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유물, 유적 부탁드립니다.

청주의 유물, 유적 부탁드립니다.

작성일 2012.08.13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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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의 유물 유적 부탁드립니다.

사진과 같이......

다른 지식iN은 이상한 것만 나와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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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유물)

 

1.용두사지 철당간


종 목  국보  제4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48-19 
시 대 고려시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그 입구에는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당간이 서 있는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는 예전에 용두사라는 절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용두사는 고려 광종 13년(962)에 창건되었으나 고려말의 잦은 전쟁과 난으로 인해 폐허가 되었고, 절이 있던 터는 청주시내의 가장 번화한 거리로 변하였다.

 

이 당간은 밑받침돌과 이를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온전히 남아 예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두 기둥은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도드라지게 선을 새겨 단조로운 표면에 변화를 주었다. 그 사이로 원통 모양의 철통 20개를 아래위가 서로 맞물리도록 쌓아 당간을 이루게 하였고, 돌기둥의 맨 위쪽에는 빗장과 같은 고정장치를 두어 당간을 단단히 잡아매고 있다. 특히 세 번째 철통 표면에는 철당간을 세우게 된 동기와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원래는 30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간을 세운 시기는 절의 창건과 때를 같이 하는 고려 광종 13년(962)으로,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당간이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문 우리 문화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곳과 함께 공주 갑사, 안성 칠장사의 세 곳에서만 철당간을 접할 수 있어 보기 드문 작품이다.

 

현재 청주에는 이 유물과 관련된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2.계유명전씨 아미타불비상


종 목  국보  제106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87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충청남도 연기군 비암사에서 발견된 이 삼존석상은 4각의 긴 돌 각 면에 불상과 글씨를 조각한 비상 형태이다.

 

정면은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새기고, 그 안쪽을 한 단 낮게하여 아미타삼존상을 조각하였다. 커다란 연꽃 위의 사각형 대좌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얼굴 부분이 갸름한 모습이며, 신체는 건장하면서 안정된 자세를 이루고 있다. 부처가 설법할 때의 손모양을 하고 있는 손은 비교적 크게 표현되어 삼국시대 이래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사각형의 대좌를 거의 덮고 있으며, 대좌 밑의 좌우에는 사자상을 배치하였다. 둥근 머리광배는 3줄의 동심원 안에 연꽃을 장식하고 있다.

 

사자 등위의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협시보살상은 본존불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얼굴은 훼손이 심하여 알아볼 수 없으나 연꽃이 새겨진 둥근 머리광배가 남아 있다. 본존불과 협시보살의 어깨 사이에는 나한상이 얼굴만 내밀고 있으며, 협시보살상의 양 옆에는 인왕상이 서 있다. 불상 위로는 불꽃무늬가 새겨진 광배가 이중으로 있으며, 안쪽의 광배에는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광배 밖의 좌우 공간은 한층 더 낮추어 비천상을 새겼다.

 

양 측면의 하단에는 정면을 향하고 있는 용머리를 조각하고, 그 위로는 연꽃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표현하였다. 뒷면은 4단으로 나누어 각 단마다 5구씩의 작은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불상 사이사이에 사람의 이름과 관직을 새겨 넣었다.

 

조각이 정교하면서도 장엄하고, 세부 양식에 있어서도 옛 형식을 남기고 있는 점이 계유명 삼존천불비상(국보 제108호)과 비슷하며, 만든 연대는 삼국통일 직후인 문무왕 13년(673)으로 추정된다. 


3.기축명아미타불비상


종 목  보물  제36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87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비암사에 있는 3점의 비상 가운데 하나이다. 배 모양의 큰 돌에 조각을 하였는데, 앞면에만 조각이 있고 뒷면에는 4줄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앞면에는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여러번 변하는 듯하여 마치 극락세계의 장면을 돌 위에 새긴 것과 같다. 맨 밑에는 연꽃을 둘러 석상 전체의 대석으로 삼고 그 위에 난간과 계단을 놓았다. 그 위에는 물결무늬로 연못을 표현했고, 난간 좌우에는 사자를 서로 마주보게 배치했다.

 

연못 중앙에 큰 연꽃이 있고, 그 위에 본존인 아미타불이 앉아 있다. 좌우에는 서 있는 자세의 여러 불상이 나열되어 있어 엄격한 좌우대칭 수법을 따르고 있다. 크게 새긴 본존불의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오른손은 뚜렷하지 않으나 왼손은 가슴 아래에 들고 있다. 본존 좌우에는 보살상이 있고 그 사이에 열반의 경지에 이른 성자인 나한의 상반신만 표현하였다. 보살상 옆에는 사나운 귀신인 야차상이 한손을 들어 천궁을 받들고 있으며, 그 옆에는 수호신인 인왕상이 있다. 본존 위에는 반원 모양으로 5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졌고, 그 위에는 다시 7구의 작은 부처가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들 사이에는 나뭇가지와 잎이 표현되었고, 구슬과 장신구가 새겨져 극락의 화려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 9년(689)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삼국시대 불상 요소와 새로 들어온 당나라 요소가 혼합된 통일신라 초기 불상양식의 좋은 예로 본존이 아미타불인 점으로 미루어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주고 있는 작품이다.


