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에 대해서

선덕여왕에 대해서

작성일 2012.10.24댓글 4건
    게시물 수정 , 삭제는 로그인 필요

   안녕하세요...저는6학년인데여

책만들기를 해야하는데 제 주제가 우리나라 위인들7인이에요... 그래서 이순신,세종대왕,선덕여왕,김춘추,대조영,광개토 대왕,이성계이렇게 하는데...

선덕여왕이 태어나셨을때와 돌아가셨을때 업적 등을 알려주세요.

그리고 김춘추와 대조영,광개토 대왕,이성계에 대해서도 아신다면 부탁드려요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선덕여왕이 태어나셨을때와 돌아가셨을때 업적 등을 알려주세요.

 

1.첨성대를 지었다.

2.황룡사완공시켰다.

3.삼국통일기반을 닦아 놓았다.

4.민생안정(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킴)

5.불교문화를 융성시켰다.

 

그리고 김춘추와 대조영,광개토 대왕,이성계에 대해서도 아신다면 부탁드려요

 

김춘추 : 당나라와의 동맹을 성공시켜 삼국통일을 하는 계기를 마련함

 

대조영 : 고구려 유민들을 통합하여 발해를 세워 고구려를 계승함

 

광개토 대왕 : 고구려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지배함

 

이성계 : 위화도 회군을 통해 조선을 건국함.

 

도움되셨길...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

글자크기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currentPlayer; var wT = document.title; function setCurrentPlayer(_id) { if (currentPlayer != undefined && currentPlayer != _id) { var player = nhn.FlashObject.find(currentPlayer); player.stopSound(); } currentPlayer = _id; document.title = wT; } function flashClick() { document.title = wT; } window.onload = function() { document.title = wT; } </script>

나는 신라 최고의 여왕 선덕이에요. 여자의 몸으로 귀족들의 신뢰를 얻기 힘들었지만, 나는 내 자신이 자랑스러워요.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들 중 여자가 임금을 했던 나라는 내 나라 신라밖에 없으며, 나는 그 중에서도 첫 테이프를 끊은 왕이에요. 또한 나는 높이가 아파트 27층 정도에 이르는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했던 통이 큰 여장부이기도 해요. 자! 그럼 지금부터 내가 어떤 마음으로 황룡사 9층 목탑을 만들었는지 장콩샘과 함께 탐구해볼까요?

선덕여왕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진평왕 신라의 26대 임금. 아들이 없어서 왕위를 딸인 덕만에게 물려주었다.
미실 선덕여왕과 왕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인물. 하지만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여자가 왕이 된 까닭은?

신라 24대 임금인 진흥왕(540~576)이 죽고 진지왕(576~579)이 뒤를 이었어요. 진지는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었지만, 태자인 동륜이 일찍 죽고 조카들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진지왕은 즉위한 지 3년 만에 신하들에 의해 퇴출당하고, 뒤를 이어 동륜태자의 아들인 조카가 임금이 되었어요. 진평왕(579~632)이지요.

진평왕은 한강 하류에 있는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역을 하면서 신라의 문물을 발전시켰고, 할아버지인 진흥왕의 뒤를 이어서 불교를 융성하게 하는 등 나라 발전에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나 진평왕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어요. 그에게는 딸만 있었을 뿐, 자신의 뒤를 이어받을 아들이 없었어요.

진평왕이 죽자, 귀족들은 후대 임금 선발 문제로 회의를 열었어요. 당시 신라의 왕은 부모 둘 다 왕족인 성골만이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인물은 진평왕의 딸인 덕만 공주와 사촌 동생인 승만 공주뿐이었어요. 귀족들이 생각하기에 여자를 임금으로 내세우는 것은 신라의 위상에 걸맞지 않은 남부끄러운 일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은 ‘누구를 임금으로 추대할 것인가.’를 놓고 장시간 토론을 벌였어요. 그 결과, 성골 출신이 임금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무너뜨려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덕만 공주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라의 27대 임금으로 즉위했어요. 이 이가 곧 선덕여왕(632~647)이지요.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우는 선덕여왕

여자가 왕이 되자, 불만을 가진 귀족들이 즉위 첫 해부터 반발했어요. 선덕여왕은 이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귀족 세력의 우두머리 격인 진골 귀족 을제에게 나랏일을 모두 맡겼어요. 하지만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불거진 불만은 쉽게 잠들지 않았어요. 게다가 주변 국가들의 시선 또한 곱지 못했어요. 당나라 임금이 신라 사신에게 “고구려, 백제가 그대 나라를 깔보는 것은 여자가 왕이기 때문이다. 내가 친족 하나를 너희 나라의 임시 왕으로 보낼테니, 너희는 그를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안정시켜라.” 하고 말할 정도였어요.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하여 선덕여왕이 고심하고 있을 때, 마침 당나라에 불교 유학을 다녀온 승려 자장이 제안을 하나 해 왔어요. 왕의 권위를 세우고 불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하여 황룡사에 거대한 탑을 세우자는 건의였어요.


황룡사는 진흥왕 시절에 세워진 절로, 원래 진흥왕은 궁궐인 월성의 위쪽에 새 궁궐을 짓고자 했어요.그러나 땅을 파는 과정에서 황룡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자 계획을 변경하여 절을 짓고 이름을 황룡사라 했어요. 자장은 이 사찰에 9층 탑을 세우자고 했어요.

“왕이시여! 황룡사 마당에 9층짜리 탑을 세우면, 중국과 왜를 비롯한 신라 주변의 아홉 나라 모두가 감히 신라 왕이 여자라고 깔보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모두 항복해 올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선덕여왕은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을 책임자로 임명하여 거대한 탑을 세우게 했어요. 용춘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불러와 2년 만에 높이 80미터 정도 되는 목탑을 완성했어요. 고려 후기 몽골 침략기때 몽골군에 의해 불타 버렸기에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지만, 아파트 27층 정도 되는 거대한 탑이었어요. 하지만 선덕여왕이 죽던 해까지 진골 귀족들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으며, 이는 곧 여자가 왕이라는 한계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어요.

교과서 속의골품 제도

왕위는 처음에는 성골에서 차지하였으나 무열왕부터는 진골 출신이 왕이 되었고, 3두품 이하는 평민 신분이 되었다. 신라인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은 골품에 따라 결정되었다. 진골은 최고 귀족으로서 중요한 관직을 독점하였고, 6두품은 6등급 아찬까지의 벼슬만 할 수 있었으므로 정치보다는 주로 학문과 종교 쪽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5두품은 10관등인 대나마, 4두품은 12관등인 대사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 39쪽〉


알쏭이와 장콩샘의 미주알 고주알

선덕여왕은 매우 지혜로운 여왕이었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와요. 어느 날 선덕여왕에게 당나라 태종이 진홍색, 자색, 백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그 씨앗 석 되를 보내 왔어요. 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씨앗을 궁궐 뜰에 심게 했어요. 꽃이 피어 꽃 냄새를 맡아 보니 정말 향기가 나지 않았어요. 신하들이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선덕여왕은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예측했다면서 “이는 당 태종이 내가 배우자 없이 홀로 사는 것을 업신여기고 조롱 삼아 보낸 것이다.” 했어요.

