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봄 12.12 사태 이후.

서울의봄 12.12 사태 이후.

작성일 2024.04.05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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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민기, 원경, 진영도는 어떻게 됐나요?

이후 장태완 수경사령관과의 관계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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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에서 장민기, 진영도, 원경의 실존 인물은 각각 장세동, 김진영, 조홍입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각자 수도경비사령부 30단장, 33단장, 헌병단장으로서 사령관 장태완 소장을 배신하고 하나회 회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에 따르며 반란을 성공시켰습니다. 당연히 이후 장태완과는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죠. 다만 2010년 장태완이 별세했을 때 장세동이 장례식 빈소에 찾아오기는 했습니다.

수경사 30단장 장세동 대령

12/12 군사반란 당시 장세동은 경복궁 내 반란군 지휘부 모임을 주최했던 책임자였습니다. 12/12 이후 장세동은 특전사 작전참모로 보직 발령받아 1980년 5/17 쿠데타와 5/18 민중항쟁 당시 공수부대를 지휘했습니다. 특히 5/18이 일어나기 전인 5월 10~15일경 광주를 미리 방문해 지역 분위기와 민심을 살폈습니다. 이때 광주 시민들의 반발과 저항이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공수부대를 투입해 악랄하게 살육 작전을 펼쳤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5/18이 발생하자, 광주 현지 지휘관들을 압박하면서까지 강경 진압을 주도했고, 그 결과 많은 광주 시민이 죽고 다쳤습니다.

이후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자 1981년부터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경호실장이 됐습니다. 이때 장세동은 청와대 내에서 허화평, 허삼수('서울의 봄'에서 문일평, 하창수)를 견제하면서 전두환의 심기까지 경호했습니다. 결국 허화평과 허삼수는 12/12 당시 핵심 공로에도 불구하고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청와대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밖에도 전두환의 친구인 노태우와 정호용도 감시하며 견제했습니다. 이 정도로 전두환은 장세동을 매우매우 신뢰했고, 마찬가지로 장세동은 전두환에게 무한한 충성을 다해 보필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저지른 실책으로 1982년 '봉황새 작전'이 있는데, 전두환 경호를 위해 악천후 속에서도 무리하게 특전사 대원을 공군 비행기로 출격시켰다가 53명이 전원 사망한 사건입니다.

1985년부터는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직을 맡아 전두환을 지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공권력 남용을 저질렀습니다. 수지킴 간첩 조작 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금강산댐 수공 공포 정국 조장, 민주당 창당 방해, 야당 분열 공작이 모두 그의 작품입니다. 결국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민주항쟁이 터지자 마침내 안기부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열린 전두환 정부의 비리와 악행을 진상 규명하려는 국회 청문회에 불려다니며 추궁받았습니다. 이때 장세동은 "각하(전두환)와는 무관하고, 전부 나 알아서 한 것이다"라고 일관적으로 주장하는 등, 이미 퇴임한 전두환에게 비난의 화살이 갈 법한 논란은 전부 본인 책임이라고 강조하면서까지 전두환을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1993년 민주당 창당 방해 관련해 본인이 전두환 대신 감옥을 갔다 왔습니다. 이때 출소한 직후 전두환을 찾아간 장세동은 "각하! 휴가 다녀왔습니다!"라며 인사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전두환은 장세동에게 흔쾌히 무려 20억 원(!)을 그 자리에서 건네줬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으로 장세동은 전두환 등과 함께 12/12 군사반란, 5/17 쿠데타, 5/18 학살에 대해 검찰 수사받고 유죄를 선고받아 교도소로 들어갔습니다(군인 연금도 지급 중단). 그러나 1997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이내 교도소에서 풀려나왔고, 2002년에도 16대 대선, 17대 총선에 후보로 출마하는 등 정치권에 대한 미련은 놓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2014년 박근혜 정부 시기에는 군사반란죄 등으로 유죄 선고받고 징역 복역했던 점 때문에 그동안 지급이 중단된 군인 연금을 다시 달라고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가 깔끔히 패소했습니다.

이후 언론에서 전두환 관련해 취재해올 때면 항상 "각하께서는 나를 사랑으로 보듬어주셨다" "각하는 절대 나쁜 분이 아니다"라며 끝까지 전두환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고, 2021년 전두환이 죽었을 때도 장례식 빈소에 찾아가서 며칠간 머물렀습니다. 이때 전두환 손자 전우원의 양심 고백을 두고도 "어린 게 뭘 알겠냐"라며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24년 현재도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수경사 33단장 김진영 대령

12/12 군사반란 당시 김진영은 사령관 장태완이 보낸 전차 부대 진압군을 홀로 직접 설득해서 돌려 보내는 등 반란군 지휘부의 안전을 지겼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진영은 다른 반란 가담자와는 좀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평소에도 자기만의 소신과 주관이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12/12 때도 단순히 사리사욕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직을 맡는다는 게 진심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특유의 곧은 그의 성격은 비록 하나회 회원이자 전두환 쿠데타 공신이었음에도 우여곡절이 많은 군 생활을 예고했습니다.

