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촉사미륵과 석굴암 보존불의 차이점이 뭔가요??

관촉사미륵과 석굴암 보존불의 차이점이 뭔가요??

작성일 2003.11.18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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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가르쳐 주세요.. 학교숙제지만

너무 찾기가 어려워서;;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 보물218호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며 높이가 18m에 이르는데,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寶蓋)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주름선이 간략화되어 단조롭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만든 관음보살상이라 전해지는데, 연대 고찰을 위해 참고할 만하다. 이 보살상은 경기·충청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2.석굴암석굴(石窟庵石窟) : 국보24호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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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 보물218호**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며 높이가 18m에 이르는데,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寶蓋)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주름선이 간략화되어 단조롭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광종 19년(968)에 만든 관음보살상이라 전해지는데, 연대 고찰을 위해 참고할 만하다. 이 보살상은 경기·충청일대에서 특징적으로 조성되었던 토착성이 강한 불상으로, 새로운 지방적 미의식을 나타내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석굴암 본존불**

하나하나의 부분이 생명력을 충만히 간직한 覺의 모습으로 표현된 그 얼굴은 결코 尊嚴하기만 하지도 않으며, 결코 엄숙하기만 하지도 않으며, 인자하고 부드러운 그러나 아무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위엄을 간직하고 있다. ......본존의 모든 표현은 인간적인 기교가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공적인 부자연함이 없이 부드럽게, 넘치는 생명력을 표현하였다. 그 두 팔과 두 손과 跏趺座를 한 두 다리와 무릎과 그 모든 線들이 어느 한 부분도 헛점을 드러내는 곳이 없다.-韓國佛敎硏究院 2, 「석굴암」에서 간추림.

이 石佛坐像은 신라통일 직후인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신라 일대와 그후 高麗 초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좌상의 기본양식을 갖추고 있다.
기본양식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옷차림의 양식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만 감싸는 이른바 '右肩遍袒'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手印인데 오른손이 '降魔觸地印(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땅을 가리켜 부처의 진리를 증명하는 뜻을 지닌 손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본존불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높지도 낮지도 않게 알맞게 솟은 肉 에는 螺髮을 새겼는데 이는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서 들어와 우리나라에서는 8세기에 더욱 유행한 양식이다. 상호는 온화하면서도 깨달은 성자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반쯤 감은 두 눈에는 눈동자를 새겼고 눈두덩은 높이 새겨서 천진한 彫刻線을 나타내고 있다. 비교적 좁은 이마의 한가운데에는 白毫를 나타냈으며, 시원한 콧날과 살짝 미소를 머금은 조그마한 입이 잘 어울려 자비스런 모습을 더욱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두 귀는 길게 늘어져 복스럽다. 三道를 곱게 새긴 목은 살짝 고개 숙인 머리를 잘 받들고 있다.

넓게 벌여진 두 어깨와 봉긋하게 솟은 젖가슴의 사실적 표현은 잘 생긴 장부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당당한 상체를 꼿꼿하게 받치고 있는 것은 대좌 밖으로 뻗어나와 있는 양 무릎이다. 오른쪽 발을 바깥쪽으로 하여 結跏趺坐한 앉음새는 벼락이 쳐도 꿈적도 아니할 태산 같은 不動의 몸가짐이다. 그런데 신라의 名匠은 이 태산과 같은 부동의 자세에 가벼운 운동감을 잊지 않게끔 배려하였다. 즉, 무릎에 걸쳐 손등을 보이며 아래를 향한 오른손의 표현 가운데 집게손가락을 가운데 손가락에 살짝 겹치게 하였으니, 寂靜 三昧에 잠긴 法悅이 이 손가락 끝에서 숨쉬고 있게끔 神妙를 부린 것이다. 왼손은 반듯하게 丹田 아래 놓여 오른손과 대비를 이룬다. 오른쪽 어깨는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을 감싸며 흘러내린 法衣는 얇아 당당한 몸매를 돋보이게 하더니 두 무릎 사이에서 부채꼴을 이룬다.
불상의 크기를 살펴 보면 佛身의 앉은키가 349.40cm이고, 대좌 높이는 166.67cm이어서 전체 높이는 약 516cm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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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특징

석굴암의 석굴은 백색의 화강암재를 사용하여 토함산 중턱에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 공간에
는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벽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39체의 불상
을 조각하였으며, 석굴암의 석굴은 장방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데 360여 개의
판석으로 원형주실의 궁륭천장 등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이며, 석굴암의
입구쪽에 위치하고 있는 평면방형의 전실에는 좌우로 4구씩 8부신장을 두고 있으며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2구씩의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 석주를 세웠고 이곳을 지나면 평면원형의 주실로 본존은 중심에서 약간 뒤로
안치되어 있으며 입구 좌우로부터 천부상 이구, 보살상 이구, 나한상 십구로 주벽을 채우고 본존 정후면
에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다.

조각에 있어서 원숙한 조법과 사실적인 표현에서 완벽에 가까운 석가여래상, 10구의 얼굴과 전신이 화려
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인왕상의 용맹, 사천왕상의 위엄, 주실내의 보살들의 유연 우아한 모습,
나한상들의 개성있는 표현 등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 것이다.

