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무왕에대해서

발해 무왕에대해서

작성일 2012.09.02댓글 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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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무왕때

영톤를넓히는 과정에서 당나라:신라가 싸우는것에대해서 알아오는게숙제인데

이것좀알려주세요

복사해오지마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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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최강국, 발해(渤海) - 대제국 발해를 건설한 위대한 王 , 무왕

 

출처 : http://blog.naver.com/knightblack/10100381134

 

고구려의 복수를 하고 동아시아 최강자로 우뚝 선 발해(渤海)

 

발해는 만주를 지배한 한민족 최후의 왕조였다.

발해의 멸망으로 우리의 활동무대는 드넓은 만주에서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그만큼 발해의 멸망은 한민족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이요, 전환기였다.

 

발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그래서 우리는 발해가 어떤 국가였는지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발해의 대다수를 차지한 말갈족에 대해 이민족이라는 설, 고구려 변방민의 비칭이라는 설 등이 있고, 북한과 우리나라의 일부 학자들은 발해주민의 대부분은 고구려인이라는 설이 있는 등 발해는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흔히 한민족에서 가장 강력한 왕조를 꼽으라면 고구려를 꼽는다. 물론 이는 사실이다. 고구려는 중국이 분열되었을 때 이이제이 외교로 중국왕조들을 제어하였고, 통일왕조 수와 당의 침입을 분쇄시켰다. 그런데 발해 역시 고구려 못지 않은 군사강국이요, 해상강국이었다.

당나라 측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발해 사람 셋이면 호랑이를 잡는다."

 

이는 발해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보여주는 문구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같은 기록은 당시 당이 발해를 두려워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흐른 698년 고구려 유장(遺將) 대조영이 천문령에서 이해고가 이끄는 당군을 몰살시키고, 무리를 모아 동모산에 나라를 건국했다. 나라 이름은 크게 떨친다는 의미의 진(振)국이었다. 하지만 일본서기 등의 기록을 보면 발해는 스스로를 고려(高麗)라 불렀다. 발해라는 호칭은 이웃국가인 당에서 부른 호칭일 뿐, 발해는 스스로를 진국 혹은 고려국이라 불리웠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고구려 문화를 토대로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게다가 끊임없이 영토를 확장하여 남쪽으로는 대동강, 북쪽으로는 러시아 연해주 최북단, 동쪽으로는 연해주, 서쪽으로는 요동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다. 이런 발해를 두고 당나라는 해동성국(海東盛國: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이라 부르며 부러워했다.

 


 

발해가 해동성국이라 불리운 것... 그것은 발해가 고구려 못지 않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기에 가능했다.

남쪽의 신라가 당에 조공을 바치며, 특히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 왕이 저 멀리 사천까지 피난가있을 상황에 기를 쓰고 쫒아가 눈물을 흘리며 조공을 바친 것에 비하면 발해는 당당한 자주국가였다.   

 

해동성국이라 불리우며 주변국의 부러움을 산 발해, 그렇다면 발해를 발해로 만든 위대한 왕은 누구일까?

고구려 광개토태왕에 비견되는 발해의 임금은 대조영의 아들 2대 무왕(대무예)이다.

지금부터 난 대무예의 업적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건국 직후 발해는 내부 상황을 정비하느라 부득이하게 당과 화친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자신의 아들 문예를 당에 보냄으로써 건국 초 혼란한 나라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신생국 발해로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했던 고구려를 무너뜨린 당과 대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의 옛 땅을 다물(多勿)하고 발해를 반석에 올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대조영은 719년 숨을 거둔다. 옛 고구려땅을 되찾는 과업은 그의 아들 대무예에게 이어졌다.

 

대무예 때 발해는 고구려 광개토태왕 시대에 비견될만큼 강성한 시대를 보였다. 왕위에 오른 무왕은 스스로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정하여, 발해가 황제국임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또 왕위에 오른 뒤 적극적으로 대외확장을 시도하여 세력을 발전시키고 727년에 이르러서는“여러 나라를 아우르고 여러 번국을 감독하니 고구려의 구토를 회복하고 부여의 습속을 지녔다”고 자칭하며 대국의 맹주로 자처하였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동북아시아에서 발해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대토우(大土宇)를 개척하여 동북의 여러 오랑캐(夷)들이 두려워하여 발해의 신하가 되었다 『신당서』 권219하 북적열전발해

 

발해의 확장에 큰 위협을 느낀 세력이 있었다. 흑수말갈이었다. 흑수말갈은 말갈7부 중 가장 강력한 부족이었다. 『신당서』는 이들이 거세고 보병전에 능해서 다른 부족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고 전한다. 흑수말갈은 식량과 철 등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웃인 발해나 중국과 통교하여 식량을 조달하였다. 5세기 고구려가 실위에 철을 수출하고, 그 대가로 실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듯, 발해 역시 흑수말갈에 철과 식량을 수출하고, 대신 흑수말갈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흑수말갈은 발해의 확장에 다른 말갈족들이 발해에 복속하자, 이에 위협을 느껴 발해와의 관계를 끊고 당에 조공을 한다.

