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산문명을 상징하는 것은 적석총(積石塚)이다. 한 민족의 전형적 무덤양식은 그 민족의 고유 전통으로 이는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는 묘장법(墓葬法)”이 된다는 것을 입증한다. 실제 문헌상으로 볼 때 홍산문화와 동일한 묘장법을 채용했던 나라는 고조선이라고 알려져 있다. 중국의 묘제는 토광묘(土壙墓)로 홍산문명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우하량의 16개 유적지 가운데 13곳이 돌무덤, 즉 적석총 유적지이다. 적석총은 고대로부터 삼국 시대 때까지 계속 나타나는 동이족의 대표적 묘제墓制로 황하 지역의 화하족 문명권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은 것이다. 충적층 지대인 황하 지역에 살던 화하족(중국 한족의 조상)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직접 주검을 묻거나 관을 묻는 형식의 널무덤(土壙墓)을 지었고, 산악과 평지가 공존하는 요서 지역에 살던 동이족은 주로 돌무덤을 지었다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천원지방 구조는 배달 시대 이후 고조선 때 지은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 명나라 때 지은 북경의 환구단, 조 선 말기에 고종 황제가 세운 원구단 등 제천단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5,500년 전에 배달 동이족이 세운 우하량 제단은 동북아 제천단의 원형이고, 나아가 배달의 천제 문화는 동북아 천제 문화의 뿌리인 것이다.<환단고기 역주본,상생출판>
각 층의 둘레를 따라 늘여 세워진 원통형 토기 또한 이 원형 건축물이 제단이었음을 말해준다. 요령성 조양시 의 덕보박물관 왕동리王冬力 관장은 이 독특한 토기에 대해 “토기의 위쪽에 덮개가 없고 아래쪽에 바닥이 없는 것은 천지가 하나로 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제사장은 제단의 주변에 원통형 토기를 둘러 세워 하늘과 통하는 소통로를 만들었다” 라고 해석한다.
홍산문화의 우하량 여신묘 제단터에는 희생으로 사용된 곰의 아래턱 뼈가 발견됐고 여신상 옆에서는 흙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곰상이 발견됐다. 옥으로 만든 곰룡, 즉 옥웅룡(玉熊龍)도 다수 발견됐다. 그러나 홍산문화의 곰토템은 지역이나 시기적으로 단군신화의 웅녀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한민족 문화의 원류일 수 있는 것이다.
☞신석기 시대 4대 문화라 하면 거석문화,채도문화,빗살무늬토기문화,세석기문화인데 요서요 동만주일대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벨트는 이 4대 신석기문화가 모두 모여있는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문화권역이다. 채도문화만을 수용한 중원지역과는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문명권에 속한다.
☞요하 일대에서 발굴되는 빗살무늬 토기는 중국 중원의 황하 일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북방 계통의 문화이다. 요하 문명의 주도세력들은 중원에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빗살무늬가 전파되는 길로 이동한 세력임을 알 수 있다.결국 BC 6000년 당시 부터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요서 지방과 발해만 연안은 중원과 다른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 문화는 결국 예·맥족(고조선과 고구려)으로 이어졌다. 빗살무늬 토기들이 나온 곳들을 살피면 이른바 발해문명권, 다시 말해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이족의 영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문화 유형인 빗살무늬토기 문화가 만주지방과 한반도에서 오랫동안(기원전 6000년쯤부터 2000년쯤까지) 유행했다는 사실은 적어도 두 지역이 동일한 문화영역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화의 동질성은 민족의 동질성과도 통한다 (이형구 교수)
☞요하문명의 주인공이 사용한 ‘빗살무늬 토기’는 ‘시베리아 남단-만주-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 문화 계통으로 황하문명에는 없는 것이다. 다롄대학의 한 교수도 “(이 지역의) 평저통형관은 동북삼성, 내몽고 동남부, 흑룡강 하류 및 한반도 동북구와 서북부 지역에서 발견된다…모두 동방의 전통문화에서 기원했다”고 했다
☞옥기 가장 이른 시기의 귀고리 장식품인 옥결( 玉 )이 나왔다. 우리나라 강원 고성군 문암리에서 발굴된 옥결이 이와 똑같다(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한반도 남쪽 여수 안도리에서도 6천년전 똑가은 양식의 옥귀걸이가 발굴되어있습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박물관에도 지금으로부터 6000년 전의 옥결이 전시되어 있다. 이런 옥결은 일본에서도 나왔다.
☞흥륭화문화의 상징인 옥 귀걸이도 같은 형태가 동 시대의 한반도에서 출토됐다.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패총이 그것이다. 황하ㆍ양자강 유역의 것보다 1000년 이상 앞선 흥륭와문화 옥 귀걸이의 놀라운 점은 사용된 옥에 있다. 압록강변 수암 지역의 옥을 450㎞를 옮겨와 가공한 것이다. 이는 기원전 6000년께 요서·요동·한반도 북부가 동일 문화권이었음을 보여준다.
☞성분 분석까지는 모르겠지만, 외양 으로 보면 흥륭와의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기원전 4000 ~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되는 전남 여수시 안도패총의 옥귀걸이도 흥륭와의 것과 똑같은 모습이다. 이것은 요하일대의 신석기를 주도한 세력이 한반도 선주민들과 연결된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하량 제16지점 4호묘에서 5500년전 비파형 옥검 발굴. 우하량 여신묘유적(BCE 3500) 에서는 큰 규모의 돌무지무덤과 흙으로 만든 신상이 출토되었고, 중앙에 있는 석석묘에서는 많은 양의 옥기가 출토되었다. 이들 옥기 가운데 옥으로 만든 비파형동검이 출토되어 고조선문화와의 관계를 입증해준다.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에서부터 보이는‘치(雉:석성에서 돌출된 부분)를 갖춘 석성’도 고구려에서 부활한다. 이 역시 고구려 이전까지 중원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요서지방의 홍산문화(紅山文化) 유적지에서 곡옥의 기원을 알려 줄 만한 옥룡들이 발견된 점, 무엇보다 이 같은 곡옥이 중국의 중원지방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홍산문화 유적지의 봉분들이 중국의 분묘양식과는 달리 한반도의 적석총, 즉 돌무지무덤 형태를 띠고 있고 진주 남강 일대에서 홍산문화 유적과 유사한 곡옥을 비롯한 돌무지무덤, 빗살무늬 토기 등이 발견되고 있어요." 이 같은 사실로 미뤄 홍산문화 유적지 일대가 중국과는 다른 별개의 문화를 이뤘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는 것. (출처 : 대구MBC문화방송)
<우하량 제2지점 1호 적석총> 유골인데, 머리 위에 이고 있는 물건이 '동곳'으로 판정되어 적성총의 주인공이 상투를 했던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우하량 유적 시기인 BCE3500~ BCE3000년 경에, 한민족이 상투 머리를 했던 게 확인된 셈이다.
