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서(讖書)의 하나인 이 책은 여러 비기(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 ·풍수지리설 ·도교(道敎)사상 등이 혼합되어 이룩되었으며, 조선의 선조인 이심(李沁)이란 사람이 이씨의 대흥자가 될 정씨의 조상인 정감(鄭堪)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말도 전하나 그 종류가 많아 70종(種)에 이르며 정확한 저자의 이름과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정감록》이라 하면 《감결(鑑訣)》을 비롯한 여러 비기(記)에다 《동국역대본궁음양결(東國歷代本宮陰陽訣)》 《역대왕도본궁수(歷代王都本宮數)》등을 합친 비기의 집성을 말하기도 하고, 협의(狹義)로는 《감결》 하나만을 떼어서 말하기도 한다. 그 명칭도 많지만, 《정이감여론(鄭李堪輿論)》 《정이문답(鄭李問答)》 《정감록(鄭堪錄)》 《감결》 《징비록(徵懲錄)》 《감인록(鑑寅錄)》 ≪천이록(天以錄)≫《동세기(東世記)》《요람역세(要覽歷世)》《동차결(東車訣)》
《경고(鏡古)》《기말록(其末錄)》《참서유취(讖書類聚)》등의 이본(異本)이 있다.
현재 이 제목이 붙은 책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규장각본 《鄭鑑錄》:필사본. 아유까이 후사노신(점貝房之進) 1책.
② 김약술(金若述) 소장본 《鄭鑑錄》:필사본. 1책.
③ 김용주(金用柱) 발행 《鄭鑑錄》:활자본. 국판. 163쪽. 한성도서(주) 대정12년(1922)년 3월 19일발행,
④ 현병주(玄丙周) 편《비난정감록진본(批難鄭鑑錄眞本)》:활자본. 4×6판. 100쪽, 우문관, 대정 12년(서기 1923년) 4월 18일 초판, 영창서관에서 그해 6월 10일 재판, 근화사, 세창서관 등에서 발행.
⑤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편저 《鄭鑑錄》:동경,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4×6판 국립중앙도서관 청구 기호:한-02-5.
6. 야나기타 분지로[柳田文治郞] 편집 겸 발행, <鄭堪錄>,활자본, 4x6판,3 5장(70쪽), 이문당(以文堂), 대정 12년(1923)년 3월 19일 초판, 그해 3월 30일 재판발행.
7. 鄭鑑錄(제목 없음)/영조(英祖)?/45쪽/필사본.
1. 鄭鑑錄/刊年未詳/編者未詳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1番/(복사본).
2. 道宣秘訣/記年未詳/玉龍子/2장:4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3番/(복사본).
3. 無學秘訣/記年未詳/朴自超/4장:7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2番/(복사본).
4. 北窓秘訣/記年未詳/鄭磏/2장:3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4番/(복사본).
5. 南師古秘訣/記年未詳/南師古/4장:7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5番/(복사본).
6. 西山大師秘訣/記年未詳/淸虛(休靜)/1장:1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6番/(복사본).
7. 土亭家藏訣/記年未詳/李之菡/25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9番/(복사본).
8. 杜師聰秘訣/記年未詳/杜師聰/4장:8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7番/(복사본).
9. 西溪家藏訣/記年未詳/李得胤/ 14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12378番/(복사본).
10. 鄭勘秘錄/編者未詳/記年未詳/22장:44쪽/
서울大學校 想白古133J459番/(복사본).
11. 秘訣輯錄/編者未詳/記年未詳/46張:91쪽/
서울大學校 奎章閣圖書館 7568番/(복사본).
12. 徵秘寶藏(징비록(徵秘錄)/30쪽/哲宗九年 戊午(단기4191〈서기1858〉)음 2월 9일/ 編者未詳/印本/국립중도서관 한-19-110/(복사본).
13. 鏡古/編者未詳/116쪽/記年未詳/筆寫本/國立中央圖書館 古
19-20番/(복사본).
14. 其末錄/編者未詳/71쪽/記年未詳/ 印本/國立中央圖書館 古
19-42番.
15. 鑑寅錄/記年未詳/編者未詳/63張:125쪽/釜山大學校圖書館/(복사본)
16. 秘覽(聽流堂陰晴錄)/필사본/22쪽.
17.秘藏/필사본/14장.
