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어업협정 관련]
한일어업협정 공동수역의 발단은 박정희의 독도밀약입니다.
그리고 신 한일어업협정은 김영삼 정부 내내 일본과 협상 해왔었고 김대중 대통령 때는 협상 막바지에 오히려 수역을 늘려놓고 마무리 정리한 것입니다.
신 한일어업협정으로 독도의 영유권이 침해 당했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이 청구되었는데, 헌법재판소는 어업을 위해 한일 양국이 정한 수역과 섬의 영유권 내지는 영해 문제는 서로 관련이 없다며 기각했습니다.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한일중간수역에 놓인 것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으나,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합니다. 신 한일어업협정 조문에서도 이 협정은 영유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습니다.
독도를 한일중간수역에 놓이게 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수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실효성이 없습니다.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일본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는 것입니다.
[북한 핵 문제]
원자력기구 발표: "북한의 핵개발은 1960년 초반부터 계획했으며 1993년 완공 되었다"
미국 CIA 1994년 발표: "북한은 1992년 이전에 핵개발을 끝냈다"
황 전 비서 증언: "1996년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 지하에서 핵실험을 할 정도로 이미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가 상당수 만들어져 있다"
즉, 북한의 핵개발은 1993년 완공 핵무기화하고, 추진체 개발이 다소 늦어진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문에 북한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북한핵은 예전부터 진행중이었다는 것은 만천하가 다 압니다.
새누리당에서도 잘 압니다.
북핵 가지고 일부 무리가 하두 장난을 치니까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도 말한 적이 있지요. "예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참으로 나쁜 습성입니다. 노벨평화상은 대단한 것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업적]
1. IMF(경제위기,국가부도사태)극복과 구조조정(기업,은행,금융,민간 4대 부문에 대한 개혁) 등 경제적 업적: 한국이 처음으로 일본을 앞서기 시작하는 분야(IT. NT.BT.금융산업.문화산업)가 출현하는 계기가 만들어 졌다.
2. 지식정보화산업 육성: IT 강국 인터넷 강국 실현, 과학기술혁신
3. 한류문화산업 육성, 문화발전(문화예산 비중이 역대 정권 중 가장 높았고, 문화산업 각 분야 크게 발전)
4. 민주화의 완성과 평화적인 정권교체 그리고 남북화해
5.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국위 선양
6. 인권신장(국가인권위원회 설치 등)
7. 용서와 화해(자신을 핍박하고 민주화를 거부해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설정했던 박정희 기념사업 지원. 전두환 사면 건의 등)
8. 외국에서도 긍정적 평가
外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며 정적들이나 배신자들을 해치거나 비난 하지 않았습니다.
'국민에게 알리라'는 말을 하는 등 국민을 솔직히 대했다.
서해안고속도로, 인천공항 건설 등 중국과의 경제교류에 대비하여 서해안 시대를 열었다.
조선, 반도체 산업이 꾸준히 발전했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이란 구호를 내세웠다.
IMF극복과 구조조정을 위하여 경제 장관들을 사심없이 등용했다.
벤처기업을 키웠다.
금강산 육로와 해로 관광 실현, 경의선 철도 복원
[국제적 평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 “용기있는 민주화와 인권 투사이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역동적인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운동을 일으키고 이끌어 오는데 목숨을 바쳤다.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인 희생은 고무적이며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김대중 구명을 위하여 와인버거 미 국방부 장관과 그레그 전 대사를 한국에 급파했고, 이들은 전두환 신군부를 상대로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다.
미국 뉴욕타임스: "전 국민이 외환위기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민주화운동 지도자로 뛰어 난 비전과 리더십을 갖춘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한국 국 민들에게 행운이다."