2012년 7월 초,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내몽고 제1공작대와 오한기박물관의 합동발굴팀은 중국 내몽고 적봉시 오한기 흥륭구興隆溝 유적 제2지점에서 BCE 3300년 것으로 추정되는 ‘도소남신상(陶塑男神像, 흙으로 구운 남신상)’을 발굴하였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BCE 3300년경은 원시 신석기시대로 배워왔는데 그러한 원시시대 때 인류가 수행을 했다는 증거인 수행상이 발견된 것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BCE 3897년의 초대 환웅이 ‘주원유공呪願有功’ 수행했다는 기록이나, BCE 3500년경에 태우의 환웅이 ‘묵념조식’의 수행을 했다는 기록을 사실로 입증하는 귀중한 출토품
홍산문화에서 나온 유골을 mtDNA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은 분포를 나타낸 35.71%가 16172라는 하위 변이에 속하며 이는 중국한족에서는 잘나타나지않고, 대부분 우리 현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에서 나타나는 변이입니다. 실제로 현대 한국인중 일부는 이 유전자변이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동북아에 세운 한민족 최초 국가
배달민족의 유래
예로부터 우리민족을 배달민족 배달겨레 또는 배달의 자손 배달의 기수라고도 합니다. 이 배달은 무엇일까요?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요 ? 언제부터 우리는 배달이라 불리웠을까요? 우리가 진정 한국인이라면 배달이라는 유래와 의미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환단고기를 보면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배달은 밝음을 뜻하는 배(밝)와 땅을 뜻하는 달을 합친말로서 '광명의 동방 땅'을 뜻한다. 우리 민족을 '배달겨레'라 하는 것은 한민족사의 첫 번째 나라인 배달국의 배달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배달국은 18명의 환웅께서 1565년 동안 통치하신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입니다.
초대 환웅의 배달 건국
환국 시대 말, 인구 증가와 물자 부족 등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서자부 부족의 환웅이 새로운 터전을 개척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이에 금악(알타이산)산과 삼위산과 백두산을 두루 살펴 본 환국의 마지막 임금 지위리 환인께서 백두산은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라 하고, 환웅을 동방 개척의 선봉장으로 세우셨습니다.
환인은 백두산을 향해 떠나는 환웅에게 국통 계승의 상징으로 천부天符와 인印을 내려 주고, 문명 개척단 3천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문명개척단을 이끌고 마침내 백두산에 도착한 환웅은 천평(하늘의 땅)이란 곳에 우물을 파고 그곳을 중심으로 농사짓는 땅을 구획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시(신의 도시)에 도읍을 정하여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고, 백두산 신단수神檀樹아래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려 나라 세움을 고하였습니다. 이 배달을 세운 분이 초대 환웅이신 거발환 환웅이십니다. 이로써 동북아 한민족사의 최초 국가인 배달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홍익인간 이념의 유래
마지막 환인천제에게서 국통 계승의 증표로 천부와 인을 전수 받은 거발환 환웅은 또한 국가 통치이념도 이어받았습니다. 그 이념이 바로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입니다.홍익인간 이념은 환국, 배달, 고조선 시대에 가장 강렬하게 실현되었지만, 오늘날까지 한민족의 국시로 또는 생활이념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홍익 사상은 한민족이란 울타리를 넘어서 온 인류에 대한 헌신과 봉사, 자비와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홍익인간은 ‘온 인류의 생존 이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환웅천황은 가르침의 시대를 펴다
거발환 환웅은 제세이화를 기반으로 홍익인간을 실천하였습니다. 환웅천황은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강론하여 우주관, 신관, 인성론, 수행관에 관한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천부경은 환국 때에 구전되어 오다가 배달시대에 문자로 옮겨진 한민족 최고의 경전입니다. 삼일신고는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환웅천황이 직접 지은, 다섯 장으로 구성된 신학서神學書입니다. 이로 보건대, 6천 년 전 상고 시대에 한민족은 이미 우주와 신과 인간에 대한 지극한 깨달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은 백성들에게도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삼신상제님의 진리, 즉 신교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깨우쳐서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 것입니다.
배달시대 정치제도
환웅이 제세이화와 홍익인간의 도를 실현하기 위해 취한 정치제도 또한 신교에 바탕을 두었습니다.그 제도는 삼신오제三神五帝사상에서 나온 삼백.오사三白.五事입니다. 삼백은 입법부인 풍백, 행정부인 우사, 사법부인 운사를 말하고, 오사는 主穀, 主命, 主刑, 主病, 主善惡이라는 다섯 부서를 말합니다. 이때 오사에서 인간사를 360여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백성을 다스렸다고 하니, 환국 시대에 비해 인간 삶의 방식이 많이 복잡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배달국의 삼대 성인
배달국에는 배달국 삼대 성인이 출현하였습니다. 5대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로 문명의 시조가 된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치우천황 이 세분은 동방 문명의 중심축을 세운 위대한 성인 제왕입니다. 이 세분이 출현한 배달 시대는, 삼신의 세 가지 신성 가운데 문명을 꽃피우는 ‘교화신의 신성이 발현된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인간을 교화시키는 역학, 천문, 의술, 농경술 분야가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배달국의 천도
백두산의 신시에서 출발한 배달국은 점차 도시국가의 틀을 벗고 동북아의 대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배달은 14세 자오지천황(치우천황)은 넓어진 강역을 다스리기 위해 도읍을 백두산 신시에서 서토에 가까운 청구(현 대릉하 유역)로 옮김으로써 치우천황의 전성기이자 배달의 전성기인 청구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배달국은 18명의 환웅께서 1565년 동안 통치하신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입니다. 배달의 민족 배달 겨레 우리가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환단고기는 당연히 위서가 아니다
위서를 구분하는 방법은 현재로서는 공인되고 확실하게 정립된 학설이 없으며 아울러 서지학적인 접근은 오직 일차적인 분석기법으로서 위서판별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서지학적인 판별]은 진위 판별에 있어서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며 그 외에 다른 여러 가지 비교분석법과 진위분별을 위한 기준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는 걸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착각하거나 경시하면 결국 피치 못할 큰 우愚를 범하게 됩니다.
환단고기에 대한 논쟁중의 하나는 그 원본이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유립씨가 편집한 원본이 발견된다고 해도 환단고기의 위서논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다음 단계는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네 책 즉 [삼성기][단군세기][북부여기][태백일사]의 원본문제가 또 다시 대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단고기의 또 다른 원본인 이 네 책의 원본이 세상에 나오지 않는 한 논쟁이 끝나지 않을 수 있다.
과연 원본이 있어야 역사를 인정할 수 있는가? 현재 우리나라의 사서 중의 사서인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직접 쓴 원본이 아니다. 김부식은 1145년 고려 인종 23년에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했는데 현존하는 [삼국사기]는 1573년에 간행된 것이다. 이는 최초의 편찬시기로부터 400여년이 지난 뒤의 간행본이다. 이뿐만 아니라 김부식이 [삼국사기] 자체를 편찬할 당시 역시 이미 삼국시대 초기로부터 무려 1천년이나 지난 시기다.
