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도 내 7개 가람에 대해서

신라 경도 내 7개 가람에 대해서

작성일 2003.07.23댓글 2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신라 경도 내 7개 가람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아시는 분은 빨리 대답해 주세염..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신라인들은 자신의 나라가 곧 불국토라고 인식하였다.

인도로부터 발전한 불국토사상은 중국을 거쳐 신라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였다.

신라는 불국토사상을 자신의 종교적 특성 위에서 수용하여 독특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불국토사상은 다양한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과거불 인연설은 신라가 과거세 이래 불교와 인연이 있던 국토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의 예로서 대표적인 것은 '7처가람설'이다.

신라인들의 신라를 부처님이 살고 있는 땅으로 믿어..

서라벌에는 전불시대부터 7개소의 가람이 있었다고 한다.
칠처가람설은 이 땅이 본래 불국토였다는 신념을 신라인에게 불어 넣어..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불교에 귀의하게끔 하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법흥왕 이후 신라의 김씨 왕 자신들이 석가모니를 배출한 석가족과 동일하다고 믿었다.

이런 진종설은 칠처가람설과 같은 성격이라 하겠다.

경주에 위치한 7처가람은 이미 과거불 시기부터 불교 사원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신라가 불교와 인연이 있는 나라이므로 불교를 수용, 흥성하는 데..

정당한 근거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7처가람은 흥륜사를 위시해서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천왕사, 담엄사 등이다.

이들 사찰은 150년 이상의 기간을 소요하면서 각각 창건되었다.

그런데 이들 사찰이 '7처가람설'로 묶여진 것은..

신라 하대 초기에 중고불교를 회복하고자 하는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① 금교 동쪽의 천경림 자리(흥륜사)

흥륜사는 신라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절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온 고구려 승려 아도가 지은 것이라 전한다. 신라 미추왕이 절을 짓도록 하였다고 하나, 창건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며, 규모가 작고 검소하여 초가집을 짓고 불법을 강연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미추왕이 죽자 절은 곧 폐허가 되었고, 그 후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로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되었다. 진흥왕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라 하고 백성들이 중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왕 자신도 만년에는 스스로 삭발하여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고 절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흥륜사는 대법회를 열고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신라의 큰 절이 되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밭을 보시한 절이 흥륜사이고, 김현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었다는 절도 이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당 안에는 선덕여왕 때 김양도가 만들었다는 미륵삼존불상이 모셔져 있고, 동쪽 벽에는 아도·이차돈·혜숙·안함·의상의 상이, 서쪽 벽에는 표훈·원효·혜공·지장·사파의 상을 모셔 놓았다. 금당지 앞에는 8각탑지와 서쪽의 경루가 있고 이를 둘러싼 회랑지가 조사되었다. 흥륜사의 남문은 길달문이라고 불렀는데, 귀신인 길달(吉達)이 지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말 반란군에 의해 불탄 것을 경명왕 5년(921)에 다시 지었으며, 조선시대에 화재로 불타 폐사되었다. 절터에는 신라시대의 석조물 가운데 가장 큰 석조와 배례석이 있었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한 신라의 미소로 일컫는 사람얼굴 모양의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지금은 1980년대에 새로 지은 흥륜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선덕여왕 때 창건된 영묘사터로 보기도 한다.


 

② 삼천기 자리(영흥사)

영흥사는 흥륜사와 같은 해에 세워진 신라시대의 최초의 비구니 사찰로서 유명하다.

 

'삼지협'이라 했으니, 세 내가 갈라지는 곳은 바꾸어 말하면, 3개의 내가 모이는 곳이니, 경주에서 이런 곳은 단 한 군데, 지금의 탑동 수원지 북쪽 부근이다. 즉 내남 쪽에서 내려오는 긴내와, 서쪽인 모량에서 내려오는 모량내가 합치고, 조금 하류 쪽에는 남천이 맞닥뜨리니 여기가 영흥사 터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 위치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1965년 경주공업고등학교 확장시에 초석, 와당, 석재 등 신라시대 건물구조에 쓰였던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정식발굴을 하지 않은채 덮어 버렸다. 이후 이 일대를 흥륜사지 또는 영흥사지일 것이라고 추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삼국 사기의 경우 미추왕릉의 장지를 흥륜사동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 일대는 영흥사지 보다는 흥륜사일 가능성이 더 많다.



