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입니다.]
민주화운동도 부득이 무장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군대처럼 질서 정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 박근혜: 민주화운동이다.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
- 이명박: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숨져간 민주영령들 앞에 온국민과 함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온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5·18민주화운동은 크나큰 아픔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화사회를 이루는 데 큰초석이 되었다.
- 김영삼: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다..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 백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 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
- 조갑제: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민주화운동’이라 평가 했고,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사와 방송국은 5·18은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남 및 광주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입니다. 광주민중항쟁,광주민주항쟁,광주항쟁,광주민주화운동,5.18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도 불립니다.
[5.18이 발생한 이유]
박정희 대통령이 같은 경북 구미 출신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 된 후 국민들은 당연히 다음 정권은 민주화 된 정권이 들어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 당시 신군부 일당이 12.12군사반란과 5.17쿠데타 등을 일으켜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김대중,김영삼,김종필과 야당 정치인들을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 혹은 연금하고, 국회를 폐쇄하고 기능을 정지시키는 등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불법적인 권력이 등장하려하자 전국 여러 지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5.18민주화운동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은 6·25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입니다.
<5.18은 반공 민주화운동입니다. 5.18 당시 현장에는 '북괴는 오판 말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우파 언론인의 주장]
2007년 3월 우파 언론인이며 조선일보 원로 기자인 조갑제는 5·18 당시 현장을 취재 했었다. 조갑제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민주화운동’이라 평가 했고,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북한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한 탈북자 단체 및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이 조갑제를 비난하는 등의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 광주시민 수십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기자 수백 명들이 취재한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5·18을 취재했던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었다.
- 전국 비상계엄령으로 해안과 항만이 철저히 봉쇄됐다.
- 전두환 정권 하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확인했을 것이다.
- 대대 규모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무장시민에 의한 국군 사망자가 7명에 그쳤을리 없다.
- 탈북자 증언은 전언에 불과하며,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 김일성이 5월 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를 투입했다고 해도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5월 20일 이후일 것인데, 5월 20일부터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됐다.
[5.18 진행 과정]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군사독재를 연장하려하자, 학생을 중심으로한 수만명의 시민들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계엄 철폐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 해산하게 된다.
이에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오히려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발표를 하고 학생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 휴교령 등의 민주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5월 18일: 전남대생 200여명은 휴교령이 내려진 학교에 들어가려다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였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보고 합세한 시민들과 시위를 벌였으나 계엄군의 폭력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5월 19일: 시위대가 5,000여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착검한 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5월 20일 20만명의 시민이 군경 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으며, 계엄군에 의해 모든 시외 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고, 밤 11시경 계엄군은 시민에게 발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5월 21일: 계엄군의 발포로 수십여명이 사망하였으며, 이에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하며, 경찰서나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을 시작하였다.
5월 22일: 시민들은 계엄군을 몰아내고 도청을 차지 '5.18사태 수습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사태 수습에 들어갔으나, 계엄군의 협상 거부로 협상이 결렬되고 27일 계엄군의 총공세로 많은 희생자를 낸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다.
[5.18 이후 조치]
5.18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정권을 잡았던 신군부정권(제5공화국)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 폄하했으나 6공화국 때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었으며, 민주화된 정부인 김영삼 대통령 문민정부 시절에, 12.12군사반란을 일으키고 5.18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한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 신군부 일당은 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 등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희생된 군인이나 민간인들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매년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정부주관 기념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에도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정식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2011년 5월에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되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사회운동은 70년대의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운동으로의 변화를 가져왔고, 국민들의 대미인식(對美認識) 변화와 함께 사회운동의 목표로 민족해방·사회주의 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기점이 되었다. 이 후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준거가 된 이 사건은 발발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되었다가,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되었고, 1988년 11월 사건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개최되었다. 1995년에 '5.18특별법'이 제정되었으며 1997년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5.18의 의의]
오랫동안 독재 정치에 시달리던 한국 사람들은 5.18을 통해 일정 계층에서만 외쳐왔던 민주,자주,인권,통일이라는 기치를 자연스럽게 가슴에 새기게 되었으며, 민주주의나 인권사상이 일반국민에 확실하게 합류하는 시민민주주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학교 교과서를 통해서는 몇 십년 걸려도 깨닫기 어려운 진정한 인권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깨달았고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지난 어두운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 5.18은 항쟁의 대명사로서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제3세계의 민중,인권운동에 강력한 변혁의지를 심어 주었다. 5·18민주화운동은 부당한 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하여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 인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전두환 등 신군부의 행적]
1979년 11월초 전두환은 노태우를 불러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 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정호용,유학성,황영시 등이 주도하는 비밀 군내 친목단체 하나회의 육사 11기 출신장교들을 주축으로하여 신군부를 형성했고, 일부 선후배 기수들을 끌어 들였다. 이를 배경으로 전두환은 신군부가 12·12군사반란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전두환은 노태우,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 했다. 당시 청와대가 내부 수리 중이어서 최규하는 총리공관에 살았다.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 갔다. 드러내 놓고 위협했다. 전두환은 즉시 명령을 내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국방장관 노재현을 잡아 오라'하였다. 상관을 체포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집행 되었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군의 주요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안사령부의 도청으로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의 병력 마저 서슴 없이 동원하는 대범함도 보였다.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께 행주대교를 건넌 1공수여단은 새벽 3시 50분께 지하벙커에 있던 노재헌 국방장관을 연행한다..