그러면 [환단고기]를 위서로 주장하는 그러한 서지학적 기준으로 볼 때 1573년에 간행된 [삼국사기] 판본을 인정할 수 있을까?중국의 [사기]나 [한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사기]나 [한서]에 등장하고 있는 삼황오제설은 중국인 스스로도 한나라때 위작된 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누구도 [사기]와 [한서]를 위서라고 폄하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우리의 [삼국사기]건 중국의 [사기]건 [환단고기]와 같은 기준으로 위서 여부를 따진다면 문제의 소지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기준을 가지고 역사를 파헤치고 인정해야 한다면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역사는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새롭게 가다듬는 바람직한 방향은 고대사서의 진위 여부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사서 안에 기록된 구체적 내용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하나하나따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겠다.
글 출처 : 환단고기 위서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 우대석 ]
계연수 선생은 실존인물이며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책과 증언을 통해서 지금까지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그와 그의 환단고기 초간본 편찬에 대한 내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환단고기를 편찬한 계연수(1864~1920)와 스승 이기(1848~1909)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쓰인 다섯 권의 사서를 한 권의 [환단고기]로 묶은 인물은 바로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입니다. 지인들로부터 구한 책을 한 권으로 엮어 편찬한 것입니다.
안함로의 [삼성기]는 운초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고, 원동중의 [삼성기]는 인근의 태천에 살던 백관묵에게서 구하였습니다. [단국세기]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뱃골 사람 이형식의 소장본이었습니다. [태백일사]는 운초의 스승인 해학 이기의 집안에 전해 오던 것이었습니다.
백관묵(1804~?)은 문재로 이름이 높은 명문 집안 출신인데 헌종 6년(1840)에 식년시에 진사로 합격하였고 많은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형식은 1796년생으로 백관묵과 같은 해에 식년시 생원과에 합격하였습니다. 이형식 소장본에는 [단군세기]도 합본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백관묵의 [단군세기]와 동일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 해학 이기와 운초 계연수 초상화>
[환단고기]가 탄생하기까지 백관묵과 이형식을 비롯한 많은 사람의 공덕이 있었지만, 특히 계연수와 이기의 혈성과 희생이 컸습니다. 이기는 전라도 만경 출생으로 정약용의 학통을 계승한 실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습니다. 15세 때 향시에 나가면서 뛰어난 재주와 명성이 여러 고을에 알려졌습니다. 이기는 당시 유명한 선비들과 교류하였는데, 석정 이정직(1840~1910), 매천 황현(1855~1910)과 더불어 호남의 三才라 불리었습니다. 이기의 문장에 대해 이정직은 “대개 백증(이기의 자)의 글은 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이 없어서 마치 꽃 중의 꽃이요, 곡식의 자양분과 같고, 따뜻하고 윤기가 있으며, 법도에 맞고 아담하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이건창(1852~1898)은 “백증의 문장은 수를 놓은 비단이다”라고 평하였습니다. 황현도 “씩씩하고 뛰어나며, 뛰고 달리는 기운이요, 특출하게 아름답고 박학한 문장이다”라고 칭찬 하였습니다.
성리학과 실학을 모두 섭렵한 이기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저항의 일선에서 애국 활동을 하였습니다. 1894년(고종31)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을 찾아가서 ‘동학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올라가 간사한 무리를 물리치고 임금을 받들어 국가의 질서를 새롭게 하자’는 뜻을 전했습니다. 전봉준은 이기의 뜻에 호응하여 남원에서 동학군을 지휘하던 김개남과 협의하도록 하였으나 협의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에 침투해 오자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토지개혁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서울로 올라가 탁지부대신 어윤중을 만나 토지제도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습니다.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강화회의가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릴 때, 이기는 동지들과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호소를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여권이 나오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미국행에 실패한 이기는 동향 후배이자 동지인 나인영(나철 1863~1916)을 비롯한 몇 명의 독립운동가와 그 해 8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과 일본 정계 요인들에게 조선 침략을 규탄하는 서면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투쟁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그 해 11월 소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12월에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던 이기는 곧 이어 모친상을 당해 귀향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권이 기울어지는 위급한 시기였으므로 ‘상복을 벗어버렸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다시 상경하여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들어가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습니다. 또한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월보를 발행하여 국민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이기는 교육의 목적을 국권 회복에 두고, 교육을 통하여 자강자급으로 실력을 길러 나라를 지키자고 주창하였습니다.
1907년에는 육순의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인영, 오기호, 윤주찬, 김인식등과 을사오적 암살을 계획하였습니다. 그러나 계획이 실패로 끝나 7년의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귀양을 갔습니다. 다행히 2년 후에 석방되어 서울로 돌아온 이기는 [호남학보]를 발행하고, 단군 성조의 얼을 기리고 고조선의 역사를 부흥시키자는 취지로 단학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구국운동을 계속 펼쳤습니다. 하지만 끝내 국세가 기울자 1909년 7월 13일 서울의 한 여관에서 절식으로 62년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종 목: 시도기념물 118호
명 칭: 해학이기선생생가 (海鶴李沂先生生家)
분 류: 생가(지)
수 량: 일원(863㎡)
지정일: 2003.12.26
소재지: 전북 김제시 성덕면 대석리 340-1
이기의 생애에서 특히 시선을 끄는 것은, 이기가 [단군세기]를 쓴 이암과, 이암의 현손으로 [태백일사]를 쓴 이맥의 후손이라는 점입니다. [태백일사]가 가보로 전해졌기에 이기는 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기의 지도와 감수 아래 계연수가 발간한 역사서의 최종 결정판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계연수에 대한 기록은 [해동인물지](1969)와 [정신철학통편](1920) 외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두 책이 전하는 내용도 몇 가지 큰 사건에 그칠 뿐입니다. [해동인물지]는 계연수의 자는 인경人卿, 호는 운초雲樵 이고 평안도 선천에서 살았으며, 이기의 문하생이 되어 백가의 책을 섭렵한 후 1890년에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등을 간행하였다고 전합니다.
< 정신철학통편 1920년 발간 >
<해동인물지 1969년 발간>
하지만 이 기록에는 오류가 있습니다. 계연수는 1890년이 아니라 1911년(辛亥)에 책을 발간하였고,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를 환단고기에 함께 묶어 간행하였습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필자가 [환단고기]를 연구하고 서지학적 정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현 단단학회 회장인 양종현(1948~)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계연수의 실체가 좀 더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양종현은 [환단고기]의 전수자인 이유립의 증언을 바탕으로 계연수의 생존 당시 모습을 초상화로 그려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계연수는 1864년에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습니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27세(1890) 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습니다. 1897년(34)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습니다.
