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유물, 유적을 알려주세요

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유물, 유적을 알려주세요

작성일 2011.10.05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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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만 발견되는 유물, 유적을 알려주세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요

 

꼭 우리나라에서만 아니라더라도   아시아에서 우리나라만 발견된다거나 그런거요.

아니면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로 발견되었다.

이런거요!!

 

10개 정도 부탁드립니다^^



profile_image 익명 작성일 -

신석기시대의 유물로는 아래 올린 바리라는 토기입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것이 있기 때문에 꼭 우리나라에서만 출토된 것은 아닙니다.

 

<출처>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media_id=291374&docid=727347&dir_id=10020202

 

함경북도 경성군 원주대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바리(오목주발과 같으나 아가리가 조금 좁고 중배가 나온 토기 밧그릇) 입니다.

 

고인돌은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으로, 선사시대 돌무덤의 하나인데 일본에서는 지석묘, 중국에서는 석붕,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으로 불립니다.

 

<출처>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media_id=55170&docid=14363&dir_id=10020202

 

질문자님, 이 사진은 휴네베덴이라고 부르는 선사시대의 돌무덤으로 네덜란드의 엠멘에 있는 유물인데, 우리나라 고인돌과 비슷한 돌멘(dolmen)인데 좀 다르지요?

 

땅속이나 위에 주검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얹는 방식의 무덤 또는 제단의 일종이라고 봅니다.

북유럽과 지중해 연안 및 북아프리카 일대의 신석기시대 묘제로 분포하나, 한국의 고인돌과 직접적인 문화적 관계는 없는 듯하다고 합니다.

중국 랴오닝성과 산둥반도 및 일본 규슈에도 분포하나, 한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미미합니다.

 

 

<출처> http://100.naver.com/100.nhn?type=image&media_id=71013&docid=14363&dir_id=10020202

 

질문자님, 그런데 '온돌'은 우리나에만 있는 것입니다.

 

 

한국사에서 20세기는 대단한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한국인들이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생활방식을 거의 버리고 서양식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집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한국인들은 예부터 한반도에 거주해 오면서 한번도 한국식 집을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옥에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대부분 아파트와 같은 서양식 집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격변 속에서도 한국인들이 고집하는 오래된 관습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보게 될 온돌, 혹은 구들은 대표적인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과거의 좋은 관습 가운데 현대 문화를 사는 데에 거추장스러운 것이 있으면 가차 없이 버렸습니다. 한복을 버린 게 그런 예에 속합니다. 그러나 온돌은 어느 누구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아무리 초현대적인 아파트를 지어도 온돌에서 살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또 아무리 서양식 주거 형태를 좋아해도 신발을 신은 채로 생활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산 외암리마을의 한옥 굴뚝. 한옥은 굴뚝을 지상에 만드는데 그 모습이 정겹다.

 

 

온돌, 구운 돌로 바닥을 데운다

전통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한국인들이 온돌은 왜 버리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온돌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온돌은 순수 우리말로 ‘구들’이라고 합니다. 구들은 ‘구운 돌’의 약자입니다. 그러니까 온돌은 구운 돌로 바닥을 데우는 온방법을 말합니다. 바닥을 데우는 게 왜 좋은 온방법일까요? 사람은 손발을 따뜻하게 하고 머리를 차갑게 하는 게 건강에 좋습니다. 온돌은 바로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온방법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집에서 신발 벗고 사는 것을 극히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신발을 벗는 게 건강에 좋다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발은 하루 종일 신발 안에서 옥죄여 있어서 집에 오면 풀어주는 게 좋습니다. 한국인들이 집에서 신발을 벗을 수 있는 것은 바닥이 따뜻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아울러 온돌이 대단히 경제적인 온방법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서양의 벽난로는 전 열량 가운데 약 5분의 1만 방 안으로 전달된다고 하니 아주 비경제적입니다. 이에 비해 온돌은 열량을 구들에 저축해 오랫동안 열을 뿜어내게 할 수 있습니다. 구들만 잘 깔면 열이 며칠을 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게다가 벽난로는 연기가 방안으로 들어와 방안의 공기를 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돌은 그럴 염려가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온돌은 방을 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밥 같은 음식을 조리하는 것도 가능하게 하는 등 요리와 온방을 동시에 하니 일석이조입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과학적인 난방법

