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에 관해 찾아주세요

발해에 관해 찾아주세요

작성일 2004.03.23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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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에 관해

자세히 좀 찾아주세요~~

그럼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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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북부, 만주 동부, 연해주(沿海州)에 걸쳐서 존속한 나라.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9년에 동북지구의 당(唐)나라 세력이 쇠퇴한 틈을 타 백두산(白頭山) 동북지방에 근거를 둔 숙신족(肅愼族)의 후예와 고구려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이 창건하였으며 926년 멸망하였다.

〔건국과 성쇠〕 〈건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唐)나라가 옛 고구려와 한반도를 다스리기 위하여 평양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만을 통치하게 된 지 약 20년이 지난 696년에 랴오시지방[遼西地方]에서 거란족 이진충(李盡忠)의 난이 일어나 약소민족의 자각심과 주체의식을 깨우쳐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고구려 별부(別部) 출신인 대조영이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乞四比羽)와 더불어 무리를 이끌고 영주(營州;지금의 朝陽)에서 북동으로 빠져나와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처음에 회유책을 썼으나 실패하자 이해고(李楷固)를 시켜 이들을 추적하게 하였고, 걸사비우는 당군에게 참살되었으나 대조영은 추격을 물리치고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둔화청[敦化城] 밖의 육정산(六頂山)으로 빠져나와 성을 쌓고 건국의 터전을 잡았다.

대조영은 성력(聖曆;698∼700) 연간에는 자립하여 진국왕(震國王)을 칭하기에 이르렀다. 뒤에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예종(睿宗)의 선천(先天) 2년인 713년에 발해군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진국(震國)을 발해국이라 하였으며, 대조영의 아들을 계루군왕(桂婁郡王)으로 봉하였다. 〈성쇠〉 대조영의 정책과 치적에 대하여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가 진국을 세우고 당시 한창 세력을 뻗치고 있던 돌궐의 추장 묵철과 서로 통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716년(개원 4) 묵철이 살해되고, 당나라가 영주를 되찾아 랴오시의 경영에 활기를 띠게 되자, 대조영은 당나라의 초무(招撫)를 받아들여 건국 초에 발해 외교정책의 기본인 평화적외교의 기틀을 잡았다. 한편 수도는 아직 동모산(東牟山;지금의 육정산 부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 당이 그를 군왕(郡王)으로 책봉한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건국 초의 발해는 추장국(酋長國)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719년(개원 7) 대조영이 죽고 맏아들 대무예(大武藝), 즉 무왕(武王)이 즉위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올가강유역에 이르는 연해주 남단을 발해의 영토로 만들었고 동해를 통해 일본과 수교하였으며, 그 뒤 북동쪽의 흑수말갈(黑水靺鞨)의 문제로 당나라와 대립하였다. 무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왕(文王)은 내치에 힘을 기울였으며, 당나라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고 관무역을 활발하게 하여 대외관계에서는 평화외교정책을 취하였다.

특히 무왕 때까지 수도로 되어 있던 동모산인 이른바 <구국(舊國)>에서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로 천도하였다가, 천보(天寶;742∼755) 연간에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다시 정원(貞元;785∼794) 연간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로 옮기는 등 잦은 천도가 있었다. 문왕의 재위기간 중 당나라는 762년(보응 1)에 그를 발해국왕으로 올려 책봉하였고, 이것은 발해의 국력성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독립국가로서의 기틀을 완전히 굳힌 문왕이 죽고, 그 뒤 제10대 왕 대인수(大仁秀), 즉 선왕(宣王)에 이르기까지의 25년(793∼818)간은 제 6 대 강왕(康王) 대숭린(大嵩璘)의 15년간 재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재위기간이 짧아 뚜렷한 업적이 없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5대 성왕(成王)의 재위기간 중 수도가 동경용원부에서 상경용천부로 옮겨진 점이다. 이와 같은 발해의 침체상태를 벗어나 왕국의 황금시대를 이룩한 것이 선왕이었다. 그는 발해의 영토를 헤이룽강[黑龍江] 하류까지 확장하여 이른바 <방 5천리(方五千里)>를 이룩하였으며, 제 3 대 문왕시대에 알려진 3경 외에 다시 서경압록부(西京鴨綠府)와 남경남해부(南京南海府)를 더하여 <5경 15부(府) 62주(州)>의 이름으로 전국을 통치하였다.

재위 10년에 <해동성국(海東盛國)>을 이룩한 선왕은 830년에 죽었다. 한편 묵철이 죽은 뒤 세력이 약화되었던 거란의 수령은 안녹산(安祿山)의 반란 이후의 혼란을 틈타 당나라를 멀리하고 역시 오르혼강을 근거로 옛날의 돌궐과 같은 경로를 밟아 남하하던 위구르에 복종하면서 그 세력을 확장하여 발해의 선왕 대인수의 무렵에는 북류쑹화강[北流松花江] 부근을 경계로 하여 발해와 겨루는 형세로까지 발전하였다. 10세기 초에 이르러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거란족의 숙원이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중국본토 진출에 앞서 발해경략의 전략을 감행하였다.

927년 아보기가 이끄는 거란군은 발해가 거란을 방비하기 위하여 최전선에 구축한 부여성(扶餘城;지금의 昌圖 부근 西面城)을 뚫고 곧 국도 상경용천부를 포위, 공격하여 불과 20일 만에 발해의 마지막 왕인 제15대왕 대인전의 항복을 받았다. 이로써 대조영에서부터 15대 220여 년 간 건재하던 발해는 멸망하였다. 〔강역과 교통로〕 〈강역〉 전성기의 강역은 《신당서》 <발해전>에 대체적인 방향과 주의 이름 등이 적혀 있으나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종전의 연구성과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⑴ 남계(南界):《신당서》 <지리지>에 실려 있는 가탐(賈耽)의 《도리기(道里記》에 압록강 하구에서 약 130리의 상류에 있는 박작성이 발해의 경계선으로 되어 있다. 이 박삭성은 지금의 주롄청[九連城]의 북동 약 20리에 있는 압록강에 흘러 들어가는 포석(蒲石) 하구에 있었다.
그러나 북동에서는 발해, 남쪽으로부터는 신라의 세력이 북상하여 이 지방에 있어서는 발해와 당나라는 직접 경계를 접하는 일이 없었으며, 압록강과 청천강을 갈라놓은 산맥이 이 양국의 경계선이 되어 있있던 것으로 믿어진다.
발해의 동쪽은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바와 같이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德源) 근처의 용흥강(龍興江)으로 믿어지는 이하(泥河)가 신라와의 경계선이 되어 있었다.

⑵ 서계(西界):《신당서》에 따르면 발해의 전성기인 선왕 대인수시대까지는 그 서쪽 경계의 국경선이 압록강 하류 주롄청 부근인 박작성에서 북으로 휘발하(輝發河)유역의 산성자(山城子) 서변을 거쳐 창도의 서변을 이어 눙안[農安]까지의 일선(一線)으로 보인다.

⑶ 북계(北界):《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발해 15부의 위치 이름을 보면, 발해의 북방경계선은 대체로 동류쑹화강까지이고 이와 헤이룽강의 합류점 북동에서 하류까지는 흑수말갈이 건재하여 발해의 영토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연해주 남부에서 싱카이호[興凱湖] 일대와 우수리강과 헤이룽강이 합류하는 지금의 산성까지의 선이 발해의 영토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경과 주요 교통로〉 발해의 5경에 대하여 각각 그 위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경용천부:지린성 닝안현[寧安縣] 동경성(東京城)에 있는 고성지(古城址)가 그 유적이다. 제 3대 문왕이 742∼755년에 중경현덕부에서 이곳에 천도하였다가, 785년부터 문왕이 사망한 794년까지 다시 동경용원부로 옮겼으나, 제 5 대 성왕에 이르러 다시 상경으로 되돌아와 927년 나라가 망할 때까지 130여 년 간 발해의 정치중심지가 되었다.

② 중경현덕부:발해가 건국의 터전을 마련한 이른바 <구국>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둔화현 육정산 오동성에서 제 3 대 문왕 때에 처음으로 천도하여 다시 상경으로 천도하기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이 중경현덕부의 유적지 추정은 어려운 문제의 하나로 되어 휘발하와 쑹화강의 합류점인 <나단포로설(Nadan foro設;那丹佛勒說)>, 지린성 화뎬현[樺甸縣]의 <소밀성설(蘇密城設)>과 <둔화현설> 등이 모두 제 나름대로의 논거를 가지고 그 정당성을 고수한 바 있었으나 둔화현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어 정설화(正說化)되고 있었다.
그러나 발해의 유적에 대한 발굴이 전개되어 상경용천부와 겨룰 만한 유적으로서 두만강에 유입하는 해란하(海蘭河)와 차오양강[朝陽川]의 중간지점에 있는 서고성자(西古城子)의 유적으로 비정(比定)하게 되어 정설화되고 있다.

③ 동경용원부:발해의 제 3 대 문왕이 중경현덕부에서 천보 말년에 상경현덕부로 천도하였다가, 정원 연간에 이곳으로 천도하여 제 6 대 강왕이 다시 상경으로 천도할 때까지 발해의 수도였다.
《신당서》 <발해전>에 확실한 위치가 나와 있지 않아 그 위치의 비정에 여러 설이 엇갈려 있었다. 그러나 1940년대 초의 발굴 결과 젠다오[間島]의 훈춘현[琿春縣] 반라청[半拉城]의 유적에 비정되어 정설화되고 있다.

④ 남경남해부:남경의 위치에 대하여는 함흥설(咸興說)을 비롯하여 함경북도의 경성설(鏡城說), 또는 종성설(鐘城說)·북청설(北靑說) 등이 있으나, 함흥설이 거의 정설시되고 있다.

⑤ 서경압록부:서경의 위치에 대해서도 《신당서》 <발해전>의 설명이 없어, 정약용(丁若鏞)의 평안북도 자성북안설(慈城北岸說) 등 몇가지 설이 있으나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한편 발해의 중요한 교통의 간선에 대하여 《신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상경현덕부를 중심으로 각 방면에의 교통로를 알 수 있는데, 동경용원부는 동해를 항해하여 일본의 쓰루가[敦賀] 등 북륙(北陸)지방의 각 항구로 향하는 선박들의 출항지였다고 설명되어 있다.
남경남해부는 신라와의 국경도시인 이하, 즉 함경남도 덕원에서 신라로 들어가는 교통로였다. 한편 서경압록부가 조공도(朝貢道)인 것은 당나라로 가는 조공사(朝貢使)가 상경에서 중경현덕부를 거쳐 린장[臨江]·통구지방을 통과하여 랴오둥반도[遼東半島]의 연안을 따라 산둥반도[山東半島]의 등주(登州)에 상륙한 뒤, 육로로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향하였기 때문이다. 부여부는 거란도(契丹道)라고도 하여 거란으로 가는 경로로 이용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사회구조〕
발해의 사회구성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사료로는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일본의 승려 영충이 견문을 적어 남긴 기사(記事)를 들 수 있다. 즉 스가하라[管原道眞]의 《유취국사(類聚國史)》 권193에 수록되어 있는 영충의 견문담에 따르면 토인(土人)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고구려족이 곳곳의 촌락의 촌장을 비롯한 지배계층으로 나타나 있으며, 촌락의 구성원인 주민들은 거의 말갈계였다. 즉 소수의 고구려계 유민이 지배층이 되어 다수의 말갈족을 통치하는 복합민족국가 같은 모습을 띤 사회였다. 그러나 극소수였지만 말갈계의 참여가 전혀 막혔던 것은 아니었다.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 <신고(臣考)>에도 적혀 있는 수령관함(首領官銜)의 이알기몽(已閼棄蒙)이라든가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의 부사격이었던 이진몽(已珍蒙) 같은 말갈계의 사회참여도 찾아볼 수 있다. 발해의 유력한 성으로는 고·장·양(楊)·두(竇)·오(烏)·이(李) 등 모두 한족식의 성을 가진 고구려계였다. 이와 같은 발해의 사회구조는 성당문화(盛唐文化)를 섭취하여 그 관제와 정교면(政敎面)에 발전을 거듭하여 내려오던 말기에 이르기까지도 신분계층에 관한 큰 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 점이 발해가 지니는 사회구성상의 취약점이었다.

즉 혈통과 문화·언어·역사의 공동체의식을 느낄 수 없는 족적관계(族的關係)가 이익을 달리하면서 한 국가를 형성하고 거기에 다시 종족적 차별이 노출되어 피지배종족까지도 국민의 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이나 운명공동체의식 같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취약성이 가장 뚜렷이 나타난 것이 거란에게 멸망하게 된 시기로서 국력이나 군사력에서 패한 것이 아니고, 사회 모순의 취약성에 기인한 결과였다.

