 전파 공해 이 거리를 헤매는 표정없는 얼굴들.
Mother! 다음 세상엔 무엇이 기다리나요.

Part - Ⅲ
타오르는 연기 뒤로 전사들의 메아리. 내 형제를 지키는 자랑스런 T.N.T 이글대는 태양 아래 춤을 추는 자동차 구멍뚫린 하늘 아래 내리쬐는 검은 빛 다시 한번 들려줘 어머니의 노래를 희미하게 식어가는 어머니의 노래를

Part - Ⅳ
이제는 모두 지워버리고 이젠 잠을 잘 시간. 때로는 힘겨운 나날들 한숨 뒤로 묻어요. 그대 품에 가득 안기어 어제의 수고에 감사드려요. 새들도 모두 집을 찾는데 우리 이젠 안녕히 슬픔도 이젠 안녕히


⑤ 오월의 햇살 (이선희 노래)
어디선가 날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면 / 보이는건 쓸쓸한 거리 불어오는 바람뿐인데 / 바람결에 휘날리는 머리카락 쓸어올리면 / 가던 걸음 멈추어서서 또 뒤를 돌아보네 / 어두운 밤 함께하던 젊은 소리가 허공에 흩어져가고 아침이 올 때까지 노래하자던 내 친구 어디로 갔나 / 머물다 간 순간들 남겨진 너의 그 목소리 / 오월의 햇살 가득 건너 우리 마음 따스하리

⑥ 불씨 (한돌 작사·작곡 신형원 노래 1982)
그 누가 나를 / 사랑한다고 해도
이젠 사랑의 불꽃 / 태울 수 없네
슬픈 내 사랑 / 바람에 흩날리더니
뜨거운 눈물 속으로 / 사라져버렸네
텅빈 내 가슴에 / 재만 남았네
불씨야 불씨야 / 다시 피어라.

* 이 노래는 5공 초기 젊은이들의 좌절감과 패배감을 노래하고 있다. '불씨'는 야망과 정열과 투쟁과 항쟁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불꽃은 타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자기변명, 자기 정당화에 불과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두고 보자는 최소한의 자존심, 바로 불씨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끝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불꽃은 꺼져버렸지만 또 타오를 수 있는 불씨만큼은 가슴 속에 살아있기에 '절대적인 힘'에 부딪쳐 물러나도 권토중래를 기약한다는 자기 위안의 의미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에 대학가에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다.

⑦ 여러분 (윤항기 작사·작곡 윤복희 노래)
윤복희의 히트곡 은 '단 한분'의 심기를 건드려 불경죄로 쓴맛을 본 대표적 노래다. 이 노래는 원래 가수 남진과의 이혼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던 윤복희를 위로하기 위해 그녀의 오빠였던 윤항기가 1979년 만든 노래였다. 1주일간 문을 닫고 버티던 윤복희는 결국 이 노래로 문을 열고 힘없이 악보를 따라 부르던 그녀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 내가 위로해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때면 / 내가 눈물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 내가 너의 벗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이들 남매는 이 단 한사람이 아닌, 세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이듬해 서울 국제 가요제에 출품했다. 오빠는 지휘봉을 잡고 동생은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대상을 거머쥐었다. 어쨌거나 은 여러사람이 좋아했던 곡이였다. 전두환 대통령도 그 '여러분'중의 한명이었다. 의 인기 덕분에 조영남과 함께 청와대 영빈관에 초대되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내외 귀빈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리였다. 그 지엄한 자리가 의 생명이 끝날 자리일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무대에 나서기 전 노래 연습을 할 때였다. 청와대측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정중하게 가사를 바꿔 달라는 거였다. 노랫말 중에 '네가' 혹은 '너는'하는 부분이 반말투여서 대통령 앞에서 부르는 것은 좀 심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복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네가' 대신 '그대' '당신'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노래의 가사를 바꾸는 것은 곡을 바꾸는거나 마찬가지라며 요구를 물리쳤다. 영빈관 객석과 무대와의 사이는 5m정도 됐다. 먼저 무대에 오른 윤복희는 내외빈이 가득한 무대를 향해 을 불렀다. 열창이었다. 그러나 그 '네가'가 결국 말썽이었다. 문제는 반말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내외를 향해 아예 손가락까지 까딱대니 대통령은 물론 주위 분위기까지 어색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불경'도 이만저만한 '불경'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 이후로 그녀에게 청와대 초청은 더 이상 없었다. 그리고 노래의 방송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의 인기는 시들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할머니께서 광주에 계시기 때문에 설날만 되면 광주에 내려가곤 합니다. 작년 이맘때 SBS가 지방에서는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래시계]를 서울에서 본 후 다시 광주 유선 방송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저도 나름대로 감동을 받으며 보았지만, 직접 광주 항쟁을 겪으신 할머니와 막내 삼촌 등 광주에 계신 친척들이 모래시계를 보며 느끼는 것들은 분명 저와 달랐습니다. 친한 친구가 총에 맞아 죽고, 옥상에서 저격수가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며 고추장을 푸러 가셨다는 할머니..... 막내 삼촌은 몇 일 동안 어두컴컴한 다락방에 숨어 할머니께서 갖다 주시는 밥으로 생활하셨다고 합니다. 아주 먼일로 여겨졌던 일들을 직접 들으면서 한 사람의 야망이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됩니다. 사람의 욕망으로 실수를 또 반복합니다. 또 언젠가 비극은 시작되겠지요. 그것은 필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반성을 합니다. 과거의 일들을 돌이켜보며 다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게 하자고 다짐을 합니다. 사람의 욕망으로 비극은 언제나 역사 속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다시 배우며 욕망을 억제하고, 모두 다 같이 행복할 수 있게 노력하려는 태도가 바로 역사를 배우는 태도가 아닐까요?
(명덕외고 96년 졸업생 불어과 김민선 )