미국 국무부: “김 전 대통령은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 열망에 영감을 일으킨 지도자이자 상징이었다.”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 의원: “당신은 한국의 존 F. 케네디다. 당신과 나는 민주와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지지한다.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클린턴 전 미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용감하고 강력한 이상을 가진 지도자였다. 한국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넘어서게 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길을 닦고 국제적으로 인권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후 나는 남북한의 화해를 위해 그와 함께 일하는 영광을 누렸다. 햇볕정책이 한국 전쟁 이후 어느 때보다도 영속적인 평화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
미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워싱턴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대표 에드윈 퓰너: “김대중은 진정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나는 절친했던 벗”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 소장: “김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한국 민주주의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한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통찰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의 비범한 삶 전체가 기억될 것이다.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보여준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역사적인 평양방문은 그가 남긴 현란한 유산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 주한 미국대사인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 “50여 년간 아시아와 관련된 일을 해오면서 내가 만난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 3명이 바로 김 전 대통령과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의 리콴유였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에 강력한 민주주의를 가져왔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와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확신한다"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 “평생을 민주화와 한국의 발전 그리고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헌신해온 분이다. 노벨 평화상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삶 자체가 민주주의와 인권향상을 위해 헌신한 삶이었으며, 특히 수십 년간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며 투옥도 당하는 등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고, 영웅이었다”
세계적 경제전문 통신인 블룸버그 통신: '김 대통령의 업적' 이란 칼럼에서 "김 대통령은 경제ㆍ정치ㆍ외교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김대중씨는 한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지도자의 업적을 이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 집행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편지였다. 1980년 12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1차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김 전 대통령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분이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정말 기뻤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김 전 대통령은 격동의 시기에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아시아 금융위기 시에는 한국의 빠른 경제 회복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평생을 헌신하신 분이며, 세계 인권수호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
빌리 브란트 독일 사민당 총재: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조국의 사회적 발전과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노력이 이런 판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이 집행된다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막대한 손상을 입으므로 대통령이 판결이 수정되도록 조치할 것을 긴급히 요청한다. 김대중씨 구명에 모든 힘을 발휘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긴급히 요청한다”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 “나의 오랜 친구이다. 김 전 대통령은 불굴의 용기,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한민족 전체의 평화를 위한 탁월한 기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40년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눴던 그는 특히 독일 연방하원 부의장으로 있던 1980년 김대중이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자 하원에서 ‘김대중 구명 결의안’이 답변확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국제적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이자 민주주의자이다.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독일과의 오랜 인연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김 전 대통령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좋은 친구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양국관계의 심화와 교류강화를 통해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프랑스 정부(베르나르 쿠슈네르 외교부 장관 명의 성명):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평생을 바쳐 지칠줄 모르고 투쟁한 용기있는 정치인이었다. 또한 인권과 평화를 위해서도 헌신한 분이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중요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형성, 한반도의 평화조성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평화,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김 전 대통령을 알아왔고 그의 용기와 선견지명을 매우 높게 사 왔다. 그는 대통령 임기 말 건강에 문제를 겪으면서도 한반도를 재결합시키면서 남북문제 해결책을 계속해서 찾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대외 창구인 만델라 재단: “우리는 그가 인권을 위해 싸우고 북한과의 화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기억한다.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를 평화공원으로 전환하자는 만델라의 아이디어에 공감을 표시했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지난 1997년 5월 대선을 앞둔 김 전 대통령에게 자신의 셋째 딸 진드지 여사 부부를 보내 자신이 27년 동안 옥중에서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선물하며 승리를 기원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다. 이에 당시 김 전 대통령도 유신 체제와 망명 시절을 거치며 20년 동안 간직해온 낡은 가방을 답례품으로 전달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중국 국민의 가까운 친구이다. 중국 정부와 국민은 그가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 쏟았던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김대중 선생님은 나의 오랜 벗으로 중한관계 발전을 위한 그분의 공헌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 "세계에서 단임 5년에 김대중씨 만큼 변화시킨 대통령은 거의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소 다로 전 일본 총리: “김 전 대통령의 업적에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
가와무라 다케오 전 일본 관방장관: “한일 관계를 비약적으로 진전시킨 대통령이다.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하고 문화교류를 진전시켰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한일 양국의 외교관계 개선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민주당 대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며, 한국 근대화에도 큰 공헌을 하신 분이다”
고노 요헤이 일본 전 중의원 의장: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친구였다”
[국내 국외 평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하여 왜 국내 일부 무리는 외국과 다른 평가를 할까요?
그 이유는
1).우리나라의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이 만들어낸,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조작,왜곡된 이미지로 인한 편견,
2).지역감정,
3).반대파의 정략적 공격
때문입니다.
[장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기간 중에는 세계 각국 지도자들과 42개국이 조전을 보내왔고 미국,중국,일본 등 11개국이 영결식에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하였다. 세계 언론들도 사망 및 국장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에 대해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문정인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제적 비중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이라며“ 한국이 아니라 전세계가 큰 지도자를 잃었다”고 말했다.
김동길 전 연세대교수: “한 시대의 풍운아 김대중 형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부지기수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그렇게 불러보고 싶은 것 뿐이니 너그럽게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2009년 11월 13일, 일본 도쿄 아사히 신문사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모행사가 열렸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 시절과 대통령 재임 시 인연을 맺은 일본 정계,학계,종교계 인사와 교포 등 20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는 모임’이 주관했다. 한·일 양국의 정·관계,학계,종교계 인사 4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김 전 대통령 추모 영상 상영과 추도사,성경 낭독과 기도,헌화 순으로 3시간 동안 진행 됐다. 일본 측에서는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과 센고쿠 요시토 행정쇄신상이 인사말을 하고,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교수와 이토 나리히코 주오대학 교수가 추모사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영결식은 여의도 국회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우리나라 모든 대통령들이 다 일정부분씩의 공과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 개인에 대하여 올립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18년 장기 집권 동안 나름의 경제 발전이 있었습니다.
2013년 11월14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신제 때 나온 말 : "박정희 전 대통령은 半人半神으로 하늘이 내렸다는..."
