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1 한국사 신라의 삼국통일

고1 한국사 신라의 삼국통일

작성일 2022.04.04댓글 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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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삼국통일 직접 요약하여 쓴 것이니 참고 바랍니다.

(1) 나당동맹 648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상류와 하류를 모두 백제로부터 빼앗기자 7세기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여제동맹을 맺게 되고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심한 압박을 가하게 됨

그러므로 인해 백제 고구려 돌궐(설연타) 왜의 남북세력과 신라와 수나라(당나라) 동서 세력 간의 대립이 심화하게 됨.

백제는 642년 의자왕 때 윤충이 이끄는 1만의 백제군이 대야성을 비롯하여 신라 40개의 성을 빼앗으며 승승장구하자 윤충은 김춘추의 사위와 딸의 목을 베어 사비성 왕도로 옮겨갔고 몸은 신라로 보내게 되었으니 김춘추는 딸과 사위의 복수를 하고자 사신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당시 신라는 일부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의 당항성을 공격하자 다급해진 신라의 사신으로 간 김춘추는 고구려에 군사요청을 요구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르기를 '죽령의 서북쪽에 있는 고구려의 옛 땅을 돌려달라' 는 답을 했지만 김춘추는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이야기하자 연개소문은 분노하여 신라의 김춘추를 고구려에 감금하게 되었고 결국 김춘추는 648년 당나라 2대 황제 이세민과 나당 동맹을 맺었다.

(2) 660 - 백제 멸망

나당연합군 중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이끄는 13만의 당군은 백강 하구로 들어서고

계백의 5천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의 5만이 황산벌에서 대치하였으며 황산벌에서 신라군이 백제의 계백을 물리치고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를 멸망시킨 후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다스리게 했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복신 도침 등이 중심이었고 복신과 도침은 백제의 왕족인 부여 풍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흑치상지는 임존성 등지에서 백제의 부흥 운동을 주도하였다.

(3) 668 - 고구려 멸망

666년에 연개소문이 병으로 사망하면서 연남생이 권력을 잡았으나 둘째인 연남건과 셋째 연남산이 권력을 잡으면서 형제 간의 티격태격했으니. 667년에 당나라에 연남생이 투항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항복을 하니 내분이 일어나 결국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었다.

고구려 부흥 운동은 황해도 재령인 한성과 왕족 고연무가 이끄는 오골성에서 비롯되었는데 한성의 검모잠이 고구려 왕족인 안승을 옹립하여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4) 675 매소성 전투 - 신라가 외세인 당을 끌어들이면서 각각 백제에는 웅진 도독부 고구려는 안동 도호부 그리고 신라에는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려고 즉 한반도를 집어삼키려 들게 되니 신라와 당나라 간 전쟁이 이루어졌으며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과 연합하기도 하였다.

(5) 676 기벌포 전투 - 금강 하구에 기벌포라는 곳에서 이것이 마지막 나당전쟁의 핵심이자 삼국 통일의 완성되는 점을 의미한다. 신라가 당나라를 기벌포에서 격파하며 당나라를 몰아냈다

(6) 삼국통일 의의 - 우리 민족의 최초의 통일

(7) 한계 - 외세의 힘을 빌림 / 대동강 이북 상실 / 불완전한 통일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신라가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의 한강을 공격합니다. 그것은 무역을 더 하려고 했겠죠. 그리고 백제군을 뒤에서 칩니다. 그래서 한강을 차지하죠. 그리고 백제는 화가나 신라를 공격합니다. 이렇게 치고받고 하는중, 의자왕이 올라왔을때, 신라의 중요한성이 빼앗겼죠. 그러자 김춘추는 김유신한테 고구려에 갔다 올거니 몇일동안 안 오면 죽은걸로 알아 라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설득하지 못하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자 그는 꾀를 내어 탈출합니다. 그리고 김춘추는 왕이 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러자 김유신이 왕의 후보중 한명한테 물어보니 되고 샆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김춘추는 왕이됩니다. 그리고 당나라와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 신라는 황산벌애서 강적을 만납니다. 적은 계백의 5000군사였죠. 군사의 차이는 거의 10배였습니다. 하지만 계백의 군사들은 죽을힘을 다해서 무려 4번을 막았죠. 하지만 관창이 죽은것을 부풀려서 말하자, 군사들의 사기가 높아져 계백은 죽고 맙니다. 그리고 당나라와 만나 공격해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긴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답변확정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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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신라는 6세기 법흥왕 때에 이르러 율령(律令)과 관제를 반포하고, 이차돈의 순교를 거쳐 불교를 국교로 정한 이후 불교정신을 바탕으로 내부의 결속을 다지며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여 국력이 강해졌다. 이 시기에 신라는 금관가야를 통합하였고, 국호를 사로국, 서라벌에서 덕업을 일신하고 사방에 망라한다는 뜻의 '신라(新羅)'로 개칭하였다.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백성의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신라의 진흥왕554년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백제 성왕을 전사시킴으로써 한강 유역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가야 연맹 중 마지막으로 남은 대가야를 완전히 정복하여 남서쪽으로는 낙동강 서쪽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동북쪽으로는 함경남도, 북서쪽으로는 황해도 지역까지 신라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진흥왕이 집권한 이후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의 삼국 간 항쟁을 일방적으로 주도할 만큼 강국이 되었고,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던 기간에는 진골에 속하는 왕족인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가 가야계 세력의 필두인 김유신과 함께 신흥 세력으로서 집권 체제를 강화하며 국가의 내부 결속을 다졌다.