망월동
언니 오빠들이 봄비를 맞으며 / 노래를 부릅니다.
무덤 속의 오빠들에게 / 들려 주는 노래입니다.
안경 쓴 할머니가 / 비를 맞으며
엉엉 웁니다.
무덤 속의 언니가 / 보고 싶은가 봅니다.
노래 소리를 듣고 / 무덤 속에서
제비 꽃이 피어납니다.
엉엉 우는 소리를 듣고 / 풀잎들이
할머니 머리를 만져 줍니다.
5.18 묘역에서는 / 비가 와도
깃발이 펄럭입니다.
김진경 (광주 서석국교 4학년)

아기 천사에게
태어났으면 나와 동갑인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아기 천사야! 너의 아빠가 엄마의 묘비에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라고 적은 걸 보고 나는 너를 아기 천사라고 부른다.
만삭의 어머니들처럼 불룩불룩한 무덤들이 너무 많아서 달님도 조용히 살펴간다는 망월동. 소풍 가방에 챙겨 온 치즈, 햄버거와 콜라를 먹으려다가 너의 영전에 바친다. 너도 이런 걸 좋아했을 거야.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최루탄 터지지 않은 오월이야. 5월은 언제나 그렇게 맵고 눈물 흘리며 숨어 있어야 하는 계절로만 알았지 뭐야. 쓰러진 엄마 뱃속에서 펄쩍 펄쩍 뛰었다는 말을 듣고 너라도 살려내지 못한 그 순간이 무척 안타까웠단다. 엄마가 쓰러지면 아기도 쓰러지는 것처럼 망월동이 쓰러지면 나도 쓰러지겠지? 엄마가 묻히면 아기도 따라 묻히는 것처럼 5월이 묻히면 희망도 따라 묻혀 버리겠지?
네가 태어나려다 만 세상은 너를 죽인 사람들에겐 천국 같은 곳이지만 너의 아빠와 같은 분들에겐 눈물이 마르지 않는 곳이란다. 민주화란 말은 참 슬퍼. 무덤 위에서 피어난 민들레 꽃처럼 봄비 속에서 노오랗게 떨고 있는 생명 같은 거야. 초록 풀잎들이 싱싱하게 자라는 걸 보면 무덤 속의 거름으로 태어나는 누군가가 있다는 거야. ..... 우리의 초록빛 소원을 기름지게 키우는 아기 천사야. 햄버거 봉지를 든 내 손이 부끄러워 목이 메인다. 쑥쑥 자라난 풀밭을 헤치고 불쑥 뛰어오르는 개구리 왕자처럼 깜짝 놀라게 찾아올 그날을 위하여 우리의 몸을 맑은 샘물로 채워 두어야겠어.
안녕! 나의 친구 아기 천사야.


박건호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지금은 약 4시가 넘은 새벽입니다. 이것 저것 하다보니 잘 시간을 놓쳐 뜬 눈으로 밤을 새게 되었어요. 제가 원래 좀 밤잠이 없어서요. 이 늦은 시간에 펜을 든 건 아까 보충시간때 배운 '5.18 광주사태'에 대해 몇자 적어보려구요.
제가 5.18에 대해 알게 된 건 초등학교 6학년때였어요.
그해 초에 전 광주로 전학을 갔고 또 그 무렵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김대통령이 5.18을 크게 떠들썩하게 만드는 것을 보며 많은 광주인들은 비난을 하였습니다. 저의 담임선생님께서도 5.18사태를 정치에 이용해먹으려는 수작이라면서 도덕시간마다 목에 핏대를 세우시며 말씀하셨던게 기억이 납니다. 근데 그때 당시엔 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잘 몰랐어요. 전 제가 광주에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살면서... 정말 많은 걸 경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 우리나라 정치에 대한 그들의 관심들... 어린 나이였지만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나 그들은 5.18을 잊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저의 세대들에게도 그 정신을 가르치고 그들의 아픔을 잊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들이 5.18때 희생된 많은 사람들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속 계승한다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제가 느끼기엔 그들은 뭔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아주 단편적이고 작은 경험들이었지만 제가 본 광주인들은 너무나 배타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역사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란 사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무조건적인 적개심이 전 너무 무서웠고 한편으로는 불쾌했습니다. 물론 군부가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과오는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들의 증오는 거기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호남지방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국민들 또 그 중 영남 지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호남인이 아니면 누구든 적으로 보는 닫힌 그들의 사고방식은 분명 고쳐져야 합니다.
그 당시 우리 국민은 모두가 희생자였고 그 상처를 치유하려면 국민 모두는 서로 화합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그들이 이렇게 하기란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치른 희생과 억울함에 대한 상처 역시 정치인들의 보상과 사죄 또한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피해 의식도 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너무 냉정하다고 누가 그러긴 하지만... 저의 이 말도 안되는 글을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몽사몽간에 쓴 거라 저도 정신이 없네요. 그리고 진짜 현대사를 고 3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배우게 됐는데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인 수업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 ○ 올림



******** 1987년 6월 민주 항쟁 ********

2.12 총선, 선거혁명을 이루다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를 밟고 등장한 제5공화국 (대통령 전두환)은 '정의 사회 구현'과 '의식 개혁', '선진 조국 창조'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울 좋은 명분일 뿐 실제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을 탄압하려고 경찰 등 폭압 기구를 강화하여 정권 유지의 방패막이로 삼고, 자유 민주주의를 뿌리 채 흔드는 폭력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노동관계법, 국가 보안법 등을 개악하여 국민의 기본권마저 제한하고 정치적 반대 세력을 더욱 강력히 탄압하였다. 전 정권은 1980년 말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언론 기본법을 만들어 언론을 권력의 시녀로 만들었다.

