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발전 모습과 의의 [뜻] 조사... [숙젠데요 ㅠ0ㅠ]

고조선의 발전 모습과 의의 [뜻] 조사... [숙젠데요 ㅠ0ㅠ]

작성일 2003.03.05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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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발전 모습과 의의를 조사해 오라네요 =ㅅ=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여기에 올려요

부디 =_= 플리즈 =_= 알려줘요 ㅠ0ㅠ


#고조선의 발전 #고조선의 발전과 멸망 #고조선의 건국 발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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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세기(檀君世紀)

고려 말(高麗 末) 좌정승

이암(李 ) 편찬(編撰)















1)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왕검(王儉)의 아버지는 단웅(檀雄:18대 거불단 한웅)이고, 어머니는 웅씨국(熊氏國)의 왕녀이며, 신묘(辛卯:BC 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밝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신인(神人)의 덕(德)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14세 되던 갑진(甲辰:B.C 2,357)년에 웅씨국(熊氏國)왕이 왕검(王儉)의 신성(神聖)함을 듣고 비왕(裨王=副王)으로 삼아, 큰 고을과 나라의 일을 대신 처리하도록 하였다. 무진(戊辰: B.C 2,333)년 중국의 요(堯)나라 임금 때에 단국(檀國=熊氏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밝달나무의 터에 이르러, 나라의 국인(國人:공무원)들이 추대하여 천제(天帝)로 삼으니, 자식들이 뭉치듯이 구한(九桓)이 하나로 되고, 신성한 교화(敎化)가 먼 곳에 까지 미치었다.

이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니, 비왕(裨王)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천제(天帝)의 자리에 있기를 93년 이었으며, 수명은 130세 였다.」고 하였다.

2) 아주 옛날 바야흐로 신시(神市)의 세상이 시작 될 때에 사방에서 모여온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널려 퍼져 살았으며, 풀로 옷을 만들어 입고 맨발로 다녔다.

신시(神市)에 나라를 세운지 1,565년 10월 3일, 무진(戊辰) 원년(元年)에 신인 왕검(神人王儉)이 있어, 오가(五加)의 우두머리가 되어, 8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밝달나무의 터전에 와서 무리와 더불어 삼신(三神)께 제사를 받들었는데, 지극한 신인(神人)의 덕(德)과 성인(聖人)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으며, 능히 조서(詔書)를 받들고, 하늘의 뜻을 계승함이 높고, 크고, 또 열렬하였으므로 구한(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천제(天帝)의 화신(化身)인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복종하고 충성을 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단군왕검(檀君王儉)이시다.

신시(神市)의 옛 규범(規範)을 부활시켜, 아사달(阿斯達)에 도읍(都邑)하고, 나라를 세우니,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3)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하늘의 법칙은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니, 그 문은, 너희들이 오로지 그 정성이 순수하게 하나가 되어야, 너희 마음으로 마침내 하늘님을 볼 것이다.

하늘의 법칙은 항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또한 한가지니, 몸을 추수리고 마음을 잘 지켜야, 이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교화(敎化)되어지고, 또 하늘의 법칙과 합쳐지면 이로서 세상 어느 곳에서도 쓰일 수가 있느니라.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로 인연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으니, 오직 너희 부모를 존경하고, 또한 하늘님을 지극히 공경하면, 이것이 나라에까지 그 힘이 미치니, 이것이 충효(忠孝)이니라. 너희가 능히 이 도리를 체득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먼저 화(禍)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짐승에게도 짝이 있으며, 다 헤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남녀도 서로 화목하여 원망하지 말고, 질투하지 말며, 음란하지 말 것이다.

4) 너희들은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크고 작은 것 없이 모두 아프지 않는가?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서로 헐뜯지 말고 서로 도우며, 다투거나 싸우지 말아라. 그리하면 가정과 나라가 흥(興)할 것이다.

너희들은 소나 말을 살펴 보아라. 오히려 먹이를 서로 나누어 먹지 않더냐? 너희가 서로 양보하고, 서로 헐뜯지 않고, 서로 빼앗지 않으며, 서로 공모하여 도둑질 하지 않으면, 나라는 융성(隆盛)해 질 것이다.

너희들은 호족(虎族)의 무리를 생각해 보아라, 힘만 세고 난폭하며, 신령하지 못하여 비천하게 되어 버렸다.

너희는 오만하여 순종치 않거나 난폭하게 날뛰지 말것이며, 사람의 성품을 상하게 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항상 하늘의 법칙을 준수하며, 능히 모든 것을 사랑하여라. 너희는 넘어지려는 자를 부축하여 주고, 약한 자를 업신여겨 깔보지 말고, 긍휼히 여겨 도와 주어야 하며, 비천하다고 얕 보지 말 것이니라.

너희가 만일 이러한 뜻을 어긴다면, 하늘님(하느님)의 도움을 영원히 얻을 수 없어, 네 자신은 물론이고, 네 집안 까지도 죽고 망할 것이다.

너희가 만일, 벼 논에 불을 놓으면, 벼는 남김없이 죽을 것이며, 이를 보고 신인(神人)은 화를 내실 것이 아닌가?

너희가 아무리 뚜껍게 싸서 냄새를 감춘다 하여도 반드시 그 냄새는 새어 나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공경하는 마음과 올바른 성품을 지니고 사특한 마음을 품지 말며, 악을 은폐하지 말고, 허물을 감추지 말며, 마음은 능히 하늘을 공경하며, 백성을 가까이 하라. 너희는 이렇게 함으로서 무궁한 복록이 있을 것이다. 너희 오가(五加)의 무리들은 그 뜻을 잘 따라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5) 이때에 팽우(彭虞)에게 명령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신지(臣智)에게 명령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奇省)에게는 의약(醫藥)을 베풀게 하였으며,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였으며, 우(尤)에게는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비서갑(斐西岬)의 하백 녀(河伯女)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인정이 넘치고, 덕이 넉넉한 다스림이 온 세상에 밝게 두루 미치었다.

단기(檀紀) 50년 되던 정사(丁巳)년에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편히 쉴 수가 없었다. 황제께서는 풍백(風伯)인 팽우(彭虞)에게 명령하여, 높은 산을 정하여 큰 강의 물을 다스리게 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하였으니, 이에 대한 공적비(功績碑)가 우수주(牛首州)에 있다.

단기 51년 무오(戊午)년에 황제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령하여 혈구(穴口=강화도)에 삼랑성(三郞城)을 짓고, 제천(祭天)의 단(壇)을 마리산(摩璃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바로 그것이다.

단기 67년 갑술(甲戌)년에 황제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虞)의 사공(司空)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하였으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하였다. 또 회대(淮岱)지방의 제후(諸侯)들을 평정하여 나라를 나누어서 이를 다스렸는데 우(虞)나라의 순(舜)제후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6) 단기 93년 경자(庚子)년 황제께서 섬돌과 흙으로 쌓여진 버들궁에 계셨는데, 풀은 우거져 길이 없고, 밝달나무가 무성한 그늘에서는 곰과 호랑이가 노닐고, 양과 소가 살찌는 것이 보였다. 밭두둑을 만들고 밭도랑을 파게하며, 누에치기를 권하고 고기잡이와 짐승 사냥하는 것을 다스리니, 백성들은 넉넉하여 재물이 남으므로, 나라살림에 도움이 되도록 보태었다. 10월 상달(上月)에 나라 안에 큰 모임을 가지고 하늘님께 제사를 지내니,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고 환호하며 스스로 즐거워했다. 이에 단군황제의 덕화(德化)와 교화(敎化)와 치화(治化)가 온누리에 가득 넘쳐서 멀리 바다의 탐라(耽羅)섬까지 점차로 널리 퍼져 나갔다.

이때에 일정한 지역을 갈라서 천하의 땅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三韓)은 모두 오가(五家) 64족을 포함하였다.

이해 3월 15일 단군황제께서 봉정(蓬亭)에서 붕어(崩御)하시니, 교외로 십리쯤 떨어진 땅에 장사를 지냈다.

만 백성이 부모의 상(喪)을 당한 것 같이 단군황제의 조기(弔旗)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함께 모여 경배하며 항상 마음에 사모하며 잊지 못하였다.

이에 태자 부루(扶婁)가 새로 황제가 되었다.

7) 2세 단군 부루(扶婁)황제 재위 58년

단군 부루 원년(元年)인 신축(辛丑:BC 2240)년에 황제께서는 어질고 복이 많아 큰 재물을 물려 받아 그 재물이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림이 공평하니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백성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매년 봄 가을로 나라안을 두루 순방하여 살피시고, 하늘님께 제사를 올리며 그 예(禮)를 다하였다. 지방의 여러 왕들의 잘하고 잘못함을 살펴서, 상(賞)주고, 벌(罰)주는 일을 지극히 바르게 하였으며, 도랑을 파고 고치도록 하였으며, 농사 짓기와 뽕나무 심기를 권장하고, 공부하는 집을 짓고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로 떨쳐 졌다. 처음으로 우(虞)지방의 순(舜)왕이 남국(藍國)에 인접한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잘 감독치 않고 방치하므로, 부루황제께서 병사를 파견하여 정벌하여 모두 쫓아 내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 등을 그 곳의 왕으로 임명하여 그 공적을 나타내었다.

8) 신시(神市) 이래로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하늘님께 제사(祭祀) 지낼 때 마다,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於阿歌)를 부르고 하늘님과 조상에 대하여 감사하며, 신인(神人)이 사방(四方)을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것이 곧 참전( 佺)의 계(戒)가 되었다. 그 가사(歌詞)는 다음과 같았다.

「어아 어아 우리들, 하늘님과 조상님의 크신 은혜와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마세 !

어아 어아, 착한 마음은 큰 활되고, 나쁜 마음은 과녁되니,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줄같아, 착한 마음 바른 화살이 한 마음 같네 !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되어, 한 화살로 과녁마다 적중시켜, 끓는 물을 쏟아 버리듯, 착한 마음속에 있는 한 덩어리 나쁜 마음 씻어 보자 !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굳세고 굳센 큰 활같은 마음, 천년 만년 크신 은덕 배달나라 영광일세

우리들의 하늘님이시여 ! 우리들의 조상님이시여 !」

9) 단군 부루 2년 임인(壬寅:BC 2,239)년 황제께서는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을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물었는데, 이보다 앞서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은 부모의 초상을 잘 치루었으니, 삼일 동안은 게으르지 않았으며, 석달 동안은 소홀히 하지 않았고, 일년이 될 때까지도 슬프하고 애통하였으며, 삼년동안은 계속 슬픔과 근심에 젖어 있었다. 이로부터 풍속이 변하여 부모의 상(喪)을 치룸에 있어, 그 동안 다섯 달로 끝내던 상(喪)을 오래 끌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이 어찌 천하의 큰 성인(聖人)이라 하지 않을 것인가! 이와 같이 능히 덕(德)으로 교화(敎化)하면 그 유행(流行)이 온 백성에게 전하여 지는 것이 우편(郵 便)의 빠름과 같다.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은 이렇듯 효(孝)로서 알려 졌으니, 공자(孔子)도 역시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무릇 효도(孝道)라 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도와 넉넉하게 하는 근본으로서, 온 세상에 두루 알려 삶의 표준이 되게 하였다.

10) 단군 부루 3년 계묘(癸卯)년 9월에 황제의 명령을 적은 글, 즉 조서(詔書)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으며, 되(斗)와 저울, 즉 도량형기(度量衡器)들을 관청(官廳)에서 정한대로 따르게 하였으며, 삼베나 모시의 시장가격이 장소에 따라 서로 다르지 않고, 백성들이 스스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하였다.

단군 부루 10년 경술(庚戌)년 4월에 밭을 정(井)자 모양으로 구획정리를 하여 나누어 줌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게 하였다.

단군 부루 12년 임자(壬子)년에 신지(神誌)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단군 부루 58년 무술(戊戌:BC 2183)년에 부루황제께서 붕 어(崩御) 하셨는데 이날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산짐승은 떼를 지어 산위에서 어지럽게 울부짖고, 만 백성들은 심히 애통하였다.

그후 백성들은 제사를 베풀기 위하여, 집안의 적당한 곳을 택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토기 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히 담아 제단위에 올려 놓고 부루단지(扶婁壇地)라 칭하였다. 이를 업신(業神)이라 하고, 또는 전계(佺戒)라 칭하였다. 이로서 온전한 사람을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하는 말씀을 받았으니, 이는 사람과 생업이 함께 온전하게 갖추어 졌다는 뜻인 것이다. 태자 가륵이 새 황제로 즉위하였다.

11) 3세 단군 가륵(嘉勒)황제 재위 45년

단군 가륵 원년 기해(己亥:BC 2,182))년 5월 황제께서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을 불러, 선왕(先王)들께서 백성을 교화(敎化)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근본으로 삼았던 전(佺)과 종(倧)의 이치에 관하여 물었다.

보륵(普勒)은 엄지 손가락을 교차시켜 왼손위에 오른손을 올려 놓아 삼육대례(三六大禮)를 행한 후 나아가 말씀을 드렸다.

「하늘님(하느님)은 능히 만물이 생겨나게 하고, 그 성품을 각각 온전하게 하므로, 하늘님의 현묘하심을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능히 덕(德)과 의(義)로서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생명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왕이 베풀어야 할 바이며,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모두 승복할 것입니다. 사람을 우주의 근본된 존재로 알고, 가장 귀하게 여겨, 바르게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할 이념이며, 사람은 온전해 져야 한다는 것은, 백성이 노력해야 할 계율(戒律)인 것입니다.

모두 칠일을 기한 삼아, 삼신(三神) 하늘님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되기를 세번씩 빌어 다짐한다면, 구한(九桓)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되어, 잘 다스려 질 것입니다.

무릇 그 길은, 부모가 되기를 원하면 부모다워야 하며, 임금이 되기를 원하면 임금다워야 하며, 스승되기를 원하면 스승다워야 하며, 자녀가 되고, 신하가 되고, 제자가 되려면, 역시 자녀 다워야 하며, 신하 다워야 하며, 제자 다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웅천왕께서 처음으로 신시(神市)를 열고 나라를 세우신 까닭이나, 하늘님께서 교화(敎化)를 베푸심도, 이는 나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니, 홀로 도(道)를 구하며, 나를 비우고, 재물을 있게 하면, 능히 내 몸과 더불어 인간세 상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님을 대신하여 임금은 천하(天下)에 큰 도(道)를 펴서 대중을 도와서, 한 사람이라도 본성(本性)을 잃지 않도록 하고, 만왕(萬王)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여 병을 없애고, 원한을 풀어 주고, 생명을 해치는 물건은 하나도 없게 하고, 나라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과 망령됨을 고쳐 참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7일을 기한으로 3번을 정하여, 모든 사람들이 교화(敎化)의 모임을 갖고 계율을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朝庭)에는 종훈(倧訓)이 있고, 백성에는 전계(佺戒)를 두었으니, 우주의 순수한 정기(精氣)는 햇살같이 땅에 내리고, 세 빛과 다섯가지의 정기(精氣)는 사람의 머리골에 응결되고, 현묘(玄 )하게도 스스로 광명(光明)을 얻으니 다같이 위엄이 있었다. 이것이 굳세게 일어나 살게 함이라. 이를 구한(九桓)에 베풀어 주니, 구한(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따르고, 하나로 돌아와 교화(敎化)되었다.

12) 단군 가륵(嘉勒) 2년 경자(庚子)년, 그 시대의 풍속은 오히려 하나 같지 않았으니,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形象)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 글이 있다 해도, 열 집이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한나라에서도 백리(百里)만 떨어져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령하여〈바른 소리 글〉, 즉 정음(正音) 38자를 지었으니, 이 글을 가림토(加臨土)라 하였으며,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ㆍ ㅣ ㅡ ㅣ ㅣㅡ ㅡ ㅣ ㅣ ㅡ ㅡ × ㅌ

ㅇ ㄱ ㅂ ㅁ ㄴ ㅿ ㅈ ㅊ ∧ ∧ ㆆ ∧ ∨

ㅣ ㄹ ㅐ ㅒ ㅿ ㄱ ㅈ ∧ ㄱ ㅗ ㅍ ㅍ 』

단군 가륵 3년 신축(辛丑)년 신지(神誌)인 고글(高契)에게 명령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수(編修)하게 하였다.

단군 가륵 6년 갑진(甲辰)년 열양(列陽)지방의 욕살(褥薩:장관급)인 색정(索靖)에게 약수(弱水)지방으로 옮기도록 명령한 후 종신토록 그 곳에 머물게 하였다가, 후에 사면하여 그 땅의 욕살(褥薩)로 봉하니, 그가 흉노(凶奴)의 조상이 되었다.

단군 가륵 8년 병오(丙午:BC 2,175)년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께서는 이를 지백특(支伯特)에서 토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임금께서는 불함산(不咸山)에 올라 민가(民家)를 보고는, 연기가 적게 나는 집은 조세(租稅)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租稅)에 차이가 있게 하였다.

단군 가륵 10년 무신(戊申)년에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령하여 그 두목인 소시모리(素尸毛犁)를 참수(斬首)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그 땅을 칭하여 소시모리(素尸毛犁)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音)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이라 한다.

그 후손 가운데 협야노(陜野奴)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세 섬을 점거하여 살면서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하였다.

단군 가륵 45년 계미(癸未:BC 2,138)년 9월에 가륵황제께서 붕어하시었다.

태자 오사구(烏斯丘)가 새 황제로 즉위하였다.

13)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황제 재위 38년

단군 오사구 원년 갑신(甲申:BC 2,137)년 황제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蒙古里)의 왕으로 봉하였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고 돌아와,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러 삼신(三神) 하늘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었는데, 이를 인삼(人蔘)이라고도 하고, 선약(仙藥)이라고도 한다. 그 후로부터 신선(神仙)이 되면 죽지 않는다는 설은 삼(蔘)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전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간혹 산삼(山蔘)을 채집하는 집이 있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기하고 영험한 매우 기적같은 경험이 많다고 하였다.