〔산업경제〕
발해의 산업과 경제활동은 분명하지 않으나, 발해가 남만주의 심장부인 랴오양[遼陽]·선양[潘陽]·카이위안[開原] 등지의 평야지대를 점거하지 못한 채 당나라에 점유되고, 그 북동의 산악지대를 개척하면서 천연자원의 활용에 힘을 기울였던 자취는 당과 일본과의 무역품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즉 인삼·우황(牛黃)·황명(黃明) 등의 약재류와 몇 가지의 특산물의 수출은 매우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중요 생산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주(顯州)의 포〉 현주는 중경현덕부에 속한 6주 가운데 수주(首州)이다. 그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옛 북옥저(北沃沮)인 두만강 하류의 어느 지점으로 짐작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기록된 옥저의 특산물인 맥포(貊布)와 발해가 후당(後唐)에 공품(貢品)으로 수출한 세포(細布) 등은 현주의 포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포는 심[麻]을 원료로 한 직물이었을 것이다. 〈옥주(沃州)의 면(綿)〉 옥주는 남경남해부에 영속된 주이다. 남경남해부는 지금의 함경남도 함흥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여 옥주도 이 부근으로 짐작된다. 면은 누에의 일종에서 만들어내는 실로 짠 직물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강원도지방인 동예에서 양잠을 하여 면을 만든다는 기사가 있다. 〈용주(龍州)의 주(紬)〉 용주는 상경용천부에 영속된 수주이며, 지금의 지린성 닝안현 부근이다. 주는 면포를 말하는 것으로 앞서의 강원도지방의 양잠이 남경과 중경현덕부를 거쳐 지금의 목단강(牧丹江) 유역인 닝안현의 특산물로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노주(盧州)의 벼〉 발해의 산도지(産稻地)로 《신당서》 <발해전>에 적혀 있는 노주는 중경현덕부에 영속된 주로 해란하 유역의 평야인 것으로 믿어진다. 이 지역은 만주 북동부에서 가장 비옥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위성(位城)의 철〉 발해의 철생산지로 알려진 위성은 중경현덕부에 영속된 철주(鐵州)의 수현(首縣)이다. <철주>란 이름도 철의 생산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중경현덕부의 서고성자는 BC 4세기의 제철유적지가 발견된 두만강 남쪽의 무산(茂山)과 매우 가까우며, 지금도 이 부근에 천보산(天寶山) 같은 만주 북동부 굴지의 철광산이 있다.

〔대외무역〕 발해는 당나라와 일본을 대상으로 공사무역(公私貿易)을 활발히 계속하였다. 일본과는 제 2대 무왕이 727년 처음으로 대사(大使) 고인의(高仁義) 이하 24명을 일본에 파견하여 국교를 청한 이후 점차 관사무역(官私貿易)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발해는 상리주의적 입장에서 능숙한 외교술을 구사하면서 일본에는 주로 모피류 및 인삼을 수출하고 그들로부터는 견포(絹布)를 수입하였다.

발해는 713년(개원 1) 왕자를 당나라에 보내어 호시(互市)의 자유로운 출입을 요청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그후 당나라는 산둥반도인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의 관하에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를 두어 등주 같은 항구에 신라와 발해의 무역선에 관한 업무를 전담하게 하고, 대종(代宗;763∼779) 이후는 칭저우[靑州]에 발해관(渤海館)을 두어 발해 사신과 무역선의 편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한편 매년 발해에서 명마(名馬)의 수입이 끊이지 않았다는 《신당서》와 《구당서》의 기사에서 미루어 보아도 당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하였던 것 같다.

〔문물제도〕
〈행정기구〉 발해의 중앙정부 통치기구는 당나라의 3성(省)·6부(部)·9시(寺)제를 본받아 3성·6부·1대(臺)·7시·1원(院)·1감(監)의 관료체제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발해의 3성은 조칙(詔勅)을 기초(起草)하는 당의 중서성(中書省)을 중대성(中臺省)이라 하고 조칙을 심의하는 당의 문하성(門下省)을 선조성(宣詔省)으로, 상서성(尙書省)을 정당성(政堂省)이라고 하였다. 당나라의 상서성에 속하는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의 6부를 충부(忠部)·인부(仁部)·의 부(義部)·지 부(智部)·예부(禮部)·신부(信部)로 그 기능은 당의 것과 같았으나 명칭을 달리하였다. 지방행정기관으로는 부·주·현을 두고 도독(都督)·자사(刺使)·현승(縣丞) 등의 지방관을 두었다.
〈수도의 짜임새〉 상경용천부는 성왕이 동경용원부에서 다시 이곳으로 천도한 뒤 135년 간의 수도로서 지금의 지린성 닝안현 동경성이다. 발굴조사 결과 그 규모는 동서길이 약 4.6㎞, 남북 약 3.3㎞의 큰 도성으로 당나라의 장안을 본뜬 것 같은 토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궁성은 이 외곽성의 중앙에서 약간 북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석축으로 쌓은 둘레 약 3990m의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궁성은 동·서·북·중심의 4구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중심구(中心區)는 둘레가 2680m가 되며, 남·북에 두 문이 있다. 왕성은 궁성 남쪽에 있으며, 그 사이에는 큰 가도(街道)가 가로놓여 있고, 동·서·남의 3문이 있는 직사각형의 성이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성에 비하면 그 규모는 약 반밖에 되지 않으나 일본의 평안경(平安京)보다 규모가 컸다고 한다. 밀림지대였던 만주 북동의 구석진 곳에 이와 같은 대도시를 건설한 국력과 역량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불교미술〉 불교신앙은 사료가 없어 체계를 세워 설명하기 어려우나, 발해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발해의 상류층이 불교신앙을 지녔다는 점 등은 부분적으로 기타의 자료를 통해 짐작되고 있다. 또한 승려 중에는 조수(鳥獸)의 언어에 능통하여 당나라에까지 알려졌다는 함통(咸通;860∼873) 연간의 살다라(薩多羅)나, 멸망 후 고려에 투항하였다는 재웅(載雄) 등 60여 명의 기사로 보아 발해의 승려수는 결코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불교유물로는 지금 남대묘(南大廟)로 불리는 옛 발해사지에 남아 우뚝 솟아 있는 높이 2m가 넘는 용암제(熔岩製) 석등은 발해가 남긴 문화재의 대표적 유물로 손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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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요약해 올려달라고 하는 님이 원하는데로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라고 아주 세세하게 답변 올립니다.
님 무작정 백과사전싸이트에서 배껴오는 플레이는 저도 하기 싫은데
자세한 답변을 요구하셔서 죄송합니다
어느님이 다른님에게 자세히 발해에 대해서 이렇게 글을 올려놓았기에 좋은거 같아서 이렇게 전부다 복사해 많은 양을 오려드리오니 눈이 많이 아프셔도 천천 읽어보시죠
1.발해 대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왜 왕호는 고왕인가요?

조영의 성은 대씨입니다.하지만,대조영의 왕호가 高王 이라서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즉,대조영의 원래 성씨가 고씨인데,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성씨를 바꾸었다는 주장있습니다.아마도 대조영은 옛 고구려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물론,전해지는 사료가 없어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왕호를 보고 추측한 것이지요.

2.발해 건국시 이름이 진이었다고 하는데 그 연원 및 왜 이름을 진에서 발해로 바꾸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발해가 건국할 당시에는 진국이라는 국명을 썼습니다.진(振)은 진(震)이라고도 합니다.
진은 주역에 황제가 동방에서 나왔다는 진괘에서 유래된 것입니다.(稱葉岩吉) 구당서
권 199 발해말갈전을 보면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진국왕이 되었다.." (自立爲振國王)에 진국이 나옵니다.발해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713년 당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이라고 책봉한 이후,국명을 바꾸었다고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발해 스스로 국명을 바꾸어 당에 통보한 식으로 생각합니다.
즉,국력이 강성함에 따라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죠.이런 경우가 바로 후대의 조선인데,
국명을 미리 정한 후 명나라에 선택권을 줍니다.당연히 명나라는 조선이 선택한 국명을 따르겠죠.중국 학계는 책봉으로 인해서 국명 변경을,북한 학계는 발해 스스로 국명을 바꾸었다고 보고 있습니다.한국 학계는 아직 명확한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연구자에 따라서 시각이 다릅니다.

3.무왕때 보낸 사신의 국서에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습(풍속)을 계승하였다"

일본 사서인 속일본기 권10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부문이죠.
무왕이 727년에 보낸 국서 내용인데,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요구하는 국서입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고립된 정세를 벗어나기 위해서,무왕은 일본을 선택했고 그렇기에
국서의 내용은 일본과의 좋은 관계를 수립하고자 무왕이 바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물론 발해의 건국도 알리고 있는데 발해가 여러 번국들을 주관하고 부여-고구려를 잇는 정통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국서의 자세한 내용은 발해 서적을 참조하세요.

4.727년 일본과 발해외교관계가 시작된 후에733년에 나,당관계가 안정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형태의 안정이었을까요?
동해의 등주 공격으로 인해서 당-신라의 관계는 자연스레 복원 되었습니다.나.당 전쟁 이후 양국은 최악의 상황까지 갔지만 발해로 인해서 연합군을 형성했습니다.733년 신라군이 발해의 남부 지역을 공격합니다.물론 실패로 끝나죠.이후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영역을 신라 영토로 공식적으로 인정해 줍니다.

5.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라는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발해 문왕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면서 스스로 천손이라고 했습니다.일본 정부에서는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문왕은 나아가 발해-일본 관계를 장인과 사위의 관계로 설정
하였습니다.한편으로 국서 없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전달하는 등 국력에 따른 자신감을 표출했습니다.
1988년 북한의 오메리 절터에서 고구려 금동판이 발견되기 전까지 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 당나라 또는 일본의 천제,천황을 모방했다고 생각했으나 이 금동판에서 천손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발해 왕실이 고구려 왕실을 계승했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미 모두루 묘지나 광개토대왕비문 등에 고구려 왕실을 하늘의 자손이라고 표현하였죠.결국,발해 왕실도스스로 천손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6.발해 3대 문왕이 쓴 연호가 대흥이라고 하는데,연호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문왕의 대흥이라는 연호는,정효 공주 묘지문에서 다시 확인 되었습니다.
大興은 '크게 흥하다' 라는 뜻처럼 문왕은 56년의 통치 기간 동안 발해라는 국가를 크게 발전시켰습니다.정효 공주 묘지문에 보면 "...부왕 때에 와서는 국세가 강성해지고 나라의 운명이 장구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문왕의 연호를 잘 대변해 줍니다.
그리고 대흥 이외에 묘지문에서 확인된 것이,보력이라는 또다른 연호입니다.언제부터
썼는지 모르겠지만,중간에 보력이라는 연호를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7.발해 통치 조직 중 6부와 왕권 강화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6부의 중앙 관청은 현재 행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문.무 관리를 등용하고,조세 및,군사,법률 등 왕권과 결부되는 곳입니다.중앙 관청의
힘은 곧 왕권의 힘입니다.중앙 정부가 힘이 없다면,왕권은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겠죠.

8.발해는 여러번 수도를 옮겼다고 들었습니다.설명해 주세요.
문왕대에 대부분 수도를 옮겼습니다.742년 문왕은 구국에서 수도를 중경현덕부로 옮겼
습니다.해란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개발하여 경제력을 확보하고 정치적으로도 새롭게
시작할려고 했습니다.
755년 문왕은 상경용천부로 수도를 옮깁니다.이 시기에는 안사의 난으로 인해서 수도 방위 의 중요성 때문에 상경으로 이동했다고 생각됩니다.다시 30년 뒤 문왕은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옮기는데 아마도 문왕 말기에 접어들면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고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동경에서 다시 상경으로 돌아옵니다.794년에 성왕에 의해서 다시 수도를
천도하여 상경용천부가 발해 멸망 시까지 중심 수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9.발해는 황제국가였나요?
국제적으로는 당의 질서에 편입 되어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황제 체제를 유지한 것 같습니다.
독자적 연호 사용과 더불어 정혜,정효 공주 묘지문에 나오는 황상 같은 경우에는 문왕을 황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함화 4년명에 나오는 허왕부라는 존재와 발해 3성 중에 하나인 선조성을 보면 詔 의 경우 황제의 명령을 의미합니다.敎는 한 단계 아래인 왕이 사용하는 용어이죠.자세한 것은 송기호 교수님의 '황제 칭호와 관련된 발해 사료들' 글을 참조하세요.

10.발해 1대부터 15대까지의 왕15명이 매우 궁금합니다.
발해왕이 몇 명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위해의 경우 20세기에 들어와 김육
불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사실상 13대왕 대현석 이후 인선왕까지 그 사이에 몇 명의 왕이 더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당이 멸망하면서 중국측에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발해가 남긴 사료도 없기 때문입니다.

11.발해가 있는데 왜 '통일 신라' 라는 명칭을 사용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은 어느 정도 정착 되었지만,단일 명칭이 통일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삼국 시대의 신라와 통일 이후의 신라 명칭을 구분해야 하는데 아직 공식적으로 학계에서 합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오래전에 '후기신라'라는 명칭으로 통일 신라 시대를 대신했으며 남한에
서는 한규철 교수님께서 '대신라'로 제안했습니다.즉,통일신라시대 대신에 '대신라'
라는 시대 명칭을 제안한 것이죠.

12.5천년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발해는 다민족 국가인가요?
사실상 한국 역사는 단일 민족사의 역사가 아닙니다.현재 우리는 국민과 민족을 혼동하고 있습니다.ethnic group(민족) 하고 nation(국민) 의 혼동입니다.하지만 민족과 국민은 엄연히 다릅니다.중국을 보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다양한 55개의 민족이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아래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고려 이후 중앙 집권화된 국가에서 강력한 통합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 차이를
모르는 것입니다.처음으로 민족이라는 의식을 심어 준 것이 몽고의 침략입니다.
당시에 많은 역사서들이 집필된 이유도 몽고의 침략으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고조선 이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민족 통합을 강력히 추구하신 분은 다름아닌 세종대왕입니다.한글이라는 문자 자체가
중국과의 차별성을 둔 것이고 압록.두만강에 방어진들을 구축하여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구분 지어 버렸습니다.특히 이 민족의 풍습을 금지시켜 많은 위구르인과 한족들이 조선인으로 동화 되어 버렸죠.
처음부터 韓민족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수백,수천의 민족이
있었는데 이것을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가 통합했으며 다시 발해와 신라, 고려-조선
으로 이어지면서 지금의 한국인과 한민족이 생긴 것입니다.
발해에는 고구려인,말갈인 뿐만 아니라 소그드인,한인,거란인 등 다양한 민족이 살았습니다.
9세기 이후 중앙 정부의 강력한 통합 정책으로 어느정도 단일화된 발해인이 나타납니다.
동화가 된 것이죠.중요한 것은 민족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민족은 국수주의와 배타성을 증폭시키기 때문이죠.