 

개원 10년(722) 윤5월 계사(癸巳) 흑수말갈의 추장 친속리계(親屬利稽:예속리계)가 내조하자, 발주자사를 제수하고 돌려보냈다. 발주는 오랑캐 지역에 설치한 주이다. 『책부원구』 권975 포계2

 

개원 14년(726) 흑수말갈이 사신을 보내 내조하자 조서를 내려 그 지역을 흑수주(黑水州)로 삼았다. 이어서 장사를 두고 사신을 보내 감독케 하였다.      『구당서』 권199하, 열전 149하 발해말갈

 

당과 흑수말갈의 밀착은 발해에겐 큰 위협이었다. 무왕은 왕위 계승자인 장자 대도리행(大道利行:?~728)을 당에 파견해 당이 말갈에 주를 설치한 것에 항의했다. 그리고 무왕은 흑수말갈 정벌 계획을 세운다.

 

흑수말갈이 처음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당나라와 통교하였다. 그런데 지금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하면서 우리에게 알리지 않으니 이는 반드시 당나라와 함께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 문예와 장군 임아는 군사를 거느리고 흑수를 치도록 하라 『구당서』 권199하, 열전 149하 발해말갈

 

무왕이 즉위한 8세기 동북아시아는 당과 발해 그리고 제변 부족들이 얽히고 섥혀 팽팽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만약 흑수말갈과 당이 손을 잡는다면 발해는 앞뒤로 협공당할 수 있었다. 불과 1세기 전, 고구려가 당과 신라의 협공으로 멸망했듯, 발해의 입장에서는 흑수말갈과 당의 공조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이에 무왕은 아우 대문예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흑수말갈 정복을 명한다. 하지만 대문예는 형의 명을 거부한다.

 

흑수말갈이 당에 관리를 요청하였는데 곧바로 공격하려고 한다면 이는 당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당은 사람이 많고 순사가 강로 공격 우리보다 만 배나 되니, 하루아침에 원수를 맺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취하는 것입니다. 옛날 고구려가 전성기에 강병(强兵)이 30만이나 되어 당에 대적하며 섬기지 않다가 당병이 한번 이르곧바땅을 쓸 듯이 다 없애 버렸습니다. 오늘날 발해의 무리는 고구려보다 몇 배나 적습니다. 그러니 당과 등지려는 것은 형세상 불가하옵니다.

『구당서』 권199하, 열전 149하 발해말갈

 

문예는 발해 건국 초 인질로 당에 끌려가 8년 간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 문명을 융합한 당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보았고, 누구보다 당의 정세에 능통했기에 반대했다. 하지만 흑수말갈을 내버려둔다면, 발해의 영향력 하에 있는 불녈, 월희, 철리말갈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더욱이 흑수말갈이 독자적으로 당과 교섭한 것은 발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발해로서는 간과할 수 없었다.

 

아무튼 대문예가 계속 왕명을 거부하자, 무왕은 대문예를 파직하고, 대신 사촌형 대일하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흑수말갈을 치게 하는 한편 대문예를 소환했다. 하지만 대문예는 소환에 불응하고 당에 망명했다.

 

군대가 흑수말갈과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에 그는 또 굳이 간하였다. 국왕이 성화가 나서 종형(從兄)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서 장수를 대신하게 하고, 대문예를 불려서 죽이려고 했다. 대문예가 두려워서 그 무리를 버리고 지름길로 당나라로 달아났다. 

『발해고』

 

그러나 무예는 따르지 않았다. 문예가 국경에 이르러 다시 상소하여 간절하게 간하였다. 무예가 노하여 종형(從兄) 대일하(大壹夏)를 보내 문예를 대신하여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대문예는 소환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문예가 드디어 무리를 버리고 샛길로 도망쳐 오니 (당은 그에게)좌효위장군을 제수하였다.              『구당서』 권199하, 열전 149하 발해말갈

 

발해사를 연구하는 성균관대박물관 김종복 박사는 무왕과 대문예의 대립을 반당파와 친당파의 대립이며, 무왕과 대문예는 각기 그 세력의 수장으로 보고 이 정치싸움에서 반당파가 승리했기 때문에 대문예가 당에 망명했다 해석하고 있다.

