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주요관점1
①실학: 조선후기에 백성들이 잘살고 나라가 튼튼해지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②사실을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의 학문이다.
③사람들이 실제 생활에 활용할 수있는 학문이다.
④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학문이다.
실학자 주요주장과이론
1. 농업 연구
유형원: 토지 제도를 바로잡아 농사를 짓는 사람만이 토지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반계수록 지음.
정약용(실학의 아버지): 실학 연구를 집대성하고, 관리들은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 목민심서, 경세유표, 여유당전서 지음.
2. 상공업 연구
박지원: 상업기술을 익히고, 화폐를 사용할 것을 주장. 열하일기 지음.
박제가: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중국의 새로운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북학의 지음.
3. 과학 기술 연구
홍대용: 지동설을 주장하는 등 서양의 근대적인 천문학에 관심을 가짐. 의산문답 지음.
정약용: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만들어 성을 쌓는 기간과 경비를 크게 절감함.
4. 지리, 역사, 국어 연구
김정호: 대동여지도: 산맥, 하천, 도로망 등이 자세히 표시
이중환: 우리나라의 지리적 환경과 각 지역의 경제, 생활, 풍속을 자세히 조사하여 택지리를 지음.
유득공: 발해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다룸. 발해고 지음.
유희: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 언문지 지음.
유득공(柳得恭)
1748년~1807년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학자, 시인이며, 사상가이자 역사학자이다. 조선 정조때의 실학자이다.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 제천, 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풍천부사에 이르렀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를 겸임하여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서얼출신 학자로 실학사상가이면서 역사가로, 발해고의 저자였다. 발해사를 한국사로 인식하기 시작한 학자이기도 하다.
업적
한국사연구
국사의 독자적인 발전과 체계화를 위해 역사연구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단군조선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이 세운 21개 국가의 도읍지를 답사하여 역대 국가들의 도읍지돌의 전도(奠都) 및 번영을 읊은 43편의 회고시로서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민족의 주체의식을 되새겨보려는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해사 연구
그는 최초로 발해사에 관심을 갖고, 발해사가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그는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자로 봤고,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이를 조선 역사의 체계 안에 포함시켜야 함을 주장했다. 또한 기존의 통일신라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로 규정했다.
주요저서
《경도잡지(京都雜誌)》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영재집》
《앙엽기(盎葉記)》
화이관 [華夷觀]이란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말합니다
박지원(朴趾源, 1737년 ~ 1805년 음력 2월 5일)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이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 계열로,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다.
박제가(朴齊家, 1750년~1805년/1815년)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 자는 재선(在先), 차수(次修),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否), 위항도인(葦杭道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 수용과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이덕무(李德懋, 1741년 ~ 1793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 북학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무관(懋官)이며 호는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이다.
홍대용(洪大容, 1731년 ~ 1783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과학 사상가이다.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과 홍지(弘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등과 우정을 쌓았으며, 학풍은 유학보다도 군국과 경제장려에 치중하였다.
유득공(柳得恭, 1748년 음력 11월 5일(양력 1749년 1월 3일)~1807년 음력 9월 1일(양력 10월 1일)은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이다. 본관은 문화[1], 자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영암(泠菴), 가상루(歌商樓), 고운거사 (古芸居士), 고운당(古芸堂), 은휘당(恩暉堂)이다.
이익
본관 우봉(牛峰). 자 계우(季羽). 호 농재(農齋). 시호 문정(文貞). 1652년(효종 3) 진사에 합격, 1657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세자시강원에 들어가 설서(說書)를 거쳐 사서(司書)가 되었다. 1659년 정언(正言), 1660년(현종 1) 사간이 되어 송시열(宋時烈)을 무고하는 유세철(柳世哲) 등을 탄핵하였다. 그 후 승정원동부승지 ·대사간 ·이조참의 ·원양도(原襄道)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홍문관부수찬 때 송시열이 귀양가게 되자 양덕(陽德)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일명 경신환국)으로 풀려나 동부승지로 복관, 대사헌 ·홍문관부제학 ·경상도관찰사 ·형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로 있을 때 서인이 노론(老論) ·소론(少論)으로 분열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 ·경기도관찰사 등을 거쳐 1688년(숙종 14)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이듬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장흥부(長興府)에 귀양가 죽었다. 청렴강직하고 문장에 능하여 《수교집록(受敎輯錄)》을 편찬하였다.
이익의사상
나라가발전하지않는이유로
1.노비제도
2.과거제도
3.양반제도
4.미신
5.승려
6.나태
특히 봉건적 계급 관계의 표현인..
반상(班常) 차별, 문벌, 적서(嫡庶) 차별, 노비 제도를 철저히 비판하고..
이를 개혁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개혁 사상은이후의 실학자들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게 됩니다.
후에 성호학파는 천주교 문제를 놓고.공서파(功西派)와 신서파(信西派)로 나누어져 각각 발전하는 계기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