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운동과 전라도 지역감정에대해 혼란이옵니다... 도와주세요..

광주민주화운동과 전라도 지역감정에대해 혼란이옵니다... 도와주세요..

작성일 2014.04.04댓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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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진보를 지지하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고등학생인데요
오늘 친구한테 충격적인 소리를 듣고 믿을수가 없어 지식인에 여쭤보려 글을 남겨요....
친구가 광주민주화운동이 폭동이라길래
제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걸고 시위한거다 국가에서 시민을 죽이는게 말이되냐고 이야기했더니
처음 죽은사람이 누군지아냐고 묻더군요
전당연히 민주화운동하신분들인줄알았는데
친구말론 경찰4명이 먼저 죽었답니다.
친구말론 시위막으려 경찰보냈는데 경찰죽으니까 경찰로 감당안되 군대보낸거고 북한개입설같은 음모론을 대입안해도 경찰이 먼저죽었기에 어쩔수없이 군대를 보냈다. 먼저 총든건어느쪽인지 모르나 자기생각엔 시위대가 먼저 총과 다이너마이트 이런무기썻을꺼다 아니 군대에서 먼저썻다하더라도 광주시민들이 그런무기를 쓰는데 어떻게 안죽이고 시위를 재압하냐고 하는데 할말이없더라구여 처음에 경찰이 먼저죽은건 맞는거같은데 그러니까 반박이안되요;;
그리고 광주시민들이 무기들고싸운것도 처음알았구요...

또 지역감정이야기나오길래
뭔사람이 지역마다 다르냐 오바하지마라 이런말했다가 말싸움에서또졌는데
아시아권이랑 유럽이랑 마인드 비교해봐라
강남에사는사람이랑 빈민촌에사는사람들 마인드 비교해봐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점점닮아간다
그래서 강남에 기를쓰고 빛내서라도 이사갈려하는거다 니말대로라면 외국사람들이랑 우리나라사람들이랑 왜생각하는게 다르냐
전라도도똑같다 예전부터 산세가??험해 사람들이 성격이 그렇게봐뀌었고 그런사람들이 모여살다보니 전라도엔 그런사람들이 많은거다
아주예전부터 전라도지역감정은 있었고 세종대왕마저 전라도를 비하했다 니말대로라면 전라도는 정치적성향이 대부분 비슷하냐 이런말하길래
그건 광주민주화운동때문이라고하니까 또무한반복하다가
김대중 노무현대통령님들도 비하하길래 그냥알았다고하고 왔는데

이게진짜인가요??

제가 다음에 반박하려면 뭐라해야되나요.

;;

열받내요

근대 왜교과서에는 광주시민들이 총들고싸우고 경찰관이 먼저죽고 이런건 안나왔나요??

김대중대통령님 노무현대통령님 이야기로 안넘어갔으면

걔 세뇌에 넘어갈번함...

광주민주화운동이랑 지역감정 진실좀알려주세요
또 보수인친구 말싸움이길 논리도여..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이때까지의 투표 결과 한번 검색해서 보세요.

 

전라도 보면 온통 한군데 몰빵입니다.

 

어떻게 96~98% 몰빵을 주는데는

 

거기 밖에 없습니다.

 

괜히 우덜식 민주주의라고 하는게 아닙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5.18이 폭동이라는 말은 주로 전두환을 지지하거나, 5.18을 시기 질투하거나, 전라도를 비하하려는 지역감정 정신병자들이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최초 사망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 5.18 최초 사망자는 1980년 5월19일 오전 3시 사망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씨입니다.
● 5월 18일 희생된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 청각장애로 인해 말까지 할 수 없었던 김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05981
●김경철씨 사망자 조서
http://i49.tinypic.com/32zkyh1.jpg
http://i46.tinypic.com/2v9x0u1.png
●19일에는 김경철씨 이외에도 김안부씨도 공수부대로부터 구타당해 사망했다.
http://i47.tinypic.com/6tjy2w.png
대학생은 아니고 29살의 딸아이를 가진 한명의 아버지입니다.

 

- 다른 주장:
5월 17일 밤 12시를 기해 계엄군이 일제히 전북대학교 캠퍼스에 진입했다. 철야농성을 벌이고 있던 전북대학교 총여학생회장 문희선(42. 당시 전북대 사학과 3년), 김성숙(42, 국문과 2년) 씨를 비롯해 35명의 학생들이 계엄군에게 순식간에 연행됐다. 문희선 씨와 김성숙 씨는 당시의 기억을 “생각하기 싫은 악몽”이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문 씨는 학생회관에서 체포된 약 35명의 학생이 차 한 대에 정확히 새벽 3시30분까지 갇혀 있다가 전주 경찰서에서 새벽 4시부터 조사를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 과정에서 농학과 2학년생이던 이세종 씨는 옥상으로 피신하면서 두들겨 맞고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 피투성이가 된 채 학생회관 옆 마당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경찰서로 이송될 시간인 새벽 3시30분까지, 한 대의 차량에 태워져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 채 갇혀 있던 35명의 학생들은 한 가지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다. 계엄군들끼리 무전기로 주고받는 말 가운데 학생 한 명이 학생회관에서 떨어져 숨졌다는 것이다. 연행됐던 문희선 씨는 바로 이렇게 이세종 씨의 죽음을 전해들은 목격자중의 한 사람이다. 그날 새벽 이렇게 목숨을 잃은 이가 바로 이세종이었다. 5.18과 관련된 전국 최초의 희생자 이세종의 죽음은 이렇게 시작됐다.

 

5.18에 대하여:

- 박근혜: 민주화운동이다.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

- 이명박: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숨져간 민주영령들 앞에 온국민과 함께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역사의 고비마다 정의와 진실을 위해 앞장서온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5·18민주화운동은 크나큰 아픔으로 남았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민주화사회를 이루는 데 큰초석이 되었다.

- 김영삼: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다.. 그 비극을 국민들이 기억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으로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국 국민을 그렇게 수 백명을 죽일 수 있나. 우리 역사에 길이 길이 크게 기록돼야 한다.

- 조갑제: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민주화운동’이라 평가 했고,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사와 방송국은 5·18은 ‘민주화운동’과 ‘민중항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남 및 광주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입니다. 광주민중항쟁,광주민주항쟁,광주항쟁,광주민주화운동,5.18광주민주화운동 등으로도 불립니다.

[5.18이 발생한 이유] 
박정희 대통령이 같은 경북 구미 출신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 된 후 국민들은 당연히 다음 정권은 민주화 된 정권이 들어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는데,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 당시 신군부 일당이 12.12군사반란과 5.17쿠데타 등을 일으켜 국가의 실권을 장악하고 김대중,김영삼,김종필과 야당 정치인들을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 혹은 연금하고, 국회를 폐쇄하고 기능을 정지시키는 등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불법적인 권력이 등장하려하자 전국 여러 지역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5.18민주화운동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은 6·25전쟁 이래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입니다.

