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국사 (한국역사) 고대사 관련 질문

고등학교 국사 (한국역사) 고대사 관련 질문

작성일 2005.04.09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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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1학년생이예요

 

최근 고대사를 배우고 있는데

 

궁금한 점이 있어서 질문 올려요^_^

 

답변 부탁드립니다ㅎ 기왕이면 역사관련쪽으로 일하시는 분이면

 

더욱 좋겠네요^_^  주관적이기보다는 객관적으로 답변해주세요ㅎㅎ

 

 

 

1. 환웅이 유이민 집단이라고 배웠는데 어디서 온 유이민인지 궁금합니다

 

 

2. 고조선의 세력범위를 보면 한반도의 평양이북(정확하지는 않지만..)부터 만주의

 

넓은 땅이 영토였는데 중국이 고조선의 자신의 역사로 왜곡하지는 않나요?

 

고구려 역사 왜곡하는 것을 보면 고조선도 충분히 왜곡하려들지 않을까요?

 

 

3. 중학교때는 기자조선을 배웠었는데 고등학교에서는 기자조선을 허구로 가르치더군요.

 

무엇이 진실인지 궁급합니다

 

 

4. 위만이 유이민 집단이라던데 위만조선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준왕의 자손들이 한반도로 내려왔으니까 위만조선은 우리나라와

 

관련 없지 않을까요?

 

 

5. 교과서에는 부여의 건국과정이 하나도 안 나왔있더군요 [뭔가 이상합니다.... 부여출신

 

이 고구려 백제를 세웠는데 부여를 중히 다루지 않는 이유는.. 우리나라도 역사왜곡을 하

 

는 것은 아닌지...]

 

아무튼 부여의 건국한 사람과 건국과정 궁금합니다

 

 

6. 백제가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렸는데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합니다

 

신라처럼 패쇄된 지형은 아니지만 위로는 고구려가 막고 있어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는 불가능 했을 듯 싶은데.. 그냥 훌륭한 왕이 나와서 그런건가요?

 

 

7. 가야가 어째서 그토록 약했는지 궁금합니다

 

교과서 읽어보면 가야는 거의 동네북으로 나옵니다만

 

TV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보면 가야는 상당히 발전된 나라로 나오는데..;;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8.  광개토대왕이 왜 신라를 가만히 내버려두었는지 궁금합니다.

 

북쪽은 계속 영토를 확장해 나가면서 왜 신라를 도와줬는지 (예를 들어 왜를 격퇴해주고)

 

신라 조그만 나라 먹는게 귀찮은 탓이였을까요?

 

 

9.  고구려는 장수왕때 최고전성기 였다고 배웠습니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에

 

백제, 신라, 가야가 밀리지 않았는데 실제로 백제, 신라, 가야도 상당히

 

강한 국가였나요?

 

 

10.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수나라 30만 군대를 몰살켜서 몇천명만 돌아가게 했다는

 

전투.  을지문덕이  강의 상류를 소가죽으로 묶어 막아놓은 다음에

 

수나라가 지나가는 틈을 타서 물로 수장시켰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물을 이용해서 군사를 쓸어버린다고 한들 

 

강의 폭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정말로 많이 수장시켜도 만명이 안될 것 같습니다. 그 후 물론 수나라의 사기가 떨어져서

 

전투에 유리했겠지만.. 상대는 무려 30만입니다... 30만 군사는 도대체 뭘 한 겁니까?

 

제 생각에는 역사가들이 지나치게 과장을 한 듯 싶네요

 

정말로 살수대첩이 이렇게 많은 이를 죽인 전투가 사실인지 궁금합니다.

 

 

11. 신라가 삼국을 통일 했습니다. 하지만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는데

 

통일신라라고 교과서에 써있습니다. 이거 잘못 된 거 아닙니까?

 

남북국시대의 신라라고 표기해야 옳지 않을까요?

 

 

 

질문이 많습니다

 

아직도 고등학교 1학년생이다보니

 

억지스런 질문도 몇개 있겠네요ㅠ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 자세한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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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전문가나 전공자는 아닙니다만.... ^^;

 

 

1. 환웅집단

환웅집단이 딱히 어디다라고 말할 건 없지만, 우리의 초기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중국과는 거리가 멀고 시베리아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으로 미루어 중국보다는 몽골 내지는 시베리아 쪽에서 이주해 온 집단이 아닐까 합니다.