 

무왕이 흑수말갈 공략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흑수를 건드리면 당이 움직이라는 것은 그도 예상했을 것이다. 특히 신생국 발해로서는 거대제국 당과 맞서는 건 크나큰 부담이다. 하지만 그는 국제정세에 능했다. 당과 발해 사이엔 돌궐, 거란, 해족 등이 있었다. 이들 부족이 완충지대 역할을 해줄 뿐 아니라, 북방의 돌궐과 서방의 토번이 끊임없이 당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무왕은 자신있게 흑수말갈 토벌을 추진한 것이다.

 

조국을 배신한 대문예는 당으로 망명하자, 당시 당을 다스리던 현종이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좌효위장군이라는 벼슬까지 내렸다. 무왕은 당에 사신을 급파해 현종에게 국서를 보냈다. 대문예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동생을 죽이려는 형을 어떻게 봐야할까? 한규철 경성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발해 내부에 있는 친당파의 동요를 우려해 무왕이 자기 동생을 죽이려 했을 것'이라 분석했다. 무왕의 요구에 현종은 가볍게 무시했다. 현종은 대문예를 멀리 귀양 보냈다고 발해에 통보하고, 안서지방에 대문예를 피신시켰다.

 

하지만 비밀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안 무왕은 현종에게 외교 전례사 유례없던 파격적 표현을 국서에 써서 보냈다.

 

"어찌 속일 수가 있소이까"

 

신생국 발해의 태왕이 당나라 황제를 꾸짖은 것이다. 이 와중에 발해 차기 왕위계승자인 대도리행이 당에서 죽었다. 그러자 발해에 대한 당의태도는 이전과 달리 고압적으로 나왔다.

 

경은 나라의 은혜를 모르고 마침내 짐을 배반하려고 한다. 경이 믿는 것은 멀리 있다는 것뿐이지,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짐은 근래 관용을 품고 중원을 보살펴왔다.(그러나 경이)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언제인가 있게 될 것이다.

『문원영화』 권417 한림제조 번서4

 

당의 이 국서는 대도리행의 사망으로 발해의 차기 왕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문예를 왕으로 임명할 수 있다는 일종의 시위였다. 당 현종은 대문예란 카드를 이용해 발해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결국 무왕은 결단을 내렸다.

 

옛날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를 굴복시켰듯, 당나라로 쳐들어가 발해의 힘을 보여주기로 한 것이다.

732년 9월 무왕은 장군 장문휴(張文休)에게 당나라 정벌을 명하였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해외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발해는 발해만과 서해안의 패권을 장악한 고구려의 막강한 수군을 계승했다.

 

발해 수군의 공격목표는 등주였다. 등주는 지금의 산동반도에 위치한 항구로, 당나라 때 가장 큰 항구도시이자 무역의 거점이었다. 더욱이 이 지역은 수당시기에는 수군의 거점이기도 했다. 수당 시대 이들은 등주를 통해 해로로 고구려를 쳤다. 게다가 중요한 공격이 있을 때마다 전국의 조선 기술자들이 등주성 안에 배를 정박시키고 집결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해 배를 만들고 물자를 수송하는 일이 모두 등주에서 이루어졌다.

 


 

발해로서는 등주를 초토화시켜야 했다. 등주를 그냥 놔둔다면 당이 이 곳을 거점으로 대대적으로 발해를 공략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 수군기지가 있는 등주를 초토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발해의 등주공격의 목적이었다.

 

고운센둥 노동대학 역사학과 교수는 "등주는 수나라와 당나라 때 남북을 잇는 가장 크고 중요한 무역항구였고, 대외적으로 한반도, 일본 그리고 발해 입장에서 중요한 곳이었다"라 등주의 전략적 가치를 평하였다.

 

무왕의 치밀한 계산 아래 732년 9월 5일 이루어진 발해의 등주기습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당에 치명적인 손실을 입혔다. 등주자사 위준을 죽였을 뿐 아니라 당 수군기지를 초토화시켜 당의 수군을 무력화시켰다.