[5.18 평가]
<5.18은 반공 민주화운동입니다. 5.18 당시 현장에는 '북괴는 오판 말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우파 언론인의 주장]
2007년 3월 우파 언론인이며 조선일보 원로 기자인 조갑제는 5·18 당시 현장을 취재 했었다. 조갑제는 자신이 직접 5·18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과 정황에 따른 논리적 판단을 토대로 5·18을 ‘반공민주화운동’이라 평가 했고, 일부 우파에서 제기한 북한인민군 개입설에 정면으로 반박하며, 이러한 주장이 결국 좌파들을 돕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대해 북한인민군 개입설을 주장한 탈북자 단체 및 이에 동조하는 우파 세력이 조갑제를 비난하는 등의 일이 빚어지기도 했다. 조갑제는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어 애국단체들이 북한군 개입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 광주시민 수십만 명과 진압군이 목격자이고, 기자 수백 명들이 취재한 목격자가 많은 사건이다. 5·18을 취재했던 어느 기자도 북한군 부대가 개입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전투를 벌였을 당시 진압군(계엄군)의 장교들 중 어느 한 사람도 북한군의 출현에 대해서 보고하거나 주장한 사람이 없었다.
- 전국 비상계엄령으로 해안과 항만이 철저히 봉쇄됐다.
- 전두환 정권 하에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단서가 나오면 확인했을 것이다.
- 대대 규모 북한군이 개입했다면 무장시민에 의한 국군 사망자가 7명에 그쳤을리 없다.
- 탈북자 증언은 전언에 불과하며, '내가 광주에 내려왔었다'고 나서도 믿기 힘든 판에 '카더라'란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선 곤란하다.
- 김일성이 5월 18일 광주 상황 보고를 받고 특수부대를 투입했다고 해도 광주 부근에 나타나려면 빨라도 5월 20일 이후일 것인데, 5월 20일부터 광주가 철통같이 포위됐다.

[5.18의 의의]
오랫동안 독재 정치에 시달리던 한국 사람들은 5.18을 통해, 일정 계층에서만 외쳐왔던 민주,자주,인권,통일이라는 기치를 자연스럽게 가슴에 새기게 되었으며, 민주주의나 인권사상이 일반국민에 비로소 합류하는 시민민주주의를 획득하게 되었다.
학교 교과서를 통해서는 몇 십년 걸려도 깨닫기 어려운 진정한 인권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부당한 권력에는 저항권이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적 원리를 깨달았고 민주주의는 남이 지켜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키고 창조한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다.
지난 어두운 시절을 뒤로하고 이제 5.18은 항쟁의 대명사로서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포함한 제3세계의 민중, 인권운동에 강력한 변혁의지를 심어 주었다.
5·18민주화운동은 부당한 권력에 대한 시민저항으로 출발, 정의를 위한 자기희생과 반인륜적 학살에 저항하는 세계적 인권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5.18 이후 조치]
5.18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정권을 잡았던 신군부정권(제5공화국)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 폄하했으나 6공화국 때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었으며, 민주화된 정부인 김영삼 대통령 문민정부 시절에, 12.12군사반란을 일으키고 5.18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한 전두환,노태우,정호용 등 신군부 일당은 재판에 넘겨져 무기징역 등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희생된 군인이나 민간인들에 대한 명예회복이나 보상이 이루어졌으며, 매년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정부주관 기념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에도 ‘5·18민주화운동’이라는 정식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2011년 5월에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되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당시 전두환 등 신군부의 행적]
1979년 11월초 전두환은 노태우를 불러 모종의 계획을 세웠다. 1979년 11월 중순부터, 전두환은 하나회 동기와 후배들을 규합하여 군사반란을 일으킬 모의를 했다. 같은 해 12월 6일 최규하는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노태우,정호용,유학성,황영시 등이 주도하는 비밀 군내 친목단체 하나회의 육사 11기 출신장교들을 주축으로하여 신군부를 형성했고, 일부 선후배 기수들을 끌어 들였다. 이를 배경으로 전두환은 신군부가 12·12군사반란을 일으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전두환은 노태우,최세창 등 동지들의 부대에 병력출동 준비를 명령했다. 또 총리공관 경비의 무장을 해제시켜 최규하를 완전히 포위 했다. 당시 청와대가 내부 수리 중이어서 최규하는 총리공관에 살았다. 이번에는 전두환 뿐만아니라 유학성 등 여럿이 함께 쳐들어 갔다. 드러내 놓고 위협했다. 전두환은 즉시 명령을 내려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여, 국방장관 노재현을 잡아 오라'하였다. 상관을 체포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은 아무런 머뭇거림도 없이 집행 되었다. 치밀하게 계획했고 군의 주요 병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안사령부의 도청으로 모든 움직임을 샅샅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선을 지키는 최전방의 병력 마저 서슴 없이 동원하는 대범함도 보였다. 12월 13일 새벽 1시 30분께 행주대교를 건넌 1공수여단은 새벽 3시 50분께 지하벙커에 있던 노재헌 국방장관을 연행한다..

1980년 2월 무렵 전두환은 자신이 왜 집권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물론 공식 석상과 뒷자리에서 보이는 전두환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다. 공식 석상에서 그는 집권욕이 없는 우직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뒷자리에서는 이미 무력을 틀어 쥐고 대권만을 생각하는 정치가였다. 5월 17일 전두환은 노태우,정호용 등에게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찬성 의견을 주도하도록 했고,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의 의견을 내세워 국무총리와 대통령에게 계엄확대,비상기구설치 등을 실시하도록 강요했다. 같은 날 중앙청과 국회가 군으로 포위 되고 외부와의 통신이 차단 된 상태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실시 됐다. 5월 18일 0시에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 되면서, 전두환은 사전 연행 계획에 따라 김대중,김종필 등을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체포하고, 김영삼 등 다른 야당인사들도 연금, 국회를 폐쇄하고 기능을 정지시켰다. 전두환은 노태우,정호용 등과 함께 5·18광주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지휘 체계의 실질적인 주요 핵심 책임자 및 조력자로 여겨지고 있다.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전두환이 정식 지휘 계통에 불법 개입해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강경 진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조선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하여 대다수 보수 세력은 신군부의 집권 과정 중 일어난 12·12군사반란,5·17쿠데타를 비롯한 불법적인 집권과정, 5.18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과 전두환 대통령이 세운 제5공화국정권의 민주주의 및 인권탄압에 대해서 만큼은 매우 비판적이다.


[5.18은 왜 광주에서만 일어났는가?(1)]
전두환이 주도하는 신군부는 12.12쿠데타(군사반란)를 일으켜서 군부를 장악했습니다. 4월에는 중앙정보부장서리와 보안사령관 자리를 겸직한 전두환은 시위 대비를 위해 서울 광주 대전 대구 전주 등 주요 도시에 계엄군을 배치 시켰습니다.
광주에서만 시위가 격렬해진 직접적 이유로는,
첫번째로 전남대 앞에서 공수부대와 학생 간의 충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광주에 배치된 계엄군은 공수부대가 주를 이뤘는데, 비상계엄 이후 내려진 휴교령에 따라 공수부대가 전남대학교 교문을 봉쇄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등교를 저지 당한채  전남대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공수부대가 예비 검속을 실시하느라  학교 안에 있는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무릎 꿇리고 있었습니다. 학교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은 분노해서 공수부대와 충돌을 했죠.
둘째로, 광주에서는 5.18 이전부터 대학생들이 비상계엄과 휴교령이 내려지면 도심에 모여서 시위를 하자고 약속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서울에서도 비상계엄 이후 대학생 몇 명이 간헐적으로 시위를 벌이기는 했지만, 조직적으로 시위가 일어나지는 못했습니다. 광주는 다른 도시와 달리 대학생 수 백명이 모여 조직적으로 시위를 벌일 수 있었죠.
셋째로, 오랜 유신 독재로 지쳤던 광주시민이 민주화를 열망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영남을 우대하고 호남지역 발전에 소홀히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까지 선포하면서 영구집권하자 지역균형발전을 할 의지가 있는 대통령을 뽑을 방법이 사라졌죠. 점차 정치적으로 불만이 쌓이다가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쌓였는데 전두환이 영남 출신 군인들을 이끌고 등장하니 민주화가 될 거란 희망이 좌절 됐죠..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분노가 쌓인 많은 시민이 시위 현장에 나온 것이였고요..

