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업적과 비판받아야 할 점에는 어떤게있나요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과 비판받아야 할 점에는 어떤게있나요

작성일 2012.02.05댓글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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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고2되는데요 사탐으로 정치를 선택했고 제가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있고 해서 역대 대통령들에 대해 차례대로 질문하면서
지식인 여러분의 평가를 좀 들어볼까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알아보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지만
우리나라가 동남아 국가들보다도 열악하던 경제를 급부상시켰다고 하는데
박정희대통령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후진국 계열에서
기었을거라는 평가가 있는 반면에 친일파에 독재자라는 평가도 있더군요
박정희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여러 글을 읽어보니 극과 극인것 같습니다
최대한 중립적인 입장에서 구체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과
비난받아야할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지 정리해서 적어주셨으면 합니다
어려운 질문이라는 거 알지만 질문자 연령대 생각해서 쉽게 적어주세요 ㅠ;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 #박정희 대통령의 명언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박정희 대통령의 맛집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1. 질문자님, 박정희대통령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쁘게 보는 분들도 많이 있어요.

제가 진보적인 성균관대학교 서중석 교수의 글과  제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합니다.

 

     <박정희 정권의 수립>

 

박정희 등 쿠데타 주동자들은 가능한 한 군정(軍政)을 연장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4월 혁명이 일어난 지 얼마 안되었고, 미국도 하루빨리 민간정부 형태를 띠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1961년 8월 12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963년 여름을 정권 이양의 시기로 발표했고, 그해 11월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의 공동성명에서 다시금 확인했다.

 

혁명주체 세력은 민정이양에서 두 가지 비열한 행동을 했다.

하나는 기성 정치인들의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상태에서 중앙정보부를 동원해 사전 창당활동을 한 행위이다. 신당 정책개발 책임 임무를 맡은 중앙정보부 관계자와 학자로 구성된 대외문제연구소는 1961년 10월 중순경 신당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신당은 1961년 1월부터 사전 조직작업에 착수해 3월 말까지 중앙조직의 충원과 골격을 마련했고, 이해 말까지 1,000여 명을 중앙정보부 모처에서 '밀봉교육' 시켰다. 신당은 사무국 중심으로 운영되는 이원체제로, 국회의원 후보와 국회운영까지도 사무국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특수한 체제였다. 1963년 1월 신당 명칭이 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으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동하 최고위원 등이 거세게 반발했다.

다른 하나는 정치활동정화법을 만든 일이다. 1962년 3월 최고회의를 통과한 이 법에 의하면 정치활동정화위원회에서 적격 판정을 받지 못하면 1968년 8월 15일까지 6년여 동안 정치활동을 못하게 되어 있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보균자'들에게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 국회의원만 되지 말아달라는 것이라고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 며칠 후 이 법에 대한 항의 표시로 윤보선이 대통령에서 물러나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정치인들의 거센 반발 속에 다음 해 2월까지 적격 판정이 있었고, 민주당. 혁신계 등의 중요 정치인 299명이 이 법에 묶이게 되었다.

 

민정이양을 앞두고 헌법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도 논란이 되었다. 국민의 대의기관이 아닌 최고회의가 헌법문제를 다룰 수 있느냐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1962년 10월 최고회의는 10월 개정 절차를 취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최고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로 확정하는 것이어서 개정이 아닌 명백한 제정이었다. 11월 5일 헌법 개정안이 공고되었고, 12월 5일 비상계엄이 경비계엄으로 바뀌었다. 헌법은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 절차를 밟았다. 부통령이 없는 대통령 중심제여서 이승만 정권보다도 대통령의 권한이 더 독단적으로 통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무소속으로 대통령 출마를 할 수 없게 하여 야당 난립을 유도했다.

 

1963년 1월에 공포된 국회의원선거법에는 처음으로 전국구 비례대표를 두었다. 득표율이 높은 제 1당이 과반수 득표 이하일 경우 1/2을 차지하고, 과반수를 넘으면 2/3를 차지하게 되는 제 1당 중심의 이상한 비례대표제였다.

