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문화유산(고려)

역사적인 문화유산(고려)

작성일 2020.10.27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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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떄 역사적인 문화유산이 어떤것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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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문화유산)

1.봉선홍경사 갈기비

종 목 국보 제7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흥리 319-8

시 대 고려시대

봉선홍경사는 고려 현종 12년(1021)에 창건된 절이다. 절이름 앞의 ‘봉선’은 불교의 교리를 전하고자 절을 짓기 시작한 고려 안종이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목숨을 다하자, 아들인 현종이 절을 완성한 후 아버지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현재 절터에는 절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담은 이 갈비만이 남아 있다.

갈비는 일반적인 석비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말하는데, 대개는 머릿돌이나 지붕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의 끝부분을 둥글게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다.하지만 이 비는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다.

거북모습의 받침돌은 양식상의 변화로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었고, 물고기의 지느러미같은 날개를 머리 양쪽에 새겨 생동감을 더하고 있다. 비몸돌 앞면 윗쪽에는 ‘봉선홍경사갈기’라는 비의 제목이 가로로 새겨져 있다. 머릿돌에는 구름에 휩싸인 용을 새겼는데 그 모양이 자못 도식적이다.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문은 ‘해동공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이 짓고, 백현례가 글씨를 썼다.

2.봉정사 극락전

종 목 국보 제1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 봉정사

시 대 고려시대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신문왕 2년(682) 의상대사가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극락전은 원래 대장전이라고 불렀으나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1972년 보수공사때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지붕을 크게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담긴 상량문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전통 목조건물은 신축후 지붕을 크게 수리하기까지 통상적으로 100~150년이 지나야 하므로 건립연대를 1200년대 초까지 올려볼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보고 있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창문을 내었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봉정사 극락전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본받고 있다.

3.부석사 무량수전

종 목 국보 제1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 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4.부석사 조사당

종 목 국보 제1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51

시 대 고려시대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5.해인사 대장경판

종 목 국보 제3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10 해인사

시 대 고려시대

대장경은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말하며, 불교경전의 총서를 가리킨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4∼35년(1237∼1248)에 걸쳐 간행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간행되었다고 해서 고려대장경이라고도 하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고 8만 4천 번뇌에 해당하는 8만 4천 법문을 실었다고 하여 8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을 만들게 된 동기는 고려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이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지자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으며, 그래서 재조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몽고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새긴 것이다. 새긴 곳은 경상남도 남해에 설치한 분사대장도감에서 담당하였다.

원래 강화도 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보관되었던 것을 선원사를 거쳐 태조 7년(1398) 5월에 해인사로 옮겨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해인사 법보전과 수다라장에 보관되어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한 숫자를 보면 81,258장이지만 여기에는 조선시대에 다시 새긴 것도 포함되어 있다. 경판의 크기는 가로 70㎝내외, 세로 24㎝내외이고 두께는 2.6㎝ 내지 4㎝이다. 무게는 3㎏ 내지 4㎏이다.

구성을 보면 모두 1,496종 6,568권으로 되어있다. 이 대장경의 특징은 사업을 주관하던 개태사승통인 수기대사가 북송관판, 거란본, 초조대장경을 참고하여 내용의 오류를 바로잡아 대장경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경판은 현재 없어진 송나라 북송관판이나 거란의 대장경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수천만 개의 글자 하나 하나가 오자·탈자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그 보존가치가 매우 크며,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니고 있는 문화재이다. 또한 200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6.용두사지 철당간

종 목 국보 제4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시 대 고려시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현재 청주에는 이 유물과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7.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종 목 국보 제4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지금의 손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8.부석사 조사당 벽화

종 목 국보 제4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 대 고려시대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벽면 전체를 그대로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에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천부상은 우아한 귀족풍으로 양감이 풍만하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9.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종 목 국보 제4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63-1 월정사

시 대 고려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한 월정사 안에 있는 탑으로,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상이 마주보며 앉아 있다.

