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건국 내용 (내공잇음)

고려건국 내용 (내공잇음)

작성일 2004.10.17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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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건국 내용좀 자세~하게, ㅋㅋ
알려주세요,, 그에대한 글을 써야하는데,,
영 쓸게없어서,,
자세~하게 길~게 ^^ 부탁드릴게요 !!

오늘 안으로만 써주세요,, ㅠㅠ

고려건국에 해당되는거 전부~다 써주시면, !!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왕건의 출생과 출사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송악(개성)에서 출생하였다.
통일신라말기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치러 큰 공을 세웠다. 900년에는 광주(경기), 충주, 청주 및 당성(지금의 화성), 괴양(지금의 괴산) 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지금의 나주)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개 군현을 쳐서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해에 양주(지금의 구리)수 김인훈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달려가 구하여 주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해에 그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에 올라 시중이 되었다.




궁예와 후고구려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운 왕(재위 901~918년)이다.
신라의 제47대 헌안왕 또는 제48대 경문왕의 서자라고도 전한다. 궁중의 음모로 태어나자마자 유모의 품에서 시골에 숨어 자랐다.
10세 때 비로소 자기가 왕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그러나 신라가 쇠약해져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진성여왕 6년(892년)에 북원(지금의 원주)에서 양길의 부하가 되어 세력을 기르다가, 898년에 송악(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여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쳤다가 911년에 다시 태봉으로 바꾸어 강원도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다. 세력을 넓혀 국력이 커지자, 사치스러운 생활과 횡포로 민심을 잃은 끝에 왕건에게 좆겨 도망가다가 평강에서 백성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이로써 태봉은 18년만에 망하고, 왕건의 고려가 세워졌다.




견훤후백제

후백제를 세운 사람(재위 900~935년)이다.
신라 상주 사람으로서, 비장으로 있다가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무진주(지금의 광주),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점령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관제를 정비하고, 후당, 거란과도 외교를 맺어 국력을 충실히 하는 한편, 태봉국의 궁예, 고려의 왕건과 자주 충돌하면서 세력을 넓히는 데 힘썼다.
막내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불만을 품은 맏아들 신검에 의하여 금산사에 갇히었다가 몰래 빠져 나와 고려에 항복하였다.
936년 왕건에게 신검의 토벌을 요청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이 해에 병으로 황산(지금의 논산시)의 한 절에서 죽었다.




(제일 중요 한 것)고려의 건국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고 하였다. 그러나 태조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 이흔암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있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 나갔다.
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 안정책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이래 크게 문란하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제도적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의 표방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신라 말기 이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갔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약적으로 혼인하였으며, 각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인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량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919년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냐하세요.

도움이 될지는 몰라두.

봐주세요 ^*^

1. 고려의 시작

고려는 신라말 왕건이 세운 왕조이다.

왕건은 태봉의 왕인 궁예의 부하로 있다가 호족세력을 배경으로 918년 포악한 왕인 궁예를 추방하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였다.왕건은 처음 철원에서 즉위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긴 다음 ,호족세력 통합정책, 북진 정책, 숭불정책(불교를 숭상)을 펴서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935년에신라를 병합하고 936년에는 후백제를 격파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성취했다.


태조 때는 호족세력 통합의 방도로 호족과의 정략 결혼이 성행하게 되자 종실세력이 대립하여 왕실의 약화를 가져왔으나 제 4대 광종은 노비 안검법,과거제도,공복제도등을 실시하여 왕권강화에 힘썼으며 제 5대 경종은 전시과라 하여 새로운 토지제도를 마련하여 관리들의 생활안정을 도모 하였다.또 제 6대 성종은 새로운 사회 질서를 위하여 유교적 정치 사상에 입각한 2성 6부의 중앙관제를 마련하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 중앙집권체제 강화에 힘썼고 제 11대 문종은 율령 , 관제 , 병제등을 완비하여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완성 하였다.


2. 역대의 왕들
제 1대왕 : 태조
제 2대왕 : 혜종
제 3대왕 : 정종

제 4대왕 : 광종
제 5대왕 : 경종
제 6대왕 : 성종

제 7대왕 : 목종
제 8대왕 : 현종
제 9대왕 : 덕종

제 10대왕 : 정종
제 11대왕 : 문종
제 12대왕 : 순종

제 13대왕 : 선종
제 14대왕 : 헌종
제 15대왕 : 숙종

제 16대왕 : 예종
제 17대왕 : 인종
제 18대왕 : 의종

제 19대왕 : 명종
제 20대왕 : 신종
제 21대왕 : 희종

제 22대왕 : 강종
제 23대왕 : 고종
제 24대왕 : 원종

제 25대왕 : 충렬왕
제 26대왕 : 충선왕
제 27대왕 : 충숙왕

제 28대왕 : 충혜왕
제 29대왕 : 충목왕
제 30대왕 : 충정왕

제 31대왕 : 공민왕
제 32대왕 : 우왕
제 33대왕 : 창왕

제 34대왕 : 공양왕

3. 전쟁과 반란

※거란의 침입

고려의 북진정책 및 친송정책과 정안국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년), l010년, 1018년(현종 9년)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916년(발해 애왕 16년) 요나라를 건국하였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려 태조는 북진정책을 추진, 발해 유민을 포섭하였다. 거란은 고구려 장수왕 때 출복부 등 일부가 예속되었지만 고려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 922년(태조 5년)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이들과 적대관계를 유지하였고, 942년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 광군 30만을 조직한 것도 요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송이 건국하고 고려가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자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진화·내원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하였다.
거란의 제1차 침략은 993년(성종 12년) 10월 요의 소손녕이 침략해 오자 고려는 박양유·서희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을 빼앗기자 이에 놀라 청화사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이와 함께 고려는 소손녕의 요구에 따라 항복하든지 서경 이북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이 나왔고, 후자가 유력했으나 서희·이지백 등이 항전을 주장하였으므로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소손녕이 안융진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화친의 분위기가 일어났고 서희가 소손녕을 만나기로 하였다.