 

[5.18은 왜 광주에서만 일어났는가?(2)]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겸 합수본부장은 이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을 제거하고 이희성 장군을 육군참모총장겸 계엄사령관으 로임명(?), 권력의 정점에 서있었습니다. 물론 국정 최고책임자 최규하 대통령이 있었지만 이미 허수아비 대통령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7일 전 국민의 여망을 뒤집고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경상도 맹주격인 김영삼을 가택연금. 김종필 충청도 맹주.전라도의 맹주 김대중을 구금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전두환의 지시대로 된 것입니다. 후에 재판석상에서 자신은 이때 그런 계엄령확대를 명령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강변합니다만 누가 봐도 전두환의 막후조정이였습니다.
그런데 이전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에서는 김영삼 의원직 제명과 민주당총재직 직무정지 사태로 1979년 10월 15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여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 되고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주동자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이 부마 민주화운동으로 1980년 5월17일 계엄령과 김영삼 연금으로 들고 일어나야 할 부산지역에서는 시위를 벌일만한 사람들이 대부분 구금되어 시위를 벌일 수 없었습니다.
광주지역은 1980년 5월 17일 계엄령 전국 확대가 본격적인 시위 및 시위 확산의 계기가 된 것입니다. 광주 시위는 전두환 신군부의 과잉진압에 책임이 큽니다. 이전 부마사건을 공수부대를 출동시켜 초기에 강력 진압한 것을 신군부는 시위에 적절하게 대처했다는 성공사례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광주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지자 초기에 진압하려고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시위 학생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계엄군에 쫒겨 도망하다가 민가에 숨은 학생까지 민가에 들어가 끌어내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때리는 무자비한 과잉진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과잉진압을 본 시민들이 분노해서 봉기로 이어진 것이구요. 그러니까 5.18민주화운동은 처음부터 계획한 것이 아니라 계엄군의 무자비한 과잉진압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5.18 재판 결과(전두환)]
죄수번호 3124번 전두환:
1심: 전두환 사형
2심: 전두환 무기징역, 추징금 2205억원
3심(대법원): 전두환 무기징역, 추징금 2205억원

대법원에서 확정된 전두환의 죄목:
1. 반란수괴
2. 반란모의참여
3. 반란중요임무종사
4. 불법진퇴

5.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6. 상관살해
7. 상관살해미수
8. 초병살해
9. 내란수괴
10. 내란모의참여
11. 내란중요임무종사
12. 내란목적살인
13.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 5.18에 대한 백과사전들의 설명:

 

1). 시사상식사전:
5.18 민주화운동(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남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민주화운동.

2). 두산백과:
1980년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전라남도 및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하여 벌인 민주화운동.

3). 한국근현대사사전:
5·17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된 공수특전단의 초강경 유혈진압에 맞서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들이 전개한 민주화항쟁. 한국 현대사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광주사태·광주민중항쟁·광주민중봉기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나, 88년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화 되었다.

4). 21세기 정치학대사전:
1980년 5월 18~27일까지 광주(光州)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전두환(全斗換) 및 12ㆍ12사태의 주도세력의 퇴진과 계엄령 철폐,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며 펼친 민주화운동.

5). 위키 백과: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12·12군사반란과 5·17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이다. 당시 광주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파괴·민주화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 되었다.

6). 사회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사회질문사전:
전두환,노태우 등 하나회 소속 신군부가 쿠데타(12·12사태)를 일으켜 정권 장악을 시도하자 신군부의 퇴진과 자유민주주의 헌정 체제 회복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됩니다. 이에 신군부는 시위가 절정에 달한 전라도 광주에 공수부대를 동원해 강경 진압을 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쿠데타의 주체가 정권을 잡은 후...

7). 사건으로 보는 한국의 정치변동:
1979~1980년은 마이너스 경제성장과 박정희의 갑작스런 피살에 따른 사회적 불안·위기 의식이 조성 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리력과 언론 통제를 확보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포고령 10호를 통해 국회와 대학 폐쇄, 모든 정치활동금지,언론검열강화,파업금지 등을 발표하였다...1980년 5월 광주항쟁은 바로 신군부의 권력 장악 시나리오에 반대하면서 그 자체의 역동성과 민중적 활력을 추동 시켜나간 민주항쟁이었다.

 

 

정신나간 지역감정 정신병자들이 지역감정을 조장하거나 특정지역을 비하하기도 하는데요, 그런 정신나간 사람들은 이 땅에서 척결해야합니다.
 
지역감정은 누군가를 시기 질투하고 헐뜯고 왕따시키고 싶은 충동의 결과로, 정신병의 일종입니다.

우리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지역감정 정신병자들은 능지처참 부관참시해야 합니다.

 

뒤통수 통계들을 보면 호남은 모두 소수(후순위)입니다.
즉, 호남 사람들의 기질에 관한 속설이 철저하게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반역 사건 31회의 지역별 분포, (평안 9회(27%), 경상 11회(34%), 전라,황해,제주 각각 3회(9%), 충청 2회(6%))
조선시대 반란 사건 30회의 지역별 분포, (경상 12회(39%, 전라 4회(12%))
고려사 열전에 탐관오리와 간신,역적으로 분류된 33명의 지역별 분포, (전라 5명, 경상 10명)
일본놈들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임진왜란)이라고 보고한 사람, (김성일: 안동)
영조,정조시대 범죄의 지역별 통계, (인구대비 강력 범죄율, 범죄율: 서울·경기·황해 등 수도권이 제일 높음, 광주 전라는 최하위권임)
현대의 반란(쿠데타) 사건 통계,
전임 대통령을 뒤통수 친 대통령들, 등등,,

지역감정은 정신병입니다. 지역감정을 없앱시다.
우리나라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지역감정 정신병자들은 능지처참 부관참시해야 합니다.

