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멸망과 조선의 불교박해

고구려의 멸망과 조선의 불교박해

작성일 2005.04.17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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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이 그러는데.

 

조선이 중들을 박해하고 유교를 숭상한 이유가

 

고구려의 멸망에 관련이 있다고 해서 올립니다.

 

조선이 계속 숭상해온 불교가 아닌 유교를 숭상한 이유를 가르쳐 주세요.


#고구려의 멸망과 부흥운동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가 아닌가요??

 

고구려랑 조선은 관련이 없답니다 ^^ 아이들이 잘못 말했겠지요

 

어쨋든 고려는 불교를 숭상하고 조선은 유교를 숭상했는데요??

 

가장 먼저 나라의 기반을 다지기 위함과, 또 고려의 풍습을 모두 지우는데 공을

 

들이기 위한것입니다..

 

또 고려후기의 중들은 자비의 정신보다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었고, 부처님은 단지

 

신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라는 사람들의 생각이 퍼졌습니다 즉 불교의 정신만으로는

 

나라를 이끌수가 없고 전란시에도 불교의 정신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죠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고구려사...

 

 
1. 기원

  “天帝와 水神(河伯)의 혈통을 이어받은 朱蒙이 하늘신과 地母神으로부터 부여받은 神的 權能을 가지고 여러 곤경을 극복하고, 卒本地域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인 주몽설화의 주된 줄거리이다. 이러한 내용으로써 일반민들에게 고구려 건국의 당위성을 확고히 하고, 지배자들의 통치의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고구려 건국의 주체는 이주민이었던 주몽집단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존재해 있었던 압록강 중류에 위치한 선주토착집단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건국은 이 집단들의 일원화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기원전 2세기 중엽에서 기원전 3세기 초경 사이 압록강 중류유역에 주민집단이 형성되어 '那'를 이루었다. 나집단 간의 교류와 상쟁이 계속되고, 주변국인 위만조선이나 한군현의 압력을 받으며 결속력을 키워온 결과 예전보다 강력한 결속력을 지닌 연맹체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독자적 정치세력을 지닌다는 의미의 ‘那國’이라 할 수 있으며, 나국의 결집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那國聯盟體’라 할 수 있다. 각각의 那部는 자체의 관원과 독자적 군사력을 지니고 대외정복을 하였으나, 계루부의 통제를 받았다. 이처럼 나부는 자치권을 가졌으나 계루부의 통제를 받는 ‘하부단위정치체’였고, 계루부는 왕권으로 성장하였지만 나부를 통해야 하는 한계를 지녔다. 계루부와 나부 이 둘은 고구려를 성립시킨 주체로서 당시 권력의 두 축이었다. 따라서 나부를 매개로 통치력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那部統治體制’, 사회가 전반적으로 나부중심으로 운영되었다는 의미인 ‘那部體制社會’라 할 수 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諸加들이 나부의 長으로서 나부를 세력기반으로 중앙정치에 참여하였다. 즉 제가회의에 참여함으로써 국왕보다 하위에 있었지만 국정을 왕과 함께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가는 자신의 관인들을 국왕에게 보고해야 하는 등 왕은 우위에 위치해 있었다. 이처럼 전기고구려는 국내외문제는 왕의 주도 아래 내부를 대표하는 귀족들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이원적 형태였다. 이민족과 토착집단사이의 분열과 융합, 결국에 이들은 하나의 국가체제로 형성하게 된다. 그 바탕에는 선진기술이었던 청동기나 철기문화가 경제적으로 좀더 풍요로운 삶을 선사해 주었기 때문이다.

