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괄
삼국은 안으로는 서로 대립하거나 연맹 관계를 맺고, 밖으로는 중국 세력과 평화적 교섭이나 전쟁을 치르면서 통일의 길로 나아갔다.
6세기 말 이후, 중국을 통일한 수⋅당이 침입해 오자, 고구려는 이들을 격퇴하여 중국 세력으로부터 한반도를 보호하였다.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였고, 중국의 분열을 틈타 해상 세력권을 이루기도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보다 발전이 늦었으나, 한강 유역을 확보한 6세기 후반부터 수⋅당 등 중국 세력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여 갔다.
고구려
장수왕은 5세기 79년 집권 기간 중 북중국에서 여러 왕조들이 명멸하는 오호십육국의 혼란한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여 조공외교를 통해 고구려의 안보를 최대한 확보하면서 때로는 복종하는 자세로, 때로는 이들의 요구를 회피하고, 때로는 당당하게 맞서 고구려의 위상을 최대한 끌어올린 인물이다. 특히 연의 멸망과 연왕의 고구려 망명을 둘러싼 사건, 그리고 북부의 위와 남부의 남제/남송이라는 남북 두 왕조 간의 대립을 처리하는 그의 외교적 능력은 한국외교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외교군주(diplomat king)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신라
성덕왕 때 이룩된 나당관계는 단순한 조공관계가 아니라, 다양한 사절의 왕래와 문물의 교류가 활발해져 양국간에는 친선관계가 확립. 신라는 빈번한 使行을 통해 漢文化 내지는 서역문화까지 수용하여 민족문화를 개발시켰으며, 대외적으로 민족적 자존과 긍지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백제
근초고왕 때에 중국의 남조인 동진과 외교 관계를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였고, 백제의 이주민들이 많이 거주한 규슈의 왜와 외교 관계를 맺기도 하였으며 신라의 협공을 저지하기위해
다. 이를 계기로 하여 백제는 중국의 요서, 산둥 지역과 일본의 규슈 지역을 연결하는 세력권을 형성하여 해상 무역 활동을 활발히 펴 나갔다. 그 후,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때로는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 끌어들여 삼국 항쟁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신라의 협공을 견제 하기위해 6가야 연맹과 동맹과 결속으로 신라를위협
신라외교
나당 친선외교의 확립
신라외교는 나당관계는 단순한 조공관계가 아니라, 다양한 사절의 왕래와 문물의 교류가 활발해져 양국간에는 친선관계가 확립
고려 대외외교
고려는 실리외교라 합니다
중국은, 만주 지역에서는 거란, 여진 등 호족들이 세력을 다투는 3강 구조가 동아시아 지역을 지배하는 세력이었다. 따라서 고려는 상황에 따라 주변 국가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실리 외교를 추구하는 것이 외교 정책의 특징
조선의외교
사대교린 정책(事大交隣政策) 이란
조선 전기에 조공 관계로 맺어진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 속에서 확립된 기본 외교 정책이다. 이때 사대교린은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이웃 나라와는 화평하게 지낸다는 뜻이었으며, 사대는 명나라에 대한 외교책이며, 교린은 여진족과 일본에 대한 외교책
역사적 배경
한반도 여러국가들의 오랜된 외교방식입니다
고구려도 한나라(32년), 북위, 수나라 등 중국에서 강성한 왕조가 들어서면 조공 책봉관계를 맺고 외교적 이익을 취하였으며, 고려도 송나라나 금나라가 강성할 때는 이러한 외교관계로서 국제적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주변 약소 민족에게 회유와 토벌 정책을 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