 

'인구 10만명당 범죄 발생건수'표를 보면 항상 광주가 제일 높은 것은 아닙니다. 2012년,2006년을 제외하고 광주는 다른 주요 도시들과 그렇게 큰 차이가 없습니다. 심지어 2011년이나 2007년에는 굉장히 낮은 수치를 보여주구요. 광주가 주요 도시별 가장 높은 범죄율을 기록한다는 것은 조작이라는 것을 알수 있죠. 혹시 광주가 매년 국내 주요 도시별 범죄율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5대 강력 범죄율이 전라도가 가장 높은 것 아니냐?! 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그것도 진실이 아닙니다. 광주가 강력범죄 비율이 높은 편인 것은 사실이지만 전북이나 전남은 매우 낮죠. 그리고 광주가 높다는 것도 타 지역에 비해 몇배로 월등히 높은 것도 아닙니다. 이렇듯, 전국 지역별 범죄율은 약간씩의 차이로 연도별 순위 변화가 있으며, 전라도가 범죄율이나 강력범죄가 무조건 높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진실입니다.
결론적으로,
1.주요 도시별 범죄율이 매년 광주가 높은 것은 아닙니다. 연도별로 순위 변화가 있습니다.
2.강력 범죄 또한, 약간 높은 편인 광주를 제외한 전남북은 타 지역보다 낮습니다.
일본의 범죄율은 우리나라보다 한참 낮습니다.(예: '강간,강제추행'은 통계에 따라 절반 이하 혹은 몇분의 1 수준임). 우리가 도토리키재기 같은 범죄율 가지고 서로 아웅다웅하는 거 보면 일본놈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ㅠㅠ

 

아래 글은 형사정책연구 제12권 제4호에 실린 논문입니다. 읽어보면 전라도의 범죄율이 제일 높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설사 약간 높다한들 뭔 문제가 있습니까?

 

Ⅳ. 분석결과
1. 범죄의 지역별 분포
다음의 <표 2>는.. 살인, 강간, 강도, 절도, 사기, 폭력의 대분류된6개 범죄의 지역별 분포를 살펴 본 것이다.. 인구 10만 명당 전체 범죄율을 살펴보면, 강원도가 가장 높은 4120.3건으로 나타났고, 그 다음으로 제주도가 4007.2건, 전남광주가 3545.3건, 서울이 3544.9건의 순으로 높았으며, 경북대구와 경기인천, 전북은 각각 2956.6건, 3127.0건, 그리고 3232.4건의 순으로 낮았다. 다음으로 6개 대분류된 유형만을 추려서 계산한 범죄율을 살펴보면, 제주가 1388.7건으로 가장 높고, 그 다음으로 서울이 1378.1건, 경남부산이 1311.5건, 전남광주가 1310.9건, 강원도가 1292.8건의 순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대구는 876.3건으로 가장 낮았으며, 그 다음으로 전북이 931.7건, 충남대전이 980.8건의 순으로 낮았다.. 다음으로 범죄의 심각성을 감안한 가중범죄율을 살펴보면, 제주도가 가장 높은 3913.1이었고, 그 다음으로 서울이 3844.2, 전남광주가 3735.3, 경남부산이 3710.4, 강원도가 3663.7의 순으로 나타났다..


다음의 <표 3>은 47개 범죄유형.. 지역별 인구 10만 명당 범죄율..의 분포를 살펴본 것이다. 전체범죄율의 경우 충남이 5948.5건으로 가장 높았고, 그 다음으로 전남이 5837.1건, 강원이 4120.3건, 제주가 4007.2건, 경남부산이 3883.9건, 충북이 3585.8건, 서울이 3544.8건의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경북대구는 2829.3건으로 가장 낮았고, 그 다음으로 경기인천이 3127.0건, 전북이 3232.4건으로 낮게 나타났다. 다음으로 47개 유형만을 추려서 범죄율을 살펴본 결과, 역시 충남이 가장 높은 5109.1건으로 가장 높았고, 그 다음으로 전남이 4978.5건, 강원이 3565.3건, 제주가 3514.5건, 경남부산이 3082.8건, 충북이 3063.5건, 서울이 2872.2건의 순으로 높았다.경북대구는 2379.1건으로 가장 낮았으며, 그 다음으로 전북이 2632.5건, 경기인천이 2562.0건의 순으로 낮았다..



 

지역감정은 일부 여야 정치인들이 표를 얻기 위하여 노골적으로 조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963년 10월 9일 박정희 대통령후보는 "우리 경상도 사람 대통령으로 한번 뽑아보자"고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했습니다. 그 다음날 김사만, 전진한은 경북 영주에서 열린 민정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의 선거유세에서 부산, 대구는 빨갱이가 많은 곳이라 지적하며 박정희가 그 표를 얻으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이효상 국회의장의 지역감정 조장 발언록:
박정희의 충복 이효상은 1963년 대선 때 "천년만에 신라에서 왕이 나왔다", "문둥이가 문둥이 안 찍으면 우짤끼고"라고 했으며, 1965년 5월 13일 서독 방문 중 이효상은 본대학교 학생들 앞에서 "현 정권은 경상도 정권이다"라는 발언을했습니다. 1971년 4월 대선을 앞두고 이효상 국회의장은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고 말했으며, 박정희지지 찬조연설에서 그는 "쌀밥에 뉘가 섞이듯이 경상도에서 반대표가 나오면 안 된다. 경상도 사람 중에서 박대통령 안 찍는 자는 미친놈이다."라는 말도했습니다. 누가 미친놈인지는 네티즌 여러분이 잘 아시겠죠? 그래서 1966년 9월에는 이효상 국회의장에 대한 불신임결의안이 제출되기도 했습니다. 또 공화당의 어느 찬조 연사는 "경상도 사람치고 박대통령 안뽑을 사람있느냐"고 반문, 노골적으로 지역감정을 조장했습니다. 한편, 1971년 대선때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 정보원)의 공작으로 영남 지역에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건을 사지 않기로 했다"는 흑색선전 전단지가 나돌기도 했습니다.
다들 미쳤었지요..!

 

1960년대까지 호남은 우파성향이 강했습니다. 건국세력인 한민당은 우익 민족진영의 대표적인 정치세력(영수:이승만,김구,이시영)으로 당수격인 수석총무를 호남 출신인 송진우,김성수 등이 맡는 등 호남이 본거지였습니다. 그러던 호남이 경제 개발에서 늦어지고, 중도성향인 야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종북 빨갱이로 모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영남은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노동당(남노당. 박정희도 가입했음)이 주도한 대구폭동 등 좌파 성향 폭동이 많았던 지역입니다. 대구폭동(대구10.1사건 혹은 대구10월사건이라고도 함)은 건국후 최초로 발생한 좌파성향폭동으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매우 큰 사건으로 계엄령이 선포되기도 하였으며, 경북도민의 약 1/4(약77만명)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대구를 포함한 경북에서만 시민,경찰 등 13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5,000여명이 폭동혐의로 검거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 재일동포 총 60만명 중에는 영남 출신이 40만명, 호남 출신이 7만명이었는데, 그 당시 조총련계가 25만명, 민단이 15만명, 중립이 20만명이었습니다. 이 통계는 무었을 의미할까요..
호남의 주장은 독재하지 말자는 것, 민주화하자는 것 등 종북 좌파와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친일사범 검거 횟수는 조작된 중간자료입니다. 친일로 확정된 숫자는 지역별 인구수에 비례하게 나타났습니다.!
반민특위가 반민족행위자 7천여명을 파악하고 1949년 1월 8일부터 검거활동에나서 취급한 조사건수는 682건(여자60명 포함)이었는데, 이중에 체포 305건, 미체포 193건, 자수 61건, 영장취소 30건, 검찰송치 559건이었으며, 각 도별 송치건수는 중앙서울 282건, 경기 32건, 황해 26건, 충남 25건, 충북 26건, 전남 27건, 전북 35건, 경남 50건, 경북 34건, 강원 19건 등 모두 559건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서민적인 대통령, 진솔한 대통령이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일부 주변의 비리가 밝혀지니까 자존심 상해 자실했습니다.
진짜 비리 정권들에 비하면 너무나 터무니 없이 작은 액수였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상했던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에 무슨 비리가 많은 것처럼 떠벌리는 사람들은 무엇일까요..
진짜 많은 액수의 비리를 저지른 인간들에 대해서는 입 꾹 다물고 말이죠..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현안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입장을 밝히는 대통령이었습니다.
부자들을 잘 이해해주는 대통령, 공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도 입 꾹 다물고 있고 나팔수들이 대신 나대게 만드는 그런 붙통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 두산백과사전(김대중):

