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은 민주화운동?폭동?

5.18은 민주화운동?폭동?

작성일 2013.11.18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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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80년 518사태에 대해 궁금하게 있어서 지식인을 활용합니다.

 

80년 당시 광주는 "민주주의"라는 말과 함께 반정부 시위를 조성했었죠

그 결과 경찰소 및 교도소를 털었고 총기류, 폭발물(TNT)를 도난 했죠

그 때 TNT를 설치, 해체 할 수 있었던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한명정도?

(그런데 어떻게 폭도들이 TNT를 설치 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20사단장? 차량을 무력으로 훔쳐

장갑차 및 탱크도 탈취해서 사용했었죠..운전은 또 어떻게 했었을까요..

그래서 개인적인 견해로는 민주화 운동보다는 폭동이라는 말이 더 가깝게 들립니다.

 

당시 방송에서도 폭도들의 폭동이라 하였습니다만..

 

왜 언제부터 5.18사태를 민주화운동이라 불리게 되었나요?

또한, 그 폭도들의 후예들이 한국전쟁 및 월남전에 참가한

분들 보다 더 많은 혜택을 가질 수 있었나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무조건 민주화운동이라고 보기에는 좀 무리가 있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완벽한 폭동이라는 건 아니구요.

 

 

 

[세계사광의 역사논평]<64>5.18은 민주화운동인가, 폭동인가?

 

 

* 북한 특수부대의 개입 여부에 관해서는 필자가 맞다 틀리다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관련된 전문지식이 없을 뿐더러 기초적인 사실관계가 맞는지 틀린지를 판단할 수준이 되지 못하므로 논외로 하고, 5.18은 민주화운동이냐 폭동이냐를 중점적으로 본 논평에서 다뤘음을 앞서 밝힙니다.

 

 


종편채널인 TV조선에 나와 5.18을 폭동이라고 주장하는 지만원 박사의 모습

 

5.18은 민주화운동인가, 폭동인가? 최근에 이와 관련해서 다시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예컨대 5.18을 폭동이라고 부르는 세력은 주로 전두환을 필두로 당시의 기득권층이었던, 즉 군부세력이다. 이들은 5.18을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폭동이라고 규정했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비단 당시의 기득권층만 하는 것은 아니다.

 

5.18을 폭동이라고 일컫는 사람은 대표적으로 지만원 박사이다. 그는 대표적인 보수논객으로 '시스템 클럽'이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군과 관련해서 상당한 지식과 현장경험을 자랑하는 전문가이다. 또한 그는 제주 4.3사건이나 12.12, 그리고 5.18과 같은 분야를 집중적으로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책을 냈다.

 

5.18이 폭동이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는 대체적으로 지만원 박사의 책에 의존한다. 즉, 5.18에는 북한 특수부대가 개입을 했으며, 무기를 들고 정부에 대항하여 맞서 싸웠기 때문에 폭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폭동이냐 민주화운동이냐는 논란은 보수측 내에서도 입장이 엇갈린다. 폭동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2000년 1월 12일에 제정된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호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는 민주화운동을 1969년 8월 7일 이후 자유 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 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을 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단, 사전적인 의미로 5.18의 2가지 명칭인 '민주화운동'과 '폭동'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민주화운동 -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벌이는 운동.

 

폭동 - 조직되지 않은 인간집단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력에 의해 소동을 일으키는 일.

 

 

5.18사건을 따져보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정치적으로 벌인 운동'인 것은 맞다. 그리고 또 폭동의 정의인 '조직되지 않은 인간집단이 자연발생적으로 폭력을 일으킨 소동'인 것도 맞다. 2가지 의미 모두 맞는 말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필자의 입장과 생각은 무엇이냐? 결론적으로 말을 하자면, 중도 보수우파인 필자는 5.18 자체는 폭동이 아닌, 민주화운동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5.18은 민주화운동이라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5.21은 폭동이라고 볼 수 있다고 본다. 아니, 그렇게 볼 측면이 다분히 존재한다고 본다. 예컨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기록에 따르면, 5월 18일 당일에는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소식이 보도됐다.