탑은 8각 모양의 2단 기단 위에 9층 탑신을 올린 뒤,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을 새겨 놓았고, 아래·위층 기단 윗부분에는 받침돌을 마련하여 윗돌을 괴어주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일반적인 석탑이 위층으로 올라 갈수록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과 달리 2층 탑신부터 거의 같은 높이를 유지하고 있으며, 1층 탑신의 4면에 작은 규모의 감실(불상을 모셔두는 방)을 마련해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계단 모양의 받침을 두지 않고 간략하게 마무리하였고, 가볍게 들려있는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아 놓았다. 지붕돌 위로는 머리장식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데, 아랫부분은 돌로, 윗부분은 금동으로 만들어서 화려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고려시대가 되면 4각형 평면에서 벗어난 다각형의 다층석탑이 우리나라 북쪽지방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는데, 이 탑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고려 전기 석탑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당시 불교문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와 조각수법이 착실하여 다각다층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또한 청동으로 만들어진 풍경과 금동으로 만들어진 머리장식을 통해 금속공예의 수법을 살필 수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0.수덕사 대웅전

종 목 국보 제4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19

시 대 고려시대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11.강릉 임영관 삼문

종 목 국보 제5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 강릉시 용강동 58-1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시대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형태이다.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2.연곡사 북승탑

종 목 국보 제5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연곡사

시 대 고려시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라면, 수행이 높았던 스님의 사리를 두는 곳이 승탑이다. 구성은 석탑과 비슷해서, 기단 위에 사리를 모시는 탑신을 두고 그 위에 머리장식을 얹게 된다.

이 승탑은 연곡사 내의 북쪽 산 중턱에 네모나게 둔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 곳에는 북 승탑 외에도 구례 연곡사 동 승탑(국보 제53호),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보물 제154호) 등이 더 모셔져 있다. 북 승탑은 그 중에서 가장 형태가 아름다운 동 승탑을 본떠 건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크기와 형태는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기단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받침돌은 2단으로,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위에는 두 겹으로 된 16잎의 연꽃무늬를 각각 새겨두었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누어 연꽃과 돌난간을 아래위로 꾸몄다. 특히 윗단에는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속에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를 돋을새김해 두었다. 탑신의 몸돌은 각 면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 등을 꾸며놓았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는데, 동 승탑과 마찬가지로 기와 끝에 막새기와의 모양을 새겨두었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네 마리의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긴 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승탑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스님을 기리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북 승탑’이라고만 부르고 있다. 동 승탑이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반면에 북 승탑은 그 후인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8각형 승탑을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이다.

13.법천사지 지광국사 탑비

종 목 국보 제5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강원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산70

시 대 고려시대

법천사터에 세워져 있는 지광국사(984∼1070)의 탑비로, 국사가 고려 문종 24년(1070)에 이 절에서 입적하자 그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사리탑인 현묘탑과 함께 이 비를 세워놓았다. 현묘탑은 현재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탑비만이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거북은 목을 곧게 세우고 입을 벌린 채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은 거북이라기보다 용의 얼굴에 가까운 형상으로, 턱 밑에는 길다란 수염이 달려 있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인데,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릿돌은 네 귀가 바짝 들려진 채로 귀꽃을 달고 있는데, 그 중심에 3단으로 이루어진 연꽃무늬 조각을 얹어 놓아 꾸밈을 더하고 있다.

비문에는 지광국사가 불교에 입문해서 목숨을 다할 때까지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정유산이 짓고, 글씨는 안민후(安民厚)가 중국의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삼아 부드러운 필체로 썼다.

고려 선종2년(1085)에 세워진 작품으로, 거북등의 조각수법과 머릿돌의 모양이 새로운 것이 특징이다. 비앞면 가장자리에 덩굴무늬를 새기고, 양 옆면에 정교한 조각을 한 치밀함이 돋보여 형태와 조각이 잘 어울리는 고려시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14.청자사자유개향로

종 목 국보 제6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향로로, 높이 21.2㎝, 지름 16.3㎝이다.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사자 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는 3개의 짐승모양을 한 다리가 떠받치고 있는데, 전면에 구름무늬가 가늘게 새겨져 있다. 몸체 윗면 가장자리에도 세 곳에 구름무늬를 배치하였다.

뚜껑은 대좌에 앉아있는 사자모양을 하고 있으며, 대좌에는 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사자의 자세는 뚜껑의 왼쪽에 치우쳐 있어 시각적인 변화에서 오는 조형효과를 노린 것으로 해석된다. 사자는 입을 벌린 채 한쪽 무릎을 구부린 상태에서 앞을 보고있는 자세이며, 두 눈은 검은 점을 찍어서 표현했다. 사자의 목 뒤쪽과 엉덩이 부분에는 소용돌이모양의 털이 표현되었고, 꼬리는 위로 치켜올려 등에 붙인 모습을 하고 있다.