1999년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1998년 12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1999년 5월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 50인' 중 공동 1위에 선정되었으며, 6월에는 미국 경제 주간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하는 '아시아개혁을 주도하는 지도자 50인'에 선정되었다. 2000년 1월 자유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또한 동아시아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향상 그리고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노력한 공로로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 시사상식사전(김대중):

1997년 처음으로 여야 정권교체를 이루며 제15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재임기간 동안 외환위기 극복을 핵심 과제로 내세웠으며 사회복지제도 정비, 노사관계 안정 등의 공적을 이뤘다. 특히 통일 분야에 있어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며 6ㆍ15 공동선언에 합의해,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노벨위원회 2000년 노벨 평화상 발표문]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기려 2000년 노벨 평화상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이 수십년간 권위주의의 통치하에 있을 때, 여러 차례의 생명에 대한 위협과 장기간의 망명생활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점차적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1997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 대열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씨는 확고한 민주 정부의 수립과 한국에서의 내부적 화합 증진을 추구해 왔다.
강력한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김대통령은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동아시아 인권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버마(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그의 헌신적 노력 역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햇볕정책'을 통해 김대통령은 50년 이상 지속된 남북한간의 전쟁과 적대관계의 해소에 노력해 왔다. 그의 북한 방문은 남북한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과정에 큰 동력이 되었다. 이제 한반도에 냉전이 종식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김대통령은 또한 인근 국가들, 특히 일본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 왔다.
노벨위원회는 한반도의 화해 진전과 통일을 위한 북한 및 다른 국가 지도자들의 기여를 인정하고자 한다. 

 

[노벨상 로비설]

노벨재단은"노벨상위원회가어떻게활동하는지알고있는사람들은누구나그같은로비가있더라도아무런영향을미치지못할것이라는사실을알고있다"고말했다.노벨재단은또한노벨상로비설에대해서다음과같은답변을했다.


"그렇다. 한국으로부터 로비가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김대중 정부로부터의 로비가 아니었다.
정치적 반대자 등으로부터 상을 주면 안된다는 로비가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노벨위원회의군나르베르게위원장은노벨상로비설에대해"매우무례하며,위원회의심사절차등에대해아무것도모르고있음을드러내는것이다.김대중측이아닌오히려김대중의정치적반대자등으로부터상을주면안된다는로비가있었으며,반대자들의편지가왔다"라고말했다.
동티모르의노벨평화상수상자조제하무스오르타가로비설에대해집요하게묻는월간조선기자에게"멍청한소리하지말라"라고하더라고전하기도했다.일각에서는노벨상로비설에대해서"국가적으로환영하고축하해야할일을노벨상반납까지운운하며로비설을흘리는 것은상식에맞지않는다"라고지적이있었다. 즉, 노벨 평화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는 세계적인 '대한민국 국가 망신 사건'인 것이다.


1990년부터노벨위원회사무국장을맡아온룬데슈타트는"누군가뇌물로매수하려는인상을줬다면위원회는오히려반감을가질것이고,노벨상선정과정에외부로비가있을경우해당자를제외시키고선정작업을더욱까다롭게진행한다"고말혔다.이어룬데슈타트는특히김대중대통령이남북정상회담을성사시켜노벨상을받아냈다는일부주장은편견이며유일한결정적인요인은아니며김대중의민주주의와인권을위한김대통령의투쟁노력을주목했다고밝혔다.

노벨재단에서50년간일해온유일한동양인한영우노벨재단특임고문은"노르웨이정계에서는김전대통령이민주화운동을했을때부터관심이있었지요.옥중(獄中)에있을때는노르웨이정부가한국군사정부에석방을탄원하기도했어요"라고 했고, 박경서 전 인권대사는 "노벨상은 로비를 할수록 수상이 멀어지며 금전의 개입은 어불성설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미 1987년에 강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였다"고 말했다. 

 

[인격관련]

김대중 전대통령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꼬박 꼬박 청와대로 초청해서 밥 먹였습니다. 배알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랬을까요? 그릇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그토록 증오하고 죽이려 했던 사람이 박정희입니다.(몇년전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가 대신 사과한 적 있음).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산 민주공원 개장식에 참석했을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면전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독재정권이라고 몰아 붙였습니다. 그리고 개장식이 끝나고 뒤도 안돌아 보고 연단을 내려 가려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등을 치면서 악수를 청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이였습니다.
자꾸 뭔가를 물고 늘어지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섭섭한 표현 단 한 마디 한 적 있는가? 없습니다.
위와 같이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릇이 크기 때문에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적이나 배신자를 해치거나 비난 하지 않았습니다.

예를들면 새누리당의 모의원은 80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서 대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한 사람이었는데,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이해찬 김옥두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으로 부터 돈을 받았다거나 내란을 음모 했다는 진술을 거부했는데, 그 의원은 신군부가 원하는 답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종 대법원 판결에서 사형이 확정 되었을 때 심재철이 보고 동지 고생 많았다고 했습니다.

또 대통령 재임 이전부터 줄기차게 자신을 괴롭혀온 정형근과 국회의사당내에서 마주쳤을 때 공부 열심히 하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고 어느 토론회에서 정형근 본인이 이야기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의 정책과 사상이 맞지 않은 것이지 인간적으로 존경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그토록 씹어대도 김영삼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죄는 밉지만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 자신의 철학을 실천했던 것이죠..

 

[군복무 문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에 20대를 보냈기 때문에 군 복무 의무가 없습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6·25전쟁 동안 군 복무를 기피했다, 목포해상방위대는 유령 군부대이다"라는 신한국당(새누리당) 측의 주장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목포해상방위대는 1950년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와 국방군사연구소에서 발행한 국방사연표에 분명히 근거가 있는 실존 군부대이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목포해상방위대 부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해병대예비역준장송인명은"목포경비부사령관으로부임했을때군과경찰만으로공산세력의잔당소탕과안녕질서유지에어려움이많았기 때문에목포시내청년단과여성청년단등애국단체들을모두동원해작전을보조하게하였으며,특히해상작전이중요했다고판단했기때문에당시지역유지오재균에게지시,해상방위대를창설해김대중에게부대장을맡겼다"고증언했습니다.
1997년국방부가제출한답변서에따르면해상방위대는목포지역에서약1년간(50-51년)존속되었습니다.해군목포경비부연혁사39쪽에'당경비부내보조기관인해상방위대를총참모장의명으로완전해체하고건물일체를인수함'이라는51년5월3일자 기록도 있습니다.