1909년 대영절(3월16일)에 이기, 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 해 5월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신상제님께 이를 고할 때, 계연수도 그 자리에 참여 하였습니다. 두 달 후에 이기가 자진하자, 계연수가 그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2년 후인 1911년(48세), 계연수는 스승이 생전에 세세히 감수해 준 [환단고기]에 범례를 지어 붙인 후 드디어 세상에 내놓습니다.
서문에 나와 있듯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책을 옮겨 편집한 후, 자신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1868~1943)와 오동진(1865~1930)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하였습니다.
< 홍범도 와 오동진>
범례에서 계연수는 “환단 이후로 계속 전수되어 온 三一心法(태고시대 동방의 우주사상의 핵심)이 진실로 이 책 속에 들어 있으니, 동방 대광명의 참 진리가 중흥하는 기틀이 아니고 무엇이랴! 손발이 절로 춤추며 흥겨워 외치고 싶고 기뻐서 미칠 듯하도다!”라고 벅찬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발간 의의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며, 또 한편으로 세계 인류가 대립을 떠나 공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으니 더욱 경축할 만한 일이다”라고 밝혔습니다.
1912년 49세 임자 5월에 광개토대왕성릉비 징실고를 발표하였다. (아래 내용 참고)
1914 (51세) 3월 16일 대영절에 단해 이관집 석천 최시흥 송암 오동진 백하 전효운 벽산 이덕수 일봉 박응백 창춘당 양승우 직송헌 이용담 국은 이태집 녹수 서청산 백주 백형규 등 12 선인과 더불어 삭주 천마산에서 제천 혈맹을 거행하고 역사회복운동을 통한 구국운동을 다짐하였습니다.
이듬 해 1915년 10월 단학회의 근거지를 만주로 옮기면서 관전현 홍석랍자구에 배달의숙이라는 교육기관을 열어 청년 학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별파대, 기원독립단 등에 속한 단원들의 사상적 계몽에 주된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단학회가 결성된 지 10여년이 지난 1919년 3월부터 기관지 <단학회보>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제 8호까지 발간하였습니다.
환단고기를 간행한 후 역사 회복뿐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던 계연수는 조선인의 민족혼 말살과 역사 파괴에 혈안이 된 일제가 검거할 제1순위 대상이었습니다.
1919년 조선인의 십보장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해외에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들이 마음에 새겼던 십보장을 소개한다.
(1) 우리는 조선인이다. 세계 인류와 함께 평등하며 신앙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질 수 있는 기본 권리를 버릴 수 없다.
(2) 우리는 환웅천왕님이 처음 태백산에 천강하옵신 목적과 사명을 오늘도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3)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져야 하므로 어떠한 폭력에 대하여 우리의 원칙과 주장이 좌절될 수 없다.
(4) 우리는 조국의 주권과 국토의 회복을 방해하는 자들의 일체의 행동을 방관할 수 없다.
(5) 우리는 일본의 무력침략과 또 그 외에 방조하는 구미 열강들의 외교사상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6) 우리는 모든 파당과 차별을 초월하여 오직 항일투쟁의 통일강화에 전력하지 않을 수 없다.
(7) 우리는 국권회복의 목표를 세우고 오직 현실의 지평선에서 모든 물질과학의 전 분야를 하나에의 길로 이끌어서 먼저 민족의식의 귀일을 사회적 조직으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8) 우리는 적의 어떠한 굴욕과 속박이 있을지라도 언제나 정확한 판단을 찾고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9) 우리는 끝까지 국토를 지키면서 조선인이 먼저 외국의 침략세력에 대한 치욕의 역사와 오늘의 비참한 생활을 잠시라도 잊을 수 없다.
(10) 우리는 매일 아침 마음속으로 성지 백두산을 향하여 염표문을 외우고 가족과 함께 전곡사백이 저축으로 항일운동을 돕지 않을 수 없다.
신시개천 5860년 3월 16일 (서기 1919년)
리상룡,계연수,홍범도,신채호,리탁,최시홍,오동진,리관집,리덕수,김효운,편강렬,량승우,최석준,허경호,박룡담,리봉우,리태즙,주상옥,라창헌,박웅백,최지풍,리용담,김병수,서청산,백형규,김황석,리동규
광무 23년(1919) 기미년 3월 대호산 만세에 참가, 같은 해 3월 16일 이상룡, 홍범도, 여운형, 신채호, 이탁, 최시흥, 오동진, 이관집, 이덕수, 전효운, 편강열, 양승우, 최석순, 허기호, 박용담, 이봉우, 이태집, 주상옥, 나창헌, 박응백, 최지풍, 이용담, 김병주, 서청산, 백형규, 김활석, 이동규 등 24인 서명으로 [朝鮮人 十寶章]을 발표하고 4월에 이상룡 막하에서 군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결국 계연수는 1920년 (57세)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밀정(당시 밀정을 파견한 위순사감독 감영극(감연극)은 조선역사를 고취하는 놈은 일본의 대동방 평화정책을 방해하는 것이니 모두 잡아 없애야 한다‘고 하였습니다-양종현-백년의 여정, 106쪽)의 덫에 걸려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일제는 그의 사지를 절단하여 압록강에 버리고 배달의숙 건물에 불을 질러 계연수가 소장하던 3,000여권에 달하는 서적과 원고를 모두 태워 버렸습니다.
조선이 일본 제국의 흉포한 야욕에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고 절망의 벼랑 끝에 서 있던 그때, 인류의 창세사와 한민족의 9천 년 국통 맥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국사학의 아버지’ 계연수는 이렇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출처 :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66쪽~ 71쪽)
참고 1. 계연수는 실존 인물이 아닌 이유립이 지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수안계씨 족보에도 이름이 없고, 함께 독립운동을 한 지인들의 기록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주와 한반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일본 밀정에 걸려 사지가 토막나서 압록강에 버려졌다. 시체를 건져올리는 현장에서 당시 12살의 어린 소년 이유립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이 광경을 목도했다고 한다. 이는 나중에 이유립의 생생한 계연수에 대한 증언으로 이어진다. 그 증언은 양종현과 같은 제자들에 의해서 나중에 정리된다.
수안계씨 종친회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북한 출신 종친들 중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느라 후손이 끊긴데다가 증언자도 없어 족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계연수를 유령 인물로 매도하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두루 고려하지 않고 단편적인 사실 하나를 내세워 진실을 왜곡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계연수가 실존인물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는, 『해동인물지』(1969)와 계연수 선생이 천부경을 입수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경위가 기록되어있는『정신철학통편』(1920) 등이 있다.
생사를 건 무력 독립투쟁을 벌였던 인물을 증언자가 있음에도 기록에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고 해서 이처럼 부정하는 것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력의 야비한 행위로 볼 수밖에 없다.