유약의 색은 엷은 녹청색으로 광택이 은은하다. 구조적으로 보면 몸체에서 피워진 향의 연기가 사자의 몸을 통하여 벌려진 입으로 내뿜도록 되어있는데, 아름답고 단정하여 이 시기 청자향로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2세기 전반기에 비취색의 청자가 절정에 달하였을 때 이와 같이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본뜬 상형청자가 많이 만들어졌다. 특별히 사자향로에 대해서는 중국 송나라 사람들도 극찬을 하였던 훌륭한 작품이다.

15.청자비룡형주자

종 목 국보 제6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주전자로 높이 24.4cm, 밑지름 10.3cm이다.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가진 특이한 형태의 동물을 형상화했는데, 이런 물고기모양은 옛날부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로 건축물에 많이 장식하였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용의 머리모양이고, 이빨과 지느러미, 꼬리 끝에는 백토(白土)를 발랐다. 얼굴의 털이나 지느러미들을 매우 가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주전자 몸체에는 비늘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고, 중앙부에는 앞뒤로 커다란 갈퀴모양의 옆지느러미가 묘사되었다. 손잡이는 연꽃줄기 모양으로 주전자의 몸체 위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고, 뚜껑은 물고기의 꼬리부분을 본떠서 만들었다.

전체적인 구조로 볼 때 기이하면서도 각 부위를 갖춘 한 마리의 상상의 동물모습을 하고 있다. 비취빛의 유약색과 더불어 지느러미와 꽃무늬에 나타난 세밀한 음각 표현은 능숙한 솜씨를 보여준다. 이 주전자는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모방해서 만든 상형청자 중에서도 매우 기발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16.경천사 십층석탑

종 목 국보 제8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경천사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있던 절로, 고려시대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 세워져 있었던 이 탑은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무단으로 반출되었던 것을 되돌려 받아 1960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3단으로 된 기단은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고, 그 위로 올려진 10층의 높은 탑신 역시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이었다가, 4층에 이르러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기단과 탑신에는 화려한 조각이 가득 차 있는데, 부처, 보살, 풀꽃무늬 등이 뛰어난 조각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4층부터는 각 몸돌마다 난간을 돌리고, 지붕돌은 옆에서 보아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형태의 기와골을 표현해 놓는 등 목조건축을 연상케 하는 풍부한 조각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다. 탑의 1층 몸돌에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만들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 많이 출현했던 고려시대에서도 특수한 형태를 자랑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도 특이하다.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조각수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끌며, 지붕돌의 처마가 목조건축의 구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양식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훼손되었던 원래의 탑 형태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복원작업을 거쳐 현재 새로 개관한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7.청자소문과형병

종 목 국보 제9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장단군에 있는 고려 인종의 릉에서 ‘황통 6년(1146)’이란 연도가 표기된 책과 함께 발견된 화병으로, 높이 22.8㎝, 아가리 지름 8.8㎝, 밑지름 8.8㎝ 크기이다.

참외 모양의 몸체에 꽃을 주둥이로 삼아 표현한 매우 귀족적인 작품으로 긴 목에 치마주름 모양의 높은 굽이 받치고 있는 단정하고 세련된 화병이다. 담록색이 감도는 맑은 비색 유약이 얇고 고르게 발라져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사당리 7·8호 가마터를 중심으로 동일한 청자조각이 발견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러한 양식은 다른 고려 고분의 출토품에도 보이며 중국의 자주요와 경덕진 가마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병이 발견된다.

고려 청자 전성기인 12세기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우아하고 단정한 모습과 비색의 은은한 유색이 돋보이는 참외모양 화병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18.청자칠보투각향로

종 목 국보 제95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전기의 청자 향로로, 높이 15.3㎝, 대좌지름 11.2㎝의 크기이며 뚜껑과 몸통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뚜껑은 향이 피어올라 퍼지도록 뚫어서 장식한 구형(球刑) 부분과 그 밑에 받침 부분으로 되어 있다.

구형 부분 곳곳의 교차 지점에는 흰 점이 하나씩 장식되어 있다. 몸통은 두 부분으로 윗부분은 둥근 화로 형태인데, 몇 겹의 국화잎으로 싸여있고 다시 커다란 국화잎이 이를 받치고 있다. 아래 부분은 향로 몸체를 받치고 있는 대좌로, 3 마리의 토끼가 등으로 떠받들고 있다. 대좌의 옆면에는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토끼의 두 눈은 검은 점을 찍어서 나타냈다. 유약은 회청색으로 은은한 광택이 난다.

이 작품은 상감청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고려 청자에서는 드물게 다양한 기교를 부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적인 섬세한 장식이 많은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잘 잡힌 안정감 있는 뛰어난 청자 향로이다.

