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환이 김좌진 아들이 맞습니까

김두환이 김좌진 아들이 맞습니까

작성일 2015.11.17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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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두한은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씨가 무었인지  모릅니다.

  김두한의 사기 행각은 그 자신이 쓴 자서전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김두한 자서전 검증

 

역사는 사료(史料)를 바탕으로 기술한다. 사료(史料)는 역사 연구의 소재가 되는 기록이다. 기록(記錄)의 사전적 정의는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는 행위이거나 적은 글이다. 기록이란 참으로 다양한 것이지만 모두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창작과 구별되고 사실성이 떨어지는 기록은 창작 소설이라는 말을 듣는 등 여러 가지로 비웃음을 받는다.

일기나 회고록, 자서전 등 사실에 기초한 기록이라 인정받는 형식의 글도 정말로 사실에 의거한 것인지 정밀한 검정을 받은 다음에야 사료로 이용한다. 허구나 거짓이 많은 기록을 사실 그대로 기술한 것으로 믿고 사료로 이용하여 역사 기술을 하면 당연히 허구의 역사가 된다.

회고록이나 자서전은 매우 오래 전부터 쓰인 것이지만 저자의 자기 합리화나 미화가 심한 것이 많아 사료로 쓸 때 깊은 주의의 대상이 된다. 너무나 정직한 기술이라 상찬받는 회고록도 있지만 완전 소설이라 혹평 받는 것도 많다. 회고록이나 자서전은 다른 기록과 비교 검토해야하고 사건을 겪거나 목격한 동시대 사람들의 평가도 들어 보아야 한다.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자서전이나 회고록 형식의 글 가운데 하나를 예로 들어 논해 본다.

1963년 발간된 김두한의 자서전 피로 물들인 건국 전야는 그 많은 한국현대사의 회고록, 자서전 가운데 믿기 어려운 내용이 가장 많은 것에 속한다. 이를 검증해 본다. 거짓일 가능성이 큰 부분은 밑줄로 표시했다. 이 글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 경찰에 쫓기시던 아버님께서 담을 뛰어넘어 들어간 그 집이 나의 운명적 산실이었다. 이런 사연을 간직한 명문 안동 김씨 집안의 서족(庶族) 김두한이 자서전을 엮어 세상이 내놓는다.

나는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힐 필요를 느낀다. 나는 오랫동안 서민 대중의 벗으로 살아왔다. 나의 이 신념만큼은 생명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악명 높은 일개 협객으로 입신하여 당당히 10만 선량의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사실은 국제적으로도 희귀한 일에 속한다.

나는 종로 뒷골목에서 나의 귀중한 청춘을 보냈고, 8·15 출옥 후에는 공산당들과 180여 차례나 싸워 내 정열을 기울여 정부 수립에 적은 공헌이나마 했다. 세상은 나를 협객의 두목’, ‘정치 압력 단체의 보스라고 경멸했어도 내가 어떻게 해서 협객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일곱 살이 될 때 일경(日警)은 나의 외조모와 어머니를 예비 검속했다. 일경이 지명 수배한 아버님을 은신시키고 만주로 건너가게 하여 후일 한국 독립군 총사령으로 청산리 대첩을 이루게 했다는 죄목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외조모가 투옥되자 집과 보호자를 잃은 소년 김두한은 개성에 있는 외숙 댁에 잠시 있다가 10살이 될 때 서울로 내려와 거리의 왕초에게 붙들려 장치구 다리 밑에 사는 고아가 되었다.

내가 일제의 관리가 된다? 비록 배우지는 못했지만 항일 의식 때문에 일본 제국의 앞잡이는 될 수 없었다. 내가 16세의 봄을 맞이할 때 나는 이미 일본 경찰의 요시찰인(要視察人)이 되어 서울 밖의 주거이전을 제한 당했다. 내가 과연 이 땅 어디에서 정착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숙명적으로 협객 생활을 선택했다.

나를 협객으로 만들어준 것은 어머니와 할머니를 투옥시켜 7살 된 교동보통학교 2학년생 김두한을 거리로 내몬 일본제국주의다. 나는 인생의 뒷골목에서 쓰라린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극복했고, 많은 서민 대중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왔다.

(중략)

 

 

일개 협객으로 종로 뒷골목에서 15년간 살아오면서 나는 무한한 노력으로 공부했다. 학교 교육만이 교육의 전부가 아니다. 나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국한문을 해득했고, 내가 모르는 것은 아무에게나 물어 배워왔다.