4.미륵보살반가사유비상


종 목  보물  제36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87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곱돌로 만든 이 석상은 그 생김새가 탑비를 닮았다 하여 비상이라 불리는데, 아래쪽의 대좌, 중앙의 사면석, 위쪽의 덮개돌이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T자형을 이루고 있는 이 비상은 정면에 왼발을 내리고 오른발을 왼쪽 다리에 올린 반가상을 크게 새기고 있다. 오른손을 들어 뺨에 대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반가상은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있으며 목걸이와 구슬장식을 갖추고 있다. 양 측면에는 두손에 보주를 들고 정면을 향하고 있는 보살입상이 새겨져 있는데, 반가상을 본존으로 삼아서 3존 형식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는 보탑을 크게 새겼는데 이 보탑으로 보아서 정면의 반가상이 미륵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각형의 대좌에는 중앙에 둥근 화병을 놓고 그 좌우에 꿇어 앉은 공양상을 조각하였는데, 대좌의 양 측면에도 정면을 향해 꿇어 앉은 공양상을 표현하였다.

 

이 석상은 삼국시대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크게 발달한 반가사유상 양식의 귀중한 유품이며, 만든 연대는 조각솜씨로 미루어 보아 충남 연기군 비암사에서 함께 발견된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존석상(국보 제106호)과 같은 673년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멸망한 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에 그 영역에서 조성된 이들 석상은 백제의 석조미술 수준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예이다. 


5.김길룡 좌리공신교서


종 목  보물  제716호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공신녹권이란 공이 있는 신하에게 왕의 명을 받들어 공신도감에서 발행하는 공신임명증서를 말하는데, 이 녹권은 조선 성종임금이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도와준 신료를 공신에 임명하고 그에 상응하는 녹을 내린 것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4등에 임명된 숭정대부행호조판서 김길통에게 내린 것으로,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좌리공신은 1등 7명, 2등 12명, 3등 18명, 4등 36명으로 총 인원은 73명이다.

 

본래 이것은 공신 개개인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공신의 수와 같이 발행되었으나 전하는 것은 거의 없어, 현재는 3등 공신에 임명된 이숭원의 녹권과 김길통의 녹권이 유일하다.

 

이 문서에 기록된 인물들을 통해 성종 대의 정치세력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6.용화사 석조불상군


종 목  보물  제985호  
지 정 일 1989.04.1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사직동 216-1 용화사 
시 대  고려시대


용화사 법당 상량문(건축공사의 시작과 끝, 참여자의 이름을 기록한 글)에 의하면 이곳은 1902년에 만든 절로, 엄비의 꿈에 청주에서 7구의 석불이 나타나 집을 지어달라고 간청하자, 사람을 보내어 청주 서북쪽의 냇가에서 이들 석불을 발견하였다는 유래가 있다. 그리하여 용화사를 세우고 미륵보전에 7구의 석불을 모시게 된 것이다.

 

5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되어있는 석불들은 모두 거대한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는데 최고 5.5m, 최저 1.4m이다. 이들 중 왼쪽 3번째의 불상은 머리 위에 솟아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크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신체는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가슴 부위에 卍 자가 양각되어 있다. 왼쪽 5번째 불상은 독특한 옷주름이 있고, 뒷면에는 거대한 나한상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머리 부분과 양 손을 나중에 보수한 석조여래입상은 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한 것이 특징이다.

 

7구의 불상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 특히 옷주름 표현과 손모양 등을 감안할 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7.분류두공부시(언해) 권21


종 목  보물  제1051-3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당나라의 시인 두보(712∼770)의 두공부시를 성종 때 홍문관전한 유윤겸 등이 왕명을 받들어 제주를 참정하고 한글로 역편한 것이다. 두공부시라 제명한 것은 두보가 공부원외랑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이며, 분류는 송조의 분문집주두공보시를 참고하고 서명에 관기한 것이다. 그리고 원(元)나라 때 편찬된 찬주분류두시를 원본으로 두보의 시 1,647편 전부와, 다른 사람의 시 16편에 주석을 달고 한글로 언해한 책으로 흔히 ‘두시언해’로 통칭되기도 한다.