 

[한일어업협정 관련]

한일어업협정 공동수역의 발단은 박정희의 독도밀약입니다.
그리고 신 한일어업협정은 김영삼 정부 내내 일본과 협상 해왔었고 김대중 대통령 때는 협상 막바지에 오히려 수역을 늘려놓고 마무리 정리한 것입니다.
신 한일어업협정으로 독도의 영유권이 침해 당했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이 청구되었는데, 헌법재판소는 어업을 위해 한일 양국이 정한 수역과 섬의 영유권 내지는 영해 문제는 서로 관련이 없다며 기각했습니다.
독도가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한일중간수역에 놓인 것이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빌미를 준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으나, 어업협정은 영토 영유권 문제와는 무관합니다. 신 한일어업협정 조문에서도 이 협정은 영유권에는 전혀 영향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국제사법재판소 역시 어업협정은 어업 문제에만 국한됨을 판시했습니다.
독도를 한일중간수역에 놓이게 한 신 한일어업협정을 수정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실효성이 없습니다. 협상을 다시 한다고 해도 일본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을 것이고, 또 다른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에 실효성이 없는 것입니다.

 

[북한 핵 문제] 

원자력기구 발표: "북한의 핵개발은 1960년 초반부터 계획했으며 1993년 완공 되었다"
미국 CIA 1994년 발표: "북한은 1992년 이전에 핵개발을 끝냈다"
황 전 비서 증언: "1996년 김일성이 살아있을 때 지하에서 핵실험을 할 정도로 이미 농축 우라늄을 이용한 핵무기가 상당수 만들어져 있다"
즉, 북한의 핵개발은 1993년 완공 핵무기화하고, 추진체 개발이 다소 늦어진 것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때문에 북한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북한핵은 예전부터 진행중이었다는 것은 만천하가 다 압니다.
새누리당에서도 잘 압니다.
북핵 가지고 일부 무리가 하두 장난을 치니까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도 말한 적이 있지요. "예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픕니다. 참으로 나쁜 습성입니다. 노벨평화상은 대단한 것입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업적]
1. IMF(경제위기,국가부도사태)극복과 구조조정(기업,은행,금융,민간 4대 부문에 대한 개혁) 등 경제적 업적: 한국이 처음으로 일본을 앞서기 시작하는 분야(IT. NT.BT.금융산업.문화산업)가 출현하는 계기가 만들어 졌다.
2. 지식정보화산업 육성: IT 강국 인터넷 강국 실현, 과학기술혁신
3. 한류문화산업 육성, 문화발전(문화예산 비중이 역대 정권 중 가장 높았고, 문화산업 각 분야 크게 발전)
4. 민주화의 완성과 평화적인 정권교체 그리고 남북화해
5.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국위 선양
6. 인권신장(국가인권위원회 설치 등)
7. 용서와 화해(자신을 핍박하고 민주화를 거부해 타도해야 할 독재자로 설정했던 박정희 기념사업 지원. 전두환 사면 건의 등)
8. 외국에서도 긍정적 평가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자신의 철학을 실천하며 정적들이나 배신자들을 해치거나 비난 하지 않았습니다.
'국민에게 알리라'는 말을 하는 등 국민을 솔직히 대했다.
서해안고속도로, 인천공항 건설 등 중국과의 경제교류에 대비하여 서해안 시대를 열었다.
조선, 반도체 산업이 꾸준히 발전했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이란 구호를 내세웠다.
IMF극복과 구조조정을 위하여 경제 장관들을 사심없이 등용했다.
벤처기업을 키웠다.
금강산 육로와 해로 관광 실현, 경의선 철도 복원

 

[국제적 평가]
오바마 미국 대통령: “용기있는 민주화와 인권 투사이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역동적인 민주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정치운동을 일으키고 이끌어 오는데 목숨을 바쳤다.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인 희생은 고무적이며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김대중 구명을 위하여 와인버거 미 국방부 장관과 그레그 전 대사를 한국에 급파했고, 이들은 전두환 신군부를 상대로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다.

미국 뉴욕타임스: "전 국민이 외환위기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민주화운동 지도자로 뛰어 난 비전과 리더십을 갖춘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한국 국 민들에게 행운이다."

미국 국무부: “김 전 대통령은 한국 국민의 민주주의 열망에 영감을 일으킨 지도자이자 상징이었다.”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 의원: “당신은 한국의 존 F. 케네디다. 당신과 나는 민주와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지지한다.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클린턴 전 미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용감하고 강력한 이상을 가진 지도자였다. 한국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넘어서게 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길을 닦고 국제적으로 인권을 보호하는데 앞장섰다.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후 나는 남북한의 화해를 위해 그와 함께 일하는 영광을 누렸다. 햇볕정책이 한국 전쟁 이후 어느 때보다도 영속적인 평화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

미국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워싱턴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대표 에드윈 퓰너: “김대중은 진정 역사적인 인물이었다. 나는 절친했던 벗”

잭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 소장: “김 전 대통령은 무엇보다도 한국 민주주의의 얼굴로 기억될 것이다. 한국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통찰력을 지녔다는 점에서 그의 비범한 삶 전체가 기억될 것이다.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 보여준 김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역사적인 평양방문은 그가 남긴 현란한 유산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 주한 미국대사인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 “50여 년간 아시아와 관련된 일을 해오면서 내가 만난 가장 위대한 아시아인 3명이 바로 김 전 대통령과 중국의 덩샤오핑, 싱가포르의 리콴유였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에 강력한 민주주의를 가져왔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와 명성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확신한다"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 미국대사: “평생을 민주화와 한국의 발전 그리고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위해 헌신해온 분이다. 노벨 평화상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삶 자체가 민주주의와 인권향상을 위해 헌신한 삶이었으며, 특히 수십 년간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싸우며 투옥도 당하는 등 민주화 투쟁의 상징이었고, 영웅이었다”

세계적 경제전문 통신인 블룸버그 통신: '김 대통령의 업적' 이란 칼럼에서 "김 대통령은 경제ㆍ정치ㆍ외교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다. 김대중씨는 한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지도자의 업적을 이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형 집행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편지였다. 1980년 12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1차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김 전 대통령은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중요한 분이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정말 기뻤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김 전 대통령은 격동의 시기에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아시아 금융위기 시에는 한국의 빠른 경제 회복을 위해 국내외적으로 평생을 헌신하신 분이며, 세계 인권수호를 위한 노력을 지속해 왔다"

빌리 브란트 독일 사민당 총재: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조국의 사회적 발전과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노력이 이런 판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이 집행된다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막대한 손상을 입으므로 대통령이 판결이 수정되도록 조치할 것을 긴급히 요청한다. 김대중씨 구명에 모든 힘을 발휘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긴급히 요청한다”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 “나의 오랜 친구이다. 김 전 대통령은 불굴의 용기,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사랑, 그리고 무엇보다 한민족 전체의 평화를 위한 탁월한 기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모범이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40년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눴던 그는 특히 독일 연방하원 부의장으로 있던 1980년 김대중이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자 하원에서 ‘김대중 구명 결의안’이 답변확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국제적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국경을 넘어 국제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이자 민주주의자이다.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 그리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 독일과의 오랜 인연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는 김 전 대통령은 독일연방공화국의 좋은 친구이다.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양국관계의 심화와 교류강화를 통해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프랑스 정부(베르나르 쿠슈네르 외교부 장관 명의 성명):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평생을 바쳐 지칠줄 모르고 투쟁한 용기있는 정치인이었다. 또한 인권과 평화를 위해서도 헌신한 분이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중요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형성, 한반도의 평화조성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평화, 민주주의, 자유, 인권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김 전 대통령을 알아왔고 그의 용기와 선견지명을 매우 높게 사 왔다. 그는 대통령 임기 말 건강에 문제를 겪으면서도 한반도를 재결합시키면서 남북문제 해결책을 계속해서 찾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대외 창구인 만델라 재단: “우리는 그가 인권을 위해 싸우고 북한과의 화해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기억한다.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를 평화공원으로 전환하자는 만델라의 아이디어에 공감을 표시했다”
만델라 전 대통령은 지난 1997년 5월 대선을 앞둔 김 전 대통령에게 자신의 셋째 딸 진드지 여사 부부를 보내 자신이 27년 동안 옥중에서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선물하며 승리를 기원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있다. 이에 당시 김 전 대통령도 유신 체제와 망명 시절을 거치며 20년 동안 간직해온 낡은 가방을 답례품으로 전달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중국 국민의 가까운 친구이다. 중국 정부와 국민은 그가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 쏟았던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다”