이런 속에서 1985년 2월 12일 실시된 총선의 결과는 국민들의 5공 정권에 대한 분노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준 것이었다.
1984년 11월 30일 3차 해금으로 풀려난 구신민당 출신 전직 의원들은 1985년 1월 18일 김대중·김영삼의 지원을 받아 신한민주당(약칭 신민당)의 창당 대회를 서울 앰베서더 호텔에서 가졌다. 대의원 523명이 참가한 창당 대회는 이민우 창당준비위원장을 당 총재로 뽑고, 김녹영, 이기택, 조영하, 김수한, 노승환 등 5명을 부총재로 선출하였다. 이 날의 신민당 창당은 2월 12일로 예정된 제 12대 총선을 대비한 것이었다. 신민당 창당을 계기로 민주 세력의 결집은 날로 가속화되었다.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이 같은 '신당바람'은 서서히 증폭되었다. 이는 선거일 4일 전인 2월 8일 미국 망명 2년여 만에 김대중이 귀국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정부 여당(민정당)은 김대중의 귀국을 거부하면서, 그가 귀국하면 투옥시키켔다고 위협하기도 하고, 신변 안전을 이유로 귀국을 만류하기도 하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귀국을 강행했다. 국내에서는 김영삼이 죽음을 각오한 23일간의 단식으로 흩어진 야권을 결속했고, 국외에서는 김대중의 죽음을 각오한 귀국으로 민주화 세력을 결집, 전두환 정권과의 일전 불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선거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선거 결과 지역구 총 의석수 184석 중 신민당은 92개 지구당에서 50명이 당선되어 기염을 토했다. 집권당인 민정당이 87석을, 그리고 종래의 제1야당이었던 민한당은 26석에 불과한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이에 따라 민정당은 전국구 61석을 합쳐 148석, 신민당은 17석을 합쳐 67석, 민한당은 9석을 합쳐 35석이 되었다. 이로써 신민당은 민한당을 물리치고 창당한지 불과 25일만에 제1야당으로 부상하였다.

당시 신민당이 12대 총선에서 '신당 돌풍'을 일으킨 배경에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정치에 대한 반감을 배경으로, 체제 내에 안주해 온 제도권 정당에 대한 국민의 회의와 반발이 깊어진데다 야당다운 야당이 있어야겠다는 국민 의식이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신민당은 김대중·김영삼의 권유에 따라 민한당의 인사들이 대거 입당함에 따라 일시적이나마 야권 통합을 이룩하게 되었다. 신민당은 5월 9일 민한당 부총재 이태구의 입당으로 헌정 이후 최대 의석인 103석을 확보, 거대 야당으로 발돋움하였다. 이런 힘을 배경으로 국회가 열리자 신민당은 직선제 개헌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민주화 운동 세력도 군사 독재 정권 타도와 이를 위한 직선제 개헌을 적극 주장하였다. 집권세력은 개헌을 요구하는 대중 집회를 물리적 힘으로 탄압하면서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사회 혼란을 조성하는 행위로 매도하였다.

권인숙과 박종철

권인숙은 대학 출신으로 노동 운동에 뛰어들어 비합법단체에서 활동하던 여성이다. 그녀가 1986년 6월 부천 경찰서에서 추악한 성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다. 권인숙 의 진솔하고 도도한, 그리고 당당한 눈물의 법정 발언은 독재 정권의 부도덕성과 폭력성을 들추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해를 넘기고 이번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박종철은 반정부운동을 하던 친구의 행방을 대라는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들의 요구에 불응하며 끔찍한 고문을 견디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1987.1.14) 다음 날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이 죽은 까닭을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 같이 있던 치안 본부 대공 담당 차장은 "책상을 '탁' 치니 박군이 '억!'하고 쓰러졌다."라고 덧붙여 설명하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위 발표는 시민적 공분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어느 시민은 " 박군 관계 신문 기사를 보면서 부부가 함께 울어버렸던 우리들의 아픔을 당신들은 정녕 아는가?"라는 글을 언론사에 보내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국민들은 80년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등장한 제 5공화국을 자신들을 대표하는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국민들의 억눌린 감정은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했다. 관련자 처벌 및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 시위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정국은 중대 고비를 맞게 된 것이다.

4.13 호헌 조치 그리고 6월....

이런 상황 속에서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평화적 정권 교체란 명분을 앞세워 국민의 여망이던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4.13 호헌(護憲)조치'를 선언하였다. 4.13 호헌 조치 뒤에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 대중의 결의는 더욱더 강해졌다. 각계 각층에서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시국성명을 내고, 각계와 각 지역을 대표한 2200여 명의 발기인이 참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다.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살인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 대회를 6월 10일 대규모로 벌이기로 결정했다. 6월 10일 그날은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날이기도 했다. 6월 5일 국민운동본부는 국민대회 행동 요강을 발표한다.

.. 2.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을 기하여 전 국민은 있는 자리에서 애국가를 제창한다. 애국가가 끝난 후 자동차는 경적을 울린다. 전국 사찰, 성당, 교회는 타종을 한다. 국민들은 형편에 따라 만세 삼창(민주헌법 쟁취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을 하거나 제자리에서 1분간 묵념을 하며 민주주의 쟁취의 결의를 다진다
3. 경찰이 폭력으로 대회 진행을 막는 경우 전국민은 비폭력으로 이에 저항한다. 연행을 거부한다. 연행되면 일체의 묵비권을 행사한다.
4. 전국민은 오후 9시부터 10분간 소등을 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깬 민정당의 6.10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항의한다....
7. 또 한번 부탁하거니와 6.10 국민대회는 철저하게 평화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바라며 폭력을 사용하거나 기물 파손 등을 자행하는 사람은 국민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세력으로 규정한다....

이런 움직임에 당황한 정부는 6월 10일 며칠 전부터 6.10대회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경찰 병력을 총동원하여 이를 원천봉쇄 한다는 방침을 세워 놓았다. 이에 따라 6월 7일부터 주요 대도시에서 검문·검색이 강화되었으며, 인쇄소 등에 대한 경찰의 경계와 수색도 심해졌다. 또한 전국 경찰에 갑호 비상을 발령하는 한편 버스·택시 회사에 경음기를 떼어내고 교대시간도 바꾸도록 종용하였다. 심지어 행인들의 애국가 합창을 막기 위해 오후 6시에 시행하던 애국가 옥외 방송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대회 전날인 9일부터는 민주인사에 대한 가택 연금을 실시했으며 전국 110개 대학을 전격 수색하여 시위용품을 압수하기도 했다.