 

(하략)

 

 

 

 

본문은 자신의 출생 과정을 다룬 기술로 시작한다. 사리에 맞지 않는 주장은 밑줄로 표시하고 논박한다.

 

 

 

나의 가계

 

근세사에 있어 우리 민족이 낳은 동양의 1인자이신 나의 백조부(伯祖父 : 큰할아버지)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80여년 전 그때 이미 국제정세와 세계정세를 파악하시고, 한중일 3국은 국권을 존중하는 원칙 하에 제휴해야 한다는 소위 삼화주의(三和主義)’의 기치를 들고 일본을 방문해 그 나라의 조야 지도층을 놀라게 하신 분이었다.

 

[이는 김옥균이 김좌진의 큰아버지이고 김좌진의 부친 김형규의 형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김좌진 가문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역적 가문이 되어 멸문지화를 당해야 했고 1889년 생인 김좌진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어야 한다.]

 

(중략)

 

 

나는 고균 김옥균을 조부로 백야(白冶) 김좌진을 부()로 모신 세도가 당당했던 이른바 명문 안동 김씨의 피를 받고 세상에 태어났다. 나는 아버님(김좌진)께서 일찍이 고균 할아버지에게 양자로 가셨기 때문에 나는 법률상으로 고균의 직계가 된다.

 

[1884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이 188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김좌진을 양자로 맞이했다는 말이다].

 

 

고균 할아버지께서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계획하셨던 일에 대해서는 여러 책에 쓰여 있어 세상이 다 아는 일이므로 약술하고, 나의 선친에 대한 이야기부터 써 가기로 한다.

선친 백야께서는 충남 홍성군 갈산면 갈산리에서 1898 11 14일에 태어나셨다. 선친은 15세에 백부이자 양부이신 고균의 유지를 받들어 홍성에 있는 2천석(추수)의 전답을 집안의 노비들에게 무상분배하셨다고 한다. 백야께서는 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시고 국치 이후 호명중학, 오성중학 등을 경영하셨다. 그분은 광복단 사건에 연좌되시어 3년간 옥고를 겪으셨는데. 출옥하자마자 다시 광복단 단장에 취임하셨다고 한다. 우리 3대는 모두가 기질적 혁명아로 통하는 모양이다.

 

[김좌진은 1898 11 14일 생이 아니라 1889 12 16(음력 11 24) 생이다. 광복단이 아니라 광복회이다. 광복회는 1915년 음력 7 15일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 항일 조직이다.]

(중략)

 

이런 훌륭한 분을 직계 선조로 모시고 태어났음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우리 가문에 내려오는 혁명아적 기질은 나의 밑 대대로 훌륭하게 계승되어질 것을 확신한다.

 

 

 

 

 

백야의 피난처가 된 나의 산실

 

 

나의 선친께서는 기미독립선언의 전주(前奏)였던 무오독립선언서를 여준, 윤동렬, 김동삼, 신팔균, 장원준, 서상용, 이탁, 이상구, 남일호 등 제씨(諸氏)와 공동성명을 발표하셨는데,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일경이 선친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무오독립선언서는 정식 명칭이 대한독립 선언서인데 무오년인 1918년 겨울에 작성되어 1919 2월 만주 길림에서 발표되었다. 조소앙이 문장을 기초하였다. 선언서 끝에 대표자 39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김교헌(金敎獻), 김규식(金奎植), 김동삼(金東三), 김약연(金躍淵), 김학만(金學萬), 정재관(鄭在寬), 조용은(趙鏞殷), 여준(呂準), 유동열(柳東說), 이광(李光), 이대위(李大爲), 이동녕(李東寧), 이동휘(李東輝), 이범윤(李範允), 이봉우(李奉雨), 이상룡(李相龍), 이세영(李世永), 이승만(李承晩), 이시영(李始榮), 이종탁(李鍾倬), 이탁(李沰), 문창범(文昌範), 박성태(朴性泰), 박용만(朴容萬), 박은식(朴殷植), 박찬익(朴贊翊), 손일민(孫一民), 신규식(申圭植), 신채호(申采浩), 안정근(安定根), 안창호(安昌浩), 임방, 윤세복(尹世復), 조욱(曺煜), 최병학(崔炳學), 한흥(韓興), 허혁, 황상규(黃尙奎), 김좌진(金佐鎭) 등이다.

이중 가장 나이 어린 축에 드는 김좌진이 이름을 올린 것은 광복회 활동을 인정받아서인 것 같다. 김두한이 무오독립선언서 발표자로 지목한 인물 9인 가운데 실제 선언서 대표자는 여준, 김동삼, 이탁 3인뿐이 없다.]

