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시조설화

신라의 시조설화

작성일 2004.05.17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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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게 있어서 그러는데요
신라의 시조 설화라구 박씨, 김씨, 석씨 3개의 성 시조 설화종
아리켜주세요.. 부탁합니다.ㅎ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박씨 설화

옛날 진한 땅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룻날의 일이었다. 여섯 촌의 우두머리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 둑 위에 모여 의논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위에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법도를 모르고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소. 하루 바삐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창건하여 도읍을 세우도록 합시다."
이에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남쪽 양산 기슭 나정 우물가에서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워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모양은 마치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리로 달려가보니 자주빛의 큰 알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 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 알을 조심스럽게 쪼개 보았다. 아이의 몸에서는 광채가 나며 임금의 위용을 드러내었다. 새와 짐승들이 모여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이 맑고 밝게 빛났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했는데, 이는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말이다.
혁거세왕은 맨 처음 입을 열어 스스로를 '알지거서간'이라 했다. 그때부터 임금의 존칭을 '거실한' 혹은 '거서간'이라 하게 되었다. 여섯 촌의 사람들은 하늘이 자신들의 소원을 듣고 임금님을 내려준 것을 소리높여 칭송하며, "이제 천자님이 세상에 내려왔으니 덕있는 여식을 찾아 배필을 정할 일만 남았구나" 하며 환호했다.
그런데 바로 이 날 정오 무렵이었다. 사량리라는 마을의 알영 우물가에 계룡 한 마리가 나타나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그 자태가 매우 고왔다. 그러나 오직 입술만은 닭의 부리처럼 생겨서 보기가 흉했다. 사람들은 신기해 하기도 하고 애석해 하기도 하면서 그 아이를 데리고 월성 북쪽 시내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켰다. 그런데 목욕을 끝내고 보니 어느 사이에 부리는 떨어지고 앵두같이 예쁜 사람의 입술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놀라움은 이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그 시내를 부리가 빠졌다 해서 발천(撥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남산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하늘이 내려준 신령한 두 아이를 모셔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고 그 알이 마치 바가지처럼 생겼는지라 성을 '박'이라 했다. 또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했다. 두 성인이 자라 열 세 살이 되었을 때 혁거세는 왕으로 추대되고 알영은 왕후가 되니 기원전 57년의 일이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이라 하였는데 더러는 사라 혹은 사로라고도 했다.
또 처음 왕이 계정(鷄井)에서 났으므로 계림국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낸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 때에 김알지를 얻으면서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고쳤다고도 한다. 신라(新羅)라는 이름이 정해진 것은 후대의 일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째 되는 어느 날, 왕은 홀연히 하늘로 올라갔다. 이레 뒤에 왕의 유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으며 이때 왕후도 따라 죽었다. 백성들이 유체를 수습하여 합장을 하려 했더니 커다란 구렁이가 나와 못하도록 방해했다. 하는 수없이 다섯 부분으로 흩어진 그대로 각각 다섯 곳에 장사를 지내고 오릉, 또는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담엄사 북쪽에 있는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오릉에는 혁거세왕의 제향을 받는 제전인 '숭덕전'과 알영왕비의 탄생지라 하는 '알영정터'가 있다.
혁거세왕이 하늘로 올라간 뒤 그 뒤를 이어 남해왕(남해차차웅)이 즉위했다.


