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에서 풍수지리

한국사에서 풍수지리

작성일 2019.10.15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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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풍수지리가 신라때 들어온거에요 아니면 통일신라때 들어온거에요???
한국사 관점으로 설명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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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풍수지리설이 도입된것은 삼국시대 입니다.

한국 문헌에서 풍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탈해왕에 관한 대목에 왕이 등극하기 전 호공으로 있을 때, 산에 올라 현월형의 택지를 발견하고 속임수를 써서 그 택지를 빼앗아 후에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백제가 반월형의 부여를 도성으로 삼은 것도, 고구려가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도 모두 풍수사상에 의한 것입니다.

삼국시대 풍수지리설

삼국시대에 도입된 풍수사상은 신라 말기부터 활발하여져 고려시대에 전성을 이루어 조정과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특히 신라 말기에는 도선과 같은 풍수대가가 나왔으며, 그는 중국에서 발달한 참위설을 골자로 하여 지리쇠왕설·산천순역설 및 비보설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지리는 곳에 따라 쇠왕과 순역이 있으므로 왕지와 순지를 택하여 거주할 것과 쇠지와 역지는 이것을 비보(도와서 더하다)할 것이라고 말한 일종의 비기도참서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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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땅, 의 흐름을 읽어 이것을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지리. 바람은 기운을 흩고 물은 기운을 모이게 하여서, (바람을 막는 것은 아니고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 장풍득수(藏風得水)로 풍수(風水)다.

삼국시대부터 민간에 뿌리내렸던 토속신앙에서 비롯하여 현재의 풍수지리가 되어 이어져 내려왔다는 설이 대세이며, 이후 조선시대에 완전히 정착해 널리 퍼져나갔다고 한다. 다만 제도화된 풍수지리사상 자체는 일단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풍수지리라는 말 자체가 중국어이며, 중국의 풍수 사상은 삼국시대보다 천년 이전 시대에 등장했다.

이와는 반대로 과거 선조들이 풍수지리에서 가졌던 신비주의 관점을 유지하거나, 그런 관점의 존재와 유래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견해도 상당수 있다. 대개 돈 받고 터 봐주는 대중 사회의 지관이나 지관 시민단체들은 이쪽 노선이며,(이중에서도 젊은 연령층일수록 후자가 많다) 학계에서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는 조용헌 교수가 있다.

다만 풍수이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이유는 역시 거의 모든 명리학(서양을 포함)이 갖는 대표적 특징에 기인하는데, 첫째. 음양오행주역 사상을 기반으로 했고, 둘째. 이 이론이 여간 해서는 '제대로' 파악하기 쉬운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로 이 이론을 '제대로' 파악했다 해도 실제 현실에 적용하여 응용하고 풀어나가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리고 어딜가나 돈을 노리는 사람, 실력에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널려 있기 때문에 과거나 지금이나 같은 지형을 놓고도 해석이 분분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한국의 풍수지리의 유래는 흔히 신라 말기에 불교 선종의 승려들이 중국에서 수입했다는 설이 대세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생설, 신라 중기 도입설 등도 근거가 있어 여전히 논의되는 상태이다. 일단 물기가 샘솟는 땅에 만든 원성왕릉(괘릉) 같은 사례를 봐도 신라 하대까지는 적어도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는 풍수지리는 아예 도입되지 않았거나, 알려져 있었더라도 왕실과 귀족계층도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라 때도 전불 7처 같은 고유 신앙의 길지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중국식 풍수지리와는 기준이 달랐다.

