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위인중 부산사람이 누구누구 있나요?

조선시대 위인중 부산사람이 누구누구 있나요?

작성일 2012.11.06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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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께요!

조선시대 위인중 부산출신이 누구누구 인지 궁금합니다!

더불어서 무슨일을 하셨는지까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서원이 뭐뭐 있는지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조선 숙종 때 부산 동래 출신의 평범한 어부인 안용복 선생이 떠오르네요.

마침 캐스트에 적절한 자료가 있어 첨부합니다.

 

서원은 고종때 철폐령 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중 에  동래 충렬사(안락서원) 있습니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조지 오웰의 유명한 경구는 역사의 현실적·정치적 의미를 날카롭게 압축하고 있다. 허황된 망상이나 도착(倒錯) 같은 드문 예외를 빼면―어쩌면 그것조차도―인간의 모든 삶은 현실 안에서 이뤄진다. 역사를 비롯한 모든 학문도 어떤 방식으로든 궁극적으로 현실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치나 경제처럼 현실을 직접 강력하게 지배하는 분야와 견주면, 그 영향력과 범위는 상당히 축소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제한된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역사를 비롯한 학문의 본연에 좀 더 가깝다고도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현실과 가장 민감하게 얽혀 있는 과거의 문제는 독도의 영유권을 둘러싼 일본과의 분쟁일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등도 주요한 현안이지만, 현실의 영토주권이 걸려있다는 측면에서 독도 문제는 그 차원을 달리할 것이다.

아호에서 자주 나타나듯이, 어떤 인물과 지명은 서로 깊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많다. 한국사에서 안용복(安龍福. 1658?~?)과 독도는 그런 관계가 가장 밀접한 사례의 하나다. 그러나 독도가 한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듯이, 그 섬과 가장 중요하게 관련된 안용복도 자세한 사항은 흐릿하다.

개인적 사항들

방금 말했듯이 안용복의 인적 사항은 그 이름을 빼면 정확한 것이 드물다. 우선 가장 기초적인 생몰년부터 확정하기 어렵다. 사망한 해는 전혀 알 수 없지만, 태어난 해는 1658년과 1652년의 두 학설이 제시되고 있다. 두 근거 모두 돗토리 번(鳥取藩)의 번사(藩士) 오카지마 마사요시(岡嶋正義)가 지은 [죽도고(竹島考)](1828년. 순조 28)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 1652년설은 안용복 자신이 제1차 도일(1693년. 숙종 19) 당시 42세라고 진술했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1658년설은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안용복의 호패에서 추산한 결과다. 경오년(1690년. 숙종 16)에 발행된 그 호패에는 그가 33세로 적혀있다. 그러니까 안용복은 1658년 생으로 제1차 도일 당시 36세였다.

자신의 진술과 호패의 기록이 달라 선뜻 확정하기는 주저되지만, 당시 특히 안용복처럼 신분이 높지 않은 부류는 자신의 나이를 정확히 알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판단에 따라 호패라는 실체적 자료에 기록된 1658년설이 좀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 양식상 호패에는 안용복에 관련된 기초적 사항이 몇 가지 더 담겨 있다. 우선 “주인은 서울에 거주하는 오충추(主京居吳忠秋)”라는 부분은 그의 신분이 사노비였음을 알려준다. 이익의 [성호사설] (제3권 <천지문〔天地門〕> 울릉도) 등 안용복에 관련된 다른 자료에서는 그가 동래부 전선(戰船)의 노꾼이었다고 기록했다. 이 부분도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안용복이 평민 이하의 신분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얼굴이 검고 검버섯이 돋았지만 흉터는 없었다. 키는 4척 1촌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환산하면 너무 작아(123센티미터 정도) 오기로 보고 있다. 호패에는 이름도 ‘用卜’으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거주지는 ‘부산(釜山) 좌자천(佐自川) 일리(一里) 십사통(十四統) 삼호(三戶- 현재의 부산시 동구 좌천동 부근)’로 적혀 있는데, 이곳은 왜관ㆍ경상좌수영과 가까웠다. 이런 사실은 그가 “동래부의 노꾼으로 왜관을 드나들어 일본어를 잘했다”는 [성호사설] 등의 기록과 부합된다.