김씨 설화


탈해왕 9년 봄이었다.
호공은 대궐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보고 자기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호공이 집으로 돌아가려면 반월성 너머 서쪽 마을을 지나가야 했다. 그 마을 옆에는 시림(始林)이라고 하는 숲이 있는데 나무가 어찌나 우거졌는지 대낮에도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호공은 밤늦게 이곳을 지날 때면 으레 하인을 데리고 다녔다.
이 날도 호공은 조금쯤 긴장한 채 시림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 숲속은 조용하지만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무엇인가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호공은 조금 전에 대궐에서 하던 일을 생각했다. 그 때였다. 죽은 듯이 조용하던 시림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꼬끼오, 꼭, 꼭, 꼬..."
호공이 깜짝 놀라 시림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 조금 전에 무슨 소리 듣지 못했느냐?"
호공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뒤에 따라오는 하인에게 물었다. 하인은 자기도 들었노라고 하며 시림 쪽으로 다시 귀를 기울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림에서 닭이 울다니 그곳에는 늘 신비한 구름과 안개가 서리어 있어서 서라벌 사람들은 상서로운 곳으로 여기고 함부로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호공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닭 울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힘차고 우렁차서 단번에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호공은 닭이 우는 쪽을 바라보다가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만큼 시커멓던 서림이 온통 환한 광명으로 차있고, 숲 위에는 자주빛 구름이 하늘에서 숲속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저건, 아무래도 시림에서 무엇인가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이렇게 생각한 호공은 하인을 데리고 자주빛 구름이 길게 뻗쳐 내린 숲속으로 달려갔다.
"아아!"
호공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숲속에 드리워진 그 구름 속에는 황금빛깔로 된 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숲속을 환하게 밝히던 그 광명은 바로 그 황금빛깔의 궤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궤가 걸려 있는 나무 아래에서 하얀 닭 한 마리가 목을 길게 빼고 우는 것이었다.
"아, 저것은 분명 하늘의 닭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 황금 빛깔의 궤에는 틀림없이 귀한 것이 들어 있을 것이다."
호공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호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대궐로 들어갔다. 아무리 밤이 이슥해졌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임금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탈해왕은 마침 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탈해왕은 호공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호공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도 조금 전에 닭우는 소리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탈해왕은 호공을 따라 시림으로 거동을 했다.
탈해왕은 숲속으로 길게 뻗쳐있는 자주빛 구름을 보고 나라에 경사가 난 것을 단번에 알았다. 그는 얼마나 기뻤는지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탈해왕은 궤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자 흰 닭은 다시 한번 목을 길게 빼고 운 다음 하늘로 날아갔다.
탈해왕은 흰닭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흰닭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
"호공은 조심스럽게 저 궤를 내리도록 하시오."
호공은 하인을 시켜 조심스럽게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궤를 내리도록 하였다. 탈해왕은 손수 궤를 열었다. 그랬더니 궤 속에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금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궤 안에는 잘 생긴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너무나 빼어나게 잘 생기고 씩씩해 보였다.
탈해왕은 그 아이를 두 팔로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는 펄쩍 펄쩍 뛰면서 둥구둥구를 했다. 그러다가 탈해왕은 호공을 바라보고는,
"이건, 아무래도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내린 것 같소."
하고 말했다. 사실 탈해왕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러하옵니다, 마마."
호공이 이렇게 말하자 탈해왕은 더욱 기뻐하였다.
그리고 이번 일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옛 일과 비슷하므로 박혁거세가 세상에 나타나 처음으로 스스로를 가리켜 말한 이란 말에서 '알지'를 따내어 아이의 이름으로 하였다. 알지란 곧 우리나라 말에서 '아기'를 뜻하는 말이다. 알지의 성은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김(金)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자손이 바로 오늘날의 경주 김씨들이다. 그리고 금궤가 나온 시림은 숲과 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서 계림(鷄林)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탈해왕은 알지를 안고 대궐로 향하였다. 그러자 탈해왕의 뒤에는 새와 짐승들이 따라오면서 날고 뛰며 기뻐서 야단들이었다. 탈해왕은 알지를 정성스럽게 길렀다. 알지는 점점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로와 탈해왕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탈해왕은 마침내 좋은 날을 골라서 알지를 태자로 세우고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알지는 뒷날 왕위를 유리왕의 둘째 아들 파사에게 사양하고 왕이 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그는 도량이 넓었다. 알지는 그 뒤 대보의 벼슬에 올라 다만 왕을 도왔을 뿐이다.
그 뒤, 알지의 7대 후손인 미추에 이르러 김씨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로부터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이 임금을 번갈아 하였는데, 그 중에서 알지의 후손으로 왕위에 오른 이는 무려 30 여명이나 되었다.