 

2. 왜곡 우려가 높습니다. 당연히 '동북공정' 은 고구려 역사만을 노리는 것이 아닙니다. 좁게는 만주 전체, 넓게는 북한 지역까지 중국이 역사적으로 지배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프로젝트죠. 조만간 중국이 고조선까지 중국사라고 언급할 가능성이 큽니다.

 

3.

기자조선설은 중국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기에 기록에서 근거합니다. 주나라 무왕(희발)이 은나라 주왕과 달기를 치자 기자가 조선으로 망명하고, 주 무왕이 그를 조선후로 봉했다는 기록입니다. (이 시대에 대한 유명한 중국 판타지 소설이 <<봉신연의>> 죠. ^^; )

 

기자조선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민족주의 측면입니다. 기자조선설은 '중화주의' 로 표현되는 중국 민족주의의 한 결과물입니다. 즉, 기자가 오기 전의 조선(고조선)은 미개한 곳이었는데, 기자가 옴으로 인해서 문명화되었다는 것이지요. 초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이러한 점에서 기자조선설에 반발한 면도 큽니다.

둘째, 기자 관련 유물이라는 것이 대부분 수천년 뒤의 후대에 건립된 것이거나 전혀 관계없는 것을 기자에 억지로 갖다 붙인 예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때에 조성된 것인데, 사대주의에 빠진 고려 지배층이 고작 기자가 우리를 문명화시켜 주었다는 식으로 고려가 문명국임을 자랑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중국 사서에 나오는 기자묘의 위치는 산동성 내지는 하남성인데, 당시 은/주나라의 위치를 생각하면 산동성이나 하남성이 거리상 대략 맞습니다. (은나라 말기, 주나라 초기라면 도저히 중국의 세력이 한반도 평양에까지 미칠 가능성은 적습니다.)

셋째, 은나라나 주나라의 조선 정벌기록은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국가들이 조선을 정벌하지도 않고 기자를 조선에 봉할 수 있다는 것은, 마치 '중국의 문화와 예법이 뛰어나므로' 중국인을 이민족 국가의 제후로 봉해도 이민족들이 이에 호응하리라 생각했다는 것인데, 이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죠. 요컨대 당시 고조선이 중국 국가들의 영향권 내에 있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넷째, 고조선이 주나라 제후국들과 전쟁한다는 점입니다.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 의해 조선(고조선)을 통치하는 제후로 임명되었다면, 주나라의 제후국인 조선과 제齊, 진秦, 진晉, 정鄭 등의 국가들과의 관계가 그들 제후국들의 관계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나 조선은 연 등 주나라의 제후국들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심지어 제후 연합군에 의해 공격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패자가 등장할 때에 제후들을 불러 모임을 여는데, 이 때 조선후(조선 통치 제후)가 초대받았다는 말은 들은 바 없습니다. 따라서 조선과 주나라의 관계는 조선이 주나라의 제후국이라기보다는 주나라 통치권 바깥의 다른  '이민족 국가' 들의 경우와 유사합니다.

 

4.

엄밀히 말한다면야 남한 사람들 대부분의 조상은 고조선 및 삼한이 존재하던 시절 그 지역에 살던 '백성들' 입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지배층이 이리저리 움직였다고 해서 누구는 조상이다 아니다 라고 말한다는 것은 좀 그렇지요. 사실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고 해서 단군이 내 족보상의 제일 꼭대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습니다. (단 1명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단군의 자손이니, 주몽의 자손이니 하는 표현은 생물학적으로 그 혈통이 내게 이어진다는 의미보다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 역사나 주몽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역사가 내가 속한 공동체(한국)의 역사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생각할 때에 위만조선 이전의 고조선사가 한국사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설사 고조선의 임금에 변동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주민 구성 대부분이라든가 그 문화에서 별반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한국사에서 이를 제외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준왕은 내 XX대 할아버지인데 위만은 아니다, 이런 개념이 아니니까요.

 

 

5.