 

그리고 18일 오전 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항의했고, 항의 도중에 대학생과 공수부대원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학생들은 구타를 당했고 공수부대의 구타에 자극받은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광주천 주변 돌을 들어 교문에 있던 공수부대원들을 향해 던졌다. 전남대학생 300여명은 가톨릭 회관에 집결해 시위했다.

 

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해 5월 18일 오후 4시 제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했고,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검문검색과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이렇게 사건의 일지를 본다면 5.18은 폭동이 아니다. 5.18은 엄연히 민주화운동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 14시 00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민들은 화순, 나주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다.

 

이후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이런 점에서 5.18은 부정할 수 없는 민주화운동이되, 5.21은 폭동의 요소가 다분히 존재한다고 본다. 따지고 보면 5월 18일에는 시민군들이 아무런 무장을 하지도 않았다. 일반적으로 폭동이라는 명칭은 반란, 봉기, 소요 등의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5.18과 5.21을 구분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두산백과에 나온 폭동의 사전적 정의

 

예컨대 서구의 역사에서도 살펴보면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이 분명 존재한다. 그런데 그 혁명의 일면을 본다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두산백과에 따르면, 프랑스혁명의 발단이 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것은 폭동이라고 불리우며, 미국혁명과 러시아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것도 역시 폭동이라고 불리운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폭동은 '오랫동안 경제적, 신분적, 계급적으로 억압당해 오면서 쌓였던 불만이 한계에 도달하여, 누군가가 일을 저지르면 기다렸다는 듯이 집단으로 파급되어, 단순한 슬로건과 구호에도 민중은 흥분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나 폭도화된다.'고 한다.

 

또 '맹목적이고 감정적인 폭발이므로 거대한 파괴력을 발휘하며, 종종 이러한 폭동이 기성체제에 주는 타격은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폭도가 지도자를 내세워 정치목적을 명확히 하고 조직을 갖추게 되면, 혁명·내란·해방전·군사행동 등으로 바뀌게 되는데, 그럴 경우 폭도는 군대가 되고 폭동은 국내전쟁이 된다. 물론 이러한 전화(轉化) 과정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필자는 5.18이 무기고를 시민들이 털어서 무장을 했음에도 왜 폭동으로 불리지 않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며 민주화운동이냐 폭동이냐를 두고 논란이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일단, 프랑스혁명의 경우 바스티유 습격사건이라는 하나의 사건과, 또 이를 통틀어서 일컫는 프랑스혁명이라는 2가지의 명칭이 존재한다.

 

또 앞에서 언급했듯이 미국혁명과 러시아혁명도 혁명이지만, 사전에서 언급을 하는 것처럼 그 이전에 일어났던 일은 폭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미국혁명 이전에 발생했던 폭동이라고 하는 사건의 경우, 보스턴 차 사건일 것이다. 보스턴 차 사건의 경우도 폭동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에 미국의 독립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혁명이야 말을 할 것도 없을 것이다.

 

중국의 경우도 신해혁명이 일어났는데, 그 이전에는 쓰촨폭동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다. 쓰촨폭동은 중국 청나라 말기에 철도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난 폭동사건을 뜻하는데, 수백만 명의 일반민중이 무장투쟁을 전개했었던 사건이다. 그러나 이후 진압이 거의 성공할 무렵 군대가 거의 비어 있던 후베이성의 우창에서 혁명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신해혁명이다.

 

10월 10일 신군, 동맹회가 봉기함으로써 신해혁명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의 각 주요 혁명들, 예컨대 미국 독립혁명, 신해혁명, 러시아혁명, 프랑스혁명과 같은 혁명들의 경우에도 폭동이 시작된 이후에 비로소 혁명으로 발전했다. 즉, 폭동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서야 비로소 혁명으로 연결된 것이다.