2. 성장

  고구려는 계루부에 의해 각 지역의 독자적인 정치체들을 那部(나부)로 편제하며 국가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계루부왕권과 통제를 받는 나부가 권력의 양축을 이루며 공존했다. 초기 국가체제는 계루부왕권과 나부의 역관계를 조정하고 원활한 통치력을 행사하는 방향이었다. 원래 나부는 다양한 세력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계루부왕권은 보다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하기 위해 나부의 다양한 세력을 일원적으로 편제해야했다. 이는 고구려가 국가로서 성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관등을 살펴보면 대로․패자․주부․우태․사자․조의․선인의 7등급으로 파악된다. 이들 관등 중 패자․우대․조 등의 관등은 나부의 제가세력을 서열화 하여 왕권 아래로 편제했으며, 대로․주부․사자 등은 왕명의 수행 등 왕권과 밀접한 관련 속에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왕권을 보다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이처럼 나부의 자치권을 뒷받침한 관계, 계루부의 왕권을 뒷받침한 관계 등으로 초기 관계조직은 구성되었다. 왕권은 나부를 일원적으로 함으로써 자신들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한편, 통제를 강화하였다. 또 나부세력들은 자신의 세력을 인정받아 중앙정계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국가중대사는 계루부왕권과 나부세력들의 협의기관인 諸加評議會에서 결정되었다. 대외전쟁의 경우 나부의 군사력이 동원되기는 했지만, 복속민에 대한 지배는 왕권의 통제를 받아야만했다. 이런 통치방식은 나부체제기 동안 유지되었다. 나부체제의 성립 이후 통합을 바탕으로 한 국력은 급속히 강화되었다. 3세기 전반경에 이르면 계루부의 왕권은 강화됨과 동시에 나부의 자치성은 약화되었으며, 또 나부간의 우열이 발생하여 보다 강력한 세력을 지닌 나부는 독자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지만 미미한 세력의 나부는 독자성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중앙정치조직은 점차 왕권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던 것이다.
  3세기 말 이후로 오면서부터 나부의 자치성은 거의 약화되었다. 그 요인으로는 잦은 정복전쟁과 농업생산력 증대로 인한 읍락민의 계층분화, 왕권의 의도적인 나부분열의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는 많고 넓은 들은 없어” 고구려인들이 “부지런히 농사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했다”라고 표현한 고구려의 지형적 특성상 생산기반을 보충하기 위해 정복활동을 통해 경제적 기반이 될 지역의 확보는 고구려에게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고구려의 대외정복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당시 왕은 최고통치권자로서 전쟁을 수행하고 전리품을 분배함으로써 정치적 권한이 강화되었으며 부도 축적되었다. 그러나 제가들은 자신들의 병력으로 출정하였지만 왕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으며 참전자들의 희생에 대한 타격도 막강한 병력을 소유한 왕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쟁이 잦아질수록 왕의 권한은 강화된 반면 제가들의 세력기반은 점차 약화되었다. 따라서 5나부의 연대성은 약화되고 나부의 독자적인 운동성은 줄었다.
  또 다른 요인인 계층분화현상은 철기문화에 바탕을 두고있다. 철기농기구의 보급으로 농업생산력은 증대되었으며 잉여가치증가로 인한 토지확보 경쟁이 심화되었다. 이 과정 중 부가 축적된 소수에게 토지소유가 집중되고 토지를 상실한 사람들이 대거 발생하였다. 이런 계층분화가 심화되면서 각 읍락의 공동체적 유대관계는 점차 약화되었다. 이 때문에 각 나부의 기존 통치권자들의 권력도 예전과 같은 강제력을 지니지 못했고, 나부 자체의 운영도 원활하지 못했다. 읍락의 구성원들 간의 소속의식과 공동체의식이 희박해졌으며 각각의 나부의 독자적 운영을 뒷받침해주던 경제적관계도 변화했기 때문이다.
  왕권은 특정나부의 세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나부내의 통치행위에 간여하거나 다른 나부의 정치적 역량을 키워 균형을 맞추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탐학을 이유로 部長을 교체하거나 균형적인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세력을 조정하였다. 이런 요인들로 나부가 해체되어 가는 동시에 국왕은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했으며 귀족들은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유지라도 하기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점차 일원화되어 중앙집권화의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나부의 해체 방향은 두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각 나부의 귀족들은 왕의 밑에 들어가 관료적 귀족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왕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전자는 중앙귀족으로 편제되어 자신의 세력을 미약하나마 유지하였으며, 후자의 경우 자신의 세력기반인 나부에서만 머물다 점차적으로 중앙세력으로부터 배제되어 후에 나부에서의 세력기반을 거의 상실하였다. 따라서 각각의 나부들의 서열은 왕권과의 친밀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나부세력이 점차 왕권하의 중앙귀족으로 되어감에 따라 나부체제는 점차 미약해져갔다. 나부체제의 해체에 따라 고구려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는 점차 정비되어 나갔다. 예를 들어 “고국천왕이 다른 사람의 토지와 노동력을 과도하게 수탈하던 연나부 세력을 억누르고 비교적 한미한 출신인 西鴨淥谷 左勿村의 乙巴素를 國相으로 등용한 것은 집권적 국가체제의 방향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국천왕은 계급분화로 인한 농민층의 몰락이 심화되자 이들이 유력세력의 예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賑貸法(진대법)1)을 실시하였다. 이는 중앙집권적체제에 인적․물적 기반을 이루었다. 계루부왕권은 나부해체의 시기를 이용하여 왕권강화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바로 왕위계승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바뀐 것이다. 또 특정 나부세력과 지속적인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계루부집단내에 왕권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한편 나부가 자치권을 행사하던 곳에 대한 지방통치조직도 정비되어 감에 따라 집권적 국가체제로 성립될 수 있었다.