여기서 소손녕은 고려를 침략한 이유로 첫째, 고려가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자기 땅인 고구려를 침식하고 있으며 둘째, 이웃인 거란을 버리고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서희는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고 했으므로 요의 동경(東京)도 고려의 땅이며 둘째, 압록강 유역도 고려 땅인데 고려가 요와 교류하고자 해도 여진이 있어 불가능하므로 이 지역을 회복하여 성을 쌓고 도로를 확보하면 교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응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를 개척하는 데 동의를 얻었고, 송나라의 연호 대신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고려는 흥화진·통주·귀주·곽주·용주·철주 등을 획득하여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결국 요의 제1차 침략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사대의 예를 받아 침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북진정책의 일환으로서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비공식적으로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에 전략적 가치가 크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요는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그러나 거란의 2차 침입이 이루어졌는데, 1010년(현종 1년) 11월 요의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해 왔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불륜관계를 맺고 왕위를 빼앗으려하자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는데, 요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침략한 것이다. 이는 구실에 불과한 것으로, 침략의 실제적인 목적은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요는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양규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자, 통주로 진군하여 고려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던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어 곽산·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하자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다. 요는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구주·통주·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돌아가다가 귀주 등에서 양규·김숙흥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거란의 3번째 침략으로 1018년 12월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비하였다.
처음에 흥화진에서 소배압의 군대를 막아내자 이를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다음 해 정월에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다가 귀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으로 대패, 10만 대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수천 명에 불과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이로써 전쟁은 끝나고 1019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데 그치고, 요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았으며, 요가 멸망하는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이나 밀무역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귀주대첩

고려시대 현종 때 거란 침략군을 구주에서 강감찬의 지략과 고려인의 용맹성으로 물리쳐 승리한 싸움이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계속 시행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년) 소손녕에 의한 거란의 제1차 침략이 있었으나 서희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강동 6주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년) 성종이 제 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없이 다시 철수하였고,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8년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하였다. 거란군은 흥화진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 곳에서 패배하고 자주에서도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 그러나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위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달아났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여진정벌


여진정벌의 배경은 새로 일어나는 동여진 완안부족은 더욱 성장하여 그 부족장 영가에 이어 1103년(숙종 8년) 에 우야소가 그뒤를 이었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충돌 직전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밖에 쳐들어오게 되었다.

왕은 무력으로 여진정벌을 결심하고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게 하였으나 여진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때에 윤관은 왕명을 받고 여진에 대한 북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해 2월 21일 당시 추밀원사로 있던 그는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고려군은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그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이에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의 원인은 적의 기병을 우리의 보병으로는 능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왕에게 보고하고,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윤관은 1104년(숙종 9년)12월부터 여진토벌을 위한 준비확장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별무반이라고 하는 특수부대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1107년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하지 않다는 한 변장의 긴급보고를 접하자 원수가 되어 부원수인 지추밀원사 오연총과 17만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한편, 여진추장에게 거짓통보를 하여 고려가 앞서 잡아둔 허정·나불 등을 돌려보낸다고 하자 여진족 400여명을 보내왔는데, 이때 이들을 유인하여 거의 섬멸시키고 사로잡았다.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중군은 김한충, 좌군은 문관, 우군은 김덕진으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으며, 수군은 선병별감 양유송 등이 2, 600명으로 도린포의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막강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은 척준경을 시켜 패주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태반을 섬멸하였다.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처, 적의 전사자 4, 940명, 생포 130명의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정에 전승의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남도지방의 이주민들이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 되었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에 이주민 1, 948가구, 영주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 238가구, 웅주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 436가구, 복주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성곽 670칸,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에 이주민 532가구로서,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통태·진양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를 두어 이곳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고려군이 이렇게 함경도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가 반발하여 1108년초에 군사를 이끌고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가한촌의 전투에서 포위당하였으나 척준경 등의 역전으로 겨우 구출되었으며, 영주성의 공방전에서는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기지로써 여진군을 겨우 물리치게 되었다. 또 다시 여진군 수만명이 웅주성을 포위하자 역시 척준경의 지략과 용기로써 적을 패주시켰다. 그해 3월 30일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두를 노획하여 개경으로 개선하여 '추충좌리평융 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에 봉하여졌다.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은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게 되었으나, 윤관의 9성축조와 농업이주민으로 말미암아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여진족으로서는 강력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길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원하였다. 드디어 여진은 적극적인 강화교섭을 개시하였으며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환부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평장사 최홍사 등 28명은 찬성하고 예부낭중 한상은 반대하였으나 당시 조정은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이유는 여진을 공략함에 있어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고, 근거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으며,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거리가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 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윤관이 장병들과 더불어 생명을 걸고 경략하였던 9성일대의 땅이 다시 여진에게 환부되었다.
뒤에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워 강대한 국가가 된 데에는 그들이 9성을 다시 찾은 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몽고와의 전쟁


최씨정권이 확립되었을 때 고려는 밖으로부터 몽고의 압박을 받아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13세기에 들어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는 일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그것은 몽고세력의 흥기였다. 몽고고원의 유목민족인 몽고족은 금의 세력하에 있었는데, 13세기 초엽에 테무친이라는 영웅이 나타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206년에는 칸(황제)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가 곧 칭기즈칸이다.

이 때부터 몽고는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전개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북중국에 자리잡은 금을 침략하여 그 세력이 강성해지더니 마침내 고려와도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다. 고려가 몽고와 처음으로 접촉을 갖게 된 것은 고종 6년인 1219년에 강동성의 거란족을 몽고와 함께 공략하면서부터이다.

요가 멸망한 후 거란족은 금에 복속하여 있다가 금이 쇠약해지자 독립하였지만 이번에는 몽고에 쫓기어 고려영토로 밀려와 고려군의 공격을 받고 강동성에 갇혀 있었는데, 이것을 고려와 몽고가 협공하여 패멸시켰던 것이다. 몽고는 거란을 토벌한 후 고려에 대하여 큰 은혜나 베푼듯이 과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는데, 특히 1221년에 사신으로 온 저고여는 몽고 황태자의 지시라 하여 과중한 공물을 요구할 뿐 아니라 그 태도가 오만불손하여 고려 군신들의 불만을 샀다.

그러던 저고여가 1225년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부근에서 누구인가에 의하여 피살된 사건이 일어나자 몽고는 이를 트집잡아 고려에 침입하기에 이르렀다. 몽고의 제 1차 침입은 1231년에 시작되었다. 몽고의 장군 살리타가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북계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고려는 몽고군의 침입을 맞아 귀주에서 박서가 용감히 항전하였으나 수도가 포위되자 화의를 청하게 되었고, 이에 몽고군은 서북면에 다루가치를 설치한 후 철수하였다.

그러나 몽고가 고려에 대하여 더욱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고 고려에 파견된 몽고관리의 횡포가 심하여 고려 군신의 분노가 고조되자 최우정권은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1232년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항몽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몽고는 제 2차 침입을 단행하여 개경을 지나 한강 남쪽까지 공략하였으나 살리타가 처인성에서 김준후에게 사살되어 철군하였다. 그 뒤에도 몽고군은 계속해서 1259년인 고종 46년 강화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하였다.