 

두산백과의 사전내용에서 인용한 문장에 나와있는 것처럼 '종종 이러한 폭동이 기성체제에 주는 타격은 혁명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즉, 앞에서 언급한 혁명들이 바로 그러한 케이스일 것이다. 그러나 5.18은 어떻게 보면 케이스가 다르다. 혁명일 뻔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니라 민주화운동, 민중항쟁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5.18은 앞서 언급했던 혁명들이 일어나기 이전에 폭동이 발생하지 않았다. 즉, 5.18은 그 사건이 일어나서야 비로소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5.18이 폭동이냐 민주화운동이냐를 두고 정치권과 연결되어 논란이 되는 이유는 5.18이라는 사건을 5월 18일이라는 명칭으로 인해 하루만 기준으로 잡기 때문에 벌어지는 해프닝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서양은 프랑스혁명, 신해혁명, 러시아혁명, 미국혁명과 같이 날짜로 혁명이니 중요한 사건이니를 결정했던 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틀의 사건을 하나의 포괄적인 명칭으로 결정해서 그 포괄적인 사건 안에 폭동을 규정한 한 사건을 넣어 그 사건을 시발점으로 혁명이라 일컫는다. 폭동의 요소가 다분한 사건은 폭동이라 하되, 혁명이라는 사건의 안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서양과 달리 날짜의 명칭을 통해 예컨대 4.19혁명, 5.18민주화운동과 같이 중요한 민중항쟁의 역사적 사건을 정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고 본다. 사실, 굳이 따지면 5월 18일에 일어난 사건은 분명 그 누구가 뭐래도 부정할 수 없는 민주화운동이다. 5월 18일 사건 당일에는 분명 시민들이 폭동적인 요소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5월 21일은 폭동으로 규정해서 볼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분명히 5월 21일에는 14시 00분에 시위대가 나주, 화순 등지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을 시작했고, 14시 40분에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했고, 이어서 16시 00분에 화순, 나주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정치학대사전 편찬위원회가 편찬한 21세기 정치학대사전에서 폭동은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반란’ㆍ‘봉기(蜂起)’ㆍ‘소요(騒擾)’라고도 한다. 인간은 욕구나 이익이 만족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면 자연발생적으로 그것을 파괴하고자 조직되지 않는 집단이 폭력행위를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집합행동은 어떠한 경우에 일어나는가? 첫째, 가치박탈이 극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와 둘째, 집단의 역량이 강력해진 경우이다.

 

첫째에 관해서 박해나 빈곤이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폭동이 일어나기 쉽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 둘째에 대해서는 폭동을 일으키는 집단의 역량이 강하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즉,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그리고 신해혁명과 같이 세계의 판도를 뒤바꾼 의거와 같은 혁명의 이전에는 폭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 혁명의 시발점이 된 폭동을 폭동이라고 해서 깎아내리거나 그 혁명을 추켜세우지 않거나 하지는 않다. 따라서 필자가 판단컨대, 5.18은 명백한 민주화운동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장을 한 시점인 5.21은 폭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신군부가 당시 광주에서 벌인 사건에 대해 정당화나 합리화를 할 생각을 없다. 5.18은 명백한 민주화운동이고, 5.21은 폭동이지만, 5.21이라는 폭동은 정당화가 될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본다. 앞에서 언급된 혁명 이전에 벌어졌던 폭동사건들처럼 말이다. 사전에도 나와있지만(물론 필연적이지는 않다고 서술했지만), 폭동이 혁명을 낳기도 하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5.18은 실패한 혁명이었고, 그렇기에 혁명이라고 불리지는 않지만, 혁명적인 면모가 분명 존재했다. 필자가 쓴 본 글의 결론을 다시 정리해서 말하자면, 5.18은 명백한 민주화운동으로 이를 폭동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지만, 분명 5.18이라는 명칭이 다른 미국, 러시아, 프랑스혁명이나 신해혁명처럼 포괄적인 명칭이 아니라, 날짜로 명칭을 정했기 때문에 헷갈릴 요소가 있다.