그럼 온돌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이렇게 훌륭한 온방법이라고 하는 걸까요? 원래 온돌은 방 전체를 데우는 온방법이 아니라 부분만 데우는 ‘쪽구들식 온방법’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구들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보이지요. 그러다 고려 중기가 되어서야 방 전체를 데우는 방식이 나옵니다. 이 온방법이 한반도 전역에 퍼지게 된 것은 조선 초기, 그러니까 15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온돌은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거쳐 발달해왔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나름대로 과학적이고 복잡한 구조를 갖게 됩니다.

 

온돌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뜨거운 연기가 지나는 (구들)고래입니다. 구들은 이 고래 위에 놓는 것이지요. 불과 뜨거운 연기는 아궁이에서 ‘부넹기’라는 구멍을 통해 고래 쪽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부넹기는 부넘기 혹은 불목이라고도 하는데, 불이 넘어가는 고개 혹은 목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이 구멍은 작기 때문에 열기가 바깥으로 새지 않고 고래로 잘 빨려 들어가게 해줍니다. 열기가 그 다음에 도달하는 곳은 ‘구들개자리’입니다. 이곳에서 열기는 속도가 늦추어지고 고래로 균등하게 공급됩니다. 이 고래에서 구들이 데워지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이 고래 전체에 골고루 가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고래와 구들장을 제대로 놓아야 하는데 온돌을 만들 때에는 이 기술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아랫목에는 두꺼운 돌을 놓고 윗목에는 그보다 얇은 돌을 놓습니다. 윗목은 아무래도 열이 덜 가기 때문에 빨리 달구려면 돌이 얇아야 합니다.

 

  • 1 온돌은 그냥 구들만 까는 것이 아니라 그림과 같이 꽤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 2 초기철기시대 완벽한 온돌시설.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 율문리에서 발굴되었다.

 

 

온돌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과학적 장치

고래에서 뜨거운 열기가 굴뚝으로 빨리 빠져 나가면 열의 손실이 심하겠죠? 그래서 고래가 끝나는 부분에 ‘고래개자리’를 만듭니다. 여러 개의 고래를 통과한 뜨거운 공기가 여기서 다시 모아집니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숨을 고른 다음 열기는 이곳에 남게 하고 연기만 굴뚝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고래개자리입니다. 마지막까지 열기를 잡아 방을 더 데울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온돌이 효율적이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고래개자리를 떠난 연기는 굴뚝으로 갑니다. 연기는 이 굴뚝으로 나가기 전에 그 밑에 있는 ‘굴뚝개자리’를 만납니다. 이것은 찬 공기나 빗물이 굴뚝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 온돌에는 개자리만 3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들개자리, 고래개자리, 굴뚝개자리가 그것이지요. 이것들은 모두 온돌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과학적인 생각 끝에 만들어낸 장치입니다.

 

구들은 한민족이 수천 년을 두고 발전시켜온 방법이라 그 양식이 매우 다양하다.

 

 

구들을 잘 깐 다음에는 그 위에 연기가 위로 새지 않게 황토 진흙을 바릅니다. 황토는 인체에 아주 좋은 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전에는 배탈이 나면 황토를 물에 타서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황토는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도 막아줍니다. 이렇게 진흙을 두 번 정도 바른 뒤 잘 고른 다음에 불을 지펴서 말립니다. 그리고 이 위에 사람이 생활할 수 있게 종이나 장판을 까는 것이지요. 사실 고래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원리는 다 같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온돌에는 이러한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온돌은 일단 구들이 데워지면 열기가 오래 가지만 구들을 데우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런가 하면 구들을 잘못 깔면 아랫목만 뜨겁고 윗목은 차가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웃풍’이 세져 춥게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무의 과소비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전력 에너지가 발달한 요즘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본 등이 변형한 온돌 난방을 역수입하고 있는 현실

실제로 구들을 놓는 모습이다. 온돌의 성패는 이 구들 놓는 기술에 달려 있다.