석씨 탄생 설화


가락국 바다 가운데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이 신민들과 함께 북을 치고 맞아 들여 머물게 하려 하니, 배가 곧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지금도 상서지(上西知) 하서지촌(下西知村)이 있다). 마침 포구 가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니 혁거왕의 고기잡이의 어미였다.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 바다 가운데 본래 바위가 없었는데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고 배를 끌고 가서 찾아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들고 그 배 가운데 궤 하나가 있는데 길이가 20척, 너비가 13척이나 되었다. 그 배를 끌어다 수림 밑에 두고, 길흉을 알지 못하여 하늘에 고하였다. 조금 있다가 궤를 열어 보니 단정한 남아와 아울러 칠보와 노비가 그 가운데 가득차 있었다. (그들이) 대접받은 지 7일만에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정명국(政明國) 또는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하는데, 완하(琓夏)는 혹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倭)의 북동 1천 리에 있다)으로 우리나라에 일찌기 28 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태(胎)에서 나왔고 5, 6세 때부터 왕위를 이어 만민을 가르쳐 성명을 올바르게 하였다. 8품의 성골이 있으나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대위(大位)에 올랐다. 이 때 우리 부왕 함달파가 적녀국의 왕녀를 맞아서 비를 삼았더니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할새, 7년 뒤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이에 대왕이 군신에게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음은 고금에 없는 일이니 이것이 불길한 징조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또 칠보(七寶)와 노비를 배 안에 가득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마음대로 인연 있는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에 왔노라."고 말을 마치자, 그 아이가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 석총(石塚)을 만들고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성중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니 마치 초생달같이 둥근 봉강(蜂岡)이 있어 지세가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내려와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모략을 써, 몰래 숫돌과 숯을 그 곁에 묻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 집 문 앞에 가서 이것이 우리 조상 때의 집이라 하였다. 호공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여 서로 다투어 결단치 못하고 관가에 고하였다. 관에서는 무엇으로써 너의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하니, 동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시골에 간 동안 다른 사람이 뺴앗아 살고 있으니 그 땅을 파 보면 알 것이라." 하였다. 그 말대로 파 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있으므로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때 남해왕이 탈해의 슬기 있음을 알고 맏공주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阿尼) 부인이었다. 하루는 탈해가 동구(東丘)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를 시켜 물을 구해 오라 하였다. 백의가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서 먼저 맛보고 드리려 하다가 그 각배가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탈해가 이를) 꾸짖자 백의가 맹세해 말하기를 "이후에는 멀고 가까운 곳을 논할 것 없이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하니 비로소 그릇이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가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지금 동악 가운데 우물 하나가 있어 속(俗)에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니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이 돌아가매 光虎(武)帝 중원(中元) 6년 정사(丁巳) 6월에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예적 내 집이라 해서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또는 까치로 인하여 궤를 열게 되었으므로 '작(鵲)' 字에서 '조(鳥)' 字를 떼고 석씨(昔氏)라 성(姓)하였다고도 하고, 또 궤를 풀고 탈출해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한다. 재위 23년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에 들어가니 소천구(疏川丘) 가운데 장사지냈던바, 그 뒤에 신의 가르침이 있기를 "나의 뼈를 삼가 묻으라" 하였다. 그 두골의 둘레가 3척 2촌, 신골의 길이가 9척 7촌이나 되며 이가 엉키어 하나가 된 듯하고 골절이 모두 연해졌으니 참으로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이었다.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궐내에 모시었더니 신이 또 이르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두어라." 하므로 (거기에) 봉안케 하였다(또는 이르기를 탈해 붕후(崩後) 27세(世) 文虎(武)王 떄 조로(調露) 2년 경신(庚辰) 3월 15일 신유(辛酉) 밤에 태종의 꿈에 매우 사나운 모양의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인데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지금까지 나라에서 끊이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곧 동악신(東岳神)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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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혁거세 신화 > 박씨 설화