이렇게 오랫동안에 걸쳐 몽고군의 침략이 되풀이 되었지만 고려인은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여 국토를 수호하였다. 강력한 반몽정책을 견지한 최씨정권이 바다 건너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하였고,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침략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움으로써 몽고군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무신정권은 농민들로 하여금 산성과 해도로 입보케 하는 정책을 썼으므로 이들 농민은 이 기지를 중심으로 집단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싸워 항전의 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몽전에 변화를 초래한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항전을 고수해 왔던 최씨정권의 붕괴였다.
1258년 최의가 문신 유경, 무신 김인후 등에 의하여 제거되자 강화파 문신들의 주장에 따라 이듬해 몽고와의 화의가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최씨정권을 무너뜨린 무신 김준이 유경을 거세한 후 스스로 교정별감이 되어 무신정치를 계속하고 몽고와의 강화를 반대하였는데, 이는 원종 9년인 1268년 김준을 살해하고 교정별감이 된 임연에 이르러 더욱 노골화되었다. 임연은 친몽정책을 쓴 원종을 폐하고 왕제 안록공 창을 세웠으나 1269년 몽고의 압력으로 곧 복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임연이 죽은 후 그 아들 임유무도 반몽정책을 고수하여 1270년 국왕이 몽고의 세력을 업고 몽고에서 귀국하면서 강화도에서 출륙하여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는 이를 거부하고 재항쟁을 결의하였으나 반대파에 의하여 피살됨으로써 무신정권은 종식되고, 이에 따라 오랜 항몽도 끝나게 되었다. 이제 고려는 왕정을 복구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지만 아직 몽고에 대한 반항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무신정권의 무력기반으로 항몽전의 선두에 섰던 삼별초가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즉, 1270년 출륙명령이 내리자 개경환도는 곧 몽고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하여 배중손이 이끈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승화후 온을 왕으로 옹립하고 몽고세력을 등에 업은 원조의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장기전을 펴기 위해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남부지방 일대를 지배하에 넣었지만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의 토벌로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김통정의 지휘하에 다시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다가 1273년에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이 때 삼별초군은 중앙으로 가는 조선을 붙잡아 세미와 공물을 탈취하고 남부의 넓은 지방을 점령하여 몽고군을 습격하였으며, 한 때 일본에 협력을 요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내기도 하였으나 몽고군과 정부군의 합동공격으로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계속된 대몽항쟁도 종식되고 이후 고려는 몽고의 간섭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 삼별초의 항쟁

1258년 3월 고려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최의를 타도함으러써 4대 63년에 걸친 최씨정권을 종식시켰다.

그러나 아직 무신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대몽강경론은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태자가 몽고로 입조하는 것을 반대하며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다시 몽고의 침입을 유발하여 1258년 4월 몽고군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번에 몽고군은 서 북 지방을 거쳐 경기, 황해, 충청 지방을 제압할 뿐만 아니라 동북 지방으로 남진하여 1259년에는 인제 방면까지 진출하였다.
피해는 극심하였고 일부 지방에서는 백성들이 오랜 전쟁에 염증을 느 낀 끝에 지방관을 죽이고 몽고군에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몽고군은 강화도 건너편 경기 지방에 공격을 집중하여 이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하고 강화를 고립시키자, 고려는 드디어 1259년 3월 태자의 직접 조공을 조건으로 한 휴전에 합의하였다.

1259년 4월 약속대로 태자 이 몽고로 출발하였다. 6월, 고려에서는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몽고와의 전쟁으로 보낸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7월에는 몽고 황제 헌종도 병사하였다. 고려와 몽고의 새로운 계승자인 전과 쿠빌라이가 개봉에서 만났고, 양국 간의 전쟁은 이로써 종식되었다.

몽고로부터 돌아온 세자 전은 1260년 3월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원종이다. 어쨌든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강화가 성립되자, 이를 실질적으로 성사시킨 국왕 원종과 문신관 료들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무신 세력이 도태된 것은 아니었다. 강화도에서는 무신 김준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국왕을 배제하고 개경 환도를 늦추면서 세력기반을 확충하려 하였다.

이에 몽고는 개경 환도를 재촉하면서 김준을 소환하는 등 압박을 가하였다. 강화 이후 위축 되던 무신들은 몽고와의 재대결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임연이 김준을 죽이고 집권한 뒤 원종을 폐위하고 몽고와 의 재대결을 기도하였다. 이에 원종은 몽고에 원군을 청하였고, 강화 도에서 문신관료들이 임연의 아들인 임유무를 제거함으로써 1270년 무신들의 정권은 완전히 종식 되었다.

그러나 모든 고려인이 여기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조정에서 강화 도를 완전히 포기하고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경정하자, 이를 몽고에 대한 항복과 종속으로 받아 들이고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들은 원종의 해산명령을 무시하고 몽고군과 굴욕적인 유전에 반대 하며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원래 최우가 수도의 치안유지를 위해 창설한 야별초로부터 시작하였다.

야별초는 지방에도 파견되면서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좌·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고와의 항전기간 동안에는 몽고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온 장정들로 신의군을 조직하면서 삼별초가 되었다.
최씨정권을 자신들의 정권유지를 위해 사적으로 양성한 군대가 있었음에도 불 가하고 국가의 공병조직을 자신들의 통제하에 둘 필요를 느꼈다.

따라서 자기 가문의 사병들과 별도로 국고에 의해 운영되는 공병으로서 삼별초를 육성하여 정권의 무력기반으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수족으로서만 가능하였던 것은 아니다. 고려의 대몽항쟁 기간 중 그래도 국가의 공병으로 몽고군과 교전을 벌인 집단이 바로 이 삼별초이다.
삼별초는 백성들이 농성 중인 산성이나 섬 방어별갑과 함께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파견되어 함께 싸우기도 하고, 때로 유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몽고군에 대항해 함께 싸운 경험은 훗날 삼별초의 항쟁 에 농민들이 적극 호응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1270년 6월 배중손과 노영희 등은 승화후 온을 옹립하고 강화에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 것을 순수한 민족정신에 바탕을 둔 것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삼별초의 반란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원종이 삼별초의 해체를 명한 데 있었으며 삼별초가 무신정권의 직접적인 물리력으로 활용되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삼별초 항쟁은 부분적으로 배제되어 가는 무신정권의 잔여 세력들이 왕권강화와 친정체제 구축을 시도하는 원종에 도전하는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원종의 이런 정치적 움직임은 몽고의 후원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반대편에서 움직인 삼별초는 자연히 반몽적인 민족 항쟁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6월 3일 강화도의 삼별초군은 1천여 척의 함선을 타고 진도로 이동하였다. 8월 19일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전라도와 경상도 일원을 제압하였고 제주도까지 장악하였다.