드디어 6월 10일이 밝았다.
오전 11시 15분 서울시 송파구 잠실 체육관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12 30분 채문식 전당대회 의장이 투표 결과를 발표한 뒤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음을 선언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후보와 손을 잡고 연단 앞쪽으로 걸어나가 번쩍 치켜들었다. 그것은 신군부 내의 권력 승계를 위한 한판의 축제였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체육관 밖에서는 또 하나의 '축제' 가 진행되고 있었다.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서울시청 건물에 걸린 대형 시계의 숫자가 12:00로 변하는 순간 도로 건너편 성공회 대성당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종탑 꼭대기에 잿빛 가사를 걸치 스님(지선스님)과 연한 보라색 블라우스에 쉬어링 치마를 입은 30대 중반의 여성(소설가 유시춘)이 나타났다. 스님이 마이크를 잡고 성명서를 낭독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이름으로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이 무효임을 선언한다..."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를 대표하여 종탑에 올라간 그들은 그날 오후 6시부터 시작될 6.10국민대회의 성공을 예감했다.

드디어 6시 약속된 시간이 되자 거대한 함성이 도심을 울렸다. 구호는 '호헌 철폐', '독재타도'.
학생들이 먼저 나서고 시민들이 속속 동참하기 시작했다. 연세대생 이한열이 전날인 9일의 시위 도중 최루탄 파편에 맞아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로 인해 불에 기름을 부은 듯 규모가 커지면서 급속히 전개되어갔다. 차들은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시위대와 경찰은 밀고 당기는 공방전을 계속했다. 거리는 마치 포연에 휩싸인 전쟁터 같았다. 6.10국민대회는 서울 부산 대구 공주 인천 대전 등 대도시를 비롯하여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 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가두 시위로 발전하였다.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가 점차 격화되면서 시청 한 곳, 파출소 열 다섯 곳, 민정당 지구당사 두 곳 등이 파손되었다. 경찰은 그날 전국에서 3831명을 연행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명동성당에서는 8백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농성 투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6월 10일 밤부터 시작되어 15일까지 5박 6일 동안 진행된 명동성당 농성 투쟁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들의 희망이었다.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그 희망의 파문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시민들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사람들에게 성금은 물론 빵, 음료수, 의약품 등을 전달하였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던 회사원들은 그 자리에서 가두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남대문 시장 상인들도 성당에서 농성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옷을 보냈다.


⊙ 민주발전을 위해 써 주십시오. 고등학생이라 아무 것도 드릴게 없어요. 지갑을 털어 작은 정성을 보냅니다.
⊙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함께 하는 데서 항상 여러분에게 못 미쳤던 평범한 샐러리맨 69명과 식당 주인 아저씨로부터
⊙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몸은 함께 하지 못하나 마음만은 당신들과 함께 합니다. 당신과 같이 피를 흘리지 못하나 눈물만은 함께 흘립니다.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당신들은 진정 우리의 '희망'이라고.
⊙ 장한 일 하십니다. 힘과 용기를 가지십시오. 시민 일동
⊙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애국적인 투쟁에 따른 희생을 모르는 척 하고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 몹시 부끄럽고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은 괴로움이 자꾸 치밀어 올라와 어느 모퉁이에서 간절히 동참하고 있는 마음 약한 40대 중반의 못난 선배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부탁이 있소. 폭력은 금물이오. 국민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오. 또 법의 가면을 쓴 폭력이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오. 정부당국의 발표를 보면 80년 5.17때의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하오. 이번만은 절대로 그러한 우를 범해서 반역자들에게 빌미를 주지 맙시다. 말없이 지켜보는 많은 국민은 애국적인 학생들을 지지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부디 건강을 비오.

이렇게 명동 성당에서의 농성 투쟁이 6월 민주화 운동의 불길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운동본부는 6월 18일 최루탄 추방대회를 개최한데 이어서 군대 동원의 가능성에 대한 정부의 경고에도 굽히지 않고 6월 26일 [국민평화 대행진]이라는 조직된 시위를 주도하여 1백만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런 국민들의 거대한 힘에 놀란 정권은 '직선제 개헌' 및 광범한 민주화 조치 등을 보장하는 [국민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위한 특별선언(일명 '6.29선언')을 내놓게 된다. 우리 국민이 거둔 또 하나의 승리였다.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각계 각층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여 이 나라의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정부 역시 국민들로부터 슬기와 용기와 진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역사와 국민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6.29선언 중)



6월 시민항쟁 그 후....

6월 항쟁의 거친 파도 속에서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시민과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통령 직선제에 동의함으로써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6.29선언은 여당이 국민의 지지를 못받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대단히 모험적인 조치였다. 노 대표가 발표한 8개항에는 김대중의 사면복권, 언론 자유, 대학 자율권 지지 등이 포함돼 있었다. 노 대표의 핵심 측근에 따르면 광주사태에 대한 공식 사과도 포함시키려 했으나 군부의 반발을 우려해 마지막 순간에 철회했다. 노대표는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건의 형식으로 6월 29일 이 제안을 전격 발표했다. 그는 "만에 하나라도 위의 제안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저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와 당대표 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비장한 어조로 밝힌 후 국립 묘지를 참배했다. 그리고 전두환 대통령은 이틀 후 노대표의 계획을 지지했다.
6.29 선언은 국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노 대표가 대담한 조치를 취함에 따라 전대통령도 마지못해 동의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노대표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기도 했다. 전대통령은 그런 소문에 전혀 반박하지 않았으며 노 대표의 결단에 자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4년뒤 6.29선언은 전두환 대통령의 '작품'이고, 노대통령은 처음에는 한사코 반대하다가 결국 '연출'을 맡게 된 것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9선언은 1987년 6월의 위기를 종식시켰고, 한국의 정치개혁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6.29선언으로 정치적 돌파구를 마련한 후 치러진 12월의 대통령 선거는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근소한 차이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당선된 이래 처음으로 치러진 직선제 선거였다.