참고 2. 1915년 한국통사 내용은 환단고기 초간본의 존재를 반증한다
『단군세기』의 서문에서 보이는 “나라가 형이라면 역사는 혼이라, 형이 혼을 잃고 보존될 수 있는가”란 대목은 박은식이 1915년 『한국통사』의 <서언>에서 “대개 나라는 형이고 신이다. 지금 한국의 형은 허물어졌으나 신만이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를 저술하는 까닭이다. 신이 존속하여 멸하지 않으면 형은 부활할 때가 있는 것이다.”라는 대목과 비슷하여 ‘위작’의 근거로 지적된다.(283-284쪽)
그러나 이는 반전이 있습니다.
한국통사에는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가히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가히 멸할 수 없으니, 대개 나라는 형(形)이요, 역사는 신(神)이기 때문이다.지금 나라가 멸하였어도 역사(=神=魂)만 살아 있으면 나라(=形=魄)는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다 "
한국통사의 문장이 '옛사람'을 인용하면서 나라와 역사에 대해 언급하는 형식이므로 박은식이 다른 역사서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 사서가 무엇입니까? 1911년에 발간된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입니다.
박은식 선생의 이 내용은 오히려 환단고기가 1915년 이전에 있었을 가능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최소한 단군세기를 보았거나 그 내용을 들었다고 볼 수 있다.
3. 현재 단단학회 양종현 회장의 초간본(1911) 증언
1966년 고등학교 1학년때 만나 환단고기를 배우기 시작한 현 단단학회 회장 양종현(1948~)은 “좁은 방에서 스승님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환단고기 초간본]을 글자 하나하나 짚어가며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라고 하며 [환단고기]는 결코 위작이 아니다“라고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71쪽)
양종현은 종이의 질과 색깔, 책 표지 상태까지 말하였는데 책을 묶은 끈이 떨어져서 여러번 고쳐 매고 풀로 붙였던 사실도 기억하였다. 이 같은 양종현의 증언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원본이 분명이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 상생출판 91쪽)
4. 환단고기 모든 판본을 부정해야 하는 모순
만일 환단고기 편찬과정에 의문을 품는 다면 계연수 편집본, 오형기 필사본, 오형기 필사본에 대한 영인본, 1976년 이유립의 원본 분실, 오형기 필사본의 오탈자를 바로잡은 배달의숙본 등의 과정을 모두 부정해야 한다. 더구나 환단고기 초간본으로 역사를 공부하였다는 양종현의 진술 또한 거짓이라 해야 하는데 이는 위서론을 주장하기 위해 한 인격체의 경험적 사실을 매도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92
5. 굳이 의도적으로 조작할 필요가 없는 환단고기
계연수는 이상룡이나 박은식, 김교헌이 그랬던 것처럼 <<환단고기>>를 의도적으로 조작할 필요는 없었다. 당시 이상룡, 김교헌 등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사관에 따라 고서류를 참고하여 고대사를 서술한 것처럼 하면 되지, 굳이 전해진 책을 조작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교헌 등이 지은 고대사는 <<환단고기>>와 그 기본 논지가 일치하고 있음에도 위서란 비난을 받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그간 <<환단고기>>에 가해진 비난이 과도한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위서 여부를 비난하는 데 쓸 역량을 그 내용의 검토와 분석에 사용하는 것이 우리 역사학의 발전이나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는 데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환단고기>>의 신봉, 비판 여부가 마치 전문역구가와 재야사학자를 가르는 기준으로 적용되는 듯한 현재의 폐쇄적ㆍ배타적이며 자기중심적인 학계의 연구풍토를 개방적인 것으로 바꾸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ㅡ 이덕일ㆍ이희근 공저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p.45∼55 발췌 ㅡ
6. 말년에 환단고기 내용을 검토해보려고 했던 이유립 선생
치우학회장 박정학씨가 기억하는 이유립 선생의 말년 삶은 그가 환단고기에 있는 내용을 검토해보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그가 미리 세조실록 등을 접하고 조작했을 가능성을 희박하게 한다.
“한번은 선생이 “10여세 때 들었던 내용을 확인하고 싶으니 이러저러한 책들을 구해달라”고 하였다. 왜 필요한가를 되물었더니 “옛날 계연수 선생으로부터 들은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40여종의 도서중 80여 곳에 대한 복사를 요청받고 국립도서관을 방문했으나 상당수 책이 귀중본, 희귀본이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것임을 알게 되고 담당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더니 도서를 찾던 담당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도대체 이런 책을 누가 보느냐? 이런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만나보고 싶다. 그리고 지하실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이런 책이 수북히 쌓여있다” 며 요청한 자료를 준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원하는 책의 복사부분을 상자에 담아 전해드렸다 그런데 이 상자를 뜯어보지도 못하고 선생님은 세상을 뜨셨다
“한번은 조선왕조실록을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듣고 구하여 드렸더니 순식간에 순한문본을 읽으시면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 하셨다고 한다. 모두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 박정학씨 증언
7.환단고기는 목판본이다.
안창범은 환단고기 범례의 말미 기록을 풀이하면서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는 목판본이라고 주장한다.
桓檀古記는悉經海鶴李先生之監修오 而且余精勤繕寫하고 又因洪範圖吳東振兩友之出金하야 付諸剞劂하니 환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선생의 감수를 거쳤으며, 또 내가 정성을 들여 부지런히
편집하고 옮겨 적었다. 그리고 홍범도·오동진 두벗이 자금을 대어 인쇄에 부치게 되었다.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은 이 문장을 오역하고 그것이 환단고기 위서론의 직접적인 근거라고 오도하고 있다. 선사(繕寫)를 ‘고쳐쓰다’로 오역하고 ‘기궐剞劂’을 활판인쇄로 오역하는 것이다.
자전에 의하면 ‘선사’는 원고지 같은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이 글자 하나하나를 베낀다는 뜻이고 ‘기궐’은 새김칼로 나무판자에 글자를 또박또박 새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환단고기의 원본은 활판 인쇄본이 아니라 목판본임을 알 수 있다.
.... 30부를 발간했다함은 그것 전체를 필사할 수도 없는 것이며, 사소한 것을 인쇄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필사한 종이를 목판에 부치고, 그 위에 조각칼과 조각끌로 글자를 새겨서 목판을 만들고. 그것으로 책을 찍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을 목판본이라 하는 것이다.
繕寫 [선사] 잘못을 바로잡아 다시 고쳐 베낌
剞劂 [기궐] 인쇄할 목적으로 나무 판에 글자를 새김.
....우리 나라는 고려 때 주자인쇄가 싹터 조선시대에서 크게 발달하였지만, 그러면서도 목판본의 생산이 조선조 말기까지 성행하였다.그 이유는 활자판은 조판이 튼튼하지 못하여 동시에 찍어내는 부수에 제한이 있고, 또 한번 사용하면 해판되어 동일한 판에서의 후쇄(後刷)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이었다.
목판본은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단점이지만, 한번 새겨놓으면 많이 소요되는 책을 언제라도 찍어낼 수 있고, 또 책판을 잘 보존하면 오래도록 책을 찍어 널리 유통시킬 수 있는 큰 장점이 있어서, 그처럼 성행하였던 것이다.