삼별초의 반란에 당황한 것은 개경의 원종 조정이었다. 반란 당시 이를 진압할 병력조차 제댁로 없었던 개경 조정 은 몽고에 원군을 요청, 1270년 11월 김방경 등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진도 앞바다에 진출하 였으나 울둘목에서 삼별초군이 반격으로 대패하였다. 삼별초군은 수차의 전투에 잇달아 승리를 거두면서 방심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1271년 5월, 삼별 초군 중 상당수의 병력이 인근 남해안 일대에 나가 있는 사이, 개경의 정부군과 몽고군은 기습적 으로 진도에 상륙,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삼별초군이 조직적인 저항을 벌일 사이도 없이 진도성은 함락되어 승화후 온은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하였다. 진도를 잃고 난 삼별초군은 김통정을 지도자로 하여 제주로 본거지를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1272년부터 삼별초군은 다시 활동을 제개하여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273년 2월 여몽연합 군 1만여 명이 제주의 삼별초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삼별초군은 끝까지 용전분투하였으나 지도자 김방경은 산중으로 도피하였다가 죽고, 나머지도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됨으로써 3년여에 걸친 항쟁도 종식되었다.

※합단의 침입


1290년(충렬왕 16년) 원나라의 합단이 고려를 침입한 사건을 말한다. 원나라의 반군 내안의 부장이었던 그는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에게 패하자 방향을 바꾸어 고려의 동북변을 침입하였다.

고려는 중군만호 정수기, 좌군만호 박지량, 우군만호 김흔으로 하여금 각각 금기산동·이천현계·권가현계를 지키도록 하는 한편, 원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합단의 무리는 원나라의 쌍성을 점령하고 고려의 등주(안변)를 함락하였으며, 이듬해 철령을 넘어 교주도의 양근을 점령하였다. 이에 왕은 강화로 파란하는 한편으로 원주별초 소속의 원충갑이 원주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원나라도 1만의 군사를 보내 고려를 도왔다.

원주에서 패한 합단의 무리들은 계속 남하하여, 주력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은 다시 연기에 집결하였다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의 급습으로 대패하였다.
그들의 기병부대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으나 한희유의 추격으로 합단과 아들 노적은 2,000여 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1년 6개월 동안의 합단의 침입은 끝나고 9월 왕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홍건적의 침입


만주로 진출하여 랴오양을 점령하였다가 원나라 군대에게 쫓기게 된 홍건적은 퇴로를 한반도로 잡아 1359년(공민왕 8년)에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 해 12월 홍건적의 장군 모거경 등은 4만의 무리를 이끌고 결빙된 압록강을 건너 일거에 의주·정주·인주·철주 등을 차례로 함락하고 이어 서경(평양)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편장 이방실, 안주만호 안우 등이 이끄는 고려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아 서경을 버리고 퇴각하다가 다시 고려군의 추격을 받고 궤멸되어 겨우 잔병 300이 압록강을 건너 달아났다. 그 후 홍건적들은 수군을 동원하여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침범하다가 61년(공민왕 10년) 10월에 다시 반성·사유·관선생 등이 10여 만의 홍건적으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였다.

홍건적이 절령의 방책을 깨뜨리고 개경으로 진군한다는 보고가 있자 공민왕은 남으로 난을 피하고 도지휘사 이방실, 상원수 안우 등이 홍건적과 대적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개경은 이들의 손에 함락되었다.

홍건적은 이후 수개월 동안 개경을 중심으로 머물면서 잔학한 짓을 자행하고 그 일부는 인근의 주현과 원주·안주 등지까지 침탈하였다. 이 해 12월 복주(안동)에 다다른 공민왕은 정세운으로써 총병관을 삼아 홍건적 토벌의 명을 내렸다.

1362년 1월이 되자 총병관 정세운은 이방실·안우·김득배 등 원수 등과 함께 군을 수습, 홍건적을 크게 무찔러 개경을 수복하고 난을 평정하였다. 개경을 수복할 때 동북면의 상만호이던 이성계는 휘하의 2,000 군사를 이끌고 선봉에서 적의 괴수 사유·관선생 등을 목베는 등 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써 중국 직례지에서 일어나 만주에 진출한 홍건적은 고려에 대한 2차의 침공으로 오히려 고려에 의해 전멸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고려도 막대한 타격을 입어 국운의 쇠퇴를 가져왔다.

2. 반란
※왕규의 반란

혜종의 임종 직전 기묘한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다. 한마디로 조작의 반란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서경의 장군으로 있던 왕식렴의 군대가 대광 왕규의 반란 음모를 사전 차단한다는 구실로 수도 개경에 난입하여 왕규와 300여명에 달하는 그 추종 세력을 몽땅 처형한 것이다.

정사에는 이 사건이 왕규의 반란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종과 왕식렴이 반란을 사전 진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왕규는 왕건의 16대 비였던 자신의 딸이 낳은 아들 광주원군을 왕으로 옹립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 관련된 기록들을 살펴보면 도대체 왕규의 반란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전후과정이 잘 이해가 되지 않고 앞뒤가 맞지 않는부분이 많다는 점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왕규는 와병중에 있는 혜종을 살해하려고 수 차례 자객을 보내고 사병을 동원해 궁중에서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데 박술희가 이에 맞서 혜종을 지켜내고 정종을 즉위시켰다. 그러자 정종은 바로 박술희를 귀양보내 버린다. 그리고나자 왕규가 자객을 보내 박술희를 살해했고, 그런 다음 얼마 안 있어 왕규 자신은 정종이 불러 온 왕식렴의 군대에 잡혀 처형당한다.