 

이 책은 조선 성종 12년(1481)에 을해자 및 을해자 병용 한글자로 간행된 것이 그 초간본이다. 권두의 서명은 ‘분류두공부시 권지이십일’로 되어 있으며, 별도의 저자 표시는 보이지 않고 있다. 판식은 사주단변이며 반엽을 기준으로 8항 17자를 기본으로 하여 작은 자와 한글 활자를 함께 배열하고 있고, 판심부에는 ‘두시’의 판심제와 장차가 새겨져 있다. 한글에는 방점이 남아 있어 임란 이전의 국어현상을 반영하고 있다. 모두 45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태가 양호한 편이나, 전후의 표지가 모두 개장되어 있다. 


8.성리대전서절요


종 목  보물  제1157-2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 김정국이 성리대전을 요약하여 4권으로 편집한 후, 그 당시 나주 관청에 보관해 있던 금성목활자를 기본으로 하고 부족한 것은 새로 보충하여 성리대전서절요 400부를 간행한 것이다. 권말에 있는 김정국의 후서에 보면, 그 인출경위는 절요자 김정국이 중종 33년(1538) 여름 호남관찰사의 명을 받고 부임한 이후, 도사 김회백과 의논하여 금성인 나주목에 있던 목활자에 부족자와 결자를 새겨 보완하여 그해 가을에 간행하였던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은 모두 4권 4책으로 편성되어 있는데, 권1의 권두에는 서문이, 그리고 권4의 후미에는 김정국의 후서가 수록되어 있다. 권1의 서문이 끝나고 장을 바꾸어 권두서명이 나타나고 이어서 바로 ‘태극도총론’편으로부터 본문이 시작된다. 권두제면의 반엽을 기준으로 판식의 특징을 살펴보면, 변란은 사주단변이나 간혹 쌍변의 경우도 보인다. 반엽은 모두 10항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한 항은 19자씩 배자되어 있는 상태이다. 중앙의 판심부는 상하로 대흑구가 보이고 있는데, 그 사이로 상하내향 흑어미가 새겨져 있으며, 흑어미 안으로 판심제 ‘성리대전’과 권장차가 새겨져 있다. 각 책의 권두에는 신선로와 종형의 장서인이 날인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유명인사가 소유했던 장서로 보인다.

 

권4의 말미에 후서(後序)가 수록되어 있는데, 후서 끝에 ‘가정무술추 문소김정국근지’란 기록이 보이고 있어, 이 책이 바로 중종 33년(1538)에 간행된 것을 알 수 있다. 전책(全冊)의 표지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며, 본문의 경우도 충식이 전혀 나타나지 않은 상태인 점으로 보아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전체분량은 권1은 64장, 권2는 56장, 권3은 62장, 권4는 67장이다.


9.운천동 출토 동종


종 목  보물  제1167호 
지 정 일 1993.09.10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81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통일신라


청주시 운천동에서 금동불상과 징 모양의 금고와 함께 출토된 동종이다.

 

총 길이가 78㎝, 종 몸체 높이 64㎝, 입지름 47.4㎝인 중간 크기의 종으로 위·아래 단에 어떠한 문양도 없이 단순하게 처리된 것이, 오히려 이 종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사각형의 유곽 너비부분에는 3구의 비천상과 당초문, 3보 문양으로 꾸몄고, 그 안에 9개의 돌출된 유두가 있다. 종 몸통에는 2구의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연꽃으로 장식한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2개 가지고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덩굴무늬가 새겨 있다.

 

현재 용통은 일부 없어졌으나, 종의 고리부분인 용뉴는 한 마리 용이 입을 벌리고 목을 구부리고 있는 형태가 완전히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말기(8∼9세기 경)의 종임을 짐작하게 한다.

 

 

10.보살사 영산회괘불탱


 종 목  보물  제1258호 
지 정 일 1997.08.0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시 대 조선시대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 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화를 말하며, 영산회상도는 그 중에서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보살사영산회괘불탱은 길이 6.13m, 폭 4.26m로 삼베 위에 그린 것이며,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였고 녹색·황색 등 중간색을 넣어 밝은 화면을 보여준다. 남아 있는 글을 통해 조선 인조 27년(1649)에 경기도·충청도 등지에서 활약했던 신겸, 덕희, 경윤 등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중앙에 앉아 있는 석가모니 본존불은 사각형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근엄하고 엄격한 표정을 지니며 당당한 신체에서는 중후한 모습을 풍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 걸치고 있는 모습이며, 오른손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하단의 8대보살, 중단의 10대제자 등은 석가불 주변을 빽빽하게 에워싸며 좌우대칭의 구도를 보이고 있다.

