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이황에 대해 내공 팍팍검!!

퇴계이황에 대해 내공 팍팍검!!

작성일 2007.11.02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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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쫌 급합니다.

다음주 목요일까지

'퇴계이황'의 유적지 를 조사해야 하는데..

마땅한게 없어서 이렇게 질문드립니다.

내공팍팍 겁니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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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 황 ( 滉 )  .  1501~1570

 

조선시대 오백년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학자로서,  헤아릴 수 없이 깊은 학문과 더없이 어진 덕망 그리고 인격을

갖추었던 그는 율곡 이 이와 더블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우리나라 역사속의 보기 드문 성현입니다

 


* 이 황의 유적지 = 색을 칠한 곳

 

1501 년  (연산군 7년)  :  출생

 

1502 년  (연산군 8년)  :  부친 찬성공 별세

 

1506 년  (중종   1년)   :  6세 천자문을 비롯하여 동몽선습,명심보감,소학 등을 배움

 

1512 년  (중종   7년)  :  12세 숙부인 송재공 이우에게서 논어를 배움.

 

1515 년  (중종 10년)  :  15세 부석 천사자유가(負石穿沙自由家) 등의 시를 지음

 

1520 년  (중종 15년)  :  20세 주역을 탐독

 

1521 년  (중종 16년)  :  21세 김해 허씨와 결혼

 

1523 년  (중종 18년)  :  23세 6월에 장자 준 출생.

 

1527 년  (중종 22년)  :  27세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2위로 합격, 허씨 부인 사망

 

1528 년  (중종 23년)  :  28세 진사회시에 2등 합격

 

1530 년  (중종 25년)  :  30세 권전의 질녀인 안동 권씨와 재혼

 

1532 년  (중종 27년)  :  32세 문과 별시 합격

 

1533 년  (중종 28년)  :  33세 반궁에 유학. 경상도 향시 합격

 

1534 년  (중종 29년)  :  34세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 검열이 됨

 

1536 년  (중종 31년)  :  36세 선무랑과 성균관 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됨

 

1537 년  (중종 32년)  :  37세 모친 박씨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남

 

1539 년  (중종 34년)  :  39세 3년상을 마치고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수찬 지제교로 승진

 

1543 년  (중종 38년)  :  43세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함

 

1544 년  (중종 39년)  :  44세 10월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

 

1546 년  (명종   1년)  :  46세 7월에 권씨부인 사망

 

1547 년  (명종   2년)  :  47세 7월 안동부사로 제수되었으나 사임,

 

1548 년  (명종   3년)  :  48세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취임(9개월).

 

1549 년  (명종   4년)  :  49세 소수서원 개칭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됨.

 

1550 년  (명종   5년)  :  50세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을 짓고 학문에 전념

 

1553 년  (명종   8년)  :  53세 4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함

 

1554 년  (명종   9년)  :  54세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씀.

 

1556 년  (명종 11년)  :  56세 도산에서 주자서절요를 편찬 완성함.

 

1557 년  (명종 12년)  :  57세 도산에 도산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를 저술함

 

1559 년  (명종 14년)  :  59세 휴가를 얻어 귀향함

 

1560 년  (명종 15년)  :  60세 4단7정론을 저술함. 이해에 도산서당이 완공됨

 

1561 년  (명종 16년)  :  61세 도산기 같은 명문을 남김

 

1564 년  (명종 19년)  :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의 발을 씀

 

1566 년  (명종 21년)  :  66세 1566 공조판서와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제수 받음

 

1567 년  (명종 22년)  :  67세 역동서원을 새로 건축함

 

1568 년  (선조   1년)  :  68세 선조 원년 의정부 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

 

1570 년  (선조   3년)  :  70세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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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애 》생애의 개관 / 업적,배울점 / 인간상 / 연보


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중년기 :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經籍 : 옛날 성현(聖賢)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순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 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 錄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사망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참고자료 - 1)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1997년 학사원
2) "퇴계의 삶과 철학" / 금장태 저 / 1998년 서울대출판부 3) "퇴계선집" / 윤사순 역주 / 1993년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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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애 》생애의 개관 / 업적,배울점 / 인간상 / 연보


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퇴계는 6살 때 이웃에 사는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했으며, 12살 때 병으로 휴직하고 집에 와 있던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다. 13세와 15세 때에는 형과 사촌 자형을 따라 청량산에 가서 함께 독서할 만큼 성장하였고, 16세 때에는 사촌 동생과 친구를 데리고 천등산 봉정사에 들어가 독학하기도 하였다.17세 때 안동 부사로 재임 중이던 숙부가 별세하여 물을 곳도 없게 되어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비록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19세 때 '성리대전'의 첫 권 '태극도설'과 마지막 권 '시·찬·함·명·부'의 두 권을 구해 읽고 나서는,"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렸는데, 오래 두고 익숙하게 읽으니 점차 의미를 알 게 되어 마치 들어가는 길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때부터 비로소 성리학의 체계를 친숙하게 알 게 되었다."고 하였다. 20세 때 용수사에서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주역'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게 되고, 이로 인해 평생 동안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잠시 성균관에 유학하였고, 27세에 향시, 28세에 진사 회시, 32세에 문과 별시, 33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고, 수 개월간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3. 중년기 : 34세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할 때까지의 임관기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과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 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43, 46, 50세)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퇴계는 외척의 권력 투쟁이 격심하였던 혼란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경적(經籍 : 옛날 성현(聖賢)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책)을 관장하고 글을 짓거나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에 가장 오래 재직하였다. 45세 때 을묘사화(乙卯士禍)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당하였으나 복직되었다.