노태우 후보는 직선제를 이끌어낸 역할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그의 軍 배경 때문에 대선에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군사 정권에 몸 담은 전력은 그만큼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노태우 후보는 1932년 12월 대구 부근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던 부친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편모 슬하에서 성장했다. 한국 전쟁 초기 단기간 사병으로 복무한 뒤 그는 육군사관학교의 첫 번째 4년제 정규코스인 11기로 입학했다.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 당시 9사단장이었던 그는 전방에서 병력을 빼내 서울로 이동시킴으로써 이 거사의 핵심적인 지원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는 수경사 사령관, 보안사 사령관 등을 지냈다.

노태우 후보에 맞설 야당 정치인으로 양金(김영삼, 김대중)이 국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뜻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서로 협력할 것을 모색했다. 그러나 곧이어 김대중씨는 자신의 본거지인 광주에서 대규모 군중 집회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대통령 후보처럼 전국 유세를 시작했다. 김영삼씨도 자신의 본거지인 부산에서부터 시작해 같은 행동을 취했다. 양金은 오랜 세월 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해왔다는 사실을 내세우며 각각 자신이 야당 단일 후보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선거에서 이길 것으로 확신했다. 양金은 그들의 단일후보 약속을 뒤로하고 둘 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김영삼 후보는1928년 12월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어장 사업으로 성공한 부친은 그를 부산의 명문 고등학교와 서울대로 유학을 보냈다. 25세 때 자유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최연소 당선 기록을 세운바 있다. 곧이어 그는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에 항거해 야당인 민주당 창당에 참여함으로써 평생동안 민주주의 옹호에 나서게 된다. 1960년 북한 공비에 의해 그의 모친이 총살되는 비극 때문에 북한에 대해 확고한 입당을 견지했으며 야당 정치인 탄압에 자주 이용되는 색깔론 시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기득권 층이라는 사실 때문에 중·상류층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1987년 대선에서 주요 후보 3명 가운데 가장 정상적인 정치인에 가까웠다. 야당 지도자로서 김영삼은 오랜 세월 동안 굴복하지 않고 투쟁해왔다. 박 대통령 시절 그는 군부통치에 반대해 투옥됐으며 1969년에는 3선개헌 추진에 반대하다가 황산 투척을 당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김영삼은 공개석상에서 박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미국의 개입을 요청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김영삼 후보는 민주개혁을 주장하다 2년 동안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23일간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대중 후보는 1924년 1월 전라남도의 작은 섬 하의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오랜 라이벌인 김영삼과 달리 유복한 가정 출신이 아닌 그는 한국 엘리트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1971년 대선 당시 야당 후보 지명전에서 김영삼을 누르고 승리한 김대중은 여당 측의 극심한 선거부정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에 맞서 46%를 득표함으로써 최고 정치 지도자 대열에 뛰어 올랐다. 박대통령은 그를 증오했고 두려워했다. 박대통령 시절 중앙정보부는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암살하려다가 사정이 여의치 못해 한국으로 데려왔다. 그후 김대중은 가택연금을 당했고 나중에는 또 선동죄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박대통령이 시해된 후 들어선 전대통령도 탄압을 계속했다. 전대통령은 김대중을 체포해 날조된 혐의로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결국에는 레이건 미 행정부와 가진 협상으로 그를 석방해 미국 망명에 오르게 했다. 1985년 자진 귀국한 뒤 또다시 가택 연금을 당했다. 그리고 1987년 6.29선언으로 모든 혐의를 벗고 정치적으로 사면 복권됐다. 대선 전 박희도 육군 참모총장은 김대중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한다는 군부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그에 따라 김대중이 당선되더라도 군부 지도자들이 그의 취임을 용납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으며 군부가 김대중을 살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같은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36%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영삼 (28%)과 김대중(27%)은 각각 야당 표를 양분했다. 노태우 후보는 치열하게 전개된 직선제 선거를 통해 당선됨으로써 전두환 대통령에게 결여됐던 정치적 정통성을 확립했다. 그에 따라 노대통령은 임기 동안 전임자인 전대통령에 비해 언론자유를 확대하고 기업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줄일 수 있었다. 노태우 후보의 승리는 또 한국이 강경 반공노선을 완화하고 동유럽 공산국가, 소련, 중국 등과 관계를 발전시켜 결국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소위 '북방외교') 국제 사회에서 북한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동북 아시아의 전략적 상황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우리 나라 시민 사회 형성 과정에서 발생한 다음의 사건들에 대한 공통적인 의의를 설명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 1960년의 4.19혁명 * 1973년의 유신 반대 투쟁
* 1980년의 광주민주화 운동 * 1987년의 6.10민주화 항쟁

① 과거 군사 정부에 대한 저항 운동이었다.
②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 대한 저항 운동이었다.
③ 정치 권력의 정당성에 문제를 제기한 시민 운동이었다.
④ 정치적 사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를 총괄한 시민 운동 차원으로 확대된 사건들이다.
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이다.

노래로 보는 5공의 몇 단면..

① 전두환 대통령과 '여러분'

윤복희의 히트곡 은 '단 한분'의 심기를 건드려 불경죄로 쓴맛을 본 대표적 노래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때면
내가 눈물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되리라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나는 나는 나는 나는 너의 기쁨이야.....

원래 이노래는 1979년 가수 윤복희가 세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가스펠송으로 작사 작곡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 국제 가요제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어쨌거나 은 여러사람이 좋아했던 곡이였다. 전두환 대통령도 그 '여러분'중의 한명이었다. 의 인기 덕분에 조영남과 함께 청와대 영빈관에 초대되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내외 귀빈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리였다. 그 지엄한 자리가 의 생명이 끝날 자리일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무대에 나서기전 노래 연습을 할 때였다. 청와대측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정중하게 가사를 바꿔 달라는 거였다. 노랫말중에 '네가' 혹은 '너는'하는 부분이 반말투여서 대통령앞에서 부르는 것은 좀 심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윤복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네가' 대신 '그대' '당신'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노래의 가사를 바꾸는 것은 곡을 바꾸는거나 마찬가지라며 요구를 물리쳤다. 영빈관 객석과 무대와의 사이는 5m정도 됐다. 먼저 무대에 오른 윤복희는 내외빈이 가득한 무대를 향해 을 불렀다. 열창이었다. 그러나 그 '네가'가 결국 말썽이었다. 문제는 반말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내외를 향해 아예 손가락까지 까딱대니 대통령은 물론 주위 분위기까지 어색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불경'도 이만저만한 '불경'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 이후로 그녀에게 청와대 초청은 더이상 없었다. 그리고 노래의 방송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의 인기는 시들해지고 말았다.