8.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면 이전에 환단고기가 있었다는 뜻이므로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는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글출처 : 신동아 2007년 9월호 권말부록(611쪽~ 658쪽) 환단고기 위서인가 진서인가
소중화 사상이 판치던 시절 환단고기 류의 사서는 인쇄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필사를 통해서만 전해질 수 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었는데 그것때문에지금 위서 시비를 받는다면 이는 우리 역사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 사회는 환단고기의 내용 가운데 어느 것이 사실이고 어느 것이 틀렸는지 그리고 필사과정에서 어떤 오류가 있었닌지를 살피는 연구에 들어가야 한다. 기자는 이유립은 실존인물이고 그가 남긴 환단고기는 1949년 오형기가 필사했다는 것 그리고 오형기씨 필사본에는 오자가 있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1949년 오형기씨가 필사했다면 이전에 환단고기가 있었다는 뜻이므로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는 일제 강점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9. 오형기의 발문을 못마땅해한 이유립
<박창암씨 소개로 이유립씨 제자가 된 전형배씨 : 사진출처 신동아>
이유립씨는 오형기씨 필사본과 관련해 몇가지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다음은 전형배씨의 기억이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씨가 붙인 발문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유립 선생은 "발문은 그 책을 쓴 사람이 붙이는 것이지 필사를 한 사람이 붙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또 이유립 선생은 오씨가 필사한 환단고기에는 오자가 많다며 환단고기를 가르쳐줄때마다. 틀린 글자를 지적하면서 수정해주었다" 전형배씨의 기억
============================================================================
환단고기 발
기축년 봄(단기 4282년 서기 1949년), 나는 강화도의 마리산에 들어갔다. 때마침 대영절을 맞아(음력 3월 16일) 대시전에서 정산 이유립 씨를 뵈니, 그가 <한단고기>의 정서의 역할을 나에게 위촉했다. [己丑春 余入江道之摩利山 適値大迎節 謁大始殿 李靜山裕립氏 囑余以桓檀古記正書之役]
나는 붓이 거칠고 그 중임을 감당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조의 옛 역사를 알고자 하여 이를 승락했다. [余筆荒 雖不能勝重任 爲識我國祖古史 而諾之]
<환단고기>에는 <삼성기 상 하> <단군세기> <북부여기 상 하> <태백일사>가 실려 있다. 달포 만에 쓰기를 마쳤다. [中有 三聖記上下 檀君世紀 北夫餘記 上下 太白逸史 載在焉 月餘而告紇]
환인은 7세까지 전하였다고 했으나 상세한 연대는 모르고, 환웅은 개천하여 18세를 전하여 1565년을 지났으며 ,단군은 47세를 전하여 2096년이 지났으니,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5846년이라 기자가 어찌 그 사이에 끼어들 틈이 있으리요. [桓因傳世七世而未詳其年代 自桓雄開天傳十八世而歷一千五百六十五年 檀君傳四十七世而歷二千九十六年 旨于今凡五千八百四十六年 箕子何與於其間哉]
오호라, 천부의 경(천부경) 홍익의 훈(태백진훈 등) 신고(삼일신고) 전계(참전계경)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 명명한 `나를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심법`이 되고, 당당한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대전`이 된다,[嗚乎 天符之經 弘益之訓 神誥 佺戒 猶有存焉 明明爲修己治人之心法 堂堂爲經世濟民之大典] 때문에 천하는 모두 감복하여 이를 존숭하며 신성하다고 여긴다.[故 天下咸服尊之 以聖神]
그런데 우리 동방의 유가는 불씨와 함께 고전에 어둡고 작은 성취의 달콤함에 빠져서 서토에 무릎 꿇고도 이를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다.[而我東土之儒家與佛氏 昧於 古典 安於小成甘 爲屈膝於西土 而 莫之恥也]
아, 뒤에 이 책을 보는 자 반드시 창연히 일어나 공경하리니, [噫 後之覽此書者 必창然而起敬也] 요청에 의하여 이 글을 써 이 책의 뒤에 붙인다 [請書此而附之券後]
신시개천 5846년 기축 5월 上澣, 동복 오형기 跋.
=============================================================================
10. 환단고기 이유립 선생 창작 변개설을 반박한다
작성자 : 임인철
대배달민족사연구회 http://cafe.daum.net/masterleeyooreep
위서론을 주장하는 이들의 의견을 무조건 반대하고 감정적으로 대립할 것은 아니로되, 그들이 환단고기를 이유립 선생님이 쓴 것이다(창작) 또는 운초 선생님의 책을 후대에 개작(첨삭 수정)한 것이다 라는 인신공격성 주장에는 찬동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 제자들이 의문을 표한 것들에 대하여 선학의 말씀이라고 해서 변동을 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자신이 배우고 지지한 해학 운초, 벽산, 단재, 단해, 위당... 선생님의 학설을 좀처럼 바꾸지 않으신 분입니다. 일례를 들어 안시성이 개평 북70리에 있다는 설이나 졸본이 수분하 유역이라는 설은 우리 후학에게는 선뜻 이해되지 않은 것입니다만....대배달민족사에는 그 지리적 비정을 고수하셨습니다. 왜냐? 선학의 말씀이다 하는 것입니다.우리는 광개토대왕의 징실고에 대하여도 정말 그렇게 비에 글짜가 새겨져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중국 일본 한국인들이 내놓은 탁본과 해석과는 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암당 선생님은 운초 선사께서 직접 답사하여 징실을 하신 것이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그대로 인용하고 주석을 쓰셨습니다. 글쎄요 그런 분이 스승이 남기신 환단고기를- 조상 역사를 멋지게 하려고 함부로 덧칠하고 자기 맘에 안드는 부분은 임의로 뺐을까요? 북부여기를 보면 단군해모수 시절에 진개의 난이 있는 것처럼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해를 보니 先是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어떤 글은 아마 衍文일것이다 하고 주를 달았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스승의 글에 무모하게 붓을 가할 분이 아닙니다.
환단고기가 문헌학적으로 고서로 인정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또 용어에 근대 용어가 들어가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체 내용으로 보아 그 책을 무조건 위서다 조작이다 창작이다 편집이다 하는 공격성 비하 발언은 그대로 허용하기 어렵습니다.(규원사화 단기고사 부도지....같은 서적들이 이런 비판과 의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쩔수 없습니다)
그리고 계연수 선생님이나 이유립 선생님은 분명히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애쓴 분인데,...[약초를 캐는 계연수라는 사람, 이유립이라는 노인]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도 우리 맘에 들지 않습니다. 무조건 존칭을 사용하고 칭찬해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많은 말 중에 하필이면 무식하고 이름 없는 떠돌이 채약꾼이라는 식으로 씁니까? 또 채약꾼은 무식한가요? 이유립 선생님이 가난하게 살다 가신 것은 사실이지만 무명의 한학 노인은 아니었습니다.