무언가 어거지로 꿰어 맞추려 애썼으나 잘 맞추어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하여간 이 사건을 전후하여 혜종은 사망했고 새로운 왕으로는 그의 배 다른 동생 즉 정종이 즉위했다.
혜종은 두 아들이 있었고 그 중 하나를 태자로 책봉해 둔 상태였는데, 정작 왕으로는 태자가 아닌 그 삼촌이 즉위했던 것이다. 미스테리로 가득 찬 이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훈요십조 날조설의 진위를 가리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정종의 쿠데타 요즈음 시중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 왕조 실록"이라는 책에서는 이 사건을 정종의 쿠데타라고 단정하고 있다. 즉 정종이 왕식렴의 군대와 제휴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권을 찬탈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는 쿠데타의 명분으로 왕규의 반란 음모를 거론하면서 자신들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한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보면이해가 되지 않던 전후과정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종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고 나서 선왕의 심복들이었던 박술희와 왕규를 모두 제거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쿠데타의 명분으로 왕규의 반란 음모를 거론했고, 자신의 즉위 과정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박술희가 중신들의 의견을 모아 자신을 즉위토록 했다는 이야기를 집어넣었을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정종과 그 친 아우 광종대에 이르러 틀이 잡히기 시작한 고려 왕조는 이 두 왕들을 정당화하면서 선왕 혜종과 그 친모를 폄하하는 내용을 사서에 기록하였고, 왕규에게 반란 음모를 씌워 역적으로 적어놓았다.

왕규는 혜종 생존시에 왕자 "堯"(정종)와 "昭"(광종)의 수상한 움직임을 수시로 보고했으나, 혜종이 이를 무시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역시 승자의 기록인 역사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왕규가 형제간을 공연히 이간질했다고 쓰고 있다.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정종은 왕규를 제거해야 할 정적 1호로 간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혜종 사후 태자를 무시하고 정종이 왕위에 오른 점을 보면 이들은 실제로 집요하게 왕권을 노리고 있었고 이같은 움직임을 포착한 왕규가 혜종에게 이를 보고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쨌거나 왕건의 사후 2-3년간은 극심한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었고, 이 과정에서 왕건의 훈요십조라고 하는 것이 나타났다. 혜종 자신이 바로 공주강 이남 출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주강 이남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훈요십조의 내용이 혜종 재위시절 공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것은 아무래도 정종 즉위 후 만들어져 선대의 이야기 속에 삽입시켜진 것이라고 보아야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는 것이다. 즉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정종과 그 추종세력들이 선왕 혜종의 세력 기반이 되어 온 전라도 사람들을 축출하고자 만들어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설혹 훈요십조라는 것이 선대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문제의 그 구절은 정종조에 날조되었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훈요십조 날조설에 대해 내가 여기저기서 보고 읽은 내용들이다.
짧은 지식의 시각에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확한 내용이 있을 수 있다.

※ 이자겸의 난


귀족사회의 전성기인 문종 이후 의종대에 이르는 귀족정치의 전개는 점차 귀족사회 내부에 모순이 축적되어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문벌귀족들은 과거와 음서를 통하여 관직을 독점하고 정치권력을 장악하였을 뿐 아니라 관직에 따른 전시과나 공음전 이외에도 따로 봉급을 받고, 특히 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토지의 탈점을 통하여 막대한 사전을 겸병하였다.

이러한 정치권력과 경제력의 특권적 확대는 이를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귀족사회의 모순으로 나타난 지배세력의 내부분열은 전통적인 문벌귀족과 지방출신 신진관료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인주 이씨 등 보수적인 집권세력에 도전하는 지방향리출신의 신진관료가 대두하여 양자의 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체적 사건이 인종 때 일어난 이자겸의 난이었다.

이자겸은 고려 전기의 최고의 문벌귀족인 인주 이씨로서 예종의 외구(외할아버지)가 되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인종이 즉위하자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 보를 왕위를 찬탈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제거하고, 이와 함께 한안인·문공미·이영 등을 이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이것은 이자겸 일파가 그들에게 도전하여 오는 지방출신의 신진관료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책동이었다.

그러나 이자겸에 대한 반대세력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이자겸은 권세를 탐하여 인종에게도 그의 두 딸을 왕비로 들여보내고 마침내는 인종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인종 4년 국왕의 측근세력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거사하였으니, 이들은 문벌귀족에 반대하여 왕권을 옹호하려는 세력으로서 신진관료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 거사는 이자겸의 일당인 척준경의 군사행동으로 인하여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 이자겸은 인종을 살해하려는 등 횡포를 다하였으나, 척준경과 반목하게 됨으로써 도리어 척준경에 의하여 축출되고 말았다.

이자겸이 제거됨으로써 인주 이씨는 몰락하였으니, 이는 고려 전기의 귀족사회가 붕괴되는 발단이 되었다.


※묘청의 난


묘청의 난은 무신 이자겸과 척준경의 연이은 반란 등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궁궐이 불타고 국가기강과 민심은 매우 어지럽고 불안한 정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정세를 틈타 정지상을 중심으로 한 개혁 정치세력과 묘청이 임금의 총애와 지지를 등에 업고 전면에 부상한다. 당시 고려에서는 원래 고려의 국시가 북진책이었고 고토회복과 북벌사상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던지라 그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특히 서경은 그 근거지로 여겨지고 있었다.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자임을 천명하고 한대륙을 도모하고자 했던 고려인지라, 서경은 북진책의 전진기지로써 조선의 발원지이자 고구려의 수도로써 개경과 거의 대등한 비중을 갖고 있었으며 분사라 하여 통상 개경의 정부조직과 비슷한 기구와 기반이 있었을 정도였다.

역대 임금들도 서경에 자주 들러 머물면서 그 곳에서 내외의 정사를 보는 것이 관행이었다. 특히 묘청은 자신이 도선과 강정화의 후계자임을 내세우고 풍수지리와 도참설을 근거로 임금의 신임과 민심을 얻어나갔다.

이에 서경세력이 동조하면서 인종의 몇 차례에 걸친 서행과 1129년 서경에의 대화궁과 연이은 팔성당의 건설을 통해 급기야 서경천도를 추진했다.

아울러 정치·교육 등에 걸친 내정의 유신정책과 칭제건원(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하는 것)도 진행해 나갔으며 유제 등을 앞세워 금나라를 정벌하고자 했다.

반면에 개성의 중앙세력은 송과의 유대와 보수주의적 노선에 서 있었던지라 이들의 정면충돌은 불가피했다. 더욱이 김부식 일파는 대화궁에 벼락이 치고 천재지변이 잇따르자 이를 빙자한 집요한 강요로 인종의 서행을 단념하게 한다.

이에 따라 묘청은 일이 자신의 원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자 1134년에 이르러 결국은 서경을 근거로 군사를 일으키고 만다.
당시 묘청은 국호를 대위라 하고 건원하여 천개라 했고 군대는 천견충의군이라 했다.

그러나 임금마저 등을 돌리고 김부식이 대원수로서 전면에 나서서 그들을 치게 된다. 그리고는 이내 묘청 일파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 묘청이 조광의 손에 죽고 조광의 재차 반란마저 진압되면서 끝이 난다.
당시 묘청일파의 대의와 노선은 좋았을지 모르나 준비가 모자랐고 성급했다. 결국 개경세력에 의해 제압 당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좌절된다. 그런데 이 와중에 수구파 개경세력은 대대적인 반대파 제거에 나섰고, 그 칼은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정지상을 향하게 된다.