단군 오사구 5년 무자(戊子:BC 2,133)년에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夏)나라 사람들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하여 갔으며, 10월에는 조정과 민간에서, 돌에다 별도로 기록한 신서(神書)를 백성들에게 공개 하였다.

단군 오사구 7년 경인(庚寅:BC 2,131)년에 배 만드는 곳을 살수(薩水)의 상류에 설치하였다.

단군 오사구 19년 임인(壬寅:BC 2,119)년 하(夏)나라의 왕, 상(相)이 백성들에게 덕(德)을 잃어버리니, 황제께서 식달(息達)에게 명령하여 람(藍), 진(眞), 변(弁)의 삼부(三部)의 병력을 인솔하여 가서 정벌(征伐)하게 하였다. 천하가 이 소식을 듣고 복종하였다.

단군 오사구 38년 신유(辛酉:BC 2,100)년 6월 오사구 황제께서 붕어(崩御) 하시니, 양가(羊加)의 구을(丘乙)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14) 5세 단군 구을(丘乙)황제 재위 16년

단군 구을 원년 임술(壬戌:BC 2,099)년에 황제께서 명 령하여 태백산(太白山)에 제단을 쌓게하고, 사신(使臣)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냈다.

단군 구을 2년 계해(癸亥)년 5월 황충(蝗 )의 떼가 크게 일어나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황제께서 친히 황충이 에워싼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 하늘님께 고(告)하여 황충을 없애 주기를 비니, 며칠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단군 구을 4년 을축(乙丑:BC 2,096)년 처음으로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사용하여 책력(冊曆)을 만들었다.

단군 구을 8년 기사(己巳)년에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해(東海)의 바닷가에 도착하였다.

단군 구을 16년 정축(丁丑:BC 2,084)년 황제께서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시어 삼신(三神)의 제단을 쌓아 봉축(封築)하고, 환화(桓花:무궁화)를 많이 심었다. 7월 황제께서 남쪽으로 각 지역을 두루 순행(巡行)하시다가 풍류강(風流江)에 이르러 송양(松壤)에서 병을 얻어 갑자기 붕어(崩御)하시니, 대박산(大博山)에 장사(葬事)를 지냈다.

우가(牛加)의 달문(達門)이 뭇사람으로 부터 뽑혀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였다.

15) 6세 단군 달문(達門)황제 재위 36년

단군 달문 원년 무인(戊寅:BC 2,083)년,

단군 달문 35년 임자(壬子:BC 2,049)년에 모든 왕들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여, 구월산(九月山)에서 삼신 하늘님께 제사를 지내게 하고, 신지(神誌)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다. 그 서효사(誓效詞)에 이르기를,

「아침 햇살을 먼저 받는 땅에, 삼신(三神)께서 밝고도 빛나게 세상에 임하셨으니, 한인(桓仁)께서 먼저 모습을 나타내시고, 넓고 또 깊은 덕을 심으시니, 모든 신(神)들이 의논하여 한웅(桓雄)을 보내서 한인(桓仁)의 뜻을 계승하여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셨으며, 치우천왕(蚩尤天王)께서는 청구(靑邱)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武)의 명성을 떨치어, 회대(淮岱)가 모두 천왕(天王)께로 돌아 왔으니, 이에 천하(天下)가 감히 넘볼 수 없었다. 왕검(王儉)께서 대명(大命)을 받으시니, 기뻐하는 소리가 구한(九桓)을 진동하였으며, 고기가 물을 얻음같이 백성은 소생하고, 바람에 풀잎이 나부끼듯 덕화(德化)가 새롭고, 원한(怨恨)이 있으면 먼저 풀어주고, 병이 있으면 먼저 병을 없애주며, 어짐과 효도(孝道)로, 한 마음으로 살아 가니 온 세상이 광명(光明)으로 가득 하였습니다.

진한(眞韓)은 나라 안의 민심을 진정시키고 안정시켜서 도리(道理)로서 다스리니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하였으며, 모한(慕韓)은 그 왼쪽을 보호하고, 번한(番韓)은 그 남쪽을 지키니, 높은 바위가 사방을 벽으로 에워싸듯 하였습니다.

거룩한 주인이신 황제께서 저울추와 저울판과 같은 새로운 수도로 행차하시었으니, 저울판은 백아강(白牙岡)이요, 저울대는 소밀랑(蘇密郞)이며, 저울추는 안덕향(安德鄕)이었습니다. 머리와 꼬리가 균형이 잡히듯 평균을 이루니, 덕(德)을 신뢰하고, 신(神)의 정기(精氣)를 보호하여, 나라가 흥(興)하여져 태평성세(太平盛世)를 보전하였으니, 70여국이 굴복하여 조공을 바쳤으며, 영원히 삼한(三韓)의 의로움을 보전하여, 왕의 업적이 흥(興)하고 융성(隆盛)하였습니다. 그러나 흥(興)하고 폐(廢)함이 말로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성이니, 그 일은 하늘님(천신:天神)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고 하였다.

16) 이어 모든 왕들과 약속하여 말씀하시길,

「무릇 나와 함께 이를 약속하는 사람은 한국(桓國)의 오훈(五訓)과 신시(神市)의 오사(五事)를 영구히 지켜 나갈 것을 안건(案件)으로 삼는다. 하늘님께 제사하는 의식(儀式)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위하는 도리는 백성들의 먹고 사는 것을 우선해야 하니, 농사(農事)가 만가지 일중에 가장 근본이며, 제사(祭祀)는 오교(五敎)의 근원이니, 마땅히 국인(國人:공무원)과 더불어 산업을 함께 다스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먼저 겨레의 중요함을 가르치시고,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사형(死刑)제도와 남을 대신하여 벌을 받는 제도를 없애고, 국경을 보호하며, 화백(和白)제도를 오로지 공정히 하여, 이로서 다함께 화합의 마음과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마음을 베푸니, 스스로 수양(修養)이 되었으며, 바로 어진 정치의 시작인 것이었다. 이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貢物)을 바쳤던 나라는 큰 나라가 둘이요, 작은 나라가 스물이였으며, 부락은 3,624개 마을이었다.

단군 달문 36년 계축(癸丑:BC 2,048)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양가(羊加)인 한율(翰栗)이 즉위 하였다.

17) 7세 단군 한율(翰栗)황제 재위 54년

단군 한율 원년 갑인(甲寅:BC 2,047)년,

단군 한율 54년 정미(丁未:BC 1,994)년 황제(皇帝)께서 붕어(崩御)하시고, 우서한(于西翰)이 즉위 하였다.

18) 8세 단군 우서한(于西翰) 또는 오사함(烏斯含)황제

재위 8년

단군 우서한 원년 무신(戊申:BC 1,993)년에 농사의 20/1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있는 자와 없는 자에게 널리 통하게 하였으며, 이로서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다.

단군 우서한 2년 기유(己酉)년에는 풍년이 들어 벼 한 줄기에 이삭이 여덟개씩이나 맺혔다.

단군 우서한 4년 신해(辛亥)년 황제께서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국경을 넘어서, 하(夏)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관(官)의 제도를 크게 고쳤다.

단군 우서한 7년 갑인(甲寅)년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안에 들어 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三尺)나 되었다고 한다.

단군 우서한 8년 을묘(乙卯)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인 아술(阿述)이 즉위 하였다.

19) 9세 단군 아술(阿述)황제 재위 35년

단군 아술 원년 병진(丙辰:BC 1,985)년 황제께서는 어질고 덕이 많으사 백성들이 금지하는 법을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리면 때를 맞춰 씻겨지는 것이다」하시며, 죄 지은 자를 벌하지 않고 용서하며 교화(敎化)하니, 마침내 죄 지은자가 그 덕(德)에 감화(感化)되었다. 이에 인정이 넘치는 교화(敎化)가 크게 행하여 졌다. 이 날에 두 태양이 나란히 떠 올랐으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마치 담장과 같이 늘어 섰었다.

단군 아술 2년 정사(丁巳)년에 청해(靑海)의 욕살(褥薩) 우착(于捉)이 군사를 일으켜 궁성을 침범하니, 황제께선 상춘(常春)으로 몸을 피하신 후, 새 궁궐을 구월산(九月山) 남쪽기슭에 새로 짓게 하였으며, 우지(于支)와 우율(于栗) 등을 파견하여 우착(于捉)을 토벌하여 죽이도록 명령한 후 3년만에 옛 궁궐로 돌아 왔다.

단군 아술 35년 경인(庚寅:BC 1,951)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우가(牛加)의 노을(魯乙)이 즉위 하였다.

20) 10세 단군 노을(魯乙)황제 재위 59년

단군 노을 원년 신묘(辛卯:BC 1,950)년에 처음으로 큰 동물우리(집)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도 길렀다.

단군 노을 2년 임진(壬辰)년에 황제께서 몸소 마을로 행차하시어 어가(御駕)가 야외에 머무르며,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국정(國政)에 대하여 물으니, 현자(賢者)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단군 노을 5년 을미(乙未:BC 1,946)년에는 대궐밖에 신원목(伸寃木)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들을 들어시니, 나라 안팎이 크게 기뻐하였다.

단군 노을 16년 병오(丙午:BC 1,935)년에는 동문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드니 질줄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저절로 일어 섰으며, 천하(天河)에서는 신기한 거북이가 등에 그림을 짊어지고 나타났는데, 그 그림이 윷판과 같았으며, 발해(渤海)연안에서는 금덩이가 나왔는데, 그 양(量)이 13석(石)이나 되었다.

단군 노을 35년 을축(乙丑:BC 1,916)년에는 처음으로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天文臺)를 설치하였다.

단군 노을 59년 기축(己丑:BC 1,892)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도해(道奚)가 즉위하였다.

21) 11세 단군 도해(道奚)황제 재위 57년

단군 도해 원년 경인(庚寅:BC 1,891)년에 황제께서는 오가(五加)에 명령을 내려 열두 명산(名山)의 제일 좋은 곳을 골라 국선(國仙)의 소도(蘇塗)를 설치하게 하였다. 밝달나무를 주위에 많이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한웅(桓雄)의 상(像)으로 봉하여,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雄常)이라 불렀다.

이때 국자랑(國子郞)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有爲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神市)는 실로 한웅천왕(桓雄天王)께옵서 나라를 처음으로 세우시고 무리들을 받아 들이어,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을 계율(戒律)로 세워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에 천경(天經)과 신고(神誥)의 뜻을 가르치고 설명하였으며, 윗 사람은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대검(大劍)을 차고, 풍류(風流)를 배우게 하였으며, 아래 백성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함께 다스렸으니, 들에는 도적이 없으므로 자연히 활동하기가 안전하였으며, 세상사람들은 병이 없으니 자연히 장수하였으며, 탐욕이 없으니 자연히 넉넉하였으며, 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며, 달을 맞아 춤을 추 니, 먼곳까지 그 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흥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이에 덕화(德化)와 교화(敎化)가 만백성에게 더하여 지니,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四海)에 넘치었습니다. 이와같이 하시기를 청하옵니다.」고 하였다.

22) 겨울인 10월에 황제께서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령하셨다. 대시전(大始殿)은 극히 크고 화려하였으며, 돌아가신 천제환웅(天帝桓雄)의 상(像)을 안전하게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위에는 광채가 번쩍 번쩍하여 마치 큰 태양과도 같았다. 그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밝게 비추고, 밝달나무 아래 한화(桓花)의 위에 앉아 계시는 모습은 하나의 살아 있는 신(神)이 온전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인(天符印)이 표시(標示)되어 있는 큰 하나의 원(圓)으로 된 그림을 누전(樓殿)에 걸어 놓았다. 호를 거발한(居發桓)이라 하였다. 3일 동안 규범을 지키게 하고, 7일 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소문이 사해(四海)를 진동(振動)하였다.

말씀한 내용을 간절한 마음으로 표시한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고요하고 묵묵하여 큰 것이며, 그 이치는 온누리에 막힘없이 널리 미침이요, 그 일은 참됨으로부터 시작됨이라.

땅은 감추고 저장함이 큰 것이며, 그 이치는 온누리를 본받아 현상화(現像化)함이요, 그 일은 부지런함으로부터 시작됨이라.

사람은 알고 분별하는 능력이 큰 것이며, 그 이치는 온누리를 고르게 함이요, 그 일은 힘을 모아 협력함으로부터 시작됨이라.

그러므로 하늘님께서는 정성된 마음가운데 내려와 성품을 통하여 밝게 빛나게 하고,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로 교화하여, 인간세상을 크게 도우셨다.」고 하였다.

이에 그 말씀을 돌에 새겼다.

23) 단군 도해 28년 정사(丁巳:BC 1,864)년에 장소를 마련하여 조공(朝貢)으로 받은 물건, 즉 방물(方物)들을 모아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도 다투어 방물(方物)을 헌납하니, 진열한 것이 산더미와 같았다.

단군 도해 38년 정묘(丁卯:BC 1,854)년에 백성들 가운데 장정(壯丁)들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그 중 장사(壯士) 20명을 선발하여 하(夏)나라 수도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서 위세와 명성을 보였다.

단군 도해 46년 을해(乙亥:BC 1,846)년에 송화강(松花江) 연안에 관청을 짓고 세우니, 배와 노 등 그에 관계되는 기물(器物)이 세상에 크게 성행하여 졌다. 3월에 삼신(三神)에게 산(山)의 남쪽에서 제사를 지냈다. 술을 올리고 음식을 준비하여 간절한 원도(願禱)의 말씀을 드린 후, 술을 따르고 제사의식(祭祀儀式)을 행하였다. 그날 밤 특별한 은사로 술을 베풀어 주시고, 국인(國人)들과 함께 술잔을 돌려가며, 여러 가지 재주들을 관람하셨다. 이 자리가 끝난 후 누전(樓殿)에 올라 천부경(天符經)을 논(論)하고,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강연(講演)하시었다.

오가(五加)의 국인(國人)들을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는 살생(殺生)을 금하고, 모든 생물(生物)들을 놓아 주고, 옥문(獄門)을 열어 석방하고, 떠도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사형(死刑)제도를 없애도록 하여라.」고 하셨다. 내외의 모든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단군 도해 57년 병술(丙戌:BC 1,835)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만 백성이 슬퍼함이 마치 부모의 상(喪)을 당한 것같이 삼년 동안 근심하니, 온누리에 노래소리가 끓겼다. 우가(牛加)의 아한(阿漢)이 즉위하였다.

24) 12세 단군 아한(阿漢)황제 재위 52년

단군 아한 원년 정해(정해:BC 1834)년,

단군 아한 2년 무자(戊子)년 여름 4월에 외뿔가진 짐승이 송화강(松花江) 북쪽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황제께서 나라안을 두루 순시(巡視)하였는데, 요하(遼河)에 이르자 좌편에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황제와 왕들의 이름과 호(號)를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금석문(金石文)으로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훗날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이 이곳을 지나다가 비석(碑石)을 보고 시(詩)를 한수 지어 말하기를,

「마을밖 변한(弁韓)이라 칭하는 곳에

별난 비석하나 갈라진 채로 있구나

받침대는 잡초에 덮이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사라지고 이끼만 푸르구나

처음 세워 완성했던 생생한 모습으로

이끼를 잘라내고 글자를 찾아 내려하나

흥하고 망함이 기울어 지고

바쳐진 비문(碑文)에 보이는 증거는 없으나

이 어찌 단군황제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단군 아한 29년 을묘(乙卯:BC 1,806)년에 청아(菁莪)의 욕살(褥薩)인 비신(丕信)과 서옥저(西沃沮)의 욕살(褥薩)인 고사침(高士琛)과 맥성(貊城)의 욕살(褥薩)인 돌개(突盖)를 봉(封)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단군 아한 52년 무인(戊寅:BC 1,783)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우가(牛加)의 흘달(屹達)이 즉위하였다.

25) 13세 단군 흘달(屹達)혹은 대음달(代音達)황제 재위

61년

단군 흘달 원년 기묘(己卯:BC 1,782)년.

단군 흘달 16년 갑오(甲午)년에 주(州)와 현(縣)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職責)를 구분하는 제도를 수립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지 않게 하고, 정치는 법을 넘어서지 않게 하였다. 백성들은 자연히 고향을 떠나지 않았고, 일하는 것이 편안하므로 거문고 노래소리가 온 지역에 넘쳤다.

이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들이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夏)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황제께서 읍차(邑借)인 말량(末良)으로 하여금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군사(軍師)가 되어 이에 싸움을 돕게 하니,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사신을 보내 황제께 사죄하고, 곧 돌아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런데 하(夏)나라 걸왕(桀王)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파견하여 돌아가는 길을 막고, 불침(不侵)의 맹세를 어기려 하므로 은(殷)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걸왕(桀王)을 정벌하기로 하여, 은밀히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군( 軍)을 이끌고 가서 낙랑군(樂浪軍)과 합세하여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 )과 기(岐)의 땅에 살며, 관제를 설치 하였다.

단군 흘달 20년 무술(戊戌)년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미혼(未婚)의 자제들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니,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밖으로 돌아 다닐 때는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를 꽂았으므로, 이때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불렀다.

단군 흘달 50년 무진(戊辰)년에 오성(五星)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단군 흘달 61년 기묘(己卯:BC 1,722)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백성들은 모두 밥을 먹지 않고 곡성이 끓이지 않았다. 명령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 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 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 지낸 후, 우가(牛加)의 고불(古弗)이 즉위하였다.

26) 14세 단군 고불(古弗)황제 재위 80년

단군 고불 원년 경진(庚辰:BC 1,721)년,

단군 고불 6년 을유(乙酉)년, 이해에는 큰 가뭄이 있었다. 황제께서 몸소 하늘님께 기원하여 비 오기를 빌 때, 하늘님께 올리는 서고문(誓告文)에 이르기를,

「하늘이 비록 크다고 하나 백성이 없으면 어찌 베풀수 있으며, 비는 비록 기름지다고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이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나이까? 이제 비가 곡식을 적시게 하여 때 맞쳐 구제하게 하소서!」하니, 말씀이 끝나자 큰 비가 장대같이 수천리에 내렸다.