19.청자상감모란문항

종 목 국보 제9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 만들어진 청자 항아리로 크기는 높이 20.1㎝, 아가리지름 20.7㎝, 밑지름 14.8㎝이다.

몸통에는 앞뒤로 모란이 한 줄기씩 장식되어 있다. 모란꽃은 잎맥까지도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몸체의 한 면마다 가득히 큼직한 문양을 넣어 인상적이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특히 꽃은 흰색으로 잎은 검은색으로 상감하였는데, 꽃을 중심으로 잎을 좌·우·상·하로 대칭되게 배열하였다. 유약은 맑은 녹색이 감도는 회청색으로 매우 얇고 고르게 칠해져 있다.

유약의 느낌이나 항아리의 형태로 보아 12세기경의 작품으로 보이는 이 항아리는 꽃과 잎이 큼직하게 표현됨으로써 흑백의 대비가 강하여 시원한 느낌을 주며, 상감기법의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20.남계원 칠층석탑

종 목 국보 제10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경기도 개성 부근의 남계원터에 남아 있던 탑으로, 예전에는 이 터가 개국사의 옛터로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려져 왔으나, 나중에 남계원의 터임이 밝혀져 탑의 이름도 남계원칠층석탑으로 고쳐지게 되었다. 1915년에 탑의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만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 이후 원 위치에 대한 조사 결과 2층으로 구성된 기단이 출토되어 추가 이전해 석탑 옆에 놓았다가 다시 복원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세워져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7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얼핏 보면 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듯하나 세부적으로는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기단은 신라의 일반형 석탑에 비해 아래층 기단이 훨씬 높아졌고, 상대적으로 2층 기단이 약간 낮아져 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조성하였으며,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두툼해 보이는 처마가 밋밋한 곡선을 그리다 네 귀퉁이에서 심하게 들려져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밑면에는 3단씩의 받침이 얕게 새겨져 있다. 탑의 머리장식으로는 노반과 복발만이 하나의 돌에 조각되어 남아있다.

이 탑은 고려 중기 이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 전체에 흐르는 웅건한 기풍과 정제된 수법은 신라탑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고려시대 석탑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915년 탑을 옮겨 세울 때, 탑신부에서 두루마리 7개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려 충렬왕 9년(1283)에 탑 속에 넣은 불교경전으로, 이 때 탑을 보수했음을 알 수 있다.

21.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

종 목 국보 제10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목종 때의 승려인 홍법국사의 부도로, 충청북도 중원군(현 충주시)의 정토사 옛터에 있던 것을 1915년에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홍법국사는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 초에 활약하였던 유명한 승려로서 당나라에서 수행하고 돌아와 선을 유행시켰으며, 고려 성종 때 대선사를 거쳐 목종 때 국사의 칭호를 받았다.

기단은 네모난 바닥돌을 깐 후에 8각의 아래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엎어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높직한 괴임을 두어 가운데받침돌을 올린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놓은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에는 구름을 타고 있는 용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고, 윗받침돌에는 아래와 대칭되는 솟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 탑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탑신의 몸돌로, 둥근 공모양을 하고 있다. 몸돌에는 공을 가로·세로로 묶은 듯한 십(十)자형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며, 그 교차점에는 꽃무늬를 두어 장식하고 있다. 지붕돌은 별다른 장식은 없으나 여덟 곳의 모서리마다 꽃조각을 둔 것이 눈에 띄는데, 아쉽게도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다. 삿갓 모양으로 깊숙이 패인 지붕돌 밑면에는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8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신라의 부도형식을 잃지 않으면서 일부분에서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 작품으로, 제작연대는 홍법국사가 입적한 고려 현종 8년(1017) 이후로 보고 있다. 공모양의 몸돌로 인해 ‘알독’이라고 불려지기도 한 이 탑은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부도로, 섬세한 조각과 단조로운 무늬가 잘 조화되어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22.선죽교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9호

소 재 지 개성시 선죽동

시 대 고려시대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이다.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 1) 송도(지금의 개성시)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길이 8.35m, 너비 3.36m의,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다리이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 4)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였다.

선죽교는 1392년(조선 태조 즉위년) 정몽주가 후에 태종이 된 이방원의 일파에게 피살된 장소이기도 하다. 원래 선지교라 불렸는데,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 하여 선죽교로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지금은 통행을 제한하는 대신 행인을 위하여 바로 옆에 좁은 돌다리를 가설하였다. 다리 옆에 비각 안에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서 있다. 또 선죽교 서쪽으로 정몽주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숭양서원(북한 국보 128)과 표충비가 있다.