특히 김부식은 그의 정적이자 학문적 시기의 대상이었던 정지상을 가장 싫어하고 있었다 물론 정지상은 묘청일파와 그 뜻을 같이하기는 했고 실제로 윤언이·김안 등과 더불어 고려 중흥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는 했다.

※무신정변


무신들의 반란으로 고려 귀족사회는 결국 1170년에 붕괴되었다. 귀족사회의 내부적 모순으로 폭발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귀족정치의 몰락의 단적인 표현이었는데, 이제 무신란의 발생과 무신정권의 성립은 귀족사회의 결정적 파국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무신란 발생의 요인은 전술한 바와 같이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에 있었다. 고려의 귀족정치가 성숙함에 따라 문벌귀족들은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를 확대하여 특권적 지위를 향유하였는데, 이를 놓고 귀족들 사이에 치열한 자기항쟁이 전개되었으며, 특히 기성문벌귀족에 대한 지방출신 신진관료들의 도전이 치열하였다. 이러한 지배세력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귀족사회는 동요되었으니, 이것이 무신란 발생의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신란 발생의 직접적인 동기는 귀족정권의 대무신정책의 모순에 있었다. 고려는 양반제도를 만들어 문반과 무반을 하나의 관제안에 일원적으로 편성하고 법제적으로는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 숭문천시(문을 중히 여기고 무를 천히 여기는것)의 정책에 따라 문반에 비해서 무반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다.

귀족은 문반직을 가지고 정치권력을 차지하였고 심지어는 군대를 지휘·통솔하는 병마권까지도 장악하여 무반은 다만 문신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대우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은 서서히 그의 지위를 상승시켜 나갔다. 양반이라 하는 법제적 지위를 근거로 하고 거란·여진과의 전쟁을 통해 현실적인 세력을 축적하여 나갔던 것이다. 1076년에 갱정된 전시과에서 무반에 대한 대우가 좋아진 것이나, 1109(예종 4년)에 무학재가 설치된 것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것이었다.

귀족정권의 천무정책에도 불구하고 무반의 현실적인 지위의 상승이 무신란을 일으켜 무신정권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문신귀족정권에 대한 군인들의 불만도 무신봉기의 한 요인이 되었다.

고려의 군인들은 일반 농민층으로 충당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문신귀족들이 농민의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농민의 생활은 곤궁하게 되었고, 또한 이들 군인들은 여러 가지 잡역에 혹사당하였으며, 자기들에게 지급된 군인전마저 귀족들에게 빼앗겨 불만이 커졌던 것이다.

이러한 군인들의 처지가 자기들의 직접상관인 무신들의 불평과 결합되어 귀족정권 타도에 동원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은 마침내 1170년의 무신란으로 폭발되었다. 태평호문의 군주라 일컬어지던 의종이 문신들과 함께 보현원에 놀러갔을 때 호위한 무신 정중부·이의방·이고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폐한 후 왕제인 명종을 옹립하였다. 이리하여 무신들은 스스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갈아 무신정권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무신란의 발생과 무신정권의 출현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고 문신귀족정치의 누적된 모순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의 귀족사회는 붕괴되고 새로이 무신정권이 성립되어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으니, 무신란은 고려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170년 정중부 등이 일으킨 무신란에 의하여 수립된 무신정권은 1270년(원종 11년) 임연 부자가 몰락할 때까지 꼭 100년간 지속되었다.
이 동안 무신들은 초월적인 권력을 가진 시인보정을 정점으로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권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하였으므로 이를 형성기와 확립기, 그리고 붕괴기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처음 무신정권의 형성기는 정중부가 무신란을 일으켰을 때부터 1196(명종26)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할 때까지를 말한다.

이 때는 아직 무신정권의 기반이 확립되지 못하여 무인집정의 지위가 불안정하였고, 무신정치는 무신세력의 집합체인 중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종래의 문신세력의 반항이 일어났고,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교종계통의 승려들의 반란이 발생하였으며, 무신 상호 간에도 치열한 정권다툼이 전개되었다. 명종 4년(1173)에는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를 꾀하여 거병하였다가 실패하였는데, 이것은 무신정권에 대한 문신세력의 반항이었다.

이듬해에도 서경유수가 서북면지방민의 불만을 이용하여 정중부정권의 타도를 부르짖고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지만 역시 진압되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귀법사 등의 승도 이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은 왕실·귀족의 비호를 받고 있었던 교종계통의 사원세력이 무신정권에 반발한 것이었다. 명종 초에는 불안정한 무신정권을 전복하려는 이러한 반 무신란이 계속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이 때에는 무신정권의 대표자인 무인집정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쉴 새없이 정권이 교체되었다.

처음 무신란을 일으켜 함께 정권을 잡았던 정중부·이의방·이고 사이에 분열이 생겨 1171년에 이의방이 이고를 주살하더니, 1174년에는 정중부가 이의방을 제거하고 단독으로 정권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정중부도 1179년에 장군 경대승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1183년 경대승이 병사하자 이번에는 이의민이 집권하였지만 그도 1196년에 최충헌에게 숙청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명종조에는 아직도 무신정권의 기반이 확립되지 못하고 정권을 잡은 무인집정이 잇달아 바뀌었는데, 이러한 혼란은 결국 최충헌이 집권함으로써 수습되었다. 즉, 최충헌은 과단성있는 전제정치로 무신정권의 안정을 다짐으로써 최우·최항·최의에 이르는 4대 62년 간 최씨정권이 계속되었으니, 이 기간을 무신정권의 확립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에는 교정도감이라는 독자적인 정치기구를 만들고 막대한 사병을 조직하여 자신의 무력기반으로 삼는 등 자체적인 권력기반을 확립하여 전형적인 무신정권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것은 형성기의 무인집정이 공식적인 정부관직의 권위를 필요로 하고 중방을 통하여 무인정치를 시행하였다.

최충헌이 명종을 폐하고 신종·희종·강종·고종을 세우는 등 마음대로 국왕을 폐립하는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할

※농민, 천민의 난


농민·천민의 난은 무신란 후에는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문신계의 반항과 이와 연결된 사원세력의 항쟁, 그리고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무인 상호간의 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농민과 천민의 보기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이들 농민과 천민의 봉기는 양반 관리들의 정치적 반란과는 달리 사회경제적인 모순에 의한 하층민들의 반항이었으므로 민란이라 할 수 있다.