 

본존불의 얼굴이 또렷하고 신체가 당당하여 화면을 압도하는 듯하며, 선명한 색채·화려한 문양·석가를 둘러싼 무리들의 세밀하고 단아한 묘사로 당대 불화의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되는 작품이다. 

 

11.신경행청난공신교서 및 관련문적


종 목  보물  제1380호 
지 정 일 2003.08.2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명암동 산81 국립청주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신경행(1559∼1623)과 관련된 문적으로 신경행 청난공신교서를 비롯하여 유서, 시호서경(2점), 증시교지, 조은신공시장, 청난원종공신록권, 이십공신회맹록, 이십일공신회맹록 등 모두 8종 9점이다.

 

신경행은 조선 선조 10년(1577) 문과에 급제하여 한산군수가 되었으며, 충청도병마절도사 등의 벼슬을 하였다. 선조 29년(1596) 7월에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이를 평정하는데 세운 공으로 청난공신이 되어 영성군에 봉해졌다. 죽은 뒤에 예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충익’이다.

 

신경행 청난공신교서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신경행에게 내린 것으로,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선무공신 및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호성공신과 함께 선조 37년(1604)에 발급되었다. 이 교서는 녹훈 사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청난공신 포상 규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교서의 양식과 문체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유서는 선조 41년(1608) 6월 16일에 신경행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면서 제1부의 밀부를 내린 유서이다. 유서 가운데 제1부를 내린 것은 매우 희귀한 것으로 가치가 있다.

 

시호서경(2점)·증시교지·조은신공시장 등은 신경행이 ‘충익’이란 시호를 받는 과정을 알 수 있는 문서들이다. 시호서경은 사헌부 시호서경과 사간원 시호서경이 있는데, 순조 11년(1811) 6월에 증예조판서 신경행의 시호를 충익으로 정하는 것에 대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동의한 문서이다. 증시교지는 순조 12년(1812) 1월에 신경행에게 충익의 시호를 내리는 교지이다. 조은신공시장은 신경행이 시호를 받기 위하여 그가 살았을 때의 한 일을 가선대부 김이영(1755∼1845)이 지은 글이다.

 

청난원종공신록권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선조 38년(1605) 4월 16일에 공신도감에서 신경행의 아들인 주부 신면에게 내려준 녹권이다. 이 녹권은 공신에 대한 대우와 포상규정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조 원종공신관계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그밖에 이십공신회맹록 및 이십일공신회맹록은 신경행과 관련있는 자료들로, 당시 20공신·21공신과 그 자손들의 동향 및 당시의 정치상황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십공신회맹록은 숙종 6년(1680) 남인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경신대출척에 공을 세운 보사공신이 복훈되어 추록한 것을 계기로 숙종 20년 6월 20일 보사공신을 중심으로 역대의 공신 및 그 적장자들이 모여서 회맹제를 행하고 참여인을 수록한 명단이다. 이 회맹록에는 신경행의 4세손인 신득중이 기록되어 있다. 이십일공신회맹록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분무공신의 녹훈을 계기로 영조 4년(1728) 7월 18일에 개국공신 이하 각 공신의 적장손들이 모여서 회맹제를 행하고 그 참여자를 수록한 명단이다. 이 회맹록에는 신경행의 6세손인 신광우가 기록되어 있다.

 

신경행 청난공신교서 및 관련문적은 서지학·역사학 연구 및 조선조 공신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 동시에 신경행 전기자료이기도 하므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12.범망경보살계본 및 수보살계법


종 목  보물  제1407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이 책은 후진의 구마라즙이 번역한 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 권하와 이 경전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지는 보살계도량이나 수계법회 등의 절차와 규범인 북송의 연수가 집한 수보살계법, 그리고 진나라 혜사가 찬한 수보살계의로 되어 있다.

 

『범망경』은 승조의 후서에 따르면 112권 61품으로 구성된 범문이 있었으나 전체는 한역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하권만 따로 뽑아 보살계본으로 삼아 불교도의 신행 규범으로 삼고 있다. 내용은 보살이 지켜야 하는 10가지 무거운 계와 십선계 등 보살이 지녀야 할 몸가짐과, 말씨와 마음자세 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실천덕목을 담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한국불교 종단의 조직 및 유지에 큰 영향을 미친 경전이다.

 

이 책은 종이 앞·뒷면에 모두 인쇄되어 있는 등 인쇄상태 및 인쇄조건, 그리고 발문의 내용 등으로 보아 1306년 이후에 고려인들에 의해 원나라에서 판각하여 원나라 종이로 찍어낸 판본으로 추정된다.