13.발해가 중국,한반도 남쪽으로 진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 발해가 있었던 지역은 북방 지역으로 상당히 추운 지역입니다.하지만 발해가 북쪽 지역에서 문화의 꽃을 피우고 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발해가 존재할 시기에 지구 온난화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런 기후의 영향으로 발해 지역에서 농사나 작물 생산이 가능했던 것입니다.만약 한랭기의 시기에 발해가 존재 했다면 발해는 한반도 내로 중심 수도를 옮기던가 아님 신라와 전쟁을했을 것입니다.발해는 자체 생산력만으로 식량을 해결하는데 충분하여 남쪽이나 중국으로 진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4.발해의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가 아닌 만주사가 아닐까요?

박시형 교수님께서 중국 학술회의에서 영토가 바뀐다고 역사까지 바뀌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당시 학술회의는 중국과 북한 학자들의 논쟁으로 인해서 엉망으로 되어
버렸죠.
비록 중국,러시아가 옛 발해 영토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지만 발해사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귀속시키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집니다.
발해 이후에 일어난 금이나 청나라는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으로 진출하였기에 중국 왕조의 한 부문으로 남았습니다.그래서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하지만 발해는
만주에서 일어나 만주에서 멸망합니다.중국의 역사가 아닌 것입니다.고구려도 같은
경우이죠.
후대의 역사 인식도 중요합니다.후금이나 청은 발해가 자신들의 원류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사서 하나 남기지 않습니다.하지만 조선에서는 중국보다 200년 이상 앞서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합니다.
유득공 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 실학자들이 발해사를 저술합니다.이것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역사 인식에 대한 변화 때문입니다.영.정조 시대에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구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실학자들은 자연히 발해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실학자들의 발해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는 바로 발해가 선조의 국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조선 전기와는 다른 역사 인식의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중국은 20세기에 들어와 발해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현재 중국인과 한국인 중에서 발해에 대한 귀속 의식은 한국인이 훨씬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그리고 영순태씨,협계 태씨 등 대조영의 후예라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중국 지역에는 없습니다.

15.발해 시대에 존재한 소고구려국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고구려인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서 당나라는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추구합니다.그래서 자신들의 괴뢰 정권을 요동에 세웁니다.677년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으로 봉해 신성으로 보내서 고구려인을 회유한 것이죠.
당시 보장왕은 당의 의도와 다르게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자 했으나 당에 발각되어 잡혀가 주로 귀양을 갑니다.그리고 682년 보장왕은 서거합니다.686년 당나라는 손자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봉하고 요동 지역의 통치를 맡깁니다.이 시기의 고구려를 소고구려라고 부릅니다.
당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소고구려는 독립적인 정치 세력을 유지하지만 발해 문왕대에
들어와 흡수됩니다.하지만 소고구려는 발해의 번국으로 인정되었나 봅니다.10세기
초까지 여러 사료에 고려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죠.당회요나 책부원귀에 보면 고려가
당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나오는데,이 당시의 고구려는 소고구려를 지칭합니다.
소고구려의 영토는 황해 북부,평안.남북도,요동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수도는
신의주의 국내성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자세한 것은 얼마전 천지출판에서 나온 '자주
독립국 발해'라는 책 속에 장학종 교수님의 "고려 후국의 수도와 그 존립에 대해서" 논문을 참조하세요.

16.발해의 옛 터에서 일어난 금나라는 한국사가 아닌가요?
금나라가 고구려.발해처럼 만주에서 흥망했다면 한국사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중국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한 왕조로 풍미했습니다.또한 이 당시의 여진족들은 많이 이질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비록 같은 원류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활,풍습,언어 등이 달라지면서 분파 되었습니다.금의 황실이 발해와의 연관성은 가지고 있지만,이것만으로 한국사로 귀속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17.발해는 여권이 강한 사회였는지요?
발해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고 봅니다.정효공주묘지문에는 발해 사회에 유교적인 경향이 나타나지만,유교는 발해 사회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현재와 같은 남녀 평등 사회를 접목하기에는 힘들지만 가족 구성에서 일부일처제가 기본이었습니다.이것은 발해 무덤 발굴에서 확인되는데,보통 중앙에 주인공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송 시대때 쓰여진 [송막기문]에는 발해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부인들은 모두 사납고 투기가 심하다.대씨는 다른 성씨와 서로 맺어 10자매를 이루었는데,번갈아 남편을 감시하여 남편이 측실(첩)을 두는 것과 다른 여자와의 연애(교유)를 용납하지 않는다.만일 이런 일이 알려지면 반드시 독을 넣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도록 꾀한다.한 남편이 범한 바가 있어 아내가 알지 못하더라도, 9인이 모두 일어나 그를 꾸짖으면서 다투어 증오하는 것을 서로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거란,여진의 여러 나라에는 모두 여창(창녀)이 있고 낭인(일반사람)들은 모두 소부(첩),시종(몸종)들을 가지고 있으나,오직 발해에는 이들이 없다." -역 송기호 교수님-
우리나라 고대 국가에서 여창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신라 시대때 김유신이 간 곳이창가였는지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발해 사회에서는 위의 사료를 참조했을때,발해시대에는 매춘이라는 것이 존재 하지 않았으며 첩 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상상을 못했다는 것이겠죠.
송막기문에 나오는 내용은 발해 지배층의 생활상입니다.성을 가진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집단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간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홍라녀'에 대한 기사입니다.'홍라녀'에 대한 많은 전설이 있기에 우리는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홍라녀가 전사가 되어 적을 공격하여 승리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우리 역사에서 여자가 장군이 되어 적을 물려쳤다는 것은 민간 전설에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홍라녀는 국왕을 대신해서 적(거란)과 싸워 물리치고,남편을 구해 온다는 내용이 중국 동북부 조선족에 전설로 내려옵니다.위의 사실을 종합한다면,발해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고 봅니다. 발해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서 조선 중기 이전에는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는데,이것은 북방 민족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고려 시대에도 여성들은 재산권 및자식들이 어머니 성을 따르는 사실 등 여성의 지위를 엿볼수 있는 자료가 많습니다.

18.발해와 신라의 뱃길의 역사를 알고 싶습니다.

포시에트만 근처에서 사암으로 만든 불상이 발견 되었는데,그 형태가 신라의 불상과 비슷하여 신라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또한 도장에 나오는 이광현의 이야기를 봤을때 발해-신라간의 해양 교류는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10세기 초에 발해는 신라와 결속을 맺습니다.당시 한반도 중부 지역은 고려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염주(현 포시에트만)와 경주를 잇는 해상 루트를 이용하여 외교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합니다.
장보고의 해상세력과 9세기 발해의 국제상인단과의 연관성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아직은 자료가 부족하여 자세히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19.발해가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을 알고 싶습니다.
일본 문인들은 발해 사절단을 크게 환영했습니다.아마도 섬이라는 고립된 지역의 특성
때문이겠죠.중국과 인접한 발해인들이 일본에 오는 것은 자신들이 직접 외국인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발해 대사들의 한시 수준은 매우 높아 일본 문인들이 감탄할 정도였으며 종종 자신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도 했답니다.
발해는 26회 발해 사절단때 일본에 "장경선명력"을 전해주었는데,일본에서는 이것을 16
84년까지 사용하였으며,27회 발해사절단 때에는'불정존승다라니경'을 전하여 현재,일본 석산사에 남아 있습니다.발해에서 전래된 발해악은 지금도 '아야키리'로 아악의 상연 종목으로 남아 있습니다.

20.유득공의 발해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유득공은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자신이 규장각에 있을때 쓴 책이 바로 발해고입니다.
1784년에 유명한 발해고 서문을 썼는데,이 서문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역사상 처음으로 남북국 시대를 제창한 사람이며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성시켜 독자적인 역사서로 저술했던 분입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유득공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만 한국 역사가에서 유득공이 없었더라면 발해사는 한국사의 한 영역으로 평가 받기가 불가능 했습니다.본문에 들어가면 군고(왕에 대한 고찰 ),신고(신하에 대한 고찰),지리고(지리에 관한 고찰),직관고(관청 및 관직에 대한 고찰),의장고(의식 및 복장에 관한 고찰),물산고(물산에 관한 고찰),국어고 (국어에 관한 고찰),국서고 (국서에 관한 고찰),속국고(후국에 관한 고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년 초에 송기호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발해고가 출판 되었습니다.일반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으며 역사학도나 발해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뒷 부문에 원문도 있습니다.
유득공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신 분은 정진헌 선생님이 쓰신 '실학자 유득공의 고대사 인식'이라는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신선원에서 나왔습니다

21. 발해의 영토는 가장 넓었을 때 어느 정도였습니까?
발해의 영토는 전성기일때 사방 5천리였다고 합니다.동쪽으로 연해주 지역을 포함해서 아무르 강까지,서쪽으로 요동 지역,남쪽으로 대동강,원산 이남(강릉이 신라와의 경계선이라는주장도 있습니다) 북쪽으로 송화강 이북의 흑수말갈까지 복속시켰습니다.
고구려보다 훨씬 넓은 영토에 5경 15부 62주를 설치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보여 줍니다.
물론 지방 수령들은 발해의 지방 관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죠.

22. 발해가 요동지역을 차지했었는지의 여부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발해가 요동 지역을 점령했다고 보는 학자는 많습니다.하지만 요동반도 끝까지 발해 영토였는지 논란이 남아 있습니다.이미 10세기 초에 발해와 요는 요동을 두고 치열한 전투를 합니다.결국 발해가 요동을 잃게 됩니다.요사 기록을 살펴 본다면 발해가 요동을 점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3. 발해 장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발해의 유명한 장군은 장문휴 대장이겠죠.당의 등주를 기습한 어쩌면 우리 나라 역사상
수군으로 해외 정벌을 지휘했던 첫 장군입니다.그리고 한단 고기 대진국 본기에 전하는 수비 장수 출신인 연충린 장군도 있지만 위서 논쟁으로 인해서 이 분이 실존한 인물인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대진국 본기에는 마도산 전투에서 발해군을 이끌었던 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 사신으로 간 무관 출신 명단을 제외하고,나머지 전하는 장군 이름이 없습니다.최근,고고학에서 발견된 장군 이름도 있습니다.러시아 니꼴라예브까성에서 발견된 청동 부절에 좌효위장군 '섭리계'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도 있었습니다.이 성의 성주겠죠.
이 밖에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발해 멸망시에 3일 동안 부여성 방어 전투를 지휘한 성주,924년 요나라의 요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장군,문왕이나 선왕 시대때 정벌 전쟁에 참가한 장군,장군은 아니지만 멸망 후 요와의 전쟁을 6개월간 이끌었던 장령부 도독,기병대 7천을 이끌고 요와 싸운 압록부,장령부,남해부,안변부,정리부 도독,포로로 잡혀 참살당한안변부 두 장수,철주 자사 항쟁 등 이름이 전해 지지 않는 장군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장군 밑에 있는 일반 병사들의 공이 훨씬 크다고 봅니다.전쟁에서 장군 혼자 싸우는 것은 아니겠죠.

24.발해수군을 지휘했던 장문휴 대장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대장이라는 직책과 무왕의 명을 받고 발해 수군을 이끌고 당의 등주성을 기습하여 함락시킨 후 철수했다는 기록 외에 다른 부분은 알수가 없습니다.추측한다면 장문휴 대장(중국에서는 해적 두목으로 봅니다.)은 발해를 건국시킨 대조영의 부장 출신일지도 모르죠.전쟁의 경험 없이 당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모할 것이고,발해 최고의 군사 작전에서 경험이많은 노이 전투를 지휘했을 거라고 봅니다.아마도 장문휴는 옛 고구려 해양 세력의 출신이 아닐까 싶습니다.바다를 아는 사람만이 당의 등주를 기습할 수 있겠죠.물론 이건 제 추측일 뿐입니다.

25.발해에서 쓰던 무기 방어구 공성용무기 계열체계 진형, 기타등등이 궁금합니다.
발해 중앙 군대는 10위가 있었습니다.좌맹분위,우맹분위,좌비위,우비위,좌웅위,우웅위,남좌위,남우위,북좌위,북우위입니다.이 곳에 대장군 1명,장군 1명이 배치 되었죠.하지만 신당서 발해전에 나오는 이 발해 군사 제도는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었을 것입니다.
고려로 망명한 좌수위 소장 모두간이나,일본에 파견된 낭장 고인 등 별도의 명칭이 많이 남아 있지만 어느 소속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발해가 쓰는 무기.방어구 등은 고구려 시대와 비슷하겠죠.사료에 자세히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발견되고 있는 유물 등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수도를 다섯 군데로 분산시켜 방어력을 높이고자 했으나 상경 지역은 산성과 평지성의 이원적 방어 체제가 아니라서 문제점을 많이 노출 시켰습니다.외성이 너무 길다 보니 어느 한 부분이 뚫히면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26.발해 5경의 위치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현재 논란이 되는 곳이 서경 압록부와 동경 용원부입니다.나머지 3경의 위치는 학계에서어느 정도 합의가 되었습니다.서경 압록부의 경우 대체적으로 임강진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지만 발견되는 유물.유적이 적어서 이 곳에 수도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집안 지역을 서경으로 보기도 하며,집안에서 임강진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동경의 경우 훈춘의 팔련성으로 보지만 북한 학계는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부거석성을 동경용원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북한 학계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기에 앞으로의 고고학적 발굴에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27.발해의 탑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발해 시대 탑의 경우 영광탑이 완벽하게 남아 있습니다.이 외에 정효공주 무덤 위에 탑이 존재했으며,1920년대까지 남아 있었던 훈춘의 마적달탑입니다.안타깝게도 이 마적달탑을찍은 사진이 없기에 그 형태를 알 수 없습니다.어떤 학자는 이 마적달탑을 문왕의 아들인 대굉림을 위해 건설한 탑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발해 탑의 특징은 무덤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지궁이라는 무덤칸이 있는데 이것은 발해의 독특한 형태입니다.그리고 전탑 위주입니다.한반도 남부가 화강암을 사용한 석탑 위주에 반해서 발해는 전탑 중심이었습니다.이것은 환경의 영향이 아닐까 싶네요.