 

따라서 폭동적인 요소가 있었고, 또 벌어졌던 5월 21일에 벌어진 5.21은 사전적인 용어의 기준에서 볼 때 폭동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폭동은 앞서 말을 했듯이 세계의 여러 굵직한 혁명 이전에 있었던 폭동들과 같은 사건이다. 따라서 5.21폭동은 정당화가 될 측면이 있으며, 신군부의 행위를 합리화 하고자 본 글에서 폭동이라 일컫는 것이 아닌,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고자 하는 의도로 붙인 것이고 분류한 것이다.

 

차라리 '5.18민주화운동'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명칭을 변경하고 그 사건에서 '5.21무기고 습격' 또는 '광주무기고 습격'이라는 폭동사건으로 규정을 해서 따로 사건을 표현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고 구분이 확실한, 그나마 객관적인 역사서술이 될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야만 지금처럼 혼란이 가중되지 않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마치 프랑스혁명이라는 사건의 발단에 바스티유 습격, 즉 바스티유 폭동이라는 사건이 있었고, 미국 독립혁명이라는 사건의 발달에 보스턴 차 사건이라는 보스턴 차 습격, 즉 보스턴 차 폭동이라는 사건이 존재했었으며, 신해혁명이라는 사건의 발단에 쓰촨폭동이라는 사건이 존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상입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일단 질문자님 글에서 몇개가 이상한개 껴있는데요.

 

폭발물 같은 경우에 전문가 까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다 TNT를 설치 했다는 말도 내용도 어디에도 없고요.(거기다 TNT 사용법이 다이너마이트와 같은데 사용법이 힘들면 군인들은 어떡해 사용 합니까;;)

 

거기다 장갑차와 탱크를 탈취및 사용했다고 적으셨는데..... 거참 말이 됨니까?

 

전차나 장갑차는 포위중인 군인들이 타고 고놈들(군인) 기지에 있는데 거기가 털렸다면 광주 시민들이 다 밖으로 나갔겠지요.

 

그리고 새각해 봅시다.

 

 질문자님이 사시는 곳을 00마을 이라고 했을때... 그저 마을주민이 전두환이 올바르지 않다고 하여 00마을을 포위 하고 모든 통신, 물자등을 막았습니다.

 

당연히 질문자님과 마을주민 들은 물러가라고 했겠죠.

 

그런데 갑자기 군인들이 질문자님과 마을 주민에게 총을 쐈고 상당수가 죽었습니다.

 

그럼 군인들이 마을사람들과 질문자님을 살려줄 생각이 없다는걸 알았겠죠. 그럼 어쩝니까. 총을들고 자기 목숨과 부모 형제등 가족을 지켜야죠.

 

여기서 만약 질문자님 말대로 탱크나 장갑차를 마을분들이 탈취하고 사용할줄 알았다면 탈출하는데 썼겠죠.

 

마지막으로 만약 질문자님 말대로 폭동이라면 이상한점이 한두가지가 아님니다.

 

첫째 외국인 기자들이 쓴 신문과 당시 게엄군의 증언 입니다. 전두환 정부를 비판하며 내부상황을 적은기사가 대다수 이고 계엄군들중 사태후 죄책감에의해 정신병을 얻은자가 많죠 거기다 증언도 수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둘째 전두환 정부는 폭동이일어날것을 어떡해 알고 게엄령 선포및 광주를 포위했다는 것인가.. 입니다. 내부고발자가 있었다면 기록이 있거나 유명세를 탔겠죠.

 

그외에도 많겠지만 시간관계상 여기서 이부분은 끊겠습니다.

 

다음은 광주사태를 민주화 운동이 된것인데 사실상 그당시 정부는 독재 입니다. 그것에대해 시위가 많던 곳이 광주고요.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에서 훨신 동떨어진 국가가 됬을지도요.