13.금강반야바라밀경


종 목  보물  제1408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이 책은 목판본으로 구마라즙이 번역한 금강경을 바탕으로 육조 혜능이 금강경에 대해 해석한 내용을 붙인 것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은 줄여서 ‘금강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모든 법이 실체가 없으므로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는 공사상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제10의 <장엄정토분>에서는 청정한 마음으로 외적인 대상에 집착함이 없이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 것’을 가르친다.

 

이는 혜능 및 여러 고승들을 깨닫게 한 유명한 구절이다. 우리나라에서 조계종의 근본경전으로 반야심경과 함께 가장 많이 읽히는 경전이다.

 

고려 충렬왕 31년(1305) 청주 원흥사에서 개판된 점이 주목되는데, 곧 원흥사의 육구, 박지요거사 등이 발원한 사찰판이다. 이는 1377년의 흥덕사 간행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이전에 간행된 판본으로서, 청주지역이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발흥지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소중하다. 


14.대방광불화엄경소 권48, 64, 83


종 목  보물  제1409호 
지 정 일 2004.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고인쇄박물관 
시 대 고려시대


이 책은 대승경전의 하나인 화엄경(주본)을 저본으로 당나라 징관이 주소하고 여기에 송나라 정원이 주해한 교장류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대방광불화엄경’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통칭되기도 하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이러한 화엄경에 화엄학의 대가인 당나라 징관이 주소한 화엄경소를 송나라 정원이 주해한 것이다.

 

이 판본은 저자인 정원이 의천에게 상인 서전을 통해 보낸 목판으로 주본 화엄경을 주해한 주소본 120권을 찍어낸 것 가운데 권48, 64, 83에 해당하는 것으로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표지는 상즙으로 염색한 종이를 사용하였고, 중앙의 제첨은 금니로 그리고 그 안에 표지서명 또한 금니로 기재하였다. 판식의 특징은 상하단변으로 계선이 보이고 있으며, 한 행은 15자씩 배자되어 있다. 한 장은 5면씩 접혀 있으며, 점련부분에는 판수제가 기입되어 있어 작업과 관리의 편리를 위한 의도로 고려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지질은 저지만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표면의 광택과 묵즙의 번짐을 방지하기 위해 도침한 흔적이 보이는 상품의 고려지이다. 그런데 권83의 말미에 ‘가정 31년(1552) 임자…시봉…’라는 묵서가 남아 있는데, 인출기로 보기 어렵고 소유를 나타내는 장서기로 생각된다. 자체는 송판에서 유행한 전형적인 구양순체로 보이며, 인쇄면의 필획이 살아 있어 비교적 초기에 인출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주본 화엄경소 120권 가운데 3책으로서 당시 대각국사 의천의 불서 수집 상황과 더불어 송과 일본으로 이어지는 문화교류를 알게 하는 소중한 자료가 되는 불경이라 하겠다.

 

15.청주 출토 순천김씨 의복 및 간찰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09호 
지 정 일 1979.12.2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1977년 봄, 청원군 석병산에 있는 채무이와 그의 부인 묘를 이장하게 되었을 때 관에서 나온 것으로 의복과 당시 채씨 집안에 오고간 서간류이다.

 

채무이(1537∼1594)은 명종 10년(1555) 생원을 시작으로 세자 익위사대직을 지낸 인물로 그는 임진왜란 중인 선조27년(1594)에 죽었고 그의 둘째 부인인 김씨는 임진왜란 전에 죽은 것으로 보여 이곳에서 출토된 의복과 서간류는 임진왜란 전의 유물로 분류되고 있다.

 

의복은 김씨 부인이 평소에 착용하였던 것으로 겹누비철릭 1점, 겹누비바지 2점, 겹회장저고리 2점, 직령 겹두루마기 1점, 목면 겹저고리 1점, 모시 치마 1점, 베적삼 1점, 모시철릭 1점, 토기 1점 등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시철릭은 흰색의 세모시로 된 겉옷으로 치수는 등솔기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길이 144㎝, 뒤품 40㎝, 소매길이 104㎝이다.

 

치마는 길이 63㎝에 2㎜의 잔주름이 있으며 겉자락 6폭, 뒷자락 7폭, 안자락 2폭으로 총 15폭으로 만들어진 특이한 치마이다. 잔주름은 눌러 덧 박았는데 그 박음질 솜씨가 매우 섬세하다.

 

토시 1점은 겉은 가는 명주이고 안은 굵은 명주이며 속에는 얇게 솜을 넣었다. 크기는 52㎝ ×39㎝로 비교적 큰 편이며 양쪽 부리에는 1㎝간격으로 곱게 선을 대었다.