23.개성 성균관 (고려 성균관)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7호

소 재 지 개성시 부산동

시 대 고려시대

992년(고려 성종 11)에 세운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현재의 건물은 1602~161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원래는 고려의 별궁(別宮)인 대명궁이 있던 곳이었는데 유교 경전에 관한 사무를 보는 숭문전으로도 사용되었다가, 1089년에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고려는 992년에는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을 설립하고 국가 관리 양성 및 유교 교육을 담당하였다. 1304년(충렬왕 30)에 국자감의 이름을 국학으로 바꾸면서 대성전을 짓고, 1310년(충선왕 2)에 성균관으로 바꾸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렸던 것을 1602년(선조 35)에 복원하였다.

고려말 개혁에 앞장섰던 신진사대부들이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건물은 남북 중심축을 따라 앞에 명륜당이, 뒤에 대성전이 배치되었다. 현재 성균관이 개성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개성 근처에서 발굴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모아 전시하고 있으며, 뜰에는 주변의 절터에서 가져온 탑과 불상들을 모아 놓았다.

24.개성 첨성대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31호

소 재 지 개성시 송악동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천문관측을 위해 축조한 첨성대로, 고려의 왕궁 터인 개성 만월대 서쪽에 있다. 919년(고려 태조 1) 연경궁을 세울 때 축조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천문 관측기구를 올려 놓았던 축대만 남아 있다.

첨성대는 네모난 5개의 주춧돌 위에 화강석 기둥을 세우고 2.2×2.2m 크기의 돌마루를 깐 형태로, 7세기경에 축조되었던 경주 첨성대와는 구조가 다르다. 각 기둥은 크기 0.4×0.2×2.8m, 지면에서 돌마루까지의 높이는 2.3m이다.

땅바닥에서 돌마루까지는 디딤돌이나 사다리로 오르내렸을 것으로 짐작되나,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첨성대의 돌마루와 기둥에는 관측기구들을 설치하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름 12cm, 깊이 9cm의 구멍 1개와 지름 4cm, 깊이 3.5cm의 구멍 2개가 있다.

경주 첨성대에 이어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서 천문 관측을 진행해 온 사실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고려 천문학의 발전 모습을 실물로 밝혀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25.만월대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2호

소 재 지 개성시 송악동

시 대 고려시대

송악산 남쪽 구릉지에 있는 고려 궁터로, 1361년(고려 공민왕 10)에 모두 불에 타서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8·15광복 후 발굴하였다.

궁의 중앙 높은 축대 위에 정전인 회경전 터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궁성 동쪽 벽까지 약 135m, 서쪽 벽까지 약 230m이며, 남쪽 벽의 성문인 승평문까지 약 250m이다.

건물배치는 크게 보아 회경전 중심의 외전 일곽, 장화전 중심의 내전 일곽과 서북쪽의 침전 일곽으로 구분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구릉지에 위치한 지형적 특성상 높은 축대를 쌓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건물들의 배치 또한 자유롭게 구성했다는 점이다.

회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된 본채의 좌우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익사)가 붙어 있는 형태이다. 높은 축대 정면에는 넓은 장대석 계단을 4군데 설치하였다.

남아 있는 흔적들로 보아 정남의 승평문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동락정과 신봉문·춘덕문·춘궁·태초문이 있었으며, 장화전·원덕전·장령전·연영전·자화전 등과 왕이 거처하던 건덕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개천에 놓인 돌다리 만월교, 수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였던 임천각, 불교사찰인 법운사와 내제석원 터도 발굴되었다. 또한 수많은 기와와 함께 지붕의 마루기와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잡상이 출토되어 당시 궁궐의 지붕 장식 형태를 알 수 있다.

26.광통보제선사비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2호

소 재 지 개성직할시 개풍군 해선리

시 대 고려시대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2호이다. 광통보제선사라는 절의 내력을 기술한 고려 말기의 석비로, 이 절을 중건한 1377년에 건립되었다. 공민왕릉 동쪽, 개풍군 해선리 봉명산 광통보제선사터에 있다. 광통보제선사는 고려 공민왕이 왕비인 노국공주의 명복을 빌던 사찰이다. 원래 이름은 운암사 혹은 창화사, 광암사 등으로 불렸는데 노국공주의 원찰이 되면서 공민왕이 '광통보제선사'라는 사액을 내렸다고 한다.

