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에관련한 문헌및 고증
성종실록 (1472년)
세종대왕실록과 함께 역사적 사료가 가장많은 실록입니다 특히 영토 에관련한 자료가 풍부합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년)
조선성종때의 지리서이다. 성종 때 명나라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가 수입되자 왕이 노사신·양성지·강희맹등에 그것을 참고하고, 세종 때의 《신찬 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하여 지리서를 편찬케 하였다. 그들은 성종 12년(1481년)에 50권을 완성하였고, 성종 17년에 다시 증산(增刪)·수정하여 35권을 간행하였다. 그 후 연산군5년에 개수(改修)를 거쳐 중종25년(1530)에 이행(李荇) 등의 증보판이 나오니 이것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 총도(1530년)
1530년경에 제작된 지도로서 독도(우산도)가 울릉도의 서쪽에 그려져 있다.
위치는 부정확하지만 영토의식은 명백히 나타내고 있음을 알수 있다.중종 25년에 완성된 신증 동국 여지승람에 실려있는 팔도총도에 독도가 그려져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770년)
동국문헌비고의 증보판이다. 증보문헌비고는 총 250권의 방대한 분류서로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모든 제도와 문물을 16개 분야로 나누어 연대순으로 정리한 백과사전이자, 국가를 다스리는 데 필수적인 기초 문헌이었다.특히 제161권에 을릉도와 독도에대한 인구 자연환경등을 기록
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 또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라고도 불린다.
영조-정조 시대를 거쳐 고종 대에 이르는 140여 년의 기간에 걸쳐 채제공, 신경준, 김택영, 장지연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참여하여 만들었다.
만기요람(萬機要覽)(1808년)
1808년(순조8년)에 서영보(徐榮輔), 심상규(沈象奎)등이 왕명을 받아 왕이 나라의 군정(軍政)과 재정(財政)을 관리하기 편하도록 만든 책이다. 《재용편(財用篇)》과 《군정편(軍政篇)》이 각각 6권 6편 62절목, 이 5권 5편 23절목이다. 특히 을릉도와 독도표기를분명하게한 지리서가 포함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조선총독부중추원에서 1938년에 활자본을 간행하였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71년에 번역본을 냈다. 재용편은 재정, 군정편은 군정에 관한 내용을 매우 자세하게 담고 있다.
일본측 사료 일본정부 주장및 근거자료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 1667)
일본 이즈모 지방의 관료인 사이또호센이 번주의 명에 의해 편찬한 풍토기로 “북서쪽으로 이틀 낮과 하루 밤을 간 곳에 송도(독도)가 있고, 이곳에서 다시 1일 낮을가면 을릉도가 있다고 기록한 지리서 입니다
통항일람(通航一覽)
에도시대 1566∼1825년 일본의 공식적인 외국과의 관계를 담은 문서를 엮은책 특히 독도문제로 조선과 서신을왕래한 기록이 있음
이를뒤바침하는자료가있고삼국사기(지증왕 본기)에 지증왕13년(512) 이사부가 우산국(울릉도)를 복속한 이래 우리나라의 고유영토가 되었다고 했으며, 고려사에는 우산국 사람들이 고려에 토산물을 바친 기록이 나와있는데 독도가 우산국 영역임을 밝혔고 고려 고종 때 최우가 우산국에 사민정책을 실시했으나 실패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 50페이지 3번째 줄에는 강원도 울진현 조에는 울릉도와 별도로 독도의 존재를 형제섬으로 처음 기록함으로써 독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성종실록에는 독도의 지형묘사,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증보문헌비고, 만기요람의(군정편),에는 을릉도와 독도의 지리 지도 자연환경을기록하였고
일본의 자료인 은주시청합기(일본에서 기록한 사서) 통항일람등을 살펴볼때 기록으로는 우리나라땅임이 기록한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