이런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어요. 선덕여왕 5년인 636년 겨울에 궁성 서쪽에 있는 영묘사 앞의 옥문지(玉門池)라는 연못에 개구리들이 모여들어 3, 4일 동안 계속 울어댔어요. 신하들이 여왕에게 보고를 하니, 여왕은 알천과 필탄에게 “서쪽 교외에 있는 여근곡1)에 백제 병사 5천 명이 숨어 있다.” 하면서, 빨리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처치 하라고 했어요. 알천과 필탄이 날랜 군사들을 데리고 여근곡에 가 보니, 정말 백제 병사들이 신라를 치기 위해 숨어 있어서 이들을 모두 해치웠어요. 신하들이 여근곡에 백제 군사가 숨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선덕여왕이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개구리의 눈이 튀어 나온 형상은 성이 몹시 난 모양이니 이는 군사를 상징하는 것이고, 옥문이란 여자의 성기를 말하며, 여자는 음인데 그 색은 희고 흰색은 서쪽을 상징한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알았고, 남자의 성기는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승리할 것을 예측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어요. 어느 날 여왕이 신하들에게 “내가 모 년, 모 월, 모 일에 죽을 것이니 도리천에 묻어라.” 하고 부탁했어요.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 더 자세히 알려 달라고 하자, 여왕은 도리천은 낭산(狼山)의 남쪽이라고 했어요. 그 후 여왕은 자기가 예언한 날에 죽었고, 신하들은 낭산 남쪽 양지 바른 곳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어요. 그런데 30여 년이 흐른 뒤인 문무왕 시대에 선덕여왕의 무덤이 있는 산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졌어요.

불교 경전에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나와 있으니, 선덕여왕은 자신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가 들어설 것을 미리 알고 자신이 묻힐 장소를 도리천이라 했던 거예요. 어때요. 이 정도면, 선덕여왕이 무릎팍 도사 뺨치는 지혜로운 왕이었음이 분명하지요?

신라의 임금은 성골에서 배출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성골은 어떤 사람들이에요?
신라는 신분제 사회였어요. 왕족에는 성골과 진골 두 계층이 있었으며, 귀족들은 6두품, 5두품, 4두품으로 나뉘어 있었어요. 왕족인 성골과 진골의 구분은 일반적으로 부모가 모두 왕족이면 성골, 부모 중 한 쪽만 왕족이면 진골이라고 해요. 귀족은 지방 족장 세력을 중앙 귀족으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대족장 출신은 6두품, 중·소 족장들은 5두품이나 4두품을 주어 자손대대로 대물림하게 했어요.

임금은 성골에서 배출되는 것이 원칙이었어요. 그런데 진평왕을 마지막으로 남자 중에서는 성골이 없었기에 부득불 진평왕의 딸인 덕만 공주가 왕위를 이어 선덕여왕이 되었어요. 그리고 뒤를 이어 선덕여왕의 사촌 동생인 승만이 진덕여왕으로 즉위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진덕여왕 다음이었어요.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신라 땅에서 성골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어요. 결국 진골 귀족들은 화백회의를 열어 진골 중에서 왕을 선발해야 했고, 이때 왕이 된 사람이 김춘추였어요. 이 이가 곧 신라 삼국 통일의 문을 연 태종 무열왕이지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면 선덕여왕의 라이벌로 미실이 나오던데, 미실은 실존 인물인가요?
미실이 실존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샘도 확신할 수 없어요. 삼국시대 역사의 기본 사료가 되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미실에 대한 어떤 행적도 나와 있지 않아요. 다만, 지은이를 알 수 없는 『화랑세기』에 진흥왕 시대부터 진평왕 시대에 활약한 미실의 행적이 자세히 나와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화랑세기』 자체가 역사 기록물이 아닌 창작물일 가능성이 커서 미실이 실존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어요.

『삼국유사』에 나와 있는 선덕여왕의 세 가지 예언은 아마 여자가 왕이 되어 불안정했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신라 왕실의 홍보팀이 만들어 낸 조작극일거야. 여자라도 덕만이는 너무나 지혜로워서 능히 한 나라를 통솔할 수 있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서 말이야. 어때요, 여러분! 삐따기 생각이 맞지 않을까요?

 

이순신[ 李舜臣 ]

글자크기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 옥포대첩,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했다.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currentPlayer; var wT = document.title; function setCurrentPlayer(_id) { if (currentPlayer != undefined && currentPlayer != _id) { var player = nhn.FlashObject.find(currentPlayer); player.stopSound(); } currentPlayer = _id; document.title = wT; } function flashClick() { document.title = wT; } window.onload = function() { document.title = wT; } </script>

이순신

조선 중기의 무신.

  • 출생-사망

    1545 ~ 1598

  • 본관

    덕수(德水)

  • 여해(汝諧)

  • 시호

    충무(忠武)

  • 국적

    조선

  • 활동분야

    군사

  • 출생지

    서울 건천동(現 인현동)

  • 주요저서

    《난중일기》

  • 주요업적

    임진왜란에서 왜적을 물리침

  • 시대

    조선시대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밑에서 두 번째로 백의종군하였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亂中日記)》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 충렬사 팔사품(통영 충렬사 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rmcPlayer = new VideoInfraRMCPlayer('rmcPlayer', '7753FA6CD54A496A5751DE2E67C98343DFA6', 'V124321226ad2caf7095b8ea929cf2153a4cbc82d60333421ddc97ee894272252959e8ea929cf2153a4cb', 'flash', '448', '285'); rmcPlayer.properties.coverImageURL = ''; rmcPlayer.properties.autoPlay="false"; rmcPlayer.properties.isResizableCoverImage = 'true'; rmcPlayer.properties.wmode = 'transparent'; rmcPlayer.displayRMCPlayer(); </script> <object id="rmcPlayer_1351126394920227" codeBase="http://fpdownload.macromedia.com/pub/shockwave/cabs/flash/swflash.cab#version=7,0,0,0" classid="clsid:d27cdb6e-ae6d-11cf-96b8-444553540000" width="448" align="middle" height="285"><embed id="rmcPlayer_1351126394920227" height="285" name="rmcPlayer_1351126394920227"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ign="middle" pluginspage="http://www.macromedia.com/go/getflashplayer" width="448" src="http://serviceapi.rmcnmv.naver.com/flash/getCommonPlayer.nhn" quality="high" wmode="transparent" FlashVars="vid=7753FA6CD54A496A5751DE2E67C98343DFA6&inKey=V124321226ad2caf7095b8ea929cf2153a4cbc82d60333421ddc97ee894272252959e8ea929cf2153a4cb&wmode=transparent&wmode_outkey=transparent&isAutoPlay=false&api=http%3A//serviceapi.rmcnmv.naver.com/flash&skinURL=http%3A//serviceapi.rmcnmv.naver.com/flash/getCommonPlayerSkin.nhn%3Fname%3Ddefault&skinName=default&isResizableCoverImage=true&__flashID=rmcPlayer_1351126394920227&controlBarMovable=false&" bgcolor="#000000" allowScriptAccess="always" allowFullScreen="true"></object>

임진왜란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침략에 야망을 품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왜군은 4월 부산성의 함락을 시작으로 하여 제1군, 제2군, 제3군을 편성,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함경도까지 침공하였으나 명나라의 지원과 조선 각 지방의 활발한 의병활동으로 퇴각을 시작하였다. 한편 바다에서는 이순신장군이 한산도대첩, 노량대첩, 명량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각 지방에서 활발하게 의병활동을 한 사람은 곽재우, 조헌

 

세종대왕[ 世宗大王 ]

글자크기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currentPlayer; var wT = document.title; function setCurrentPlayer(_id) { if (currentPlayer != undefined && currentPlayer != _id) { var player = nhn.FlashObject.find(currentPlayer); player.stopSound(); } currentPlayer = _id; document.title = wT; } function flashClick() { document.title = wT; } window.onload = function() { document.title = wT; } </script>

세종대왕

  • 본명

    이도(李祹)

  • 이명

    자 : 원정(元正)

  • 시호

    장헌(莊憲)

  • 본관

    전주(全州)