석비는 지대석·대석·비신·옥개석으로 이루어졌는데, 비신석만 회색의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다른 부분의 석재는 화강암이다. 높이 2.2m, 비신 길이 2.1m, 두께는 0.4m이다.

대석은 직사각 모양에 복련을 빙둘러 장식하였다. 비신은 상하로 나누고, 하단에는 문양을 장식하고 상단에는 비문을 새겼다. 옥개석은 팔작지붕 형식이며, 3단의 옥개받침이 있다.

비신 전면에는 이색이 짓고 한수가 쓴 비문이 해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손상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는 글자도 많다. 그런데 다행히 «동문선»과 «목은집»에 비의 원문이 전하고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문에는 광통보제선사의 연혁과 공민왕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광통보제선사를 세우게 된 사실, 그리고 최영과 이색 등 왕릉과 보제선사 건립에 관여한 문무백관들의 관직과 성명 등이 적혀 있다. 또한 사찰의 규모와 짓는 과정의 이야기를 밝히고 있다.

비석돌은 공민왕이 중국으로부터 구해 온 것이라고 한다. 비문은 고려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고려 말의 세련된 조각기술을 엿볼 수 있는 석비이다.

27.개성 나성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30호

소 재 지 개성시 송악동 송악산

시 대 고려시대

고려 도성이었던 개성을 둘러싼 성으로, 개성옛성 또는 개성성·나성·외성이라고도 한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은 뒤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현종이 청주의 호족 이가도에게 명하여 축성하였다. 1009년(고려 현종 즉위년) 공사가 시작되어 착공 21년 만인 1029년(현종 20)에 완공하였다.

송악산 꼭대기에서 시작하여 남쪽의 용수산, 서쪽의 지네산, 동쪽의 부흥산 등 높은 산봉우리들을 이용하여 쌓은 평산성식 도성이다. 송악산 남쪽 사면과 남산을 둘러 시가지 전체를 포위하듯이 쌓았다. 둘레는 약 16km, 성벽의 높이는 약 3~4m 정도 된다. 30만 4,000여 명이 동원되었으며, 성벽의 재료는 주위 조건에 따라 돌 혹은 흙을 사용하였으며, 상황에 따라 돌과 흙을 혼합하여 쌓기도 하였다.

또 동서남북의 4대문과 중문 8개, 소문 13개가 있었고 중요한 성문에는 옹성과 치(雉)를 쌓았다. 또한 성벽 위에는 성가퀴를 만들고, 활쏘는 구멍을 냈다. 현재 성문은 모두 없어지고 터만 일부 남아 있다.

1391년부터 약 2년에 걸쳐 쌓은 내성은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을 겪은 후 나성 안의 주요 부분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이다. 나성의 서쪽 성벽 눌리문 부근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남대문과 동대문을 거쳐 북쪽 성벽 북소문 부근까지 약 8.5km로 뻗어 있다. 이로써 개성의 성곽은 발어참성, 내성, 외성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현재 내성은 남대문, 건물터 등이 일부 남아 있다.

28.대흥산성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26호

소 재 지 개성시 박연리

시 대 고려시대

천마산성이라고도 한다. 축성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출토된 기와들로 보아 고려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보이며, 1676년(숙종 2)에 크게 보수하였다. 성의 둘레는 10.1km, 높이는 4~8m 정도이다.

개성 북쪽 대흥산의 산성골을 감싸며 천마산, 청량봉, 인달봉, 성거산 등의 험준한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은 석성이다. 천마산을 연결한 구간은 험한 절벽을 성벽으로 그대로 이용했고 능선과 평평한 구간에는 돌로 성벽을 쌓았다. 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성벽은 바깥쪽에만 쌓아 올리고, 평평하거나 계곡이 있는 곳에서는 양쪽에 쌓았다. 또 절벽이 낮은 곳에는 성가퀴만을 쌓았으며 10개소에 치를 설치하였다.

위를 평평하게 만든 성가퀴가 15~30개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동쪽과 서쪽 벽에만 일부가 남아 있다. 원래 동·서·남·북 4개의 큰 성문과 동소문·서소문 등 6개의 사이문을 갖추었으나 현재는 북문의 축대와 문루만 그대로 남아 있다.

성안에는 본영인 제승당 터의 돌기둥 8개가 남아 있다. 또한 군량미 3,887섬을 저장하였다는 북창·동창·내창·승창의 터가 있으며, 서문 밖에도 5,960섬을 저장하였다는 태안창 터가 남아 있다. 무기와 화약을 저장한 창고 터와 장대 터도 남아 있고, 서문 밖 474m 고지에는 둘레 700m의 돌로 쌓은 망대가 있다. 그밖에 관음사·대흥사·운흥사·개성암 등의 절터와 박연폭포, 크낙새의 보호구역이 있다. 조선 순조 때 나온 개성부의 읍지 《중경지》에 기록이 남아 있다.