 

 

 

어느 날 선친께서는 지금의 서울 근교 야산(사직공원 뒤)에서 동지들과 회합을 가지셨다. 이 회합에는 백린, 윤성 등 30여 명의 독립투사들이 결집하여 이색적인 산상회담을 열고 있었는데, 일경은 이 정보를 미리 알고 이중 삼중으로 포위한 후 포위망을 착착 압축해왔다고 한다. 당황한 산상의 동지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백야는 내가 일경을 유인할 테니 동지들은 어서 속히 몸을 피해 먼저 대륙으로 망명하시오.”라고 말하면서 왜경들 앞에 홀연히 자태를 나타냈다고 한다. 백야는 두 손을 들고 왜경 앞에 항복하는 양 꾸미고 수갑을 채우려는 순간 순경 3명을 한꺼번에 때려 눕혔다. 그리고 그들이 소지했던 권총을 나꿔채 여러 발을 공중 발사하여 적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후 산상의 동지들에게 피신로를 마련해주고 나서, 자신도 피하기 위해 달아나셨다고 한다.

 

[무오독립선언서가 시발이 되어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서울 근교 야산 회합 1919년 이후의 일이 된다. 김좌진은 1917 8월 만주로 떠나 무장독립운동 준비를 했다. 이후 국내에 들어온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회합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보아 어떻게 비밀모임을 건물이 아닌 야산에서 갖는다는 발상이 가능한가? 그리고 일제가 미리 이 회합을 알고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는데 어떻게 도주가 가능했을까? 일본 경찰은 어떻게 단 1명도 체포하지 못할 수 있나? 이러한 사건이 있었다면 일경에 대한 대대적인 문책이 있었고 기록에 남았을 것이다.]

 

 

이어지는 도피에 대한 묘사도 몰상식의 연속이다.

 

발악하는 추격대들을 뒤로 하며 허둥지둥 서울 문 안으로 들어선 아버지는 갈 곳이 없어 지금의 사직동에 자리 잡고 있던 어느 양반촌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분초를 다투는 위기에서 백야는 어떤 양반집의 담을 뛰어 넘어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 운명의 집이 바로 나의 산실이 되었다.

궁전의 상궁이셨던 나의 외조모님에게는 딸이 한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나의 생모가 되신다. 호각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밖은 철통같은 경비망이 퍼졌다.

나의 선친께서 뛰어든 집은 궁녀 박 상궁의 딸 박계숙의 공부방이었다.

놀란 어머니께서는 강도가 침입한 줄 알고 안채에 연결된 요령줄을 흔드시려는 찰나

아버지 백야는 내가 김좌진이오라고 말했다. 이때 나의 생모는 흔들려던 요령줄을 멈추고 방안에 아버지를 들어오게 하신 후 책을 넣어두는 책장을 열고 아버지의 몸을 감추어 주었고, 방안에 남겨진 신발 자국을 걸레로 말끔히 닦았다고 한다.

 

 

[김두한은 이름을 적시하지 않고 막연히 박씨 성을 가진 상궁이라고 했다. 김두한은 할머니 이름도 모르는가? 상궁은 죽어서야 궁궐을 떠날 수 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도 궁 밖으로 나간 상궁은 없었다. 일제가 고종, 순종 등을 일본 황족 대우를 해주어 상당한 예산을 주었다. 왕의 여자인 상궁이 박씨 남자의 딸을 낳는다? 상궁이 외간 남자와 불륜으로 아이를 낳아도 진상이 드러나지 않는 한 그 아이는 왕의 자식으로 간주된다.

설사 1910 8 29일 한일합방 발표 이후 궁을 나가서 아이를 낳았다 하더라도 그 아이는 아무리 빨라야 1911년 생이 된다. 즉 박계숙(김두한은 만 28세 때인 1946년 처음으로 호적에 기재되는데, 김좌진 장군의 본처 오숙근 여사의 장남으로 입적되었다. 박계숙은 호적 등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은 실존 인물이라면 이때 빨라야 만 6세가 된다. 김두한은 1918 5 15일생이라고 주장하므로 이 김좌진 피신 사건 1917년 이전에 있었던 일이 되어야 한다. 무오독립선언서는 1919 2월에 발표되었으니 그 후에 일어났어야 하는 김좌진 피신 사건이 먼저 일어난 것이 되고 만다. 김두한의 사건 서술 가운데 시간이 거꾸로 돌아가는 일이 여러 차례 있다.