  • 시대

    조선

  • 직업

    조선조 제4대 임금

  • 가족관계

    아버지 : 태종(太宗)
    어머니 :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 저서

    훈민정음,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조선조 제4대 임금. 성은 전주 이씨(全州李氏), 이름은 도(裪), 자는 원정(元正), 존시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시호는 장헌(莊憲), 묘호는 세종(世宗), 능호는 영릉(英陵). 태종(太宗)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비(妃)는 심온(沈溫)의 따님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태종 8년(140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태종 12년(1412) 충녕대군(忠寧大君)에 진봉, 태종 18년(1418) 음력 6월 맏형 양녕대군(讓寧大君) 제(褆)가 폐세자(廢世子) 됨에 따라 왕세자(王世子)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음력 8월 22세의 나이로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세종 2년(1420) 집현전(集賢殿)을 확충, 궁중에 설치하여 학자를 키우고, 학문을 숭상하며, 옛 제도를 연구 검토하게 함으로써 정치와 문물제도를 정리하여 행정체제를 확립하였다. 역사, 지리, 정치, 경제, 천문, 도덕, 예의, 문자, 운학, 문학, 종교, 군사, 농사, 의약, 음악 등에 관한 각종 저서를 하게 함으로써 문화 생활에 막중한 지침서가 되게 하였다.

한편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새 활자를 만들고 판짜기를 개량하여 인쇄 능률을 올렸는 바, 새로 주조한 활자는 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 갑인자(甲寅字)와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와 효시의 한글 활자가 그것이며, 이 중 갑인자와 한글 활자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활자들이다.

세종 15년(1433) 천체측각기인 혼천의(渾天儀)와 간의(簡儀),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를 만들고, 세종 16년(1434)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발명하고, 세종 23년(1441)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測雨器)와 하천수(河川水)를 재는 수표(水標)를 발명하였으며, 천문, 역서(曆書)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과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펴냈다. 그 중 측우기의 발명은 이탈리아 사람 베네데토 카스텔리(Benedeto Gastelli)의 측우기(1639)보다 거의 200년 앞선 세계 최초의 것이다.

화전(火箭), 화포(火砲)를 개량하여 우리 나라 무기사상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도량형(度量衡)의 고정(考正) 실시로 물량거래(物量去來)의 공정을 기하고, 경제적인 정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정책상의 제도 마련 기준에 공헌하였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 반포케 하여 농업 발전에 기여하고, 조세제도(租稅制度)를 정할 때 온 백성의 민의를 파악하기 위하여 먼저 전국 8도의 관민(官民)에게 공법(貢法)에 대한 가부를 조사(민주적 여론조사)하는 한편,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종래에 모순이 많았던 조세제도를 연분구등(年分九等), 전분육등(田分六等)의 54등급으로 확립 실시하여 조선조 5백년 간의 조세제도를 확립하였다.

의료기관을 정비하고,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의방류취(醫方類聚)》 등의 의서를 편찬하여 향약(鄕藥)을 개발함으로써 의료 활동의 합리화를 기하였다. 죄수(罪囚)들의 건강을 염려하여 감옥 시설을 개선해 주는 한편, 남형(濫刑)을 금하고 억울하게 죽는 이가 없게 하기 위하여 삼심제도(三審制度)인 삼복법(三覆法)을 실시하였고, 배태법(背胎法)을 둔태법(臀笞法)으로 바꾸어 등과 같은 인체의 중요 기관을 치는 고문을 엄금시키었으며, 법의학서(法醫學書)인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 발간함으로써 인명치사(人命致死)의 사건이 생겼을 때에는 살상 검증(殺傷檢證)에 관한 검시(檢屍)의 제도를 실시하게 되니, 형정(刑政)에 획기적 발전을 보게 되었다.

15세 미만인 어린이와 70세가 넘는 늙은이는 살인죄나 강도죄가 아니면 가두지 못하게 하고, 10세 이하와 80세 이상인 이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범했더라도 가두지 못하게 하였으며, 천민인 노비(奴婢)를 하늘이 낸 백성으로 인정해 주었다. 관비(官婢)의 출산 휴가를 대폭 늘려 주었다.

세종 25년(1443) 친히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 이에 대한 자세한 풀이를 집현전 학사 등에게 하게 하여 만든 해설서인 《훈민정음》이란 책을 만들어 이와 함께 세종 28년(1446)에 반포하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하고, 운서인《동국정운(東國正韻)》,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 등을 편찬 발간하게 하는 한편 스스로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어 내기도 하였고, 한문으로 된 경서(經書)와 문학서 및 불경(佛經)을 번역하게 하였으며, 또 이과(吏科)와 이전(吏典) 시험에 [훈민정음]을 시험 과목으로 정하는 등 훈민정음 보급에 크게 힘썼으니, 우리 문자 생활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다.

박연(朴堧)을 시켜 향악(鄕樂)과 아악(雅樂)을 짓거나 정리하고, 편경(編磬)과 편종(編鐘) 등의 악기(樂器)를 제작하게 하였으니, 정간보(井間譜)의 창안은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이고, 《세종악보(世宗樂譜)》는 우리 아악의 연총(淵叢)일 뿐 아니라 동양의 고전 음악 연구에 절대적인 자료이다.

역사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고, 《효행록(孝行錄)》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지어 풍속을 권려하였고, 《명황계감(明皇誡鑑)》을 지어 후세에 제왕의 일락(逸樂)을 방지하고자 하였고,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와 《치평요람(治平要覽)》을 엮어 흥망 성쇠를 본받도록 하였고,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엮어 전쟁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전주 출척(銓注黜陟)의 법이 지극히 정밀하고 잘 갖추어져 현량(賢良)이 등용되었다.

종교에 있어서도 유교를 장려하여 도의 정치를 구현하는 한편 세종 6년(1424)에는 불사(佛寺)를 정리하여 선종(禪宗), 교종(敎宗) 36사(寺)만을 남겨 불도(佛道)를 정하게 닦도록 하였으며, 세종 30년(1448)에는 경복궁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짓고, 불교 서적의 국역 간행 배포와 과거 승과(僧科)를 설치하는 등 불교 발달에 노력하여 유교와 불교 내지 도교(道敎)가 조화된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게 되었다.

세종 원년(1419)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하게 하여 항복을 받음은 물론 경상도에 예속시켰고, 세종 15년(1433)에 최윤덕(崔閏德)에게 명하여 파저강(婆猪江) 일대의 야인들을 토벌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고, 세종 16년(1434)에는 김종서(金宗瑞)로 하여금 동북 변경 지방의 여진(女眞)을 토벌하여 육진(六鎭)을 설치함으로써 동북과 서북쪽의 땅을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확장, 우리 강토의 방비를 튼튼히 하는 한편, 나라안의 지리(地理)를 조사하게 하여 지리지(地理志)를 편찬하게 하고, 실측지도를 제작하게 하였으니, 그것이 정척(鄭陟)과 양성지(梁誠之) 등에 의해서 세조 9년(1463)에 편찬된 [동국지도(東國地圖)]이다. 이렇듯 세종은 겨레 생활을 존중하는 모든 제도의 완성을 이루어 국택 민안 문화 찬란의 황금 시대를 이룩하였다.

 

진골 출신 최초의 왕 태종 무열왕

글자크기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currentPlayer; var wT = document.title; function setCurrentPlayer(_id) { if (currentPlayer != undefined && currentPlayer != _id) { var player = nhn.FlashObject.find(currentPlayer); player.stopSound(); } currentPlayer = _id; document.title = wT; } function flashClick() { document.title = wT; } window.onload = function() { document.title = wT; } </script>

나는 신라 29대 임금 무열왕으로, 내 본명은 김춘추에요. 나는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임금이자,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진 왕이에요. 나·당 동맹이 나의 노력으로 체결되었기에 사람들은 나를 명 외교관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하지만 한편에서는 나를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해요. 왜냐고요? 내가 민족 내부의 투쟁에 외세를 끌어들렸기 때문이죠. 자! 그럼 지금부터 내가 왜, 어떤 마음으로 당나라와 연합을 했는지 장콩샘과 함께 탐구해 볼까요?