29.연복사종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36호

소 재 지 개성시 북안동남대문누각

시대 고려시대

1346년(고려 충목왕 2) 원나라 종장이 만들어 연복사에 걸었던 범종으로, 1563년(조선 명종 18)에 연복사의 화재 때문에 개성 남대문루에 옮겨 걸었다. 종의 크기는 종입 지름 1.9m, 높이 3.12m, 두께 0.23m, 무게는 약 14톤이며, 동합금으로 만들었다.

국립 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보다 약간 작은 거종이다. 중국 종에서 보이는 것처럼 종신 중앙에 여러 줄의 선이 있어서 상부와 하부가 나뉜다. 종걸이는 용 두 마리로 되어 있으며, 음통이 없다. 종신에는 팔괘가 새겨져 있으며, 사방으로 삼존불이 양각되어 있다. 상단부에 종유는 없고, 상대에는 범자가 새겨졌으며, 하대에는 물결무늬 속에 물고기와 용이 새겨져 있다. 종신의 하반부에는 네 곳에 직사각형의 구간이 새겨져 있고 종입 부분은 8잎의 꽃잎처럼 곡선을 이루었다.

이 종에는 이곡이 찬하고 성사달이 글씨를 쓴 긴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는 1346년 원나라 순종의 명을 받아 자정원사 강금강과 좌장고부사 신예가 금강산 장안사에 와서 범종을 만들고 돌아가는 길에 고려 충목왕과 덕녕공주의 요청에 의하여 주조하게 된 것이라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새벽 4시와 밤10시 성문을 열고닫을 때 종을 쳐서 알렸다고 하는데 그 소리가 매우 맑아 100여 리까지 퍼졌다고 전한다.

30.영통사 오층석탑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33호

소 재 지 개성시 용흥리 오관산 영통사터

시 대 고려시대

단층 기단과 5층의 탑신부, 탑머리의 상륜부로 구성된 화강암 석탑이다. 높이 약 6.5m.

괴임대나 하대석 등의 시설이 없이 지대 위에 기단 면석을 그대로 올려놓았다. 우주가 모각된 기단 면석 위에는 큼직한 갑석을 얹었다. 탑신부는 탑신석과 옥개석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는데 각 층의 탑신석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탑신은 고려 중기 이후의 탑에 비해 약간 높다. 옥개석의 옥개받침은 일률적이지 않아서 1층과 2층은 4단, 3 ·4 ·5층은 3단씩 각출되어 있다. 옥개석의 네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탑 꼭대기의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覆鉢)만 남아 있다.

고려 초기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탑이다. 영통사는 고려 현종 때 창건되었다가 폐사된 채 용흥리 오관산 기슭에 절터만 남아 있었는데 2005년 복원된 사찰이다.

31. 영통사 당간지주

종 목 북한 보물급 제37호

소 재 지 개성시 용흥동 오관산 영통사터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2개의 돌기둥으로 되었으며, 한 개의 크기가 높이 4.47m, 너비 1.01m, 두께 20cm이다. 구조는 먼저 밑에 댓돌을 깐 다음 중앙에 72cm의 간격으로 2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당간을 세웠다. 맨 꼭대기에는 너비 18cm, 깊이 11cm의 홈을 안쪽으로 파서 돌기둥을 고정시켰다.

32.영통사 대각국사비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55호

소 재 지 개성시 용흥리 영통사

시 대 고려시대

1125년(인종 3), 고려의 불교를 통일한 천태종의 개조 대각국사 의천의 사적을 새긴 것으로 용흥리 오관산 남쪽 영통사에 있다. 몸체 높이 3.06m, 너비 1.61m, 두께 0.24m, 전체 높이 4.32m.

귀부·비신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귀부는 화강석, 옥개석과 몸체는 대리석이다. 귀부는 용머리형으로, 등에 낮은 비좌가 있다.

비신 앞면 상단에는 ‘증익대각국사비명’이라는 명칭이 있고 그 좌우에 봉황과 보상화무늬를 양각하였으며, 비면 가장자리에도 보상화무늬띠를 양각하였다. 이 꽃무늬 안쪽에 김부식이 짓고 오언후가 해서체로 써서 새긴 2,000여 자의 비문이 있다. 옥개석은 얇고 네모난 돌추녀로 만들고, 처마에는 가름대를 새겼다.