한국에서 풍수지리학문이 역사적으로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후삼국시대로, 신라 말기 이전 도입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이전에는 극히 일부 지배계층만의 고급 지식이었다고 주장한다.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종과 함께 인기를 끌고, 사회 전환의 추진력이 됐을 때였다. 호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근거지를 명당화해 자기 권위를 확립하였으며, 지방에서 어느 정도 커진 호족들은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반란 루트를 타기도 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발전하여 조선시대에 가장 번성하게 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사람이 살아가는 땅인 양택을 중심의 풍수학설이 사람이 죽은 뒤에 묻히는 땅, 음택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설화나 야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시대에는 석탈해가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호공의 집을 뺏었다고 하며 고려시대에는 왕건의 아버지가 왕기를 받기 위해 개경에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이는 주거 중심의 풍수지리의 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묏자리가 좋았던 덕에 이 되었다, 세종의 묘를 잘못 써서 장손이 망했다, 흥선대원군이 묏자리를 '만 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두 사람의 황제가 나오는 자리'에 잡아서 대한제국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등 묏자리 중심의 풍수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유학자들은 '풍수지리는 미신같은 괴력낙신이니, 그렇게 풍수가 중요하면 공자님이 왜 한마디도 언급을 안 했냐느니 이런 걸 추종해서야 되겠냐'고 신나게 떠들다가 조상 무덤 자리는 풍수지리 상으로 좋은 곳에 잡으려고 몇 대에 걸쳐서 산송을 일삼곤 하는 참으로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현재의 풍수학설은 민간에서는 토착신앙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묏자리 잡는 용도로 사용되는 일종의 미신 취급을 받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조상 묘는 명당에 모시려 기를 쓰고 있으며 관공서나 건물의 입주 등 실생활에도 응용되고 있다. 국립묘지, 박물관, 시청과 도청 급의 건물들은 모두 풍수를 고려하여 위치를 선정한다고 하며, 홍콩은 도시 자체가 풍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에서도 풍수지리가 고려되었다. 정치에 이용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물론 정치에 이용된 것치고 좋은 결말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기업 건물이 풍수지리 자문을 받아 짓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도시전설의 영역.

위에서 풍수지리의 본격적 도입이 후삼국~고려초라고 했듯, 한국사에서 풍수지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는 단연 개성으로, 도시 배치 자체가 송악산 자락의 지형에 최대한 맞춰져있다. 궁궐인 만월대를 둘러싼 궁성은 시가지 서북쪽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고, 궁궐의 정문은 동향으로 나 있으며, 도로망 역시 바둑판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중국 당나라 도시계획의 영향을 받아 궁궐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바둑판처럼 방리 구획으로 도시를 개발한 부여군, 경주시, 서울특별시를 생각하고 개성시가지 지도를 들여다본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체제도 어찌하지 못한 개성의 그 난개발스러움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고려는 한국 양택풍수의 최전성기였던 시기로, 묘청이 풍수지리에 입각해 천도대상지로 건설한 평양 대화궁도 드넓은 대동강변이 아닌 평양 동북쪽 입불산 기슭에 있다. 서울로 따지면 풍수지리 좋다고 경복궁을 우이동에 박아넣은 꼴이다.

반면 한성은 세간에 파다한 인식과 달리 그다지 풍수지리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시는 아니다. 애초에 형세가 좋다고 하여 처음 도성공사를 시작한 곳은 계룡산 신도안이었고, 신도안 건설이 중지된 이후 천도논의에서 이 분야 전문직인 서운관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소명당, 즉 송악 잔류를 강력하게 밀었으며, 그 와중에 하륜의 무악천도론도 제기되었다. 이런 모든 논란을 일거에 잠재운 것이 명에 사신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온 정도전으로, 그는 상소를 통해 송경(개성)이 국토의 중앙이기는 하나 땅이 너무 비좁아 도읍으로는 마땅치 못하다고 비판하는 한편, 쟤들이 음양술수 소리만 해대는데 중국사 봐도 그딴 거 없거등요?라며 한양 천도를 반대하는 풍수쟁이들을 대차게 디스하기도 했다.

도시의 입지 선정에 있어서 북악을 진산과 주산, 주맥 등을 따지는 수준의 기본적인 배려는 있었으나 기존에 아마도 풍수에 입각해 지었을 남경 이궁은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대신 북악산 아래에 네모반듯한 형태의 경복궁을 새로 지었는데 처음부터 풍수지리를 최대한 따졌다면 아마도 창덕궁과 같이 비뚤어진 모양새의 궁궐이 나왔을 것이다.

과학적 근거는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숭례문 화재 당시 수호상인 해태상이 이전되고, 서울역 앞에 있다던 화기를 가라앉히는 연못은 사라진 지 오래고, 관악산 서울대학교 출신 고위직이 많아졌을 때 비로소 숭례문에 화가 났다는 말도 있다.

한국사에서 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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