46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9개월)와 풍기군수(1년 2개월)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생활에서도 불행한 일이 속출하여 27세에 허씨부인을 잃고, 30세에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46세 때 그 권씨부인마저 잃는다. 더구나 단양순수로 나가던 해(48세)에는 둘째 아들마저 잃는 슬픔을 겪는다. 50세 때에는 친형인 좌윤공 해를 사화의 격동 속에서 잃는다.


4. 만년기 : 50세~70세 때까지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한 강학기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 또한 주로 노년으로 접어드는 50대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의 저술 가운데 천명도설(天命圖說 : 1553년)과 천명도설후서(天命圖說後敍 : 1553년),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 1527~1572)과의 8년 간에 걸친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 錄辨 : 1559~1566),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1556), 자성록(自省錄 : 1558), 전습록논변(傳習錄錄辨 : 1566),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 1568), 성학십도(聖學十圖 : 1568) 등은 한국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60세에 도산서당을 지어 스스로 학문을 연구하고 후진을 인도하는데 힘썼는데 그의 강학은 사망하기 전달까지 계속되었다.


5. 사망

선비의 품격은 생애를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선조 3년) 12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그는 11월 초에 병환으로 강의를 그만두고 제자들을 돌려 보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조목 들 몇 사람의 제자들이 찾아와 간병을 하였다.12월 3일 자제들에게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12월 4일 조카에게 명하여 유서를 쓰게 하였다. 이 유서에는 1)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 2)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의 전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력, 뜻함과 행적을 쓰도록 당부하였다.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명하고, 12월 7일 제자 이덕홍에게 서적을 맡게 하였으며, 그 이튿날 세상을 떠났다.

참고자료 - 1) "이퇴계의 실행유학" / 권오봉 저 / 1997년 학사원
2) "퇴계의 삶과 철학" / 금장태 저 / 1998년 서울대출판부 3) "퇴계선집" / 윤사순 역주 / 1993년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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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것만!!

 

 * 이 황의 사상

   1. 이기론: 퇴계의 사상은 정자, 주자의 입장을 바탕에 둔 정주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그리하여 정주 계통의 성리학설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 퇴계는 이와 다른 이론이나 학설을 배척한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성리학이라 하더라도 심학이라 불려지는 양명학이라든지, 서화담 계통의 기일원론, 나정암(나순흠이라고도 함, 명의 성리학자)의 주기설 및 오초려(오징이라고도 함, 원의 학자)의 주륙 절충적 견해 등을 배척한다. 그 중에서도 양명학과 화담계의 기일원론에 대한 배척이 가장 강력하다.

 퇴계는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을 거경궁리론과 지행병진설로 조목 조목 반박하고, 화담의 기일원론을 이기이원론으로 반박한다. 결국 퇴계는 정주의 이기이원론만을 인정한다.

   2. 심성론(인성론): 이처럼 퇴계는 정주의 입장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하여 출발하였지만 깊이를 더하여 감에 따라 독자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정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는데 그 좋은 예가 심성론 특히 사단칠정론이다.  퇴계는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이기론의 이론을 심성 개념의 분석과 해명에 적용하여 한국 유학의 중요한 특징인 심성론(인성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퇴계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은 강한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게 된다.

   3. 수양론

 퇴계의 학문정신은 이론적 정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퇴계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요,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이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며, 퇴계가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한 경의 태도를 한 평생 몸소 실천한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문인 정유일은 퇴계의 이러한 학문과 사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오로지 정주를 표준으로 한다. 경과 의가 같이 지탱하고(경의협지, 敬義夾持), 지와 행이 함께 나아가며(지행병진, 知行幷進), 밖과 안이 한결 같고(표리여일, 表裏如一), 본과 말을 함께 하며(본말병거, 本末幷擧), 대원을 뚫어보고 대본을 심어 세운다(식립대본 植立大本), 그 이른 경지를 논한다면 우리 동방에는 오직 그 한 분 뿐이다.

이황의 여러 가지 모습들

 * 학자 및 사상가로서의 모습

1) 뛰어난 재질

  연보에 따르면 어릴 때 논어 등을 그에게 가르쳐준 그의 숙부 송재공 우는 그의 이해력이 뛰어남에 항상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던 중에 퇴계는 이(理)자를 가리키며 그 뜻을 '무릇 일의 옳음'이라고 스스로 깨달아 말하였다는 것이고, 그리하여 그의 숙부는 그를 가리켜 "가문을 유지할 사람은 이 아이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자라서 향시를 비롯한 대과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험에 수석 아니면 차석의 성적을 올린 것만 보더라도 그의 재질이 우수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학(성균관)에서 함께 생활한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 1510~1560)가 그를 가리켜 "영남의 수재"라 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닌 듯하다.