단군 고불 42년 신유(辛酉:BC 1,680)년 9월에 말라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 빛의 큰 닭이 성(城)의 동쪽 자촌가(子村家)에서 났다. 잘못 보고 봉(鳳)이라고 하였다.

단군 고불 56년 을해(乙亥:BC 1,666)년에 관리를 사방에 파견하여 호구(戶口)를 조사하여 계산하게 하니, 총 일억 팔천만(180,000,000)이었다.

단군 고불 60년 기묘(己卯:BC 1,662)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대음(代音)이 즉위하였다.

27) 15세 단군 대음(大音) 혹은 후흘달(後屹達)황제

재위 51년

단군 대음 원년 경진(庚辰:BC 1,661)년에 은(殷)나라 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 화친(和親)을 간구해 왔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稅法)으로 개정(改定)하였다.

단군 대음 2년 신사(辛巳)년에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의 집이 큰 피해를 당하였다. 황제께서는 이를 매우 불쌍히 여기시고, 조(粟)를 창해사수(滄海蛇水)의 땅으로 옮겨와서 백성들에게 고르게 배급하였다.

겨울 10월에 양운국(養雲國)과 수밀이국(須密爾國)의 두 나라 사신(使臣)들이 와서 방물(方物:특산물)을 바쳤다.

단군 대음 10년 기축(己丑:BC 1,652)년에 황제께서 서쪽 으로 행차하시어 약수(弱水)에 이르러, 신지(臣智) 우속(禹粟)에게 명령하여 금과 철, 그리고 고유(膏油)를 채취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에 우루국(虞婁國)사람 20가구가 투항하여 왔으므로, 염수(鹽水)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령하였다.

단군 대음 28년 정미(丁未:BC 1,634)년에 황제께서는 태백산(太白山)에 오르사 비석(碑石)을 세워, 역대 단군황제와 많은 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단군 대음 40년 기미(己未:BC 1,622)년에 황제의 동생 대심(代心)을 봉(封)하여, 남선비(南鮮卑)의 대인(大人)으로 삼았다.

단군 대음 51년 경오(庚午:BC 1,611)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우가(牛加)의 위나(尉那)가 즉위하였다.

28) 16세 단군 위나(尉那)황제 재위 58년

단군 위나 원년 신미(辛未:BC 1,610)년.

단군 위나 28년 무술(戊戌:BC 1,583)년에 구한(九桓)의 여러 왕들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삼신 하늘님께 제사를 올렸으며, 아울러 한인(桓仁), 한웅(桓雄), 치우(蚩尤) 및 단군왕검(檀君王儉)께도 제사를 드렸다. 닷새 동안이나 무리들과 더불어 큰 연회(宴會)를 베푸니, 밝은 등불은 밤을 지키고, 천부경(天符經)을 독송하고, 마당을 밟으며, 한쪽은 횃불을 줄지어 들고, 또 한쪽은 원을 이루어 춤을 추며 돌면서 애한가(愛桓歌)를 함께 불렀다.

애한가(愛桓歌)는 옛날 하늘님께 올리는 노래의 한 종류였다. 선인(先人)들은 한화(桓花)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가는 다음과 같았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었고, 올해도 만 그루 심었네

불함산에 봄이 오면, 꽃은 온통 붉은 빛

하늘님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단군 위나 58년 무진(戊辰:BC 1,553)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太子) 여을(余乙)이 즉위하였다.

29) 17세 단군 여을(余乙)황제 재위 68년

단군 여을 원년 기사(己巳:BC 1,552)년.

단군 여을 52년 경신(庚申:BC 1,501)년에 황제께서는 오가(五加)의 무리들과 함께 나라 안을 돌아 보시는데, 개사성(蓋斯城)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푸른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황제께 하례(賀禮)를 드리고 말하기를,

「오래 동안 선인(仙人)의 나라에 살면서, 선인(仙人)의 나라 백성이 된 것을 즐거워 하는 것은, 황제의 덕(德)이 두루미쳐 허물이 없음이니, 왕의 다스림은 치우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愁心)이나 고통을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서 책화(責禍)하고, 은혜로서 경계(境界)를 관할(管轄)하니, 성(城)도 나라도 싸우는 전쟁을 보지 못하였나이다.」고 하였다.

이에 황제께서 이르기를,

「고맙구나 고맙구나, 짐(朕)이 덕을 닦은지 오래되지 않아 백성들의 여망(與望)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구나.」하였다.

단군 여을 68년 병자(丙子:BC 1,485)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동엄(冬奄)이 즉위하였다.

30) 18세 단군 동엄(冬奄)황제 재위 49년

단군 동엄 원년 정축(丁丑:BC 1,484)년.

단군 동엄 20년 병신(丙申:BC 1,465)년에 지백특(支伯特)사람이 와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단군 동엄 49년 을축(乙丑:BC 1,436)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구모소( 牟蘇)가 즉위하였다.

31) 19세 단군 구모소( 牟蘇)황제 재위 55년

단군 구모소 원년 병인(丙寅:BC 1,435)년.

단군 구모소 24년 기축(己丑:BC 1,412)년에 남장인(南掌 人)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 왔다.

단군 구모소 54년 기미(己未:BC 1,382)년에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지었다.

단군 구모소 55년 경신(庚申)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우가(牛加)의 고홀(固忽)이 즉위하였다.

32) 20세 단군 고홀(固忽)황제 재위 43년

단군 고홀 원년 신유(辛酉:BC 1,380)년.

단군 고홀 11년 신미(辛未:BC 1,370)년 가을에 흰 태양이 무지개를 꿰 뚫었다.

단군 고홀 36년 병신(丙申:BC 1,345)년에 영고탑(寧古塔)을 개축하고 별궁(別宮)을 지었다.

단군 고홀 40년 경자(庚子:BC 1,341)년에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장인(匠人) 공홀(工忽)이 구한(九桓)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단군 고홀 43년 계묘(癸卯:BC 1,338)년에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소태(蘇台)가 즉위하였다.

33) 21세 단군 소태(蘇台)황제 재위 52년

단군 소태 원년 갑진(甲辰:BC 1,337)년에 은(殷)나라 왕 소을(小乙:BC 1,349∼1,339)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단군 소태 47년 경인(庚寅:BC 1,291)년에 은(殷)나라 왕 무정(武丁:BC 1,339∼1,280)이 귀방(鬼方)을 쳐서 이기더니, 또 대군(大軍)을 이끌고 색도(索度)와 영지(令支) 등 우리를 따르는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크게 패하자 화해(和解)를 청하며, 조공(朝貢)을 바쳤다.

단군 소태 49년 임진(壬辰:BC 1,289)년에 개사원(蓋斯原)의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一 國)과 양운국(養雲國)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高登)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지역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성해졌다. 이에 고등(高登)은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황제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꺼리어 허락치 않으려 했으나 거듭하여 청하므로 마침내 이를 허락하고, 그 호(號)를 두막루(豆莫婁)라 부르게 하였다.

단군 소태 52년 을미(乙未:BC 1,286)년에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세습하여 우현왕(右賢王)이 되었다. 황제께서 나라 안을 돌아 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海城)에 이르러, 큰 모임을 갖고 부모같은 노인들을 불러서 하늘님께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 오가(五加)의 무리들을 불러, 이들과 더불어 황제의 자리를 물려 줄 것을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더 이상 황제의 자리를 지키기에 늙고 권태로와서 정사(政事)를 서우여(徐于餘)에게 넘기고자 한다」고 하며, 살수(薩水)의 땅 주위 백리를 봉(封)하고, 명령을 내려 서우여(徐于餘)를 섭주(攝主)로 삼고, 호(號)를 기수(奇首)라 하였다. 우현왕(右賢王)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그 일을 중지하기를 권하였으나, 황제는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이에 우현왕(右賢王)은 좌우 주변 사람과 사냥하는 무리 수천 호(戶)를 거느리고, 마침내 부여(夫餘)의 신궁(新宮)에서 즉위하였다. 황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전하고, 서우여(徐于餘)는 폐하여 평민이 되게 하였으며, 황제께서는 은퇴(隱退)하여 아사달(阿斯達)에서 돌아가셨다.

이 해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역시 고죽왕(孤竹王)의 자손으로서 나라를 사양하고, 동해(東海:현 발해만)의 해변가에 숨어 살면서, 농사를 지어 자급 자족하였다.

33) 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황제 재위 48년

단군 색불루 원년 병신(丙申:BC 1,285)년에 황제께서 명령하여 녹산성(鹿山城)의 무너진 곳은 고쳐 쌓도록 하며, 관제(官制)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에는 친히 장당경(藏唐京)으로 행차하시어 고등왕(高登王)의 묘소(廟所)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11월에는 친히 구한(九桓)의 군사(軍師)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은(殷)나라 수도(首都)를 격파하고 곧 화친(和親)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우게 되어 은(殷)을 격파하였다. 이듬해 2월 강 상류까지 이들을 추격하여, 승전(勝戰)의 하례(賀禮)를 받았으며,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단군 색불루 6년 신축(辛丑:BC 1,280)년에 신지(臣智) 육우(陸右)가 황제께 아뢰기를,

「아사달(阿斯達)은 천년 제국(帝國)의 도읍이나, 이미 대운(大運)이 다했으며, 영고탑(寧古塔)은 왕기(王氣)가 농후하여 백악산(白岳山)을 능가하는 듯 하오니,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都邑)을 옮기시옵소서」하였더니, 황제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새 도읍지가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단군 색불루 20년 을묘(乙卯:BC 1,266)년에 이르러, 이때에 남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孤竹)왕과 더불어 여러 도둑들을 쫓아 내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은(殷)나라 땅의 경계와 매우 가까운 곳에 살면서,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누어 진격하게 하여 빈( )과 기(岐)를 점거하고, 그 곳의 유민들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였는데, 서융(西戎)과 함께 은(殷)나라 제후(諸侯)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이의 버려진 땅이었다. 남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황제의 덕화가 멀리까지 미쳤으니, 항산(恒山) 이남(以南)의 땅까지 였다.

단군 색불루 36년 신미(辛未:BC 1,250)년에 변방(邊方)의 장수인 신독(申督)이 병력을 믿고 란(亂)을 일으켰다. 이에 황제가 잠시 영고탑(寧古塔)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들이 뒤를 따랐다.

단군 색불루 48년 계미(癸未:BC 1,238)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아홀(阿忽)이 즉위하였다.

34) 23세 단군 아홀(阿忽)황제 재위 76년

단군 아홀 원년 갑신(甲申:BC 1,237)년에 황제의 숙부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령하여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도록 하고, 웅갈손(熊乫孫)을 보내어 남국(藍國)의 왕과 함께 남 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殷)나라 땅에 여섯 읍(邑)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 보게 하였는데, 은(殷)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워 결판을 내지 못하므로, 마침내 진격하여 군대로 하여금 공격하여 파괴토록 하였다. 가을 7월에는 신독(申督)을 공격하여 쳐 죽이고, 수도(首都)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단군 아홀 2년 을유(乙酉)년에 남국(藍國)의 왕 금달(今達)이 청구(靑邱)의 왕과 구려(句麗)의 왕과 주개(周愷)에서 모임을 갖고, 몽고리(蒙古里)의 군대와 합하여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城柵)을 부수고 깊숙한 곳까지 쳐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蒲古)씨를 엄(淹)에, 영고(盈古)씨를 서(徐)에, 방고(邦古)씨를 회(淮)에 봉하여 각각 제후로 삼았다. 은(殷)나라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우러러 보고 겁이나서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단군 아홀 5년 무자(戊子:BC 1,233)년에 번한(番韓)과 막한(莫韓) 및 오가(五加)들을 불러서 영고탑(寧古塔)으로 도읍을 옮기는 일에 대한 논의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단군 아홀 76년 기해(己亥:BC 1,162)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연나(延那)가 즉위하였다.

35) 24세 단군 연나(延那)황제 재위 11년

단군 연나 원년 경자(庚子:BC 1,161)년에 황제의 숙부인 고불가(固弗加)에게 섭정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단군 연나 2년 신축(辛丑)년 여러왕들은 조서(詔書)를 받들어 소도(蘇塗)를 증설하고, 하늘님께 제사를 지냈으며, 국가에 큰 일이나 이상한 재난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서 기도하여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단군 연나 11년 경술(庚戌)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솔나(率那)가 즉위하였다.

36) 25세 단군 솔나(率那)황제 재위 88년

단군 솔라 원년 신해(辛亥:BC 1,150)년

단군 솔라 37년 정해(丁亥:BC 1,114)년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단군 솔라 47년 정유(丁酉:BC 1,104)년에 황제께서 소도(蘇塗)의 윗자리에 계시며, 오래된 예법을 설명하시면서, 영신( 臣)과 직신(直臣)의 구분에 대하여 물으시니, 삼랑(三郞) 홍운성(洪雲性)이 나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直臣:올바른 신하)이옵고, 위세를 두려워 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 臣:아첨하는 신하)이옵니다. 하오나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흘러가는 물과 같으니, 근원이 이미 흐려 있으면, 그 흐르는 물이 맑기를 구하여도 이것은 될 수없는 일이오니, 그러므로 오직 임금이 성인(聖人)이 된 후라야, 신하는 올바른 신하가 되는 법 입니다.」고 하였다.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옳은 말인지고.」라고 하셨다.

단군 솔나 59년 기유(己酉:BC 1,092)년에 밭 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 개 이삭의 조(粟)가 있었다.

단군 솔나 88년 무인(戊寅:BC 1,063)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추로(鄒魯)가 즉위하였다.

37) 26세 단군 추로(鄒魯)황제 재위 65년

단군 추로 원년 기묘(己卯:BC 1,062)년, 가을 7월에 백악산(白岳山)의 계곡에 흰사슴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놀았다.

단군 추로 65년 계미(癸未:BC 998)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두밀(豆密)이 즉위하였다.

38) 27세 단군 두밀(豆密)황제 재위 26년

단군 두밀 원년 갑신(甲申:BC 997)년에 천해(天海)의 물이 넘쳐 아란산(阿蘭山)이 무너졌다. 이해에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

단군 두밀 8년 신묘(辛卯:BC 990)년에 큰 가뭄 뒷 끝에 큰 비가 쏟아져 내려 흉년이 되어, 백성들이 수확할 곡식이 없으므로, 황제는 명령을 내려 창고를 열어 곡식을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단군 두밀 26년 기유(己酉)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 니, 해모(奚牟)가 즉위하였다.

39) 28세 단군 해모(奚牟)황제 재위 28년

단군 해모 원년 경술(庚戌:BC 971)년에 황제께서 질병이 있어 백의동자(白衣童子)로 하여금 하늘님께 기도하도록 하였더니, 이윽고 병이 나으셨다.

단군 해모 11년 경신(庚申:BC 961)년 여름 4월에 태풍이 크게 일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더니, 땅위에 물고기가 함께 쏟아져 내렸다.

단군 해모 18년 정묘(丁卯:BC 954)년에 빙해(氷海)의 뭇 왕들이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바쳤다.

단군 해모 28년 정축(丁丑:BC 944)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마휴(摩休)가 즉위하였다.

40) 29세 단군 마휴(摩休)황제 재위 34년

단군 마휴 원년 무인(戊寅:BC 943)년에 주(周)나라 사람이 조공을 바쳤다.

단군 마휴 8년 을유(乙酉)년 여름에 지진이 있었다.

단군 마휴 9년 병술(丙戌:BC 935)년에 남해의 조수(潮水)가 3척(三尺)이나 물러갔다.

단군 마휴 34년 신해(辛亥:BC 910)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내휴(奈休)가 즉위하였다.

41) 30세 단군 내휴(奈休)황제 재위 35년

단군 내휴 원년 임자(壬子:BC 909)년에 황제께서 남쪽으로 순행(巡行)하시어 청구(靑邱)의 다스림을 살피신 후 치우천왕(蚩尤天王)의 공덕을 돌에 새겨 놓고, 서쪽으로 엄독홀(淹瀆忽)에 이르러,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는 여러 왕들을 모아 놓고, 군사들을 검열(檢閱)하고, 하늘님께 제사를 올리고, 주(周)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좋은 수교(修交)를 하였다.

단군 내휴 5년 병진(丙辰:BC 905)년에 흉노(凶奴)의 사람들이 조공을 바쳤다.

단군 내휴 35년 병술(丙戌:BC 875)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등올(登 )이 즉위하였다.

42) 31세 단군 등올(登 )황제 재위 25년

단군 등올 원년 정해(丁亥:BC 874)년

단군 등올 16년 임인(壬寅:BC 859)년에 봉황이 백악산(白岳山)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上苑)에서 노닐었다.

단군 등올 25년 신해(辛亥:BC 850)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아들 추밀(鄒密)이 즉위하였다.

43) 32세 단군 추밀(鄒密)황제 재위 30년

단군 추밀 원년 임자(壬子:BC 849)년

단군 추밀 3년 갑인(甲寅)년에 선비산(鮮卑山)의 추장(酋 長) 문고(們古)가 조공을 바쳤다.

단군 추밀 12년 계해(癸亥:BC 838)년에 초(楚)나라 대부(大夫) 이문기(李文起)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단군 추밀 13년 갑자(甲子)년 3월 일식(日蝕)이 있었다.

단군 추밀 15년 병인(丙寅:BC 835)년에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단군 추밀 30년 신사(辛巳:BC 820)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감물(甘勿)이 즉위하였다.

44) 33세 단군 감물(甘勿)황제 재위 24년

단군 감물 원년 임오(壬午:BC 819)년

단군 감물 2년 계미(癸未)년에 주(周)나라 사람들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의 가죽을 바쳤다.