대명천지 현대 첨단시대에 이런 소리를 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탄압하고 죽였던 사람을 신격화까지하여 종묘제례 못지 않는 제복을 갖추고 탄신제를 지내며 추앙 숭배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생전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과 정치에 대하여 욕 먹을 부분은 욕 먹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를 신격화하여 추앙,숭배하는 무리들은 누군가 그를 비판하면 난리가 납니다. 욕을 해대기도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박정희는 변신의 대가이자 기회주의자입니다.
사람들(지지자들)에게 시작과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게한 사람입니다.
박정희 사형
박정희 무기징역
박정희 징역 15년
박정희 전 대통령 18년 장기 집권 동안 우리나라가 상당한 경제 발전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경제 발전에는 우리의 민족성과 월남특수가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으며, 외향적 경제성장으로 인한 폐단도 아주 많음). 그리고 박정희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저해(박근혜 대통령이 대신 사과함)하고 국민의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인 것도 사실입니다. 국제적으로도 박정희는 독재자로 통합니다.
박정희는 일본에 충성 맹세 혈서를 쓰고 일본 육사를 나온 친일파이기도 합니다. 박정희의 일본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또 박정희는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던 빨갱이였습니다. 남로당에 가입하여 할동했던 죄로 박정희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며,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실토한 대가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습니다. 자기의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만 살아 나온 것이지요. 이후 15년으로 감형되어 군에서 파면되었다가 6.25가 발발하자 군에 복귀하였습니다.
그후 박정희는 1961년 별 2개 소장 때 5.16 쿠데타로 한국 정부를 몰아내고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존경했다는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대구 좌익 빨갱이들의 시위(대구10.1사건, 대구10월사건, 대구폭동 등으로 불림)를 주도한 빨갱이였으며 경찰에 총맞아 죽었습니다.
광복 후 구미에서 박상희의 영향력은 상당했는데, 박상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지도하다가 김일성,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찬탁으로 돌아서자 그는 침묵했습니다.
박정희는 그런 사람입니다. 박정희는 공보다 과가 더 많은 사람입니다. 박정희를 무조건 찬양하거나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나라 박정희의 공과 과를 다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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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에 대한 글들:
1).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가 되었다...
만주의 무단장시[牡丹江市]에 소재한 제6군관구 사령부 초급장교 양성학교인 신경(新京:지금의長春)군관학교를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이때 그는 나이 제한에 걸려 1차에서 낙방하였으나 장교가 되겠다는 자신의 간곡한 편지를 보내 합격하게 되었다...
1946년 9월 대구에서 좌익에 의한 시위가 일어났는데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가 시위를 주도하였다. 10월 1일 대구시민들과 경찰간의 충돌이 발생하였고 박상희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형의 영향을 받았던 박정희는 군부에 비밀리에 조직된 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47년 육군소령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이 되었다. 1948년 10월 국방군 내 좌익계열의 군인들이 제주4.3사건 진압을 거부하고 일으킨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나자 육군 정보사령부 작전참모로 배속되었다. 그해 박정희는 당시 국군 내부 남로당원을 색출하자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만주군 선배들의 구명운동과 군부 내 남로당원 존재를 실토한 대가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다. 이후 15년으로 감형되어 군에서 파면되었다...
2).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關東軍)에 배치되었다. 광복 때까지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쟁에 가담...
3). 만주군관학교 졸업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여 졸업, 만주 보병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박정희는 일제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했다.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를 증거로 내세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했다고 하며, 혈서라고 알려진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한편 박정희와 같이 교사생활을 한 유증선은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박정희에게 혈서를 쓰도록 권유했으며, 그 말을 들은 박정희가 즉시 시험지에다가 핏방울로 혈서를 썼다고 말했다. 조갑제도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혈서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박정희 평전:가난에서 권력까지'를 쓴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혈서에 대해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의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투사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투사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도 있다. 언론인 겸 작가 문명자는 1972년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으로부터 만주군관학교 동창생들이 박정희에 대해 "박정희는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 마디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증언하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였으나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 언론인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 공산당의 군대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조갑제가 팔로군과 독립군이 무관하다고 한 반면,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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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에 가입해서 국군 장교 수십명을 포섭하는 프락치 역할을 했습니다.
(1963년 10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 박정희 소령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남로당 세포 조직하였고 후임인 오일근 소령에게 세포책으로 인계하고 제사연대로 전임 그리고 육본정보국에 전임하였다. 박정희 소령은 이중업 남로당 지령에 의하여 이재복 군부 연락책에 의하여 육군군부내 조직책을 담당하였으며 전군부조직을 통할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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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혈서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만주신문은 1938.10.11~1944.3.31까지 만주 신경(장춘)에서 만주신문사가 발행했습니다. 만주군관학교도 1939년에는 신경(장춘)에 있었습니다.
간혹 만주일보가 1908년 폐간됐다고 혈서 자체도 조작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박정희혈서를 보도한 '만주신문'과 1908년 폐간된 '만주일보'는 별개의 언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