장쩌민 전 중국 국가주석: “김대중 선생님은 나의 오랜 벗으로 중한관계 발전을 위한 그분의 공헌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 "세계에서 단임 5년에 김대중씨 만큼 변화시킨 대통령은 거의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소 다로 전 일본 총리: “김 전 대통령의 업적에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

가와무라 다케오 전 일본 관방장관: “한일 관계를 비약적으로 진전시킨 대통령이다. 한일 파트너십을 선언하고 문화교류를 진전시켰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 “한국의 현대 정치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한일 양국의 외교관계 개선에도 큰 기여를 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민주당 대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며, 한국 근대화에도 큰 공헌을 하신 분이다”

고노 요헤이 일본 전 중의원 의장: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친구였다” 

 

[국내 국외 평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하여 왜 국내 일부 무리는 외국과 다른 평가를 할까요?
그 이유는
1).우리나라의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이 만들어낸,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조작,왜곡된 이미지로 인한 편견,
2).지역감정,
3).반대파의 정략적 공격

때문입니다.

 
[장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기간 중에는 세계 각국 지도자들과 42개국이 조전을 보내왔고 미국,중국,일본 등 11개국이 영결식에 고위급 조문단을 파견하였다. 세계 언론들도 사망 및 국장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이에 대해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문정인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제적 비중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 이라며“ 한국이 아니라 전세계가 큰 지도자를 잃었다”고 말했다.

김동길 전 연세대교수: “한 시대의 풍운아 김대중 형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은 부지기수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자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그렇게 불러보고 싶은 것 뿐이니 너그럽게 받아주시기를 바랍니다”

2009년 11월 13일, 일본 도쿄 아사히 신문사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모행사가 열렸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 시절과 대통령 재임 시 인연을 맺은 일본 정계,학계,종교계 인사와 교포 등 20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김대중 대통령을 추모하는 모임’이 주관했다. 한·일 양국의 정·관계,학계,종교계 인사 400여 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김 전 대통령 추모 영상 상영과 추도사,성경 낭독과 기도,헌화 순으로 3시간 동안 진행 됐다. 일본 측에서는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과 센고쿠 요시토 행정쇄신상이 인사말을 하고, 와다 하루키 도쿄대학 교수와 이토 나리히코 주오대학 교수가 추모사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영결식은 여의도 국회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우리나라 모든 대통령들이 다 일정부분씩의 공과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 개인에 대하여 올립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18년 장기 집권 동안 나름의 경제 발전이 있었습니다.

 

2013년 11월14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탄신제 때 나온 말 : "박정희 전 대통령은 半人半神으로 하늘이 내렸다는..."

 

대명천지 현대 첨단시대에 이런 소리를 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탄압하고 죽였던 사람을 신격화까지하여 종묘제례 못지 않는 제복을 갖추고 탄신제를 지내며 추앙 숭배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생전에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삶과 정치에 대하여 욕 먹을 부분은 욕 먹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를 신격화하여 추앙,숭배하는 무리들은 누군가 그를 비판하면 난리가 납니다. 욕을 해대기도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박정희는 변신의 대가이자 기회주의자입니다.
사람들(지지자들)에게 시작과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그릇된 생각을 갖게한 사람입니다.

박정희 사형
박정희 무기징역
박정희 징역 15년

박정희 전 대통령 18년 장기 집권 동안 우리나라가 상당한 경제 발전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경제 발전에는 우리의 민족성과 월남특수가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으며, 외향적 경제성장으로 인한 폐단도 아주 많음). 그리고 박정희는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저해(박근혜 대통령이 대신 사과함)하고 국민의 인권을 유린한 독재자인 것도 사실입니다. 국제적으로도 박정희는 독재자로 통합니다.
박정희는 일본에 충성 맹세 혈서를 쓰고 일본 육사를 나온 친일파이기도 합니다. 박정희의 일본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입니다.
박정희는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던 빨갱이였습니다. 남로당에 가입하여 할동했던 죄로 박정희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며,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실토한 대가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습니다. 자기의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만 살아 나온 것이지요. 이후 15년으로 감형되어 군에서 파면되었다가 6.25가 발발하자 군에 복귀하였습니다.
그후 박정희는 1961년 별 2개 소장 때 5.16 쿠데타로 한국 정부를 몰아내고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존경했다는 박정희의 형 박상희는 대구 좌익 빨갱이들의 시위(대구10.1사건, 대구10월사건, 대구폭동 등으로 불림)를 주도한 빨갱이였으며 경찰에 총맞아 죽었습니다.

광복 후 구미에서 박상희의 영향력은 상당했는데, 박상희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지도하다가 김일성,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이 찬탁으로 돌아서자 그는 침묵했습니다.
박정희는 그런 사람입니다. 박정희는 공보다 과가 더 많은 사람입니다. 박정희를 무조건 찬양하거나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나라 박정희의 공과 과를 다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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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에 대한 글들:

1).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만주군 중위가 되었다...

만주의 무단장시[牡丹江市]에 소재한 제6군관구 사령부 초급장교 양성학교인 신경(新京:지금의長春)군관학교를 지원하여 합격하였다. 이때 그는 나이 제한에 걸려 1차에서 낙방하였으나 장교가 되겠다는 자신의 간곡한 편지를 보내 합격하게 되었다...

1946년 9월 대구에서 좌익에 의한 시위가 일어났는데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가 시위를 주도하였다. 10월 1일 대구시민들과 경찰간의 충돌이 발생하였고 박상희가 경찰의 총격에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형의 영향을 받았던 박정희는 군부에 비밀리에 조직된 남로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47년 육군소령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중대장이 되었다. 1948년 10월 국방군 내 좌익계열의 군인들이 제주4.3사건 진압을 거부하고 일으킨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나자 육군 정보사령부 작전참모로 배속되었다. 그해 박정희는 당시 국군 내부 남로당원을 색출하자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만주군 선배들의 구명운동과 군부 내 남로당원 존재를 실토한 대가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다. 이후 15년으로 감형되어 군에서 파면되었다...

 

2).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關東軍)에 배치되었다. 광복 때까지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쟁에 가담...

 

3).  만주군관학교 졸업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3학년 과정에 편입하여 졸업, 만주 보병제8사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만주국의 장교로 근무하였다...

