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의 주관적 판단이 무엇보다 좋은 부분입니다만, 그걸 실현시키려면 본인도 여러모로 공부를 하고 있다
라는 전제하에, 두가지 입장을 서술해드리겠습니다.
A(폭동)
- 무기를 들었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장을 실시했다.
-> 폭동을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5.18은 폭동이다.
- 북한개입설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다.
-> 그래서 북한에서는 이를 기념한다.
-> 탈북자들의 증언이 존재한다.
-> AK가 나왔다는 점, 간첩 600명이 남파되었다는 점
- 5.18은 김대중을 석방시키기 위한 운동이다.
- 5.18은 전두환 잘못이 아니고 정웅이 총책임자다.
-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B : 민주화운동 측)
A : 무기를 들었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장을 실시했다.
=> 원인은 그쪽이 아닌 "서울의 봄" 때의 민중들의 행동 즉, 시위에서 나온것이며, 당시 최규하 정부 역시
그 부분은 수용한다고 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있을 수가 없었지만, 12.12 사태로 군권을 잡고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본보기로 광주를 진압했다. 라는 것은 역사적인 팩트.
=> 또한 6.25 전후로 징병제가 시작되었으며 30년간 대한민국 남성들은 군필자가 대부분이였다. 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무기를 다루는 것도 이상한일은 아님. (미국의 총기소유는 문화적인 부분도 있지만,
법이 생길 당시 민병대의 힘이 강했고, (실제로 이들이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음) 그 때문에 자기몸은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뜻에서 총기소유를 할 수 있도록 합법적으로 지정 -> 자위권 행사 가능)
A : 북한개입설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다.
-> 그래서 북한에서는 이를 기념한다.
=> 딱히 5.18만 기념하는게 아닌 4.19나 6월 민주항쟁 역시 기념한다.
북한 입장에서는 반자본주의 운동이기 때문에 이를 선동에 넣어야 할 필요성이 생기며, 자본주의 정부는
정당성이 없다. 라는 것을 민중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에 기념을 한다.
즉, 5.18은 북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
-> A : 탈북자들의 증언이 존재한다.
증언이 점점 변합니다. 객관적으로 증언이 변한다고 한다면, 이건 믿을 가치가 없죠.
-> A: AK가 나왔다는 점, 간첩 600명이 남파되었다는 점
=> 1. AK는 일절 나오지 않았습니다. M16이나 칼빈 등등 총상자들은 나왔지만, 현재까지 AK 총상자는
한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505 보안부대 검시보고>
총상 M16 - 90명
카빈 - 21명
미상 - 13명
기타 - 1명
자상 - 8명
차량사 - 7명
타박사 - 16명
<광주 지검 검시 보고>
M16 96명,
카빈 26명,
刺傷 4명,
타박死 18명,
차량死 12명
<보안사 검시참여보고>
총 사망자 159명
카빈 21명,
총상 미상 15명,
M16 94명
=> http://asegaew.egloos.com/3373250
- 사건 조사때문에 조금씩은 다르지만 뭘 뒤져도 AK 흔적은 안나왔습니다.
- 탈북자의 증언이 간첩 600명이 남파되었다. 라는 사실이지만, 규모가 변하고 있고, 확실성이 없기 때문에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정황적으로도 당시 미국은 12.12 사태 전후로 긴장상태를 유지했습니다.
12.12 사태에는 남침을 대비해서 항공모함을 띄워놓앗고, 5.18 당시에는 미국 국방부가 수시로 정보를 받아왔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5.18과 많은 관련이 있고, 근거 중 부분해제된 국방부 문서가 있는 겁니다.)
미국의 눈에서는 간첩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주적은 북한이고, 반공정책이 그때 당시에
는 최우선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명이 들어왔다. 라는 첩보가 들어왔더라면 우리나라의 국군의 존재의
의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우익이라는 정파는 완벽하게 살아날 수 없습니다. (우익계열이 국방에 대해서는 좀더
무게를 싣는 쪽이죠. 물론 국방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부분이지만 말입니다.)
=> 강명도의 증언
강명도는 북한의 고위급 탈북자들 중 하나로 실제 현 북한을 통치하고 있는 김씨 일가와도 많은 친분이 있었고, 당시 강명도의 탈북은 북한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강명도는 탈북이후 북한에서의 듣고 본 바를 책을 써내는데 그가 바로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라는 서적이였다. 여기서 강명도는 광주사건에 대해서 일침을 내렸는데, 그는 광주에 북한군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실제 김일성 12.12사태와 5.18을 두고 위의 발언처럼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왜그럴까? 당연한 일이다. 국가적으로 파란을 가져올만한 사건에 아무런 손도 쓰지 못했으니 참으로 아쉬울 수 밖에!
"당시 대남공작총책이었던 김중린 비서(훗날 아웅산테러 실패와 전두환에 대한 여러가지 공작 실패로 김일성-김정일 부자로 부터 "똥물에
튀겨죽일놈"이란 낙인이 찍히고 숙청당함)가 1200명 정도의 특수부대를 차출해서 남한의 광주에 침투시켜서 사태를 격화시키고자 시도했었다."
"실제로 일선급 특수부대에서 인원선발도 끝났고 세부계획도 마련되어있는 상태였지만 북한측이 예상했던 것 보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찍 남측에 의해 진압되어버린 바람에 투입하지 못했고, 김중린은 시기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에 엄청난 문책을 받았다."
-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 강명도 저 中
- 5.18은 김대중을 석방시키기 위한 운동
=> 그럴리가... 5.18은 서울의 봄으로 인한 시위에서 나온겁니다. (광주도 어느지역와 다를거 없이 서울의 봄 당시
에는 시위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5.18 이전에는 총 한자루도 보이지 않았죠.) 게다가 군인에 의해 5.17 계엄령
을 기점으로 재야인사들을 강제로 연행했는데, 이걸 풀어달라고 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있을까요? 그것도 김대중이
라는 사람은 꾸준히 반유신을 외쳐왔고, 거물재야인사라는 점에서 보면 신군부측이 이미 견제할 대상을 쳐내고 있
다. 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 또한 김대중 석방문제 때문에 미국 극우계열의 레이건 행정부는 구명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세계 각국의
인사들이 구명운동에 앞장섰습니다.
-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 NO. 19일 계엄군이 먼저 발포했습니다.
광주에서 최초의 발포는 5. 19.에 있었다. 5. 19. 16:50 광주시 계림동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다가 멈춰선 장갑차를 시위대가 공격하자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 대위가 M16을 발포했고,1) 당시 조대부고 3학년인 김영찬이 유탄에 총상을 입었다. 5. 20. 01:00 보안사는 현지 505보안부대로부터 “5. 19 고교생 1명(인적사항 미상)이 우측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전남의대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았다.”는 보고를 받았다.2)
1) 당시 11여단 63대대장 조창구 중령은 차○○ 대위로부터 보고를 받았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서울지검, 「조창구 2회 피의자 신문조서」, 5․18사건 수사기록 17권, 26454~26455쪽
2) 보안사, 「광주사태 일일 속보철」(5. 20. 01:00, 505), 383-1980-89, 113쪽.
[진상규명 제3호 12.12, 5.17, 5.18 조사결과보고서 -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 - p79
총상자나, 사망자는 시민 측에서 먼저 나왔습니다.
최초 사망자 김경철 씨 (http://i49.tinypic.com/32zkyh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