 

철릭은 조선시대 문무관리들이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거나, 국난을 당했을 때, 왕을 호위할 때 착용했던 옷으로 소매가 넓고 웃옷과 치마가 연결되어 있으며 허리에 주름이 있는 옷이다. 웃옷인 저고리는 몽땅하고 겨드랑이에 다른 천을 댄 무가 있으며 저고리 소매 뒤의 회장과 소매끝에 덧댄 천인 삼수가 상당히 넓다. 깃은 겹깃으로 고색을 띠고 있는데, 신라와 고려의 저고리를 상고하는데 도움이 되고있다. 저고리와 연결된 치마의 주름은 잔주름으로 되어있고 조선 초기의 포로서 깃모양이 직각으로 각진 직령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여자도 철릭을 입었다는 사실과 철릭의 초기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복식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만장 3점, 은장도, 돗자리, 목관, 표주박 1점씩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언문서간 185점이 함께 출토되어 16세기 언어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6.청원 구례손씨 묘 출토 유물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16호 
지 정 일 1981.1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1979년 충북 청원군에 거주하는 변종화씨가 조상의 묘들을 이장할 때, 그의 11대 조부인 변유인(1566∼1641)의 둘째 부인인 구례 손씨의 묘에서 미이라화된 시신과 함께 발견한 의복들이다.

 

이 의복의 주인인 손씨의 생몰년대는 알 수 없으나 변유인씨와의 연령차를 10세로 보고 50세 때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1576년에서 1626년 사이에 해당되므로 임진왜란 전후시기의 유물로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고리는 비교적 길이가 길고 소매 끝에 한삼을 단 것이 특징이다.

 

남명주저고리는 사각모양의 목판깃을 하고 있고 앞쪽에는 고름이 달려 있는데 장식적 의미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너비 2㎝의 단순한 끈 모양으로 매는 용도로만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색단속곳과 겹솜바지는 요즘 한복 속에 입는 속바지와 같은 모습이지만 소색 단속곳은 허리에 끈과 밀방이 달려 있고 겹솜바지는 아래가 터져있다. 그밖에 옷감을 반폭씩 이어 붙힌 겹회장저고리와 트임이 75㎝나 되는 누빈창의 그리고 몽고의 영향을 받은 듯 보이는 소모자 등이 있다.

 

이들 유물들은 임진왜란 전후의 옷으로 우리 복식의 옛 모습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7.청원 전 박장군 출토 유물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17호 
지 정 일 1981.1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충청북도 청원군 노계산에서 대청댐 수몰지역 내에 있던 박장군 묘라고 알려진 무연고 분묘를 이장하던 중에 나온 의복들로 그 종류가 다양하다.

 

조선시대 남자 겉옷의 일종인 중치막 2점, 직령포 2점, 관복, 구의, 도포, 동방형포가 각 1점씩 나왔는데 특히 저고리 11점, 적삼 2점은 조선전기와 후기를 잇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아울러 겹유고, 겹유바지, 상의에 딸린 치마가 각 1점씩 출토되었다.

 

조선초의 단배자와 숙종이후의 당의의 중간치인 조끼모양의 배자 저고리가 3점 있는데 이들의 길이는 각각 66㎝, 65㎝, 66㎝이다. 또한 소매의 끝단에는 다른 천으로 덧댄 삼수가 10∼15㎝정도 달려있고, 적삼의 경우는 39㎝정도이고 등솔기에서 소매끝까지의 화장길이는 119㎝나 되어 저고리 길이보다 소매가 더 길다.

 

깃모양이 둥글어 단령이라고 불리우는 옷에는 옆에 협삼이 달려있어 김위묘에서 나온 의복과 비슷하고 흰색의 무명으로 만든 구의의 앞 여밈은 두루마기와 같다. 앞길 98㎝, 뒷길 60㎝로 소매는 단령이나 창의나 모두 중간 크기로 되어있어 임진왜란 전후의 다른 포들과 비슷하다.

 

도포는 현존하는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도포가 문헌상 선조대에 비롯되었다는 말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소매통이 32㎝로 밋밋하여오늘날과 같이 도포의 소매가 넓어진 것은 18세기부터 임을 알 수 있다. 구의는 백색 무명으로 되어있고, 직령포는 짙은 청색의 소매가 좁은 포로서 소매끝에는 33㎝의 삼수가 달려있는데 왼쪽 소매를 조각조각 이은 것이 이휴정묘에서 출토된 직령포와 비슷하다.

 

창의는 청색의 목면으로 지었으며 소매가 좁고 70㎝의 옆트임이 있다. 동방형포는 백색 명주로 만든 중들이 입던 옷의 일종인 납의로서 소매가 길고 저고리의 길이가 길다.