옛날 진한 땅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룻날의 일이었다. 여섯 촌의 우두머리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 둑 위에 모여 의논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위에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법도를 모르고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소. 하루 바삐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창건하여 도읍을 세우도록 합시다."
이에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남쪽 양산 기슭 나정 우물가에서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워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모양은 마치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리로 달려가보니 자주빛의 큰 알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 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 알을 조심스럽게 쪼개 보았다. 아이의 몸에서는 광채가 나며 임금의 위용을 드러내었다. 새와 짐승들이 모여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이 맑고 밝게 빛났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했는데, 이는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말이다.
혁거세왕은 맨 처음 입을 열어 스스로를 '알지거서간'이라 했다. 그때부터 임금의 존칭을 '거실한' 혹은 '거서간'이라 하게 되었다. 여섯 촌의 사람들은 하늘이 자신들의 소원을 듣고 임금님을 내려준 것을 소리높여 칭송하며, "이제 천자님이 세상에 내려왔으니 덕있는 여식을 찾아 배필을 정할 일만 남았구나" 하며 환호했다.
그런데 바로 이 날 정오 무렵이었다. 사량리라는 마을의 알영 우물가에 계룡 한 마리가 나타나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여자아이를 낳았는데 그 자태가 매우 고왔다. 그러나 오직 입술만은 닭의 부리처럼 생겨서 보기가 흉했다. 사람들은 신기해 하기도 하고 애석해 하기도 하면서 그 아이를 데리고 월성 북쪽 시내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켰다. 그런데 목욕을 끝내고 보니 어느 사이에 부리는 떨어지고 앵두같이 예쁜 사람의 입술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의 놀라움은 이후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그 시내를 부리가 빠졌다 해서 발천(撥川)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남산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하늘이 내려준 신령한 두 아이를 모셔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고 그 알이 마치 바가지처럼 생겼는지라 성을 '박'이라 했다. 또 여자아이는 그가 나온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 했다. 두 성인이 자라 열 세 살이 되었을 때 혁거세는 왕으로 추대되고 알영은 왕후가 되니 기원전 57년의 일이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이라 하였는데 더러는 사라 혹은 사로라고도 했다.
또 처음 왕이 계정(鷄井)에서 났으므로 계림국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낸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 때에 김알지를 얻으면서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계림으로 고쳤다고도 한다. 신라(新羅)라는 이름이 정해진 것은 후대의 일이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째 되는 어느 날, 왕은 홀연히 하늘로 올라갔다. 이레 뒤에 왕의 유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으며 이때 왕후도 따라 죽었다. 백성들이 유체를 수습하여 합장을 하려 했더니 커다란 구렁이가 나와 못하도록 방해했다. 하는 수없이 다섯 부분으로 흩어진 그대로 각각 다섯 곳에 장사를 지내고 오릉, 또는 사릉(蛇陵)이라고 했다. 담엄사 북쪽에 있는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오릉에는 혁거세왕의 제향을 받는 제전인 '숭덕전'과 알영왕비의 탄생지라 하는 '알영정터'가 있다.
혁거세왕이 하늘로 올라간 뒤 그 뒤를 이어 남해왕(남해차차웅)이 즉위했다.