온돌이 좋다는 것은 이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온돌 난방법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말로는 좋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파트에서 항용하는 바닥 난방법은 정확히 말하면 온돌 난방법은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한 바닥 난방으로 구들을 놓고 열을 저장해서 오랫동안 열기를 뿜어내는 온돌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온돌 난방법에 대해 말로만 좋다고 했지 그다지 발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온돌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이나 서구에서는 온돌의 효용성을 눈치 채고 온돌에 기반을 둔 새로운 난방법을 개발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이런 새 기술을 역수입해서 쓰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앞으로 온돌 혹은 구들의 종주국답게 우리의 온방법인 온돌을 현대에 맞게 발전시키는 일에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840

 

 

질문자님, 고려시대의 팔만대장경입니다.

 

국보 제 32호, 해인사 팔만대장경판. ‘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으로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대장경이란?

대장경은 불교 경전의 일부를 일컫기도 하나, 대개 경전의 모두를 포괄하는 전체 집합의 용어로 ‘성스러운 불교 경전들을 모두 담은 3개의 큰 광주리나 큰 그릇’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삼장(三藏)이나 중경(衆經), 일체경(一切經), 대장(大藏) 등으로 표기하기도 하였다. 삼장은 산스크리트어 ‘3개의 광주리’의 한역(漢譯)으로,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을 아우른다. 경장은 부처님의 설법 전부를, 율장은 부처님께서 가르친 불제자의 실천규범과 교단의 계율들을, 논장은 경과 율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주석하고 해설한 논술 전체를 담은 그릇들이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이후 인도의 삼장에다가 중국에서 편찬된 문헌들을 포함시켜 대장경이라 표기하였으며, 남북조 이후에는 일체경이라 하였다. 대장경은 원래 중국에서 번역되거나 편찬된 권위 있는 불교 경전의 전체를 지칭하였으나, 불교 경전의 지역적 확산에 따라 인도와 중국 밖에서 편찬된 경전들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경, 율, 논과 더불어 논에 대한 주석서인 소(疏) 등을 비롯하여, 전통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여러 종류의 불교 관계 문헌들을 포함한다. 또한 후대 불교 들의 저술, 불교의 역사서와 전기 및 사전류, 기타 불교학 관련의 주요 저술과 자료를 총괄적으로 포괄한다. 따라서 대장경에 포함되는 불전의 종류와 분량은 시대의 흐름과 지역적 공간의 확산에 비례하여 확대된다고 할 것이다.

 

삼장, 즉 대장경은 산스크리트어 ‘3개의 광주리’의 한역(漢譯)으로, 경장, 율장, 논장을 아우른다.

 

 

불교경전의 편집작업은 부처님의 입적 직후 제자 500 나한들이 마다가왕국 왕사성 교외(현재의 인도 비하르주)에 위치한 칠엽굴(七葉窟)에서 부처님의 교설을 함께 암송하여 집대성하는 첫 회의인 ‘제1차 결집’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4차 결집 때까지 경, 율, 논이 정리되었고 암송 형태로 구전되던 것이 기원전 1세기 중반 경 패엽(貝葉)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기원전 1세기~2세기에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경전은 각각 동남아시아 소승불교(팔리어)와 대승불교(산스크리트어) 권역의 원천 텍스트가 되었다.

 

중국에서는 인도 불교가 전래되면서 서기 2세기부터 8세기까지 산스크리트어 경전의 한역(漢譯)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남북조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석가모니의 설법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분류하는 작업(교상판석)이 지속되었다. 우리의 팔만대장경이 조성되기 이전에 중국에서 번역된 주요 대장경으로는 개보칙판대장경, 무주개원사대장경, 거란대장경 등이 있다.