김두한은 만 16세 때인 1934년에 종로를 장악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액면 그대로 믿으면 김두한의 생년이라는 1918년을 의심할 수도 있다. 유교적 장유유서 질서가 엄격한 한국사회에서 깡패 집단도 나이를 엄청 따졌다. 16세 소년을 두목으로 떠받들 애들은 없다. 그러나 김두한의 종로 장악도 허풍이므로 1918년생 설이 맞을 수도 있다. 구마적, 신마적이니 하는 애들도 보잘 것 없는 동네 깡패였으므로 근력 좋은 16세 아이가 이기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다.]

 

 

이어지는 구절이다.

 

아버지의 뒤를 쫓아 방문 앞에 다다른 왜경이 검문을 하겠다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주저하지 않고 책장의 열쇠를 꺼내 여는 시늉을 태연자약하게 연출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선수에 눌렸던 왜경이 때마침 들려온 추격대 집합 호각소리에 따라 물러갔기 때문에 위기일발의 순간을 모면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함께 내쉬었다고 한다.

왜경이 돌아간 후 한참 있다가 문을 열어본 어머니는 또 한번 놀라셨다고 한다. 왜경이 물러간 것을 안 아버지께서 곤한 단잠에 들어 있으셨으니 말이다. 연일 주야를 막론하고 동분서주하던 혁명아는 몹시 고단한 법 ……. 나의 외조모와 어머니는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궁리 끝에 데리고 있는 하인들을 재산상의 이유라며 그날로 하향시키고, 모녀가 손수 아버지 백야의 시중을 드신 모양이다. 이때 생겨난 혁명아가 바로 나 김두한이다. 6개월 간의 피신생활에서 아버지가 향리인 홍성을 들러 만주로 건너가려 하실 때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이미 6개월의 태아가 되어 있었다.

 

 

[6개월이나 머물렀다고 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괴한을 숨겨 주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위기를 모면했으면 내보내는 게 상식이다. 김좌진이 생전 처음 보는 집주인에게 장기 투숙을 요구했다는 말인데 박 상궁 모녀는 신원 확인도 하지 않고 이를 받아들여 당일로 집안의 하인들을 내보내고 시녀 노릇을 한 것이 된다. 김좌진은 박 상궁이 잘 아는 왕손이라도 되는가? 박 상궁의 행위는 일반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좌진이 헤어진 동지들과 연락도 하지 않고 6개월이나 박 상궁 집에서 무위도식할 이유가 없다. 6개월 머물다가 떠나려 할 때 박 상궁의 딸 박계숙이 임신 6개월이었다니 김좌진은 피신 당일로 박계숙과 야합을 했다는 말이다. 박 상궁 집안은 잡년 집안인가? 집 안에 들어온 괴한의 신원 확인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박계숙은 빨라야 만 여섯 살이다. 김좌진은 아동 성도착자인가? 6세 어린 소녀가 임신을 했다는 황당한 주장이다.]

 


이어 이어지는 구절에서는 김좌진과 박계숙이 이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 무렵 아버지는 백발노인으로 변장하고 여정에 오르게 되었다. 기약 없는 이별을 서러워하는 어머니께 아버지께서는 혁명가는 예고 없이 떠나는 법이오라고 말할 뿐 냉정을 견지했다고 한다.

떠나는 아버지를 붙들고 어머니께서 태아가 있음을 고하자 아버지는 아들을 낳으면 두한(斗漢)이라 하고, 딸을 낳으면 두옥(斗玉)이라 부르라 하시면서 홀연히 집을 떠나셨다고 후일 어머니가 말해주었다.

 

 

[임신 6개월인데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박계숙이 이를 사전에 김좌진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수 있는가? 박 상궁은 여기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설명이 없다.]

 

 

그 다음의 예비 검거된 외할머니와 어머니란 제목의 구절에서는 김두한은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예비 검거된 외할머니와 어머니

 

 

이런 비극적 환경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 나는 참으로 어려운 소년 시절을 극복해야 했다. 이름난 명문 안동 김씨 가문에서는 나 같은 서족(庶族)을 반가이 맞아 주지 않았다.

 

[애매한 기술이지만 이를 사실로 믿는다면 박 상궁과 박계숙이 태어난 아기 김두한을 데리고 안동 김씨 문중을 찾아간 모양이다. 구체적으로 충남 홍성에 있는 김좌진 가문으로 찾아갔다는 것 같다. 그런데 김좌진의 사생아로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말인지, 아니면 인정했어도 냉대했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어 학교생활에 대한 기술이다.