 

다음은 보상에 관한것인데 월남전은 그저 파병이였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파병군들에게 줄돈으로 고속도로짓고 만대로 쓴데다 먹었죠.. (만약 모든 파병군들에게 지원금을 계속준다면 국방비가 좀 더들기 시작할 겁니다.) 원래는 파병을 하면 원군을 요청한 국가같은데서 파병금을 주는데 이걸 박정희 정권이 먹었죠. 그의따른 현재의 보상입니다.

 

한국전쟁때도 국가와 국가관의 전쟁인데다가 그저 아직까지 제대로 지원을 못해줄 뿐입니다.

 

광주사태같은 경우에는 완전히 케이스가 다른데요. 파병이나 전쟁유공자들과 다르게 이들은 국가의 잘못에 의해 돌아가셨고 당연히 국가가지은 죄많큼 보상을 해줘야죠(이것마져도 제대로 않된다 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일베에서 사소한 것도 부풀리는 음모론 글을 많이 보신 듯 한데요. TNT는 광주 주변의 화순군에 있는 화순광업소 광부가 가져온거고, 5.18 당시 사용된 KM900 장갑차는 일반인도 운용 가능한 차륜형 장갑차입니다. 국가보훈처 사이트에 따르면 한국전쟁 및 월남전에 참전한 국가유공자가 혜택이 많습니다. 

1. 화순광업소 직원이 TNT 조립 

일반 시민이 어떻게 TNT의 조립이 가능하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TNT을 가져온 곳이 화순광업소이고, TNT 제조를 담당한 사람이 화순광업소(화순광산) 직원들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광주 주변에 어디선가 TNT를 쓰는 곳이 있기 때문에 광주 시내로 반입이 가능한 것이겠죠. 아래 사진은 화순광업소 앞에 있는 5.18 민중항쟁사적비를 찍은 사진입니다.



다이너마이트는 계엄군을 가까이 오지못하게 하는 수단이었을뿐 공격용 무기는 아니었다. 5.18기간동안 엄청난양의 다이너마이트가 유출됐지만 계엄군 공격을 위해 사용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성전씨등은 다이너마이트를 손에 넣으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증언한다. 

다이너마이트가 시위대에게 전달되던 21일 밤 9시께 시위차량에 타고 있던사람들은 이성전씨와 당시 호남탄좌 화순광업소에 근무하고 있던 김영봉씨등 모두 13명. 이들은 곧바로 신운마을 인근 가정집으로 들어가 다이너마이트 결합작업에 들어간다. 이 다이너마이트가 계엄군들의 광기에 위협받고있는 광주 시민들을 구한다는 일념하나로 13명 모두가 숨을 죽인다. 김영봉씨의 주도 아래 뇌관과떡밥을 연결하고 20-30cm길이로 자른 도화선을 연결한다. 



2. KM900 장갑차는 일반인도 운용이 가능

5.18에서 시민이 조종했던 장갑차는 KM900(CM6614)입니다. KM900은 궤도장갑차가 아니라 차륜식 장갑차이며, 핸들이 달려있어 조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당시 버스기사, 트럭기사도 시위에 많이 참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광주 시민의 KM900 조종이 불가능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3. 1988년 노태우 정부 때부터 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 사용

5.18은 1988년에 가동된「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거치면서 노태우 정부로부터 처음「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공식 인정받았습니다. 1988년 13대 국회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규명에 나섰습니다.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30416164800533




4. 6.25 및 베트남전 국가유공자가 5.18 민주유공자보다 혜택이 좋음


5.18 민주유공자 혜택이 6.25관련 유공자보다 반드시 많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6.25상이군경, 6.25전사자는 국가유공자로 분류된다는 점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6.25 관련 유공자는 국가유공자와 참전유공자로 나뉘어 집니다. 6.25전쟁에서 전사한 군인의 유가족, 부상으로 장애를 입은 군인, 전투에서 공훈을 세운 군인은 국가유공자에 등록되어 혜택을 받고요. 6.25전쟁에 참전했지만 장애나 사망 등 피해를 입지않은 군인은 참전유공자로 등록됩니다.