 

당시 발해 수군의 상륙전이 당나라에 끼친 결과는 엄청났다. 『신당서』 「오승자전」을 보면 발해군의 침공으로, 성읍이 도륙되었고, 많은 유민과 실업사태를 일으켜 등주라는 항구도시를 완전히 파탄시켰다고 씌여 있다. 엉망이 된 등주를 재건하기 위해 전쟁으로 발생한 실업자들을 위해 운전금(運錢金)을 해마다 30만의 규모로 줄이는 긴축재정을 펴지 않으면 안되었다. 즉 등주의 복구를 위해 다른 데에 예정된 30만의 운전금 지출계획을 바꿔, 용도를 변경하여 지출해야만 했다.

 

무왕의 등주공격에 대해 한규철 교수는"평화로운 시기에 담 칭공 계획을 세웠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발해의 등주상륙전은 한민족사의 장대한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발해의 등주공격에 놀란 당 현종은 급히 장수와 토벌군을 보냈지만, 발해의 기세를 꺾지 못했다. 당황한 현종은 신라를 끌어들였다. 현종은 신라 성덕왕의 벼슬을 높여주며 병력을 요청했고, 원정군 사령관으로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을 직접 지명하기 까지 했다.

 

김사란(金思蘭)에게 범양과 신라의 군사 10만을 일으켜 발해를 공격케 하였다.       『신당서』

 

733년 1월 신라는 약속대로 10만의 병력을 파견했지만, 소득없이 물러나야 했다. 추위와 눈보라 때문에 신라군은 발해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눈이 한길 남짓 내려 길이 막혔고, 병사들 중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어 아무런 전공 없이 돌아왔다.

『삼국사기』신라본기 성덕왕 33년

 

발해의 강세에 위협을 느낀 당은 무왕의 동생인 대문예를 발해 토벌군의 총사령관으로 삼아 발해에 맞서게 했다.

 

현종이 대문예를 유주에 보내 군사를 일으켜 발해왕 무예를 토벌케 하였다.     『자치통감』

 

당의 장수가 되어 조국에 칼을 댄 대문예를 무왕은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무왕은 비밀리에 대문예 암살작전을 개시한다. 당시 대문예는 낙양에 거주하고 있었다. 무왕은 낙양에 자객을 보냈다. 낙양의 상징이자 거점인 당시 번화한 지역인  천진교(天津橋)에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 발해 자객의 대문예 피습 사건이다. 하지만 무왕의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다.

 

발해 자객이 당나라 영토에서 대문예를 암살하려 한 것 이는 당 현종의 체면을 구긴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자기가 다스리는 당에 이민족 자객에 활개했다는 것은 대당 황제로서의 자존심을 긁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발해의 자주적인 면모를 또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분노한 현종은 낙양에 침입한 자객을 모두 잡아 처형시켰다.

 

그러자 무왕은 반격에 나섰다. 무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당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고구려가 중원에 쳐들어갔듯 발해 역시 당나라에 발해의 위용을 보여준 것이다.

 

 

733년 무왕은 지금의 진황도시 청룡만족자치현과 승덕시 관성만족자치현 경계에 위치한 도산, 즉 마도산을 공격했다. 등주 공격에 이은 발해 2차 정벌이었다.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진 발해와 당의 또 하나의 전투 마도산 전투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고구려가 수군과 육군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중원을 공략했듯, 발해 역시 고구려의 그러한 전술을 이어받았다. 발해 무왕이 친정에 나선 것, 이는 당나라에 대한 적극적인 응징 의지가 담겨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대무예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에 이르러 성읍을 공격하였다. 오승체가 중요한 길을 막고 큰 돌로 400리에 걸쳐 메우니, 적들이 들어오지 못하였다.         『신당서』 권136, 열전 61, 오승체

 

 발해가 마도산을 공격할 수 있었던 데에는 거란과의 협력이 있었다. 거란은 733년 윤3월 유관도산(楡關都山)에서 당군과 전추를 벌였다. 유관도산은 유관의 도산, 즉 마도산을 의미하므로, 발해는 거란과 함께 당의 마도산까지 진격한 것이었다.

 

무왕이 이끄는 발해군은 맹렬한 기세로 당군을 제압했다. 당은 군사를 추가로 파병하는 등 저항했지만, 발해의 공격에 수비가 뚤리는 등 발해의 진격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리후웅빈에 따르면 “당시 당나라는 1만명의 군사를 파견했는데 비교적 심각한 손해를 입었다”고 한다. 『구당서』는 발해와의 전투에서 당나라군 6천명이 사망했다고 하고, 『신당서』에는 1만명이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또 이 전쟁에 참가한 당 장수 오승체(烏承玼)의 묘비에는 관리와 백성들이 달아났고 본업을 상실했다고 적혀있다.