3. 발전

  고구려의 중앙집권통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3세기 중․후반경 나부체제가 해제되면서 보다 확고한 세력을 이루어졌다. 이와 더불어 대외적 요인으로는 중국의 5胡16國시대라는 혼란기를 이용, 보다 강력하게 추진될 수 있었다. 그러나 故國原王시기 계속된 전쟁에서의 패배와 고국원왕의 전사로 고구려는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와 같은 위기는 단순히 전술상의 문제가 아니다. 나부체제가 해제된 이후 보다 중앙집권적 정치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준이 미약했기 때문에 급격히 변화된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계속된 영토확장 과정에서 편입된 다양한 복속민들은 서로 간에 배타성과 이질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또 다른 전쟁에서 통합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힘을 발휘하여 못했다. 따라서 보다 안정적인 통치를 위하여 의식과 제도상의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4세기 말 이후 소수림왕대에 비로소 초보적인 성립단계에서 집권적 국가체제로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소수림왕의 개혁작업은 불교의 보급, 율령반포와 태학설립,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진행되었다.
  불교의 보급은 서쪽국경의 안정을 위한 전진과의 우호관계유지와 같은 외교적인 이유와 의식적 통합을 위하여 나라를 지키는 호국사상이 필요했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모든 구성원에서 불교를 믿게 함으로써 다양한 구성원들과의 이질감을 해소하고 통합할 수 있는 정신적 사상을 제공하였다. 이런 불교의 도입으로 고구려인의 융합과 중앙권력에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바탕을 이루었다.
  太學은 유교적 이념에 충실한 인재를 키우기 위한 교육기관이다. 태학의 설립은 유교적 정치이념을 도입하기 위한 중앙정부의 의지표현으로 볼 수 있다. 유교의 忠사상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필요한 정치이데올로기를 제시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율령의 반포는 각 세력집단들이 보유하고 있던 고유의 관습법을 일원화하기 위함과 그것에 따른 중앙집권적 국가운영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 율령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유학에 대한 이해와 이에 따른 국가권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고구려의 경우 태학을 통해 유교적 기반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고 미천왕 이후 꾸준한 중앙집권적 통치 작업으로 인하여 정치적 기반도 마련되어 있었다. 율령은 이전의 다원적 관습법체계를 일원적 공법체계로 전환함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체계를 보다 뒷받침하였다. 정해진 율령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새로 편입된 복속민들도 쉽게 동요될 수 있었으며 나부의 해체 등 사회의 변화를 제도화함으로써 사회상황과 제도사이의 괴리를 없앴다. 이로써 국가발전 방향이 명확하게 제시되었으며 보다 체계적으로 국가가 운영될 수 있었다.
  정치면에서는 중앙통치와 국왕의 제약을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던 각 나부의 개별적인 통치체제를 중앙으로 집중하였다. 관등제의 경우를 살펴보면 다원적으로 구성된 것을 兄系와 使者系 官位를 중심으로 일원화 시킨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국가 성립초기부터 국정운영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제가회의는 국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그에 대한 영향력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귀족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운영방식은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中裏都督, 장사, 사마, 참군 등의 새로운 관직명이 생기고 그 아래로 편제하는 귀족들이 많아짐을 볼 때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발전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방통치체제도 축성작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곳곳에 중앙에서 보낸 지방관을 파견함으로써 중앙의 권력이 지방에 보다 잘 뻗칠 수 있게 하였다.
  지방제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 바로 군사제도이다. 광개토왕의 신라구원전에서 동원된 步騎5만의 군사력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4세기 중․후반부터 일반민도 병사로 동원되었다. 또 각 지역의 주민들로 구성된 지방군이 지방통치의 중심권역에 있는 주요 성에 편성되기도 했다. 이 당시의 전쟁은 생존을 위한 약탈전쟁의 단계를 벗어나, 영토확장과 인민확보 등의 국가의 발전을 위한 대외전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쟁은 더욱 격화되고 대규모의 물량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다. 일반민들은 과거 각 나부의 특권으로 전투를 하고 그들의 예속민에게 물자를 보급하는 것과는 달리 이제 국가를 위해서 참전하였다. 이런 점은 중앙집권체제의 성장과정에서 노비를 제외한 모든 민들을 군역에 동원하는 皆兵制2)로 군사제도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4세기 후반 장수왕과 광대토왕 때에는 각 나부에 독자적으로 편제되어있었던 군사조직이 국가의 질서 속에 모두 일원적으로 편입되었다. 이와 같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급격히 팽창시킬 수 있었다.
  신분제에도 변화가 왔다. 당시 귀족․평민․천민의 세 신분층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각 신분층은 다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상부 귀족층은 승진한계에 따라 나누어졌으며 평민들도 자신의 경제력에 따라 다시 세분화되었다. 이와 함께 조세제도도 바뀌었다. 과거 무분별하고 집단을 단위로 수시로 공납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법률에 의해 등급화하고 일정한 기준을 적용하여 규칙적이고 체계적으로 수취하였다.
  4세기말 이후 소수림왕의 체제정비는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의 확고한 기틀을 잡아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체제정비를 통해 5세기의 고구려는 장수왕, 광개토왕대에 비로소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5세기의 고구려는 永樂, 延壽 등과 같은 자체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독자성을 과시하였고, 남조․북조와 교류하면서 대등한 외교활동을 했다. 더불어 국제적으로도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4. 쇠퇴