③ 월성동 용궁남쪽 자리(황복사)

황복사터는 낭산의 동북쪽 보문 뜰에 있는데 이곳이 황복사라는 것을 알려주는 유물 중에는 '황복사'라고 새겨진 기와가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데 1937년경에 낭산 동쪽 기슭에서 수집한 것으로, 비록 발견 지점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막연했던 황복사터의 위치를 밝혀 주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황복사의 창건연대는 정확하게 밝힐 자료는 현재 없으나. 다만, 신라의 명승이며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대사가 이곳 황복사에서 삭발하고 스님이 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 이전부터 있었던 절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황복사는 의상대사와 인연이 깊은 절이며 또한 왕실의 명복을 기원했던 중요한 사찰이다.

황복사터에는 석탑 외에 우수한 십이지신상(9상)이 탑동편의 밭속에 건물기단처럼 보이도록 배열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땅속에 묻혀 있어 볼수 없다. 또 탑의 동남편에 머리가 잘린 귀부 2기가 나란히 남아 있는데, 이는 탑비 혹은 사적비로 생각되고 있다. 특히 서쪽 귀부의 등에는 '王'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1968년 신라 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하여 이 절터의 일부를 발굴 조사한 적이 있지만 아직 절터의 전체규모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④ 용궁북쪽 자리(분황사)

황룡사와 담장을 같이 하고 있는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나지는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 만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⑤ 사천미 자리(영묘사)

오릉 서쪽으로 난 금성로를 따라 시내로 들어오며 남천에 걸친 오릉교를 지나 100m정도 되는 오른쪽에 있다.
지금은 비구니들이 불도를 닦는 절이 있어 천경림 흥륜사라 하는데 여기가 영묘사 터다. 왜냐 하면 사천미 즉 ‘모래내 혹은 문천의 끄트머리’에 해당되는 곳일 뿐더러, 영묘지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대(632)에 세워진 영묘사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른 사찰과는 다른 의도로 마련됐다. 전쟁터에 숨진 신라 청년 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절로 두두리(도깨비)들이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세웠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백제 군사가 여근곡에 잠입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생 포할 수 있게 된 것도 영묘사 못에서 울고 있던 개구리 덕분이었을 정도로 국가의 운명과 연관된 절이었다.

또 온 신라 사람들이 흙을 져다나르며 장육존상을 만들었던 절이다.

 

더욱이 이곳은 선덕여왕을 사모하던 지귀 청년의 사랑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평민인 지귀가 여왕을 사모하여 상사병이 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여왕 이 영묘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면서 그 청년을 불렀다. 불공을 마치고 나와 보니 그 청년은 어느새 탑 옆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물끄러미 지귀를 보 던 여왕은 팔찌를 빼내 그의 가슴에 얹어 두고 왕궁으로 돌아왔다. 잠에서 깨어난 지귀는 그 팔찌를 보고 사랑의 감정이 북받쳐 온 몸이 불에 타올라 불귀신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⑥ 신유림 자리(사천왕사)

경주 낭산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⑦ 서청전 자리(담엄사 터)

담엄사 터는 오릉 남쪽 주차장 자리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박혁거세의 능은 담엄사 북쪽에 있다”고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담엄사 터는 사릉(박혁거세 능의 다른 이름) 남쪽에 있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7처 가람 중 마지막으로 열거된 담엄사에 대해서는 그 창건 시기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 등 기록에서 담엄사에서 활동한 승려에 대해서 전혀 전해오는 것이 없다. 따라서 담엄사에 대해서는 알 수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몇가지 추측되는 점에 대해서만 언급해 두겠다.