 

『발해사연구론문집』을 보면 "발해의 무왕은 직접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요하, 대릉하를 건너 당나라의 영주, 평주지역의 성읍을 점령하고 장성계선으로 진출"했다고 못박고 있다. 『신당서』의 「오승자전」의 기록을 살펴보면"발해의 대무예(무왕)가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을 점령했다"고 한다. 이러한 때 당나라 조정은 발해의 침공에 정신이 없었다. 『자치통감』을 보면"대문예를 유주로 보내, 군사들을 징발케 하여 싸우게 하는 한편, 유주절도사로 하여금 '하북채방처치사'를 겸하게 하고 상주, 낙주, 패주, 기주, 위주 등 16개주에 이르는 주와 안동도호부(평주)의 병력까지도 통솔케 했다"고 한다. 당시의 기사를 통해 당 조정이 발해군의 공격에 대해 얼마나 긴장했던가를 확인하게 한다. 즉 발해군이 당 조정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일종의 전면전과 같은 정벌전쟁을 펼친 셈이었다.

 

 발해군이 요서의 마도산에 진격한 것은 엄청나게 위협적인 기습작전으로 평가된다. 『신당서』 「오승자전」을 보면 발해군에 맞서고자 하던 오승자가 당군을 움직여 "요긴한 길목을 막고 큰 돌로 참호를 만들어 400리에 걸치게 했다"고 한다. 『통감고이』에도 오승자가 축조한 석축참호에 대해 "길을 막고 언덕을 파고 돌을 쌓아 400리 구간에 걸쳐 깊이와 높이가 각각 3길이나 되게 했다"는 규모였다고 씌여 있다.

 

당시 당이 400리에 걸친 참호를 만들 정도로 발해의 기습전 능력이 엄청났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그리고 발해군의 지상전투 능력이 당나라 부대를 긴장시킬만큼 수준급이었음을 증명한다 볼 수 있다. 등주전투와 마도산 전투를 통해 당시 발해는 고구려에 견줄만한 군사강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겠다. 더불어 발해가 요동을 너머 저 멀리 요서 지방까지 차지했음을 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계최강이라 자부하던 당이 발해 무왕에게 무릎을 끓었다. 이는 동아시아에 파장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이었다.

또 하나의 고구려의 탄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발해의 등장은 동아시아에 파란을 일었다.

그래서인가?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 발해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이 땅은 부여의 유속을 이었고,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으니 너희 일본은 옛 고구려를 대하듯 나를 대하라"

 

발해는 더 이상 당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발해 임금은 스스로를 '황상'이라 칭했다. 더욱이 발해는 연호를 정하였다. 발해가 독자적으로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발해가 당과 대등한 지위를 지닌 국가였다는 것을 말한다 볼 수 있다. 당시 동아시아를 보면 당 중심의 국제질서가 성립되었고 이런 당 중심의 국제질서에는 신라가 포함되었다. 그런데 발해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정한 것은 신라와 달리 발해와 당이 대등한 帝國임을 나타낸다 할 수 있다.

 

발해국의 관제 중에는 제국에서만 나타나는 3사 3공제가 있다. 국왕에게 스승의 대우를 받는 3사는 최고의 벼슬로서 국왕에게 충고를 하며, 3공은 모든 관청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제후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제후적 존재가 발해국에 있었다는 것은 발해국이 제국으로서의 제도와 틀을 가지고 있었으며 황제인 군주 밑에 작은 왕들이 제후로서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

 

일본 구라시키시의 오오하라 미술관에는 발해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 유물이 발해가 황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 유물은 함화 4년명 비상(碑像)으로, 함화란 발해 11대 임금인 왕 이진(이름, 묘호는 전해지지 않음, 다만 한단고기에 의하면 이진왕의 묘호를 장종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그의 묘호는 장종, 또는 장왕이 된다)의 연호로 834년(함화 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비상은 허왕부(許王府)의 관리였던 조문휴의 어머니가 모둔 불제자를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허왕부(許王府)'라는 관청의 이름이다. 이는 발해에 왕으로 봉해진 이가 있었다는 뜻이 된다. 당시 중국의 제도를 참조해보면 왕부는 황제국(정확히는 황제를 주장하는 국가나 황제의 위치에 있는 나라)에서 개설할 수 있다. 허왕부라는 명칭의 등장은 발해가 황제국임을 주장하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발해는 스스로를 황제국이라 칭하는 등 당과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담비의 길이라는 새로운 루트를 통해 저 멀리 서역과 교류를 하였을 뿐 아니라 험한 동해 바다를 건너 일본과 자주 교류하는 등 교역 강국이자, 해상 강국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발해는 동방의 강자라는 지위에 만족했다는 점이다.