18.鄭邯錄(盤溪訣在中附論心及楊柳問答)/ 필사본/33쪽/庚寅 臘月(陰12월) 初八日.
19.鄭賦‧沁與勘長歎賦/필사본/3쪽.
20 東國要覽/37쪽/필사본/신해(辛亥) 9월
21鄭鑑錄/63쪽/이소암(李小岩)?/ 필사본.
22.鄭公李沁問答/필사본/13面.
23.雜書訣/筆寫本/23張.
24.年事錄/필사본/12쪽.
25.朝鮮秘訣全集/奎文閣 /1966년 10월 20일 발행/ 97쪽/프린트本.
8. 批難 鄭鑑錄 眞本/槿花社/100面/1923년 4월.
9. 批難鄭鑑錄眞本/雲汀道人 著/100面/世昌書館版/刊年未詳.
10. 批難鄭鑑錄眞本/玄丙周 編/100面/永昌書館/단기4254(서기1921)년 6월10일 발행.
11. <鄭鑑錄>/77쪽/연활자본./刊年 및 발행처 및 발행년도 미상.
12. <鄭鑑錄解說>/16쪽/신세계사 간행/西紀1946년 2월 15일 발행.
13.< 鄭鑑錄에 對한 社會的 考察>/崔守正 著/55쪽/서울, 解放書林/(단기 4281) 서기 1948 年 4月 5日 發行
14. <鄭鑑錄; 원본해설>/編輯部編/66쪽/서울,昌新文化社/ 단기4288(1955)년 5월 27일 발행.
15. <韓國의 蕙眼>/權寧斗 著/100쪽/世光出版社/ 西紀 1962년 十月 五日 初版發行.
16. <元本 鄭鑑錄解說>오륜출판사/1969년 10월 30일 발행.
17.<鄭鑑錄>/ 金水山 編/217쪽/弘益出版社/西紀一九七零年二月二十五日.
18.<鄭鑑錄>/金水山 編著/217쪽/明文堂/1972年 4月 15日 初版 發行.
19. <鄭鑑錄集成>安春根 編/870面/亞細亞文化社 西紀一九七三年 三月 二十五日 發行.
20.<鄭鑑錄集成>/安春根 編/870면/亞細亞文化社, 西紀一九八一年 月 日 再版發行.
21 <鄭鑑錄>李民樹 譯註/206쪽/홍신문화사 /1985년 10월 30일 초판 발행.
22 <鄭鑑錄 원본해설>저자 정다운/376쪽//밀알/1986. 4. 28. 발행.
23 <鄭鑑錄>백운항 편/246쪽/일광사/1986.7.15. 발행.
24 <內訓‧鄭鑑錄>黃吉顯 譯解/225쪽~400쪽/大韓書籍/1989년4월20일 발행.
25 <鄭鑑錄>하명중 편저/241쪽/삼원출판사/1989. 5. 30.발행.
26, <鄭鑑錄秘訣>범우사 편집부/168쪽/초판1쇄 발행 /1997년6월20일.
27 <韓민족의 秘書>다물민족연구소/298쪽/다물/1993년 8월 15일 재판.
28<현장風水>최어중 저/ 272쪽/동학사/초판발행,1992년 10월 1일.
29<십승지>지은이‧펴낸이: 이태희/301쪽/참나무/단기 4331년 음력 7월열사흘 초판발행.
30<鄭鑑錄>김탁 지음, (주)살림출판사, 313쪽,초판 발행:2005년 10월 31일.
<鄭鑑錄>金用柱 著/朝鮮圖書株式會社/大正 十二(1923)년 三月 十九日.
1) 徵秘錄/12쪽.
2)運奇龜策/13쪽.
4)要覽歷歲/22쪽.
5)東世記/11쪽.
6) 東車訣/22쪽.
7)鑑訣/38쪽.
8)鑑寅錄/52쪽.