1980년 2월 무렵 전두환은 자신이 왜 집권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물론 공식 석상과 뒷자리에서 보이는 전두환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공식 석상에서 그는 집권욕이 없는 우직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뒷자리에서는 이미 무력을 틀어 쥐고 대권만을 생각하는 정치가였다. 5월 17일 전두환은 노태우,정호용 등에게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주도하도록 했고,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의 의견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계엄확대,비상기구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같은 날 중앙청과 국회가 군으로 포위 되고 외부와의 통신이 차단 된 상태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실시 됐다. 5월 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되면서, 전두환은 사전 연행 계획에 따라 김대중,김종필 등을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김영삼 등 다른 야당인사들도 연금, 국회를 폐쇄하고 기능을 정지시켰다. 전두환은 노태우,정호용 등과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지휘 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 및 조력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전두환이 정식 지휘 계통에 불법 개입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경 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조선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하여 대다수 보수 세력은 신군부의 집권 과정 중 일어난 12·12군사반란,5·17쿠데타를 비롯한 불법적인 집권과정,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전두환 대통령이 세운 제5공화국정권의 민주주의 및 인권탄압에 대해서 만큼은 매우 비판적이다.
[5.18은 왜 광주에서만 일어났는가?(1)]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는 12.12쿠데타(군사반란)를 일으켜서 군부를 장악했습니다. 4월에는 중앙정보부장서리와 보안사령관 자리를 겸직한 전두환은 시위 대비를 위해 서울 광주 대전 대구 전주 등 주요 도시에 계엄군을 배치 시켰습니다.
광주에서만 시위가 격렬해진 직접적 이유로는,
첫번째로 전남대 앞에서 공수부대와 학생 간의 충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광주에 배치된 계엄군은 공수부대가 주를 이뤘는데, 비상계엄 이후 내려진 휴교령에 따라 공수부대가 전남대학교 교문을 봉쇄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등교를 저지 당한채 전남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공수부대가 예비 검속을 실시하느라 학교 안에 있는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무릎 꿇리고 있었습니다. 학교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은 분노해서 공수부대와 충돌을 했죠.
둘째로, 광주에서는 5.18 이전부터 대학생들이 비상계엄과 휴교령이 내려지면 도심에 모여서 시위를 하자고 약속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서울에서도 비상계엄 이후 대학생 몇 명이 간헐적으로 시위를 벌이기는 했지만, 조직적으로 시위가 일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광주는 다른 도시와 달리 대학생 수 백명이 모여 조직적으로 시위를 벌일 수 있었죠.
셋째로, 오랜 유신 독재로 지쳤던 광주시민이 민주화를 열망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영남을 우대하고 호남지역 발전에 소홀히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까지 선포하면서 영구집권하자 지역균형발전을 할 의지가 있는 대통령을 뽑을 방법이 사라졌죠. 점차 정치적으로 불만이 쌓이다가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쌓였는데 전두환이 영남 출신 군인들을 이끌고 등장하니 민주화가 될 거란 희망이 좌절 됐죠..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분노가 쌓인 많은 시민이 시위 현장에 나온 것이였고요..
[5.18은 왜 광주에서만 일어났는가?(2)]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겸 합수본부장은 이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을 제거하고 이희성 장군을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으 로임명(?), 권력의 정점에 서있었습니다. 물론 국정 최고책임자 최규하 대통령이 있었지만 이미 허수아비 대통령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전 국민의 여망을 뒤집고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경상도 맹주격인 김영삼을 가택연금. 김종필 충청도 맹주.전라도의 맹주 김대중을 구금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전두환의 지시대로 된 것입니다. 후에 재판석상에서 자신은 이때 그런 계엄령확대를 명령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강변합니다만 누가 봐도 전두환의 막후조정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전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김영삼 의원직 제명과 민주당총재직 직무정지 사태로 1979년 10월 15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여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 되고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주동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이 부마 민주화운동으로 1980년 5월17일 계엄령과 김영삼 연금으로 들고 일어나야 할 부산지역에서는 시위를 벌일만한 사람들이 대부분 구금되어 시위를 벌일 수 없었습니다.
광주지역은 1980년 5월 17일 계엄령 전국 확대가 본격적인 시위 및 시위 확산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광주 시위는 전두환 신군부의 과잉진압에 책임이 큽니다. 이전 부마사건을 공수부대를 출동시켜 초기에 강력 진압한 것을 신군부는 시위에 적절하게 대처했다는 성공사례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광주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지자 초기에 진압하려고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시위 학생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계엄군에 쫒겨 도망하다가 민가에 숨은 학생까지 민가에 들어가 끌어내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때리는 무자비한 과잉진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과잉진압을 본 시민들이 분노해서 봉기로 이어진 것이구요. 그러니까 5.18민주화운동은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 아니라 계엄군의 무자비한 과잉진압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