< 김알지 신화 > 김씨 설화


탈해왕 9년 봄이었다.
호공은 대궐에서 밤늦게까지 일을 보고 자기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호공이 집으로 돌아가려면 반월성 너머 서쪽 마을을 지나가야 했다. 그 마을 옆에는 시림(始林)이라고 하는 숲이 있는데 나무가 어찌나 우거졌는지 대낮에도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호공은 밤늦게 이곳을 지날 때면 으레 하인을 데리고 다녔다.
이 날도 호공은 조금쯤 긴장한 채 시림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밤이 깊어 숲속은 조용하지만 하늘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무엇인가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호공은 조금 전에 대궐에서 하던 일을 생각했다. 그 때였다. 죽은 듯이 조용하던 시림에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꼬끼오, 꼭, 꼭, 꼬..."
호공이 깜짝 놀라 시림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 조금 전에 무슨 소리 듣지 못했느냐?"
호공은 자기 귀를 의심하며 뒤에 따라오는 하인에게 물었다. 하인은 자기도 들었노라고 하며 시림 쪽으로 다시 귀를 기울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림에서 닭이 울다니 그곳에는 늘 신비한 구름과 안개가 서리어 있어서 서라벌 사람들은 상서로운 곳으로 여기고 함부로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호공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닭 울음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힘차고 우렁차서 단번에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호공은 닭이 우는 쪽을 바라보다가 그만 걸음을 멈추었다.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만큼 시커멓던 서림이 온통 환한 광명으로 차있고, 숲 위에는 자주빛 구름이 하늘에서 숲속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저건, 아무래도 시림에서 무엇인가 상서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이렇게 생각한 호공은 하인을 데리고 자주빛 구름이 길게 뻗쳐 내린 숲속으로 달려갔다.
"아아!"
호공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숲속에 드리워진 그 구름 속에는 황금빛깔로 된 궤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려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 않은가. 숲속을 환하게 밝히던 그 광명은 바로 그 황금빛깔의 궤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궤가 걸려 있는 나무 아래에서 하얀 닭 한 마리가 목을 길게 빼고 우는 것이었다.
"아, 저것은 분명 하늘의 닭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 황금 빛깔의 궤에는 틀림없이 귀한 것이 들어 있을 것이다."
호공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호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대궐로 들어갔다. 아무리 밤이 이슥해졌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임금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탈해왕은 마침 자리에 들지 않고 있었다. 탈해왕은 호공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다가 호공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기도 조금 전에 닭우는 소리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탈해왕은 호공을 따라 시림으로 거동을 했다.
탈해왕은 숲속으로 길게 뻗쳐있는 자주빛 구름을 보고 나라에 경사가 난 것을 단번에 알았다. 그는 얼마나 기뻤는지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탈해왕은 궤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러자 흰 닭은 다시 한번 목을 길게 빼고 운 다음 하늘로 날아갔다.
탈해왕은 흰닭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흰닭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입을 열었다.
"호공은 조심스럽게 저 궤를 내리도록 하시오."
호공은 하인을 시켜 조심스럽게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궤를 내리도록 하였다. 탈해왕은 손수 궤를 열었다. 그랬더니 궤 속에서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금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는데, 궤 안에는 잘 생긴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너무나 빼어나게 잘 생기고 씩씩해 보였다.
탈해왕은 그 아이를 두 팔로 보듬어 안았다. 그리고는 펄쩍 펄쩍 뛰면서 둥구둥구를 했다. 그러다가 탈해왕은 호공을 바라보고는,
"이건, 아무래도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내린 것 같소."
하고 말했다. 사실 탈해왕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러하옵니다, 마마."
호공이 이렇게 말하자 탈해왕은 더욱 기뻐하였다.
그리고 이번 일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옛 일과 비슷하므로 박혁거세가 세상에 나타나 처음으로 스스로를 가리켜 말한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한번 일어나다)>이란 말에서 '알지'를 따내어 아이의 이름으로 하였다. 알지란 곧 우리나라 말에서 '아기'를 뜻하는 말이다. 알지의 성은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김(金)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자손이 바로 오늘날의 경주 김씨들이다. 그리고 금궤가 나온 시림은 숲과 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서 계림(鷄林)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탈해왕은 알지를 안고 대궐로 향하였다. 그러자 탈해왕의 뒤에는 새와 짐승들이 따라오면서 날고 뛰며 기뻐서 야단들이었다. 탈해왕은 알지를 정성스럽게 길렀다. 알지는 점점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혜로와 탈해왕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탈해왕은 마침내 좋은 날을 골라서 알지를 태자로 세우고 장차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알지는 뒷날 왕위를 유리왕의 둘째 아들 파사에게 사양하고 왕이 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그는 도량이 넓었다. 알지는 그 뒤 대보의 벼슬에 올라 다만 왕을 도왔을 뿐이다.
그 뒤, 알지의 7대 후손인 미추에 이르러 김씨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로부터 신라는 박(朴), 석(昔), 김(金) 세 성이 임금을 번갈아 하였는데, 그 중에서 알지의 후손으로 왕위에 오른 이는 무려 30 여명이나 되었다.