무신란으로 정권을 잡은 무인들이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농민들은 민전을 빼앗기고 또한 지방관리의 가렴주구로 생활이 곤궁해져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광범하게 발생하였던 것이다. 농민의 동요는 이미 무신란 이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문신귀족들의 토지점탈과 농민에 대한 과중한 수취는 농민들로 하여금 유민으로 떠돌아다니게 하였으며, 이들은 때로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무신란 후의 집권무인들은 보다 과중한 수탈을 감행하여 농민생활이 더욱 곤궁하여졌으므로 농민들은 무신 상호간의 정권다툼으로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봉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무신정권기의 민란은 명종·신종대의 30년 간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음이 특징이다. 무신정권 형성기인 명종대와 최충헌의 독재정치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신종대에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하였으므로 민란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신집권기의 민란은 처음 서북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이 개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특수한 군사지역으로 제일 먼저 무신정권에 대한 반항을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172년인 명종 2년 서북계의 창주·성주·철주의 3주민이 수령의 탐학과 주구에 반발하여 민란을 일으킨 데서 비롯하여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 때에는 많은 농민들이 참가하였고,
조위총의 난이 평정된 후에도 그 나머지 무리들이 계속해서 1179년까지 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들 서북계의 서적과 더불어 남부지방에서도 남적이라 불리는 민란이 발생하였다. 같은 민란이지만 서적이 국경지대의 군사적 조건 위에서 봉기한 데 대하여 남적은 농민생활의 불안에서 야기된 순수한 민란이라는 점에 차이가 있었다. 남도의 민란은 1176년인 명종 6년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난을 일으키면서 크게 확대되어갔다.

이들은 한 때 공주를 점령하고 관군을 무찔렀으나 정부의 회유책에 말려 항복하였고, 이듬해 다시 봉기하여 충청도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지만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다. 이 망이·망소이의 난은 농민을 주체로 하였으면서도 천민집단의 특수행정구역인 所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농민반란에 부곡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이 복합된 것이라 하겠다.

그 후 1182년인 명종 12년에는 충청도의 관성 즉, 지금의 옥천과 지금의 서산인 부성에서 수령의 탐학에 반항하여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고, 전주에서도 군인과 관노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가장 대대적인 민란은 1193년인 명종 23년에 시작된 경상도 일대의 남적이었다. 이 때 김사미는 지금의 운문인 청도에서, 효심은 지금의 울산인 초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서로 연합하여 그 세력이 경상도 전역에 확장되었으나, 이듬해 지금의 밀양인 밀성 싸움에서 정부군에게 패배하여 칠천여명이나 죽임을 당하고 마침내 진압되었다.

그러나 경상도 일대의 남적이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1199년인 신종 2년에 지금의 강릉인 명주에서 일어난 민란이 확대되어 삼척·울진을 점령하고 또 지금의 경주인 동경에서도 민란이 일어나 서로 합세하였던 것이다.

이듬해에는 진주에서 공사노비의 반란이 일어났고, 지금의 합천인 협천에서 부곡민의 반란이 일어나 이들도 서로 연합전선을 전개하였는데, 여기에는 일반농민도 가담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상도 일대의 민란은 마침내 1202년인 신종 5년에 경주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민란으로 확대되었으니, 이 때 경주민들은 신라의 부흥을 내세우고 운문과 울진·초전의 반란군과 합세하여 그 기세가 자못 강성하였으나 최충헌의 과감한 토벌로 이듬해 평정되었다.

무신정권기에는 농민의 봉기 뿐 아니라 천민·노비들의 반란도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명학소의 망이·망소이의 난은 이러한 농민과 천민의 난이 연합된 형태였다. 천민과 노비 등 천민계층은 지방통제력의 약화를 틈타 신분의 해방을 꾀하여 봉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천민반란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1198년인 신종 1년에 개경에서 발생한 만적의 난이었다. 사노비인 만적은 개경 북산에 공사노비들을 모아 놓고 "무신란 후 공경대부가 천인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우리들도 최충헌과 주인들을 죽이고 천인에서 해방되면 공경·장상이 될 수 있다."고 외치면서 대규모의 반란을 도모하였지만, 이는 중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노비·천민은 농민과 같은 피지배층으로서 함께 시달림을 받았으므로 서로 결합하여 민란을 일으켰는데, 특히 이들은 천민신분에서의 해방을 목표로 하였다는 점에서 농민봉기와 차이가 있었다. 명종·신종 때에 집중적으로 일어낫던 민란은 모두 진압되고, 그 후 최충헌의 강력한 독재정치로 무신정권이 안정되면서 그 기세가 꺽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신정권기의 민란은 그 역사적 의의가 결코 적지 않았다. 무신정권은 이들 민란의 평정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농민을 위한 시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난민을 위무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권농을 하고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며 조부를 감면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부도도 중요한 것은 농민과 천민의 반란이 신분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즉, 무신집권기의 민란은 귀족중심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사회체제로 넘어가게 한 원동력이 되었으므로 고려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김보당과 조위총의 난


김보당의 난과 조위총의 난은 정중부의 난이 발생한 지 3년 후인 명종 3년(1173)에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에 의해 반무신란의 성격을 띤 거병이 있었다.

김보당은 전통 있는 문벌 귀족 가문 출신이었지만, 처음에는 무신 정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종대 이래로 문란해진 정치 질서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소신과 기대가 무신 정권하에서 더더욱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반무신의 입장으로 돌아섰으며, 동북면 병마사의 직에 오름을 기회로 정중부, 이의방의 제거와 의종의 복위를 외치며 기병하였고, 거제도에 유폐된 전왕을 경주로 출거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이 안북 도호부에서 붙들려 개경으로 이송되어 죽음을 당하였고, 의종도 이의민에게 살해 되어 거병은 3개월 만에 실패로 끝났다.

그 뒤, 얼마 안 된 명종 4년 서경 유수 조위총이 역시 정중부, 이의방 등의 토벌을 목표로 거병하였다. 이 거사는 김보당의 난과는 달리, 민란의 성격을 띤 것이기는 하나, 무인 정부에 대한 반항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거사도 결국 무신 정권에 의해 진압되었다.


4. 고려의 멸망

* 배경 *
고려 후기에 내부적으로 권문세족과 신흥사대부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을 무렵 밖으로부터의 압력도 가중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왜구 및 홍건적의 침입과 원·명 교체에 따른 대외관계의 변동이었다.