부여의 건국과정도 당연히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의 경우와 너무 흡사합니다. 간단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리국 국왕의 한 시녀가 있는데, 어느날 햇볕이 그녀가 다시는 곳마다 비추더니 그녀가 임신을 하였다. 이에 국왕이 시녀를 질책하자 '달걀만한 기운이 내 뱃속에 들어와 임신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고구려 주몽의 경우 아비가 해모수로 정해져 있고, 부여국왕이 주몽을 키움)

 

그 시녀는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짐승들 먹이로 주려 하여도 짐승들이 오히려 죽지 않게끔 이를 보호하니 고리국왕이 이를 두려워하여 '천제의 아들이로다' 하였다. 이 아이를 동명이라 이름지었다. 동명은 자라서 활을 잘 쏘게 되었는데, 왕이 이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므로 남쪽으로 달아났다.

 

그런데 시엄수에 이르러 강물을 건널 수 없자, 활로 강물을 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이를 밟고 건너가서 부여를 세웠다. 이 자가 부여 시조인 동명왕이다.

(고구려 주몽의 경우에는,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이다' 라고 외칩니다만, 동명의 경우에는 그냥 물에 대고 활만 쏩니다.)

 

보통 고구려 시조인 주몽을 동명왕/동명성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만, 이는 부여 시조인 동명왕에서 따온 이름인 듯 싶습니다.

 

 

6.

이런... 강대한 고구려 이미지 때문에 선입관이 생기셨군요. 고구려는 초기에 백제를 압박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낙랑군', '대방군' 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의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주변을 장악하던 상태였습니다. 서울 부근(초기 백제)까지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죠.

 

고구려-백제가 충돌하는 것은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킨 이후의 일입니다. 첫 전투 때에인 고구려 고국원왕 때에는 마침 백제가 마한세력을 몰아내고 경기도-충청도-전라도를 장악하는 왕인 근초고왕시기라서 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을 막고 되려 고구려를 쳐들어가서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까지 합니다. 이 때까지는 고구려가 백제를 압박하지 못했지요.

 

고구려는 북쪽으로 부여, 서쪽으로 중국의 국가들과 적대관계인 경우가 많아 백제 방면으로 병력을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한 예로 동천왕 때에는 위나라 관구검이 침입해 와서 나라가 홀딱 망할 뻔했습니다. 그리고 전연/후연 등 북경 부근의 중국 국가들은 고구려와 전통적인 적대관계였지요.) 낙랑군이 있는 경우에는 고구려에게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지요. 요컨대 초기의 고구려에게는 적이 많아 백제에만 신경쓸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반면 백제는 당시 신라가 약했다는 점을 고려하고, 마한을 사실상 무력화시켰으며 가야나 왜와는 동맹관계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고구려에 올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7.

초기에는 가야가 신라보다 우위에 섰던 기록들도 꽤 보입니다. 특히 '왜' 가 신라에 침입했다는 기록 중 몇몇은 가야의 신라 침입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실제로 왜의 침입 때문에 못살겠다는 신라의 구조 요청을 받고 광개토대왕이 대군을 끌고 경상도 지방까지 남하해서는 현재의 일본을 친 것이 아니라 가야를 정벌해 버립니다. (그 결과 전기가야가 해체되고 후기가야가 성립된다고 합니다.)

 

유물로 보아 가야 정벌 이후에도 한동안 고구려군이 그 부근에 주둔했던 것으로 보이고 그 영향으로 가야가 받은 타격을 쉽게 해소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삼국유사에 박제상이 고구려에 인질로 잡혀간 눌지왕의 동생을 장수왕으로부터 구해 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광개토대왕-장수왕 무렵에 신라왕이 왕자를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면서까지 고구려의 보호를 필요로 할 정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후 신라는 점차 성장하게 되고 가야는 영 힘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가야가 백제, 신라의 동네북이 되어 버립니다. 요컨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가야 정벌이 가야에 치명타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8.

글쎄요...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어쩌면 당시의 기준으로는 고구려가 신라를 먹은 것일 수도 있고,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요. (고구려가 신라를 먹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은, 고구려가 신라 왕자를 인질로 잡았을 가능성이 있고, 고구려왕이 신라왕에게 의복 등을 하사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국왕이 신하에게 하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 눌지왕 대에 상당한 내정간섭이 있었다는 점 등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확실하진 않죠.)