환단고기가 진서이고 사료가치가 높은 이유
환단고기의 가치를 드러내는 유물,유적의 발견,고천문학적 검증,중국일본사서와의비교 등을 통해서 드러나는 내용의 일부를 모았습니다.
▶13세 흘달(屹撻) 단군시 오성취루 현상 천문학으로 검증되다. http://dok.do/ovMjGL
▶29세 단군 마휴 시절 조수 현상 검증 ,썰물 기록 조작가능성은 전혀 없다 http://dok.do/jVIxzy
▶박창범 교수는 삼국사기도 천문학적으로 검증해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깼다. http://dok.do/ePBs89
*사실 오성취루 현상의 천문학적 검증만으로도 환단고기는 연구의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수난 : 역사왜곡과 사서강탈
▶우리겨레의 역사가 줄어들게 된 11가지 계기 http://dok.do/KK7qgc
▶수서령(收書令) : 중화보다 앞선 역사 불온서적(?)을 모두 수거하라. http://dok.do/eUe3lQ
▶일제의 역사왜곡 프로젝트 : 사서 소각,강탈과 역사왜곡을 동시에 진행하다 http://dok.do/ePBoRu
▶일제시대 국사박멸책國史撲滅策 http://dok.do/H3Z55w
▶암울한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현실 http://dok.do/OFpLx7
▶중국의 양심 주은래 총리 “중국의 역사왜곡은 바로잡아야 한다”http://dok.do/ovMpJD
환국,배달국 자료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환국에 대한 명백한 변조 사실이 말하는 것 http://dok.do/H3Z586
▶환국의 실존을 기록한 문헌들 http://dok.do/WSDD00
▶환국의 열두나라 이름은 여러 문헌상에 나타난다 http://dok.do/ovMpoC
▶1만년전 농경문화에 대한 의문 환단고기에서 찾을 수 있다. http://dok.do/jVI84X
▶DNA를 통해본 인류의 기원이나 이동 경로는 환단고기를 뒷받침해준다. http://dok.do/4bBO2n
▶안파견은 거란족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의 이름에서 흔적이 보인다. http://dok.do/5EHMQm
▶혁서 환인 시절은 장자에도 나와 있다 http://dok.do/pupkmk
▶불가의 나반존자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나반’에서 비롯되었다. http://dok.do/H9m7FF
▶삼위태백의 삼위산은 어디인가? http://dok.do/WSDDi4
▶오가五加 인류 조직사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국가 사회 조직이다. http://dok.do/OFpLcT
▶서자 환웅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환단고기 http://dok.do/eUe3iS
▶불교 대웅전은 환웅을 모시는 환웅전이었다. http://dok.do/jVI8zy
▶천왕봉의 유래는 환웅천황이다. http://dok.do/4bBOH
▶일본으로 건너간 환웅상을 통해 환웅의 실재를 알 수 있다 http://dok.do/JSTA6I
▶한자의 시조 창힐 倉頡은 치우천황의 스승 자부선생의 제자다. http://dok.do/ePBo89
▶홍산문화를 설명할 수 있는 사서는 환단고기 뿐이다. http://dok.do/pupkJx
▶홍산문화(요하문명)이 우리 한민족의 상고시대 도시국가라는 증거 http://dok.do/H3Z5ml
▶강원도 고성군 문암리 유물과 유적은 환단고기를 뒷받침해준다 http://dok.do/eUeilQ
▶환웅천황이 안착한 지역 천평이 대동여지도에 나온다. http://dok.do/jVIK5t
▶배달’,‘신시’,‘청구’를 기록한 문헌들 http://dok.do/4bB6UH
▶환단고기는 중국 한족의 뿌리를 밝혀준다 http://dok.do/ePBDRu
▶태호복희씨 중국조상 만들기를 막을 수 있는 사서가 환단고기다 http://dok.do/H9mpZB
▶환단고기는 배달시대 영웅 치우천황에 대한 기록이 있다. http://dok.do/shsMog
▶한민족 천도사는 진술축미 4토에 맞추어져 있음을 환단고기를 통해 알 수 있다 http://dok.do/hlTFBo
▶고대 한국의 양잠기술을 확인시켜주는 환단고기 http://dok.do/eUeiTd
고조선
▶비파형동검 지역은 환단고기의 고조선 강역과 일치한다 http://dok.do/jVIKKe
▶고인돌 유적은 환단고기의 사료 가치를 높인다.http://dok.do/4bB641
▶하가점은 고조선 문화 : 환단고기는 하가점 지역의 역사가 기록되어있다 http://dok.do/JSTC33
▶“한국은 있는 역사도 없다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다”http://dok.do/5EHKm5
▶환단고기를 통해 삼국유사 단군 1,908살의 비밀을 풀린다.http://dok.do/pupTXA
▶강화도 마리산 참성단과 삼랑성의 유래를 밝혀주는 환단고기 http://dok.do/H3Zr86
▶정전법은 지나보다 단군조선에서 먼저 시행하였다.http://dok.do/shsMcq
▶번한 왕 낭야가 쌓은 낭야성이 지금도 중국 지명에 남아 있다. http://dok.do/WSDA00
▶단군의 아들 부루태자가 오행치수법을 전한 사건의 실체를 보여준다 http://dok.do/OFpXTf
▶요순선양은 거짓,단군조선의 힘으로 순이 나라를 넘겨받다.http://dok.do/hlTFMv
▶순임금은 단군왕검을 알현했다. 사근동후肆覲東后의 진실http://dok.do/ovM1oC
▶3년상 제도의 기원은 유교가 단군조선 신교문화의 풍속이다 http://dok.do/eUeiUP
▶가림다와 가림토로 다르게 표현된 까닭은? http://dok.do/4bB62n
▶평양 단군릉은 7세 구을단군임을 밝혀주는 환단고기 http://dok.do/ePBDus
▶8세 우서한 단군의 20분의 1세법 http://dok.do/H3Zr3i
▶신교를 학문적으로 집대성한 유위자 有爲子 http://dok.do/KK7GVj
▶중국 하나라의 멸망과 은나라 건국에 관한 단군세기 기록이 입증되다. http://dok.do/WSDAi4
▶은나라 갑골문 기록이 환단고기의 고조선 기록과 일치한다 http://dok.do/OFpXcT
▶고죽국은 은의 제후국이 아니라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다. http://dok.do/hlTFsY
▶고조선 팔조금법 3조가 아닌 8조 전체를 보여주는 환단고기 http://dok.do/Pxd2Ip
▶법과 객관적 공권력은 고대국가형성의 기준이다 http://dok.do/5EHKeZ
▶중국 사료로 살펴본 고조선의 강대한 위상 http://dok.do/H9mpfG
▶일본 천황가의 뿌리가 한민족임을 알려주는 환단고기 http://dok.do/shsMNr
▶이두법의 창시자는 설총이 아니라 단군시대 왕문이다. http://dok.do/WSDA82
▶한무제는 전쟁에 이기고 왜 승리한 장수들을 다 죽였는가? http://dok.do/eUedlQ