< 석탈해 신화 > 석씨 탄생 설화


가락국 바다 가운데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이 신민들과 함께 북을 치고 맞아 들여 머물게 하려 하니, 배가 곧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지금도 상서지(上西知) 하서지촌(下西知村)이 있다). 마침 포구 가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 하니 혁거왕의 고기잡이의 어미였다.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 바다 가운데 본래 바위가 없었는데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고 배를 끌고 가서 찾아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들고 그 배 가운데 궤 하나가 있는데 길이가 20척, 너비가 13척이나 되었다. 그 배를 끌어다 수림 밑에 두고, 길흉을 알지 못하여 하늘에 고하였다. 조금 있다가 궤를 열어 보니 단정한 남아와 아울러 칠보와 노비가 그 가운데 가득차 있었다. (그들이) 대접받은 지 7일만에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정명국(政明國) 또는 완하국(琓夏國)이라고도 하는데, 완하(琓夏)는 혹 화하국(花厦國)이라고도 하니, 용성(龍城)은 왜(倭)의 북동 1천 리에 있다)으로 우리나라에 일찌기 28 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사람의 태(胎)에서 나왔고 5, 6세 때부터 왕위를 이어 만민을 가르쳐 성명을 올바르게 하였다. 8품의 성골이 있으나 선택하는 일이 없이 모두 대위(大位)에 올랐다. 이 때 우리 부왕 함달파가 적녀국의 왕녀를 맞아서 비를 삼았더니 오래도록 아들이 없으므로 기도하여 아들을 구할새, 7년 뒤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이에 대왕이 군신에게 묻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음은 고금에 없는 일이니 이것이 불길한 징조이다.' 하고 궤를 만들어 나를 그 속에 넣고 또 칠보(七寶)와 노비를 배 안에 가득 실어 바다에 띄우면서 축원하기를 '마음대로 인연 있는 곳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집을 이루라' 하였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여기에 왔노라."고 말을 마치자, 그 아이가 지팡이를 끌며 두 종을 데리고 토함산에 올라 석총(石塚)을 만들고 7일 동안 머무르면서 성중에 살 만한 곳이 있는가 바라보니 마치 초생달같이 둥근 봉강(蜂岡)이 있어 지세가 오래 살 만한 곳이었다. 내려와 찾으니 바로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이에 모략을 써, 몰래 숫돌과 숯을 그 곁에 묻고 이튿날 이른 아침에 그 집 문 앞에 가서 이것이 우리 조상 때의 집이라 하였다. 호공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여 서로 다투어 결단치 못하고 관가에 고하였다. 관에서는 무엇으로써 너의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하니, 동자가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시골에 간 동안 다른 사람이 뺴앗아 살고 있으니 그 땅을 파 보면 알 것이라." 하였다. 그 말대로 파 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있으므로 그 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때 남해왕이 탈해의 슬기 있음을 알고 맏공주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가 아니(阿尼) 부인이었다. 하루는 탈해가 동구(東丘)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를 시켜 물을 구해 오라 하였다. 백의가 물을 떠 가지고 오다가 중도에서 먼저 맛보고 드리려 하다가 그 각배가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탈해가 이를) 꾸짖자 백의가 맹세해 말하기를 "이후에는 멀고 가까운 곳을 논할 것 없이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하니 비로소 그릇이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가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지금 동악 가운데 우물 하나가 있어 속(俗)에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니 바로 이것이다. 노례왕이 돌아가매 光虎(武)帝 중원(中元) 6년 정사(丁巳) 6월에 (탈해가) 왕위에 올랐다. 예적 내 집이라 해서 남의 집을 빼앗았으므로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또는 까치로 인하여 궤를 열게 되었으므로 '작(鵲)' 字에서 '조(鳥)' 字를 떼고 석씨(昔氏)라 성(姓)하였다고도 하고, 또 궤를 풀고 탈출해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 한다. 재위 23년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에 들어가니 소천구(疏川丘) 가운데 장사지냈던바, 그 뒤에 신의 가르침이 있기를 "나의 뼈를 삼가 묻으라" 하였다. 그 두골의 둘레가 3척 2촌, 신골의 길이가 9척 7촌이나 되며 이가 엉키어 하나가 된 듯하고 골절이 모두 연해졌으니 참으로 천하에 짝이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이었다.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궐내에 모시었더니 신이 또 이르기를 "내 뼈를 동악(東岳)에 두어라." 하므로 (거기에) 봉안케 하였다(또는 이르기를 탈해 붕후(崩後) 27세(世) 文虎(武)王 떄 조로(調露) 2년 경신(庚辰) 3월 15일 신유(辛酉) 밤에 태종의 꿈에 매우 사나운 모양의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인데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지금까지 나라에서 끊이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를 곧 동악신(東岳神)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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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동부여의왕 금와왕이 숲에서 어떤 처녀를 만났는데 그 처녀는 수신인 하백의 딸

유화 였습니다. 유화는 하나님 의아들인 해모수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여 임신을 하였는데, 해모수는 하늘로 돌아가고  하백은 유화가 허락도없이 결혼했다하여 유화를 내쳤습니다.