5.18 민주유공자는 단순히 5.18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고 등록되는 것이 아니라, 5.18 민주화운동을 통해 장애나 유가족 사망, 구속연행 등 피해를 입어야 될 수 있는데요. (당시 구속연행은 불법이며 고문, 구타를 동반하므로 피해사실로 인정됨) 우리나라 국가보훈은 피해에 대한 보상 위주라서 피해사실이 있는 5.18 민주유공자가 참전유공자보다 혜택을 더 많이 받는 구조죠. 현재 보훈체계에 따르면 5.18 민주유공자의 보훈 비교대상은 참전유공자라기보다는 6.25 전쟁과 관련된 국가유공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국가보훈처 사이트에 따르면 5.18 민주유공자가 받는 혜택은 분명히 국가유공자보다 많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보훈처 사이트에 따르면 5.18 민주유공자가 받는 혜택은 분명히 국가유공자보다 못 미치고 있습니다. 국가유공자와 달리 5.18 민주유공자는 매달 연금을 받지 않습니다. 국가유공자는 상이군경의 경우 매달 112만원~593만원, 유가족은 매달 39만원~139만원의 연금을 받고 있네요. 의료비 혜택도 5.18민주유공자가 국가유공자보다 적은 편이고요. 

6.25전, 베트남전 관련 국가유공자, 5.18 민주유공자의 혜택을 비교하면 6.25 및 월남전 상이군경-6.25 및 월남전 전사자 유족-5.18부상자-5.18사망자 유족-5.18 구속연행자 순이라고 할 수 있죠.

(1) 6.25 국가유공자의 혜택 (국가보훈처)


(2) 5.18 민주유공자의 혜택 (국가보훈처)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애초에 질문에서 폭동이라고 생각하고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게 되는겁니다...
그리고 애초에 시민군이 군기지로 쳐들어가 무기를 탈취하는게 가능하다 생각합니까?
전 경찰서? 인가 무기고에서 탈취한걸로 압니다

그리고 광주시민들은 군대 안다녀왔답니까?
폭탄 설치를 할수 있는 사람정도 있습니다.

그리고 탱크가 있었다면
광주시민 사상자가 1천명에 가까운 반면(사망자+부상자)
군인사상자는 고작 36 명 밖에 됐을리가 있을까요?

5.18민주화 운동의 발생과정

학교 수행평가에서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데,5.18 민주화 운동의... 의미의 폭동이고, 신군부의 마음속에 내란하려는 마음(관심법)이 있었기 때문에 5.17은...

5.18 민주화운동

학교에서 5.18민주화운동을 2학년에게 설명해주라고 하는데 좀 알아먹기쉽게... 의미의 폭동이고, 신군부의 마음속에 내란하려는 마음(관심법)이 있었기 때문에 5.17은 내란을...

5.18은민주화운동인가폭동인가

안녕하세요 제가 5.18민주화운동이아닌폭동이라는소리를듣게되었습니다 저는 교과서에서도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니까 그렇구나 하면서 민주화운동이라고생각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폭동?

... 5.18은 민주화운동입니까 폭동입니까? 잘못알고 계시네요. 5. 18은 전두환 집권당시 일어난게 아닙니다. 최규하 정권하에서 전국 계엄령이 선포이후에 일어난 하나의...

광주 5.18 민주화 운동 폭동이냐?...

... 5.18 민주화운동폭동이고 왜곡되었다...? 그래.. 5.18폭동이라고 생각하고 왜곡된 역사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되지 왜 설쳐되는거지?... 5.18폭동이라고...

5.18민주화운동?폭동?에대하여

... 제가 어제고지전 보고나서 우리나라역사에대하여 좀더알아보자,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알아보니까 5.18민주화운동폭동으로도 취급이되더라고요. 그리고 우리나라정치가...

5.18 민주화운동? 폭동?

... 흑인폭동 흑인폭동은 92년 백인 경찰4명이 흑인운전수를 집단구타하고 평소 쌓였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터진 사태인데 만약 5.18 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면 흑인폭동폭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