 

 

또 일본 총독부는 독립군 영수인 김좌진의 아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안동 김씨 가문을 주시했기 때문에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고아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나는 외조모님과 어머니 밑에서 교동 보통학교 2학년까지 다녔다. 이때가 나의 행복한 소년 생활의 전부였다.

 

 

[교동 초등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이다.

1894 9 14일 황실의 자녀들에게 신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관립 교동왕실학교로 개교하였다. 1895 4월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가 설립되면서 5 1일 한성사범학교부속소학교로 개편되고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현재의 위치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초대 교장은 박재상이었다. 개교 초기의 학생들의 수는 130150명이었으며, 연령층은 815세였다. 교과목은 수신(修身: 도덕습자(習字: 글씨연습독서·작문·산술·본국지리·본국역사·외국지리·외국역사·이과(理科: 자연·실과도화(圖畵: 미술체조·재봉 등이었다. 1906 9 1일 교동소학교로 개칭하고, 설립 당시 한옥 3동으로 되어 있던 교사를 2층 목조 건물로 신축하였다. 1910 4 1일에는 교동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

이 학교는 북촌 양반 자제만 다니던 곳이다. 호적도 없는 아이가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거짓으로 자신을 미화해도 은연중에 거짓이 드러나게 마련이고 실수로 사실을 말하기도 한다. 김두한 자서전은 모순투성이다. 자서전 서문에서 김두한은 형무소에서 국한문을 배웠다고 했다. 교동 보통학교 2학년을 마쳤어도 김두한은 한글도 익히지 못했다는 말이다. 초등학교는 누구에게나 추억거리가 많은 법인데, 가르치던 교사나 담임선생이 누구였는지, 친했던 급우 이야기도 없다.]

 

 

내가 아버님의 호적에 입적된 것은 생후 20년 후로 기억하고 있지만 입적을 싸고 벌어졌던 가족 관계는 생략하겠다. 나는 7세 때까지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숙명적인 악운은 7살인 나의 머리 위에 엄습하고야 말았다.

 

[김두한은 1918년 생으로 주장하는데 그러면 일제 강점기인 1938년에 김좌진의 아들로 공인되었다는 말이 된다. ‘기억하고 있지만 이 중요한 일이 언제 때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김두한은 만 28세 때인 1946년 김좌진 장군의 본처 오숙근씨의 아들로 입적되었다. 나혜국씨 소생인 김좌진의 아들 김철한(金澈漢)은 오숙근씨 아들로 입적되었는데, 김두한이 입적되면서 호적에 차남으로 수정되었다.]

 

 

선친께서 비전투원까지 합한 18백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제19사단과 나남(羅南) 20사단이 합세한 여단 병력을 상대로 싸워 연대장 이하 33백명의 일본군을 도륙시킨 것이다. 세계 전사 상 희귀한 청산리 대첩의 전과를 올리셨다.

이를 갈던 일본 경찰은 끝내 나의 외조모님과 어머님마저 투옥시켜 어린 나를 고아로 만들어 거리로 내몰았다.

 

[김두한은 외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도 가문 자랑을 하는 김두한은 외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박 상궁이라 말할 뿐 본관도 말하지 않는다.

야만적인 일제도 간혹 문명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안중근 가문, 윤봉길 가문, 이봉창 가문, 김좌진 가문은 조선시대 같으면 역적으로 몰려 3족이 몰살당했겠지만 일제는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아 이들 가문은 그다지 박해를 받지 않았다.

김좌진의 생모 한산 이씨, 본처 오숙근은 1922년 만주로 가서 김좌진과 합류했다. 그리고 한산 이씨, 오숙근, 후처 나혜국 등은 1930년 김좌진 암살 이후 조선으로 귀국해 서울에서 살았다. 일제에 연행된 적이 없다.

7( 6) 때라면 1924년인데, 일제가 김좌진의 자식인지 확실하지도 않은 두한이의 생모와 그 외조모를 투옥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호적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박계숙은 김좌진 아들을 낳았다고 널리 선전하고 다녔나? 그리고 일제가 청산리 전투의 패배의 보복으로 경신참변을 일으켰기는 했으나, 청산리 전투 4년이 지난 후에야 김좌진의 아이를 낳았다고 박계숙과 그 어머니를 체포하는가?]