28.발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24괴석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24괴석이 발견되고 있습니다.주춧돌입니다.연변대학에서 나온 발해사 연구2에 보시면 이 주춧돌에 대한 보고서와 논문이 있습니다.하지만 이 24괴석 위에 있던 건축물이 어떤 용도였는지 아직 명확히 밝혀 지지 않았습니다.종교적인 의미에서,관아에서 사용된 건축물,곡식창고까지 다양합니다.공통된 점이라면 이 괴석이 발견되는 곳이 성입니다.즉,발해 시대 행정 중심지이던 성에서 발견되는 만큼 공공성을 띈 건축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29.발해 정혜 공주 무덤의 형태를 알고 싶습니다.
정혜 공주묘의 건축 양식은 완전한 고구려식 돌방 무덤(석실봉토분)입니다.무덤 앞에 벽돌이 깔려 있는 무덤길이 있으며,여기서 널길을 통해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천정은 고구려 무덤에서 특징적인 각을 줄여 쌓는 고임천정 방식입니다.정혜 공주는 777년,정효 공주는 792년에 사망하였는데 불과 15년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정효 공주묘는 대부분 당나라 형식입니다.천정 구조만 제외하면,전탑 형식에 당 화풍의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문왕 초기까지 고구려 전통이 강했지만,문왕 중기에 들어서면서 적극적인 당 문화 수용의 영향으로 무덤에도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30.발해 정효공주 무덤의 정확한 형태를 알고 싶습니다.
정효공주 묘는 계단식 벽돌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돌방무덤이라고 하기에는 정혜 공주묘와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정혜공주묘는 완전한 고구려식 돌방무덤이지만, 정효공주묘는 벽돌과 돌로 쌓았습니다.현실을 벽돌로 쌓아서 당나라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천장은 고구려 방식으로,무덤 위에 벽돌탑이 있는 것은 발해 고유의 특징입니다.
계단으로 통해서 현실로 들어가기 때문에,굴식일 경우 지면과 수평으로 판 널길을 통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굴식은 아닙니다.그렇다고 돌방무덤(석실봉토분)이라고 하기에는 정효공주묘는 탑 아래 무덤이 있기 때문에 굴식 돌방 무덤은 아닙니다.벽돌 무덤에 가깝다고 봅니다.물론,고구려.당.발해적 요소가 모두 섞힌 독특한 무덤 양식이지만,당나라 요소가 강합니다.벽화 역시 당풍이 강하죠

간략한 발해의 역사들...
당에 끌려갔던 대조영의 탈롤로 당의 추격군을 격파하며 동쪽으로 이동.
고구려인(지배층) + 말갈인(피지배층)
고구려의 부흥 운동의 과정에서 성립.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발해를 고구려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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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100%만빵일것가틈 수정하기 신고하기
tlstkdghek12 (2004-03-19 19:45 작성)


발해는
대조영이 동모산성 (고구려의첫번째수도)에집을 짓고 고구려인들을 모았다.
대조영은 이진충과 손만영이라는 거란의 지도자들이 반란을이르킬때
동맹하고 걸사비우(말갈족족장)라는 장수를 앞세워 안동도호부를
치고 요동땅을 전부 다차지한다.
걸사비우,걸걸중상(대조영의아버지),대조영,대무예(무왕),고연무등의 장수들이
다른성들을 차지하며 천문령전투에 오는데 이전투에서 발해군은 5만의군사로
30만의 군사를 전멸시킨다. 하지만 이때 걸걸중상과걸사비우가 죽는다.
그후에 아달해(아닐수도있음)에 황궁을지어서 발해를 발전시켰다.
발해의인구는 지도층은 고구려인 인데비해 백성들은 고구려인들은 거의없고
대부분이 말갈족과소수민족들이 찾이한다.
발해인은 신라와마찬가지로 제일가까운 친척이나 자식이 왕위를계승한다.
또 검소하게 장신구를 대대로 물려쓰는전통이 있다.
발해의 문화유산은 대표적인게 중국의 흑룡사에있는 석등이 있다.
석등에는 연꽃무늬가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연꽃무늬 석등 과 흡사하다.
발해초에는 당나라와 신라는 별로경개를 하지 않았으나 무왕 때부터
당과의 전쟁을하였다.
발해군은 한때 황해로 해서 중국땅에들어가 중국의 남동부지역을 휩쓸고 후퇴했다.
그때 당나라는 발해를 야만인취급을했고 신라의병력으로 이길줄 알았으나
신라의 병력은 발해땅에 들어가기도전에 변명을해서 쳐들어가지도 않았다.
그후 당나라가 멸망할때까지 발해는 야만국가로 알려져있었다.

삼국 (고구려,백제.신라)이 신라에 의해 통일된(676년)후 남북국 시대의 형태가 시작됩니다.
아래로는 통일이된신라.곧 통일신라와 위로는 고구려계 사람들과 말갈인으로 구성된 발해가
그것이지요. 삼국이 신라에 의해 통일이 되었지만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나라를 이루었다고 생각하시면 쉬울 거예요. 건국당시 발해는 대외적으로는 당,일본과의 무
역을 활발히 하였고(통일신라를 견제하기위해서) 경제적으로 통일신라가 귀족중심의 경제였
다면 발해는 농업과 수공업이 성행했다고 볼수 있어요.그러나 문화적으로는 귀족적인 문화
가 발달하였고 ,원래 고구려계승 의식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소수의고구려인들이 지배층
을 형성(피지배층은 다수의 말갈인)하고 있었기에 옛고구려 문화의 토대위에 당의 문화를
수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따라서 통일신라의 문화가 조화미와 정제미가 있었다면 발해문화
는 기상이높은 고구려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웅장하고,건실한 느낌을 줍니다.나름대로의 독자
적인 문화와 건실한 기상을 이루었던 발해는 그후 중국 거란족에게멸망이 되었어요. 당시
통일신라에선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호족들이 후삼국의 형태를 띄게 되는데 견훤이라
는 호족이 후백제를. 궁예라는 사람이 후 고구려를 세움으로서 후백제.신라(통일신라) 후고
구려 후삼국 시대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지역의 호족 출신인 왕건이란 사람이 궁에를 내쫒
고 자기가 차지한다음엔 힘이 아주 없어진 예전의 통일신라 즉 신라가 항복을 하고 이 둘이
힘을 합쳐 후백제를 격파 합나다(936)그리고 나서 거런에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포섭하게
되는것이지요.이리하여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중세사회로의 발전을 아아가게 되는겁니
다.어쨌든 발해가 이민족인 거란에게 멸망하긴 했지만 나중에 같은 민족에 다시 통합되었고
고려또한 고구려 계승의식이 있는것이기에 같은 맥락으로의 흡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발해는
698~926년의 220여 년 간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을 무대로 번영했던 나라다.
발해라는 이름은 713년 당(唐)이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해
그 국가적 실체를 공인한 데서 비롯했다 건국 초기에는 스스로 진국(震國)이라 칭했으며 일
본과의 사절교환시에는 고구려의 계승을 강조하며 '고려'(高麗)로 칭하기도 했다.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은 고구려의 옛 땅을 지배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
府)를 설치했으나, 유민의 저항이 심하자 치소(治所)를 요동의 신성(新城)으로 옮겼다가 30
년 만인 698년에 결국 폐지했다. 이후 요동지방에는 고구려유민 중심으로 자치국인 소고구
려국을 세워 9세기 초반까지 유지했다. 안동도호부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696년 무렵 전통
적으로 중국 동북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중시되던 요서지방의 요충지 영
주(營州)에서는 당의 압제에 시달리던 거란족이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의 지도 아
래 반란을 일으켜 이 일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1년 여에 걸친 반란의 와중에서 고구려 멸망
후 강제로 이 지역에 옮겨져 살던 고구려유민과 말갈족들이 대조영과 걸사비우(乞四比羽)의
지도 아래 영주를 빠져나와 만주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저지하던 당군과의 전투
에서 걸사비우가 죽자, 대조영은 말갈족들을 거느리고 당군의 추격을 물리치면서 동만주지
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698년 당시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으로 일컬어지던 지린 성[吉林
省] 둔화 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 근처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워 진국이라 했다. 현재의
아오둥산청[敖東山城]과 청산쯔산청[城山子山城]이 그 유지이다.
당은 발해의 건국이 기정사실화되고, 요서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契丹)·해(奚) 등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랴오허 강[遼河]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사실상 어렵게
되자 705년 시어사(侍御史) 장행급(張行)을 보내 발해의 건국을 인정했다. 이어 713년에는
고왕(高王) 대조영을 정식으로 발해군왕에 봉해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대조영은 요서
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던 돌궐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한편 당과 평화적인 교류도 계속 유지
함으로써 안정과 번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719년 대조영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
왕(武王) 대무예(大武藝)는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고 영토의 확장에 주력해 큰 성과를 거
두었다. 동북 만주 일대와 연해주 남부지역이 판도에 포함되는 것은 이때였다.

발해가 적극적으로 영토확장사업을 벌이자 신라는 이를 염려해 721년 강릉 이북지역에 장성
을 쌓아 대비했다. 또한 발해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던 헤이룽 강[黑龍江] 하류지역의 흑수말
갈(黑水靺鞨)은 당과의 연계를 통해 발해의 침공에 대비하고자 했다. 역시 발해의 세력확장
을 경계하고 있던 당은 흑수말갈이 내속의 의사를 보이자 이를 계기로 726년 이곳에 흑수주
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파견했다. 이같은 사태의 전개로 인해 위기감을 가지게 된 무왕은
아우 대문예(大門藝)로 하여금 흑수말갈의 정벌을 명령했다. 그러나 당과 직접 충돌이 야기
될 것을 우려한 대문예는 정벌을 반대하다가 여의치 않자 당으로 망명했다. 당은 대문예를
우대하여 좌효기장군(左驍騎將軍)에 임명하고 발해의 송환요구를 거절했다. 양자의 대립은
결국 발해 수군의 산둥[山東] 등주(登州) 공격, 당·신라 연합군의 발해공격이라는 무력대결
로 발전했다. 732~733년에 걸친 발해와 당·신라의 대립은 뚜렷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긴장
관계가 계속되다가 737년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가 즉위해 평화외교정책을 펼침으로써
해소되었다.

문왕은 즉위 후 연호를 대흥(大興)으로 바꾸고 750년대 전반에는 도읍을 상경으로 옮긴 뒤
대내적으로는 체제정비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교역의 증대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리고 당에서 〈당례 唐禮〉·〈십육국춘추 十六國春秋〉 등의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물을
들여와 사회적·문화적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안녹산(安綠山)·이정기(李正己) 등 당의 지
방 군웅들을 매개로 한 교역을 통해 경제적 향상을 기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신라·거란
등과도 빈번한 접촉을 가졌다. 793년 문왕이 사망하자 성왕(成王:大華璵)·강왕(康王:大嵩
璘)·정왕(定王:大元瑜)·희왕(僖王:大言義)·간왕(簡王:大明忠) 등이 뒤를 이었으나 짧
은 재위기간으로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818년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의 4세
손인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으로 즉위해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치고 나라의 분위기
를 새롭게 했다. 이때 싱카이 호[興凱湖] 북쪽의 말갈세력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력도 장악했으며, 당의 지배력이 약화된 랴오허 강 일대로 진출해 소고구려를 영
역에 포함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했다. 기존의 3경에 서경과 남경이 추가되고 헤이룽 강 하
류지역과 요동지방에 새로운 주가 설치되어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가 완비된
것도 이때였다. 당은 당시의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렀다. 830년 선왕이 사망한
후 대이진(大彛震)·대건황(大虔晃)·대현석(大玄錫)·대위해(大瑋)가 그 뒤를 이었고 대인
선(大)이 발해의 마지막 왕인 15대왕으로 즉위했으나 기록이 단편적으로 전하여 11대왕 이
후의 즉위년·사망년·왕계(王系)는 분명하지 않다.