  장수왕대에는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평양천도를 시행하게 된다. 평양으로의 천도는 기존지역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들에게는 타격이 컷지만, 이와는 반대로 평양지역의 신진귀족들을 대거 등용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지지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런 과정은 후에 귀족들 간의 세력경쟁으로 인한 내부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장수왕때나 광개토왕때와 같은 막강한 왕권이었던 시기에는 왕의 권위적 힘에 의해 귀족세력을 적절히 통제 시킬 수 있었으나, 안장왕, 안원왕대에는 왕권쟁탈전으로 인한 귀족들의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또 다른 왕권약화의 요인으로는 대외정복활동의 침체로 볼 수 있다. 성공적인 대외정복기인 장수왕대와 광개토왕 때에는 영토확장, 왕권강화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전시체제로 인한 사회에 대한 통합력을 높일 수 있었다. 따라서 왕권 아래로 모든 지배층을 결속시킬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군사력도 중앙으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더불어 왕이 직접 전투에 나서는 등 왕의 권위를 더욱 견고히 했으며 귀족들에 대한 통제력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장기간의 걸친 대외정복 활동의 침체와 왕위계승문제로 인한 귀족들의 분열․갈등은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였다.
  고구려가 급격한 위기상황을 맞이한 것은 바로 중요 거점지인 한강유역의 상실 이후부터이다. 한강유역을 상실한데 대내적 요인으로는 왕권약화와 귀족세력들 간의 분화에 따른 정국의 불안정 등이고, 대외적 요인은 백제와 신라의 나제동맹으로 인한 연합군형성과 서북부지역의 중국세력과 돌궐의 위협 때문이었다. 이런 위기를 수습하기 위하여 우선 내부적으로 귀족연립체제를 성립하였다.
  귀족연립체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의 관인 大對盧의 선임과 집권적 관직으로서의 莫離支의 등장이다. 대대로는 3년의 임기이고 유력한 자가 있으면 임기에 구애받지 않으며, 교체할 때에 반발이 있을 경우 서로 군사를 동원하여 이긴 자가 취임하였다. 이때 왕은 궁문을 닫아걸고 이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로 비추어 봤을 때 전대의 왕권보다 통치력이 상당히 약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대대로보다 하위이지만 비등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막리지이다. 사료상으로 막리지는 국정을 전제하는 강력한 정치적 실권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다. 이러한 바탕에는 막리지의 군사권 장악이 있다. 대대로의 취임 시 경우의 따라 무력충동이 생기는 상황에서 군사력의 보유는 세력 확보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었다. 다수의 막리지 중에서 대대로가 선출이 되고, 이 도중에 각 귀족집단들 간 이해관계가 조정되었기 때문에 평원왕대부터 연개소문의 정변이 있기까지 상대적으로 안정된 형태로 정국이 운영되었다.
  안정된 정권을 바탕으로 왕권의 위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영양왕 재위 9년에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隋와의 전쟁을 치뤘으며, 《新集》이란 역사서의 편찬으로 전대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왕권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대로를 통한 귀족연립정권도 점차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다. 예로 淵蓋蘇文가문의 세력독점을 들 수 있다. 당대의 귀족가문 중에서도 연개소문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 막리지를 차지함으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당대의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여러 세력이 균등한 세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왕권강화의 계기를 가질 수 있지만 하나의 세력이 독점할 경우에는 왕권마저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영류왕과 다른 귀족들은 연개소문가문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영류왕은 연개소문을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하여 변방으로 보내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오히려 연개소문에 의해 영류왕이 살해되고 말았다.
  영류왕 사후 연개소문에 의한 집권체제는 반대파의 반발에 의한 일대의 혼란에 휩싸였다. 이런 반발을 무시하지 못한 탓에 연개소문은 어느 정도의 귀족연립체적인 성격을 띄면서, 기존의 대대로보다 한층 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보장왕 2년에는 도교진층책을 시행하면서 동시에 불교와 유교에 대한 탄압을 하였으며 자신의 사적기반을 강화책으로 太大對盧․太莫離支 등의 새로운 초월적 관직을 만들었다. 더불어 자신의 아들들을 주요 요직에 편제함으로써 기존의 귀족간의 합의체제를 완전 무시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귀족들의 반발이 생기고 연개소문 사후 이런 문제는 당과의 전쟁과 그의 아들들의 권력다툼과정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의 귀족연립정권의 정치체제를 무시한 처사는 귀족들의 반발과 분열을 일으켜 당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5. 멸망