비문에는 어려서 불가에 들어간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서 천태종과 화엄종을 배우고 돌아와 천태종을 개창하기까지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또 비의 뒷면 오른쪽에 대각국사의 문하승 영근이 묘실과 비명을 안립한 사적기를 쓰고 왼쪽에는 혜소가 문도들의 이름 ·직명 등을 써서 새겼다.

비문은 당시의 서체와 서적간행 관계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며, 특히 혜소의 글씨는 명필이다. 지대석을 이루는 바닥돌은 고려시대의 석비들 중에서 가장 크며, 옥개석의 특이한 형식은 12세기경 고려의 조형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33.영통사 동 삼층석탑

종 목 북한 보물급 제35호

소 재 지 황해북도 개성시 용흥동

시 대 고려시대

높이 약 3.97 m. 이 석탑은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37호. 영통사오층탑 좌우에 있는 2기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석탑이다. 1단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을 올려놓은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리고 돌기둥과 판석으로 막아서 만든 기단 각면 중앙에는 두공을 조각하고 있는데, 이는 신라탑의 형식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34.영통사 서 삼층석탑

종 목 북한 국보급 제38호

소 재 지 개성시 용흥동 오관산 영통사터

시 대 고려시대

높이 3.7m인 이 석탑은 북한의 국보급 제37호인 영통사오층탑 좌우에 있는 2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있는 석탑으로, 네모꼴 모양의 구조와 축조기법이 영통사 동 삼층석탑과 비슷하다.

그리고 탑신 네 모서리에는 두드러지게 기둥을 새겼으며, 옥개석에는 네 줄의 굄선을 주어 단조롭지 않은 아름다운 균형과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35.현화사 칠층석탑

종 목 북한 국보 문화유물 제139호

소 재 지 개성시 부산동 고려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39호로 변경되었다. 1020년(고려 현종 11)에 화강암으로 조성된 석탑으로, 원래 장풍군 월고리 영추산 남쪽 기슭 현화사터에 있던 것을 고려박물관으로 옮겼다. 높이 8.64m.

지대석 위 단층 기단, 7층의 탑신부, 정상의 상륜부로 구성된 일반형 석탑이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결구한 괴임대 위 기단 면석은 네 모서리에 돌기둥을 세워 우주를 표시하고, 각 면 가운데에 탱주를 세웠다. 우주와 탱주 사이에는 모전석을 쌓았다.

탑신부의 각층 탑신석은 4면에 모두 감실형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불상과 보살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탑신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를 줄여 안정된 균형감이 있다. 3단의 낮은 옥개받침이 있는 옥개석에는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고, 네 귀퉁이는 반전이 강하여 경쾌한 느낌이다.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 위에 앙련과 보개가 있는데 후대에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모전석을 쌓아올린 기단면석과 탑신석에 정교하게 조각된 보살상들이 특징적이며, 옥개석의 날렵한 곡선들로 보아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유물이다. 현화사는 고려시대 역대왕실의 각종 법회가 열렸던 도량으로,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36.불일사 오층석탑

종 목 북한 국보 제135호

소 재 지 개성시 부산동 고려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고려 광종이 어머니 유씨의 원당으로 세운 불일사에 있던 탑으로, 951년(고려 광종 2)에 조성되었다. 개성시 내성동공원 안에 있던 것을 1960년 개성시의 고려박물관으로 옮겨 세웠다. 높이 7.94m로, 재질은 화강석이다. 이 탑을 옮길 때 첫 단과 둘째 단의 탑신 안에서 20여 개의 금동탑들과 고려청자, 사리함, 구슬 등 많은 불교 경물들이 발견되었다.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 그리고 정상의 상륜부로 구성된 일반형 석탑이다. 노반석과 보주로 된 상륜부는 없어진 것을 새로 만들었다. 기단은 한 변의 길이 4.32m이다.

탑신은 유물을 보관한 첫 층만 특히 높게 하였고,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든다. 3단의 옥개받침이 있는 옥개석은 위로 올라갈수록 낙수면의 경사가 크다. 예리한 반전이 있는 각 면의 합각 부분에 풍경을 달았던 흔적이 있다.

불일사는 개성시 판문군 선적리 보봉산 남쪽 기슭에 있던 사찰로, 조선 중엽에 폐사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소박하면서도 웅장한 느낌을 주며, 고려 초기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으로 조성된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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