태종 무열왕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김유신 무열왕의 동서로 무열왕이 진골 최초의 왕으로 등극하는데 앞장섰으며, 백제를 멸망시킨 주역이다.
김문희 김유신의 동생으로 무열왕의 부인이다.
의자왕 무열왕의 라이벌로 백제 마지막 임금이다.
당 고종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을 도왔다.

태종 무열왕의 집안

태종 무열왕(654~661)의 이름은 김춘추예요. 그는 신라의 29대 임금으로 진골 출신으로는 최초로 왕이 된 사람이에요.
춘추는 본인의 능력이 탁월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임금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의 할아버지는 25대 진지왕(576~579)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즉위 3년 만에 귀족들에 의하여 왕위에서 물러났어요.

물론 아버지 용춘이 고위 관직인 이찬 직에 있었고, 어머니가 선덕여왕의 동생인 천명 공주였기에 왕족으로서 떵떵거리고 살 수는 있었어요. 하지만 폐위된 진지왕의 혈통인 데다, 성골이 아닌 진골이었기 때문에 그가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어요.

여왕이 나라를 다스렸던 시기의 신라 정세는?

선덕여왕을 이어 왕이 된 사람은 신라의 마지막 성골 승만으로, 진덕여왕이었어요. 그녀는 진평왕의 동생 국반의 딸로 비록 여자의 몸이었지만, 성골 출신만이 임금을 할 수 있다는 원칙 때문에 사촌 언니인 선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어요. 그러나 선덕, 진덕 두 여왕이 나라를 다스렸던 시절에 왕의 권위는 상당히 약화되었어요. 신라 사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진골들이 여자 임금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거든요.

여기에 당나라 임금인 태종 또한 신라를 깔보았어요. 신라에서 온 사신에게 신라는 여자가 임금으로 있어서 주변국들이 얕잡아 본다며, 자신의 친척을 왕으로 보내 주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했을 정도로 여자 임금을 깔보는 눈이 대외적으로도 존재했어요. 선덕여왕 말년인 647년에 상대등으로 있던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어요. 상대등은 신라 최고 관직으로, 지금으로 치면 국무총리예요.

이처럼 높은 직책에 있던 관리가 왕을 쫓아내려 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왕이 여자였기 때문이에요. 물론 비담의 난은 진압되었어요. 그러나 이 난만 보더라도 진골 세력들이 얼마나 여자 임금들을 만만하게 봤는지 잘알 수 있어요. 그런데 비담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크게 세력을 넓힌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신라 삼국 통일의 핵심 멤버이자 김춘추와는 동서지간이었던 김유신이었어요.

유신은 진골 귀족이었지만, 정통 진골이 아니었기에 신라 정계에서 왕따를 당하는 입장이었어요. 그는 금관가야의 후손으로,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인 구해왕이 법흥왕에게 나라를 바치고 항복할 때에 신라의 진골 세력으로 편입된 신흥 귀족 집안이었어요. 따라서 신라의 정통 진골들은 김유신 집안을 별로 높게 쳐주지 않았어요. 이처럼 하찮은 가문의 김유신이었지만, 춘추와 함께 선덕여왕의 편에서 비담의 난을 진압하면서 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하여 신라의 군사권을 장악할 수 있었어요.

춘추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선덕여왕을 이어 즉위한 진덕여왕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654년에 죽었어요. 진골 귀족들은 화백회의를 열어 누구를 왕으로 추대할 것인가를 논의했어요. 이때 여러 귀족들은 이찬 직에 있던 알천에게 왕위를 이을 것을 제안했어요. 하지만 알천은 사양했어요.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으니, 춘추공이 왕이 되어야 합니다.”

알천의 추대로 왕위는 김춘추 차지가 되었어요. 그런데 알천은 정말 김춘추의 덕망이 자신보다 높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랬을 것 같다고요? 천만에요. 『삼국유사』에 의하면, 알천은 마지못해 임금 자리를 춘추에게 양보했어요. 진덕여왕의 후계자를 선발하는 화백회의가 열렸을 때,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유신이 눈을 부라리며 김춘추를 적극 밀어서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대요. 즉, 군사권을 쥐고 있던 유신의 서슬 퍼런 권위에 눌려 정통 진골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알천은 눈물을 머금고 김춘추에게 임금 자리를 양보해야 했지요.

명 외교관으로 명성을 날리며 정치가로 기반을 다진 김춘추

어찌 보면, 김춘추는 외교를 잘해서 임금 자리에 오른 사람이에요. 그가 외교에 적극 나선 이유는 딸과 사위의 죽음 때문이었어요. 백제 의자왕이 임금이 된 지 2년째 되던 해인 642년이었어요. 백제는신라의 국경 지방에 있던 대야성(경남 합천 소재)을 공격했어요. 이 성은 신라 서쪽 국경의 최고 요새지로 성주가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이었어요.

성을 지키고 있던 품석은 백제가 쳐들어왔을 때 내부에서 발생한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여 스스로 백제군에게 항복하고 말았어요. 이때 백제 장수 윤충은 포로가 된 품석과 그의 부인을 살해하여, 그들의 머리를 수도인 사비(현재 충남 부여군)로 보내 백제군의 승리를 자축 했어요. 경주에 있던 김춘추는 딸과 사위의 죽음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어요.

두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바로 앞에 사람이 지나가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망연자실했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어요. 그 후 춘추는 자신의 힘으로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다짐 속에 백제를 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어요. 우선 그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백제를 칠 생각으로 선덕여왕을 찾아가 건의를 드렸어요.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고구려와 함께 백제를 칠 대책을 마련하겠나이다.”
선덕여왕의 응낙을 받아 고구려로 떠나며 춘추는 유신에게 물었어요.
“나는 공과 한마음 한뜻이오. 지금 내가 고구려에 들어가 해를 당한다면 공은 어떻게 하겠소?”
“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겠소.”

“내 생각에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일 그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이오.”
이러한 대화를 나누고 신라 땅을 떠나 고구려로 갔던 김춘추에게 고구려 행은 굶주린 사자 입속으로 자진하여 들어가는 심정이었을 거예요.

당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김춘추가 생각하기에 당과 고구려는 계속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만 하면 고구려와 연합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춘추의 생각과는 달리 고구려는 강경하기만 했어요. 춘추를 만난 고구려 보장왕은 진흥왕 때 신라가 점령한 한강 상류 지역을 반환하면 신라를 도와주겠다고 답했어요. 김춘추는 거절했고,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어요.

고구려의 실력자 연개소문은 신라 부흥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김춘추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어요. 하지만 춘추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사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해 놓았기에 무사히 고구려를 탈출할 수 있었어요. 고구려 관리 선도해를 이미 구워삶아 놓았거든요. 춘추가 옥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선도해가 감옥으로 찾아오자, 춘추는 그에게 탈출 방도를 물었어요. 선도해는 짐짓 여유를 부리며, 토끼와 거북이 우화 중 거북이의 거짓말에 속아 용궁에 간 토끼가 간을 육지에 놔두고 왔다고 둘러대어 간신히 살아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김춘추의 머릿 속에는 짜릿한 전류가 흐르며 탈출 방법이 번개처럼 떠올랐어요. 한강 상류 지역을 고구려에 돌려주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고 풀려나는 것이었지요.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 신라 땅으로 되돌아온 춘추는 다시 짐을 꾸려 일본으로 떠났어요. 일본은 당시 백제와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춘추의 머릿속에는 오직 백제 멸망만이 들어있었기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에 연합 제안을 하러 떠났어요.