민정이양 과정은 해프닝의 연속이었다. 박정희와 김종필 등이 군복을 벗고 출마하겠다고 공언했는데도, 국방장관과 군 일부 세력이 프랑스의 드골 장군처럼 깨끗하게 처신하라고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그때까지만 해도 완전히 군을 장악하지는 못했고, 군 내부에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1963년 2월 18일 박정희는 민정 참여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 박병권 국방부장관과 3군참모총장 등이 배석한 가운데 군 중립화가 선언되었다. 27일에는 정치인들이 국방부장관, 3군참모총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박정희가 2.18 수습방안을 수락한다는 엄숙한 선서를 하였다. 정말로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 같은 감격적인 분위기였

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특수부대 군인들이 3월 15일 시위를 벌이면서 군정 연장을 요구했다. 박정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날 군정을 4년간 연장하는 문제를 국민투표에 붙이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곧 버거 주한 미국대사가 박정희를 만났고, 얼마 후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4월 8일 박정희는 3.16성명을 보류한다고 발표했다. 군 중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박정희가 나와서는 안된다는 여론에 저항하다 보니까 이러한 사태가 일어난 것이었다. 5월 27일 공화당 전당대회에서는 박정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예상한 대로 야당이 분열되어 여러 정당이 생겨나서 각각 대통령 후보를 추대하자, 7월에 민정당, 신정당, 민우당 등의 영수들이 회합하여 하나의 당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9월에 국민의당이 탄생했으나 윤보선이 승복하지 않아 대통령 후보로 국민의당에서 허정, 민정당에서 윤보선이 나왔다. 자유민주당은 내각수반이었던 송요찬을 지명했는데, 며칠 후 구속되고 말았다.

 

8월 15일 정부는 대통령 선거는 10월 15일에, 국회의원 선거는 11월 26일에 치른다고 발표했다.

대통령 선거전은, 박정희 후보가 9월 23일 중앙방송국을 통해 "이 번 선거는 민족적 이념의 자유민주주의와 가식의 자유민주주의와의 대결"이라고 말한 것에 대한 윤보선 후보의 격렬한 응수로부터 '사상논쟁'으로 비화했다.

24일 윤 후보는 이 번 선거는 민주주의와 가장된 민주주의와의 대결이라고 응수한 뒤, 여수반란사건의 관계자가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박 후보를 친일파로 공격하기에는 윤 후보도 한국민주당 관계자였으므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윤 후보는 계속 박 후보를 '이질적' 사상의 소유자로 몰아 붙였다. 그렇지만 색깔공격은 잔존한 좌익이나 혁신계, 피학살자 가족 등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박 후보를 찍게 했다.

 

10.15 대통령 선거는 허정 후보와 옥중의 송요찬 후보가 사퇴해 박 후보와 윤 후보의 양자대결이 되었다. 선거 결과 박정희 후보가 윤보선 후보를 불과 15만여 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역사상 가장 근소한 차이로 당선이 결정된 것이다. 박정희는 경상도와 전라도 등에서 많은 표를 얻었고, 윤보선은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에서 많은 표를 얻어 표의 남북 현상을 보여 주었다. 대체로 해방 직후 좌익세가 강했던 지역에서 박정희 표가 많이 나왔다. 근소한 차이로 패배한 윤보선은 자신을 정신적 대통령이라고 주장했다.

11월 26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무소속 출마금지로 인한 야당 난립으로 공화당이 무난히 다수 의석을 확보했다. 12월 16일 최고회의가 해산되고 다음 날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61년 5월 16일0시 15분경 박정희 소장 일행이 지휘소로 정한 서울 제 6관구 사령부에 도착하면서 쿠데타는 시작되었다.얼마 후 해병대가 김포가도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서울로 전진해왔다.제 6군단 포병대 및 공수특전단도 출동했다.해병 제 2중대는 한강대교에서 헌병 제 7중대와 부닥쳐 교전 끝에 저지선을 뚫었다.새벽 3시 40분경 제 6군단 포병대가 삼각지 육군본부에 진입했고,4시 넘어 해병대와 공수단이 시내에 진입했다.반란군 병력은 자료에 따라 차이는 있는데 3,600명쯤 되었다.