금와왕은 유화를 불쌍하게여겨 자기의 후궁으로 살게하였습니다.  유화는 커다란 알을

하나를 낳았는데 금와왕이 흉칙하다하여 알을 산에 버렸으나 산짐승들이 보호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들도 먹지않았습니다. 그래서 금와왕은 다시 유화에게 알을주었는데

그알에서 태어난 사람이 주몽입니다.주몽은 활을 잘쏘는 사람' 이란 뜻인데,주몽이 여러 면에서 뛰어나 금와왕의 사랑을 독차지 했습니다.이를 시샘한 아들들은, 주몽을 죽이려고 합니다.이때, 우연히 그들의 말을 들은 유화는 주몽에게 어서 떠나라고 하고 주몽은 떠나갑니다.(거북이와 물고기들이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이야기는 알고 계시죠?)주몽은 졸본땅에 이르자 나라를 짓고 제 1대왕 '동명성왕'이 됩니다.

 

다음은 신라 건국 신화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진한 한부분에선 여섯개의 촌으로 이루어진 한 부족이 있었습니다.그들은 왕을 이을 후계자가 없어서 걱정이었는데 어느날 한 촌장이 나정 우물가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말이 울더니 하늘로 날아갔습니다.말이 있던 자리를 보니 자줏빛 알이 놓여있었고, 그알에서 태어난 아이를 박혁거세라 이름을 지었습니다.성 '박'은 박처럼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 해서 성을 박이라 지었고,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 하여 이름을 혁거세라 지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백제 건국 신화 입니다.(사실 이건 신화보단 이야기에 가깝죠.)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 이야기를  아까 했죠?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 전에 부여에서 결혼을 해 아내가 아기를 가졌습니다.그런데 이때 금와왕의 아들들이 고주몽을 해치려고 하자 주몽은 도망을 가는데 임신한 아내를 놓고 갑니다.

  그 임신한 아이가 바로 '유리' 입니다.하루는 유리가 물동이를 이고 가는 어떤 아주머니를 보고 활로 물동이를 쏘아서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 여자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해했습니다. "애비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버릇없이 남의 물동이를 깨다니."라는 말을 듣고 울면서 어머니께 물읍니다. "어머니, 왜 저는 아버지가 없죠?"

그러자 어머니는 모두 이야기를 해주고 '일곱돌 모난 돌위에 소나무가 자란곳'밑에 아버지가 증표를 남겨놨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유리는 모든 산을 찾아봤지만 일곱돌 모난 돌위에 소나무가 자라는 곳은 없었습니다. 계속 산을 찾다 지쳐서 집 마루에 앉아 있던 유리는 기둥을 보니 일곱 모난 돌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유리는 그곳을 파니 칼 조각이 남아있었고 고구려 땅으로 찾아가 그 증표를 보여주었고 다른 조각과 맞쳐 본 다음 주몽은 유리가 자기 아들인걸 알게 됩니다.

   유리가 갑자기 왕세자가 되버리자, 비류와 온조는 나중에 유리가 왕이되면 자기를 해칠 것 같아 남쪽으로 떠납니다.

형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으로 가고 온조는 한강 유역으로 가 나라를 세웁니다.이게 바로 '십제'입니다.

  온조는 농사도 잘되고 나라가 편안해 백성들도 점점 많아졌지만, 인천에 나라를 세운 비류는 바닷물 때문에 농사가 잘 안되는걸 알고 자기를 따라온 백성들과 신하들을 생가하며 슬퍼하다가 죽습니다.

   비류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모두 온조의 십제로 모여들고, 온조는 백성들이 자기를 도왔다 하여 나라의 이름을 백제로 바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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