 

무명바지는 여자용으로 보이며 바지밑이 있고 바지부리의 넓이가 넓다. 치마는 진한 갈색의 모란무늬가 있는 치마와 백색 명주치마가 있다.

 

모자는 높이 17㎝, 아래직경 25㎝, 둘레가 50㎝인 청색 비단으로 된 모자와 흰색과 갈색과 명주로 된 작은 모자가 있다. 이밖에 누비치마와 흰색의 무명 홀이불과 천금(시신을 넣는 관의 뚜껑에 안에 덮는 이불), 멱목(시신의 얼굴을 싸던 천), 악수(시신의 손을 싸던 천)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옷의 형태와 질감, 무늬 등으로 추정하여 볼 때 임진왜란 전후의 의복으로 보이며 당시의 사회상이나 의복 양식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중원 김위 묘 출토 유물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18호 
지 정 일 1981.11.1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충북대학교박물관 
시 대 조선시대


1980년 충주댐 건설로 충북 청원군에 있던 조선중기의 문신인 김위의 묘를 이장할 때 미이라화된 시신과 함께 발견된 의복들이다.

 

출토된 의복에는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나 왕을 호위할 때, 국난이 있을 때 입었던 철릭과 지금의 두루마기 모습과 비슷하지만 옷깃이 직선으로 곧아 직령포라고 불리는 옷과, 옷깃이 둥글어 단령이라 불리는 옷 그리고 옷의 일부가 트여져 있는 창의, 여름에 입기 위해 삼베로 만든 저고리인 적삼, 한복 속에 입는 바지인 속곳과 솜버선 그밖에 시신을 덮었던 명주로 만든 천금 등으로 목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삼베적삼 ②명주겹직령관복 ③자색명주철릭 ④무명누비속곳 ⑤명주누비속곳 ⑥무명잔누비창의 ⑦갈색겹유창의 ⑧무명솜버선 ⑨명주겹유창의 ⑩명주홑철릭 ⑪명주누비창의 ⑫명주누비솜속곳 ⑬명주겹철릭 ⑭명주유직령포 ⑮관복(단령)

 

이 옷들은 임진왜란때 현감을 지냈던 김위의 것으로 당시 의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깃이 둥근 단령과 깃이 직선으로 각이 진 직령이 함께 출토되어 그 이전까지 불분명했던 의복의 표리관계가 확실히 밝혀졌다. 즉 평상시에는 직령이나 창의를 입고 있다가 관청에 출근 할 때 단령을 위해 걸쳐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직령은 겹으로 되어있고 단령은 홑겹으로 만들어졌으며 소매는 좁은 편으로 조선초의 전형적인 의습을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우리나라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안동김씨 묘 출토 의복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17호 
지 정 일 1987.11.23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개신동 산48 
시 대 조선시대


1985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경기도 광주군에 있던 안동 김씨 묘역을 옮길 때 출토된 의복들이다.

 

조선의 여류작가 허난설헌의 시아버지인 김첨과 15∼16세로 보이는 그의 딸, 김대경의 처인 원주 원씨의 유품으로 16세기말에서 17세기의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은 지금의 두루마기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깃이 사각형모양으로 각이져 있어 직령포라고 부르는 옷을 비롯하여 저고리, 치마, 속옷, 목도리, 보자기, 솜이불 등으로 관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 중 흰색 명주에 솜을 넣어 4㎝ 간격으로 누벼 만든 솜바지와 전형적인 직령포 모습을 하고 있는 명주 겹누비와 명주 솜누비의 직령포 2점은 김첨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딸로 보이는 15∼16세 정도의 여자 미이라와 함께 ‘안동김씨지구 ’라고 쓰여진 명정이 나왔는데 몸판과 소매가 연두색이고 동정은 흰색인 명주저고리와 앞판에 연두색 비단을 조각조각 이어 붙힌 저고리 2점이 그녀의 것으로 보인다.

 

원주 원씨의 것으로는 앞판과 소매가 연두색이고 소매 끝은 진한 갈색인 안고름과 겉고름이 달려 있는 무명저고리와 안에 솜을 넣고 15㎝ 간격으로 누빈 솜저고리 2점과 치마 3점이 있다.

 

그 밖에 삼베와 무명으로 만든 속옷, 흰색의 명주 목도리, 갈색의 꽃무늬 보자기가 있고 옷의 형태로 보아 18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인을 알 수 없는 명주 솜저고리가 함께 출토되었다.

 

시대에 따라 양식이 달라지는 복식사에서 주인과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으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청주의 유적)

 

1.상당산성


종 목  사적  제212호 
지 정 일 1970.10.0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시 대 조선시대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2.흥덕사지


종 목  사적  제315호 
지 정 일 1986.05.0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시 대 통일신라


청주 운천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이다.