 

 

팔만대장경 이전의 주요 불교 경판 조성 작업들

고려시대 팔만대장경의 조성 이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개별 경전이나 대장경의 조성사업이 있어왔다. 예컨데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이기도 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126-6호)은 751년(경덕왕 10)경 석가탑이 세워질 때 조성되었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시대 승려 선율(善律)이 조성한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이 동경(東都: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의 승사에 고려 충렬왕 때까지 보관되었다. 한편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리오층석탑에서 발견된 금판(金板) [금강경](국보 제123호)은 조성 시기에 논쟁이 있으나, 백제 때라고도 한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경전 조성 역량은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발전되어 많은 불교 경전들이 지속적으로 출간되었다. 특히 고려시대는 신라시대 때부터 발달해온 목판인쇄술이 가장 고도화되어 발전했던 시기로, 무엇보다 방대한 규모의 불교경판 조성 사업이 진행되었다. 1011년(현종 2)에는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자 초조대장경이 발원되었다. 이 대장경은 고려 최초의 대장경으로 1087년(선종 4)이 되어서야 완성되었으며, 거의 6,000권 규모의 목판으로 당시의 한역(漢譯)된 대장경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이었다. 조성 후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로 옮겨 봉안하였으나, 1232년(고종 19) 몽골 침략으로 초조대장경은 소실되고 말았다. 고려시대 또 하나의 대규모 경전으로는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얼마 후, 대각국사 의천이 초조대장경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교장(敎藏)이다. 이를 위해 1091년(선종 8)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을 설치하고 1102년(숙종 7)경까지 4,700여 권의 경판을 조성하였다.

 

초조대장경의 소실로 팔만대장경 조성사업이 시작되었다. 총 81258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팔만대장경의 조성과 목적

몽골 침략으로 소실된 초조대장경을 대신하여 1236년(고종 23년) 대장경 조성사업이 다시 시작되었다. [고려사] 권24, 고종 38년 9월 무오에는 “국왕이 성의 서문 밖에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에 행차하여 모든 관료들을 거느리고 분향하였다. 현종 때 판본(초조대장경)이 임진년(1232, 고종 19) 몽골 병사에 의해 불타 버렸다. 국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설치하고 16년 만에 공역을 마쳤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팔만대장경의 조성사업이 1236년부터 시작되어 1251년 9월 강화경(江華京: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대장경판당에서 경찬의례의 개최로 일단락되었다고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담당 관청의 설치와 인적, 물적 자원의 확보 와 같은 사전작업, 경판의 취합 및 경찬법회의 개최 등의 마무리 작업과정까지 포함한다면, 조성사업은 거의 16년동안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팔만대장경의 조성목적은 ‘몽골 침략군의 격퇴’(이규보,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 [동국이상국집], 권 25)에 있었지만 이와 더불어 왕실의 안녕, 국태안민(國太安民) 및 풍년, 불법(佛法)의 보급, 극락정토의 왕생 등도 기원하고 있었다. 

 

팔만대장경의 조성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출신성분은 다양하였다. 국왕․왕족과 고위 관료 및 유교들로부터 하급 관료와 향리 및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모든 계층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불교계에서도 다양한 종단이나 소속 사원의 고덕대승과 일반 승려들이 역할을 분담하면서 참여하였다. 각수들의 출신성분은 다음과 같다.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팔만대장경 조성

 

 