▶고조선의 실체를 보는 코드 삼한관경제를 알려주는 환단고기http://dok.do/Pxd6Lb
▶환단고기의 패수 위치 : 패수는 하북성 조백하潮白河이다 http://dok.do/JST7uU
▶BCE 209 지나의 혼란과 번조선 준왕의 망명자 수용 http://dok.do/5EHDnO
▶연나라 장수 진개秦開를 인질로 잡은 나라는 고조선이었음이 환단고기를 통해 드러났다.http://dok.do/OFp0x7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빼앗긴 땅은 번조선의 변방이다.http://dok.do/ovM6JD
▶(슬그머니 우리 역사로 자리잡은) 위만조선의 실체를 밝힌 환단고기http://dok.do/Pxd6nK
▶환단고기를 통해야 국사 교과서의 미스테리 ‘辰國’의 정체가 풀린다http://dok.do/4bBa41
▶천자는 동방 동이족이 부르던 호칭이다. http://dok.do/5EHDm5
▶고려사에 나온 신지비사 일부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전문이 확인된다 http://dok.do/WD2o00
환단고기는 배달,조선시대 한문화의 원형을 밝혀준다
▶윷놀이는 치우천황 시절 자부선생이 환역을 풀어만든 것이다. http://dok.do/H9mikJ
▶고시례의 유래 : 배달국,고조선시의 주곡관 고시례 혹은 고시씨 http://dok.do/shslcq
▶장승 문화에 담긴 심오한 철학을 풀어주는 환단고기 http://dok.do/KK7UAN
▶신교의 민간신앙 : 터주대감과 성조대군 http://dok.do/hlTwMv
▶단군과 그 아들을 기린 문화들이 환단고기에 전하고 있다. http://dok.do/ovM6oC
북부여
▶환단고기는 고구려가 북부여에서 나왔음을 알려주는 소중한 사서다.http://dok.do/jVIW4X
▶환단고기가 보여주는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 북부여와 8개 부여의 진실 http://dok.do/5EHDQm
▶창해역사 여홍성黎洪星의 진시황 저격 사건은 환단고기에 나온다. http://dok.do/ePBlus
고구려와 백제 신라
▶환단고기를 통해서만 밝혀지는 동명왕의 정체 : 동명과 주몽은 다른 인물 http://dok.do/KK7UVj
▶고구려 개국공신 협보가 건국 이야기는 삼국사기를 보충한다. http://dok.do/WSDwi4
▶신라 석탈해(昔脫解)왕은 협보가 세운 다파라국 출신임을 밝힌 환단고기 http://dok.do/OFp0cT
▶환단고기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출생비밀을 밝혀준다 http://dok.do/hlTwsY
▶비석으로 전하는 매금이란 신라왕 호칭은 사서로는 환단고기에만 전한다. http://dok.do/ovM6GL
▶환단고기는 신라 화랑도의 뿌리와 맥을 보여준다. http://dok.do/eUediS
▶환단고기는 한중일 3국의 성씨의 기원에 대해서 밝혀준다 http://dok.do/jVIWzy
▶환단고기는 백제의 시초와 건국과정을 자세히 알려준다 http://dok.do/Pxd6Ip
▶중국의 수많은 사서들과 환단고기가 증명하고 있는 대륙백제 http://dok.do/4bBaHa
▶백제가 동남아시아와 교류했다는 환단고기의 내용은 일본서기와 일치한다. http://dok.do/5EHDeZ
▶광개토대왕비 비문 왜곡 사건은 환단고기에 의해 풀린다.http://dok.do/H9mifG
▶광개토대왕비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 환단고기 http://dok.do/shslNr
▶광개토대왕 비문의 진실 계연수 [비문징실1895] 에 있다 http://dok.do/KK7Ugc
▶광개토대왕비문에 담긴 ‘신라의 복속과 비문징실로 본 왜의 항복 ’http://dok.do/OFp0h8
▶호태왕 비문 속 광개토대왕 17세손의 비밀은 환단고기로 풀린다 http://dok.do/eUe0lQ
▶고구려의 감숙성 평량시 정복은 환단고기에서만 역사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http://dok.do/PxdyLb
▶고구려가 옛날 유주, 지금의 북경 일대까지 장악했다는 증거 http://dok.do/JSTXuU
▶환단고기에 기록된 장수왕 연호가 발굴된 불상으로 입증되었다. http://dok.do/5EHXnO
▶<진서> 지리지에 나온 신라현은 태백일사의 내용을 뒷받침한다. http://dok.do/pupH9z
▶신포시 금동판 연호가 환단고기에만 적힌 보장왕 연호일 가능성이 높다 http://dok.do/shsqog
▶환단고기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설화의 비밀을 풀어준다 http://dok.do/WSDqKM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를 보충해주는 환단고기의 기록 http://dok.do/hlTTBo
▶고구려와 돌궐 → 대한민국과 터어키 우리가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 http://dok.do/eUe0Td
▶연개소문의 조부,증조부 이름을 밝힌 환단고기 http://dok.do/JSTX33
▶환단고기는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역사적 만남을 연개소문의 입장에서 보여준다 http://dok.do/5EHXm5
▶연개소문의 중원 경략은 환단고기에 잘 설명되어 있다. http://dok.do/H9mAkJ
▶안시성과 요서 10성의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는 환단고기 http://dok.do/KK7sAN
▶안시성주 양만춘의 존재와 승리는 환단고기에는 자세히 나온다 http://dok.do/WSDq00
대진국(발해), 고려
▶환단고기에서 밝힌 대진국 황제 연호, 발해공주묘를 통해 입증되다 http://dok.do/hlTTMv
▶대진국 (발해)의 제대로된 황제 연호는 환단고기에서만 보여준다 http://dok.do/eUe0UP
▶대진국 오경제도의 연원은 환단고기 속에 있다. http://dok.do/jVIy4X
▶함화 4년 석불비상(石佛碑像)에 나온 연호는 환단고기에 실려있다 http://dok.do/PxdyAh
▶함화 11년 발해 중대성첩에 나온 연호도 환단고기에 기록되어있다 http://dok.do/JSTXiV
▶발해 남경남해부의 위치는 환단고기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http://dok.do/H9mAFF
▶발해 5경 서경압록부의 위치도 잘못되어있다. http://dok.do/shsqpE
▶이정기 왕국의 대당항쟁은 국내문헌으로는 환단고기에만 나온다 http://dok.do/WSDqi4
▶(아직도 잘못된) 고려 윤관의 9성의 위치.. 환단고기가 맞다. http://dok.do/OFpDcT
▶윤관의 아들 윤언이의 억울함 호소문 : 자해표 ‘ http://dok.do/hlTTsY
▶충열왕과 연녀 이야기는 태백일사의 진실 가능성을 높여준다 http://dok.do/KKyaV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