그러나 이 또한 실패로 끝났어요. 여기서 멈췄다면, 김춘추는 명 외교관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고래의 힘줄처럼 끈질긴 춘추는 포기를 몰랐어요. 일본에서 돌아온 후에 춘추는 다시 당나라로 들어갔어요.

당 태종을 만난 춘추는 나·당 연합의 필요성을 침을 튀겨 가며 열심히 설명했어요. 춘추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당 태종은 신라와 연합하면 자신의 소원인 고구려 정복이 가능할 것 같아서 춘추의 연합 제안에 응했어요.

하지만 그는 본심은 밝히지 않고 ‘약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때문에 괴롭다고 하니 자신이 도와주겠다.’며 신라와 군사 동맹을 체결했어요. 딸과 사위를 죽인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구걸하듯이 동맹 맺기를 간청했던 춘추의 작전이 드디어 성공을 거두는 순간이었어요. 이후 그는 신라 땅에 돌아와 김유신과 굳게 뭉쳐서 차근차근 백제를 칠 준비를 해 나갔어요.

백제를 멸망시키는 태종 무열왕

654년, 화백회의를 통해 왕이 된 춘추는 당과 연합하여 빠른 시일 안에 백제를 치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은 딴전만 피웠어요. 오히려 백제와 고구려가 말갈까지 동원하여 신라 땅에 쳐들어와 신라를 곤혹스럽게 만들었어요. 무열왕은 계속해서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당은 선뜻 응하지 않았고 신라는 당군이 움직이기만 간절히 기다리며 백제와 고구려 군을 막기에 급급했어요.

그런데 드디어 당나라 군대가 움직였어요. 당의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산동 반도를 출발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어요. 무열왕은 일생 일대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고, 김유신으로 하여금 5만의 신라군을 데리고 백제로 쳐들어갈 것을 명령했어요. 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들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까지 거칠 것 없이 진격했어요.

그러나 신라군은 가족까지 죽이고 전투에 나선 계백의 5천 결사대 때문에 황산벌에서 발이 꽁꽁 묶여 버렸어요. 당나라군은 이미 금강 하구인 기벌포에 도착하여 거칠 것 없이 사비성으로 올라오고 있는데, 정작 선두에 서야 할 신라군은 계백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때 신라 진영에 힘을 불어넣어 준 용사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화랑 관창과 반굴이에요.

이들의 용기 있는 죽음으로 태산같은 용기를 얻은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치른 마지막 전투에서 백제군을 물리치고 사비성으로 가서 당군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어요. 이때가 660년 7월 18일이었어요. 무열왕은 백제가 항복한 날로부터 보름 뒤에 사비성에 들어가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함께 높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에게서 술잔을 받으며 승리의 기쁨을 누렸어요. 딸과 사위가 백제 군사들에게 죽은 지 18년 만의 일이었지요.

교과서 속의태종 무열왕 시대

위기에 처한 신라는 앞서 고구려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당에 구원을 청하였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나·당 간의 동맹을 맺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대동강 이북의 땅을 당에 넘겨주겠다는 비밀 약속을 하였다.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과 소정방이 이끈 당군은 먼저 백제를 공격하였다.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적인 저항을 물리치고 당군과 함께 사비성을 함락하였다(660). 〈중학교 국사 교과서 61쪽〉

알쏭이와 장콩샘의 미주알 고주알

김춘추를 명 외교관이라고 하는데, 저는 그가 큰 나라에 아부만 하는 사대주의자로 보여요. 샘은 김춘추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춘추가 명 외교관이냐, 아니면 우리 민족 내부의 다툼에 외세를 끌어들인 사대주의자냐 하는 논쟁은 역사가들 사이에도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논쟁거리예요. 그런데 샘 생각으로는 현재적 관점에서 본다면 김춘추는 분명 사대주의자예요. 어찌 되었건 간에 한반도 내부의 다툼에 당나라를 끌어들였고, 당 태종과 군사 동맹을 맺는 과정에서 왜소한 신라를 도와달라는 식의 아부성 발언을 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달라요.

만약 당과 연합하지 않았으면 신라의 삼국 통일은 불가능했을지 몰라요.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동맹을 맺어 끊임없이 신라를 넘보고 있었으니, 다른 나라와 동맹하지 않고 이들을 상대해서 이긴다는 것은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 보았을 때, 불가능에 가까워요. 이러한 측면에서 살핀다면, 김춘추는 신라가 처한 현실과 동아시아 정세 변화를 매우 냉철하게 꿰뚫고 있었던 냉엄한 현실주의자이자 탁월한 외교관이 분명해요.

당 태종이 신라와 동맹 관계를 승인하며 "삼국 통일을 이루면 대동강 이남 지역을 신라 땅으로 인정하겠다."고 했다는데, 이건 또 무슨 얘기예요?
맞아요, 분명히 그랬어요. 『삼국사기』 문무왕 편에 당 태종이 신라와 군사 동맹을 맺으며 춘추에게 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는 다 그대 나라에게 주겠다.”

이 이야기는 결국 고구려 영토는 당나라가 갖겠다는 이야기지요. 또 문무왕이 고구려까지 멸망시키며 삼국 통일을 달성했을 때에 신라는 대동강 이남까지만 자신의 땅으로 삼고, 대동강 이북 지역부터 만주, 즉 기존의 고구려 영역은 당나라 땅으로 순순히 인정했어요. 이런 이유 때문에 신라의 삼국 통일을 불완전한 삼국통일이라고 비판하지요.

김춘추는 사대주의자가 분명해. 그가 당 태종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라고. "백제가 굳세고 교활하여 침략을 마음대로 하고, 더구나 얼마 전에는 대대적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깊이 쳐들어와 수십 성을 함락하고 저희들이 당나라에 들어오는 길을 막았으니, 만약 흉악한 백제를 당나라가 없애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다 사로잡혀 다시는 당나라에 사절단을 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굴한 말이냐고.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찐빵 깨져서 코가 납작해져 있었는데, 이런 나라에 비굴한 아부나 하며 서로 붙어서 백제를 칠 생각을 했는데, 그가 사대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김춘추가 분명한 사대주의자라고 생각해!!! 어때요, 여러분! 삐따기 생각이 맞지 않나요?

 

발해를 세운 대조영

글자크기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currentPlayer; var wT = document.title; function setCurrentPlayer(_id) { if (currentPlayer != undefined && currentPlayer != _id) { var player = nhn.FlashObject.find(currentPlayer); player.stopSound(); } currentPlayer = _id; document.title = wT; } function flashClick() { document.title = wT; } window.onload = function() { document.title = wT; } </script>

나는 발해를 세운 고왕으로, 본래 이름은 대조영이에요. 나와 내 아버지 걸걸중상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당나라 군사들에 의해 요서 지방에 있는 영주로 강제 이주되었어요. 하지만, 이곳에서 군사를 일으켜 갖은 고초 끝에 발해를 세우게 되었어요. 자! 그럼 지금부터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발해를 세웠는지 장콩샘과 함께 탐구해 볼까요?

대조영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걸걸중상 대조영의 아버지. 발해 건국의 터전을 닦아 주었다.
걸사비우 걸걸중상과 함께 당나라에 반발하여 군사를 일으킨 여진 족장. 전투 도중 죽어서 그의 군사들이 고스란히 대조영 부대에 편입되었다.
이해조 당나라 편에서 대조영과 싸운 거란족 장수. 천문령 전투에서 대조영에게 패했다.