2) 열성적인 학구열

 퇴계는 14세 때부터 "비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조용히 생각할 정도"로 학문을 좋아하였고, 그것이 20세 경에는 "침식을 거의 잊어 가며 독서와 사색"에 잠길 정도여서 마침내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히던 몸이 야위는 일종의 소화불량증을 일으키게 되었다. 심지어 안질로 오랫동안 고생할 경우에도 독서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제자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군수직을 버리고 귀향할 때에도 그의 짐꾸러미는 오직 몇 상자의 책뿐이었다고 한다. 59세 때에도 산림에 들어가 30여년의 연구에 매진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였다. 고봉 기대승과의 편지를 통한 토론은 죽기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렇게 보면 초년에서 말년에 이르도록 그의 학구열은 변함이 없었다. 학구열에 불타는 진지한 학자의 모습, 이것이 퇴계를 논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모습이다.

3) 겸허한 학문 태도

 퇴계의 학문 태도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고봉 기대승과 나누던 "사단 칠정에 관한 논변"이다. 그 당시는 장유유서의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지배하던 때였으므로 사대부들은 학문을 하는데도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일방적인 전수만을 강조하던 형편이었다. 따라서 선배의 이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을 가하는 자유로운 토론이 어려운 풍토였다. 이러한 풍토를 깬 것이 사단 칠정 논변이다. 선배의 이론에 반기를 든 고봉도 비범하지만, 그것을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인 퇴계의 태도에 더욱 감탄하게 된다. 8년 동안의 논변이 진행되는 동안에 퇴계는 고봉의 이론을 신중하게 검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개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논변이 시작될 무렵 퇴계는 대사성까지 지낸 59세의 대가였던 데 비하여 고봉은 갓 과거에 급제한 33세의 소장학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장 8년 동안의 논변이 가능하였고 그것이 드디어 당시의 정체된 학문 풍토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켜 우리 나라 성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것은 퇴계의 겸허한 학문태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그의 제자는 "선생은 겸허로써 덕을 삼아 털끝만큼도 교만하여 잘난 체 하는 마음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 문학자 및 서예가로서의 모습

1) 퇴계는 당시까지 가장 많은 저술을 한 분이다. 전문적 저서는 별도로 하더라도 일기는 손수 쓴 것 4년분 외에 이름이 전하는 것만도 9종이 된다. 시는 제목을 아는 것이 3560수(퇴계의 시는 '도산전서' 중에 실린 것이 2천여편을 넘칠만큼 풍성하여 종전의 학자 문집 중에서 보기 어려웠을 뿐아니라, 전문작가의 시집 중에서도 보기 드믄 존재였다.), 편지는 3천 수 백편이 문집에 전하고, 그밖에 여러 종류의 긴 글이 문집에 298편 실려 있다.

 퇴계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지만 퇴계의 저술을 다 읽은 이는 없을 것이다. 워낙 방대하여 읽기도 힘들지만 아직 다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일기와 한글 편지는 거의 행방을 알 수 없고 그의 수학에 관한 글과 '계몽전의'는 어려워서 잘 해득하지 못한다.

2) 퇴계는 早年부터 終年까지 사이에 중국문단의 명시인들의 시의 영향을 받았다. 곧 도연명·두보·한유·유종지·백락천·유우석·구양수·소동파·소옹·주희 등의 시를 읽고, 次韻·用韻·和韻했다는 것은 문집 도처에 보인다.그 중에도 陶·杜·歐·蘇·朱의 시를 가장 사랑하였다. 초년엔 陶·杜詩를 중년엔 蘇詩를 만년엔 朱·邵詩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陶杜朱詩를 즐겨 읽고 인간서정을 승화시켰다. 퇴계의 제자 문봉 정유일은 "선생이 시를 좋아하되 도연명과 두보의 시를 즐겨 보았으나, 만년엔 주자의 시를 더욱 즐겨 읽었다"고 하였다.

3) 퇴계는 문장과 글씨로 중국 예부 관원들을 감탄하게 하였으며, 경복궁의 기문과 상량문, 현판 글씨, 외교 문서 등을 작성하여 명성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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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李滉 : 1501~1570),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凉山人)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퇴계는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李植)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와 춘천 박씨 두 분이다. 김씨는 잠, 하, 신담부인 등 2남 1녀를 두고 별세하였고, 재취로 들어온 박씨가 서린(일찍 죽음), 의, 해, 증, 황 등 5형제를 낳았는데 퇴계는 그 막내이다.



2. 초년기 : 출생에서 33세 때까지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열중하였던 수학기

퇴계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 보려던 뜻을 펴지 못한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퇴계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게 되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결혼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려서, 가족의 생계를 어머니가 홀로 농사와 누에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에서 난 자녀를 차별하지 않고 길렀다고 한다.
퇴계가 "나에게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분은 어머니"라 할만큼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은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엄한 가법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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