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관이라 함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이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고구려나 신라가 모두 연호를 사용하였음에도
고구려만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은
광개토대왕릉비 때문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시조 추모왕부터의 왕계도 적고 있고
광개토대왕의 업적과 무덤을 지키는 수묘제도를 적고 있지요.
특히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살펴보면
중국쪽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백제, 신라, 임나(가야)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내용인 즉, 백제가 약조를 어기고 말을 안 들어 군사를 보냈다거나
왜가 신라를 공겨하자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는 내용들이지요.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분명 중국쪽 국가들에 대한 공격도 있었지만
이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기술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비문 내용을 통해 보면
고구려가 마치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취급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지지요.
즉, 광개토대왕릉비를 통해
고구려를 중심으로 백제, 신라, 가야로 하는 독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이 독자적 세계관 내에서 말을 잘 안 듣는 백제를 혼냈으며
왜라고 하는 외부 침입세력을 몰아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허나 법흥왕 시절 신라는
연호를 사용하긴 했으나 독자적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만한
역사적 기록 혹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알 수 없지요.
하지만, 당시 신라는 광개토대왕 및 장수왕 시절의 고구려와는 달랐습니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시절
한강 이북을 점령하여 백제 수도(서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코앞까지 진격하였고
장수왕 시절에는 백제 수도를 점령하여 사실상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백제는 수도를 빼앗기고 왕이 전사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것이지요.
신라는 지리적 특성상 아직 국가 발전 단계에 있어 고구려나 백제에 뒤쳐졌으며
순흥 읍내리 고분, 어숙술간묘 등을 통해 보았을 때
고구려군이 신라 지역에 주둔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당시 고구려와 백제 및 신라의 국력 차이가 꽤 컸다는 것이지요.
법흥왕 시절 고구려와 백제는 진흥왕 시기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긴 했으나
여전히 강력한 국가들이었고 라가 압도적 위치에 있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독자적 천하관을 꾸릴만한 여건이 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