 

1985년 발굴조사 때 금당터·서회랑터·강당터·부속건물들이 있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흥덕사’라고 새겨진 쇠북(금구)조각이 나와 절의 이름이 흥덕사였음을 알 수 있었다. ‘대중 3년명’이라 새겨진 기와와 기타 유물들로 보아 늦어도 9세기에 지어져 고려 후기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치미·기와조각·그릇 들과 청동제품이 많이 출토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직지심체요절』을 찍은 곳으로서 그 가치가 중요한 유적이다. 

 

3.신봉동 백제고분군


종 목  사적  제319호 
지 정 일 1987.07.1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흥덕구 신봉동 산7 
시 대 삼국시대


청주시내를 남동에서 북서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무심천 서북쪽 기슭의 동쪽 비탈진 곳에 분포하고 있다.

 

107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는데 106기는 흙을 판 후 무덤을 쓴 널무덤(토광묘)이고, 1기는 널방과 널길을 가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이다. 널무덤은 야산 전체에 걸쳐 분포하며, 봉분은 거의 깎여 나가 남아있지 않다. 출토 유물로는 여러가지 토기류·옥과 같은 장신구류·철로 만든 칼이나 도끼같은 무기류·말갖춤(마구류)과 그 밖의 숟가락 등이 나왔다. 90-1호 널무덤에서는 갑옷이 출토되어 백제철갑의 실물을 볼 수 있어 주목되고 있다.

 

신봉동 고분군은 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동안 만들어진 고분군으로, 대체로 4∼5세기경의 백제 고분군이라 할 수 있다.

 

신봉동은 백제의 동쪽 변방지역으로 다른 유적에서 볼 수 없는 마구류·무기류가 많이 출토되어,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돌방무덤은 서울지역의 백제 초의 것과 공주지역의 돌방무덤과 비교되는 자료로서 평가된다. 


4.정북동 토성


종 목  사적  제415호 
지 정 일 1999.10.28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정북동 351-1번지 외 
시 대 삼국시대


미호천변 평야의 중심에 있는 평지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만든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궁예가 상당산성을 쌓아 도읍을 삼았는데, 견훤이 산성을 빼앗아 정북동 토성으로 짐작되는 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후삼국 쟁란기인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출토된 유물과 성의 위치, 주변 여건이 초기 성곽시설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성의 길이는 675m이고 높이 3.5m, 폭은 8∼13m 정도 된다. 성안에서는 주거지, 기둥구멍, 길, 돌무더기 등이 확인되었고, 성 밖에서는 성을 둘러싸 보호하는 물길인 해자를 확인했다.

 

토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들로 우리나라 초기의 토성 축조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토성이다.

 

5.청주향교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9호

지 정 일 1977.12.06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대성동 67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훌륭한 유학자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며, 지방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던 지방국립학교이다. 조선초에 처음 지어졌으며, 숙종 9년(1683)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현재는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비롯한 6동의 부속 건물이 남아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로부터 토지와 노비·서적 등을 지급받아 운영되었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에 교육기능은 없어지고 제사기능만이 남아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6.청주동헌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9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북문로1가동 171-3 
시 대 조선시대


동헌은 조선시대에 지방장관인 감사나 수령이 공무를 집행하던 곳으로 관청의 중심건물이다.

 

조선시대의 청주목 관청건물은 동헌을 비롯해서 객관·향사당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건물 한 채만 남고 모두 없어졌다. 기록에 의하면 영조(재위 1724∼1776) 때는 근민헌이라 했으며 고종 5년(1868)에는 이덕수가 다시 지으면서 청녕각이라 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의 기와에 순조 25년(1825)에 관청을 지었다는 글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건물은 그 때 다시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앞면 7칸·옆면 4칸으로 1층이며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이다.

 

청주목사가 있던 관청의 동헌 건물로는 격식이 낮고 왜소해 보이나 조선 후기 지방 관청건축을 원형대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는 군청사의 일부로 이용하고 있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으나, 관아의 전체구조를 알려주는 자료로서도 매우 중요하다.

 

 

7.망선루 

 

종 목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지 정 일 1982.12.17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1가 154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 청주관청의 하나로 관리들이 머무는 숙소인 객관 동쪽에 있던 취경루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려 공민왕 10년(1361)에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기념으로 청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고 이곳에 방을 써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조 7년(1461)에 수리하였고 한명회가 현판을 ‘망선루’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다시 고쳐서 근세에까지 유지되다가 1923년에 제일교회로 이건되었으며, 2000년 12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나무로 지은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누각형식이다. 현재 1층은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지만, 이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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