특히, 주실내에 봉안되어 있는 굽타양식의 본존불 석가여래불은 고요하고 결가부좌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있는 슬기로움, 금방이라도 말할 듯한 입과, 코, 길게 늘어진 귀 등 그 모
든 것이 내면에 깊은 숭고한 마음을 간직하도록 조성된 것으로서 세계에서도 가장 이상적인 미를 대표하
고 있다.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
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인공으로 석굴을 축조하고 그 내부공간에도 본존불을 중심으로 총 39체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석굴암은
전실, 통로, 주실로 이루어졌다.

방형 공간인 전실에는 팔부중상과 금강역사상이 있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는 좁은 통로를 지나면 궁
륭(Dome)천정으로 짜여진 원형공간의 주실이 나온다. 주실의 중앙에는 석가모니대불이 있고, 벽면에는 입
구에서부터 범천상(梵天像)과 제석천상(帝釋天像), 보현(普賢)·문수(文殊)보살상, 그리고 십대제자상(十
大弟子像)이 대칭을 이루도록 조각돼 있다.

천체를 상징하는 둥근 공간에 이르면 한가운데에 높이 350cm의 당당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지닌 석가모니
대불이 동해를 향해 앉아 있다. 얼굴과 어깨를 드러낸 옷의 주름에 생동감이 있어 불상 전체에 생명감이
넘친다. 깊은 명상에 잠긴 듯 가늘게 뜬 눈과, 엷은 미소를 띤 붉은 입술, 풍만한 얼굴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손모양은 항마촉지인(降摩觸址印)으로 왼손은 선정인(禪定印)을 하고 오른손
은 무릎에 걸친 채 검지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다. 석가모니가 큰 깨달음을 얻어 모든 악마의 방해
와 유혹을 물리친 승리의 순간, 즉 깨달음을 얻은 모습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성도상(成道像)이라고 한
다.

감실은 주실에서의 위치로 보아 지상계와 천상계의 중간을 뜻한다. 이는 교리적인 면에서 보면 보살이 각
자(覺者)인 여래와 무명(無明)중생의 중자적인 존재라는 점과 잘 어울린다. 미륵보살상의 오른쪽 어깨,
손목, 오른쪽 무릎으로 이어지는 직삼각형이 안정감을 주는 반면 세운 무릎, 비스듬히 얹은 팔, 숙인 얼
굴이 그리는 곡선은 변화와 운동감을 주고 있다.

전실 벽면에 있는 8구의 팔부중상은 무사의 성격을 띠고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여러가지 모습의 신들이
며, 치마를 입은 금강역사상 또한 불법을 수호하는 한쌍의 수문장으로서 상체의 근육이 발달한 용맹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데 금강으로 만든 방망이를 들고 있다하여 금강역사라 칭했다.

석가모니 대불이 앉아 있는 곳인 둥근 주실 뒷벽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나타나는 십일면관음
보살상(十一面觀音普薩像)의 아름다운 자태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머리둘레에 열구의 얼굴이 화려
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끄는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표정, 화려하게 전면을 장식한 영락(瓔珞:
구슬이나 귀금속을 꿰어 만든 장신구) 장식, 유려하게 흘러내린 천의(天衣), 손가락 발가락의 미묘한 움
직임, 왼손은 한송이 연꽃이 꽂혀있는 병을 들고 오른손은 내려서 영락을 잡고 정면관의 자세로 서 있는
모습에서 화려함과 원숙함을 느끼게 한다.

8세기 중엽 통일신라 문화의 황금기에 건립된 석굴암은 불교사상과 매우 발달한 수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 고도의 건축 기술, 뛰어난 조형감각으로 완성되었다. 우리가 석굴암에서 느끼는 장엄미와 숭고미는 이
러한 바탕과 그 속에 내재하는 조화율에 있다고 하겠다.


2. 가치

1) 통일 신라 예술의 극치
통일신라 미술의 특징인 조화미와 정제미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

2) 우리나라 건축 문화의 우수성
이 석굴은 신라시대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평가되며, 그
조영계획에 있어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이 총체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3) 우리 조상들의 불교관과 세계관 투영
석굴암의 구조와 형식,규모를 결정한 기준은 "인간중심" 이었다.
즉 석굴암의 크기와 비율은 "부처중심"이 아닌 참배자의 귀와 눈의 각도,
참배자가 서있게 되는 위치 등, 완벽한 "인간중심"으로 부처님을 참배하게
설계되고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석굴암은 대좌의 크기를 기본으로 설굴전체와 각 부분간의 비례를
자연미의 원리에 따라 조영함으로써 '인간' 과 '과학'의 관계를 조화시키고
있으며 예술의 세계, 화엄의 세계로까지 승화시키고 있다.

4)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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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신라 때 오악(五岳)의 하나인 토함산(吐含山)에 자리잡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石窟寺刹)
지정번호 : 국보 제24호
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소재지 : 경북 경주시 토함산
시대 : 신라
종류 : 석굴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정식 문화재 명칭은 석굴암석굴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進峴洞) 891번지에 있다. 한국의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의 하나이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
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重)할 때, 왕명에 의하여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대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환생(還生)하였다는 김대성은 《삼국사기(三國
史記)》에 나타나듯이 경덕왕대에 중시(中侍)로 있었던 김문량이 실존인물임에 비추어, 그의 아들인
김대정(金大正)이 신라의 기명(記名) 방식에 의해 대성과 동일인물인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
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기
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
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
(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
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이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先王), 즉 효성왕(孝成王)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이 동해구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
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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