단군 감물 7년 무자(戊子:BC 813)년에 영고탑(寧古塔) 서문(西門)밖의 감물산(甘勿山)밑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서고문(誓古文)에 아뢰기를,

「삼성(三聖)의 존귀하심은 삼신(三神)과 더불어 그 공(功)이 같음이며, 삼신(三神)의 덕(德)은 삼성(三聖)으로 인하여 넉넉해 지고 커지는 것입니다. 허(虛)와 조(粗)가 한 몸이요, 개체(個體)와 전체(全體)가 하나 이듯이, 지혜(智慧)와 생명(生命)을 같이 닦고, 형상(形像)과 혼백(魂魄)을 갖추어 번성하게 하는, 참된 가르침을 이에 세우고, 믿음을 오래 가지면 스스로 밝아져서, 삼성(三聖)을 존경하는 기세(氣勢)는 올라 갈 것입니다. 밝음을 회복하고 자신의 행함을 되돌아 보는 것을 분명이 한다면, 저 백악산(白岳山)도 한결같이 영원히 푸르고, 많은 성인들은 계속 이어지고, 글을 짓는 것과 예(禮)와 악(樂)이 흥하여 질 것입니다. 규모(規模)가 이러하니 큰 도술(道術)은 깊고도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그 속에 셋이 포함되고, 셋이 모이면 하나로 귀결되는 큰 흐름은 하늘의 규범으로, 영원한 세상의 법칙이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단군 감물 24년 을사(乙巳:BC 796)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오루문(奧婁門)이 즉위하였다.

45) 34세 단군 오루문(奧婁門)황제 재위 23년

단군 오루문 원년 병오(丙午:BC 795)년, 이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이 환호하고 즐거워하며, 두리가(兜里歌)를 지어 부르니, 그 노래에 이르기를,

「하늘에는 아침 해가 있어, 밝은 빛을 환하게 비추고,

나라에는 성인이 있어, 그 덕과 가르침이 널리 미치네

큰 나라 우리 배달나라, 거룩한 조선, 많고 많은 사람들, 맵고 사나운 다스림을 보지 못했네

밝고 밝은 노래소리 오래도록 태평일세」

라고 하였다.

단군 오루문 10년 을묘(乙卯:BC 786)년에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노란 안개가 사방을 막았다.

단군 오루문 23년 무진(戊辰:BC 773)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사벌(沙伐)이 즉위하였다.

46) 35세 단군 사벌(沙伐)황제 재위 68년

단군 사벌 원년 기사(己巳:BC 772)년

단군 사벌 6년 갑술(甲戌:BC 767)년 이 해에는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단군 사벌 14년 임오(壬午:BC 759)년에 호랑이가 궁전에 들어 왔다.

단군 사벌 24년 임진(壬辰:BC 748)년에 큰 비가 내려 산이 무너져서 골짜기를 메웠다.

단군 사벌 50년 무오(戊午:BC 723)년에 황제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바다의 곰을 습격하여 평정하였다.

단군 사벌 66년 갑술(甲戌:BC 707)년에 황제께서 조을(祖乙)을 파견하니, 곧바로 연(燕)나라 수도를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더불어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이긴 승리의 보고를 하였다.

단군 사벌 68년 병자(丙子:BC 705)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매륵(買勒)이 즉위하였다.

47) 36세 단군 매륵(買勒)황제 재위 58년

단군 매륵 원년 정축(丁丑:BC 704)년,

단군 매륵 28년 갑진(甲辰:BC 677)년에 지진과 해일(海溢)이 있었다.

단군 매륵 32년 무신(戊申)년에 서촌(西村)의 한 백성의 집에서, 어미소가 다리가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단군 매륵 35년 신해(辛亥:BC 670)년에 천하(天河)에서 용마(龍馬)가 나왔는데, 말등에는 별의 무늬가 있었다.

단군 매륵 38년 갑인(甲寅:BC 667)년에 협야후(陜野侯)와 배반명(裵 命)을 파견하여 바다의 도적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12월에는 삼도(三島:일본열도)를 모두 평정하였다.

단군 매륵 52년 무진(戊辰:BC 653)년 황제께서 군사를 파견하여 수유(須臾)의 군사와 함께 연(燕)나라를 정벌(征伐)하게 하였다. 이에 연(燕)나라 사람들이 제(齊)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齊)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으로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伏兵)을 만나 전투가 불리해지자, 화해(和解)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단군 매륵 58년 갑술(甲戌:BC 647)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마물(麻勿)이 즉위하였다.

48) 37세 단군 마물(麻勿)황제 재위 56년

단군 마물 원년 을해(乙亥:BC 646)년,

단군 마물 56년 경오(庚午:BC 591)년에 황제께서 남쪽으로 순행하시다가 기수(淇水)에 이르러,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다물(多勿)이 즉위하였다.

49) 38세 단군 다물(多勿)황제 재위 45년

단군 다물 원년 신미(辛未:BC 590)년,

단군 다물 45년 을묘(乙卯:BC 546)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두홀(豆忽)이 즉위하였다.

50) 39세 단군 두홀(豆忽)황제 재위 36년

단군 두홀 원년 병진(丙辰:BC 545)년,

단군 두홀 36년 신묘(辛卯:BC 510)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달음(達音)이 즉위하였다.

51) 40세 단군 달음(達音)황제 재위 18년

단군 달음 원년 임진(壬辰:BC 509)년,

단군 달음 18년 기유(己酉:BC 492)년에 황제께서 붕어 (崩御)하시니, 태자 음차(音次)가 즉위하였다.

52) 41세 단군 음차(音次)황제 재위 20년

단군 음차 원년 경술(庚戌:BC 491)년,

단군 음차 20년 기사(己巳:BC 422)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을우지(乙于支)가 즉위하였다.

53) 42세 단군 을우지(乙于支)황제 재위 10년

단군 을우지 원년 경오(庚午:BC 471)년

단군 을우지 10년 기묘(己卯:BC 462)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물리(勿理)가 즉위하였다.

54) 43세 단군 물리(勿理)황제 재위 36년

단군 물리 원년 경진(庚辰:BC 461)년,

단군 물리 36년 을묘(乙卯:BC 426)년에 융안(隆安)의 사냥꾼집의 우화충(于和 )이 자칭 장군이라 하며, 수만명의 무리를 모아 서북 36군(郡)을 함락시켰다.

황제께서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都城)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하 였다. 황제께서는 좌우의 궁인(宮人)과 함께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신주(神主)들을 받들어 모시고, 배를 타고 내려가 해두(海頭)를 찾아 갔으나, 여기서 황제께서 붕어하셨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군사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거하였다. 아홉지역의 군사(軍師)가 그를 따랐으며, 동서 압록(鴨綠)의 18성(城)이 모두 병사를 파견하여 원조하려고 왔다.

55) 44세 단군 구물(구물)황제 재위 29년

단군 구물 원년 병진(丙辰:BC 425)년, 3월에 큰 물이 도성(都城)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때 구물(丘勿)은 일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니, 적군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궤멸하니, 마침내 우화충(于和 )을 잡아 목을 쳐서 죽였다.

이에 구물(丘勿)은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마침내 3월 16일에 단(壇)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쳐 대부여(大夫餘)라고 하였으며, 삼한(三韓)을 고쳐 삼 조선(三朝鮮)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삼 조선은 비록 단군을 받들어서, 다스림의 체제는 한분에게 있었으나, 평화와 전쟁의 권한은 한분에게 있지 않았다.

7월에 명령하기를 해성(海城)을 개축하여 평양(平壤)이라 부르도록 하고, 별궁을 짓도록 하였다.

단군 구물 2년 정사(丁巳)년에 예관(禮官)이 청하여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지냈으니, 곧 3월 16일이었다. 황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 절은 세 번 머리를 숙이고, 두 번째 절은 여섯 번 머리를 숙이고, 세 번째 절은 아홉 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따르는 무리들은 특별히 열번씩 머리를 숙여 절하였다. 이를 삼육대례(三六大禮)라고 하였다.

단군 구물 17년 임신(壬申:BC 409)년에 감찰관(監察官)을 주(州)와 군(郡)에 파견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살피어, 효도(孝道)를 잘 하는자와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관리를 천거하게 하였다.

단군 구물 23년 무인(戊寅:BC 403)년에 연(燕)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단군 구물 29년 갑신(甲申:BC 397)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여루(余婁)가 즉위하였다.

56) 45세 단군 여루(余婁)황제 재위 55년

단군 여루 원년 을유(乙酉:BC 396)년에 장령(長嶺)과 낭산(狼山)에 성(城)을 쌓았다.

단군 여루 17년 신축(辛丑:BC 380)년에 연(燕)나라 사람이 변방의 군(郡)을 침략하자, 수비(守備)장수(將帥) 묘장춘(苗長春)이 그들을 격퇴하여 패배시켰다.

단군 여루 32년 병진(丙辰:BC 365)년에 연(燕)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 와서 요서(遼西)를 함락시키고, 운장(雲障)에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番朝鮮)이 상장군(上將軍) 우문언(于文言)에게 명령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진조선(眞朝鮮)과 막조선(莫朝鮮)도 역시 파병(派兵)하여 구원하려고 왔다. 복병(伏兵)을 설치해 놓고 협공하여,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병사들을 오도하(五道河)에서 파멸시키고, 요 서(遼西)의 여러 성(城)을 모두 다시 찾았다.

단군 여루 33년 정사(丁巳:BC 364)년에 연(燕)나라 사람들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면서, 배를 만들어 장차 쳐들어 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于文言)장군이 추격하여 크게 쳐 부수고, 그 장수를 사살(死殺)하였다.

단군 여루 47년 신미(辛未:BC 350)년에 북쪽 사막(沙漠)의 추장 액니거길(厄尼車吉)이 조정에 찾아 와서 말 200필을 바치며, 함께 연(燕)나라를 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곧 번조선(番朝鮮)의 젊은 장수 신불사(申不私)가 병력 만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燕)나라를 공격하여, 상곡(上谷)을 쳐서 빼앗고, 그 곳에 성읍(城邑)을 설치하였다.

단군 여루 54년 무인(戊寅:BC 343)년에 상곡(上谷)의 싸움 이후 연(燕)나라가 해마다 침범해 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和解)를 청하므로 이를 다시 허락하고, 또 조양(造陽)의 서쪽을 경계로 삼았다.

단군 여루 55년 기묘(己卯)년 여름에 큰 가뭄이 있었다. 이에 염려하기를,

「죄없이 옥에 갇힌 사람이 있어서일까?」하며, 죄인들을 크게 사면(赦免)하여 주고, 황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다. 9월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보을(普乙)이 즉위하였다.

57) 46세 단군 보을(普乙)황제 재위 46년

단군 보을 원년 경진(庚辰:BC 341)년에 번조선(番朝鮮)왕 해인(解仁)이 연(燕)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弑害)를 당하니, 이에 오가(五加)에서 쟁론(爭論)이 일어났다.

단군 보을 19년 무술(戊戌:BC 323)년 정월에 읍차(邑借) 기후(箕 )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번조선(番朝鮮)왕으로 자칭하며,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므로, 황제는 이를 허락하시고, 연(燕)나라의 침략에 대한 방비를 튼튼히 하도록 하였다.

단군 보을 38년 정사(丁巳:BC 304)년에 도성에 큰 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니, 황제께서는 해성(海城)의 별궁으로 피난하였다.

단군 보을 44년 계해(癸亥:BC 298)년에 북막(北漠)의 추장 니사(尼舍)가 음악(音樂)을 바치고, 후한 상을 받았다.

단군 보을 46년 을축(乙丑)년에 한개(韓介)가 수유(須臾)의 병력을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니, 상장군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격파하였다. 황제께서 도성으로 돌아 오셔서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렸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셨으나,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고열가(高列加)가 단군 물리(勿理)의 현손(玄孫)으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 되었으며, 또한 한개(韓介)를 물리친 공도 있으므로 즉위하였다.

58) 47세 단군 고열가(高列加)황제 재위 58년

단군 고열가 원년 병인(丙寅:BC 295)년,

단군 고열가 14년 기묘(己卯:BC 282)년에 단군왕검의 묘(廟:사당)를 백악산(白岳山)에 세우고, 유사(有司)에게 명령을 내려 사계절 제사를 지내게 하고, 황제께서는 일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받들었다.

단군 고열가 44년 기유(己酉:BC 252)년에 연(燕)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려왔다.

단군 고열가 48년 계축(癸丑:BC 248)년 10월 1일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이해 겨울 북막(北漠)의 추장 아리당부(阿里當夫)가 군사를 내어 연(燕)나라를 정벌 할 것을 청했으나, 황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며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단군 고열가 57년 임술(壬戌:BC 239)년 4월 8일에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에서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이었다.

단군 고열가 58년 계해(癸亥)년에 황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어지니, 명령은 많아도 시행되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자주 환란을 일으키니, 나라의 살림은 늘지 않고, 백성의 사기(士氣)는 날로 쇠약해지니, 3월 하늘님께 제사지내는 날 밤에 오가(五加)의 무리들과 더불어 의논하며 말씀하시기를,

「옛 우리의 많은 거룩한 조상들이 나라를 세우시고, 법통을 이어 가실 때에는, 그 덕이 크고 넓어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잘 지켜져 왔으나, 지금에 이르러 황도 (皇道)가 쇠미해지니, 여러 왕들이 서로 강함만을 다투고 있다. 짐은 덕이 적고, 나약하며, 능히 다스리지 못할 뿐 아니라, 어진이를 불러서 무마할 방책도 없어 백성들은 흩어지니, 오직 그대 오가(五加)들은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고, 감옥 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인과 포로들을 방면하여 돌려 보내라.」하시고, 다음날, 마침내 황제의 자리를 버리고, 입산수도(入山修道)하여 신선(神仙)의 길에 오르니, 이때에 오가(五加)들이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종실(宗室)의 대 해모수(解慕漱)는 몰래 수유왕(須臾王)과 황제의 법통을 잇기로 약속하고, 옛 도성(都城)인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니, 사방(四方) 지경(地境)내의 모든 사람들이 명령을 들었다. 이에 모든 장군들을 임명하고, 수유왕(須臾王)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왕으로 승격시켜, 상(上) 하(下)의 운장(雲障)을 지키도록 하였다.

대략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고구려란 해모수(解慕漱)의 태어난 고향이었으므로, 북부여를 또한 고구려라고도 칭하였다.

단군기원 3696년 고려 31대(서기1351∼1374) 공민왕 12년, 10월 3일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흥행촌의 늙은이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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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의 발전 모습

 

 고조선은 청동기 문화의 발전에 따라 점차 정치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해왔습니다.

 그리하여 기원전 4세기경에는 요령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갔습니다.

 기원전 2세기경에는 서쪽 지방에서 세력을 키워 위만이 준왕을 몰아 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이시기에는 철기 문화가 확장되면서 고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해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지방에서 위치한 진의 여러나라와 중국의 한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통해서

 경계적인 이익도 어덨습니다.

 고조선은 막강한 중국인 한 의 대군을 맞아 1년동안 버티다가 왕검성이 함락되면서 고조선은 멸망했습니다.

 

 * 고조선의 사회 모습

 

 고조선 사회의 생산력의 증가로 사유 재산이 늘어나면서 빈부의 차이가 생기면서

 치와 군사를 담당하는 재배 계총과 생산을 담당하는 피지배계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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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왕검(王儉)의 아버지는 단웅(檀雄:18대 거불단 한웅)이고, 어머니는 웅씨국(熊氏國)의 왕녀이며, 신묘(辛卯:BC 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밝달나무 밑에서 태어났다.

신인(神人)의 덕(德)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다. 14세 되던 갑진(甲辰:B.C 2,357)년에 웅씨국(熊氏國)왕이 왕검(王儉)의 신성(神聖)함을 듣고 비왕(裨王=副王)으로 삼아, 큰 고을과 나라의 일을 대신 처리하도록 하였다. 무진(戊辰: B.C 2,333)년 중국의 요(堯)나라 임금 때에 단국(檀國=熊氏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밝달나무의 터에 이르러, 나라의 국인(國人:공무원)들이 추대하여 천제(天帝)로 삼으니, 자식들이 뭉치듯이 구한(九桓)이 하나로 되고, 신성한 교화(敎化)가 먼 곳에 까지 미치었다.

이분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니, 비왕(裨王)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천제(天帝)의 자리에 있기를 93년 이었으며, 수명은 130세 였다.」고 하였다.

2) 아주 옛날 바야흐로 신시(神市)의 세상이 시작 될 때에 사방에서 모여온 백성들이 산과 골짜기에 널려 퍼져 살았으며, 풀로 옷을 만들어 입고 맨발로 다녔다.

신시(神市)에 나라를 세운지 1,565년 10월 3일, 무진(戊辰) 원년(元年)에 신인 왕검(神人王儉)이 있어, 오가(五加)의 우두머리가 되어, 8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밝달나무의 터전에 와서 무리와 더불어 삼신(三神)께 제사를 받들었는데, 지극한 신인(神人)의 덕(德)과 성인(聖人)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으며, 능히 조서(詔書)를 받들고, 하늘의 뜻을 계승함이 높고, 크고, 또 열렬하였으므로 구한(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천제(天帝)의 화신(化身)인 황제(皇帝)로 추대하여, 복종하고 충성을 하였으니, 이분이 바로 단군왕검(檀君王儉)이시다.

신시(神市)의 옛 규범(規範)을 부활시켜, 아사달(阿斯達)에 도읍(都邑)하고, 나라를 세우니,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3)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하늘의 법칙은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니, 그 문은, 너희들이 오로지 그 정성이 순수하게 하나가 되어야, 너희 마음으로 마침내 하늘님을 볼 것이다.

하늘의 법칙은 항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또한 한가지니, 몸을 추수리고 마음을 잘 지켜야, 이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교화(敎化)되어지고, 또 하늘의 법칙과 합쳐지면 이로서 세상 어느 곳에서도 쓰일 수가 있느니라.

너희가 태어남은 오로지 부모로 인연하였고, 부모는 하늘로부터 내려 오셨으니, 오직 너희 부모를 존경하고, 또한 하늘님을 지극히 공경하면, 이것이 나라에까지 그 힘이 미치니, 이것이 충효(忠孝)이니라. 너희가 능히 이 도리를 체득하면, 하늘이 무너져도 먼저 화(禍)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짐승에게도 짝이 있으며, 다 헤진 신발도 짝이 있나니, 너희 남녀도 서로 화목하여 원망하지 말고, 질투하지 말며, 음란하지 말 것이다.