《정감록》의 내용은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堪)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데,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漢陽) 도읍 몇 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 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도읍 몇 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 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의상(義相) ․ 도선(道詵) ․·무학(無學) 박자초(朴自超) ․·낭선자(浪仙子) 어무적(魚無跡)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 두사총(杜師聰) ․ 정북창(鄭北窓) ․ 서산대사(西山大師)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등의 예언도 있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85년(정조 9) 홍복영(洪福榮)의 옥사사건 기록에서 나온다. 정권에서 물러난 소론(少論) 및 남인(南人)들이 이용하였다. 아마 허균옥사(許均獄事)(서기 1618년)가 아니면 선조 6년(1573년) 정여립(鄭汝立) 사건(事件) 때 만들었을 것으로 사료(思料)된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 ·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王政)에 시달리며 조정(朝廷)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실제로 광해군 ·인조 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거의 빠짐없이 정감록의 예언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이래의 국정의 문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당쟁(黨爭)의 틈바구니에서 도탄에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이씨가 망한 다음에는 정씨가 있고, 그 다음에는 조씨 ·범씨가 일어나 한 민족을 구원한다는 희망을 불어넣으려 한 점에서 이 책은 높이 평가될 수는 있다. 그러나 반면 우매한 백성들이 이 책의 예언에 따라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피란처를 찾아 나서는 웃지 못 할 희극을 수없이 연출시킨 것은 이 《정감록》의 악폐였다. 신흥종교의 원전(原典)으로 되기도 하였다.
정치 사회적인 혼란을 초래할 것이 두려워하였기에 조선 왕조의 집권자(執權者)들은 『정감록』의 소지(所持)나 유포(流布)를 범법(犯法) 행위로 간주하였고, 조선 태종(太宗) 17년(1417) 11월과 세조(世祖) 3월과 5월에 왕이 팔도(八道) 관찰사(觀察使)에게 명(命)하여 『古朝鮮秘詞(고조선비사)』, 『大辯說(대변설)』, 『朝代記(조대기)』, 『通天錄(통천록)』, 『壺中錄(호중록)』,『道詵漢都讖記(도선한도참기)』 등의 문서를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 되니 진상(進上)하도록 하라.하였다. 성종(成宗)은 즉위(卽位)년(1469) 12월에 왕이 여러 도(道)의 관찰사에게 교서(敎書)를 내려 『周南逸士記(주남일사기)』『志公記(지공기)』『表訓天詞(표훈천사)』『三聖密記(삼성밀기)』『道證記(도증기)』『地異聖母河沙良訓(지리성모하사량훈)』,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壺中錄(호중록)』『地華錄(지화록)』『明鏡數(명경수)』와 천문 ․지리․음양 등 여러 서책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 보낼 일을 하유(下諭)했으니, 위에 언급한 『명경수』는 아마 술수(術數)에 관한 책이고, 『太一金鏡式(태일금경식)』은 太乙神數(태을신수)』에 관한 책(冊)이다. 『道詵讖記(도선참기)』라는 비결서가 성종대에도 실존(實存)했던 것을 확인됩니다. 그러한 금압(禁壓) 조치에도 불구하고 『鄭鑑錄(정감록)』은, 그가 지닌 도참서(圖讖書)로서의 매력으로 인하여 널리 퍼져 나갔다.
1618년 교산(蛟山) 허균(許均)의 옥사(獄事), 1628년 류효립(柳孝立, 1579~1628) 사건, 『仁祖實錄(인조실록)』 1628년(인조 6년) 2월 7일(음력 1월 3일, 乙丑을축)에 초포(草浦)에 바닷물이 들어오면 계룡[산]에 도읍한다(草浦潮入, 鷄龍建都)라는 구절(句節)이 있다.
『시디롬 조선왕조실록』에는 『정감록』은 1739년(영조 15) 9월 11일(음력 8월 6일, 庚辰)에 함경도(咸鏡道)에서 출현하였다.
『備邊司謄錄(비변사등록)』에 영조(英祖) 15년(1739) 5월 15일 평안도 삼등현(삼등현)에서 국경(國境)을 넘은 죄인(罪人)에 대한 기록에서 『鄭鑑錄』과 『歷年(역년)』이 등장(登場)하여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조(正祖) 6년(1782) 음력 12월의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보다 43년이 앞선 것이다.