시내에 들어온 공수단 1개 소대는 방송국(KBS 라디오)으로 달렸고,해병대는 치안국과 시청으로,해병 1개 수색소대는 중앙전신국으로 달려갔다.5시경 중앙방송국에서 쿠데타 제 1성이 나왔다.이날 상오 "혁명정권인 군사혁명위원회는 공공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서기 1961년 5월 16일 9시 현재로 대한민국 전역에 걸쳐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라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 육군중장 장도영의 명의의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쿠데타가 성공한 데에는 우연한 요소나 운도 따랐다.쿠데타를 진압하는데 가장 중요한 지위에 있었던 장면 총리는 미국을 지나치게 믿어서인지국방부장관에 군을 잘모르는 민간인을 임명했다.결정적인 실수는 매구르더 유엔군사령관 추천으로 이기붕의 양아들이라고 비난받았던 장도영을 육군참모총장에 앉힌 것이었다.쿠데타 정보를 들은 장면은 두 번이나 장도영에게 확인했지만 장도영은 걱정 말라는 말만 했다.장도영은 양다리를 걸쳤다.쿠데타가 일어나자 장총리는 사태를 수습하지 않고 수녀원으로 도피하여 나타나지 않았다.또한 장면과 사이가 나쁜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가 일어나자 "올 것이 왔다."고 하면서 진압을 회피한 것도 성공의 중요 원인이었다.

 

쿠데타 성공의 관건은 군사작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미8군사령관의 향배에 달려 있었다.매그루더 장군과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는 쿠데타 진압의 필요성을 인정했으나 적극적이었다고 보기 어렵다.특히 미국 케네디 정부는 쿠데타를 진압하려는 의사가 없었다.

 

5월 18일 군사혁명위원회는 군사혁명위원 30명과 고문 2명의 명단을 발표했다.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은 장도영이 맡았고, 혁명위원은 박정희와 연합참모본부총장,해.공군 참모총장,해병대사령관과 장성 및 영관급으로 구성되었다.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9일 명칭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고 20일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장도영이 내각수반과 국방부장관을 겸임한 것을 비롯해 내각은 모두 군인으로 임명되었다.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장,각 도지사,시장,군수,읍장,면장 등 중요 직책이나 장 자리는 대부분 군인이 차지했다.고려 무신란 이후 처음으로 군인세상이 왔다.박정희는 44세였지만,장도영 38세,김종필 35세,차지철 27세 등 쿠데타 주역은 30대였다.30대 군인들의 세상이었다.

 

22일 최고회의는 모든 정당.사회단체를 23일을 기해 해체한다고 발표했다.6월 6일 국가비상조치법이 공포되었다.이 법의 제1장 총칙은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군사혁명 과업 완수 후에 시행될 총선거에 의하여 국회가 구성되고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대한민국의 최고 통치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라고 규정했다.윤보선은 대통령이었지만 그야말로 명목 뿐이었고,헌법과 헌법기관이 정지되는 등 트수체제로 들어가게 되었음이 명백했다.이 날짜로 장도영은 국방부장관 및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되었다.그가 허세임이 드러났다.

 

7월 3일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부의장 이주일)이 되었고,내각수반에는 송요찬이 임명되었다. 7월 9일 중앙정보부 차장 서정순 중령은 7월 3일부터 장도영 중장 등 장교 44명을 구속하여 수사한다고 발표했다.권력투쟁에 패배한 장도영은 반혁명분자로 규정되었다.

 

쿠데타의 실세 김종필은 쿠데타가 성공하자마자 중앙정보부를 조직했다.중앙정보부는 최고회의 직속기관이었지만 최고회의보다 더 힘이 센 곳이라는 평을 들었다.