담엄사가 7처 가람 중에서 마지막으로 열거된 것으로부터 이들 중 담엄사가 가장 뒤늦게 창건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앞의 여섯 사찰들은 모두 그 창건의 시기가 밝혀지고 있으며, 그 창건시기의 순서대로 열거되었다. 이러한 원칙에 따른 것이라면 담엄사는 가장 나중에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고 그렇게 전해져 온 것이 아닌가 한다. 다만 그 창건 연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맨 나중으로 열거해 둔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위해 영험있는 장소로 여겨지던 곳으로 추측하는 견해가 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국민의 정신을 하나로 모으고자 노력하기 위해 어떤

  종교를 내세웠나?-- 신라는요 국민의 정신을 모으고자 불교를 내새웠습니다.

 

*불교사상의 통일과 실천에 노력 하였으며 불교계의

   위대한 고승의 한사람은??--  신라에게  불교를 전파한 사람은 이차돈 입니다.

 

*  통일 신라의 우수한 문화재 3개 --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등이 있겠죠^^

 

* 문화의 특징-- 신라의 문화의 특징이라 ;; 불국사와 같이 여러 문화재는 아름다움을 가졌

                              고 섬세한 면이 있죠 아무튼 아름답고 섬세하다고 생각하세요;;

*국제적 고류를 한 나라 3개 -- 당나라, 일본, 백제(백제는 좀 애매하지만 어쨎든 교류를 하

                                                           긴했다고 하더군요

 

*장보고의 원래 이름은---       궁복                 

 

*우리말로 하면 '활보' 즉--    '무예가 뛰어난 아이 '    이라는 뜻

 

*해상왕( 장보고 )는 당나라 해적들이 신라인을 괴롭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의 안정을 이룩함

 

*청해진 설치 이후 해상 활동 모습이 어떻게  변하였나? (2개)

 

----- 일본과의 무역을 독자적으로 했다 한반도의 해적을 소탕하여 해상권을 잡음.

 

★신라 삼국 통일의 의의와 한계

 

**의의(1개) 의의라면 우리나라역사의 첫 통일이라는 점이있죠

**한계(1개) 한계라면 신라혼자가 아닌 당나라의 도움을 받았다는점이죠

 

힘들게했으니 답변확정이라두^^

신라 경도 내 7개 가람에 대해서

신라 경도 내 7개 가람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아시는 분은 빨리 대답해 주세염.. 신라인들은 자신의 나라가 곧 불국토라고 인식하였다. 인도로부터 발전한 불국토사상은...

분황사, 포석정에 대해서(오늘까지예요!!)

... 포석정에 대해서 뭐든지 써주세요.. ㅜㅁㅜ 다음주에... 왕경도가 제작, 전시되어 있다. 위치를 더 자세히... 말사로 신라 서라벌 내 7개 가람에 속하였다. 644년 중국에서...

고구려,백재,신라의 유물,유적지

재가방숙을하는디 고구려,백재,신라의 유물...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백제의 도성인...

경주괘릉에 대해서

... 경주시민으로써 괘릉에 대해서 잘아시면 답변해... 왕경도가 제작, 전시되어 있다. 위치를 더 자세히... 말사로 신라 서라벌 내 7개 가람에 속하였다. 644년 중국에서 돌아온...

천마총,불국사,괘릉,안압지에대해서좀올...

천마총,불국사,괘릉,안압지에대해서좀올려주새요... 왕경도가 제작, 전시되어 있다. 위치를 더 자세히... 말사로 신라 서라벌 내 7개 가람에 속하였다. 644년 중국에서 돌아온...

고구려,신라,백제(삼국시대)의 문화재...

삼국시대(고구려,신라,백제)의문화재의사진과 그것의 설명을 많이많이올려주세요. 삼국시대의 고구려, 신라...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고구려,백재,신라,고ㄹㅕ조선문화재

고구려,백재,신라.통일신라,조선!!! 문화재 좀 많이...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백제의...

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의 유물, 유산...

...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 내력에 대해서는 『하동군읍지』가 유일한 자료이다. 이 기록과 성의 위치 및 규모로 보아 신라가 군사적...

고구려,백제,신라,가야 유물,유적 좀 ......!

... 오늘 학교숙제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유물좀 갈쳐...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백제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문화재좀...

... 이번에는 고구려,벡제,신라,가야(이건좀...^^;;)의...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모인삼백’·‘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