17세기 말(末) 숙종 17년(1691) 때 발행된 『推案及鞫案(추안급국안)』의 기록 [104책 신미(辛未) 음력 11월, 갑술(甲戌, 1694년)2월 28일]에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 1733년(영조9년) 3월 초(初)에 남원시장(南原市場) 비롯하여 4월 보름경에는 백복사(百福寺)에 있는 돌부처에 붙였고 『南師古秘訣(남사고비결)』『要覽(요람)』, 1739년 이재형(李載亨)의 『鄭鑑錄(정감록)』사건(事件), 1748년 이지서(李之曙) 등(等)이 청주(淸州)와 문의(文義)에서 괘서(掛書) 사건(事件), 영조(英祖) 31년(1755년) 나주(羅州)괘서사건, 정조(正祖) 6년(1782년)의 문인방(文仁邦) 역모(逆謀) 사건(事件), 1783년 해주(海州) 안치복(安致復)․안필복(安必復)도 『鄭鑑錄(정감록)』사건(事件), 정조 9년(1785년) 문양해(文洋海) 역모(逆謀) 사건(事件), 이율(李瑮)과 양형(梁衡) 사건(事件) 등 사건이 관련이 있다.
조선 철종(哲宗) 9년(1858)년12월 9일에 쓰인 『徵秘寶藏(징비보장)』일명(一名) 『徵秘錄(징비록)』과 고종황제(高宗皇帝) 23년(1886년)음(陰) 4월에 등초(謄抄)한 『聽流堂陰晴錄(청류당음청록)』와 고종황제(高宗皇帝) 때(?) 쓰인 『鏡古(경고)』와 『其末錄(기말록)』과 병자(丙子)(1936년?) 겨울 동현정사(銅峴精舍)에서 춘봉(春峰)이 쓴 『讖書類聚(참서유취)』와 임진(壬辰)(?) 괴하(槐夏)(음력 4월)가 목고(牧皐)가 옹필(弄筆)한 『要覽(요람)』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대정(大正) 2년(1913) 2월부터 3월까지 1개월에 걸쳐 아유까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한성(漢城)(지금의 서울)에서 『海左龜策(해좌구책)』과 『東國地理略論(동국지리약론)』와 제가비결(諸家秘訣)을 모아『鄭鑑錄』102쪽을 복사(複寫)하였고, 호소이 하지메(細井肇)가 동경(東京)의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에서 『鄭鑑錄秘訣集錄』을 서기 1923년 2월 15일에 초판(初版), 2월 22일에 재판(再版), 3월 2일에 제3판, 대정 15(1926)년 10월 5일에 4판 발행하였다. 그 뒤 김용주(金用柱)가 경성(京城)(지금의 서울) 한성도서출판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에서 3월 19일에 『鄭鑑錄』을 펴냈고, 현병주(玄丙周)가 편(編)하여 『批難鄭鑑錄』을 경성(京城)에서 서기 1923년 4월 18일에 永昌書舘(영창서관)에서 초판, 6월 10일 재판(再版) 발행하였고, 현병주(玄丙周)가 편(編)하여 근화사(槿花社) 및 세창사관(世昌書舘)에서는 운정도인(雲汀道人) 저(著)로 발행되었다. 서기 1923년 3월 19일 초판 및 그해 3월 3일 재판(再版) 발행을 야나기타 분지로(柳田文治郞)가 『眞本 鄭堪錄』편집(編輯) 겸(兼) 발행(發行)을 이문당(以文堂)에서 하였다.
최초로 『鄭鑑錄』을 간행한 호소이 하지메는 앞서 『朝鮮文化史論(조선문화사론)』 과 『조선문제의 근본적 해결(朝鮮問題の根本的解決』『朋黨․士禍의 檢討』을 목포신보(木浦新報) 주간(主幹)이었던 나가로 고지로(長野虎次郞)의 자료 지원을 받아 썻기 때문에 같이 지은 것[共著]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호소이 하지메 혼자 썼다고 한다. 자유토구사(自由討究社)에서 서기 1921년에 발행, 자유토구사에서 기획한 『通俗朝鮮文庫(통속조선문고)』의 주무(主務)를 맡아 보면서 『정쟁(政爭)과 당쟁(黨爭)』(1914)․『閥族罪惡史(벌족죄악사)』(1919)․『국태공의 비(國太公の妣)』(1932) 등 조선의 당쟁과 정쟁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남겼다.
대부분 참서(讖書)는 내용상 풍수설(風水說), 음양설(陰陽說), 방위설(方位說), 상서설(祥瑞說), 운수설(運數說)의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음양택학(陰陽宅學)의 양대(兩大) 조류(潮流)를 형성하는 명당(明堂)이 위치한 방향(方向)을 중시(重視)하는 좌향론(坐向論)과 산수(山水)의 형상을 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형국론(形局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