 

중앙정보부는 정보.사찰 기능 뿐만 아니라 수사 기능도 가지고 있었고,국외정보 뿐만 아니라 국내정보 수집도 맡고 있어 미국의 CIA와 FBI를 합쳐 놓은 것 같았다.또한 중앙정보부는 여야 정치인,고급공무원,각계 중요 인물,학생운동 리더 등을 감시하거나 회의,협박하는 활동도 하여 무소불위의 힘을 가졌다.물론 사상범이나 요시찰자들은 석방 후에도 계속 감시했다.

 

박정희 정치는 정보정치였고,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정권 18년을 지킨 수호신으로,역대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 다음의 권력을 보유하였다.군부정권은 반공법을 제정하고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으며,경찰 정보부서를 강화해 중앙정보부 지휘 아래 국민을 물샐틈없이 감시했다.군인들은 혁명공약의 첫 번째로 반공태세의 재정비 강화를 내세웠는데,극우반공 체제는 박정권에 와서 완성되었다.

 

극우반공 체제는 '혁명재판'을 통해서도 강화되었다.군부정권은 쿠데타를 합리화하고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6월 21일 혁명재판소 및 혁명검찰부조직법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공포했다.혁명재판소에서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위반사건,부정축재처리법 위반사건,특수반국가행위에 관한 사건,쿠데타에 대해 정보를 누설했거나 방해한 반혁명적 행위사건,전(前)정부 국무위원,국회의원 독직사건 등을 다루었다.

 

부정선거 원흉의 처단과 특수반국가행위에 관한 사건 처리는 쿠데타 권력의 반동적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는데 의미가 있다.특수반국가행위사건 관련자들은 6월 22일 공포된 특별소급법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처벌받았는데,혁신계 정당.사회단체 관계자,교원노조 관계자,피학살자 유족회 관계자,학생운동 리더들이 주요 대상이었다.이들 가운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었던 장건상과 김성숙 등을 포함해 통일운동 관계자가 많았다.특수반국가행위사건 관련자들은 부정선거 관련자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재판을 받았고,부정선거 관련자들이 장기형을 선고받았어도 대부분 1962,1963년에 석방된 것에 비해 이들은 상당수가 1968년에 가서야 석방되었다.

 

쿠데타 주도 세력은 혁신계를 철저하게 탄압하였다.쿠데타가 발생하자마자 혁신계는 대거 검거되었고,석방이 되었어도 계속 감시를 받았다.또한 거창피학살자 유족회 등 한국전쟁 때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수많은 피학살자 유족회 관계자들이 검거되고 구속한데 이어 피학살자 묘지가 파헤쳐졌고,비석은 땅속에 묻혔다.제2의 학살이라고 말해지는 비인간적인 행위가 저질러진 것이다.

 

부정축재자 처리는 장면 정권 시기 못지않게 우여곡절을 겪었다.군부정권에는 영남과 함경도 출신의 실력자가 많았는데,부정축재처리위원회 관계자가 설경동과 이양구 등의 함경도계 재벌을 봐주었다고 하여 구속되었다.두 계열의 권력싸움에서 영남계가 승리한 것이었다.그 뒤 경제게는 영남재벌이 주류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1961년 10월 26일에는 부정축재처리법 중 개정 법률이 공포되었다.그라하여 부정축재 기업인이 공장을 건설해 그 주식을 납부함으로써, 부정축재 금액을 대신할 수 있게끔 조치해주었다.이제 부정축재 기업인들은 정부의 보증 등으로 외자를 도입하여 공장을 건설해서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군부정권은 쿠데타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장면 정권을 몰아 세웠다.1961년 7월 4일 장면 정부의 '용공정책'의 진상이 최고회의를 통해 발표되었다.7월13일에는 장면 등 19명이 업무상 횡령 및 장물취득권으로 검찰에 기소되었다.1962년 6월에는 소위 구(舊)민주당,이주당(二主黨)계 반혁명사건으로 장면이 구속되었다.