발해가 제10대 선왕 이후 점차 쇠퇴의 기미를 보이는 동안, 랴오허 강 상류지대와 동몽골
지역을 발판으로 성장하던 거란은 9세기 후반부터 발해의 요동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916년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중원으로의 진출에 앞서 배후
를 위협할 수 있는 발해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발해는 925년 12월말부터 다음해 1월초에
걸친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을 맞아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1월 14일 수도가 함락됨으
로써 멸망했다. 발해가 멸망한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내부
분열이 심해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던 것 같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거란 태조의 맏아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발해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928년 유민들을 요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동단국도 동평(東平:지금의 遼陽)으로
옮겼다. 발해유민들은 12세기초까지 200여 년 간 곳곳에서 활동했으며, 상당수는 1117년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고려에 망명했다




내용출처 - 인터넷여기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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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발해에 대하여 수정하기 신고하기
alsrbs3629 (2004-03-25 23:19 작성)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요약해 올려달라고 하는 님이 원하는데로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라고 아주 세세하게 답변 올립니다.
님 무작정 백과사전싸이트에서 배껴오는 플레이는 저도 하기 싫은데
자세한 답변을 요구하셔서 죄송합니다
어느님이 다른님에게 자세히 발해에 대해서 이렇게 글을 올려놓았기에 좋은거 같아서 이렇게 전부다 복사해 많은 양을 오려드리오니 눈이 많이 아프셔도 천천 읽어보시죠
1.발해 대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왜 왕호는 고왕인가요?

조영의 성은 대씨입니다.하지만,대조영의 왕호가 高王 이라서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즉,대조영의 원래 성씨가 고씨인데,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성씨를 바꾸었다는 주장있습니다.아마도 대조영은 옛 고구려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물론,전해지는 사료가 없어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왕호를 보고 추측한 것이지요.

2.발해 건국시 이름이 진이었다고 하는데 그 연원 및 왜 이름을 진에서 발해로 바꾸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발해가 건국할 당시에는 진국이라는 국명을 썼습니다.진(振)은 진(震)이라고도 합니다.
진은 주역에 황제가 동방에서 나왔다는 진괘에서 유래된 것입니다.(稱葉岩吉) 구당서
권 199 발해말갈전을 보면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진국왕이 되었다.." (自立爲振國王)에 진국이 나옵니다.발해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713년 당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이라고 책봉한 이후,국명을 바꾸었다고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발해 스스로 국명을 바꾸어 당에 통보한 식으로 생각합니다.
즉,국력이 강성함에 따라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죠.이런 경우가 바로 후대의 조선인데,
국명을 미리 정한 후 명나라에 선택권을 줍니다.당연히 명나라는 조선이 선택한 국명을 따르겠죠.중국 학계는 책봉으로 인해서 국명 변경을,북한 학계는 발해 스스로 국명을 바꾸었다고 보고 있습니다.한국 학계는 아직 명확한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연구자에 따라서 시각이 다릅니다.

3.무왕때 보낸 사신의 국서에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습(풍속)을 계승하였다"

일본 사서인 속일본기 권10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부문이죠.
무왕이 727년에 보낸 국서 내용인데,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요구하는 국서입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고립된 정세를 벗어나기 위해서,무왕은 일본을 선택했고 그렇기에
국서의 내용은 일본과의 좋은 관계를 수립하고자 무왕이 바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물론 발해의 건국도 알리고 있는데 발해가 여러 번국들을 주관하고 부여-고구려를 잇는 정통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국서의 자세한 내용은 발해 서적을 참조하세요.

4.727년 일본과 발해외교관계가 시작된 후에733년에 나,당관계가 안정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형태의 안정이었을까요?
동해의 등주 공격으로 인해서 당-신라의 관계는 자연스레 복원 되었습니다.나.당 전쟁 이후 양국은 최악의 상황까지 갔지만 발해로 인해서 연합군을 형성했습니다.733년 신라군이 발해의 남부 지역을 공격합니다.물론 실패로 끝나죠.이후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영역을 신라 영토로 공식적으로 인정해 줍니다.

5.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라는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발해 문왕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면서 스스로 천손이라고 했습니다.일본 정부에서는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문왕은 나아가 발해-일본 관계를 장인과 사위의 관계로 설정
하였습니다.한편으로 국서 없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전달하는 등 국력에 따른 자신감을 표출했습니다.
1988년 북한의 오메리 절터에서 고구려 금동판이 발견되기 전까지 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 당나라 또는 일본의 천제,천황을 모방했다고 생각했으나 이 금동판에서 천손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발해 왕실이 고구려 왕실을 계승했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미 모두루 묘지나 광개토대왕비문 등에 고구려 왕실을 하늘의 자손이라고 표현하였죠.결국,발해 왕실도스스로 천손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6.발해 3대 문왕이 쓴 연호가 대흥이라고 하는데,연호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문왕의 대흥이라는 연호는,정효 공주 묘지문에서 다시 확인 되었습니다.
大興은 '크게 흥하다' 라는 뜻처럼 문왕은 56년의 통치 기간 동안 발해라는 국가를 크게 발전시켰습니다.정효 공주 묘지문에 보면 "...부왕 때에 와서는 국세가 강성해지고 나라의 운명이 장구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문왕의 연호를 잘 대변해 줍니다.
그리고 대흥 이외에 묘지문에서 확인된 것이,보력이라는 또다른 연호입니다.언제부터
썼는지 모르겠지만,중간에 보력이라는 연호를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7.발해 통치 조직 중 6부와 왕권 강화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6부의 중앙 관청은 현재 행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문.무 관리를 등용하고,조세 및,군사,법률 등 왕권과 결부되는 곳입니다.중앙 관청의
힘은 곧 왕권의 힘입니다.중앙 정부가 힘이 없다면,왕권은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겠죠.

8.발해는 여러번 수도를 옮겼다고 들었습니다.설명해 주세요.
문왕대에 대부분 수도를 옮겼습니다.742년 문왕은 구국에서 수도를 중경현덕부로 옮겼
습니다.해란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개발하여 경제력을 확보하고 정치적으로도 새롭게
시작할려고 했습니다.
755년 문왕은 상경용천부로 수도를 옮깁니다.이 시기에는 안사의 난으로 인해서 수도 방위 의 중요성 때문에 상경으로 이동했다고 생각됩니다.다시 30년 뒤 문왕은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옮기는데 아마도 문왕 말기에 접어들면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고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동경에서 다시 상경으로 돌아옵니다.794년에 성왕에 의해서 다시 수도를
천도하여 상경용천부가 발해 멸망 시까지 중심 수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9.발해는 황제국가였나요?
국제적으로는 당의 질서에 편입 되어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황제 체제를 유지한 것 같습니다.
독자적 연호 사용과 더불어 정혜,정효 공주 묘지문에 나오는 황상 같은 경우에는 문왕을 황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함화 4년명에 나오는 허왕부라는 존재와 발해 3성 중에 하나인 선조성을 보면 詔 의 경우 황제의 명령을 의미합니다.敎는 한 단계 아래인 왕이 사용하는 용어이죠.자세한 것은 송기호 교수님의 '황제 칭호와 관련된 발해 사료들' 글을 참조하세요.

10.발해 1대부터 15대까지의 왕15명이 매우 궁금합니다.
발해왕이 몇 명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위해의 경우 20세기에 들어와 김육
불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사실상 13대왕 대현석 이후 인선왕까지 그 사이에 몇 명의 왕이 더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당이 멸망하면서 중국측에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발해가 남긴 사료도 없기 때문입니다.

11.발해가 있는데 왜 '통일 신라' 라는 명칭을 사용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은 어느 정도 정착 되었지만,단일 명칭이 통일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삼국 시대의 신라와 통일 이후의 신라 명칭을 구분해야 하는데 아직 공식적으로 학계에서 합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오래전에 '후기신라'라는 명칭으로 통일 신라 시대를 대신했으며 남한에
서는 한규철 교수님께서 '대신라'로 제안했습니다.즉,통일신라시대 대신에 '대신라'
라는 시대 명칭을 제안한 것이죠.

12.5천년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발해는 다민족 국가인가요?
사실상 한국 역사는 단일 민족사의 역사가 아닙니다.현재 우리는 국민과 민족을 혼동하고 있습니다.ethnic group(민족) 하고 nation(국민) 의 혼동입니다.하지만 민족과 국민은 엄연히 다릅니다.중국을 보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다양한 55개의 민족이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아래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고려 이후 중앙 집권화된 국가에서 강력한 통합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 차이를
모르는 것입니다.처음으로 민족이라는 의식을 심어 준 것이 몽고의 침략입니다.
당시에 많은 역사서들이 집필된 이유도 몽고의 침략으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고조선 이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민족 통합을 강력히 추구하신 분은 다름아닌 세종대왕입니다.한글이라는 문자 자체가
중국과의 차별성을 둔 것이고 압록.두만강에 방어진들을 구축하여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구분 지어 버렸습니다.특히 이 민족의 풍습을 금지시켜 많은 위구르인과 한족들이 조선인으로 동화 되어 버렸죠.
처음부터 韓민족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수백,수천의 민족이
있었는데 이것을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가 통합했으며 다시 발해와 신라, 고려-조선
으로 이어지면서 지금의 한국인과 한민족이 생긴 것입니다.
발해에는 고구려인,말갈인 뿐만 아니라 소그드인,한인,거란인 등 다양한 민족이 살았습니다.
9세기 이후 중앙 정부의 강력한 통합 정책으로 어느정도 단일화된 발해인이 나타납니다.
동화가 된 것이죠.중요한 것은 민족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민족은 국수주의와 배타성을 증폭시키기 때문이죠.

13.발해가 중국,한반도 남쪽으로 진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 발해가 있었던 지역은 북방 지역으로 상당히 추운 지역입니다.하지만 발해가 북쪽 지역에서 문화의 꽃을 피우고 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발해가 존재할 시기에 지구 온난화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런 기후의 영향으로 발해 지역에서 농사나 작물 생산이 가능했던 것입니다.만약 한랭기의 시기에 발해가 존재 했다면 발해는 한반도 내로 중심 수도를 옮기던가 아님 신라와 전쟁을했을 것입니다.발해는 자체 생산력만으로 식량을 해결하는데 충분하여 남쪽이나 중국으로 진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4.발해의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가 아닌 만주사가 아닐까요?

박시형 교수님께서 중국 학술회의에서 영토가 바뀐다고 역사까지 바뀌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당시 학술회의는 중국과 북한 학자들의 논쟁으로 인해서 엉망으로 되어
버렸죠.
비록 중국,러시아가 옛 발해 영토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지만 발해사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귀속시키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집니다.
발해 이후에 일어난 금이나 청나라는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으로 진출하였기에 중국 왕조의 한 부문으로 남았습니다.그래서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하지만 발해는
만주에서 일어나 만주에서 멸망합니다.중국의 역사가 아닌 것입니다.고구려도 같은
경우이죠.
후대의 역사 인식도 중요합니다.후금이나 청은 발해가 자신들의 원류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사서 하나 남기지 않습니다.하지만 조선에서는 중국보다 200년 이상 앞서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합니다.
유득공 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 실학자들이 발해사를 저술합니다.이것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역사 인식에 대한 변화 때문입니다.영.정조 시대에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구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실학자들은 자연히 발해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실학자들의 발해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는 바로 발해가 선조의 국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조선 전기와는 다른 역사 인식의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중국은 20세기에 들어와 발해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현재 중국인과 한국인 중에서 발해에 대한 귀속 의식은 한국인이 훨씬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그리고 영순태씨,협계 태씨 등 대조영의 후예라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중국 지역에는 없습니다.

15.발해 시대에 존재한 소고구려국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고구려인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서 당나라는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추구합니다.그래서 자신들의 괴뢰 정권을 요동에 세웁니다.677년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으로 봉해 신성으로 보내서 고구려인을 회유한 것이죠.
당시 보장왕은 당의 의도와 다르게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자 했으나 당에 발각되어 잡혀가 주로 귀양을 갑니다.그리고 682년 보장왕은 서거합니다.686년 당나라는 손자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봉하고 요동 지역의 통치를 맡깁니다.이 시기의 고구려를 소고구려라고 부릅니다.
당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소고구려는 독립적인 정치 세력을 유지하지만 발해 문왕대에
들어와 흡수됩니다.하지만 소고구려는 발해의 번국으로 인정되었나 봅니다.10세기
초까지 여러 사료에 고려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죠.당회요나 책부원귀에 보면 고려가
당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나오는데,이 당시의 고구려는 소고구려를 지칭합니다.
소고구려의 영토는 황해 북부,평안.남북도,요동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수도는
신의주의 국내성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자세한 것은 얼마전 천지출판에서 나온 '자주
독립국 발해'라는 책 속에 장학종 교수님의 "고려 후국의 수도와 그 존립에 대해서" 논문을 참조하세요.