고구려 멸망 이후의 고구려 영토는?

668년 10월, 한때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흔들며 자기 나라 땅을 천하의 중심이라고까지 자부했던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어요.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은 당나라로 끌려갔으며, 수도인 평양성에는 당나라 관청인 안동 도호부가 들어섰어요.

당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고구려 사람들은 당나라의 식민 정책에 크게 반발했어요. 670년에 고구려 장군이었던 고연무가 중심이 되어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며, 고구려 왕족인 안승과 귀족인 검모잠도 안시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와 싸움을 시작했어요. 여기에 고구려 부흥군은 당나라가 영토 분할 문제로 신라와 나·당 전쟁을 벌이자, 신라 편이 되어 당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어요.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당나라는 평양에 설치한 안동 도호부를 만주에 있는 신성으로 옮겨야 했으며, 보장왕을 다시 데려와 ‘요동주도독 조선왕’으로 삼아 고구려 사람의 환심을 사려했어요. 하지만 당이 믿고 파견했던 보장왕은 그 지역의 말갈족을 끌어들여 독자적으로 고구려 부흥 운동을 모색하는 등 고구려 사람들의 당나라에 대한 저항 운동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해만 갔어요.

나라를 세우는 대조영

그러나 보장왕의 부흥 운동은 실행에 옮겨지기 전에 당나라에 들통이 나서, 왕은 당나라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어 가서 681년에 그곳에서 죽었어요. 이제 고구려 부흥의 꿈은 영영 사라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요서 지방의 영주(현재 요녕성) 땅으로 끌려갔던 고구려 유민들이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을 중심으로 뭉쳐서 재차 부흥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걸걸중상은 고구려의 장수였는데, 나라가 망하면서 당나라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영주 땅에 끌려와 정착하게 되었어요.


발해

그런데 영주 땅에서 696년에 거란족이 폭동을 일으켜 영주성을 함락하고 주변 고을을 점령한 뒤에 당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어요. 이 기회를 틈타 걸걸중상도 말갈족을 이끄는 걸사비우와 연합하여 영주 동쪽의 여러 성을 점령하며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했어요. 당나라는 거란 출신 이해고에게 대군을 주어 걸걸중상의 부흥운동을 진압하려 했어요.

이해조의 군대와 먼저 결전을 벌인 것은 말갈족 장수 걸사비우였는데, 걸사비우는 전투 도중에 죽었고, 걸걸중상도 이 무렵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이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의 운명은 대조영 손에 달려 있었어요. 대조영은 지도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당나라 군사들을 피해 천문령(현재 요녕성 창무 서쪽) 쪽으로 이동했어요.

전투를 치를 때마다 승리를 거둔 이해조는 오만해져서 아무 방비도 없이 천문령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왔어요. 대조영 부대는 천문령 골짜기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해조 부대가 주변을 살피지 않고 골짜기로 곧장 쳐들어오자, 기습 공격으로 박살을 내 버렸어요.

이 전투로 대조영은 새 나라를 건설할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으며, 송화강을 건너 동모산(현재 길림성 돈화현 소재) 자락에 정착하여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어요. 이때가 698년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 만의 일이었으며,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 했어요.


독자적 발전을 이루는 진나라

대조영은 임금이 된 첫 해에 멀리 돌궐에 사신을 보내 친선 관계를 맺는 등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중앙과 지방 행정 구역을 정비했어요. 그리고 독자 연호의 사용을 통해 진나라가 황제 국가임을 대내외에 당당하게 밝혔어요. 이처럼 진나라가 강하게 나오자, 당나라는 진나라를 인정해 줄 수밖에 없었어요.

당은 사신을 보내 새 나라 건설을 축하해 주었으며, 대조영 또한 둘째 아들인 대문예를 보내 답례를 하면서 당과 평화 관계를 유지하려 했어요. 한편 신라와 당나라는 진나라가 건설되자, 급속히 친밀해지면서 동맹 관계를 굳건하게 다져 나갔어요. 673년에 치른 나·당 전쟁 이후 양국은 서로 사이가 멀어졌는데, 고구려의 후예들이 고구려의 옛 땅에서 새 나라를 세우자 위기의식을 느껴 나·당 전쟁 이전의 끈끈한 관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교과서 속의대조영

고구려가 멸망한 후 고구려 유민들은 여러 갈래로 분산되었다. 일부 귀족들은 당으로 끌려가기도 하였으나, 많은 유민들이 당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당의 군대와 안동 도호부를 요동 지방으로 몰아냈다. 때마침 당의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던 거란의 추장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서 지방에 있던 대조영은 이를 틈타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랴오허 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이에 당은 말갈인 부대를 격파하고 고구려 유민들을 뒤쫓았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당군을 격파하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모아 길림성의 동모산 근처에 도읍을 정하고 발해를 세웠다(698). 〈중학교 국사 교과서 73쪽〉

알쏭이와 장콩샘의 미주알 고주알

현재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 정권”이라 하면서 발해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집어넣으려고 한다는데, 이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예, 그래요. 중국 정부는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 정권 정도로 격하시켜 발해사 전체를 한족(漢族)의 역사로 만드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어요. 하지만, 여러 증거로 보았을 때에 발해는 분명 우리 민족이 세운 한민족(韓民族)의 국가예요. 대체적으로 고대의 동아시아 사회에서 동아시아 각국은 왕의 재임 기간을 표시하는 호인 연호를 중국의 것을 빌려다 사용했어요.

하지만 발해는 줄곧 독자 연호를 사용했고, 스스로를 황제 국가로 표현했어요. 오죽하면, 당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신당서』에 “발해는 연호 사용을 자기 마음대로 하였다.”고 나와 있을까요. 또한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발해 왕을 ‘고려국왕’으로 표현하여 자신들이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확실하게 말하고 있어요. 이러한 사례만으로도 발해가 당의 지배를 받지 않은 자주적인 독립국가였음을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대조영이 고구려 사람이 아니라 말갈족이라는 소문도 있던데, 이것에 대해서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대조영 아버지인 걸걸중상만 보더라도 고구려 사람이기보다는 말갈족일 가능성이 큰데, 아무래도 장콩선생이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 삐따기의 예리한 시각으로 보면 말이야. 어때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물론 대조영이 말갈족의 후예일 가능성도 있어요. 실제로 중국 만주 지역의 북쪽 지대를 흐르는 흑룡강에 근접해 있는 소도시 동강에 살고 있는 말갈족 계통의 혁철족은 지금도 대조영을 자신들의 선조로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해요.

고구려나 발해는 다민족 국가였으며, 특히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다수의 말갈인들이 피지배층을 형성한 연합국가였어요. 따라서 우리 민족만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 우스운 일이에요. 하지만 발해 지배층 자체가 고구려 계승 의지를 지니고 있었고 당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은 독자성 또한 확고했어요. 따라서 발해사를 중국의 견해처럼 당의 지방 정권으로 보는 것은 억지 주장이며, 우리 민족사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거에요.

 

땅따먹기의 챔피언 광개토대왕

글자크기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currentPlayer; var wT = document.title; function setCurrentPlayer(_id) { if (currentPlayer != undefined && currentPlayer != _id) { var player = nhn.FlashObject.find(currentPlayer); player.stopSound(); } currentPlayer = _id; document.title = wT; } function flashClick() { document.title = wT; } window.onload = function() { document.title = wT; } </script>

우하하하!!! 나는 땅따먹기의 챔피언, 광개토대왕.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간첩 취급을 받아요. 자! 그럼 지금부터 나의 땅따먹기 역사를 장콩샘과 함께 탐구해 볼까요?