 

장도영 등 반혁명사건은 권력의 비정한 속성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쿠데타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을 맡았던 장도영을 비롯하여 쿠데타 당시 공수특전단을 지휘한 박치옥 대령,제6군단 포병부대를 이끈 문재준 대령,해군 소장으로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을 지낸 김동하,최고위원과 건설부장관을 지낸 제2군 사령관 박인항,혁명검찰부장 박창암 등 쿠데타 주역들이 반혁명사건과 쿠데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제거되었다.

 

쿠데타 권력은 파쇼 권력답게 이른바 사회정화작업이라는 것을 폈다.쿠데타 직후인 5월 21일 군사정권은 깡패 등을 잡아들여 "나는 깡패입니다.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피켓을 목에 걸고 시민들이 보는 가운데 시가행진을 시켰다.5월 22일 범국민운동방침을 발표하고,6월 10일부터 국가재건을 위한 자립경제를 구축하고 악습과 부패를 정화한다는 명목으로 재건국민운동을 전개했다.

전국 행정 단위마다 재건국민운동촉진회가 설치되어 생활개선사업으로 재건복 입기,재건체조 보급,국민가요,저축운동 등이 추진되었다.그러나 이러한 재건국민운동은 일제말기의 군국주의 일본의 전시동원 국민운동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이 때문에 한 신문은 재건체조는 일제말기의 라디오(보건)체조를,신생활복은 국민복을,국민가요는 말 그대로 일제말기의 국민가요를 연상시킨다고 비판했다.5월 23일에는 정기간행물 1,200여 종을 폐간시키는 등 언론기관을 대대적으로 축소시켰다.또한 6월 1일 대학생 제복 착용과 고교생 삭발을 지시했는데,이것도 일제말기를 연상시켰다.

 

6월 9일 최고회의는 농어촌고리채정리법을 공포했다.고리채에 허덕이는 농민을 구제한다는 취지는 좋았으나 고리채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농촌의 현실을 외면한 채 형식적으로 처리해 결국 임기응변적으로 끝나고 말았다.1962년 6월 9일에는 한화를 1/10 비율로 원화로 바꾸게 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음성자금을 장기저축으로 유도하려는 것이었는데,물가만 앙등시켰을 뿐 별 성과가 없었다.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은 실패의 연속이었다.특히 민주공화당의 정치자금을 만드는 과정에서 터진 '4대 의혹사건'은 군사정권의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혔다.그렇지 않아도 가진 것 없던 군인들이 쿠데타 이후 특권 생활을 하는 것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서민들은 신악(新惡)이 구악보다 더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서중석 지음,역사문제연구소 기획.<한국 현대사> 웅진 지식하우스 발행.

***이 글은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진보적 성향의 서중석 교수의 위 저서에서 제 5장<근대화와 정보.철권정치 18년> 1항의 <군인들의 세상>전문을 인용했음을 밝힌다.

 

[기타] 블로그 집필 - http://blog.naver.com/adcsk.do class='lime' target=_blank>admountain

 

 

2. 질문자님, 제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글을 의 오픈백과사전에 올린 글을 먼저 소개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박정희(朴正熙)를 다시 생각하며
adcsk
2008.04.12 19:55
 
조회
328

  조선(朝鮮)의 망국과 함께 일본의 식민지로 거의 반세기를 보낸 우리 민족의 현대사에서 박정희처럼 선이 뚜렷한 인물이 없다. 지금은 서구 각국은 기독교가 하나의 문화양식으로만 존재하는데, 전국의 교회가 번성하는 것을 보면서 중국보다도 주자학에 몰두하여 근대사의 그 험한 물결을 알아 채리지 못해 나라를 빼앗겼던 그 때를 연상하게 한다.