역사 속 위험했던 순간들

해인사 대장경판은 지금까지 잘 보관되고 있지만, 일본의 요구로 해인사에 보관되지 못하고 일본으로 보내졌을 뻔하였으며, 또한 화재나 전쟁으로 사라질 위험을 몇 차례 겪었다. 첫 번째 위기는 조선 초기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일본과 유구국 및 쓰시마가 고려 말부터 사신을 보내 팔만대장경을 요구하기 시작하다가 조선 초기에 이르러 각종 토산물을 바치면서 더욱 끈질기게 요구해왔다. 특히 세종 때에는 대장경판의 자체를 요구하기까지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5년(1423) 12월, 6년 정월, 2월, 12월, 7년 4월, 5월 등의 기록에는 일본 사신이 단식까지 하면서 완강하게 팔만대장경판을 요구하자 세종은 대장경판이 우리나라에 오직 한 벌 밖에 없으므로 줄 수 없다고 말하며, 팔만대장경판을 대신하여 범자(梵字)의 밀교대장경판, 주화엄경판 1질, 금자(金字) [화엄경], [호국인왕경], [아미타경], [석가보] 등을 주어 가져가게 하였다. 세종 6년 1월 20일조 기사 등을 보면, 왜통사 윤인보와 그의 아우 윤인시 그리고 그의 집에 있는 왜노 3명이 대장경판을 약탈하려는 사건까지 일어난다.

 

대장경판에 대한 요구가 갈수록 많아지자, 세종은 해인사의 대장경판을 도성 근처로 옮기는 계획까지 세운다. [세종실록] 19년 4월 28일조를 보면, 임금이 승지들에게 “일본국에서 매양 대장경판을 청하니, 우리나라에서 불교를 숭상하지 아니하여, 이 판이 밖에 있기 때문에 억지로 청하면 반드시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지난날에 이 판을 구하기에,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전해 내려온 국보를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고 하였더니 저들이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판을 도성 근방인 회암사나 개경사 같은 곳에 옮겨 두면 저들도 이를 듣고 우리나라의 대대로 전하는 보배라는 뜻을 알고 스스로 청구하지 않겠지만 단지 수송하는 폐단이 염려되니 그것을 정부에서 논의하라.”고 하니, 모두 “수송하는 폐단이 있사오니, 그 감사로 하여금 검찰하여 그 수령이 맡아서 더럽히거나 손상시키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갈릴 때에는 장부에 기록하여 전해서 맡게 함이 마땅하옵니다.”고 하므로 그대로 따랐다.

 

해인사 전경. 수 차례의 전쟁 속에서도 팔만대장경을 지켜내었다.

 

 

두 번째 위기는 임진왜란 때였다. 대장경판과 판전을 포함한 해인사의 건물들은 임진왜란의 전화를 면하였다. 이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임진년 왜란 때에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및 덕유산은 모두 왜적의 전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 소백산 그리고 가야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예부터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해인사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당시 이 지역을 지켰던 승병과 의병의 힘이 절대적으로 컸기 때문이다.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여 보름 만에 경상도 전역의 주요 읍성들을 모두 짓밟았다. 그 과정에서, 왜군은 창원, 창녕, 거창을 지나 4월 27일에는 해인사 코앞인 성주를 점령하였다. 이때 왜군은 북상하며 해인사 고려대장경에 눈독을 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해인사를 왜군의 전화로부터 지켜낸 것은 소암(昭岩,? ~1605)대사가 이끈 해인사 승병과 거창, 합천 일대에서 송암 김면(金沔,1541~1593), 내암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 각각 이끈 의병이다. 이들은 가야산으로 접근하려는 왜군의 진로를 목숨을 걸고 막아 왜군이 이듬해 정월 개령, 선산 쪽으로 철수하게 만들면서 해인사와 대장경도 안전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위기는 조선 후기 해인사에 수 차례 발생한 화재 이다. 숙종 21년(1695)부터 고종 8년(1695~1871)에 걸쳐 해인사에 일곱 차례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 때 해인사에 무슨 건물이 화재를 당하였고, 또 새로 지어졌음에 대하여 1876년 2월 퇴암(退庵) 스님이 찬술한 ‘해인사실화적(海印寺失火蹟)’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695년, 1696년, 1743년(영조 19), 1763년(영조 39), 1780년(정조 4), 1817년(순조 17), 1871년(고종 8)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렇듯 임진왜란 이후 해인사에는 무려 일곱 차례의 큰 불이 났으나, 팔만대장경이 봉안된 장경판전 건물은 아무 피해가 없었다. 이와 같은 화재로 장경판전을 제외한 해인사의 당우들은 모두 1817년 이후에 지어졌다. 특히, 1818년 때의 중건은 1488년(성종 19) 학조(學祖)대사의 해인사 중창 이후 해인사의 중건 역사상 획을 긋는 큰 불사였다.