 

졸지에 외조모와 어머니를 잃고 거리에 나온 일곱 살의 소년 김두한을 맞아주는 안식처는 이 땅 위에 그 아무 곳도 없었다. 나는 어렸을 때의 기억을 일일이 전부를 엮어낼 수 없지만 얼마 후 개성에 사는 외숙댁에 일시 정착하게 되었다.

 

 

[김두한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성함은 결코 말하지 않는다. 외할머니, 어머니의 생사에 말을 하지 않지만 문맥으로 보아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모양인데, 그 시신은 어디로 갔는가? 박상궁과 박계숙의 무덤은 없다. 일제가 시신을 없애서 없든지 실존 인물이 아니어서 없든지 둘 중 하나이다.

일제는 악랄했지만 고문치사당한 시신이라도 돌려주었다. 옥사한 유관순 열사 시신도 유족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두한이는 왜 붙들어가지 않았는가?

박 상궁은 박계숙 이외에 아들도 있었나 보다. 박계숙의 동생이라면 1918년생이라는 김두한과 나이 차가 몇 살 나지 않았겠다. 박 상궁은 딸만 키우고, 어린 아들을 개성 어디에 머슴으로 보냈나?

1930 2 13일자 조선일보는 김좌진의 가족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비명으로 횡사한 김좌진씨의 애첩이었던 金桂月의 품에는 아들 斗煥 金斗煥은 지금 安城 지방에 있다 하며 김계월은 元山에 있는 모 요리집에 있다는데

 

이 기사는 풍설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 김계월(金桂月)이란 여인의 정체는 전혀 알 수 없는데, 실존 인물인지조차 확인할 수 없다, 김좌진의 아들을 낳아 두환(斗煥)이란 이름을 지었다는 말도 기이하다. 신 안동김씨의 돌림자는 근() - () - () - () () - ()이 되는데, ()은 이에 맞지 않는다.]

 

 

 

 

 

아버님 비보에 우는 빵집 영감님

 

 

내가 개성의 외숙댁에 있을 때 우리 외숙집 옆에는 계란빵 장사를 하는 노인 한 분이 있었다. 그때 나는 학교에 안가고 놀고 있었으므로 곧잘 계란빵 장사 가게에 들리곤 했다.

 

 

[김두한의 외삼촌은 조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밥만 먹였나보다. 외숙모는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미혼이었나 보다. 김두한은 개성에서 부모 없는 거지로 살던 시절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하루는 밖에서 놀다가 집으로 가는 길에 계란빵 영감님 집을 들렀는데, 빵을 굽던 영감님이 일은 안하고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이상히 생각한 내가 아저씨 왜 우세요, 무슨 일이 있어요?”하고 물으니,

 

우리나라의 훌륭한 애국자 한 분이 돌아가셨단다하고 대답했다.

나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이것은 혈연에서 나오는 작용이었다) 돌아가신 독립투사가 누구이며 계란빵집 주인 영감이 왜 우는지 알 길이 없었다. 외숙댁에 돌아온 나는 또 다시 외숙의 우는 얼굴을 보았다. 나는 또 물었다.

아저씨, 왜 우세요?”

 

너의 부친이 돌아가셨단다. 그것도 우리나라 공산당 청년에게

 

이날이 바로 1929 12 25, 불망(不忘)의 날이었다.

 

 

[계란빵 주인 노인에게는 할아버지라고 호칭해야 정상이다. 노인에게 10살 어린 애가 아저씨라 하면 버릇없다고 매 맞을 일이다. 그리고 외삼촌은 외삼촌이라고 호칭해야 정상이다. 노인에게도 아저씨, 외삼촌에게도 아저씨라 호칭하는 이상한 애다. 이는 김두한이 정상적인 가족생활을 하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거지로 살았으므로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호칭도 몰랐다는 방증이 된다.

김좌진이 암살된 날은 1930 1 24. 음력으로는 1929 12 25일이다. 그러나 그의 암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진 때는 15일이 지난 다음이었다. 1930 2 9일자 동아일보는 신민부 수령 김좌진 피살설을 보도했다. 이 기사의 진원지는 하얼빈과 북만주로 출장 갔던 일본 경찰의 보고였다.