16.발해의 옛 터에서 일어난 금나라는 한국사가 아닌가요?
금나라가 고구려.발해처럼 만주에서 흥망했다면 한국사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중국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한 왕조로 풍미했습니다.또한 이 당시의 여진족들은 많이 이질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비록 같은 원류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활,풍습,언어 등이 달라지면서 분파 되었습니다.금의 황실이 발해와의 연관성은 가지고 있지만,이것만으로 한국사로 귀속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17.발해는 여권이 강한 사회였는지요?
발해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고 봅니다.정효공주묘지문에는 발해 사회에 유교적인 경향이 나타나지만,유교는 발해 사회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현재와 같은 남녀 평등 사회를 접목하기에는 힘들지만 가족 구성에서 일부일처제가 기본이었습니다.이것은 발해 무덤 발굴에서 확인되는데,보통 중앙에 주인공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송 시대때 쓰여진 [송막기문]에는 발해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부인들은 모두 사납고 투기가 심하다.대씨는 다른 성씨와 서로 맺어 10자매를 이루었는데,번갈아 남편을 감시하여 남편이 측실(첩)을 두는 것과 다른 여자와의 연애(교유)를 용납하지 않는다.만일 이런 일이 알려지면 반드시 독을 넣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도록 꾀한다.한 남편이 범한 바가 있어 아내가 알지 못하더라도, 9인이 모두 일어나 그를 꾸짖으면서 다투어 증오하는 것을 서로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거란,여진의 여러 나라에는 모두 여창(창녀)이 있고 낭인(일반사람)들은 모두 소부(첩),시종(몸종)들을 가지고 있으나,오직 발해에는 이들이 없다." -역 송기호 교수님-
우리나라 고대 국가에서 여창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신라 시대때 김유신이 간 곳이창가였는지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발해 사회에서는 위의 사료를 참조했을때,발해시대에는 매춘이라는 것이 존재 하지 않았으며 첩 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상상을 못했다는 것이겠죠.
송막기문에 나오는 내용은 발해 지배층의 생활상입니다.성을 가진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집단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간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홍라녀'에 대한 기사입니다.'홍라녀'에 대한 많은 전설이 있기에 우리는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홍라녀가 전사가 되어 적을 공격하여 승리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우리 역사에서 여자가 장군이 되어 적을 물려쳤다는 것은 민간 전설에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홍라녀는 국왕을 대신해서 적(거란)과 싸워 물리치고,남편을 구해 온다는 내용이 중국 동북부 조선족에 전설로 내려옵니다.위의 사실을 종합한다면,발해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고 봅니다. 발해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서 조선 중기 이전에는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는데,이것은 북방 민족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고려 시대에도 여성들은 재산권 및자식들이 어머니 성을 따르는 사실 등 여성의 지위를 엿볼수 있는 자료가 많습니다.

18.발해와 신라의 뱃길의 역사를 알고 싶습니다.

포시에트만 근처에서 사암으로 만든 불상이 발견 되었는데,그 형태가 신라의 불상과 비슷하여 신라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또한 도장에 나오는 이광현의 이야기를 봤을때 발해-신라간의 해양 교류는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10세기 초에 발해는 신라와 결속을 맺습니다.당시 한반도 중부 지역은 고려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염주(현 포시에트만)와 경주를 잇는 해상 루트를 이용하여 외교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합니다.
장보고의 해상세력과 9세기 발해의 국제상인단과의 연관성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아직은 자료가 부족하여 자세히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19.발해가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을 알고 싶습니다.
일본 문인들은 발해 사절단을 크게 환영했습니다.아마도 섬이라는 고립된 지역의 특성
때문이겠죠.중국과 인접한 발해인들이 일본에 오는 것은 자신들이 직접 외국인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발해 대사들의 한시 수준은 매우 높아 일본 문인들이 감탄할 정도였으며 종종 자신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도 했답니다.
발해는 26회 발해 사절단때 일본에 "장경선명력"을 전해주었는데,일본에서는 이것을 16
84년까지 사용하였으며,27회 발해사절단 때에는'불정존승다라니경'을 전하여 현재,일본 석산사에 남아 있습니다.발해에서 전래된 발해악은 지금도 '아야키리'로 아악의 상연 종목으로 남아 있습니다.

20.유득공의 발해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유득공은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자신이 규장각에 있을때 쓴 책이 바로 발해고입니다.
1784년에 유명한 발해고 서문을 썼는데,이 서문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역사상 처음으로 남북국 시대를 제창한 사람이며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성시켜 독자적인 역사서로 저술했던 분입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유득공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만 한국 역사가에서 유득공이 없었더라면 발해사는 한국사의 한 영역으로 평가 받기가 불가능 했습니다.본문에 들어가면 군고(왕에 대한 고찰 ),신고(신하에 대한 고찰),지리고(지리에 관한 고찰),직관고(관청 및 관직에 대한 고찰),의장고(의식 및 복장에 관한 고찰),물산고(물산에 관한 고찰),국어고 (국어에 관한 고찰),국서고 (국서에 관한 고찰),속국고(후국에 관한 고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년 초에 송기호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발해고가 출판 되었습니다.일반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으며 역사학도나 발해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뒷 부문에 원문도 있습니다.
유득공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신 분은 정진헌 선생님이 쓰신 '실학자 유득공의 고대사 인식'이라는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신선원에서 나왔습니다

21. 발해의 영토는 가장 넓었을 때 어느 정도였습니까?
발해의 영토는 전성기일때 사방 5천리였다고 합니다.동쪽으로 연해주 지역을 포함해서 아무르 강까지,서쪽으로 요동 지역,남쪽으로 대동강,원산 이남(강릉이 신라와의 경계선이라는주장도 있습니다) 북쪽으로 송화강 이북의 흑수말갈까지 복속시켰습니다.
고구려보다 훨씬 넓은 영토에 5경 15부 62주를 설치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보여 줍니다.
물론 지방 수령들은 발해의 지방 관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죠.

22. 발해가 요동지역을 차지했었는지의 여부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발해가 요동 지역을 점령했다고 보는 학자는 많습니다.하지만 요동반도 끝까지 발해 영토였는지 논란이 남아 있습니다.이미 10세기 초에 발해와 요는 요동을 두고 치열한 전투를 합니다.결국 발해가 요동을 잃게 됩니다.요사 기록을 살펴 본다면 발해가 요동을 점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3. 발해 장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발해의 유명한 장군은 장문휴 대장이겠죠.당의 등주를 기습한 어쩌면 우리 나라 역사상
수군으로 해외 정벌을 지휘했던 첫 장군입니다.그리고 한단 고기 대진국 본기에 전하는 수비 장수 출신인 연충린 장군도 있지만 위서 논쟁으로 인해서 이 분이 실존한 인물인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대진국 본기에는 마도산 전투에서 발해군을 이끌었던 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 사신으로 간 무관 출신 명단을 제외하고,나머지 전하는 장군 이름이 없습니다.최근,고고학에서 발견된 장군 이름도 있습니다.러시아 니꼴라예브까성에서 발견된 청동 부절에 좌효위장군 '섭리계'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도 있었습니다.이 성의 성주겠죠.
이 밖에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발해 멸망시에 3일 동안 부여성 방어 전투를 지휘한 성주,924년 요나라의 요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장군,문왕이나 선왕 시대때 정벌 전쟁에 참가한 장군,장군은 아니지만 멸망 후 요와의 전쟁을 6개월간 이끌었던 장령부 도독,기병대 7천을 이끌고 요와 싸운 압록부,장령부,남해부,안변부,정리부 도독,포로로 잡혀 참살당한안변부 두 장수,철주 자사 항쟁 등 이름이 전해 지지 않는 장군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장군 밑에 있는 일반 병사들의 공이 훨씬 크다고 봅니다.전쟁에서 장군 혼자 싸우는 것은 아니겠죠.

24.발해수군을 지휘했던 장문휴 대장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대장이라는 직책과 무왕의 명을 받고 발해 수군을 이끌고 당의 등주성을 기습하여 함락시킨 후 철수했다는 기록 외에 다른 부분은 알수가 없습니다.추측한다면 장문휴 대장(중국에서는 해적 두목으로 봅니다.)은 발해를 건국시킨 대조영의 부장 출신일지도 모르죠.전쟁의 경험 없이 당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모할 것이고,발해 최고의 군사 작전에서 경험이많은 노이 전투를 지휘했을 거라고 봅니다.아마도 장문휴는 옛 고구려 해양 세력의 출신이 아닐까 싶습니다.바다를 아는 사람만이 당의 등주를 기습할 수 있겠죠.물론 이건 제 추측일 뿐입니다.

25.발해에서 쓰던 무기 방어구 공성용무기 계열체계 진형, 기타등등이 궁금합니다.
발해 중앙 군대는 10위가 있었습니다.좌맹분위,우맹분위,좌비위,우비위,좌웅위,우웅위,남좌위,남우위,북좌위,북우위입니다.이 곳에 대장군 1명,장군 1명이 배치 되었죠.하지만 신당서 발해전에 나오는 이 발해 군사 제도는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었을 것입니다.
고려로 망명한 좌수위 소장 모두간이나,일본에 파견된 낭장 고인 등 별도의 명칭이 많이 남아 있지만 어느 소속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발해가 쓰는 무기.방어구 등은 고구려 시대와 비슷하겠죠.사료에 자세히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발견되고 있는 유물 등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수도를 다섯 군데로 분산시켜 방어력을 높이고자 했으나 상경 지역은 산성과 평지성의 이원적 방어 체제가 아니라서 문제점을 많이 노출 시켰습니다.외성이 너무 길다 보니 어느 한 부분이 뚫히면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26.발해 5경의 위치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현재 논란이 되는 곳이 서경 압록부와 동경 용원부입니다.나머지 3경의 위치는 학계에서어느 정도 합의가 되었습니다.서경 압록부의 경우 대체적으로 임강진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지만 발견되는 유물.유적이 적어서 이 곳에 수도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집안 지역을 서경으로 보기도 하며,집안에서 임강진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동경의 경우 훈춘의 팔련성으로 보지만 북한 학계는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부거석성을 동경용원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북한 학계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기에 앞으로의 고고학적 발굴에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27.발해의 탑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발해 시대 탑의 경우 영광탑이 완벽하게 남아 있습니다.이 외에 정효공주 무덤 위에 탑이 존재했으며,1920년대까지 남아 있었던 훈춘의 마적달탑입니다.안타깝게도 이 마적달탑을찍은 사진이 없기에 그 형태를 알 수 없습니다.어떤 학자는 이 마적달탑을 문왕의 아들인 대굉림을 위해 건설한 탑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발해 탑의 특징은 무덤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지궁이라는 무덤칸이 있는데 이것은 발해의 독특한 형태입니다.그리고 전탑 위주입니다.한반도 남부가 화강암을 사용한 석탑 위주에 반해서 발해는 전탑 중심이었습니다.이것은 환경의 영향이 아닐까 싶네요.

28.발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24괴석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24괴석이 발견되고 있습니다.주춧돌입니다.연변대학에서 나온 발해사 연구2에 보시면 이 주춧돌에 대한 보고서와 논문이 있습니다.하지만 이 24괴석 위에 있던 건축물이 어떤 용도였는지 아직 명확히 밝혀 지지 않았습니다.종교적인 의미에서,관아에서 사용된 건축물,곡식창고까지 다양합니다.공통된 점이라면 이 괴석이 발견되는 곳이 성입니다.즉,발해 시대 행정 중심지이던 성에서 발견되는 만큼 공공성을 띈 건축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29.발해 정혜 공주 무덤의 형태를 알고 싶습니다.
정혜 공주묘의 건축 양식은 완전한 고구려식 돌방 무덤(석실봉토분)입니다.무덤 앞에 벽돌이 깔려 있는 무덤길이 있으며,여기서 널길을 통해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천정은 고구려 무덤에서 특징적인 각을 줄여 쌓는 고임천정 방식입니다.정혜 공주는 777년,정효 공주는 792년에 사망하였는데 불과 15년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정효 공주묘는 대부분 당나라 형식입니다.천정 구조만 제외하면,전탑 형식에 당 화풍의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문왕 초기까지 고구려 전통이 강했지만,문왕 중기에 들어서면서 적극적인 당 문화 수용의 영향으로 무덤에도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30.발해 정효공주 무덤의 정확한 형태를 알고 싶습니다.
정효공주 묘는 계단식 벽돌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돌방무덤이라고 하기에는 정혜 공주묘와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정혜공주묘는 완전한 고구려식 돌방무덤이지만, 정효공주묘는 벽돌과 돌로 쌓았습니다.현실을 벽돌로 쌓아서 당나라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천장은 고구려 방식으로,무덤 위에 벽돌탑이 있는 것은 발해 고유의 특징입니다.
계단으로 통해서 현실로 들어가기 때문에,굴식일 경우 지면과 수평으로 판 널길을 통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굴식은 아닙니다.그렇다고 돌방무덤(석실봉토분)이라고 하기에는 정효공주묘는 탑 아래 무덤이 있기 때문에 굴식 돌방 무덤은 아닙니다.벽돌 무덤에 가깝다고 봅니다.물론,고구려.당.발해적 요소가 모두 섞힌 독특한 무덤 양식이지만,당나라 요소가 강합니다.벽화 역시 당풍이 강하죠

간략한 발해의 역사들...
당에 끌려갔던 대조영의 탈롤로 당의 추격군을 격파하며 동쪽으로 이동.
고구려인(지배층) + 말갈인(피지배층)
고구려의 부흥 운동의 과정에서 성립.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발해를 고구려라함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요약해 올려달라고 하는 님이 원하는데로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라고 아주 세세하게 답변 올립니다.
님 무작정 백과사전싸이트에서 배껴오는 플레이는 저도 하기 싫은데
자세한 답변을 요구하셔서 죄송합니다
어느님이 다른님에게 자세히 발해에 대해서 이렇게 글을 올려놓았기에 좋은거 같아서 이렇게 전부다 복사해 많은 양을 오려드리오니 눈이 많이 아프셔도 천천 읽어보시죠
1.발해 대조영은 성이 대씨인데 왜 왕호는 고왕인가요?

조영의 성은 대씨입니다.하지만,대조영의 왕호가 高王 이라서 여러 추측이 있습니다.
즉,대조영의 원래 성씨가 고씨인데,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면서 성씨를 바꾸었다는 주장있습니다.아마도 대조영은 옛 고구려 왕족이나 귀족 출신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물론,전해지는 사료가 없어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수가 없습니다.왕호를 보고 추측한 것이지요.