  당의 고구려에 정복에 대한 의욕과 신라의 세력 확장은 혼란스러운 고구려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다. 연개소문 사후 그의 세 아들인 남생․남건․남산의 분열이 이런 혼란에 더욱 부채질을 하였다. 더불어 다른 귀족들에 의한 삼형제간의 이간질이 이들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막리지로서 엄청난 정보를 소유했던 남생은 그의 아들 헌성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여 당나라 군대의 길잡이가 되어 고구려 정복의 일조를 했다. 결국 연개소문의 독재적 정치체제는 연속성을 가지지 못하고 후계구도 형성의 실패함에 따라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제공했다. 결국 668년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게 평양성을 함락당한다. 이로써 고구려의 700년 역사는 막을 내리고 고구려의 5부, 176성, 69만여 호는 당나라 편제에 맞춰 9도독부, 42주, 100현이 되었다. 그리고 당의 안동도호부로 편제되어 중국의 지배 하에 들어감으로써 그 넓은 벌판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찬란한 역사는 막을 내렸다.
  
 
- 참고문헌

『고구려의 정신과 정책』, 윤명철, 학연문화사 2004.
『고구려사 연구』, 과학원 출판사, 경인문화사 1990.
고구려사!! 동북공정?? (http://goguryeo.history.go.kr/)
사이버 고구려 (http://chinkim.cafe24.com/ko/)
그토록 강성하던 고구려는 왜 멸망했을까? (http://blog.naver.com/hongjig.do)
고구려의 멸망 원인 (http://blog.naver.com/knightblack.do)

고구려의 멸망과 조선의 불교박해

... 조선이 중들을 박해하고 유교를 숭상한 이유가 고구려의 멸망에 관련이 있다고 해서 올립니다. 조선이 계속 숭상해온 불교가 아닌 유교를 숭상한 이유를 가르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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