② 정수라의

1980년대 초반 가수들은 앨범을 낼 때마다 앨범 마지막에 건전가요를 한곡씩 의무적으로 실어야만 했다. 5공화국이 '사회 정화 업무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강요한, 어느 나라에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관제였다. 이른바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자는 뜻이었다. 이를 관할하는 곳이 이른바 사회정화위원회라는 데였다. 이 위원회는 1983년 '국민들에게 주인의식을 고취시키자'는 사뭇 거창한 의도하에 한국방송공사와 함께 건전가요만으로 옴니버스앨범을 제작키로했다. 박건호씨등 중견 작사, 작곡가들이 곡을 만들고 가수도 직접 추천하는 등 앨범 제작 실무를 맡았다.
은 이 과정에서 태어났다. 정부에서는 이 노래를 조용필이나 민해경이 부르기를 원했다. 이왕이면 톱스타가 부르는게 홍보 효과가 크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박건호씨는 정수라를 택했다.

(박건호 작사/ 김재일 작곡 1983)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
우리의 마음 속의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건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인건 될수가 있어
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을 노래 부르네
아 - 우리 대한민국 아 - 우리 조국
아 -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도시엔 우뚝 솟은 빌딩들 농촌엔 기름진 논과 밭
저마다 자유로움 속에서 조화를 이뤄가는 곳
도시는 농촌으로 향하고 농촌은 도시로 이어져
우리의 모든 꿈은 끝없이 세계로 뻗어가는 곳

그러나 이 노래는 처음에는 별 신통한 반응이 없었다. 한달쯤 지나자 반응은 운동장에서 왔다. 응원가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었다. 건전가요라는 비인기종목(?)의 핸티캡을 벗어던지고 은 그해 정수라에게 'MBC 10대 가수 신인상'을 안겨 줬으며 40만장의 앨범이 팔려나가는 진기록을 남겼다. 1983년 만들어진 이 노래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온 국민의 감정을 하나로 승화시켰다. 이른바 '관제 노래'임에도 이 이처럼 히트를 하게 된 것은 상당 부분 당시 사회 분위기 덕이기도 했다. 5공 독재가 무르익던 1983년, 1984년 무렵엔 KAL기 피격사건, 버마 아웅산 폭파사건, 북한의 남침땅굴 발견 등 메가톤급 공안 사건들이 연거푸 터지면서 국민들에겐 어느때보다 반공의식이 고조되었다. 이런 와중에 의 탄생은 불안한 국민감정을 하나로 묶는데 안성마춤이었다. 그리고 방송사에서도 정책적으로 이 노래를 꾸준히 내보냈다.

*비교 ① ( 1990.4 정태춘 작사·작곡 )

우린 여기 함께 살고있지 않나 / 사랑과 순결이 넘쳐흐르는 이 땅
새악시 하나 얻지 못해 농약을 마시는 / 참담한 농촌의 총각들은 말고
특급 호텔 로비에 득시글거리는 / 매춘 관광의 호사한 창녀들과 함께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 기름진 음식과 술이 넘치는 이 땅
최저임금도 받지 못해 싸우다가 쫓겨난 / 힘없는 공순이들은 말고
하룻밤 향락의 화대로 일천만원씩이나 뿌려대는
저 재벌의 아들과 함께 / 우린 모두 풍요롭게 살고 있지 않나
우린 모두 만족하게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 저들의 염려와 살뜰한 보살핌 아래
벌건 대낮에도 강도들에게 / 잔인하게 유린 당하는 정숙한 여자들은 말고
닭장차에 방패와 쇠몽둥이를 싣고 신출귀몰하는 우리의 백골단과 함께
우린 모두 안전하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모두 평화롭게 살고있지 않나
아, 우리의 땅, 아, 우리의 나라....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 양심과 정의가 넘쳐 흐르는 이 땅
식민독재와 맞서 싸우다 / 감옥에 갔거나 어디론가 사라져간 사람들은 말고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 저 민주인사와 함께
우린 너무 착하게 살고 있지 않나 / 우린 바보같이 살고 있지 않나
아, 대한민국, 아, 우리의 공화국

우린 여기 함께 살고 있지 않나 /거짓 민주, 자유의 구호가 넘쳐흐르는 이 땅
고단한 민중의 역사 / 허리 잘려 찢겨진 상처로 아직도 우는데
군림하는 자들의 배 부른 노래와 피의 채찍 아래
마른 무릎을 꺽고 / 우린 너무도 질기게 참고 살아왔지
우린 너무 오래 참고 살아왔어
아, 대한민국, 아, 저들의 공화국!
아, 대한민국, 아, 대한민국......

*비교② ( 신중현 작사/ 작곡 )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마음
나뭇잎 푸르게 강물도 푸르게 아름다운 이곳에 네가 있고 내가 있네
손잡고 가보자 달려보자 저 광야로
우리들 모여서 말해보자 새희망을
하늘은 파랗게 구름은 하얗게 실바람도 불어와 부푸는 내마음
우리는 이땅위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곳에 자랑스런 이곳에 살리라
찬란하게 빛나는 붉은 태양이 비추고 하얀 물결 넘치는 저바다와 함께있네
그 얼마나 좋은가 우리 사는 이곳에 사랑하는 그대와 노래하리
오늘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말해야지 먼 훗날에 너와 나 살고 지고
영원한 이곳에 우리의 새꿈을 만들어 보고파
봄 여름이 지나면 가을 겨울이 온다네
아름다운 강산 너의 마음 나의 마음 나의 마음 너의 마음
너와 나는 한마음 너와 나
우리 영원히 영원히 사랑 영원히 영원히
우리 모두다 모두다 끝없이 다정해.