고구려는 동방의 강자라는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조정하는 중핵의 역할을 했지만, 발해는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 들어서는 전환기에 주체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제국을 운영한 건 발해, 고구려가 같지만 발해와 고구려가 다른 점은 바로 국제질서를 주도했으냐 못했느냐이다. 만약 발해가 고구려처럼 국제질서를 주도했으면 발해는 훨씬 더 강성한 국가가 되지 않았을까?

 

 

 

 

 

 

 

 

참고자료

 

단행본

김종복, 『발해정치사연구』, 일지사, 2009,
동북아역사재단, 『발해의 역사와 문화, 동북아역사재단, 2007
동북아역사재단, 『새롭게 본 발해사, 동북아역사재단, 2007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

유득공 저 정진헌 옮김, 『발해고』, 서해문집, 2006
kbs한국사전제작팀, 『한국사전』3, 한겨레출판, 2008

 

논문

김종복, 「발해는 왜 당을 공격했는가?」 『(내일을 여는)역사』 12, 서해문집, 2003
김재선 「渤海 武王時期 對唐關係硏究」, 『중국학보』 49, 한국중국학회, 2004
변인석, 「8세기 동아시아 정세에서 바라본 당 발해 관계」, 『선사와 고대』9, 한국고대학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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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무왕 때 신라의 왕은 성덕왕입니다.성덕왕 재위 시에 당나라와 신라의 분쟁 기사는 <삼국사기>에는 보이지않습니다.발해의 무왕이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는 당나라와 신라의 분쟁이 아니라 발해와 당나라,신라의 분쟁이 생길것같습니다.당과 신라의 분쟁은 삼국통일전쟁이 종결된 후 생긴 나당전쟁이 유일합니다.이 나당전쟁은 발해가 생기기 전인 670년에 발발되었으며, 676년에 종결되었습니다.그 이후 698년에 발해가 건국됩니다.

발해 무왕에대해서

발해 무왕때 영톤를넓히는 과정에서 당나라:신라가 싸우는것에대해서 알아오는게숙제인데 이것좀알려주세요 복사해오지마세여 동아시아 최강국, 발해(渤海) - 대제국 발해를...

무왕에대해서

... 발해무왕과 백제의 무왕은 다른 인물이죠. 물론 한자는 같습니다. 武王인데요. 이들은 주로 군사적 업적이 뛰어난 왕에게 드리는 시호입니다. 중국에도 武王이란 칭호를...

발해무왕의 어머니는 누구인가요?

... 실제로 고구려의 보장왕의 조카가 발해 무왕의 생모가 맞나요? 아니면 드라마... 무왕과 대문예의 생모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는 상태입니다. 더 질문있으시면 쪽지, 1:1...

발해 대조영,선왕,무왕 그리고 최치원...

국사시간 숙제인대 대조영과선왕무왕 그리고... 견디다 못한 당현종은 대조영에게 ‘발해군왕’이라는 이름을...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아야 함에도...

민족구성, 발해의 발전 무왕,문왕,선왕은...

... 질문3)무왕 시대 때 발해의 발전은 어떤가? 질문4)문왕 시대 때 발해의 발전은 어떤가?... 당에 대해서도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당과 안사의 전투로 인하여 발해는...

발해와 흑수말갈족의 관계에 대해서

발해와 흑수말갈족의 관계에 대해서 궁금 합니다. 흑수말갈은 백산과 속말 등의 다른... 흑수말갈족이 발해 무왕 때에 당나라에 관리를 요청한 것으로 보아서 독립적인 세력으로...

급함! 발해대해서.. 내공있음!

... 발해대해서 좀 알려주세요. 아래 질문들에 대해 간략하게 답변해주시면... 무왕 대무예가 한일 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써라. 2. 문왕 대흠무가 한 일 중 중요하다고...

발해 역사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발해 역사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696년-697년: 당나라 영주 이진충의 난 -> 난을 틈타... 719년: 대조영 사망 726년: 발해 무왕, 흑수말갈 정벌 시도. 아우 대문예의 당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