광개토대왕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고국양왕 광개토대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이 능력을 발휘할 수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었다.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아들. 아버지를 이어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최강국으로 발전시켰다.
내물마립간 신라의 왕.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아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 세력을 물리쳤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는 중국의 집안시에 가면, 하늘높이 우뚝 솟은 비석이 하나 있어요. 높이가 6.39미터, 무게가 37톤이니 엄청나게 큰 비석이지요. 이 비석의 주인공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에요. 무슨 이름이 이리도 기냐고요? 고구려 사람들이 이 분을 존경하여 붙여 준 이름이니, 길다고 너무 불평하지는 마세요. 좀 짧은 이름은 없냐고요? 물론 있지요. 광개토대왕이에요.

처음부터 광개토대왕이라고 하지, 왜 읽기도 힘든 긴 이름을 말해 줬냐고요? 광개토대왕이 죽은 이후에 고구려 사람들이 붙여 준 정식 이름이니, 알고는 있어야죠. 이 이름을 우리말로 풀이해 보면, ‘나라 언덕 위의 무덤 안에 계신 넓은 영토를 개척하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만드셨던 우리가 좋아했던 위대한 임금님’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고 보니, 이름 속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다 들어 있네요.

서로 북으로 영토를 넓히는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의 어릴 적 이름은 담덕이었어요. 그는 어릴 때부터 체격이 크고 위엄이 있었대요. 그래서 아버지인 고국양왕은 아들을 무척 총애하였으며, 담덕이 열세 살이 되었을 때 태자로 삼아 일찍부터 제왕의 길을 걷게 했어요.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8세 때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19대 임금으로 등극하였어요.

광개토대왕이 임금으로 재위할 때, 고구려는 요동 지역 전체를 장악하며 동아시아 최강국이 되었어요. 그는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392년에 4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쪽 지역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어요. 이때 백제의 왕은 진사왕이었는데, 그는 광개토대왕이 병법에 능하다는 소문을 듣고 오금이 저려 미처 싸울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10여개 성을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대요.


광개토대왕은 395년에는 북방에 있는 거란을, 398년에는 숙신을 복속시켰으며, 402년에는 후연을, 410년에는 동부여를 공격하여 요동 지역 전체를 고구려 땅으로 만들었어요.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남북 어디든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일생 동안 64개 성, 1,400여 마을을 차지하여 막강 고구려 제국을 건설했어요. 한편, 400년에는 신라의 도움 요청으로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물리쳐 줬어요.

신라 왕인 내물마립간은 가야와 왜의 연합군이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인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왜와 가야 군사들을 물리쳐 줬어요. 경주에 있는 신라의 왕릉급 무덤인 호우총에서 제사에 사용된 그릇이 하나 출토되었는데, 그릇 밑면에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가 광개토대왕 집권 시절에 친밀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어요.

백성들을 편히 살게 해 준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이 싸움만 잘한 임금은 아니에요. 광개토대왕릉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어요.

“대왕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까지 이르고, 위력은 바다에까지 미쳤다. 또한 적들을 쓸어 없애셨으니 백성들은 평안히 자기 직업에 종사했고, 나라가 부강하니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마저도 풍성하게 익었다.”

대왕을 흠모했던 고구려 사람들의 인물평이고, 본인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 글이니, 어느 정도 과장은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자신들의 삶이 아주 편했다고 쓸 정도로 광개토대왕은 나라 안 살림살이도 상당히 잘했어요. 한편, 광개토대왕 시절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자기 나라를 천하의 중심으로 여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어요. 광개토대왕의 강력한 리더십과 용병술 덕분에 고구려인 전체가 강한 주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광개토대왕은 412년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어요. 역사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는 없지만, 만약 그가 60세까지만 살았더라도, 당시 동아시아 전체는 고구려 땅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한번 상상해 보세요. 말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개마무사들이 보부도 당당하게 산천을 헤집고 다니며, 고구려의 영광을 외치는 모습을. 그리고 그들을 인솔하여 영토를 확장해 가는 광개토대왕의 늠름한 모습을. 어때요? 상상만으로도 스릴이 넘치지요?


교과서 속의광개토대왕 시대

삼국 간의 세력다툼은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4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삼국의 발전을 촉진하는 자극제가 되었다. 삼국 간의 세력다툼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중국 세력과 싸움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였다. 광개토대왕은 강화된 국력으로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의 업적은 만주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은 뒤,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뜻으로 ‘광개토왕’이라 하여 그의 위업을 그렸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 47쪽〉

알쏭이와 장콩샘의 미주알 고주알

광개토대왕 이야기는 어디에 전해지고 있나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역사책은 거의 없어요. 『삼국사기』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 광개토대왕의 부인이 누구인지, 자식은 몇 명인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들인 장수왕 때에 세워 놓은 광개토대왕릉비에 그의 업적이 자세히 나와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떤 일을 언제 했는지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어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고구려 사람들은 ‘천하의 중심은 고구려’라고 했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광개토대왕 시절에 지방 관리를 지냈던 모두루라는 사람의 무덤에 이런 글이 쓰여 있어요. “하백의 손자이며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이 북부여에서 태어나셨으니, 천하 사방은 이 나라 이 고을이 가장 성스러움을 알지니.” 고구려가 천하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이란 이야기지요.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 사람들을 가리켜 ‘천손(天孫)의 후예’라 하고, 주변 국가나 부족들은 전부 오랑캐라 해 놨어요. 이러한 사실로 보았을 때에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 사람들은 고구려를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던 것이 분명해요.

광개토대왕! 대단한 영웅인 것은 분명해. 하지만 말이야,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평화의 관점에서 보아도, 그는 과연 영웅일까? 알렉산더, 나폴레옹, 칭기즈칸, 광개토대왕. 이들은 땅따먹기 전쟁에서 승리한 정복군주들이야. 그렇다면 그로 인해서고통을 받거나 죽어 간 사람들 또한 무척 많았을 거 아니야? 고통받은사람들에게도 이들은 과연 영웅일까? 우리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아.

 

이성계조선을 건국한 위대한 왕

글자크기
<script type="text/javascript"> var currentPlayer; var wT = document.title; function setCurrentPlayer(_id) { if (currentPlayer != undefined && currentPlayer != _id) { var player = nhn.FlashObject.find(currentPlayer); player.stopSound(); } currentPlayer = _id; document.title = wT; } function flashClick() { document.title = wT; } window.onload = function() { document.title = wT; } </script>
  • 시대

    조선 전기

어제 동구릉1)으로 소풍을 갔어. 선생님께서는 미리 임금님의 무덤이 많이 있는 곳이라고 말씀해 주셨지. 동구릉에 도착해서 둘러보니, 정말 많은 무덤이 있더라구. 선생님께서는 ‘능’이란 임금님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특히 건원릉은 태조의 무덤이라고 하셨어.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이게 바로 왕건의 무덤이에요?”라고 말했지. 그런데 아이들이 막 웃는 거야. 도대체 아이들이 왜 웃은 걸까?

뛰어난 장수 이성계 - 이성계가 왕이 된 이유는 뭘까?

교과단원 5학년 1학기 3. 유교 전통이 자리 잡은 조선|중학교 역사(상) Ⅵ. 조선의 성립과 발전

젊은 날 이성계는 훌륭한 장군이었어
조선을 세운 사람은 태조 이성계야. 이성계는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1335년에 함경도 영흥의 관리인 이자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어. 이성계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뛰어나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했지. 특히 활솜씨가 매우 뛰어나 누구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대.