2.발해 건국시 이름이 진이었다고 하는데 그 연원 및 왜 이름을 진에서 발해로 바꾸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발해가 건국할 당시에는 진국이라는 국명을 썼습니다.진(振)은 진(震)이라고도 합니다.
진은 주역에 황제가 동방에서 나왔다는 진괘에서 유래된 것입니다.(稱葉岩吉) 구당서
권 199 발해말갈전을 보면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진국왕이 되었다.." (自立爲振國王)에 진국이 나옵니다.발해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713년 당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이라고 책봉한 이후,국명을 바꾸었다고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발해 스스로 국명을 바꾸어 당에 통보한 식으로 생각합니다.
즉,국력이 강성함에 따라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죠.이런 경우가 바로 후대의 조선인데,
국명을 미리 정한 후 명나라에 선택권을 줍니다.당연히 명나라는 조선이 선택한 국명을 따르겠죠.중국 학계는 책봉으로 인해서 국명 변경을,북한 학계는 발해 스스로 국명을 바꾸었다고 보고 있습니다.한국 학계는 아직 명확한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연구자에 따라서 시각이 다릅니다.

3.무왕때 보낸 사신의 국서에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유습(풍속)을 계승하였다"

일본 사서인 속일본기 권10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復高麗之舊居,有扶餘之遺俗 부문이죠.
무왕이 727년에 보낸 국서 내용인데,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요구하는 국서입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고립된 정세를 벗어나기 위해서,무왕은 일본을 선택했고 그렇기에
국서의 내용은 일본과의 좋은 관계를 수립하고자 무왕이 바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물론 발해의 건국도 알리고 있는데 발해가 여러 번국들을 주관하고 부여-고구려를 잇는 정통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국서의 자세한 내용은 발해 서적을 참조하세요.

4.727년 일본과 발해외교관계가 시작된 후에733년에 나,당관계가 안정되었다고 하는데
어떤 형태의 안정이었을까요?
동해의 등주 공격으로 인해서 당-신라의 관계는 자연스레 복원 되었습니다.나.당 전쟁 이후 양국은 최악의 상황까지 갔지만 발해로 인해서 연합군을 형성했습니다.733년 신라군이 발해의 남부 지역을 공격합니다.물론 실패로 끝나죠.이후 당나라는 대동강 이남의 영역을 신라 영토로 공식적으로 인정해 줍니다.

5.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라는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발해 문왕은 일본에 국서를 보내면서 스스로 천손이라고 했습니다.일본 정부에서는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문왕은 나아가 발해-일본 관계를 장인과 사위의 관계로 설정
하였습니다.한편으로 국서 없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전달하는 등 국력에 따른 자신감을 표출했습니다.
1988년 북한의 오메리 절터에서 고구려 금동판이 발견되기 전까지 발해 문왕이 쓴 천손이 당나라 또는 일본의 천제,천황을 모방했다고 생각했으나 이 금동판에서 천손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발해 왕실이 고구려 왕실을 계승했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미 모두루 묘지나 광개토대왕비문 등에 고구려 왕실을 하늘의 자손이라고 표현하였죠.결국,발해 왕실도스스로 천손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6.발해 3대 문왕이 쓴 연호가 대흥이라고 하는데,연호에 대해서 설명해 주세요.
문왕의 대흥이라는 연호는,정효 공주 묘지문에서 다시 확인 되었습니다.
大興은 '크게 흥하다' 라는 뜻처럼 문왕은 56년의 통치 기간 동안 발해라는 국가를 크게 발전시켰습니다.정효 공주 묘지문에 보면 "...부왕 때에 와서는 국세가 강성해지고 나라의 운명이 장구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문왕의 연호를 잘 대변해 줍니다.
그리고 대흥 이외에 묘지문에서 확인된 것이,보력이라는 또다른 연호입니다.언제부터
썼는지 모르겠지만,중간에 보력이라는 연호를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7.발해 통치 조직 중 6부와 왕권 강화의 관계를 알고 싶습니다.
6부의 중앙 관청은 현재 행정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문.무 관리를 등용하고,조세 및,군사,법률 등 왕권과 결부되는 곳입니다.중앙 관청의
힘은 곧 왕권의 힘입니다.중앙 정부가 힘이 없다면,왕권은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겠죠.

8.발해는 여러번 수도를 옮겼다고 들었습니다.설명해 주세요.
문왕대에 대부분 수도를 옮겼습니다.742년 문왕은 구국에서 수도를 중경현덕부로 옮겼
습니다.해란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개발하여 경제력을 확보하고 정치적으로도 새롭게
시작할려고 했습니다.
755년 문왕은 상경용천부로 수도를 옮깁니다.이 시기에는 안사의 난으로 인해서 수도 방위 의 중요성 때문에 상경으로 이동했다고 생각됩니다.다시 30년 뒤 문왕은 동경용원부로 수도를 옮기는데 아마도 문왕 말기에 접어들면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시키고 일본과의 관계를 중요시 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동경에서 다시 상경으로 돌아옵니다.794년에 성왕에 의해서 다시 수도를
천도하여 상경용천부가 발해 멸망 시까지 중심 수도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9.발해는 황제국가였나요?
국제적으로는 당의 질서에 편입 되어 있었지만 내부적으로 황제 체제를 유지한 것 같습니다.
독자적 연호 사용과 더불어 정혜,정효 공주 묘지문에 나오는 황상 같은 경우에는 문왕을 황제로 여겼기 때문입니다.함화 4년명에 나오는 허왕부라는 존재와 발해 3성 중에 하나인 선조성을 보면 詔 의 경우 황제의 명령을 의미합니다.敎는 한 단계 아래인 왕이 사용하는 용어이죠.자세한 것은 송기호 교수님의 '황제 칭호와 관련된 발해 사료들' 글을 참조하세요.

10.발해 1대부터 15대까지의 왕15명이 매우 궁금합니다.
발해왕이 몇 명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위해의 경우 20세기에 들어와 김육
불에 의해서 밝혀졌습니다.사실상 13대왕 대현석 이후 인선왕까지 그 사이에 몇 명의 왕이 더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당이 멸망하면서 중국측에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고 발해가 남긴 사료도 없기 때문입니다.

11.발해가 있는데 왜 '통일 신라' 라는 명칭을 사용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은 어느 정도 정착 되었지만,단일 명칭이 통일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삼국 시대의 신라와 통일 이후의 신라 명칭을 구분해야 하는데 아직 공식적으로 학계에서 합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오래전에 '후기신라'라는 명칭으로 통일 신라 시대를 대신했으며 남한에
서는 한규철 교수님께서 '대신라'로 제안했습니다.즉,통일신라시대 대신에 '대신라'
라는 시대 명칭을 제안한 것이죠.

12.5천년 단일민족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발해는 다민족 국가인가요?
사실상 한국 역사는 단일 민족사의 역사가 아닙니다.현재 우리는 국민과 민족을 혼동하고 있습니다.ethnic group(민족) 하고 nation(국민) 의 혼동입니다.하지만 민족과 국민은 엄연히 다릅니다.중국을 보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다양한 55개의 민족이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아래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고려 이후 중앙 집권화된 국가에서 강력한 통합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 차이를
모르는 것입니다.처음으로 민족이라는 의식을 심어 준 것이 몽고의 침략입니다.
당시에 많은 역사서들이 집필된 이유도 몽고의 침략으로 인한 아픔을 치유하고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고조선 이래 유구한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민족 통합을 강력히 추구하신 분은 다름아닌 세종대왕입니다.한글이라는 문자 자체가
중국과의 차별성을 둔 것이고 압록.두만강에 방어진들을 구축하여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구분 지어 버렸습니다.특히 이 민족의 풍습을 금지시켜 많은 위구르인과 한족들이 조선인으로 동화 되어 버렸죠.
처음부터 韓민족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수백,수천의 민족이
있었는데 이것을 고구려,백제,신라 세 나라가 통합했으며 다시 발해와 신라, 고려-조선
으로 이어지면서 지금의 한국인과 한민족이 생긴 것입니다.
발해에는 고구려인,말갈인 뿐만 아니라 소그드인,한인,거란인 등 다양한 민족이 살았습니다.
9세기 이후 중앙 정부의 강력한 통합 정책으로 어느정도 단일화된 발해인이 나타납니다.
동화가 된 것이죠.중요한 것은 민족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에 의미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민족은 국수주의와 배타성을 증폭시키기 때문이죠.

13.발해가 중국,한반도 남쪽으로 진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재 발해가 있었던 지역은 북방 지역으로 상당히 추운 지역입니다.하지만 발해가 북쪽 지역에서 문화의 꽃을 피우고 강국으로 성장한 것은 발해가 존재할 시기에 지구 온난화의 영향 때문입니다.
이런 기후의 영향으로 발해 지역에서 농사나 작물 생산이 가능했던 것입니다.만약 한랭기의 시기에 발해가 존재 했다면 발해는 한반도 내로 중심 수도를 옮기던가 아님 신라와 전쟁을했을 것입니다.발해는 자체 생산력만으로 식량을 해결하는데 충분하여 남쪽이나 중국으로 진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4.발해의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가 아닌 만주사가 아닐까요?

박시형 교수님께서 중국 학술회의에서 영토가 바뀐다고 역사까지 바뀌지 않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당시 학술회의는 중국과 북한 학자들의 논쟁으로 인해서 엉망으로 되어
버렸죠.
비록 중국,러시아가 옛 발해 영토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지만 발해사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귀속시키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집니다.
발해 이후에 일어난 금이나 청나라는 만주에서 일어나 중국으로 진출하였기에 중국 왕조의 한 부문으로 남았습니다.그래서 중국의 역사가 될 수 있습니다.하지만 발해는
만주에서 일어나 만주에서 멸망합니다.중국의 역사가 아닌 것입니다.고구려도 같은
경우이죠.
후대의 역사 인식도 중요합니다.후금이나 청은 발해가 자신들의 원류라고 생각하면서도
역사서 하나 남기지 않습니다.하지만 조선에서는 중국보다 200년 이상 앞서 유득공이
발해고를 저술합니다.
유득공 뿐만 아니라 많은 조선 실학자들이 발해사를 저술합니다.이것은 18세기 조선 사회의 역사 인식에 대한 변화 때문입니다.영.정조 시대에 북방 영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고구려 역사에 관심을 가진 실학자들은 자연히 발해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실학자들의 발해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는 바로 발해가 선조의 국가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조선 전기와는 다른 역사 인식의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중국은 20세기에 들어와 발해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현재 중국인과 한국인 중에서 발해에 대한 귀속 의식은 한국인이 훨씬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그리고 영순태씨,협계 태씨 등 대조영의 후예라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중국 지역에는 없습니다.

15.발해 시대에 존재한 소고구려국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고구려인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서 당나라는 직접 통치가 아닌 간접 통치를 추구합니다.그래서 자신들의 괴뢰 정권을 요동에 세웁니다.677년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으로 봉해 신성으로 보내서 고구려인을 회유한 것이죠.
당시 보장왕은 당의 의도와 다르게 독립적인 세력을 키우고자 했으나 당에 발각되어 잡혀가 주로 귀양을 갑니다.그리고 682년 보장왕은 서거합니다.686년 당나라는 손자 고보원을 조선군왕으로 봉하고 요동 지역의 통치를 맡깁니다.이 시기의 고구려를 소고구려라고 부릅니다.
당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소고구려는 독립적인 정치 세력을 유지하지만 발해 문왕대에
들어와 흡수됩니다.하지만 소고구려는 발해의 번국으로 인정되었나 봅니다.10세기
초까지 여러 사료에 고려의 이름이 나오기 때문이죠.당회요나 책부원귀에 보면 고려가
당에 사신을 파견했다고 나오는데,이 당시의 고구려는 소고구려를 지칭합니다.
소고구려의 영토는 황해 북부,평안.남북도,요동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수도는
신의주의 국내성으로 비정하고 있습니다.자세한 것은 얼마전 천지출판에서 나온 '자주
독립국 발해'라는 책 속에 장학종 교수님의 "고려 후국의 수도와 그 존립에 대해서" 논문을 참조하세요.

16.발해의 옛 터에서 일어난 금나라는 한국사가 아닌가요?
금나라가 고구려.발해처럼 만주에서 흥망했다면 한국사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중국으로 진출하여 중국의 한 왕조로 풍미했습니다.또한 이 당시의 여진족들은 많이 이질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비록 같은 원류에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활,풍습,언어 등이 달라지면서 분파 되었습니다.금의 황실이 발해와의 연관성은 가지고 있지만,이것만으로 한국사로 귀속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17.발해는 여권이 강한 사회였는지요?
발해 사회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고 봅니다.정효공주묘지문에는 발해 사회에 유교적인 경향이 나타나지만,유교는 발해 사회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습니다.현재와 같은 남녀 평등 사회를 접목하기에는 힘들지만 가족 구성에서 일부일처제가 기본이었습니다.이것은 발해 무덤 발굴에서 확인되는데,보통 중앙에 주인공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남송 시대때 쓰여진 [송막기문]에는 발해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부인들은 모두 사납고 투기가 심하다.대씨는 다른 성씨와 서로 맺어 10자매를 이루었는데,번갈아 남편을 감시하여 남편이 측실(첩)을 두는 것과 다른 여자와의 연애(교유)를 용납하지 않는다.만일 이런 일이 알려지면 반드시 독을 넣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도록 꾀한다.한 남편이 범한 바가 있어 아내가 알지 못하더라도, 9인이 모두 일어나 그를 꾸짖으면서 다투어 증오하는 것을 서로 자랑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거란,여진의 여러 나라에는 모두 여창(창녀)이 있고 낭인(일반사람)들은 모두 소부(첩),시종(몸종)들을 가지고 있으나,오직 발해에는 이들이 없다." -역 송기호 교수님-
우리나라 고대 국가에서 여창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신라 시대때 김유신이 간 곳이창가였는지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발해 사회에서는 위의 사료를 참조했을때,발해시대에는 매춘이라는 것이 존재 하지 않았으며 첩 제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남자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상상을 못했다는 것이겠죠.
송막기문에 나오는 내용은 발해 지배층의 생활상입니다.성을 가진다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집단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간전설로 전해 내려오는 '홍라녀'에 대한 기사입니다.'홍라녀'에 대한 많은 전설이 있기에 우리는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홍라녀가 전사가 되어 적을 공격하여 승리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우리 역사에서 여자가 장군이 되어 적을 물려쳤다는 것은 민간 전설에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홍라녀는 국왕을 대신해서 적(거란)과 싸워 물리치고,남편을 구해 온다는 내용이 중국 동북부 조선족에 전설로 내려옵니다.위의 사실을 종합한다면,발해에서 여성의 지위는 상당히 높았다고 봅니다. 발해 뿐만 아니라 한국사에서 조선 중기 이전에는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는데,이것은 북방 민족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고려 시대에도 여성들은 재산권 및자식들이 어머니 성을 따르는 사실 등 여성의 지위를 엿볼수 있는 자료가 많습니다.