 

동아일보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新民府 首領

金佐鎭 被殺說

해림에서 청년에게 사격돼

事實眞假 尙未判

 

북만주(北滿洲)에 근거를 둔 신민부(新民府)의 두령 김좌진(金佐鎭)씨는 지난 일월이십사일에 해림(海林)이라는 곳에서 김일성(金一星)이라는 청년에게 사살을 당하얐다는 말이 잇다는데 씨는 지금으로부터 이십년전에 일한합병에 불평을 품고 만주로 건너가서 다수 한 청년 동지를 규합하야 이래 광복운동에 노력하는 일방 군대를 조직하야 훈련을 시키는 등 여러 가지 운동에 관계하든 사람으로서 근자에는 정책의 상위로 반대파가 잇게되어 금번에 사살하얐다는 청년은 전긔 반대파의 청년이라고 전한다.

 

암살이 확인 보도된 때는 1930 2 13일이었다. 어떻게 암살 당일로 계란빵 집 주인과 외숙은 김좌진 암살을 알 수 있었을까?

범인이 박상실이란 것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외숙은 박상실이 공산당 계열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외숙의 말씀에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육친을 잃은 슬픔, 할머니 어머니마저 일본 경찰에 빼앗긴 소년에게 슬픔은 또 다시 찾아왔다. 나는 부친의 별세 후 비로소 내가 독립군의 대장인 아버지를 가졌구나 하고 느꼈다. 자랑 삼아야겠다는 소년의 벅찬 희망은 번갯불 같이 사라지고 문자 그대로 나는 고아가 되었다. 이때 내 나이는 10살이었다.

 

 

[명확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김두한은 자서전에서 한국식 나이를 쓰고 있다. 그러면 만 9세 때의 일인데, 두한이는 1918년 생으로 주장하므로 김좌진 암살은 1927년에 있었던 일이 된다. 김두한 어린 시절의 기술은 사건 연도가 뒤죽박죽이다.]

 

 

 

 

 

 

모란강 역두(驛頭)에서 부자 상봉

 

 

내가 7살 되던 해로 기억한다. 나는 동해안 어느 나루터에서 (지금의 강원도 속초 지방) 우리들을 호송차 밀파된 독립군 병정(兵丁)을 따라 고깃배와 밑창에 숨어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닿았다. 며칠을 기차로 여행했다. 모란강 역에 닿으니 중국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고 생전 처음 서양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나는 어떤 중국인 복장을 한 거구의 사람 품에 안겼다. 그 분이 내 아버지 백야 김좌진 장군이었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아버지를 쉽게 식별해 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혈륜이란 무서운 것이다. 나를 번쩍 들어 품에 안으신 아버지께서는 마차에 외할머니와 나를 태우고 깊숙한 산중으로 몇 십리나 달렸다.

 

 

[김두한이 말하는 부자 상봉이 김두한의 나이 7( 6) 때 일이면, 1924년에 있었던 일이 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란강 역까지는 기차로 며칠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김두한은 어디 산채에 김좌진의 주거지가 있는 줄 착각했다. 김좌진은 소련이 지배하는 북만주의 산시(山市)에 거주했으므로 산적처럼 산채에 숨어 살 필요가 없었다. 김좌진이 거주했던 건물은 지금도 남아 있다. 1905년 포츠머스 강화 조약에서 러시아와 일본은 하얼빈을 경계로 만주를 양분하여 지배하기로 했다.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 후에도 만주 북부는 소련이, 남부는 일본 관동군과 군벌 장작림이 지배했다.]

 

 

짧은 며칠 간을 보내고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후 청산리 대첩이 있은 후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일경에 투옥되었다. 나 소년 김두한이 다리 밑의 신세가 되어야만 했던 기구한 수난의 역정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고난은 유일한 친구이므로!

 

 

[김두한은 산채에서 있었던 일은 언급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빼고 외할머니 박 상궁과 고깃배를 타고 밀항했다는 말인데, 이게 노파가 할 일인가? 그 당시 고깃배로 밀항할 수 있을 만큼 블라디보스토크는 허술한 곳이 아니었다. 소련의 가장 중요한 해군기지인 블라디보스토크는 경계가 삼엄하여 도저히 밀항할 항구로 선정할 수 없다. 속초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갈려면 반드시 동력선을 이용해야 한다. 동력선으로 이 정도 원양 항해를 했다면 반드시 기관사와 항해사가 동승했어야 하는데 1920년대에 조선인 기관사, 항해사는 단 1명도 없었다.

청산리 대첩은 1920년에 있었으니 김두한 말대로 1918년생이라면 만 2세 때 있었던 일이다. 두한이 말대로라면 두한이가 7살 때(1924) 김좌진을 만나고 그 후 청산리 대첩(1920)이 벌어졌다.