   사실 19세기 서구의 침탈 아래 극동 3국(조선.중국.일본)의 당면한 과제는 어떻게 서구의 근대 기술을 받아들여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와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그리고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는 다 당면한 과제를 풀고자 열망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세 나라 모두 개혁을 이루려 하였지만 중국은 서구의 기술에만 관심을 갖고 정신적 개혁을 이루지 못해 몰락하고,조선은 그나마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가장 먼저 서양의 기술과 정신을 접목시켜 성공한 일본에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조선은 일본에 의해 교육제도.농업정책.철도 등 모든 것을 정립해 나가는 부속지로 되어 근 40년을 보냈다. 더우기 일본의 조선지배는 근대적인 산업기술만 이식한 것이 아니라 교육.행정.사법 등 모든 제도와 관습마저 일본화하여 그 정신과 체제가 해방된지 이제 63 년이 되었어도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60년간 남한과 북한이 추진했던 근대화의 과정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비교해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비록 북한은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사실 일본의 메이지 시대의 천황제보다 더 강화된 수령제로 60년 세습정권으로 변형된 사회주의 독재국가로 완성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북한의 이런 독재 체제는 북한 국민들이 일제의 식민지 체계에서 해방되고 바로 독재 체제로 바뀌어 왔기 때문에 식민지 시기의 경험 외에 다른 비교가 없어 북의 독재는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는 미국에 의해 정부수립이 되고 한국전쟁이라는 최악의 경험과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도 정권의 교체가 평화적으로 두 번이나 있었고, 4.19혁명이라는 민주주의의 실험도 있고, 5.16의 군사정변과 12.12의 악순환도 겪어 이제는 국민들이 무엇이 나은 것인가에 절대성 보다는 상대적으로 받아 드릴 수 있도록 성숙되었다.

   여기서 왜, 박정희냐 하면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군사정변(쿠데타)으로 정권을 잡아 17 년간 통치하며 세계 최빈국에서 그가 죽을 때 아시아의 용으로 인정받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중진국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지금 한국경제의 틀과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게한 지도자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권유린과 철권통치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말살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어두운 면이 있지만 그 당시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신흥 독립국가 중에 현재 경제적으로나 정치발전 문제에서 이만큼 성공한 나라는 지구상에서 한 나라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 잔재를 말끔히 없앤 북한은 지금 더 심한 독재와 가난의 질곡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박정희 시대에서 인권이 어느 정도 유린이 되고 민주주의도 많은 부분에서 유보되었지만 남한은 정당정치가 외형적으로나마 운영되고, 언론도 통제를 받았지만 북한의 체제에 비하면 앞서고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에 있었던 친일청산의 미흡한 점은 그 보다 먼저 경제건설과 국가경영의 틀을 짜는 것이 선결과제였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러한 박정희를 비판하고 인격적으로 모독할 것이 아니라 중국이 마우쩌둥(毛

澤東)을 중심으로 그의 잘한 면과 못한 면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배워야할 것이다. 지난 과거사를 정리한다고 어두운 면만 밝히지 말고 이제는 세계로 나가 우리도 열강이 되는 길의 표지석으로 삼고 더욱 분발해야 할 것이다.

   거리의 벚꽃을 사쿠라로 부르는 시대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역사는 다시 도도히 흐르고 지난 100 년 전에 고공(高宗)의 묘호(廟號)마저 일본인 관리가 추존하고, 아관파천까지하며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되고 황제가 된 한심한 역사는 되풀이 되서는 안된다. 그리고 일본에 의해 민비(명성황후라는 말 자체가 쑥스럽다)시해를 당하고도 저항도 못하고 지낸 무능한 지도자가 다시는 나와서는 안될 것이다. 박정희는 박정희 대통령으로 우리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뿐 입니다. 누구는 욕하고 저주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28506507&qb=67CV7KCV7Z2s&enc=utf8&section=kin.qna&rank=5&search_sort=0&spq=1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박정희가 주도한 경제개발 5개년이라는게 있습니다. 근데 그 게획의 초안이 장면정부때 이미 잡혀있었