18.발해와 신라의 뱃길의 역사를 알고 싶습니다.

포시에트만 근처에서 사암으로 만든 불상이 발견 되었는데,그 형태가 신라의 불상과 비슷하여 신라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또한 도장에 나오는 이광현의 이야기를 봤을때 발해-신라간의 해양 교류는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10세기 초에 발해는 신라와 결속을 맺습니다.당시 한반도 중부 지역은 고려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염주(현 포시에트만)와 경주를 잇는 해상 루트를 이용하여 외교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합니다.
장보고의 해상세력과 9세기 발해의 국제상인단과의 연관성도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아직은 자료가 부족하여 자세히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19.발해가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을 알고 싶습니다.
일본 문인들은 발해 사절단을 크게 환영했습니다.아마도 섬이라는 고립된 지역의 특성
때문이겠죠.중국과 인접한 발해인들이 일본에 오는 것은 자신들이 직접 외국인과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발해 대사들의 한시 수준은 매우 높아 일본 문인들이 감탄할 정도였으며 종종 자신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도 했답니다.
발해는 26회 발해 사절단때 일본에 "장경선명력"을 전해주었는데,일본에서는 이것을 16
84년까지 사용하였으며,27회 발해사절단 때에는'불정존승다라니경'을 전하여 현재,일본 석산사에 남아 있습니다.발해에서 전래된 발해악은 지금도 '아야키리'로 아악의 상연 종목으로 남아 있습니다.

20.유득공의 발해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유득공은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자신이 규장각에 있을때 쓴 책이 바로 발해고입니다.
1784년에 유명한 발해고 서문을 썼는데,이 서문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역사상 처음으로 남북국 시대를 제창한 사람이며 발해사를 한국사로 편성시켜 독자적인 역사서로 저술했던 분입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유득공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만 한국 역사가에서 유득공이 없었더라면 발해사는 한국사의 한 영역으로 평가 받기가 불가능 했습니다.본문에 들어가면 군고(왕에 대한 고찰 ),신고(신하에 대한 고찰),지리고(지리에 관한 고찰),직관고(관청 및 관직에 대한 고찰),의장고(의식 및 복장에 관한 고찰),물산고(물산에 관한 고찰),국어고 (국어에 관한 고찰),국서고 (국서에 관한 고찰),속국고(후국에 관한 고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년 초에 송기호 교수님께서 번역하신 발해고가 출판 되었습니다.일반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으며 역사학도나 발해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뒷 부문에 원문도 있습니다.
유득공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신 분은 정진헌 선생님이 쓰신 '실학자 유득공의 고대사 인식'이라는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신선원에서 나왔습니다

21. 발해의 영토는 가장 넓었을 때 어느 정도였습니까?
발해의 영토는 전성기일때 사방 5천리였다고 합니다.동쪽으로 연해주 지역을 포함해서 아무르 강까지,서쪽으로 요동 지역,남쪽으로 대동강,원산 이남(강릉이 신라와의 경계선이라는주장도 있습니다) 북쪽으로 송화강 이북의 흑수말갈까지 복속시켰습니다.
고구려보다 훨씬 넓은 영토에 5경 15부 62주를 설치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화를 보여 줍니다.
물론 지방 수령들은 발해의 지방 관리로 임명되어 활동하였죠.

22. 발해가 요동지역을 차지했었는지의 여부를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발해가 요동 지역을 점령했다고 보는 학자는 많습니다.하지만 요동반도 끝까지 발해 영토였는지 논란이 남아 있습니다.이미 10세기 초에 발해와 요는 요동을 두고 치열한 전투를 합니다.결국 발해가 요동을 잃게 됩니다.요사 기록을 살펴 본다면 발해가 요동을 점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3. 발해 장군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발해의 유명한 장군은 장문휴 대장이겠죠.당의 등주를 기습한 어쩌면 우리 나라 역사상
수군으로 해외 정벌을 지휘했던 첫 장군입니다.그리고 한단 고기 대진국 본기에 전하는 수비 장수 출신인 연충린 장군도 있지만 위서 논쟁으로 인해서 이 분이 실존한 인물인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대진국 본기에는 마도산 전투에서 발해군을 이끌었던 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일본 사신으로 간 무관 출신 명단을 제외하고,나머지 전하는 장군 이름이 없습니다.최근,고고학에서 발견된 장군 이름도 있습니다.러시아 니꼴라예브까성에서 발견된 청동 부절에 좌효위장군 '섭리계'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도 있었습니다.이 성의 성주겠죠.
이 밖에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발해 멸망시에 3일 동안 부여성 방어 전투를 지휘한 성주,924년 요나라의 요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킨 장군,문왕이나 선왕 시대때 정벌 전쟁에 참가한 장군,장군은 아니지만 멸망 후 요와의 전쟁을 6개월간 이끌었던 장령부 도독,기병대 7천을 이끌고 요와 싸운 압록부,장령부,남해부,안변부,정리부 도독,포로로 잡혀 참살당한안변부 두 장수,철주 자사 항쟁 등 이름이 전해 지지 않는 장군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장군 밑에 있는 일반 병사들의 공이 훨씬 크다고 봅니다.전쟁에서 장군 혼자 싸우는 것은 아니겠죠.

24.발해수군을 지휘했던 장문휴 대장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대장이라는 직책과 무왕의 명을 받고 발해 수군을 이끌고 당의 등주성을 기습하여 함락시킨 후 철수했다는 기록 외에 다른 부분은 알수가 없습니다.추측한다면 장문휴 대장(중국에서는 해적 두목으로 봅니다.)은 발해를 건국시킨 대조영의 부장 출신일지도 모르죠.전쟁의 경험 없이 당을 공격한다는 것은 무모할 것이고,발해 최고의 군사 작전에서 경험이많은 노이 전투를 지휘했을 거라고 봅니다.아마도 장문휴는 옛 고구려 해양 세력의 출신이 아닐까 싶습니다.바다를 아는 사람만이 당의 등주를 기습할 수 있겠죠.물론 이건 제 추측일 뿐입니다.

25.발해에서 쓰던 무기 방어구 공성용무기 계열체계 진형, 기타등등이 궁금합니다.
발해 중앙 군대는 10위가 있었습니다.좌맹분위,우맹분위,좌비위,우비위,좌웅위,우웅위,남좌위,남우위,북좌위,북우위입니다.이 곳에 대장군 1명,장군 1명이 배치 되었죠.하지만 신당서 발해전에 나오는 이 발해 군사 제도는 시대에 따라서 조금씩 바뀌었을 것입니다.
고려로 망명한 좌수위 소장 모두간이나,일본에 파견된 낭장 고인 등 별도의 명칭이 많이 남아 있지만 어느 소속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발해가 쓰는 무기.방어구 등은 고구려 시대와 비슷하겠죠.사료에 자세히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발견되고 있는 유물 등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고구려와 달리 발해는 수도를 다섯 군데로 분산시켜 방어력을 높이고자 했으나 상경 지역은 산성과 평지성의 이원적 방어 체제가 아니라서 문제점을 많이 노출 시켰습니다.외성이 너무 길다 보니 어느 한 부분이 뚫히면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26.발해 5경의 위치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현재 논란이 되는 곳이 서경 압록부와 동경 용원부입니다.나머지 3경의 위치는 학계에서어느 정도 합의가 되었습니다.서경 압록부의 경우 대체적으로 임강진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지만 발견되는 유물.유적이 적어서 이 곳에 수도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그래서 집안 지역을 서경으로 보기도 하며,집안에서 임강진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동경의 경우 훈춘의 팔련성으로 보지만 북한 학계는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부거석성을 동경용원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북한 학계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기에 앞으로의 고고학적 발굴에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27.발해의 탑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발해 시대 탑의 경우 영광탑이 완벽하게 남아 있습니다.이 외에 정효공주 무덤 위에 탑이 존재했으며,1920년대까지 남아 있었던 훈춘의 마적달탑입니다.안타깝게도 이 마적달탑을찍은 사진이 없기에 그 형태를 알 수 없습니다.어떤 학자는 이 마적달탑을 문왕의 아들인 대굉림을 위해 건설한 탑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발해 탑의 특징은 무덤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지궁이라는 무덤칸이 있는데 이것은 발해의 독특한 형태입니다.그리고 전탑 위주입니다.한반도 남부가 화강암을 사용한 석탑 위주에 반해서 발해는 전탑 중심이었습니다.이것은 환경의 영향이 아닐까 싶네요.

28.발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24괴석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24괴석이 발견되고 있습니다.주춧돌입니다.연변대학에서 나온 발해사 연구2에 보시면 이 주춧돌에 대한 보고서와 논문이 있습니다.하지만 이 24괴석 위에 있던 건축물이 어떤 용도였는지 아직 명확히 밝혀 지지 않았습니다.종교적인 의미에서,관아에서 사용된 건축물,곡식창고까지 다양합니다.공통된 점이라면 이 괴석이 발견되는 곳이 성입니다.즉,발해 시대 행정 중심지이던 성에서 발견되는 만큼 공공성을 띈 건축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29.발해 정혜 공주 무덤의 형태를 알고 싶습니다.
정혜 공주묘의 건축 양식은 완전한 고구려식 돌방 무덤(석실봉토분)입니다.무덤 앞에 벽돌이 깔려 있는 무덤길이 있으며,여기서 널길을 통해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천정은 고구려 무덤에서 특징적인 각을 줄여 쌓는 고임천정 방식입니다.정혜 공주는 777년,정효 공주는 792년에 사망하였는데 불과 15년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정효 공주묘는 대부분 당나라 형식입니다.천정 구조만 제외하면,전탑 형식에 당 화풍의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문왕 초기까지 고구려 전통이 강했지만,문왕 중기에 들어서면서 적극적인 당 문화 수용의 영향으로 무덤에도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30.발해 정효공주 무덤의 정확한 형태를 알고 싶습니다.
정효공주 묘는 계단식 벽돌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돌방무덤이라고 하기에는 정혜 공주묘와 차이가 너무 많이 납니다.정혜공주묘는 완전한 고구려식 돌방무덤이지만, 정효공주묘는 벽돌과 돌로 쌓았습니다.현실을 벽돌로 쌓아서 당나라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천장은 고구려 방식으로,무덤 위에 벽돌탑이 있는 것은 발해 고유의 특징입니다.
계단으로 통해서 현실로 들어가기 때문에,굴식일 경우 지면과 수평으로 판 널길을 통해서 들어가기 때문에 굴식은 아닙니다.그렇다고 돌방무덤(석실봉토분)이라고 하기에는 정효공주묘는 탑 아래 무덤이 있기 때문에 굴식 돌방 무덤은 아닙니다.벽돌 무덤에 가깝다고 봅니다.물론,고구려.당.발해적 요소가 모두 섞힌 독특한 무덤 양식이지만,당나라 요소가 강합니다.벽화 역시 당풍이 강하죠

간략한 발해의 역사들...
당에 끌려갔던 대조영의 탈롤로 당의 추격군을 격파하며 동쪽으로 이동.
고구려인(지배층) + 말갈인(피지배층)
고구려의 부흥 운동의 과정에서 성립.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발해를 고구려라함

발해에 관해 찾아주세요

발해에 관해 자세히 좀 찾아주세요~~ 그럼 감사하겠습니다. 한반도 북부, 만주 동부, 연해주(沿海州)에 걸쳐서 존속한 나라. 고구려가 멸망한 지 약 30년 뒤인 699년에...

백제에 관해 찾아주세요

찾아주세요 저의 숙제 입니다. 해상제국, 백제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황해-발해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황하 중류유역의...

발해의 문화유산

발해의 문화유산 5개만 찾아주세요^^ 사이트도 괜찮구요, 설명할것이 너무 많아서... org/ 여기는 발해에 관해 모두 있는데요,ㅋ 발해 역사, 외교 관계, 만주, 연해주,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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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수행평가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에 관해 발표를... 사진자료도좀 찾아주세요 http://dicimg.naver.com/100/800/43... 되어왔지요 발해도 거란족에게 당하지 않았습니까 . . 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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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와발해에대해 아무거나 선정해서 4컷만화를 그려야해요... 위 네가지를 골라 봤습니다. 역사에 관해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면 네이버 지식IN 흘러라를 찾아주세요~!

우리나라를 빛낸 위인

우리나를 빛낸 위인 좀찾아 주세요...... 단군 - 우리... 대조영 -발해의 시조. 왕호 고왕(재위 699~719). 668년(고구려... 음운에 관해 묻고, 성 삼문과 함께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