김두한이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1924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만주의 산채 방문하고 돌아오자마자 일경에 체포되었다는 말이 된다.]

 

 

도보로 180리 서울 찾아 남하

 

 

나는 나의 외숙에 대해서도 쓰고 싶지 않다.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투옥된 후 다만 얼마간이라도 외숙 댁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외숙집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그렇게 유쾌한 추억이 못된다. 아버지가 만주의 영안현 산시역전에서 고려 공산 청년 회원인 박상범의 저격으로 피살된 후부터 외숙은 나를 그렇게 귀중히 보아주지 않았다.

 

[김두한의 말대로라면 외숙 댁에 있었던 기간은 1924 ~ 1930년이 된다. 이를 다만 얼마간이라도로 묘사한다. 그리고 김좌진 암살범은 박상범이 아니라 박상실(朴相實)이다. 김두한은 범인 이름도 제대로 모른다.]

냉대는 갈수록 심했고, 그때 이미 열 살이 된 나는 어느 정도의 눈치를 살필 수 있었기에 독립생활을 뜻하고 도보로 서울을 찾아 남하하기 시작했다. 다 떨어진 신발에 남루한 옷을 걸치고 어렸을 때(7) 학교 다니던 서울……. 가물가물한 기억에 의지하여 서울을 향해 개성을 떠났다.

해가 저물면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한데 잠을 자고, 또 날이 세면 걸어가면서 구걸 행각을 했다. 1주일 남짓을 걸어서 서울로 내려올 때, 밤에 가끔 울었다. 달밤은 아주 질색으로 싫었다. 어린 나를 센티멘탈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행복한 소년들이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초가집으로 휘파람을 불며 달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눈시울이 저절로 뜨거워졌다. 심지어 주인에게 끌려 마구간으로 들어가 따뜻한 소죽을 맛있게 먹는 소가 나보다 팔자가 좋다고 생각했다. 캄캄한 밤을 홀로 외롭게 지내면서 나는 반항을 배웠다. 무엇이든지 반항하고 싶었고 어떤 뚜렷한 반항의 대상도 없었지만 왜놈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왜놈을 없애야겠다 이러한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대망의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해가 져서 사방이 어둑어둑한 겨울밤이었다. 입김까지 어는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씨였다.

 

 

왕초에 잡혀 장차구 다리 밑에

 

장차구 다리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지금의 광교다. 지금은 청계천이 덮여 있지만 옛날엔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냇물이었다. 장마 때가 되면 청계천은 누런 흙탕물이 철철 흘러 황하(黃河)를 연상시켰다. 나의 소년 방랑이 제일 먼저 안착한 곳은 바로 이 장차구 다리다.

해 저문 전차 정거장에 쭈그리고 앉아서 네온사인의 불빛만을 보라보다가 왕초에게 붙들렸다. 왕초에게 이끌려 다리 밑에 도착해보니 남녀노소 여러 걸인들이 있었다. 한 늙은이가 어린 놈의 몸이 건장하다고 칭찬해주었다. 나는 이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애국자 독립군 사령관의 실자(實子)가 열 살의 나이에 장차구 다리 밑의 고아가 된 것을 일본 경찰도 몰랐고, 안동 김씨 명문도 몰랐으며, 뜻있는 동족도 몰랐다. 낮에는 밥을 얻어먹고, 저녁엔 다리 밑에서 잠을 자고, 구걸한 돈을 왕초에게 바쳐야 하고, 적으면 얻어맞고 ……. 그러나 신은 나에게 이런 생활을 오래 계속 시키지 않으셨다.

 

[매형이 되는 김좌진의 죽음에 슬피 울던 외숙이 매형의 아들을 이후 냉대하다니, 성격이 참 괴이한 인물이다. 김두한은 열 살, 즉 만 9세 때 외숙 집을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1927년의 일이 된다. 김좌진 암살은 1930. 시간의 흐름이 뒤바뀌는 기술이 너무 자주 나온다.]

 

 

김두한 자서전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 보면 이것이 사실인가?”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나?”라는 의심이 드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김두한 주장이 사실인가라는 것이 된다.

김두한 자서전을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 이러한 태도는 김두한 자서전 맹신론 또는 김두한 자서전 신봉론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것이다. 기록의 하나인 김두한 자서전을 하나의 예로 살펴보았는데, 이처럼 기록은 그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 많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맞을 확율이 훨씬 더 높습니다. 아직 의혹은 있지만요.

https://namu.wiki/w/%EA%B9%80%EB%91%90%ED%95%9C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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