4) 너희들은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크고 작은 것 없이 모두 아프지 않는가?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라. 서로 헐뜯지 말고 서로 도우며, 다투거나 싸우지 말아라. 그리하면 가정과 나라가 흥(興)할 것이다.

너희들은 소나 말을 살펴 보아라. 오히려 먹이를 서로 나누어 먹지 않더냐? 너희가 서로 양보하고, 서로 헐뜯지 않고, 서로 빼앗지 않으며, 서로 공모하여 도둑질 하지 않으면, 나라는 융성(隆盛)해 질 것이다.

너희들은 호족(虎族)의 무리를 생각해 보아라, 힘만 세고 난폭하며, 신령하지 못하여 비천하게 되어 버렸다.

너희는 오만하여 순종치 않거나 난폭하게 날뛰지 말것이며, 사람의 성품을 상하게 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항상 하늘의 법칙을 준수하며, 능히 모든 것을 사랑하여라. 너희는 넘어지려는 자를 부축하여 주고, 약한 자를 업신여겨 깔보지 말고, 긍휼히 여겨 도와 주어야 하며, 비천하다고 얕 보지 말 것이니라.

너희가 만일 이러한 뜻을 어긴다면, 하늘님(하느님)의 도움을 영원히 얻을 수 없어, 네 자신은 물론이고, 네 집안 까지도 죽고 망할 것이다.

너희가 만일, 벼 논에 불을 놓으면, 벼는 남김없이 죽을 것이며, 이를 보고 신인(神人)은 화를 내실 것이 아닌가?

너희가 아무리 뚜껍게 싸서 냄새를 감춘다 하여도 반드시 그 냄새는 새어 나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공경하는 마음과 올바른 성품을 지니고 사특한 마음을 품지 말며, 악을 은폐하지 말고, 허물을 감추지 말며, 마음은 능히 하늘을 공경하며, 백성을 가까이 하라. 너희는 이렇게 함으로서 무궁한 복록이 있을 것이다. 너희 오가(五加)의 무리들은 그 뜻을 잘 따라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5) 이때에 팽우(彭虞)에게 명령하여 땅을 개척하도록 하였고, 성조(成造)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였으며, 신지(臣智)에게 명령하여 글자를 만들게 하였으며, 기성(奇省)에게는 의약(醫藥)을 베풀게 하였으며, 나을(那乙)에게는 호적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희(羲)에게는 점치는 일을 관장케 하였으며, 우(尤)에게는 군대를 관장케 하였다. 비서갑(斐西岬)의 하백 녀(河伯女)를 거두어 아내로 삼고, 누에치기를 다스리게 하니, 인정이 넘치고, 덕이 넉넉한 다스림이 온 세상에 밝게 두루 미치었다.

단기(檀紀) 50년 되던 정사(丁巳)년에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이 편히 쉴 수가 없었다. 황제께서는 풍백(風伯)인 팽우(彭虞)에게 명령하여, 높은 산을 정하여 큰 강의 물을 다스리게 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하였으니, 이에 대한 공적비(功績碑)가 우수주(牛首州)에 있다.

단기 51년 무오(戊午)년에 황제께서 운사(雲師)인 배달신(倍達臣)에게 명령하여 혈구(穴口=강화도)에 삼랑성(三郞城)을 짓고, 제천(祭天)의 단(壇)을 마리산(摩璃山)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바로 그것이다.

단기 67년 갑술(甲戌)년에 황제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虞)의 사공(司空)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하였으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하였다. 또 회대(淮岱)지방의 제후(諸侯)들을 평정하여 나라를 나누어서 이를 다스렸는데 우(虞)나라의 순(舜)제후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6) 단기 93년 경자(庚子)년 황제께서 섬돌과 흙으로 쌓여진 버들궁에 계셨는데, 풀은 우거져 길이 없고, 밝달나무가 무성한 그늘에서는 곰과 호랑이가 노닐고, 양과 소가 살찌는 것이 보였다. 밭두둑을 만들고 밭도랑을 파게하며, 누에치기를 권하고 고기잡이와 짐승 사냥하는 것을 다스리니, 백성들은 넉넉하여 재물이 남으므로, 나라살림에 도움이 되도록 보태었다. 10월 상달(上月)에 나라 안에 큰 모임을 가지고 하늘님께 제사를 지내니,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고 환호하며 스스로 즐거워했다. 이에 단군황제의 덕화(德化)와 교화(敎化)와 치화(治化)가 온누리에 가득 넘쳐서 멀리 바다의 탐라(耽羅)섬까지 점차로 널리 퍼져 나갔다.

이때에 일정한 지역을 갈라서 천하의 땅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三韓)은 모두 오가(五家) 64족을 포함하였다.

이해 3월 15일 단군황제께서 봉정(蓬亭)에서 붕어(崩御)하시니, 교외로 십리쯤 떨어진 땅에 장사를 지냈다.

만 백성이 부모의 상(喪)을 당한 것 같이 단군황제의 조기(弔旗)를 받들어 모시고, 아침 저녁으로 함께 모여 경배하며 항상 마음에 사모하며 잊지 못하였다.

이에 태자 부루(扶婁)가 새로 황제가 되었다.

7) 2세 단군 부루(扶婁)황제 재위 58년

단군 부루 원년(元年)인 신축(辛丑:BC 2240)년에 황제께서는 어질고 복이 많아 큰 재물을 물려 받아 그 재물이 풍부하였으며, 백성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림이 공평하니 굶주리거나 추위에 떠는 백성이 한 사람도 없었다.

매년 봄 가을로 나라안을 두루 순방하여 살피시고, 하늘님께 제사를 올리며 그 예(禮)를 다하였다. 지방의 여러 왕들의 잘하고 잘못함을 살펴서, 상(賞)주고, 벌(罰)주는 일을 지극히 바르게 하였으며, 도랑을 파고 고치도록 하였으며, 농사 짓기와 뽕나무 심기를 권장하고, 공부하는 집을 짓고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는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로 떨쳐 졌다. 처음으로 우(虞)지방의 순(舜)왕이 남국(藍國)에 인접한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를 잘 감독치 않고 방치하므로, 부루황제께서 병사를 파견하여 정벌하여 모두 쫓아 내고, 동무(東武)와 도라(道羅) 등을 그 곳의 왕으로 임명하여 그 공적을 나타내었다.

8) 신시(神市) 이래로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크게 모여 하늘님께 제사(祭祀) 지낼 때 마다, 함께 노래 부르고 큰 덕을 찬양하며 서로 화목을 다졌다. 어아가(於阿歌)를 부르고 하늘님과 조상에 대하여 감사하며, 신인(神人)이 사방(四方)을 화합하는 식을 올리니, 이것이 곧 참전( 佺)의 계(戒)가 되었다. 그 가사(歌詞)는 다음과 같았다.

「어아 어아 우리들, 하늘님과 조상님의 크신 은혜와 높은 공덕, 배달나라 우리들, 누구라도 잊지 마세 !

어아 어아, 착한 마음은 큰 활되고, 나쁜 마음은 과녁되니,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줄같아, 착한 마음 바른 화살이 한 마음 같네 !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큰 활되어, 한 화살로 과녁마다 적중시켜, 끓는 물을 쏟아 버리듯, 착한 마음속에 있는 한 덩어리 나쁜 마음 씻어 보자 !

어아 어아 우리들, 누구라도 사람마다 굳세고 굳센 큰 활같은 마음, 천년 만년 크신 은덕 배달나라 영광일세

우리들의 하늘님이시여 ! 우리들의 조상님이시여 !」

9) 단군 부루 2년 임인(壬寅:BC 2,239)년 황제께서는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을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물었는데, 이보다 앞서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은 부모의 초상을 잘 치루었으니, 삼일 동안은 게으르지 않았으며, 석달 동안은 소홀히 하지 않았고, 일년이 될 때까지도 슬프하고 애통하였으며, 삼년동안은 계속 슬픔과 근심에 젖어 있었다. 이로부터 풍속이 변하여 부모의 상(喪)을 치룸에 있어, 그 동안 다섯 달로 끝내던 상(喪)을 오래 끌수록 영광된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이 어찌 천하의 큰 성인(聖人)이라 하지 않을 것인가! 이와 같이 능히 덕(德)으로 교화(敎化)하면 그 유행(流行)이 온 백성에게 전하여 지는 것이 우편(郵 便)의 빠름과 같다. 소련(少連)과 대련(大連)은 이렇듯 효(孝)로서 알려 졌으니, 공자(孔子)도 역시 이를 칭찬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무릇 효도(孝道)라 함은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도와 넉넉하게 하는 근본으로서, 온 세상에 두루 알려 삶의 표준이 되게 하였다.

10) 단군 부루 3년 계묘(癸卯)년 9월에 황제의 명령을 적은 글, 즉 조서(詔書)를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아서 목을 덮도록 하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으며, 되(斗)와 저울, 즉 도량형기(度量衡器)들을 관청(官廳)에서 정한대로 따르게 하였으며, 삼베나 모시의 시장가격이 장소에 따라 서로 다르지 않고, 백성들이 스스로 속이지 않으니, 어디서나 두루 편하였다.

단군 부루 10년 경술(庚戌)년 4월에 밭을 정(井)자 모양으로 구획정리를 하여 나누어 줌으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게 하였다.

단군 부루 12년 임자(壬子)년에 신지(神誌)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단군 부루 58년 무술(戊戌:BC 2183)년에 부루황제께서 붕 어(崩御) 하셨는데 이날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산짐승은 떼를 지어 산위에서 어지럽게 울부짖고, 만 백성들은 심히 애통하였다.

그후 백성들은 제사를 베풀기 위하여, 집안의 적당한 곳을 택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토기 그릇에 쌀과 곡식을 가득히 담아 제단위에 올려 놓고 부루단지(扶婁壇地)라 칭하였다. 이를 업신(業神)이라 하고, 또는 전계(佺戒)라 칭하였다. 이로서 온전한 사람을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하는 말씀을 받았으니, 이는 사람과 생업이 함께 온전하게 갖추어 졌다는 뜻인 것이다. 태자 가륵이 새 황제로 즉위하였다.

11) 3세 단군 가륵(嘉勒)황제 재위 45년

단군 가륵 원년 기해(己亥:BC 2,182))년 5월 황제께서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을 불러, 선왕(先王)들께서 백성을 교화(敎化)하고, 나라를 다스림에 근본으로 삼았던 전(佺)과 종(倧)의 이치에 관하여 물었다.

보륵(普勒)은 엄지 손가락을 교차시켜 왼손위에 오른손을 올려 놓아 삼육대례(三六大禮)를 행한 후 나아가 말씀을 드렸다.

「하늘님(하느님)은 능히 만물이 생겨나게 하고, 그 성품을 각각 온전하게 하므로, 하늘님의 현묘하심을 백성들은 모두 의지하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왕은 능히 덕(德)과 의(義)로서 세상을 다스려, 각각 그 생명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왕이 베풀어야 할 바이며, 이렇게 하면 백성들은 모두 승복할 것입니다. 사람을 우주의 근본된 존재로 알고, 가장 귀하게 여겨, 바르게 다스림은 나라가 선택할 이념이며, 사람은 온전해 져야 한다는 것은, 백성이 노력해야 할 계율(戒律)인 것입니다.

모두 칠일을 기한 삼아, 삼신(三神) 하늘님께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되기를 세번씩 빌어 다짐한다면, 구한(九桓)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게 되어, 잘 다스려 질 것입니다.

무릇 그 길은, 부모가 되기를 원하면 부모다워야 하며, 임금이 되기를 원하면 임금다워야 하며, 스승되기를 원하면 스승다워야 하며, 자녀가 되고, 신하가 되고, 제자가 되려면, 역시 자녀 다워야 하며, 신하 다워야 하며, 제자 다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한웅천왕께서 처음으로 신시(神市)를 열고 나라를 세우신 까닭이나, 하늘님께서 교화(敎化)를 베푸심도, 이는 나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니, 홀로 도(道)를 구하며, 나를 비우고, 재물을 있게 하면, 능히 내 몸과 더불어 인간세 상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님을 대신하여 임금은 천하(天下)에 큰 도(道)를 펴서 대중을 도와서, 한 사람이라도 본성(本性)을 잃지 않도록 하고, 만왕(萬王)을 대신하여 인간을 주관하여 병을 없애고, 원한을 풀어 주고, 생명을 해치는 물건은 하나도 없게 하고, 나라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과 망령됨을 고쳐 참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7일을 기한으로 3번을 정하여, 모든 사람들이 교화(敎化)의 모임을 갖고 계율을 지켰다. 이로부터 조정(朝庭)에는 종훈(倧訓)이 있고, 백성에는 전계(佺戒)를 두었으니, 우주의 순수한 정기(精氣)는 햇살같이 땅에 내리고, 세 빛과 다섯가지의 정기(精氣)는 사람의 머리골에 응결되고, 현묘(玄 )하게도 스스로 광명(光明)을 얻으니 다같이 위엄이 있었다. 이것이 굳세게 일어나 살게 함이라. 이를 구한(九桓)에 베풀어 주니, 구한(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따르고, 하나로 돌아와 교화(敎化)되었다.

12) 단군 가륵(嘉勒) 2년 경자(庚子)년, 그 시대의 풍속은 오히려 하나 같지 않았으니,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形象)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 글이 있다 해도, 열 집이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한나라에서도 백리(百里)만 떨어져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령하여〈바른 소리 글〉, 즉 정음(正音) 38자를 지었으니, 이 글을 가림토(加臨土)라 하였으며,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ㆍ ㅣ ㅡ ㅣ ㅣㅡ ㅡ ㅣ ㅣ ㅡ ㅡ × ㅌ

ㅇ ㄱ ㅂ ㅁ ㄴ ㅿ ㅈ ㅊ ∧ ∧ ㆆ ∧ ∨

ㅣ ㄹ ㅐ ㅒ ㅿ ㄱ ㅈ ∧ ㄱ ㅗ ㅍ ㅍ 』

단군 가륵 3년 신축(辛丑)년 신지(神誌)인 고글(高契)에게 명령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수(編修)하게 하였다.

단군 가륵 6년 갑진(甲辰)년 열양(列陽)지방의 욕살(褥薩:장관급)인 색정(索靖)에게 약수(弱水)지방으로 옮기도록 명령한 후 종신토록 그 곳에 머물게 하였다가, 후에 사면하여 그 땅의 욕살(褥薩)로 봉하니, 그가 흉노(凶奴)의 조상이 되었다.

단군 가륵 8년 병오(丙午:BC 2,175)년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께서는 이를 지백특(支伯特)에서 토벌하였다. 초여름 4월이 되자 임금께서는 불함산(不咸山)에 올라 민가(民家)를 보고는, 연기가 적게 나는 집은 조세(租稅)를 줄이도록 명령하시어, 조세(租稅)에 차이가 있게 하였다.

단군 가륵 10년 무신(戊申)년에 두지주(豆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니, 여수기(余守己)에게 명령하여 그 두목인 소시모리(素尸毛犁)를 참수(斬首)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그 땅을 칭하여 소시모리(素尸毛犁)라고 하다가, 지금은 음(音)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이라 한다.

그 후손 가운데 협야노(陜野奴)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세 섬을 점거하여 살면서 스스로 천왕(天王)이라 칭하였다.

단군 가륵 45년 계미(癸未:BC 2,138)년 9월에 가륵황제께서 붕어하시었다.

태자 오사구(烏斯丘)가 새 황제로 즉위하였다.

13)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황제 재위 38년

단군 오사구 원년 갑신(甲申:BC 2,137)년 황제의 동생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蒙古里)의 왕으로 봉하였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 후손이라고 한다.

겨울 10월에는 북쪽을 순시하고 돌아와, 태백산(太白山)에 이르러 삼신(三神) 하늘님께 제사하고, 신비한 약초를 얻었는데, 이를 인삼(人蔘)이라고도 하고, 선약(仙藥)이라고도 한다. 그 후로부터 신선(神仙)이 되면 죽지 않는다는 설은 삼(蔘)을 채집하여 정기를 보전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간혹 산삼(山蔘)을 채집하는 집이 있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기하고 영험한 매우 기적같은 경험이 많다고 하였다.

단군 오사구 5년 무자(戊子:BC 2,133)년에 둥근 구멍이 뚫린 조개 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가을 8월에는 하(夏)나라 사람들이 찾아와 특산물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하여 갔으며, 10월에는 조정과 민간에서, 돌에다 별도로 기록한 신서(神書)를 백성들에게 공개 하였다.

단군 오사구 7년 경인(庚寅:BC 2,131)년에 배 만드는 곳을 살수(薩水)의 상류에 설치하였다.

단군 오사구 19년 임인(壬寅:BC 2,119)년 하(夏)나라의 왕, 상(相)이 백성들에게 덕(德)을 잃어버리니, 황제께서 식달(息達)에게 명령하여 람(藍), 진(眞), 변(弁)의 삼부(三部)의 병력을 인솔하여 가서 정벌(征伐)하게 하였다. 천하가 이 소식을 듣고 복종하였다.

단군 오사구 38년 신유(辛酉:BC 2,100)년 6월 오사구 황제께서 붕어(崩御) 하시니, 양가(羊加)의 구을(丘乙)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14) 5세 단군 구을(丘乙)황제 재위 16년

단군 구을 원년 임술(壬戌:BC 2,099)년에 황제께서 명 령하여 태백산(太白山)에 제단을 쌓게하고, 사신(使臣)을 파견하여 제사를 지냈다.

단군 구을 2년 계해(癸亥)년 5월 황충(蝗 )의 떼가 크게 일어나 온통 밭과 들에 가득 찼다. 황제께서 친히 황충이 에워싼 밭과 들을 둘러보시고는, 삼신 하늘님께 고(告)하여 황충을 없애 주기를 비니, 며칠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단군 구을 4년 을축(乙丑:BC 2,096)년 처음으로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사용하여 책력(冊曆)을 만들었다.