 

 

9.

백제는 아신왕,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크게 깨지긴 했어도 강한 국가였으나, 아직 신라는 강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눌지왕 때에 신라가 한 고구려 장수를 죽이자 왕이 나서서 고구려 장수왕에게 백배 사죄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면서 신라는 조금씩 국력을 키우고 나제동맹을 맺어(백제 비류왕 - 신라 눌지왕) 백제의 고구려전쟁을 지원합니다. 가야는... 글쎄요. 이 무렵에 강국이라 하기에는 영...

 

10.

강물로 다 죽였다는 것은 그 전쟁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강물을 아무리 잘 막아 놔도 강물만으로 죽일 수 있는 병사는 얼마 안 됩니다.

 

강물을 막은 이유는 물이 적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수나라 군사들이 방심하고 건너게 하기 위함이고 물을 터뜨린 이후에는 두 가지 효과가 나타납니다. 강물  때문에 수나라 군대가 양분되게 되고, 또 기습을 당했다는 것 때문에 사기가 떨어지죠. 그리고 강물을 건널 때에는 물을 막았다 터뜨리지 않더라도 군대의 진이 흐트러져서 매우 혼란스러운 양상을 띠기 때문에 공격당할 경우 큰 피해를 입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고사 '송양지인' 참고)

 

양분된 부대는 불어난 물 때문에 단시간 내에 합쳐질 수 없고, 지휘관들의 명령체계가 순간적으로 엉망이 되어 병사들은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이를 이용해서 고구려군이 양분되고 혼란스러워진 수나라 군대를 몰아 쳐 버린 것입니다. 특히 주력부대와 분리된 부분의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 기병에게 손쉬운 학살대상이 되었겠죠.

 

 

11.

맞습니다. 통일신라시대라는 표현은 이제 사용하지 않지요. 남북국 시대가 맞습니다.(혹자는 남북조 시대라고도....) 문제는 삼국시대의 신라와 남북국 시대의 신라를 구분하는 것인데, 그 때문에 '통일신라' 라는 단어가 쓰이는 것 같습니다.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그냥 통일신라에서의 '통일'을 '삼국 통일' 이 아니라 '백제-신라 통일' 정도로 이해하세요.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스키토 시베리언이라고 바이칼호수 인근에서 유입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는 현재 출토되는 청동기 유품이 중국과 다르다는 것으로 입증됩니다.

물로 구석기 신석기에도 이 땅에는 임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민족의 이동은 한 차례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러번에 나누어 유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훈족이 바로 한민족의 한 갈래이며,

중국을 끊임없이 침략했던 흉노도 훈족의 다른 말이라고 지적합니다.

흉노족의 대족장을 선우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의 단군과 같이 제사장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2.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강력한 부족국가를

건설한 단군왕검께서는 당시 전국시대를 맞고 있는 연나라와 요하를 사이에 두고

쟁패 했습니다.

당시 연나라 사람들은 고조선 사람들을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서술 했습니다.

현재 한반도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중국이 현재 만주지방과 한반도 북부

등 폭넓게 포진해 있던 고조선을 인정할 리 만무 합니다.

 

3. 중국의 전국시대가 끝나고 한나라로 통일되자, 연의 장수였던 위만이 수하 1천여명

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합니다.

이때 위만은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또 국호조차 조선이라고 한 것을

보면 분명 조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엇갈린 학설이 오가지만 위만 이후에도

지석묘군이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된다든지, 수하 중 토착 조선인이 대부분의 상위

계급을 유지 했다는 등의 사실로 그가 조선인이었을 것이란 주장이 더 설득력을

가집니다.

 

4. 앞 선 이유로 위만이 우수한 철기문화를 들여왔고, 중국 유민을 일부 유입시켰다

하더라도 고조선 족장세력을 철기세력과 통합하여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시켰을

겁니다.

 

5. 부여에 관한 건 짧막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부여는 송화강 일대 농안과 장춘 지역에 걸치는 북만주 평원을 무대로

총 8만호에 이르는 거대한 부족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역사는 적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친 흉노와 강력한 고구려, 그리고 거대한 중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눈치만

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선택은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로서도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부여를 짓밟아야 했고, 부여는

살아남기 위해 후한과 협력하고, 말년에는 진과 교통하다가  흉노족의 침입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서기 494 고구려에 투항하고 맙니다.