전개 과정

가야의 멸망

신라는 532년가야 연맹의 중심국인 금관가야를 멸망시켜 현재의 경상남도 김해진해 지역을 복속시켰고, 562년에는 최종적으로 대가야를 정복함으로써 낙동강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후에도 가야 연맹이 있던 지역에서 반발하자 신라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김유신의 증조부)의 후손 등을 진골 귀족으로 편입시켜 가야계의 반발을 희석시킴과 동시에 사상적으로 통합하는데 성공하였다.

백제의 멸망

고구려가 ·과 전쟁을 전개하는 동안, 의자왕(義慈王)은 백제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신라의 백제전선(百濟戰線)의 요지인 대야성(大耶城, 현재의 합천)을 비롯한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는 외교를 감행하였으나, 고구려가 출병의 대가로 한강 유역의 반환을 요구하여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정복하고 이어 고구려를 협공하려는 전략을 세웠다. 이리하여 당 고종소정방(蘇定方)으로 하여금 백제를 치게 하였다.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등으로 하여금 백제를 진공케 하니, 당군은 백강(白江) 좌안(左岸)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 금산군 진산면)을 넘어서게 되었다.

당시 의자왕은 교만하고 향락에 젖어 있었고, 조정은 간신들이 사리(私利)를 도모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성충(成忠) · 흥수(興水) 등 충신은 처형되었다. 백성은 거듭되는 전쟁에 지쳐 내분이 발생하고 정부로부터 이반(離叛)되어 백제는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충상(忠常)이 5천의 결사대로 국운을 지탱하려 하였으나 대패하고,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는 660년에 멸망하였다.

백제 멸망 후 각지에서 백제 유신(遺臣)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왕족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은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하고 흑치상지 등은 임존성(任存城)에 웅거하여 군사를 일으켜 200여 성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왜로부터 왕자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고 사비성 · 웅진성 등을 포위 · 공격하였다. 그러나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반격과 부흥군의 내부 분열로 주류성이 함락되고, 이후 부흥군은 계속 패배하며 4년에 걸친 부흥운동도 종말을 고하였다.

당나라는 옛 백제의 영토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다.

고구려 멸망

백제를 정복한 신라의 태종무열왕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항전으로 겨우 이를 막아냈으나, 거듭되는 전쟁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고 연개소문의 독재 정치로 민심을 잃었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는 그의 동생 및 아들들을 중심으로 귀족간 권력 쟁탈전으로 국세가 급격히 쇠락하였다.

이를 틈타 당나라는 고구려 정벌에 나서고 신라군도 이에 호응하여 남쪽에서 공격하니 고구려는 1년도 채 못되어 668년(보장왕 27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 후 검모잠(劒牟岑) 등이 왕족 안승(安勝)을 받들어 약 4년 동안 부흥운동을 계속했으나 실패하였다.

당나라는 옛 고구려의 영토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다.

결과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은 신라를 이용하여 삼국의 영토 전체를 장악하려는 야심 때문이었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그 지역에 5도독부(五都督部)를 두는 한편, 663년(문무왕 3년)에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文武王)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뒤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는 그 지역에 9도독부(九都督府)를 둠과 동시에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총괄케 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과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검모잠의 부흥군을 원조하여 한반도 북부에서 당나라의 축출을 꾀하고, 백제의 옛 땅에 군대를 출동시켜 당군을 각처에서 격파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신라는 671년(문무왕 11년) 사비성을 다시 함락시킴으로써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674년 당나라는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金仁問)을 신라 왕에 임명하고 신라에 대한 전면적 무력침공에 나섰다.

그러나 신라군은 671년 1월 가림성의 당군을 격파하였고, 7월에는 평양 근교에서 이근행의 말갈군에게 대승하는 등 당나라에 맹렬히 맞서 싸웠다. 그리고 675년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고, 676년 11월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을 섬멸하여 당나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었다. 이로써 신라는 삼국을 통합하고, 대동강부터 원산만(元山灣)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성공적으로 확립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고구려, 백제, 말갈 유민을 흑금서당(黑衿誓幢)으로 편성하여 신라의 군사에 편입함으로써 민족적 융화를 이루었다.

고1 한국사 신라의 삼국통일

에 대해 배경,과정,의의등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세요..! 배경 신라는 6세기 법흥왕 때에 이르러 율령(律令)과 관제를 반포하고, 이차돈의 순교를 거쳐 불교를 국교로 정한...

고1 한국사 문제..풀어주세요

한국사에 잘몰라서 물어봅니다 ㅜㅜㅜ 사진을 보고 써야되는건데 써주새요 ㅜㅜ... 자료 1>과 〈자료 2가 신라의 삼국 통일을 긍정/부정 중 어떻 게 바라보는지 포함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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