단군 구을 8년 기사(己巳)년에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해(東海)의 바닷가에 도착하였다.

단군 구을 16년 정축(丁丑:BC 2,084)년 황제께서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시어 삼신(三神)의 제단을 쌓아 봉축(封築)하고, 환화(桓花:무궁화)를 많이 심었다. 7월 황제께서 남쪽으로 각 지역을 두루 순행(巡行)하시다가 풍류강(風流江)에 이르러 송양(松壤)에서 병을 얻어 갑자기 붕어(崩御)하시니, 대박산(大博山)에 장사(葬事)를 지냈다.

우가(牛加)의 달문(達門)이 뭇사람으로 부터 뽑혀서 대통(大統)을 계승하였다.

15) 6세 단군 달문(達門)황제 재위 36년

단군 달문 원년 무인(戊寅:BC 2,083)년,

단군 달문 35년 임자(壬子:BC 2,049)년에 모든 왕들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여, 구월산(九月山)에서 삼신 하늘님께 제사를 지내게 하고, 신지(神誌)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 하였다. 그 서효사(誓效詞)에 이르기를,

「아침 햇살을 먼저 받는 땅에, 삼신(三神)께서 밝고도 빛나게 세상에 임하셨으니, 한인(桓仁)께서 먼저 모습을 나타내시고, 넓고 또 깊은 덕을 심으시니, 모든 신(神)들이 의논하여 한웅(桓雄)을 보내서 한인(桓仁)의 뜻을 계승하여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셨으며, 치우천왕(蚩尤天王)께서는 청구(靑邱)에서 일어나 만고에 무(武)의 명성을 떨치어, 회대(淮岱)가 모두 천왕(天王)께로 돌아 왔으니, 이에 천하(天下)가 감히 넘볼 수 없었다. 왕검(王儉)께서 대명(大命)을 받으시니, 기뻐하는 소리가 구한(九桓)을 진동하였으며, 고기가 물을 얻음같이 백성은 소생하고, 바람에 풀잎이 나부끼듯 덕화(德化)가 새롭고, 원한(怨恨)이 있으면 먼저 풀어주고, 병이 있으면 먼저 병을 없애주며, 어짐과 효도(孝道)로, 한 마음으로 살아 가니 온 세상이 광명(光明)으로 가득 하였습니다.

진한(眞韓)은 나라 안의 민심을 진정시키고 안정시켜서 도리(道理)로서 다스리니 모든 것이 새롭기만 하였으며, 모한(慕韓)은 그 왼쪽을 보호하고, 번한(番韓)은 그 남쪽을 지키니, 높은 바위가 사방을 벽으로 에워싸듯 하였습니다.

거룩한 주인이신 황제께서 저울추와 저울판과 같은 새로운 수도로 행차하시었으니, 저울판은 백아강(白牙岡)이요, 저울대는 소밀랑(蘇密郞)이며, 저울추는 안덕향(安德鄕)이었습니다. 머리와 꼬리가 균형이 잡히듯 평균을 이루니, 덕(德)을 신뢰하고, 신(神)의 정기(精氣)를 보호하여, 나라가 흥(興)하여져 태평성세(太平盛世)를 보전하였으니, 70여국이 굴복하여 조공을 바쳤으며, 영원히 삼한(三韓)의 의로움을 보전하여, 왕의 업적이 흥(興)하고 융성(隆盛)하였습니다. 그러나 흥(興)하고 폐(廢)함이 말로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성이니, 그 일은 하늘님(천신:天神)을 섬기는 데 있습니다.」고 하였다.

16) 이어 모든 왕들과 약속하여 말씀하시길,

「무릇 나와 함께 이를 약속하는 사람은 한국(桓國)의 오훈(五訓)과 신시(神市)의 오사(五事)를 영구히 지켜 나갈 것을 안건(案件)으로 삼는다. 하늘님께 제사하는 의식(儀式)은 사람을 근본으로 삼고, 나라를 위하는 도리는 백성들의 먹고 사는 것을 우선해야 하니, 농사(農事)가 만가지 일중에 가장 근본이며, 제사(祭祀)는 오교(五敎)의 근원이니, 마땅히 국인(國人:공무원)과 더불어 산업을 함께 다스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먼저 겨레의 중요함을 가르치시고, 다음으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사형(死刑)제도와 남을 대신하여 벌을 받는 제도를 없애고, 국경을 보호하며, 화백(和白)제도를 오로지 공정히 하여, 이로서 다함께 화합의 마음과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마음을 베푸니, 스스로 수양(修養)이 되었으며, 바로 어진 정치의 시작인 것이었다. 이때에 동맹을 맺어 공물(貢物)을 바쳤던 나라는 큰 나라가 둘이요, 작은 나라가 스물이였으며, 부락은 3,624개 마을이었다.

단군 달문 36년 계축(癸丑:BC 2,048)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양가(羊加)인 한율(翰栗)이 즉위 하였다.

17) 7세 단군 한율(翰栗)황제 재위 54년

단군 한율 원년 갑인(甲寅:BC 2,047)년,

단군 한율 54년 정미(丁未:BC 1,994)년 황제(皇帝)께서 붕어(崩御)하시고, 우서한(于西翰)이 즉위 하였다.

18) 8세 단군 우서한(于西翰) 또는 오사함(烏斯含)황제

재위 8년

단군 우서한 원년 무신(戊申:BC 1,993)년에 농사의 20/1을 세금으로 내는 법을 정하여, 있는 자와 없는 자에게 널리 통하게 하였으며, 이로서 서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다.

단군 우서한 2년 기유(己酉)년에는 풍년이 들어 벼 한 줄기에 이삭이 여덟개씩이나 맺혔다.

단군 우서한 4년 신해(辛亥)년 황제께서 옷을 바꿔 입으시고 몰래 국경을 넘어서, 하(夏)나라의 정세를 살피고 돌아와 관(官)의 제도를 크게 고쳤다.

단군 우서한 7년 갑인(甲寅)년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안에 들어 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三尺)나 되었다고 한다.

단군 우서한 8년 을묘(乙卯)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인 아술(阿述)이 즉위 하였다.

19) 9세 단군 아술(阿述)황제 재위 35년

단군 아술 원년 병진(丙辰:BC 1,985)년 황제께서는 어질고 덕이 많으사 백성들이 금지하는 법을 위반하는 자가 있어도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똥 눈 땅이 비록 더럽다고 해도 비나 이슬이 내리면 때를 맞춰 씻겨지는 것이다」하시며, 죄 지은 자를 벌하지 않고 용서하며 교화(敎化)하니, 마침내 죄 지은자가 그 덕(德)에 감화(感化)되었다. 이에 인정이 넘치는 교화(敎化)가 크게 행하여 졌다. 이 날에 두 태양이 나란히 떠 올랐으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마치 담장과 같이 늘어 섰었다.

단군 아술 2년 정사(丁巳)년에 청해(靑海)의 욕살(褥薩) 우착(于捉)이 군사를 일으켜 궁성을 침범하니, 황제께선 상춘(常春)으로 몸을 피하신 후, 새 궁궐을 구월산(九月山) 남쪽기슭에 새로 짓게 하였으며, 우지(于支)와 우율(于栗) 등을 파견하여 우착(于捉)을 토벌하여 죽이도록 명령한 후 3년만에 옛 궁궐로 돌아 왔다.

단군 아술 35년 경인(庚寅:BC 1,951)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우가(牛加)의 노을(魯乙)이 즉위 하였다.

20) 10세 단군 노을(魯乙)황제 재위 59년

단군 노을 원년 신묘(辛卯:BC 1,950)년에 처음으로 큰 동물우리(집)를 만들어 가축 이외의 짐승들도 길렀다.

단군 노을 2년 임진(壬辰)년에 황제께서 몸소 마을로 행차하시어 어가(御駕)가 야외에 머무르며, 백성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국정(國政)에 대하여 물으니, 현자(賢者)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단군 노을 5년 을미(乙未:BC 1,946)년에는 대궐밖에 신원목(伸寃木)을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들을 들어시니, 나라 안팎이 크게 기뻐하였다.

단군 노을 16년 병오(丙午:BC 1,935)년에는 동문밖 십리의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나드니 질줄을 모르고, 누워 있던 돌이 저절로 일어 섰으며, 천하(天河)에서는 신기한 거북이가 등에 그림을 짊어지고 나타났는데, 그 그림이 윷판과 같았으며, 발해(渤海)연안에서는 금덩이가 나왔는데, 그 양(量)이 13석(石)이나 되었다.

단군 노을 35년 을축(乙丑:BC 1,916)년에는 처음으로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天文臺)를 설치하였다.

단군 노을 59년 기축(己丑:BC 1,892)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도해(道奚)가 즉위하였다.

21) 11세 단군 도해(道奚)황제 재위 57년

단군 도해 원년 경인(庚寅:BC 1,891)년에 황제께서는 오가(五加)에 명령을 내려 열두 명산(名山)의 제일 좋은 곳을 골라 국선(國仙)의 소도(蘇塗)를 설치하게 하였다. 밝달나무를 주위에 많이 심은 후, 가장 큰 나무를 한웅(桓雄)의 상(像)으로 봉하여, 여기에 제사지내며, 웅상(雄常)이라 불렀다.

이때 국자랑(國子郞)의 스승으로 있던 유위자(有爲子)가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생각하옵건대 우리의 신시(神市)는 실로 한웅천왕(桓雄天王)께옵서 나라를 처음으로 세우시고 무리들을 받아 들이어, 사람이 온전해지는 것을 계율(戒律)로 세워 백성들을 교화하셨습니다. 이에 천경(天經)과 신고(神誥)의 뜻을 가르치고 설명하였으며, 윗 사람은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대검(大劍)을 차고, 풍류(風流)를 배우게 하였으며, 아래 백성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함께 다스렸으니, 들에는 도적이 없으므로 자연히 활동하기가 안전하였으며, 세상사람들은 병이 없으니 자연히 장수하였으며, 탐욕이 없으니 자연히 넉넉하였으며, 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며, 달을 맞아 춤을 추 니, 먼곳까지 그 덕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흥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이에 덕화(德化)와 교화(敎化)가 만백성에게 더하여 지니, 칭송하는 소리가 사해(四海)에 넘치었습니다. 이와같이 하시기를 청하옵니다.」고 하였다.

22) 겨울인 10월에 황제께서 대시전(大始殿)을 세우도록 명령하셨다. 대시전(大始殿)은 극히 크고 화려하였으며, 돌아가신 천제환웅(天帝桓雄)의 상(像)을 안전하게 받들어 모셨는데, 그 머리위에는 광채가 번쩍 번쩍하여 마치 큰 태양과도 같았다. 그 둥근 빛은 온 우주를 밝게 비추고, 밝달나무 아래 한화(桓花)의 위에 앉아 계시는 모습은 하나의 살아 있는 신(神)이 온전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천부인(天符印)이 표시(標示)되어 있는 큰 하나의 원(圓)으로 된 그림을 누전(樓殿)에 걸어 놓았다. 호를 거발한(居發桓)이라 하였다. 3일 동안 규범을 지키게 하고, 7일 동안 그 뜻을 말씀하시니, 소문이 사해(四海)를 진동(振動)하였다.

말씀한 내용을 간절한 마음으로 표시한 글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하늘은 고요하고 묵묵하여 큰 것이며, 그 이치는 온누리에 막힘없이 널리 미침이요, 그 일은 참됨으로부터 시작됨이라.

땅은 감추고 저장함이 큰 것이며, 그 이치는 온누리를 본받아 현상화(現像化)함이요, 그 일은 부지런함으로부터 시작됨이라.

사람은 알고 분별하는 능력이 큰 것이며, 그 이치는 온누리를 고르게 함이요, 그 일은 힘을 모아 협력함으로부터 시작됨이라.

그러므로 하늘님께서는 정성된 마음가운데 내려와 성품을 통하여 밝게 빛나게 하고,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로 교화하여, 인간세상을 크게 도우셨다.」고 하였다.

이에 그 말씀을 돌에 새겼다.

23) 단군 도해 28년 정사(丁巳:BC 1,864)년에 장소를 마련하여 조공(朝貢)으로 받은 물건, 즉 방물(方物)들을 모아 진귀한 것들을 전시하니, 천하의 백성들도 다투어 방물(方物)을 헌납하니, 진열한 것이 산더미와 같았다.

단군 도해 38년 정묘(丁卯:BC 1,854)년에 백성들 가운데 장정(壯丁)들을 뽑아서 모두 병사로 삼았다. 그 중 장사(壯士) 20명을 선발하여 하(夏)나라 수도로 보내, 처음으로 나라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서 위세와 명성을 보였다.

단군 도해 46년 을해(乙亥:BC 1,846)년에 송화강(松花江) 연안에 관청을 짓고 세우니, 배와 노 등 그에 관계되는 기물(器物)이 세상에 크게 성행하여 졌다. 3월에 삼신(三神)에게 산(山)의 남쪽에서 제사를 지냈다. 술을 올리고 음식을 준비하여 간절한 원도(願禱)의 말씀을 드린 후, 술을 따르고 제사의식(祭祀儀式)을 행하였다. 그날 밤 특별한 은사로 술을 베풀어 주시고, 국인(國人)들과 함께 술잔을 돌려가며, 여러 가지 재주들을 관람하셨다. 이 자리가 끝난 후 누전(樓殿)에 올라 천부경(天符經)을 논(論)하고, 삼일신고(三一神誥)를 강연(講演)하시었다.

오가(五加)의 국인(國人)들을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이제부터는 살생(殺生)을 금하고, 모든 생물(生物)들을 놓아 주고, 옥문(獄門)을 열어 석방하고, 떠도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사형(死刑)제도를 없애도록 하여라.」고 하셨다. 내외의 모든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단군 도해 57년 병술(丙戌:BC 1,835)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만 백성이 슬퍼함이 마치 부모의 상(喪)을 당한 것같이 삼년 동안 근심하니, 온누리에 노래소리가 끓겼다. 우가(牛加)의 아한(阿漢)이 즉위하였다.

24) 12세 단군 아한(阿漢)황제 재위 52년

단군 아한 원년 정해(정해:BC 1834)년,

단군 아한 2년 무자(戊子)년 여름 4월에 외뿔가진 짐승이 송화강(松花江) 북쪽에 나타났다. 가을 8월에 황제께서 나라안을 두루 순시(巡視)하였는데, 요하(遼河)에 이르자 좌편에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황제와 왕들의 이름과 호(號)를 새겨 이를 전하게 하였다. 이것이 금석문(金石文)으로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훗날 창해역사(滄海力士) 여홍성(黎洪星)이 이곳을 지나다가 비석(碑石)을 보고 시(詩)를 한수 지어 말하기를,

「마을밖 변한(弁韓)이라 칭하는 곳에

별난 비석하나 갈라진 채로 있구나

받침대는 잡초에 덮이고 철쭉만 붉었는데

글자는 사라지고 이끼만 푸르구나

처음 세워 완성했던 생생한 모습으로

이끼를 잘라내고 글자를 찾아 내려하나

흥하고 망함이 기울어 지고

바쳐진 비문(碑文)에 보이는 증거는 없으나

이 어찌 단군황제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단군 아한 29년 을묘(乙卯:BC 1,806)년에 청아(菁莪)의 욕살(褥薩)인 비신(丕信)과 서옥저(西沃沮)의 욕살(褥薩)인 고사침(高士琛)과 맥성(貊城)의 욕살(褥薩)인 돌개(突盖)를 봉(封)하여 왕으로 삼으셨다.

단군 아한 52년 무인(戊寅:BC 1,783)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우가(牛加)의 흘달(屹達)이 즉위하였다.

25) 13세 단군 흘달(屹達)혹은 대음달(代音達)황제 재위

61년

단군 흘달 원년 기묘(己卯:BC 1,782)년.

단군 흘달 16년 갑오(甲午)년에 주(州)와 현(縣)을 나누어 정하고, 직책(職責)를 구분하는 제도를 수립하였다.

관리는 권력을 겸하지 않게 하고, 정치는 법을 넘어서지 않게 하였다. 백성들은 자연히 고향을 떠나지 않았고, 일하는 것이 편안하므로 거문고 노래소리가 온 지역에 넘쳤다.

이해 겨울에 은(殷)나라 사람들이 하(夏)나라를 정벌하니 하(夏)나라 걸왕(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황제께서 읍차(邑借)인 말량(末良)으로 하여금 구한(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군사(軍師)가 되어 이에 싸움을 돕게 하니,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사신을 보내 황제께 사죄하고, 곧 돌아갈 것을 명령하였다. 그런데 하(夏)나라 걸왕(桀王)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파견하여 돌아가는 길을 막고, 불침(不侵)의 맹세를 어기려 하므로 은(殷)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걸왕(桀王)을 정벌하기로 하여, 은밀히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파견하여 견군( 軍)을 이끌고 가서 낙랑군(樂浪軍)과 합세하여 진격하여, 관중(關中)의 빈( )과 기(岐)의 땅에 살며, 관제를 설치 하였다.

단군 흘달 20년 무술(戊戌)년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天指花)를 심었다. 미혼(未婚)의 자제들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니,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밖으로 돌아 다닐 때는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를 꽂았으므로, 이때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불렀다.

단군 흘달 50년 무진(戊辰)년에 오성(五星)이 모여들고 누런 학이 날아와 뜰의 소나무에 깃들었다.

단군 흘달 61년 기묘(己卯:BC 1,722)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백성들은 모두 밥을 먹지 않고 곡성이 끓이지 않았다. 명령을 내려 죄수들을 석방하고, 산 것을 죽이지 않으며, 널리 놓아 주도록 하였다. 해를 넘겨 장사 지낸 후, 우가(牛加)의 고불(古弗)이 즉위하였다.