 

네 번째 위기는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6・25전쟁 때이었다. 고려대장경판은 해인사와 함께 1950년 발생한 6・25전쟁 때 잿더미로 변할 위기를 맞았으나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퇴각로가 차단되었는데, 이때 낙오된 인민군 약 900명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가야산에 숨자 이들 공비를 소탕하는 과정에서 미군 사령부는 1951년 9월 18일 해인사에 공중 폭격을 단행하는 작전을 편다. 하지만, 당시 편대장 김영환(1921~1954) 대령은 팔만대장경의 중요성을 알고 폭격 명령 지점인 해인사 대적광전 앞마당 상공에서 기수를 돌려 선회하면서 편대기들에게 폭격 중지를 명령 내렸다. 김영환 대령은 편대장의 지시 없이는 절대로 폭탄과 로켓탄을 사용하지 말 것,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해인사 밖 능선에 숨은 인민군 진지를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날 저녁 명령 불복종의 경위를 추궁하는 자리에서 김영환 대령은 태평양전쟁 때 미군이 일본 교토를 폭격하지 않은 것은 교토가 일본 문화의 총본산이라 생각한 점을 들며 우리 민족에게 소중한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수백 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잿더미로 만들 수 없었다고 답한다. 이러한 대령의 문화유산에 대한 식견과 의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팔만대장경을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인사 내에 위치한 김영환 대령의 추모비

 

 

팔만대장경의 의의와 가치

팔만대장경에는 불교 경전 내용과 더불어 13세기 중엽의 역사 및 문화를 밝힐 수 있는 간기 및 지·발문과 최소 1,800명 이상의 각수들이 새겨져 있다. 이들 자료는 당대 역사와 불교문화·출판인쇄술·국문학·서지학 등 다양한 학문연구와 고려왕조실록 복원의 원천 텍스트로 그 가치를 가진다. 또한 팔만대장경은 13세기 중엽 잔혹한 몽골침략과 최씨무인의 파행적인 정권운영으로 인해 고려왕조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겪던 시기에 외적 격퇴와 현실모순의 극복을 염원·실천하기 위해 16년 동안 국가 사업으로 조성되었고 국왕과 왕족, 관료, 불교·유교, 일반 백성 등 당대 사회계층 및 불교 종파를 초월한 통합의식을 함축적으로 담은 민족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1995년에는 해인사 장경판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에는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팔만대장경은 동아시아지역의 한역대장경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킨 불교유산이기도 하다. 초조대장경과 국내 사원 전래 경전, 중국 북송 개보판대장경 및 거란대장경 등 13세기 중엽까지 전하던 고려 및 중국 한역대장경의 경전 전체 구성체계와 내용을 총결집시켜 계승하는 동시에, 이를 새롭게 발전시켰다. 이에 이후 동아시아 불교 경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기~20세기 초기 청나라와 일본에서 빈가대장경과 축쇄대장경, 대정신수대장경을 만들 때 팔만대장경은 그 핵심적인 근거 자료로 답변확정되었다. 또한 17세기에는 일본 천태종의 종존(宗存)이 동경 건인사 소장의 팔만대장경을 저본으로 1614년부터 1624년까지 조성하다가 중단된 소위 종존판이라는 목판대장경에도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경판은 개별 경판의 판식과 간기 형식까지도 팔만대장경의 체제를 수용하였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17세기 이후에도 동아시아 한역대장경의 조성과정에서 핵심적인 텍스트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팔만대장경은 13세기 당시까지 전래하던 국내의 초조대장경과 사원 전래본, 북송의 개보칙판대장경, 거란대장경 등을 근거로 경전 내용의 오류와 오탈자 등을 바로잡는 등 교정의 정확성을 기하였다. 그 노력의 산물은 개태사 승통 수기 등이 저술하여 팔만대장경에 새로 편입한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 30권에도 반영되어 있다. 18세기 초기 여러 종류의 한역대장경을 대조 교정한 일본의 학승 인징도 팔만대장경의 내용과 교정을 '모든 나라에서 견줄 만한 짝이 없는 대장경'이라 극찬하였다. 이처럼 팔만대장경은 13세기 중엽 고려 불교계가 동아시아사회에서 가졌던 최고의 불교 교학 역량을 반영하고 있다.