( 1973년 청와대로부터 신중현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전화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젊은 혈기의 신중현은 세상돌아가는 판세와는 무관하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5분 뒤 공화당에서 전화가 또 걸려 왔다. 역시 같은 내용의 전화였다. 정치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상대의 끈질긴 설득을 물리쳤다. 그런 일이 있고 2개월 뒤 신중현은 을 발표했다. 한 사람의 대통령을 위한 노래보다 이왕이면 온 국민이 즐겨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자는 의도에서였다. )

③ (한돌 작사·작곡 신형원 노래 1982)

그 누가 나를 / 사랑한다고 해도
이젠 사랑의 불꽃 / 태울 수 없네
슬픈 내 사랑 / 바람에 흩날리더니
뜨거운 눈물 속으로 / 사라져버렸네
텅빈 내 가슴에 / 재만 남았네
불씨야 불씨야 / 다시 피어라.

* 이 노래는 5공 초기 젊은이들의 좌절감과 패배감을 노래하고 있다. '불씨'는 야망과 정열과 투쟁과 항쟁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 불꽃은 타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비록 자기변명, 자기 정당화에 불과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두고 보자는 최소한의 자존심, 바로 불씨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끝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불꽃은 꺼져버렸지만 또 타오를 수 있는 불씨만큼은 가슴 속에 살아있기에 '절대적인 힘'에 부딪쳐 물러나도 권토중래를 기약한다는 자기 위안의 의미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에 대학가에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대통령 바이러스 인터넷 강타!
(조선일보에서 발췌 인용)

1. 이승만 바이러스
파일들이 자꾸 하나로 합쳐진다. 합쳐진 파일을 실행시키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라는 노인의 목소리가 나온 후 하드 디스크가 저절로 조각조각 분열된다.

2. 박정희 바이러스
매년 5월 16일이 되면 활동을 하는 아주 질긴 바이러스다.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총소리와 군화 발자국 소리가 나며 간간이 [그때 그 사람]이란 노래 가락이 흘러 나온다. 김재규 백신을 쓰면 100% 치료가 가능하다.

3. 최규하 바이러스
바이러스 중에서 가장 용량이 크다. 하드 디스크 내의 파일을 다 잡아먹고 화면에 오리발을 출력하는 것이 대표적인 증상. 바이러스를 구성하고 있는 파일의 맨 끝 부분을 들여다 보면 [묵묵부답]이라는 단어가 있다.

4. YS 바이러스
루트 디렉토리에 [BLUE - HOUSE]라는 디렉토리를 만든다. 만약 이 디렉토리를 건드리면 화면에 칼국수 면발이 가득 차면서 모든 문서 파일의 글들이 경상도 사투리로 바뀐다.

5. 노태우 바이러스
백신프로그램을 가장한 바이러스다. "나는 보통 백신"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면서 무려 5천메가의 파일을 지워버린다. 비자금 파일을 들여다 보면 [믿어 주세요]라는 단어가 보인다.

6. 전두환 바이러스
박정희 바이러스 이후 등장한 가장 강력한 바이러스다. 12월 12일이 되면 "하나회. EXE"파일을 만들어 CPU를 장악해버린다. 5월 18일이 되면 CPU를 정상화시키려는 파일들을 무차별 삭제한다. 이 바이러스는 활동할 때마다 [왜 자꾸 나만 갖고 그래?]라는 볼멘 소리의 메세지가 나온 후 사과 박스가 화면에 가득 찬다. 그래픽 보기 유틸리티로 불러들여 보면 박스안에 현금이 가득하다.

7. 최불암 바이러스
다른 바이러스와는 달리 반찬값을 절약해 주는 양성 바이러스. 감염되면 오히려 이득을 볼 수 있다. 컴퓨터 본체에서 갑자기 흙이 떨어지는 증상이 가장 대표적. 이때 당황하지 말고 컴퓨터 케이스를 열어보면 저녁 찬거리에 좋은 신선한 [파]가 가득 차 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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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1960)

혁명의 배경(3.15 부정선거에서 4.19혁명까지)

이승만 치하에 갖은 부정부패와 공무원의 무능과 경제는 토탄에 빠져들었고 315일 부정선거로 인한  재집권야욕을 민주학생들의 의거가 발생 419일 그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여  이승만정권이 물러났고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

윤보선씨가 4대 대통령으로 취임  이에 사회는 극도로 혼란 경제는 마비된 상태이고 식량난에 국민들이 끼니를 때우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사회불안이 가중된때 군사쿠테타를 로이어지게되었음.

 

의의

419 혁명은 민주 학생에 의거 주도되어 전 국민으로 확산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에의하여 정권이 교체된 역사의 가장큰 의의를 갖고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큰의미를 갖고있는 혁명을  정치가들의 분열과 야합으로 국민은 더 불안이 가중되어 일년후인 1961 516일 군사혁명으로 이어지게된 비극이 있습니다.

 

5.18민주화 운동 (1980)

1980 518일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전두환 일당이 집권을 공고히하고 반대파를 물리치기위한 계엄령확대 김대중을 광주소요배후인물로 지목하여 구속 이런 이유로 광주 시민들이 궐기 군사독재 타도 군부집권물러나도록 요구하자 이에 강압진압하여 희생을 가져오게된 근대사 초유의 학살 사건

신 후 등록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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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1960)

혁명의 배경(3.15 부정선거에서 4.19혁명까지)

이승만 치하에 갖은 부정부패와 공무원의 무능과 경제는 토탄에 빠져들었고 315일 부정선거로 인한  재집권야욕을 민주학생들의 의거가 발생 419일 그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여  이승만정권이 물러났고 과도 정부가 수립되어

윤보선씨가 4대 대통령으로 취임  이에 사회는 극도로 혼란 경제는 마비된 상태이고 식량난에 국민들이 끼니를 때우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사회불안이 가중된때 군사쿠테타를 로이어지게되었음.

 

의의

419 혁명은 민주 학생에 의거 주도되어 전 국민으로 확산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에의하여 정권이 교체된 역사의 가장큰 의의를 갖고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큰의미를 갖고있는 혁명을  정치가들의 분열과 야합으로 국민은 더 불안이 가중되어 일년후인 1961 516일 군사혁명으로 이어지게된 비극이 있습니다.