그의 어학능력과 일반적 지식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일본에 두 번이나 다녀왔다는 사실로 볼 때 그는 일본어를 일정 수준 이상 구사했을 것이다. 신분의 제약이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추정되는데, 그러나 한자는 그만큼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일본에서 전남 순천(順天)의 한자를 몰라 가타카나로 표기한 사실은 한자보다 일본어에 더 능숙했다는 측면을 보여주는 증거로 지적된다. 두 번에 걸친 도일 행적을 볼 때 그는 기민한 지력과 대담한 실천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측면은 뜨거운 애국심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제1차 도일(1693년 3월~12월)

방금 말했듯이 안용복은 두 번 일본에 다녀왔다. 사건의 성격상 처음은 납치된 것이고, 나중은 계획에 따른 자발적 방문이었다.

건국 이래 울릉도ㆍ독도에 관련된 조선의 방침은 섬을 비워 분쟁의 소지를 없애는 공도(空島) 정책이었다. 태종은 두 번(1403·1416년), 세종은 세 번(1419·1425·1438년)에 걸쳐 울릉도 주민을 본토로 쇄환(刷還)했다. 그러니까 조선 전기 이후 독도는 물론 울릉도에도 조선인은 살지 않았으며, 가끔씩 어업만 이뤄지던 상태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울릉도에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타케시마(竹島)’라고 불렀다. 일본 어민들은 1625년(인조 3) 무렵부터 막부에서 울릉도 도해(渡海)를 허가받은 뒤 이곳에서 전복ㆍ물개 등을 잡아왔다.

안용복의 제1차 도일은 1693년 3월에 일어났다. 그때 안용복은 울산 출신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호키(伯耆) 주 요나코무라(米子村)에서 온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고, 조업권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인원 부족으로 안용복은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박어둔은 안용복보다 8세 아래로, 역시 정확한 신상은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처지의 인물로 추정된다.

이것은 그의 삶에서 예기치 않은 수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바꾼 변곡점이 되었다. 안용복은 인질이 되었지만 대담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조선 사람이 갔는데 억류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호키 주 태수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안용복의 거세고 논리적인 반발에 밀린 태수는 그의 주장을 문서로 작성해 막부에 판단과 신병 처리를 물었다.

막부의 회신은 5월에 도착했다. 막부는 안용복 등을 나가사키(長崎)로 이송해 돌려보내라고 지시하면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鬱陵島非日本界)”라는 내용의 서계(書契)를 써주게 했다. 이것은 17세기 무렵 일본이 울릉도(와 그 부속 도서인 독도)가 자신의 영토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중대한 결정을 일개 어부인 안용복이 이끌어낸 것이었다.

9월 초 안용복은 대마도에 인계되었고 50일 정도 억류된 뒤 사신 타다 요자에몽(多田與左衛門. 조선 기록에는 귤진중(橘眞重)으로 표기)을 따라 부산 왜관으로 송환되었다. 9개월 만의 귀국이었다. 그러나 그는 왜관에서도 40일 넘게 갇혀 있다가 12월에야 동래부사에게 인도되었다. 적지 않은 고초를 겪으면서 중요한 영토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온 그에게 내려진 것은 포상이 아니라 처벌이었다. 그와 박어둔은 허가 없이 월경(越境- 국경을 넘는 일)한 죄목으로 각각 곤장 100대와 80대를 맞았다.

그러나 이때 울릉도ㆍ독도 문제는 획기적인 전환을 맞았다. 1694년(숙종 20) 4월 갑술환국으로 남구만(南九萬)ㆍ윤지완(尹趾完) 등 소론 정권이 들어선 뒤 조선의 대일노선은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해(渡海) 및 채어(採漁)를 금지한다”고 결정했고(1694년 8월), 삼척첨사 장한상(張漢相)을 보내 울릉도를 수색케 했다(같은 해 9월 10일~10월 6일). 장한상은 돌아와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아득한 바다에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며 거리는 300리 밖에 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 뒤 1년 넘게 조선 조정은 일본 막부를 대행한 대마도와 울릉도ㆍ독도의 영유권과 어업권을 둘러싸고 복잡한 논의를 벌였다. 그 결과 1696년(숙종 22) 1월 일본 막부는 울릉도ㆍ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일본 어민의 도해와 어업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17세기 후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고유 영토임을 확인한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이런 결정은,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응한 안용복의 행동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제2차 도일(1696년 5월~8월)

제2차 도일은 안용복의 자발적인 결행이었다. 1696년 1월 막부는 울릉도ㆍ독도의 조선 영속과 일본 어민의 도해ㆍ어업을 금지하기로 결정했지만, 대마도가 서계 접수를 미루는 바람에 시행이 계속 늦춰지고 있었다.