박정희는 일제의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했지만 연령 초과로 1차에서 탈락했다.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를 증거로 내세운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장에 따르면 박정희는 만주군에 다시 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들어가려고 했다고 하며, 혈서라고 알려진 인용문은 다음과 같다...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한편 박정희와 같이 교사생활을 한 유증선은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박정희에게 혈서를 쓰도록 권유했으며, 그 말을 들은 박정희가 즉시 시험지에다가 핏방울로 혈서를 썼다고 말했다. 조갑제도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혈서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박정희 평전:가난에서 권력까지'를 쓴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혈서에 대해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의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투사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투사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도 있다. 언론인 겸 작가 문명자는 1972년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으로부터 만주군관학교 동창생들이 박정희에 대해 "박정희는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 마디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증언하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였으나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 언론인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 공산당의 군대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조갑제가 팔로군과 독립군이 무관하다고 한 반면,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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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로당에 가입해서 국군 장교 수십명을 포섭하는 프락치 역할을 했습니다.
(1963년 10월 13일 동아일보 기사) : 박정희 소령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으로 근무하면서 남로당 세포 조직하였고 후임인 오일근 소령에게 세포책으로 인계하고 제사연대로 전임 그리고 육본정보국에 전임하였다. 박정희 소령은 이중업 남로당 지령에 의하여 이재복 군부 연락책에 의하여 육군군부내 조직책을 담당하였으며 전군부조직을 통할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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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혈서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은 현재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만주신문은 1938.10.11~1944.3.31까지 만주 신경(장춘)에서 만주신문사가 발행했습니다. 만주군관학교도 1939년에는 신경(장춘)에 있었습니다.
간혹 만주일보가 1908년 폐간됐다고 혈서 자체도 조작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는데, 박정희혈서를 보도한 '만주신문'과 1908년 폐간된 '만주일보'는 별개의 언론입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광주민주화운동과 지역감정은 좀 애매한 부분이 있죠.... 순서를 바꿔 지역감정으로 인해 광주민주화운동의 평가가 갈리고 있다. 이렇게 볼 수는 있습니다.

 

먼저 순수한 의도의 민주화운동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사건이 민주화에 기여했으면 민주화 운동이죠.

 

일단 광주에서 소요가 발생한 이유는 박정희 시절 때 부터 호남에 대한 차별이 있었고 또다시 등장한 군사정권에 대한 우려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김대중이라는 정치가를 숙청한 것이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광주에서의 소요가 순수하게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 이다... 이런식은 좀 오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과격진압으로 순순히 진압될 줄 알았던 시위가 광주 전역으로 번지면서 군사정권을 긴장시켰고 심각한 유혈사태로 이어졌죠...

이 사건으로 군사정권의 도덕성과 정당성에서 큰 타격을 입었고 뒤에 이어질 6월 항쟁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중요한 것은 그거죠. 정치인들의 뇌리에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국민들을 두려워 하며 함부로 경거망동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거야 말로 민주주의의 발전 아닙니까?   

 

지역감정은 전라도나 경상도 어느 한쪽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각에서는 박정희 때 부터 시작되었다. 하는데 맞는 말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박정희 때 까지만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지역간에 표가 심각하게 갈리는 현상은 드물었으니까요.

오히려 김영삼과 김대중이 서로 대립하면서 지역감정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서로 단일 후보가 되겠다고 김대중은 전라도가서 유세하고, 김영삼은 경상도가서 유세하고... 그 결과 단일화에 실패하고 어부지리로 노태우가 당선된 것이죠. 또 이게다 전라도김대중탓이다. 경상도김영삼 탓이다 이러면서 점차 골이 깊어졌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정당들이 이 지역감정을 이용해 먹는 처지니, 앞으로도 없어지긴 어렵지 싶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그 친구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구요...
지역감정도...

글만 봐선 그 친구 반 돌+아이 같군요...

참고) 지역감정이란 어느 나라이든 모두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정치인들이 어떻게 이용하느냐 입니다. 우리나라는 철저하게 정치인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고 있고 일부 어리석은 국민들이 이용당하고 있는 겁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국가기관의 진상조사 결과에서 군이 먼저 발포한 것으로 나왔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불법으로 정권을 탈취했기 때문에 교과서에 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되는 것이고요.

단순히 무장했다고 폭동이라고 하는데, 동학농민운동이나 4.19혁명에서도 시위대가 무장했습니다. 과거 독립운동에서도 무장항일 활동을 벌이기도 했고요. 역으로 4.19 혁명도 폭동이냐고 물어보세요.

4.19 혁명 당시 시위대의 무장 행적은 아래 링크를 참고해보세요.



(1) 5.18 최초 사망자는 청각장애인 김경철씨

5.18민주화운동에서 5.18이 들어가는 이유는 1980년 5월 18일에 계엄군이 광주 시위진압에 최초로 진압됐기 때문입니다. 

5.18 최초 사망자는 1980년 5월19일 오전 3시 계엄군에 의한 구타후유증으로 사망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입니다. 5.18의 두번째 사망자는 19일 밤 10시 사망한 김안부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망진단서, 사망자 검시 자료가 있죠. 

 

5.18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주영복도 1996년 5월6일 열린 12.12 5.18 사건 7차공판에서 공수부대원이 시위 진압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19일 밤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94030 

 

●김경철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7Iv8Wfm.jpg

http://i.imgur.com/sVLaaLU.png

 

●김안부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DVO907u.png



(2) 검찰, 국방부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이 5.18 최초 발포


1995년 검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이 선제발포했습니다. 계엄군은 1980년 5월 19일 오후 5시 광주고 부근, 5월 20일 밤 11시 광주역 일대,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에서 발포하고, 금남로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해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죠. 시민이 본격적으로 무장에 나선 시점은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뒤입니다.

 

●(1995년 7월 검찰발표)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는 5월 19일 오후 5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있었던 바 (중략) 20일 밤11시께 3공수여단이 광주역 일대에서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는 한편 (중략) 본격적으로 시위대가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 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당시 군수뇌부는 자위권 발동을 논의했다. 5월21일 수기로 작성된 문서에는 '전두환 각하: 초병에 대해 대해 난동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돼있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먼저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같은 날 오후 1시경 계엄군의 발포 후 계엄군에 의한 조준사격이 있었다. 계엄군이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로 올라가 조준경이 달린 소총으로 시위대 맨 앞에 주동자를 향해 조준사격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06007



(3) 지역감정은 전두환 정권의 극심한 지역차별 정책 때문


 전두환 정권에서는 고위관료 직에서 지역간 격차가 더욱 심해쳐 영남출신이 43.6%로 늘어난 반면 호남출신은 9.6%에 불과했습니다. 제5공화국 시기 한국 50대 재벌 중에 영남출신 소유주가 23개인 반면, 호남출신 소유자는 4명에 불과했죠. 85년 전북과 전남의 도시화율이 각각 43%와 40%인데 반해, 경북과 경남은 각각 57%와 75%로 큰 격차를 보였습니다. 호남지역은 지역개발이 낙후되고, 지역발전을 위한 경제활동 기반이 취약해 지역격차가 더욱 심화됐습니다. 


1945년 해방 때 전라도와 경상도의 인구는 1:1.5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치면서 호남보다 영남이 5배 이상 사회, 경제적 혜택을 받았습니다. 호남은 호남대로 대우 못 받은 것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영남은 영남대로 기득권을 잃으려고 하지 않게 됐죠. 지역감정은 군사정권의 지역편중 발전정책이 불러왔다고 볼 수 있죠.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10500209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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