* 멸망까지의 과정 *
고려 말에는 왜구의 창궐로 심한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구는 대마도 등 일본 근해의 해적들로서 이미 고종 때부터 우리 연해에 출몰하였는데, 특히 충정왕 때부터는 거의 매년 전국 각지에 침투하였고 심지어 강화도까지 약탈을 당하여 개경에 계엄령이 내리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해상의 조운이 끊겨 중앙정부의 재정이 곤란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연해의 농민들이 약탈을 당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고려는 왜구를 막기 위하여 일본정부와 외교적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정부 자체가 이를 억제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고려는 국방력을 강화하고 적극적인 왜구토벌에 나섰다. 이 때 최무선은 중국상인에게서 화약제조방법을 배워서 1377년에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포를 만들어 우왕 6년 진포에 침입한 왜선 500여척을 불태웠다. 또한 이 해에 이성계는 황산에서 왜구의 주력부대를 크게 무찔렀고, 1389년에는 박위가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니 이에 그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공민왕 때는 또한 대륙으로부터 홍건적의 침입을 받았다. 공민왕이 즉위할 무렵 대륙정세는 크게 변동하여 오랫동안 세계제국을 형성하였던 원이 쇠퇴하고 각지에서 한족의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홍건적은 그러한 한인 반란군의 하나로 한산동·유복통 등이 하북성 영평에서 일어나 북중국의 원세력을 축출하고 그 기세가 강성하였는데, 이들이 원군의 반격을 받아 그 중 한 무리가 요동으로 쫓기면서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 때 홍건적은 그러한 한인 반란군의 하나로 한산동·유복통 등이 하북성 영평에서 일어나 북중국의 원세력을 축출하고 그 기세가 강성하였는데, 이들이 원군의 반격을 받아 그 중 한 무리가 요동으로 쫓기면서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 때 홍건적은 서경까지 다다랐으나 고려군에게 패하여 큰 피해를 입고 되돌아갔다.

1361년에 홍건적은 다시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고 왕은 복주로 피난을 하기에 이르렀으나 정세운·안우·김득배·이방실 등이 크게 무찔러 내쫓았다. 이와 같이 고려는 밖으로부터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받아 큰 고통을 겪었는데, 이 때 대륙정세도 크게 변전하여 고려에 영향을 끼쳤다.

즉, 한인 반란군의 한 사람인 주원장이 남경에서 명을 세우고 원의 대도를 함락시켜 원이 멀리 달아나 원·명의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에 반원정책을 추구하던 공민왕은 명에 사신을 보내고 명의 연호를 사용하여 친명정책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는 아직도 친원세력이 잔존하고 있었으므로 외교정책을 둘러싼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때 친명파가 공민왕을 정점으로 신진사대부로 구성되었는데 반하여 친원파는 이전부터 원과 연결되고 있었던 권문세족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친원·친명의 대립 속에서 공민왕이 반대파에 의하여 시해되고 중립파인 이인임의 추대로 우왕이 즉위하자 고려는 원과 명에 두 다리를 걸치는 양면외교를 추구하였다. 즉, 이인임 등은 우왕이 즉위하자 곧 명에 사신을 보내 그 왕위의 승인을 요청하는 한편 북원에 대하여도 사신을 파견하여 국교를 회복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왕 때의 친원·친명 양세력의 대립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것은 명의 철령위 설치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명은 고려가 북원과 통하는 것을 힐책하고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며 고려사신을 유배하는 등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려조정을 분개하게 하였는데, 1388년에는 원의 쌍성총관부 관할하에 있던 철령 이북의 땅을 명의 직속령으로 삼겠다고 통고하여 왔던 것이다.이 때 정권을 잡고 있던 최영은 크게 분개하여 도리어 이 기회에 명이 차지한 요동지방까지 회복하려 하였다.

마침내 고려는 우왕 14년 최영이 8도도통사가 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요동정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출병을 반대하였던 이성계는 이른바 "사불가론"으로 이컬어지는 다음의 네가지 이유를 댔다. 첫째는 소국이 대국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고, 둘째는 여름에 군사를동원하는 것은 농사에 지장을 초래하니 불가한 일이고, 셋째는 원정을 틈타 왜적이 침입할 우려가 있으니 블가한 일이고, 넷째는 장마로 인해 활에 먹인 아교가 풀릴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우려가 있으니 불가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성계는 압록강 가운데 있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에 돌아왔다. 이리하여 이성계 일파는 반대파인 최영 등을 제거하고 우왕을 축출하여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으니, 이것이 이성계가 고려를 넘어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후 이성계 일파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제위에 올렸다.
또 이 때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이 정몽주에게 항복의 뜻을 묻고는 듣지 않자 선죽교에서 철퇴로 때려 죽인 일이 있었다.

이성계는 그 후 조준,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조선을 건국하게 된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려의 유명한 인물들
개국관련 인물
왕건
견훤
궁예
신숭겸
신검
경순왕


쌍기
최승로
서희
강조
강감찬
윤관

본격적인 고려시대
이자겸
묘청
정중부
배중손
최충헌
최우, 최항

고려말기의 인물
이성계
최영
정몽주
정도전
최무선
조준


이상!~!

 

고려건국 내용 (내공잇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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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건국한 왕건에 대헤 알아봐 주세요. 사진까지 있으면 더 좋고요.내공100 태조왕건(877~943, 고려 제1대왕, 재위918... 그 내용은 숭불정책, 풍수지리 중시, 왕위계승권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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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건국 부터 멸망까지

고려건국부터 멸망까지 간단희 한 5줄- 부탁드려요오오오오오- 오늘까지 시간없음 ㄷㄷ;; 내공45 걸어요오-울히 슨니가 이러게 빌요오오- 1. 고려의 역사연표 936년-고려...

발해~고려건국을 소재로한 신문

... 고려건국을 소재로 신문을 만드려고 하는데, A4 용지로 하드보드지에 짤라서 붙이려 하거든요? 내용좀 빵빵하게 부탁드립니다. 하드보드지 거의 꽉채우게요 ㅎ 내공냠냠...

고려건국과정☆

... 급해요 내공.. 내용에 알맞게 철저희 드리겠습니다. 고려는 신라말 왕건이 세운... * 건 국 설 화 * 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몽녀 한씨와 결혼하여 송악산 남쪽 기슭에 살림을...

고려건국 과정.

고려건국 과정. 제가 초등 6 학년 이거든요? 검색은 해... 중요한 내용만 간단히 있는걸루요^^ 지금 빨리. 급한대요^^ 답변이 좋은 분께는 내공 30 걸겠습니다 ^^ 빨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