12/12 이후 김진영은 수경사 작전참모, 청와대경호실 작전차장보,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을 맡는 등 승승장구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첫 번째 좌천은 1985년 12대 총선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전두환 정부에서는 야당을 견제하기 위해 전 군부대 장병에게 무조건 여당을 찍으라는 강제 투표를 독촉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김진영은 이를 '부정 선거'라고 판단해서 거부하고, 휘하 장병들에게 "투표하고픈 정당을 찍어라"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육군3사관학교 교장직으로 좌천당했습니다. 그러나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전두환이 한발 물러선 채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채 퇴임하게 되자, 12월 수도방위사령관(구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받아 다시 수도권 군 요직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두 번째 좌천을 맞게 됐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이전 전두환 계열 정부 인사와 군부 인사를 모두 쫓아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전두환 정부의 비리와 악행을 밝히려는 야당의 요구와 국민의 여론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에 김진영은 "야권의 전두환에 대한 심판 요구를 좌시하면 안 된다"라며 강경 대응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이때 육군교육사령관으로 또 좌천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노태우 정부는 전두환 계열 하나회 회원 간의 조화와 화해를 추구했고, 이에 김진영도 노태우에게 충성하겠다며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얼마 안 가 김진영은 1990년 한미연합사령부 부사령관, 1991년 육군참모총장이 되면서 다시 화려하게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때 김진영은 세 번째 좌천이자 완전히 군에서 숙청당했습니다. 당시 하나회를 숙청하면서 김진영은 육군참모총장직을 내려놓고 군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이후 1995년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으로 김진영도 12/12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고 교도소를 갔습니다. 그러나 1997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다시 사회에 나왔고, 정계에도 입문하지 않았습니다. 이후로 군사 안보 연구와 기독교 선교 사업에 전념하며 살다가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고, 2021년부터 한미자유안보정책센터(KAFSP)의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2021년 전두환이 죽었을 때도 장례식 빈소를 찾아갔고, 2024년 현재도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 부단장 신윤희 중령

12/12 군사반란 당시 조홍은 진압군 핵심 지휘관 3인방인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본 현병감이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병력을 동원해서 진압군을 출동시키려는 시도를 막았던 사람입니다. 이때 반란군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는 동안 조홍은 위 3인방을 서울 연희동 위장 술자리 모임에 초청해서 묶어두고 시간을 끌었습니다. 이후 반란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위 3인방이 부대로 돌아갈 때, 조홍은 슬쩍 자리를 빠져나와 전두환의 보안사령부로 와서 반란 성공을 도왔습니다. 반란 진행 말미에도 장태완이 어떻게든 진압 대책을 찾는 모습을 보이자,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장태완을 비롯한 육본 진압군 지휘부를 체포하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때 신윤희가 이끄는 반란군은 자기 상관들에게 총을 겨누면서까지 무장해제 후 연행했는데, 육본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을 가슴에 총상을 입혔습니다.

12/12 이후 조홍과 신윤희는 차례로 육군본부 헌병감을 역임했습니다. 군에서 전역한 후, 조홍은 운송업 회사와 보험 회사의 고위직을 맡았습니다. 이후 김영삼 정부 시기 하나회 숙청과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으로 위태로워지자 1995년 미국으로 도피한 후 은둔 생활하다가 2018년 캐나다에서 사망했습니다. 이때 미국 도피 후 캐나다에서 사망할 때까지 한국 국방부로부터 군인 연금을 계속 받으며 호의호식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한편 신윤희는 군에서 전역한 후 정계 입문해 정당 고위직을 맡았습니다. 이후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으로 12/12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고 교도소를 갔습니다. 그러나 1997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이내 풀려났습니다. 이후 장태완이 별세하고 2012년 "12/12는 군사반란인가?"라는 수기를 출간해서 "장태완이야말로 반란을 일으켰던 자"라고 서술하며 자신을 변호했습니다. 그리고 간간히 유튜브에도 출연하며 12/12 당시 자신의 행보를 정당화하며 장태완을 비난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2019년 뉴스타파 인터뷰에서도 "12/12랑 5/18은 각각 서로 무관한 별개의 사건인데, 김영삼이 둘을 엮어서 나를 감옥에 보냈다"라며 참회하기는커녕 오히려 김영삼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2021년 전두환이 죽었을 때도 장례식 빈소를 찾아갔고, 2024년 현재도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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