 

5.18민주화 운동 (1980)

1980 518일 군사쿠테타로 집권한 전두환 일당이 집권을 공고히하고 반대파를 물리치기위한 계엄령확대 김대중을 광주소요배후인물로 지목하여 구속 이런 이유로 광주 시민들이 궐기 군사독재 타도 군부집권물러나도록 요구하자 이에 강압진압하여 희생을 가져오게된 근대사 초유의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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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입니다.

 

원인

 

4.19혁명은 대통령 종신집권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의 지나친 정권욕심과 독재성, 그를 추종하는 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누적된 정치적 불만이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시에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리고 1960.3.15 제 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전개

 

4·19혁명 전의 몇 주 동안 주로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선거 및 자유당과 경찰의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상황의 급박성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또한 해결 능력도 결여된 상태였다.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해 이승만은 4월 15일, 그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의 이런 담화는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했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변했다. 전국적으로는 부산·대구·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주요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그날 서울에서만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1960.4.25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명은 선언문을 답변확정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고 1960.4.26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시위군중은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여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을 하야했다. 혁명의 여운은 이기붕 일가족의 자살 과 이박사의 망명이란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허 정 과도내각의 성립으로 일단 막을 내리었다.

4.19혁명의 한계

 

4.19혁명에 의해 과도 정부인 허 정 내각이 들어섰고 60년 7월 29일 총선에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 독재를 청산하고자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개막을 기대했으나 61년 5.16 쿠데타로 그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따라서 4.19는 후속과업을 성취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으로서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보기도 한다.

 

4.19 혁명의 의의

 

4.19혁명은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이 집단행동으로 휘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변전하고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이었다.

 

첫째,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 볼수 있다.

 

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삭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 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 따른 투쟁이 바로 4.19혁명으로 나타난 점이다. 4.19혁명을 한국 민주투쟁사의 제일보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4.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하였다.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학생) 파워(student power)’의 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년 3.1독립운동과 26년 6.10만세사건, 그리고

29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넷째,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 또 하나의 귀중한 각성과 교훈을 안겨준 계기가 되었다.

 

4.19혁명의 고귀한 피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가장 민주적이며 국민적 신망을 받는 국정이 이루어지고 참다운 민주주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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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입니다. 원인4.19혁명은 대통령 종신집권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의 지나친 정권욕심과 독재성,그를추종하는자유당의 부패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누적된 정치적 불만이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시에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리고 1960.3.15 제 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전개4·19혁명 전의 몇 주 동안 주로 지방도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이 불법선거 및 자유당과경찰의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인 행위에 항의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류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상황의 급박성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또한 해결 능력도 결여된 상태였다.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해 이승만은 4월 15일, 그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의 이런 담화는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했다.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변했다. 전국적으로는 부산·대구·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주요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했다. 그날서울에서만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1960.4.25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명은 선언문을 답변확정하고 학생,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고 1960.4.26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시위군중은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여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을 하야했다. 혁명의 여운은 이기붕 일가족의 자살 과 이박사의 망명이란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허 정 과도내각의 성립으로 일단 막을 내리었다. 4.19혁명에 의해 과도 정부인 허 정 내각이 들어섰고 60년 7월 29일 총선에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 독재를 청산하고자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개막을 기대했으나 61년 5.16 쿠데타로 그 기대는 무너지고 말았다. 따라서 4.19는 후속과업을 성취하지 못한 미완의 혁명으로서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보기도 한다.

4.19혁명은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이 집단행동으로 휘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변전하고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 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를 기록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이었다. 첫째,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의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을 의미한 것이라 볼수 있다.

국민은 해방과 더불어 도입되기 시작한 서구민주주의가 그 제도와 운영절차를 그대로 모방하거나 이삭만 하면 그대로 민주주의 가 정착되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 직접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나 운영절차의 모방만으로 자기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투쟁을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러한 국민적 각성에따른 투쟁이 바로 4.19혁명으로 나타난 점이다. 4.19혁명을 한국 민주투쟁사의 제일보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4.19혁명은 공권력의 횡포에 대한 국민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원리를 그대로 입증하였다.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받지 못하는 정권은 결코 존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셋째, 20세기 후반 전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학생) 파워(student power)’의한국적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 학생들은 19년 3.1독립운동과 26년 6.10만세사건, 그리고 29년 광주학생사건을 통해서 강한 저항의식과 열렬한 애족애국심을 발휘한 빛나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4.19혁명은 그러한 전통적 저항의식이나 애국심의 발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넷째, 4.19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미완의 상태로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국민에게또하나의귀중한각성과교훈을안겨준계기가되었다.4.19혁명의고귀한피의희생이바탕이되어가장민주적이며국민적신망을받는국정이이루어지고참다운민주주의발전을기약할수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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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 과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알고싶습니다^_^;; 먼저 4.19혁명) 원인) 과정) 결과) 너무 길게도 말고 너무... *발생과정(=경과)과 결과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4.19혁명,5.18광주민주화운동,6....

4.19혁명,5.18광주민주화운동,6.10민주항쟁. 사건원인,배경,경과,결과,영향,의미좀요 내공 다겁니다 제발 부탁... 북한에 대해 확고한 입당을 견지했으며 야당 정치인 탄압에 자주...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6월민주항쟁의 운동경과 그... 운동결과를 정리해주세요. 내공걸구요. 최대한 빨리... 함 원인 : 제 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에 의한...

유신헌법철폐,5.18광주민주화운동...

... 수행평가라고,,, 4.19혁명,유신헌법철폐,5.18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 의 배경,원인,결과에 대해 좀 알려주세요!! 기간은 내일 오후까지...자필로 A4 한장 반에 적어야 해서......

4.19혁명 5.18민주화 운동, 6월민주항쟁

4.19혁명 5.18민주화 운동, 6월민주항쟁 중에 하나라도 그 사건에 관한 내용 길게 써주세요ㅜㅜ 1) 10.26이란? 1979년 10월... 전복 다른 원인에 의해 사망했고, 13명이 총상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