 

현재 팔만대장경은 국보 제 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해인사 장경판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2007년에는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과 제(諸)경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6276

 

 

질문자님, 끝으로 조선시대의 종묘입니다.

여러분들은 사극에서 대신들이 임금 앞에 엎드려서 “전하! 종묘사직이 위태롭사옵니다” 하는 대사를 많이 들으셨을 겁니다. 이때 말하는 종묘사직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들은 궁궐을 세우면 중국의 예를 따라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세웠습니다.

 

가로 총 19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정전의 모습. 동아시아에서 가장 긴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다. <출처: Wikipedia>

 

 

음양의 원리가 적용된 종묘와 사직의 위치

조선도 예외가 아니라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만들었죠. 이 두 곳은 음양, 혹은 남녀의 원리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먼저 종묘는 왕의 선조들을 모시는 곳으로 남성과 하늘, 즉 양적인 원리를 대표합니다. 반면에 사직은 땅과 곡식의 신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니 여성과 땅, 즉 음적인 원리를 대표합니다. 고대인들은 이렇게 음양의 균형을 잘 맞추어야 나라가 잘 다스려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곳이었기에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보다 먼저(1395년) 종묘를 세웁니다.

 

조선의 왕과 왕후는 죽은 뒤 몸은 능에 묻히고 혼은 이곳 종묘에 모셔집니다. 이성계는 우선 이곳에 자신의 4대조를 모셨습니다. 그런데 세종 대에 이르자 이미 7실이 다 채워집니다. 태조, 정종, 태종까지 모셨으니 말입니다. 종묘의 제실은 원래 7개의 방밖에는 둘 수 없기 때문에 세종은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싫었던지 세종은 정전 옆에 영녕전이라는 건물을 하나 더 세워 이성계의 4대 조상 신위들을 옮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종은 자신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게 되는데 그 뒤부터는 방을 하나씩 늘려서 왕의 혼을 모시게 됩니다. 원래의 법도대로 하면 7개 방이 다 차면 다른 건물을 지어야 하는 것인데 그냥 계속 칸을 늘여 간 것이지요.


이렇게 칸을 늘이다 보니 정전은 19칸이 되었고 이곳에는 19명의 왕과 30명의 왕후가 모셔져 있습니다. 왜 왕후가 많으냐고요? 그것은 왕에게 한 명 이상의 중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영녕전에는 15명의 왕과 17명의 왕후,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내외가 모셔져 있습니다. 영녕전에는 대체로 단명했거나, 왕이 될 수 있었지만 되지 못한 이들, 혹은 단종처럼 왕위에서 쫓겨났다 나중에 복위되는 등 왕의 역할을 잘 할 수 없었던 이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서로 다른 정전과 영녕전의 건축양식

정전과 영년전은 종묘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인데 건축양식이 대비되어 재미있습니다. 종묘는 주지하다시피 사당입니다. 사당은 아주 엄숙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 건물이라 할 수 있는 정전은 장엄하면서도 위엄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목적으로 건물을 지을 때 사람들은 기념비적인(monumental) 스케일로 짓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것은 인간적인(humanistic) 스케일이라 하지요. 이 두 규모의 차이는 인간이 그 건축물을 보았을 때 한 번에 알아차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념비적인 건물을 지을 때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같은 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그 건물을 파악할 수 없어 압도당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건물을 볼 때 보통 5층 이상이 되면 단번에 그 층수를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옆으로 갈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옆으로 5칸 정도 이상이 되면 그 칸의 수를 셀 수 없어 곧 압도당하게 됩니다.