26) 14세 단군 고불(古弗)황제 재위 80년

단군 고불 원년 경진(庚辰:BC 1,721)년,

단군 고불 6년 을유(乙酉)년, 이해에는 큰 가뭄이 있었다. 황제께서 몸소 하늘님께 기원하여 비 오기를 빌 때, 하늘님께 올리는 서고문(誓告文)에 이르기를,

「하늘이 비록 크다고 하나 백성이 없으면 어찌 베풀수 있으며, 비는 비록 기름지다고 하나 곡식이 없으면 어찌 귀하리오, 백성이 하늘처럼 여기는 것은 곡식이며, 하늘이 마음처럼 여기는 것은 사람이니, 하늘과 사람이 일체일진대 하늘은 어찌하여 백성을 버리시나이까? 이제 비가 곡식을 적시게 하여 때 맞쳐 구제하게 하소서!」하니, 말씀이 끝나자 큰 비가 장대같이 수천리에 내렸다.

단군 고불 42년 신유(辛酉:BC 1,680)년 9월에 말라 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 빛의 큰 닭이 성(城)의 동쪽 자촌가(子村家)에서 났다. 잘못 보고 봉(鳳)이라고 하였다.

단군 고불 56년 을해(乙亥:BC 1,666)년에 관리를 사방에 파견하여 호구(戶口)를 조사하여 계산하게 하니, 총 일억 팔천만(180,000,000)이었다.

단군 고불 60년 기묘(己卯:BC 1,662)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대음(代音)이 즉위하였다.

27) 15세 단군 대음(大音) 혹은 후흘달(後屹達)황제

재위 51년

단군 대음 원년 경진(庚辰:BC 1,661)년에 은(殷)나라 왕 소갑(小甲)이 사신을 보내 화친(和親)을 간구해 왔다.

이 해에 80분의 1의 세법(稅法)으로 개정(改定)하였다.

단군 대음 2년 신사(辛巳)년에 홍수가 크게 나서 백성들의 집이 큰 피해를 당하였다. 황제께서는 이를 매우 불쌍히 여기시고, 조(粟)를 창해사수(滄海蛇水)의 땅으로 옮겨와서 백성들에게 고르게 배급하였다.

겨울 10월에 양운국(養雲國)과 수밀이국(須密爾國)의 두 나라 사신(使臣)들이 와서 방물(方物:특산물)을 바쳤다.

단군 대음 10년 기축(己丑:BC 1,652)년에 황제께서 서쪽 으로 행차하시어 약수(弱水)에 이르러, 신지(臣智) 우속(禹粟)에게 명령하여 금과 철, 그리고 고유(膏油)를 채취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에 우루국(虞婁國)사람 20가구가 투항하여 왔으므로, 염수(鹽水) 근처의 땅에 정착하도록 명령하였다.

단군 대음 28년 정미(丁未:BC 1,634)년에 황제께서는 태백산(太白山)에 오르사 비석(碑石)을 세워, 역대 단군황제와 많은 왕들의 공적을 새겼다.

단군 대음 40년 기미(己未:BC 1,622)년에 황제의 동생 대심(代心)을 봉(封)하여, 남선비(南鮮卑)의 대인(大人)으로 삼았다.

단군 대음 51년 경오(庚午:BC 1,611)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우가(牛加)의 위나(尉那)가 즉위하였다.

28) 16세 단군 위나(尉那)황제 재위 58년

단군 위나 원년 신미(辛未:BC 1,610)년.

단군 위나 28년 무술(戊戌:BC 1,583)년에 구한(九桓)의 여러 왕들이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삼신 하늘님께 제사를 올렸으며, 아울러 한인(桓仁), 한웅(桓雄), 치우(蚩尤) 및 단군왕검(檀君王儉)께도 제사를 드렸다. 닷새 동안이나 무리들과 더불어 큰 연회(宴會)를 베푸니, 밝은 등불은 밤을 지키고, 천부경(天符經)을 독송하고, 마당을 밟으며, 한쪽은 횃불을 줄지어 들고, 또 한쪽은 원을 이루어 춤을 추며 돌면서 애한가(愛桓歌)를 함께 불렀다.

애한가(愛桓歌)는 옛날 하늘님께 올리는 노래의 한 종류였다. 선인(先人)들은 한화(桓花)에 이름을 붙이지 않고 다만 꽃이라고만 하였다. 애한가는 다음과 같았다.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피네

지난해 만 그루 심었고, 올해도 만 그루 심었네

불함산에 봄이 오면, 꽃은 온통 붉은 빛

하늘님을 섬기고, 태평을 즐긴다네」

단군 위나 58년 무진(戊辰:BC 1,553)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太子) 여을(余乙)이 즉위하였다.

29) 17세 단군 여을(余乙)황제 재위 68년

단군 여을 원년 기사(己巳:BC 1,552)년.

단군 여을 52년 경신(庚申:BC 1,501)년에 황제께서는 오가(五加)의 무리들과 함께 나라 안을 돌아 보시는데, 개사성(蓋斯城)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 푸른 도포를 입은 한 노인이 황제께 하례(賀禮)를 드리고 말하기를,

「오래 동안 선인(仙人)의 나라에 살면서, 선인(仙人)의 나라 백성이 된 것을 즐거워 하는 것은, 황제의 덕(德)이 두루미쳐 허물이 없음이니, 왕의 다스림은 치우치지 않고, 백성들은 이웃에서 수심(愁心)이나 고통을 구경하지 못하고, 믿음으로서 책화(責禍)하고, 은혜로서 경계(境界)를 관할(管轄)하니, 성(城)도 나라도 싸우는 전쟁을 보지 못하였나이다.」고 하였다.

이에 황제께서 이르기를,

「고맙구나 고맙구나, 짐(朕)이 덕을 닦은지 오래되지 않아 백성들의 여망(與望)에 보답하지 못할까 두렵구나.」하였다.

단군 여을 68년 병자(丙子:BC 1,485)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동엄(冬奄)이 즉위하였다.

30) 18세 단군 동엄(冬奄)황제 재위 49년

단군 동엄 원년 정축(丁丑:BC 1,484)년.

단군 동엄 20년 병신(丙申:BC 1,465)년에 지백특(支伯特)사람이 와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단군 동엄 49년 을축(乙丑:BC 1,436)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구모소( 牟蘇)가 즉위하였다.

31) 19세 단군 구모소( 牟蘇)황제 재위 55년

단군 구모소 원년 병인(丙寅:BC 1,435)년.

단군 구모소 24년 기축(己丑:BC 1,412)년에 남장인(南掌 人)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 왔다.

단군 구모소 54년 기미(己未:BC 1,382)년에 지리숙(支離叔)이 주천력(周天曆)과 팔괘상중론(八卦相重論)을 지었다.

단군 구모소 55년 경신(庚申)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우가(牛加)의 고홀(固忽)이 즉위하였다.

32) 20세 단군 고홀(固忽)황제 재위 43년

단군 고홀 원년 신유(辛酉:BC 1,380)년.

단군 고홀 11년 신미(辛未:BC 1,370)년 가을에 흰 태양이 무지개를 꿰 뚫었다.

단군 고홀 36년 병신(丙申:BC 1,345)년에 영고탑(寧古塔)을 개축하고 별궁(別宮)을 지었다.

단군 고홀 40년 경자(庚子:BC 1,341)년에 여러 가지 물건을 만드는 장인(匠人) 공홀(工忽)이 구한(九桓)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단군 고홀 43년 계묘(癸卯:BC 1,338)년에 세상이 아직 평화롭지 못한데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소태(蘇台)가 즉위하였다.

33) 21세 단군 소태(蘇台)황제 재위 52년

단군 소태 원년 갑진(甲辰:BC 1,337)년에 은(殷)나라 왕 소을(小乙:BC 1,349∼1,339)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단군 소태 47년 경인(庚寅:BC 1,291)년에 은(殷)나라 왕 무정(武丁:BC 1,339∼1,280)이 귀방(鬼方)을 쳐서 이기더니, 또 대군(大軍)을 이끌고 색도(索度)와 영지(令支) 등 우리를 따르는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크게 패하자 화해(和解)를 청하며, 조공(朝貢)을 바쳤다.

단군 소태 49년 임진(壬辰:BC 1,289)년에 개사원(蓋斯原)의 욕살(褥薩) 고등(高登)이 몰래 군사를 이끌고 귀방(鬼方)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키니, 일군국(一 國)과 양운국(養雲國)의 두 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바쳤다.

이때에 고등(高登)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지역의 땅을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니, 그 세력이 매우 강성해졌다. 이에 고등(高登)은 사람을 보내어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황제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를 꺼리어 허락치 않으려 했으나 거듭하여 청하므로 마침내 이를 허락하고, 그 호(號)를 두막루(豆莫婁)라 부르게 하였다.

단군 소태 52년 을미(乙未:BC 1,286)년에 우현왕(右賢王) 고등(高登)이 죽으니, 그의 손자 색불루(索弗婁)가 세습하여 우현왕(右賢王)이 되었다. 황제께서 나라 안을 돌아 보시다가 남쪽에 있는 해성(海城)에 이르러, 큰 모임을 갖고 부모같은 노인들을 불러서 하늘님께 제사를 지내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그리고 오가(五加)의 무리들을 불러, 이들과 더불어 황제의 자리를 물려 줄 것을 의논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더 이상 황제의 자리를 지키기에 늙고 권태로와서 정사(政事)를 서우여(徐于餘)에게 넘기고자 한다」고 하며, 살수(薩水)의 땅 주위 백리를 봉(封)하고, 명령을 내려 서우여(徐于餘)를 섭주(攝主)로 삼고, 호(號)를 기수(奇首)라 하였다. 우현왕(右賢王)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황제에게 그 일을 중지하기를 권하였으나, 황제는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이에 우현왕(右賢王)은 좌우 주변 사람과 사냥하는 무리 수천 호(戶)를 거느리고, 마침내 부여(夫餘)의 신궁(新宮)에서 즉위하였다. 황제도 어쩔수 없이 옥책(玉冊)과 국보(國寶)를 전하고, 서우여(徐于餘)는 폐하여 평민이 되게 하였으며, 황제께서는 은퇴(隱退)하여 아사달(阿斯達)에서 돌아가셨다.

이 해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도 역시 고죽왕(孤竹王)의 자손으로서 나라를 사양하고, 동해(東海:현 발해만)의 해변가에 숨어 살면서, 농사를 지어 자급 자족하였다.

33) 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황제 재위 48년

단군 색불루 원년 병신(丙申:BC 1,285)년에 황제께서 명령하여 녹산성(鹿山城)의 무너진 곳은 고쳐 쌓도록 하며, 관제(官制)를 개정하였다. 가을 9월에는 친히 장당경(藏唐京)으로 행차하시어 고등왕(高登王)의 묘소(廟所)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11월에는 친히 구한(九桓)의 군사(軍師)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은(殷)나라 수도(首都)를 격파하고 곧 화친(和親)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우게 되어 은(殷)을 격파하였다. 이듬해 2월 강 상류까지 이들을 추격하여, 승전(勝戰)의 하례(賀禮)를 받았으며, 변한(弁韓)의 백성들을 회대(淮岱)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단군 색불루 6년 신축(辛丑:BC 1,280)년에 신지(臣智) 육우(陸右)가 황제께 아뢰기를,

「아사달(阿斯達)은 천년 제국(帝國)의 도읍이나, 이미 대운(大運)이 다했으며, 영고탑(寧古塔)은 왕기(王氣)가 농후하여 백악산(白岳山)을 능가하는 듯 하오니, 청컨대 성을 쌓고 이곳으로 도읍(都邑)을 옮기시옵소서」하였더니, 황제께서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새 도읍지가 이미 정해졌는데, 어찌 다시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인가?」라고 하셨다.

단군 색불루 20년 을묘(乙卯:BC 1,266)년에 이르러, 이때에 남국(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孤竹)왕과 더불어 여러 도둑들을 쫓아 내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엄독홀(奄瀆忽)에 이르러, 은(殷)나라 땅의 경계와 매우 가까운 곳에 살면서,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누어 진격하게 하여 빈( )과 기(岐)를 점거하고, 그 곳의 유민들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여(黎)라 칭하였는데, 서융(西戎)과 함께 은(殷)나라 제후(諸侯)들이 차지하고 있는 사이의 버려진 땅이었다. 남씨(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황제의 덕화가 멀리까지 미쳤으니, 항산(恒山) 이남(以南)의 땅까지 였다.

단군 색불루 36년 신미(辛未:BC 1,250)년에 변방(邊方)의 장수인 신독(申督)이 병력을 믿고 란(亂)을 일으켰다. 이에 황제가 잠시 영고탑(寧古塔)으로 피하니 많은 백성들이 뒤를 따랐다.

단군 색불루 48년 계미(癸未:BC 1,238)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아홀(阿忽)이 즉위하였다.

34) 23세 단군 아홀(阿忽)황제 재위 76년

단군 아홀 원년 갑신(甲申:BC 1,237)년에 황제의 숙부인 고불가(固弗加)에게 명령하여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도록 하고, 웅갈손(熊乫孫)을 보내어 남국(藍國)의 왕과 함께 남 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殷)나라 땅에 여섯 읍(邑)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 보게 하였는데, 은(殷)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워 결판을 내지 못하므로, 마침내 진격하여 군대로 하여금 공격하여 파괴토록 하였다. 가을 7월에는 신독(申督)을 공격하여 쳐 죽이고, 수도(首都)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단군 아홀 2년 을유(乙酉)년에 남국(藍國)의 왕 금달(今達)이 청구(靑邱)의 왕과 구려(句麗)의 왕과 주개(周愷)에서 모임을 갖고, 몽고리(蒙古里)의 군대와 합하여 가는 곳마다 은(殷)나라의 성책(城柵)을 부수고 깊숙한 곳까지 쳐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蒲古)씨를 엄(淹)에, 영고(盈古)씨를 서(徐)에, 방고(邦古)씨를 회(淮)에 봉하여 각각 제후로 삼았다. 은(殷)나라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우러러 보고 겁이나서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단군 아홀 5년 무자(戊子:BC 1,233)년에 번한(番韓)과 막한(莫韓) 및 오가(五加)들을 불러서 영고탑(寧古塔)으로 도읍을 옮기는 일에 대한 논의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단군 아홀 76년 기해(己亥:BC 1,162)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연나(延那)가 즉위하였다.

35) 24세 단군 연나(延那)황제 재위 11년

단군 연나 원년 경자(庚子:BC 1,161)년에 황제의 숙부인 고불가(固弗加)에게 섭정을 하도록 명령하였다.

단군 연나 2년 신축(辛丑)년 여러왕들은 조서(詔書)를 받들어 소도(蘇塗)를 증설하고, 하늘님께 제사를 지냈으며, 국가에 큰 일이나 이상한 재난이 있으면, 전적으로 여기에서 기도하여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

단군 연나 11년 경술(庚戌)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솔나(率那)가 즉위하였다.

36) 25세 단군 솔나(率那)황제 재위 88년

단군 솔라 원년 신해(辛亥:BC 1,150)년

단군 솔라 37년 정해(丁亥:BC 1,114)년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단군 솔라 47년 정유(丁酉:BC 1,104)년에 황제께서 소도(蘇塗)의 윗자리에 계시며, 오래된 예법을 설명하시면서, 영신( 臣)과 직신(直臣)의 구분에 대하여 물으시니, 삼랑(三郞) 홍운성(洪雲性)이 나아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치를 지켜 굽히지 않는 자는 직신(直臣:올바른 신하)이옵고, 위세를 두려워 하여, 굽혀 복종하는 자는 영신( 臣:아첨하는 신하)이옵니다. 하오나 임금은 근원이요, 신하는 흘러가는 물과 같으니, 근원이 이미 흐려 있으면, 그 흐르는 물이 맑기를 구하여도 이것은 될 수없는 일이오니, 그러므로 오직 임금이 성인(聖人)이 된 후라야, 신하는 올바른 신하가 되는 법 입니다.」고 하였다. 황제께서 말씀하시기를,「옳은 말인지고.」라고 하셨다.

단군 솔나 59년 기유(己酉:BC 1,092)년에 밭 곡식에 풍년이 들어 한 줄기에 다섯 개 이삭의 조(粟)가 있었다.

단군 솔나 88년 무인(戊寅:BC 1,063)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고, 태자 추로(鄒魯)가 즉위하였다.

37) 26세 단군 추로(鄒魯)황제 재위 65년

단군 추로 원년 기묘(己卯:BC 1,062)년, 가을 7월에 백악산(白岳山)의 계곡에 흰사슴 200마리가 무리지어 와서 뛰놀았다.

단군 추로 65년 계미(癸未:BC 998)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두밀(豆密)이 즉위하였다.

38) 27세 단군 두밀(豆密)황제 재위 26년

단군 두밀 원년 갑신(甲申:BC 997)년에 천해(天海)의 물이 넘쳐 아란산(阿蘭山)이 무너졌다. 이해에 수밀이국, 양운국, 구다천국 등이 모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

단군 두밀 8년 신묘(辛卯:BC 990)년에 큰 가뭄 뒷 끝에 큰 비가 쏟아져 내려 흉년이 되어, 백성들이 수확할 곡식이 없으므로, 황제는 명령을 내려 창고를 열어 곡식을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단군 두밀 26년 기유(己酉)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 니, 해모(奚牟)가 즉위하였다.

39) 28세 단군 해모(奚牟)황제 재위 28년

단군 해모 원년 경술(庚戌:BC 971)년에 황제께서 질병이 있어 백의동자(白衣童子)로 하여금 하늘님께 기도하도록 하였더니, 이윽고 병이 나으셨다.

단군 해모 11년 경신(庚申:BC 961)년 여름 4월에 태풍이 크게 일어 폭우가 쏟아져 내리더니, 땅위에 물고기가 함께 쏟아져 내렸다.

단군 해모 18년 정묘(丁卯:BC 954)년에 빙해(氷海)의 뭇 왕들이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바쳤다.

단군 해모 28년 정축(丁丑:BC 944)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마휴(摩休)가 즉위하였다.