 

는데요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대통령이 된뒤 이를 시행했습니다.(물론 다 똑같진 않았어요)

 

박정희 정권동안 우리나라는 산업화가 크게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한지역에 지나치게 편향적으로 공업

 

시설을 짓고 특혜를 주어 호남을 비롯한 다른지역에 엄청난 박탈감을 주었고 이것이 지금의 지역갈등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산업화의 일면에는 노동자들의 처참한 실태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유명한 전태일열사 아시죠 전열사

 

를 비롯한 하층민들이 얼마나 최악의 여건에서 혹사당할수 밖에 없었을까요? 정작 박정희는 카메라에다

 

대고 화장실에서 돌장난이나 치고 있을때 산업화의 진짜 주역들은 박봉에 풀타임 논스톱노동에 시달렸

 

습니다. 우리나라 산업화에 밝은면만 보지 마시길

 

또한 지금에 와서야 진실이 밝혀진 여러 공산당누명사건으로 볼수 있듯이 법치도 땅바닥까지 내려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한입협정때 꿀꺽한 보상금은 위안부할머니들에게 갔어

 

야 할 돈이지 박정희의 개인돈이 아니었습니다. 실미도 사건은요 힘없는 국민들을 실컷 이용만 해버리

 

고 나중엔 죽여버릴 생각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김대중대통령이 박정희부하들에게 살해당할뻔한거야 유

 

명하니까 설명 안하겠습니다.

 

이외에도 재판한번 못받아보고 처형당한 사람들이 셀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요 이근안

 

같은 악질고문가는 나 그래도 어렵게 산다고 되려 뻔뻔하게 큰소리 치고 있습니다. 박정희의 자식들은요

 

아직도 박정희가 만든 거대재단으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습니다 질문자님 할아버지,아버지들의 피눈물로

 

말입니다  이상 마칩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대체로 님이 말씀하신 대로 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 직업은 군인입니다.

 

우리나라의 군인이기 한참 전에는 일제 시대의 일본의 군인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것도 징병제로 끌려간 사람이 아니라 일본 군인의 장교로 있었던 사람이죠. 그래서 친일파중에서

 

하나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는데 그 때가 1961년 5월 16일입니다.

 

5.16사태라고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거의 윤보선 대통령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격이죠.

 

정권을 잡아가면서 자신만의 유리한 헌법을 만들었어요 그게 바로 유신 헌법이란 거죠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참히 죽이거나 고문을 가했고 유신 헌법을 이용해서 자신이 대통령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 때 당시의 정치적 경쟁자는 고 김대중 대통령이였죠. 자신의 경쟁자라고 해서

 

무참히 압박을 가했슴죠, 요즈음에 들어서 억울하게 죽은 시민들에 대해서 정부를 대상으로 한 재판이

 

많이 벌어졌다는 걸 뉴스로 보셨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박정희 대통령 때 얼마나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쉬운체로 죽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반증해 주는 사례입니다.

 

하지만 항상 나쁜 일만 해왔던 대통령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대통령입

 

그 중에서 하나가 새마을 운동인데요 이를 바탕으로 통일쌀(즉 개량종)이 널리 퍼지게 되었어요

 

그로 인해서 식량의 문제는 해결되고 있었고, 공업쪽에서는 경남 지역(포항 같은 지역)에서 거대한 중화학

 

공업지구가 있죠? 그 지역은 박정희 대통령 때 급속도로 발전한 지대라고 할 수 있어요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선박의 수출의 1위를 누릴 수 있는거 철강 산업의 최상위 등위를 차지할 수 있는거 등등은

 

바로 경남지역의 발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뭐 대략 이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박통..... 잘하신 점: 경제 부흥.... 그리고 현재 개도국에서 각광받는 경제발전 모델을 만들어 낸것.
못하신점:일본에게 돈빌리면서 역사문제를 슬쩍 묻은것 혹시 와우아파트 아시나요? 그것도 잘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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