정전 뒷벽의 모습. 구획 없이 하나의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종묘의 정전은 어떻습니까? 무려 19칸을 옆으로 갔습니다. 이 정도 되면 사람들은 그 규모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한 반복을 통해 장엄함을 연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에 있는 목조 건물 가운데 이 정전이 가장 긴 건물이라고 하지요? 정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정전에 갔을 때 반드시 가서 보아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우선 정전의 뒷벽을 보아야 합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무 구획도 없이 하나로 처리했습니다. 중간에 벽을 나누는 장치가 없습니다. 이것 역시 장엄함을 보여줍니다. 단순과 반복이 이어졌기 때문이지요. 그것도 가장 비싼 재료 중에 하나인 벽돌로 처리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옆에서 보면 건물이 아주 깊습니다. 쉽게 말해 두껍습니다. 이렇게 두꺼운 건물은 잘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 종묘가 죽은 혼을 모시는 공간이라 혼을 깊숙한 곳에 모시려다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보고 나면 그 다음에는 계단으로 올라가 기둥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장엄한 광경을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사진만 봐도 그 무한반복에 압도당하지 않나요?

 

옆에서 본 종묘 정전 회랑.

 

 

종묘를 동양의 파르테논신전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런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종묘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입니다. 정전이 얼마나 장엄한가를 알고 싶으면 옆에 있는 영녕전과 비교해보면 됩니다. 영녕전은 인간적인 스케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건물은 16칸이니 정전과는 3칸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담하게 보일까요? 그것은 이성계의 4대조를 모신 4칸을 가운데에 놓고 높여서 건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양쪽으로 6칸씩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어떻습니까?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오지요? 그래서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간단한 건축적 장치가 건물 전체를 다르게 보이게 하니 놀랍기만 합니다. 이것은 건물의 뒤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건물의 뒷벽은 한 칸마다 나뉘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엄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종묘에서는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부수적인 설명은 다른 정보원을 통해서 충분히 얻을 수 있습니다만 위에서 말한 것은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나와 있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영녕전의 전경(왼쪽)과 뒷벽 모습(오른쪽).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된 종묘제례

종묘에는 세계유산이 또 하나 있지요? 네, 종묘제례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무형유산 가운데 최초로 유네스코의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이 의례는 원래 일 년에 너덧 번 하던 것인데 지금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만 합니다. 이 의례는 대단히 복잡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전공한 사람들도 헛갈립니다. 그리고 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놓쳐서는 안 되는 것만 말하겠습니다.

 

이 의례가 세계유산이 된 것은 동아시아의 왕실 제례의식 가운데 5백 년 이상을 이어 내려온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례는 물론 중국서 유래한 것이지만 중국 것은 이미 단절되고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것은 자그마치 5백 년 이상 동안 원형이 손상되지 않고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종묘제례악 연주 모습. 종묘제례악은 종묘제례와 함께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Wikipedia>


이 의례의 특징은 제사임에도 불구하고 음악과 춤이 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유학의 예악사상에 따른 것으로 건물 안에서는 다양한 음식과 술이 왕(그리고 왕후)들의 혼에게 바쳐집니다. 그리고 건물의 바깥에서는 두 대로 나뉜 밴드와 64명의 무용단이 장엄한 음악과 춤을 연출합니다. 이 음악은 세종이 중국의 음악을 참조하여 직접 만든 겁니다. 성균관에서 쓰는 음악도 세종이 만든 건데 그것은 중국 음악에 가까운 반면 종묘 것은 한국적으로 변용된 것입니다. 이 의례는 일 년에 한번밖에 하지 않아 보기 힘들지만 종묘에 가면 항상 동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종묘에 가면 조금 불편한 것이 있습니다. 앞에 공원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소음을 내고 있는 점입니다.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된 귀중한 우리 문화유산인 만큼, 우리 모두가 쾌적한 주변환경 유지에 힘써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글∙사진∙그림  최준식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한국문화와 인간의식 발달에 관심이 많으며 대표저서로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등이 있다.

<출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3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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