1361년 이자춘이 세상을 떠나자 고려는 이성계에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 병마사의 벼슬을 내렸어. 그때 고려는 북에서 홍건적, 남에서 왜구가 쳐들어와 나라가 매우 어지러웠지. 이때 이성계가 홍건적과 왜구를 무찌르면서 큰 인기를 얻었어. 특히 부하들에게 늘 너그럽고 백성들을 아꼈던 이성계는 나라 안에서 큰 지지를 얻었다고 해. 그 무렵 명나라는 고려가 되찾은 땅을 돌려달라고 했어. 그러자 고려는 안 된다며 명나라의 요동 땅을 정벌하려 했지. 그때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했어. 결국 요동 정벌에 나선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린 후 개경으로 돌아와 정권을 잡았지. 이를 계기로 이성계를 따르던 사람들이 큰 정치 세력을 만들었고, 기울어 가는 고려 대신 새 나라를 세우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2)했어.

〈꿈에 얽힌 이성계 이야기〉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 낮잠을 자는데 자신이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고 ‘꼬끼오’하고 우는 꿈을 꾸었대. 그래서 무학대사를 찾아가 해몽을 부탁했지. 그랬더니 무학대사는 “이 꿈에서 서까래 세 개는 ‘임금 왕(王)’자를 의미하고, 꼬끼오는 한자로 ‘고귀위(高貴位)’, 즉 가장 높고 귀한 자라는 뜻입니다. 장차 왕이 되실 꿈을 꾼 것입니다.”라고 했대. 그리고 이성계는 정말로 조선의 왕이 되었어.



조선 건국 - 조선의 성립을 선포하다!

교과단원 5학년 1학기 3. 유교 전통이 자리 잡은 조선|중학교 역사(상) Ⅵ. 조선의 성립과 발전

드디어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어
이성계를 따르는 사람들은 권문세족3)들의 횡포로 어려워진 고려를 버리고 새 나라를 세우고자 했어. 결국 1392년 7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 왕이 된 이성계는 신하들과 새 나라의 이름을 의논했어. 신하들은 회의 끝에 단군이 세운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한다는 뜻을 담은 ‘조선(朝鮮)’과 이성계의 출생지인 ‘화령’을 새 나라의 이름으로 결정했어. 그리고 명나라 황제에게 둘 중 하나를 나라 이름으로 정해 달라고 했지.

하지만 명은 ‘조선’을 고를 수밖에 없었어. 왜냐하면 ‘화령’은 몽골 제국의 수도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해서 명이 선택하기 힘든 이름이었거든. 여기에서 ‘조선’이라는 국호4)가 결정되는 과정을 잘 보아야 해. 조정에서는 이미 국호를 ‘조선’이라 정해 놓고 안 될 게 뻔한 ‘화령’을 끼워 넣어 생색을 낸 거야. 당시 대국인 명에게 예의를 갖추면서도 실속을 챙긴 거지.


새로운 국가 탄생의 의미
‘조선’이라는 국호는 민족의식을 한 단계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어. ‘고려’는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한다는 뜻이 담겨 있어, 신라백제 사람들에게는 큰 호응을 얻을 수 없었지. 그런데 국호를 ‘조선’이라고 정하면서 다 같은 고조선의 후예라는 더 넓은 차원의 민족의식이 생겨난 거야.

읽을 거리시호, 묘호가 뭐예요?

조선 시대의 왕들은 죽은 후에 자신이 살았던 일생을 평가 받았어. 시호(諡號)와 묘호(廟號)가 그것이야. 시호는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리는 칭호이고, 묘호는 임금이 죽은 후 왕실의 제사를 지낼 때 쓰는 호칭이야. 묘호의 뒤에는 ‘조(祖)’와 ‘종(宗)’이 붙는데, 보통 조는 공(功)이 탁월한 왕에게 붙이고, 이에 비해 덕(德)이 뛰어난 왕에게는 종을 붙였어. 주로 나라를 세웠거나 전쟁에서 백성을 구한 큰 업적이 있는 왕이나, 왕조가 끊어질 위험을 극복한 왕들이 조가 된다고 할 수 있어. 예를 들면 태조 이성계,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이 있지. 한편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 왕이나 중흥 군주5)에게는 종(宗)을 붙여. 하지만 연산군이나 광해군과 같이 쫓겨난 왕에게는 ‘군(君)’이라는 호칭을 붙었어. 이들은 왕의 자격을 박탈당해서 종묘상의 묘호도 없단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황룡사9층목탑. 첨성대. 분황사 건립.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선덕여왕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돌아가신 연도는 647년입니다

업적으로는

1. 황룡사 9층 목탑 건립과 분황사 건축을 통한 불교 문화발달

2. 김유신을 통한 백제와의 소소한 승리

이 것 뿐입니다

당과의 외교는 진덕여왕 때 가서 이루어졌죠

 

김춘추의 업적 -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 통일의 기반이 되게 한 점-고구려는 문무왕 때 망합니다

대조영의 업적 - 발해를 건국해 고구려의 법통을 이은 점

광개토대왕 업적 - 후연을 물리치고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 고구려 백제 관계를 고구려 우위로 돌린 점, 신라를 도와 왜를 물리친 점 등이 있습니다

이성계의 업적 -조선건국, 각종 개혁 지지, 왜구 격퇴가 있습니다

 

선덕여왕에 대해서요..

선덕여왕에 대해서요.. 안녕하세요~~초5인데요 방학숙제로 역사인물탐구가 있는데 저는 선덕여왕에 대해서 하려구 해요! 선덕여왕에 대해서 중요한 부분들만 간단히 제가...

신라선덕여왕에 대해서

신라선덕여왕에대해서 알고싶은데요... 선덕여왕에 예견한일 3가지하고... 업적같은것좀 알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꼭이요! 우선 예언한일 3가지는 .. 제 27대 덕만의 시호는...

선덕여왕에 대해서...

선덕여왕에 대해서 조사를 해야하는데요. 정확히 선덕여왕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일까지 알아가야 해서요. 길지않아도 되고요. 그냥 알기쉽게...

선덕여왕에 대해서......

... 선덕여왕에 대해서 질문을 할께요.. 1. 선덕여왕의 줄거리 좀 알려 주세요. 2. 선덕여왕의 진짜 이야기도.... 꼭 답변 해주세여 내공 30 걸어요. 안녕하세요~~저는 선덕여왕을...

선덕여왕에대해서좀....

님 들 선덕여왕에 대해서 아는 것은 다 올려주세요.부탁이에요. 선덕여왕(善德女王, ?~647년, 재위: 632년~647년)은 신라의 제27대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선덕여왕에 대해서요!!!

제가 방학숙제로 위인을 조사해 갈 것인데요 선덕여왕에 대해서 많이 조사 부탁드려요 태어난곳,태어나신 날짜라든지 선덕여왕께서 지내오신 과정 등 많이 부탁 드려요 내공...

선덕여왕에 대해서...

... 선덕여왕에 대해서 간단하게 좀 알려 주세요~ 6월 4일 까지 꼭 좀 알려 주세요~ 내공 많이 많이 드립니다~ 제 조상이 선덕여왕이여서... 오늘은 질문자께 제 블로그의 글을...

선덕여왕에 대해서

... 그리고 김춘추와 대조영,광개토 대왕,이성계에 대해서도 아신다면 부탁드려요 선덕여왕이 태어나셨을때와 돌아가셨을때 업적 등을 알려주세요. 1.첨성대를 지었다. 2....

선덕여왕에 대해서!!

... 선덕여왕을 보는 시청자인데엽.. 질문을 좀 대답해주시면... 3.선덕여왕이 정말 낭도로 있었나요? 4.김유신이 선덕여왕을 좋아한게 사실인가요? 5.선덕여왕이 몇째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