고구려 백제가 이 부여에서 갈려져 나왔으니 엄연한 한민족의 한 갈래입니다.

금와설화도 있죠. 고주몽 설화와 함께.

 

6.백제의 고이왕 덕입니다.

서해를 사이에 두고 마한지역은 중국 군현과 충돌이 잦았던 모양입니다. 이때

백제라는 부족이 마한 전지역의 부족연맹체를 결성하고 맹주가 됩니다. 이 때의

중추적인 역할을 고이왕이 했습니다.

또 고이왕은 관직을 개편하고(6좌평), 법령을 제정하는 등 고대국가의 성립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런 통치체제의 개혁으로 누구보다 빨리 고대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한강유역을 지배하는가 하면,  한반도 서해 방면에 중국의 영향력을 방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토대로 근초고왕때는 3만의 대병을 이끌고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격살할 정도로 크게 국력을 떨칩니다.

 

7. 신라 백제보다 훨씬 우수한 문화와 경제력을 가지고도 양국의 각축장이 된

이유는 가야의 지리적 위치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다로는 왜의 위협에 시달리고 동서로는 신라 백제를 견제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땅이 거칠고 교통이 불편하여 왕래가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마치 뒤웅박에 갇힌 꼴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가야는 백제와 왜를 끌여들여 특히 위협적인 신라를

견제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화를 불러들였습니다.

지속적인 신라의 침탈로 결국 본가야 대가야 순으로 멸망하고 맙니다.

가야의 문화는 이후 신라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8.광개토대왕 당시 한강유역을 장악하고 있던 존재는 백제였습니다.

국토확장을 꾀하던 광개토대왕으로서는 백제를 쳐부수지 않을 수 없었죠.

이때만 해도 신라에 대해서는 같은 민족이라는 유대감이 더 강했던 모양입니다.

낙동강 유역까지 내려가 왜군을 격파하지요.

만약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하고 있었다면 백제 대신 신라가 광개토대왕과 싸워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후 신라의 국력이 강해지자 고구려, 백제가 협력하여 신라를 노립니다.

그러자 신라는 수나라를 끌여들여 대항하게 되고, 유명한 살수대첩이 나오는 거죠.

만약 광개토대왕이 이때 삼국통일을 하였다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매우 달라졌을

겁니다.

 

9, 장수왕의 남진정책이 좀 더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고구려의 남진으로 위기감을 느낀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맺고 대항했지만,

겨우 백제의 개로왕을 죽이고 수도 한산을 함락시켰을 따름입니다.

장수왕 사후 문자명왕이 신라의 우산성, 백제의 가불 원산 등을 함락시키지만

더 이상 진격하지 않습니다.

대충 만족한 모양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끝까지 밀어버려야 했는데----.

 

10. 그게 그렇지는 않죠.

적의 중간을 끊는 겁니다. 미리 강을 건넌 적병들은 주살하고, 남은 자들은 추격하여

뿌리를 뽑는 거죠.

그리고 살수를 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한강의 넓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면

짐작할 만 합니다. 한강 넓이가 대략 4~5백미터 가량 되던가요?

넓게 퍼진 병사들이 발목까지 차는 물을 헤트리며 전진합니다.

한쪽으로 줄을 서서 넘지 않는 이상 넓은 방면으로 한꺼번에 건너가려고 시도했겠죠.

그때 어마어마한 수량이 덮쳐든다면 떼죽음을 당했겠죠.

살아남은 적병들도 추수하듯이 목을 땄을 겁니다.

거기다가 도망가는 적병의 등을 찌르는 건 일도 아닙니다.

떼놈들이 제대로 걸려 든 겁니다.

 

11. 그건 그렇군요. 

발해는 비록 말갈족과 여진족을 근간으로 소수의 지배계층이 고구려 유민이었으나

뚜렷한 고구려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 고구려국이라 칭하며 당나라와 신라에 적대적이었습니다.

신라 또한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당나라와 싸우며 대동강 이남을 확보했으나,

발해의 위협으로 국경에 장성을 건설 했다고 합니다.

비록 230여년에 불과하지만 양국시대라 불러야 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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