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삼국유사>를 쓴 일연선사는 단군의 역사에 대해 2권의 사서를 인용하지요.
<위서>와 <고기>입니다.
일연선사가 저술한 것이 아니라 이전에 있던 내용을 인용만 하고, 자신의 견해는 작은 글씨로 덧붙여 놓았죠.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고구려본기 동천왕' 조에 단군 기록을 남겼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동천왕 21년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은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다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란 곳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이다.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죠.
처음에 누가 나라를 세워 세상을 열었는가? 석제(釋帝)의 자손으로 이름은 단군(檀君)이라네. 요(堯)임금과 함께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舜) 임금 때를 지나 하(夏)나라 때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에 아사달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네. 나라를 다스린 지가 1,028년으로, 어찌 변화시켜 환인께 전할 것이 없었겠는가? 그 뒤 164년 만에 어진 사람이 다시 군신(君臣)관계를 다시 열었도다.
아래는 단군에 대한 하나의 시각입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공용연호는 1948년 9 월 25일부로 단군기원(단기)을 답변확정하였다가 1961년에 폐지되어 1962년부터 서력기원을 사용하였다. 단군의 조선 개국 연대인 단군기원은 서거정 등이 쓴 『동국통감』 (1484)에서 요임금의 즉위 연대라고 추정하는 기원전 2357년보다 25년 뒤진 시기인 2333년이라고 본 데 따르고 있다.
현재 단군 논의는 대체로 실증사학을 강조하는 강단사학과 민족주의적 입장의 재야사학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으며, 20세기 초에 발견되거나 편찬된 『규원사화』 『한단고기』 『단기고사』 등의 문헌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지를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득권층 또는 변화를 거부하는 계층은 역사적으로 조선시대에는 중국사대주의,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사대주의, 해방 후에는 미국사대주의를 자랑스러워하고 당연시하며 자기비하에 젖어 있다. 그래서 현재 우리의 잘난 모습은 그들의 은혜로 해석하고 못난 모습은 그들을 배척한 데 따른 응보로 보고 있다. 이에 비해 진보층 또는 변화를 주도하는 계층에서는 지나치거나 왜곡된 이념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 인종주의에 젖어 모든 자료를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며 서로의 공생과 조화보다는 계층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이로부터 이익과 승리를 쟁취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관심이 실재를 낳는다. 당당하고 활달하게 자립적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극단적 대치 상황에서 벗어나 앞으로 단군 연구를 연구자 본인이나 소속 진영의 선입견이나 편견과 이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역사학, 고고학, 문헌학, 민속학, 인류학, 언어학, 분자생물학, 생물학, 종교학, 신화학, 국문학, 정신분석학, 심리학, 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체계적 종합적으로 이루어가야 할 것이다. 단군을 역사적 실재냐 허구냐 하는 식의 조상숭배의 한 형태로 고착시켰을 때 신화의 상징적 의미와 기능은 퇴색할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https://blog.naver.com/43000109/222827029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