그러자 안용복은 자신이 이 문제를 선제적으로 직접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관리로 자칭해 도일하는 대담한 계획을 실행했다. 그의 준비는 치밀했다. 그는 울릉도ㆍ독도가 강원도에 소속된 것으로 그려진 [조선팔도지도(朝鮮八道之圖)]와 자신이 입을 푸른 철릭(靑帖裡- 무반 당상관의 공복), 검은 갓, 가죽신 등 증빙 자료와 물품을 마련했다.

1696년 3월 안용복은 조선 어민을 대거 이끌고 울릉도로 갔다. 그 뒤 일본에서 안용복은 32척의 배를 동원했다고 진술했는데, 1척에 5명씩만 잡아도 160명이나 되는 규모다.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일본 어민들은 예전처럼 조업하고 있었다. 양국의 협약이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안용복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안용복은 그들의 월경죄를 꾸짖고 다시 호키 주로 갔다. 그는 대담하게 행동했다. 그는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준비한 관복을 입어 정식 관원처럼 차린 뒤 호키 주의 수석 가로(家老) 아라오 오오카즈(荒尾大和)와 담판했다. 안용복은 대마도주의 죄상을 고발하는 문서를 작성해 제출했고, 호키 주에서는 그것을 막부에 전달했다.

이때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던 안용복의 계획은 그러나 난관에 부딪쳤다. 그동안 조선과의 대일 통교를 담당해온 대마도가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막부의 연락으로 안용복의 입국과 직소(直訴- 규정된 절차를 밟지 않고 상급 관청에 직접 호소함) 사실을 알게 된 대마도는, 안용복이 조선의 관원이 아니더라도, 그동안의 관례와는 달리 자신을 거치지 않고 막부와 직접 접촉하도록 허락한(좀 더 정확히는 그렇게 했다고 판단한) 조선 조정의 의도를 의심했다. 대마도에서는 안용복의 고소장을 물리치도록 막부에 요청하고 그 일행을 표착민(漂着民)으로 처리해 자신들을 거쳐 송환하도록 요청했다. 그 결과 안용복 일행은 목표했던 울릉도ㆍ독도의 조선 영속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696년 8월에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막부의 결론은 1696년 1월에 이미 나와 있었다. 조선은 역관이 귀국한 뒤인 1697년에야 그런 사실을 알았고, 이듬해 4월 막부의 결정을 확인한다는 서계를 회신했다. 석 달 뒤인 7월에 막부는 이 서계를 인정하고 그 사실을 이듬해 1월 대마도에 알렸다. 이로써 안용복 사건을 발단으로 불거진 울릉도ㆍ독도의 조선 영속과 어업권을 둘러싼 분쟁은 6년여 만에 일단락된 것이었다.

이번에도 안용복은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관리를 참칭하고 자발적으로 월경했다는 사실 때문에 죄목은 더 무거워졌다. 안용복은 1696년 8월 하순 강원도 양양에 도착했지만 현감에게 구금되었다가 며칠 뒤 탈출해 그동안 주로 거주한 동래부로 갔다. 그러나 9월 12일에 체포되어 한양으로 이송되었고 비변사에 구금되어 국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대신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유상운(柳尙運. 영의정)ㆍ윤지선(尹趾善. 좌의정)ㆍ서문중(徐文重. 우의정)ㆍ유집일(兪集一)ㆍ민진장(閔鎭長. 병조판서)ㆍ최석정(崔錫鼎. 이조판서)ㆍ김진구(金鎭龜)ㆍ오도일(吳道一) 등 노론 대신들은 처형을 주장했다. 안용복의 도일은 건국 이래의 공도정책을 어긴 범경(犯境) 행위이며, 대마도가 아닌 호키 주를 거쳐 막부와 접촉하고 정부문서를 위조한 것은 외교적 범죄라는 논거였다.

남구만(영중추부사)ㆍ윤지완(영돈녕부사)ㆍ신여철(申汝哲. 지중추부사) 등 소론 대신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범죄행위는 인정하지만 호키 주 태수를 직접 만나 울릉도ㆍ독도의 영유권과 어업권을 막부에 주장한 것은 국가에서도 제기하기 힘든 문제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그런 공로를 인정해 감형을 주장했다. 직책과 당파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형이 우세한 견해였지만, 격론 끝에 안용복은 결국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1697년(숙종 23) 3월). 1658년에 태어난 것으로 계산하면 40세 때의 일이었다. 유배형에 처해진 뒤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평가와 추숭

울릉도 남동쪽에 위치한 독도. 안용복의 두 번에 걸친 도일은 독도에 대한 조선의 영토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조정의 적극적인 대처를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cc) 머찐만두 at ko.wikipedia.org>

지금 일정한 나이를 넘은 한국인 중에서 ‘독도’라는 지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과 맞물려 안용복의 이름 또한 웬만한 역사적 인물보다 훨씬 널리 알려져 있다.