40) 29세 단군 마휴(摩休)황제 재위 34년

단군 마휴 원년 무인(戊寅:BC 943)년에 주(周)나라 사람이 조공을 바쳤다.

단군 마휴 8년 을유(乙酉)년 여름에 지진이 있었다.

단군 마휴 9년 병술(丙戌:BC 935)년에 남해의 조수(潮水)가 3척(三尺)이나 물러갔다.

단군 마휴 34년 신해(辛亥:BC 910)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내휴(奈休)가 즉위하였다.

41) 30세 단군 내휴(奈休)황제 재위 35년

단군 내휴 원년 임자(壬子:BC 909)년에 황제께서 남쪽으로 순행(巡行)하시어 청구(靑邱)의 다스림을 살피신 후 치우천왕(蚩尤天王)의 공덕을 돌에 새겨 놓고, 서쪽으로 엄독홀(淹瀆忽)에 이르러, 나라를 나누어 다스리는 여러 왕들을 모아 놓고, 군사들을 검열(檢閱)하고, 하늘님께 제사를 올리고, 주(周)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좋은 수교(修交)를 하였다.

단군 내휴 5년 병진(丙辰:BC 905)년에 흉노(凶奴)의 사람들이 조공을 바쳤다.

단군 내휴 35년 병술(丙戌:BC 875)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등올(登 )이 즉위하였다.

42) 31세 단군 등올(登 )황제 재위 25년

단군 등올 원년 정해(丁亥:BC 874)년

단군 등올 16년 임인(壬寅:BC 859)년에 봉황이 백악산(白岳山)에서 울고, 기린이 와서 상원(上苑)에서 노닐었다.

단군 등올 25년 신해(辛亥:BC 850)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아들 추밀(鄒密)이 즉위하였다.

43) 32세 단군 추밀(鄒密)황제 재위 30년

단군 추밀 원년 임자(壬子:BC 849)년

단군 추밀 3년 갑인(甲寅)년에 선비산(鮮卑山)의 추장(酋 長) 문고(們古)가 조공을 바쳤다.

단군 추밀 12년 계해(癸亥:BC 838)년에 초(楚)나라 대부(大夫) 이문기(李文起)가 조정에 들어와 벼슬을 했다.

단군 추밀 13년 갑자(甲子)년 3월 일식(日蝕)이 있었다.

단군 추밀 15년 병인(丙寅:BC 835)년에 농사가 크게 흉작이었다.

단군 추밀 30년 신사(辛巳:BC 820)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감물(甘勿)이 즉위하였다.

44) 33세 단군 감물(甘勿)황제 재위 24년

단군 감물 원년 임오(壬午:BC 819)년

단군 감물 2년 계미(癸未)년에 주(周)나라 사람들이 와서 호랑이와 코끼리의 가죽을 바쳤다.

단군 감물 7년 무자(戊子:BC 813)년에 영고탑(寧古塔) 서문(西門)밖의 감물산(甘勿山)밑에 삼성사(三聖祠)를 세우고 친히 제사를 올렸다. 서고문(誓古文)에 아뢰기를,

「삼성(三聖)의 존귀하심은 삼신(三神)과 더불어 그 공(功)이 같음이며, 삼신(三神)의 덕(德)은 삼성(三聖)으로 인하여 넉넉해 지고 커지는 것입니다. 허(虛)와 조(粗)가 한 몸이요, 개체(個體)와 전체(全體)가 하나 이듯이, 지혜(智慧)와 생명(生命)을 같이 닦고, 형상(形像)과 혼백(魂魄)을 갖추어 번성하게 하는, 참된 가르침을 이에 세우고, 믿음을 오래 가지면 스스로 밝아져서, 삼성(三聖)을 존경하는 기세(氣勢)는 올라 갈 것입니다. 밝음을 회복하고 자신의 행함을 되돌아 보는 것을 분명이 한다면, 저 백악산(白岳山)도 한결같이 영원히 푸르고, 많은 성인들은 계속 이어지고, 글을 짓는 것과 예(禮)와 악(樂)이 흥하여 질 것입니다. 규모(規模)가 이러하니 큰 도술(道術)은 깊고도 넓어서, 하나를 잡으면 그 속에 셋이 포함되고, 셋이 모이면 하나로 귀결되는 큰 흐름은 하늘의 규범으로, 영원한 세상의 법칙이 될 것입니다.」고 하였다.

단군 감물 24년 을사(乙巳:BC 796)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오루문(奧婁門)이 즉위하였다.

45) 34세 단군 오루문(奧婁門)황제 재위 23년

단군 오루문 원년 병오(丙午:BC 795)년, 이 해에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이 환호하고 즐거워하며, 두리가(兜里歌)를 지어 부르니, 그 노래에 이르기를,

「하늘에는 아침 해가 있어, 밝은 빛을 환하게 비추고,

나라에는 성인이 있어, 그 덕과 가르침이 널리 미치네

큰 나라 우리 배달나라, 거룩한 조선, 많고 많은 사람들, 맵고 사나운 다스림을 보지 못했네

밝고 밝은 노래소리 오래도록 태평일세」

라고 하였다.

단군 오루문 10년 을묘(乙卯:BC 786)년에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마침내 노란 안개가 사방을 막았다.

단군 오루문 23년 무진(戊辰:BC 773)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사벌(沙伐)이 즉위하였다.

46) 35세 단군 사벌(沙伐)황제 재위 68년

단군 사벌 원년 기사(己巳:BC 772)년

단군 사벌 6년 갑술(甲戌:BC 767)년 이 해에는 황충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단군 사벌 14년 임오(壬午:BC 759)년에 호랑이가 궁전에 들어 왔다.

단군 사벌 24년 임진(壬辰:BC 748)년에 큰 비가 내려 산이 무너져서 골짜기를 메웠다.

단군 사벌 50년 무오(戊午:BC 723)년에 황제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 바다의 곰을 습격하여 평정하였다.

단군 사벌 66년 갑술(甲戌:BC 707)년에 황제께서 조을(祖乙)을 파견하니, 곧바로 연(燕)나라 수도를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더불어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이긴 승리의 보고를 하였다.

단군 사벌 68년 병자(丙子:BC 705)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매륵(買勒)이 즉위하였다.

47) 36세 단군 매륵(買勒)황제 재위 58년

단군 매륵 원년 정축(丁丑:BC 704)년,

단군 매륵 28년 갑진(甲辰:BC 677)년에 지진과 해일(海溢)이 있었다.

단군 매륵 32년 무신(戊申)년에 서촌(西村)의 한 백성의 집에서, 어미소가 다리가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단군 매륵 35년 신해(辛亥:BC 670)년에 천하(天河)에서 용마(龍馬)가 나왔는데, 말등에는 별의 무늬가 있었다.

단군 매륵 38년 갑인(甲寅:BC 667)년에 협야후(陜野侯)와 배반명(裵 命)을 파견하여 바다의 도적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12월에는 삼도(三島:일본열도)를 모두 평정하였다.

단군 매륵 52년 무진(戊辰:BC 653)년 황제께서 군사를 파견하여 수유(須臾)의 군사와 함께 연(燕)나라를 정벌(征伐)하게 하였다. 이에 연(燕)나라 사람들이 제(齊)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齊)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으로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伏兵)을 만나 전투가 불리해지자, 화해(和解)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단군 매륵 58년 갑술(甲戌:BC 647)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마물(麻勿)이 즉위하였다.

48) 37세 단군 마물(麻勿)황제 재위 56년

단군 마물 원년 을해(乙亥:BC 646)년,

단군 마물 56년 경오(庚午:BC 591)년에 황제께서 남쪽으로 순행하시다가 기수(淇水)에 이르러,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다물(多勿)이 즉위하였다.

49) 38세 단군 다물(多勿)황제 재위 45년

단군 다물 원년 신미(辛未:BC 590)년,

단군 다물 45년 을묘(乙卯:BC 546)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두홀(豆忽)이 즉위하였다.

50) 39세 단군 두홀(豆忽)황제 재위 36년

단군 두홀 원년 병진(丙辰:BC 545)년,

단군 두홀 36년 신묘(辛卯:BC 510)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달음(達音)이 즉위하였다.

51) 40세 단군 달음(達音)황제 재위 18년

단군 달음 원년 임진(壬辰:BC 509)년,

단군 달음 18년 기유(己酉:BC 492)년에 황제께서 붕어 (崩御)하시니, 태자 음차(音次)가 즉위하였다.

52) 41세 단군 음차(音次)황제 재위 20년

단군 음차 원년 경술(庚戌:BC 491)년,

단군 음차 20년 기사(己巳:BC 422)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을우지(乙于支)가 즉위하였다.

53) 42세 단군 을우지(乙于支)황제 재위 10년

단군 을우지 원년 경오(庚午:BC 471)년

단군 을우지 10년 기묘(己卯:BC 462)년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물리(勿理)가 즉위하였다.

54) 43세 단군 물리(勿理)황제 재위 36년

단군 물리 원년 경진(庚辰:BC 461)년,

단군 물리 36년 을묘(乙卯:BC 426)년에 융안(隆安)의 사냥꾼집의 우화충(于和 )이 자칭 장군이라 하며, 수만명의 무리를 모아 서북 36군(郡)을 함락시켰다.

황제께서 군사를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겨울이 되자 도적들은 도성(都城)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하 였다. 황제께서는 좌우의 궁인(宮人)과 함께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신주(神主)들을 받들어 모시고, 배를 타고 내려가 해두(海頭)를 찾아 갔으나, 여기서 황제께서 붕어하셨다.

이 해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褥薩) 구물(丘勿)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군사를 일으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거하였다. 아홉지역의 군사(軍師)가 그를 따랐으며, 동서 압록(鴨綠)의 18성(城)이 모두 병사를 파견하여 원조하려고 왔다.

55) 44세 단군 구물(구물)황제 재위 29년

단군 구물 원년 병진(丙辰:BC 425)년, 3월에 큰 물이 도성(都城)을 휩쓸어 버리니, 적병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때 구물(丘勿)은 일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니, 적군은 싸워 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궤멸하니, 마침내 우화충(于和 )을 잡아 목을 쳐서 죽였다.

이에 구물(丘勿)은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마침내 3월 16일에 단(壇)을 쌓아 하늘에 제사 지내고,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쳐 대부여(大夫餘)라고 하였으며, 삼한(三韓)을 고쳐 삼 조선(三朝鮮)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삼 조선은 비록 단군을 받들어서, 다스림의 체제는 한분에게 있었으나, 평화와 전쟁의 권한은 한분에게 있지 않았다.

7월에 명령하기를 해성(海城)을 개축하여 평양(平壤)이라 부르도록 하고, 별궁을 짓도록 하였다.

단군 구물 2년 정사(丁巳)년에 예관(禮官)이 청하여 삼신영고제(三神迎鼓祭)를 지냈으니, 곧 3월 16일이었다. 황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 절은 세 번 머리를 숙이고, 두 번째 절은 여섯 번 머리를 숙이고, 세 번째 절은 아홉 번 머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따르는 무리들은 특별히 열번씩 머리를 숙여 절하였다. 이를 삼육대례(三六大禮)라고 하였다.

단군 구물 17년 임신(壬申:BC 409)년에 감찰관(監察官)을 주(州)와 군(郡)에 파견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살피어, 효도(孝道)를 잘 하는자와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관리를 천거하게 하였다.

단군 구물 23년 무인(戊寅:BC 403)년에 연(燕)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단군 구물 29년 갑신(甲申:BC 397)년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여루(余婁)가 즉위하였다.

56) 45세 단군 여루(余婁)황제 재위 55년

단군 여루 원년 을유(乙酉:BC 396)년에 장령(長嶺)과 낭산(狼山)에 성(城)을 쌓았다.

단군 여루 17년 신축(辛丑:BC 380)년에 연(燕)나라 사람이 변방의 군(郡)을 침략하자, 수비(守備)장수(將帥) 묘장춘(苗長春)이 그들을 격퇴하여 패배시켰다.

단군 여루 32년 병진(丙辰:BC 365)년에 연(燕)나라 사람 배도(倍道)가 쳐들어 와서 요서(遼西)를 함락시키고, 운장(雲障)에 육박해 왔다. 이에 번조선(番朝鮮)이 상장군(上將軍) 우문언(于文言)에게 명령하여 이를 막게 하였다. 진조선(眞朝鮮)과 막조선(莫朝鮮)도 역시 파병(派兵)하여 구원하려고 왔다. 복병(伏兵)을 설치해 놓고 협공하여,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병사들을 오도하(五道河)에서 파멸시키고, 요 서(遼西)의 여러 성(城)을 모두 다시 찾았다.

단군 여루 33년 정사(丁巳:BC 364)년에 연(燕)나라 사람들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連雲島)에 주둔하면서, 배를 만들어 장차 쳐들어 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于文言)장군이 추격하여 크게 쳐 부수고, 그 장수를 사살(死殺)하였다.

단군 여루 47년 신미(辛未:BC 350)년에 북쪽 사막(沙漠)의 추장 액니거길(厄尼車吉)이 조정에 찾아 와서 말 200필을 바치며, 함께 연(燕)나라를 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곧 번조선(番朝鮮)의 젊은 장수 신불사(申不私)가 병력 만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燕)나라를 공격하여, 상곡(上谷)을 쳐서 빼앗고, 그 곳에 성읍(城邑)을 설치하였다.

단군 여루 54년 무인(戊寅:BC 343)년에 상곡(上谷)의 싸움 이후 연(燕)나라가 해마다 침범해 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和解)를 청하므로 이를 다시 허락하고, 또 조양(造陽)의 서쪽을 경계로 삼았다.

단군 여루 55년 기묘(己卯)년 여름에 큰 가뭄이 있었다. 이에 염려하기를,

「죄없이 옥에 갇힌 사람이 있어서일까?」하며, 죄인들을 크게 사면(赦免)하여 주고, 황제께서 친히 행차하시어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다. 9월에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태자 보을(普乙)이 즉위하였다.

57) 46세 단군 보을(普乙)황제 재위 46년

단군 보을 원년 경진(庚辰:BC 341)년에 번조선(番朝鮮)왕 해인(解仁)이 연(燕)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弑害)를 당하니, 이에 오가(五加)에서 쟁론(爭論)이 일어났다.

단군 보을 19년 무술(戊戌:BC 323)년 정월에 읍차(邑借) 기후(箕 )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 번조선(番朝鮮)왕으로 자칭하며, 사람을 보내 윤허를 구하므로, 황제는 이를 허락하시고, 연(燕)나라의 침략에 대한 방비를 튼튼히 하도록 하였다.

단군 보을 38년 정사(丁巳:BC 304)년에 도성에 큰 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니, 황제께서는 해성(海城)의 별궁으로 피난하였다.

단군 보을 44년 계해(癸亥:BC 298)년에 북막(北漠)의 추장 니사(尼舍)가 음악(音樂)을 바치고, 후한 상을 받았다.

단군 보을 46년 을축(乙丑)년에 한개(韓介)가 수유(須臾)의 병력을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니, 상장군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격파하였다. 황제께서 도성으로 돌아 오셔서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렸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황제께서 붕어(崩御)하셨으나,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고열가(高列加)가 단군 물리(勿理)의 현손(玄孫)으로 무리의 사랑으로 추대 되었으며, 또한 한개(韓介)를 물리친 공도 있으므로 즉위하였다.

58) 47세 단군 고열가(高列加)황제 재위 58년

단군 고열가 원년 병인(丙寅:BC 295)년,

단군 고열가 14년 기묘(己卯:BC 282)년에 단군왕검의 묘(廟:사당)를 백악산(白岳山)에 세우고, 유사(有司)에게 명령을 내려 사계절 제사를 지내게 하고, 황제께서는 일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받들었다.

단군 고열가 44년 기유(己酉:BC 252)년에 연(燕)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려왔다.

단군 고열가 48년 계축(癸丑:BC 248)년 10월 1일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이해 겨울 북막(北漠)의 추장 아리당부(阿里當夫)가 군사를 내어 연(燕)나라를 정벌 할 것을 청했으나, 황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며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단군 고열가 57년 임술(壬戌:BC 239)년 4월 8일에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에서 내려와 군사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이었다.

단군 고열가 58년 계해(癸亥)년에 황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어지니, 명령은 많아도 시행되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자주 환란을 일으키니, 나라의 살림은 늘지 않고, 백성의 사기(士氣)는 날로 쇠약해지니, 3월 하늘님께 제사지내는 날 밤에 오가(五加)의 무리들과 더불어 의논하며 말씀하시기를,

「옛 우리의 많은 거룩한 조상들이 나라를 세우시고, 법통을 이어 가실 때에는, 그 덕이 크고 넓어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잘 지켜져 왔으나, 지금에 이르러 황도 (皇道)가 쇠미해지니, 여러 왕들이 서로 강함만을 다투고 있다. 짐은 덕이 적고, 나약하며, 능히 다스리지 못할 뿐 아니라, 어진이를 불러서 무마할 방책도 없어 백성들은 흩어지니, 오직 그대 오가(五加)들은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고, 감옥 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인과 포로들을 방면하여 돌려 보내라.」하시고, 다음날, 마침내 황제의 자리를 버리고, 입산수도(入山修道)하여 신선(神仙)의 길에 오르니, 이때에 오가(五加)들이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종실(宗室)의 대 해모수(解慕漱)는 몰래 수유왕(須臾王)과 황제의 법통을 잇기로 약속하고, 옛 도성(都城)인 백악산(白岳山)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天王郞)이라 칭하니, 사방(四方) 지경(地境)내의 모든 사람들이 명령을 들었다. 이에 모든 장군들을 임명하고, 수유왕(須臾王) 기비(箕丕)를 번조선(番朝鮮)왕으로 승격시켜, 상(上) 하(下)의 운장(雲障)을 지키도록 하였다.

대략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고구려란 해모수(解慕漱)의 태어난 고향이었으므로, 북부여를 또한 고구려라고도 칭하였다.

단군기원 3696년 고려 31대(서기1351∼1374) 공민왕 12년, 10월 3일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흥행촌의 늙은이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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