안용복의 활동이 당시에 끼친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지적된다. 하나는 그동안 공도정책이 보여주었듯이 울릉도ㆍ독도와 관련해 희박했던 조선의 영토의식을 높였다는 것이다. 두 번에 걸친 안용복의 도일로 조선 조정은 두 섬의 영유권과 조업권이 분쟁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했고, 뒤늦게나마 적극적으로 대응해 권리를 확보했다.

다음은 일본(대마도)의 교섭태도가 변화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일본은 주로 억지와 기만에 근거한 외교를 유지해왔지만, 이 사건을 겪으면서 조선의 강경노선을 인식한 결과 유화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로 바뀌었다고 평가된다.

안용복보다 조금 늦은 시기를 살았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안용복은 영웅호걸이라고 생각한다. 미천한 군졸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강적과 겨뤄 간사한 마음을 꺾어버리고 여러 대를 끌어온 분쟁을 그치게 했으며 한 고을의 토지를 회복했으니, 영특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포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앞서는 형벌을 내리고 나중에는 귀양을 보냈으니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울릉도는 척박하다. 그러나 대마도는 한 조각의 농토도 없고 왜인의 소굴이 되어 역대로 우환이 되어왔는데, 울릉도를 한번 빼앗기면 이것은 대마도가 하나 더 생겨나는 것이니 앞으로의 앙화(殃禍- 재난)를 이루 말하겠는가.

그러니 안용복은 한 세대의 공적을 세운 것만이 아니었다. …… 그런 사람을 나라의 위기 때 병졸에서 발탁해 장수로 등용해 그 뜻을 펴게 했다면, 그 성취가 어찌 여기서 그쳤겠는가.

- [성호사설] 제3권 <천지문(天地門)> 울릉도

안용복은 독도 문제가 다시 불거진 현대에 와서 더욱 높이 평가되었다. 1967년 1월 대통령 박정희는 “국토를 수호한 공로는 사라지지 않을 것(國土守護, 其功不滅)”이라는 휘호를 기증했고, 같은 해 10월 안용복장군 기념사업회에서는 부산 수영사적공원(지금 수영구 수영동으로 안용복이 근처에 살았던 경상좌수영이 있던 곳이다) 안에 그의 충혼탑을 세웠다.

우리 역사와 인물에 특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시인 노산 이은상(李殷相)은 “동해 구름밖에 한 조각 외로운 섬 / 아무도 내 땅이라 돌아보지 않을 적에 / 적굴 속 넘나들면서 저님 혼자 애썼던가 / 상이야 못 드릴망정 형벌 귀양 어인 말고 / 이름이 숨겨지다 공조차 묻히리까 / 이제와 군 봉하니 웃고 받으소서”라는 시를 바쳤다. 수영사적공원에는 2001년 3월에 수강사(守彊祠. 강역을 지켰다는 뜻)라는 사당과 동상이 추가로 세워졌다.

전근대의 교통ㆍ통신 환경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낙후되었다. 소식을 주고받고 거리를 이동하는 데 드는 시간과 노고는 대단히 컸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인내심은 줄어든다”는 지적은 문명의 부정적 측면을 날카롭게 짚었다.

지금도 바다에서의 이동과 생활은 육지보다 훨씬 어렵다. 그러니 안용복의 시대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시야를 넓히면 지구를 누빈 대항해 시대의 위대한 탐험가들도 있지만, 동해와 남해를 두 번씩이나 오간 안용복의 역정도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그런 희생과 헌신을 보상받기는커녕 간신히 사형을 모면할 정도로 박대 받았다. 유배지에서 가졌을 그의 마음은 쉽게 짐작되지 않는다.

그때 안용복이 후대에 자신의 행동이 다시 평가되리라고 생각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역사는 현실의 시련과 시간의 풍화를 이겨내고 그와 그의 업적에 더 큰 보상을 했다. 현실에서 행복하고 싶은 것은 모두의 자연스러운 바람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의지일 것이다.

참고문헌: 송병기, [울릉도와 독도, 그 역사적 검증], 역사공간, 2010; 이훈, [조선후기 독도를 지킨 어부 안용복], [역사비평] 35, 1996; 독도연구소(www.dokdohistory.com) 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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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중인 들중 누구누구 있나요?? 최대한 빨리 부탁 드립니다~!!>< 엄청나게... 미친거죠/ 내공없어서 안해줄려그랬는데 친절하게 해준겁니다. 다른사람은 해주지도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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